[오늘의 운세] 2월 7일 목요일(음력 12월 27일 甲辰)
조선일보
2월 7일 오늘의 역사
1151 (고려 의종 5) 삼국사기 지은 김부식(1075-1151) 세상 떠남
1410 (조선 태종 10) 주자소, 서적 간행 판매
1887 영국 군함 거문도에서 철수
1896 독립운동가 유득신(劉得信) 출생
1898 한국 독립운동가 민필호 출생
1902 덴마크와 수호통상조약
1919 송진우 최린 등 비종교계와 종교계 합동으로 독립운동 불멸계획 추진
1929 한국 동양화가 서세옥 출생
1946 국방경비데 창설, 초대 사령관에 미국의 마셜 취임
1947 북한 조선역사편찬회 설립
1948 미군정 시기 2·7 사건 발생
1951 산청 함양 거창 양민 학살사건
1960 제4대 대통령 선거전 돌입
1964 한국-케냐 국교 수립
1965 한국 -브라질 문화협정 조인
1966 박정희 대통령 동남아순방 등정
1967 통합야당 신민당 창당, 당수에 유진오
1968 경전선(진주-순천 80.5Km) 개통
1972 파월 청룡부대 귀국
1973 한국에 4-H운동 보급한 미군 군정관 앤더슨 사망
1974 입시부정으로 인책된 김주만 전 경북교육감 자살
1977 정부 스페인과 문화협정 체결
1979 화가 이당 김은호 세상 떠남
1980 남북 직통전화 3년만에 재개
1981 서양화가 이종우(李鍾禹) 사망
1984 제14회 동계 올림픽 개막 (2.7~19, 유고 사라예보)
1990 북경아시안 게임 단일팀 구성을 위한 제9차 남북체육회담 열림 북한 측, 3개 원칙 고집하면서 회담 결렬 선언
1991 수서 택지 특혜분양사건 조사
1991 9개 시민단체, <공명선거실천시민운동협의회> 창립
1992 한국-투르크메니스탄, 국교 수립
1995 정명훈, 94년도 프랑스 최고지휘자상인 <고전음악의 승리상> 3개부문 수상
1996 정호용 ,허삼수, 허화평 의원 12.12및 5.18사건으로 구속기소
1996 전경련 기업윤리헌장 제정
1998 일본 나가노에서 제18회 동계올림픽 개막식
1999 한국-이스라엘, 투자보장협정 체결
2001 삼성전자 4기가 디램 첫개발
2001 노무현, 해양수산부 장관 , 언론과의 전쟁을 불사해야 한다고 발언해 파문
2009 김연아 4대륙 선수권 대회 우승
2007 세계태권도연맹 사무총장에 양진석씨
2010 야구선수 임수혁 사망
해외 오늘의 역사
590 63대 로마 교황 펠라지오 2세 사망
1477 영국의 인문주의자 토마스 모어 출생
1478 영국 정치가 인문주의자 토머스 모어 출생,
1799 중국 청나라의 4번째 황제 건륭제 사망
1812 영국 소설가 디킨즈 태어남
1814 미국 마취전문의 콜턴 출생
1870 오스트리아 정신의학자 알프레드 아들러 출생
1885 미국 작가 싱클레어 루이스 출생
1894 벨리에의 악기 제조인 아돌프 삭스 사망
1895 미국의 홈런왕 베이비 루스 태어남
1906 중국 청나라 마지막 황제 부의 출생
1914 챨리 채풀린 등장
1944 미국 사회학자 로버트 파크 사망
1962 미국의 대 쿠바 전면급수 발효
1964 비틀스 미국 상륙 비틀스 열풍 시작
1965 미국 베트남 북폭 개시
1971 스위스 국민투표 ,여성참전권 인정
1973 우리 나라에 4-H운동 보급한 미국인 앤더슨 대령 세상 떠남
1974 미국-파나마, 파나마 운하 반환 원칙 합의
1974 그레나다(Grenada) 독립
1980 미국 대 이란 경제제재를 동결
1981 소련 군용기 추락 장성 등 70여명 사망
1984 MMU 첫 사용
1985 프랑스 공산당, 사회당과 결별 선언
1986 필리핀 17년 만에 대통령 선거
1991 세계교회협의회 제7차 총회 호주 캔버라에서 열림
1991 아일랜드 공화국 소속 테러단이 영국총리 관저를 박격포로 공격
1992 마스트리히트조약 조인
1994 미 역사상 최강의 군사위성 '밀스타' 발사 성공
1997 압달라 부카람 에콰도르 대통령 ,비상사태 선포
1998 제18회 나가노 동계올림픽 개막
1999 후세인 요르단 국왕 사망
2000 타르야 할로넨 핀란드 사상 첫 여성 대통령 에 당선
2007 하버드대 30년만에 교과 대수술
2007 英축구 리버풀, 美에 팔려 인수 총액 4003억원
2009 호주 사상최악의 산불
2010 코스타리카 첫 여성 대통령 탄생
2010년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임수혁 사망
임수혁(1969년 6월 17일 ~ 2010년 2월 7일)은 전 한국 프로 야구 롯데 자이언츠의 선수이다.
고려대학교 재학 시절부터 야구 국가대표팀에 선출될 정도로 뛰어난 기량을 가진 포수였다. 1992년에 신인 드래프트에서 LG 트윈스의 지명을 받았으나, 국군체육부대에 입대했다. 이후 1994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다시 롯데 자이언츠의 2차 1순위 지명을 받아 입단하였다.
2000년 4월 18일에 LG 트윈스와의 잠실 경기 2회초에 유격수 실책으로 출루해서 후속 타자 안타 때 2루로 달리다 2루로 오던 중 갑자기 그라운드에 쓰러졌다. 인근 병원으로 옮겨져 응급 처치를 받았지만 10년째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다. 원인은 심장 부정맥으로 인한 발작이었다.
이후 식물인간이 되었고 투병 10년 여 만인 2010년 2월 7일에 강동 성심병원에서 사망했다.
선수 시절 /위키백과
2007 - 세계태권도연맹 사무총장에 양진석씨
세계태권도연맹(WTF)은 7일 WTF 신임 사무총장에 미국 캘리포니아주 코테 마데라시 시장을 지낸 재미교포 양진석(65)씨를 임명했다. 태권도 공인 7단인 양씨는 경희대 체육학과를 졸업한 뒤 1965년 미국으로 건너가 콜로라도·캘리포니아주에서 태권도장을 운영 하고, 1968년엔 미 공군사관학교 태권도부를 창설하는 등 미국 내 태권도 보급과 시정 활동 등으로 경력을 쌓아 왔다. 1976~86년 국내에서 주한미군 마약담당 군무관으로 근무하기도 했던 양씨는 2003년부터 임기 4년의 코테 마데라시 시의원으로 활동 중이며, 지난 2004~2005년엔 시장을 역임했다. /조선
2001 - 노무현 해양수산부 장관, 언론과의 전쟁을 불사해야 한다고 발언해 파문
참여정부 출범 4년. 대통령과 언론 사이에 난투극이 지난 4년간 계속됐다. 그러나 기득권을 수호하고자 하는 주류언론의 욕망과 언론을 우호적으로 만들고자하는 권력의 욕망은 이 난투극 속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 (진행자 박상범) 시청자 여러분 , 안녕하십니까? 내일은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한 지 꼭 4년이 되는 날입니다. 저희 미디어포커스는 지난 4년간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대통령과 언론의 관계를 되짚어보고 바람직한 언론과 권력의 관계는 무엇인지 살펴보는 시간을 특집으로 마련했습니다. 이 자리에 오세균 기자와 윤 상 기자 나와 있습니다. 윤 기자, 방금 우리가 준비한 화면에서도 봤습니다마는 노 대통령과 언론의 지난 4년간의 관계가 역대 대통령과 언론의 관계에 비추어보더라도 좀 생소한 면이 있어요? 시작할 때부터 그랬지 않습니까?
- (윤상 기자) 흔히 새 대통령이 취임하면 국정 운영의 틀을 다지기까지 비판보도를 자제하는 관행이 있는데 이를 이른바 밀월식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 취임 때는 이런 최소한의 밀월시기가 없었습니다. 참여정부가 출범한 지 만 4년. 보수 일간지들은 요즘 거의 매일 날선 언어로 비판적인 기사를 쏟아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의 실패를 거론하는 보수언론의 평가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이미 4년 전 노무현 대통령 취임 첫날부터 비판은 시작되었습니다.
- (노대통령 취임식 2003.2.25)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
- 취임식 당일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약속이나 한 듯 똑같은 제목의 기사로 노 대통령의 언론관을 문제삼았고 취임 이튿날부터 하루가 멀다하고 정부에 대해 기사와 사설 할 것 없이 공격적이고 비판적인 논조를 드러냈습니다. 새 대통령 취임 초기 한시적이나마 비판기사를 자제한다는 이른바 밀월기간은 단 하루도 없었습니다. 참여정부 출범 이후 2주간의 사설을 분석한 결과 동아일보는 35건 가운데 21건이, 조선일보는 37건 가운데 19건이 비판적인논조를 보였습니다.
- (김창룡 인제대 언론정치학부 교수) 지원하지도 않았던 후보자가 대통령이 됐고 또 그 대통령이 당선되자마자 언론과분명한 대립각을 내세웠기 때문에 이런 밀월관계는 기대해 볼 수 없었고 취임 첫날부터 이런 시장지배적 신문들은 아주 비판과 비난일색의 보도로 시작을 했고 그런 것은 일반 보도뿐만 아니라 사설을 통해서 분석해 보면 노무현 대통령 초기부터 아주 의도적으로 흠집내기에 나섰다는 것으로 볼 수 있죠.
- 하지만 이같은 보수 언론들의 태도는 이전 정권 출범 때 보여준 모습과는 확연히 차이가 납니다. 쿠데타와 광주학살에 이어 체육관 선거로 출범한 5공화국. 12대 전두환 대통령 취임에 즈음해 경쟁하듯이 내놓은 기사와 사설은 찬양과 희망일색으로 채워졌습니다. 노태우 대통령이 취임할 당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전두환 정권 출범에 비해 정도는 덜 했지만 지면에는 축하와 기대의 분위기가 가득찼습니다. 밀월보도의 관행은 김영삼 정권 출범 때도 어김없이 지켜졌습니다. 문민정부에 대한 낙관을 담은 기사들은 김영삼 정권의 개혁 구호에 힘을 실어줬습니다. 새 대통령과 언론의 밀월관계는 김대중 대통령 취임 때도 명맥을 이어갔습니다. 통일이나 대북관이 자신들과는 달랐지만 국민에 의해 선출된 만큼 최소한의 예를 갖추기는 한 것입니다. 그러나 참여정부 출범 때는 이런 최소한의 밀월관행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 (김창룡 인제대 언론정치학부 교수) 정부를 비판하는 건 언론의 책무라고는 하지만 정부와 국민 사이에 이렇게 큰 괴리감이 벌어져버리고 이렇게 되면 어느 정부가 들어서더라도 저는 제대로 국정을 수행해 나갈 수 없다는 것이죠.
- 보수언론들은 자신들이 비판언론이라고 항상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제 보수언론과 새 대통령 사이의 밀월관행은 완전히 끝난 것인지, 앞으로 1년뒤 새 정권 출범 때의 보도태도가 주목됩니다.
- (진행자) 새 대통령을 예우하는 밀월관행이 노 대통령 대에서 없어진 건지 또 다음 대통령 때, 내년 이맘때쯤 살아나는 건지 그것도 관심거리기는 합니다. 오세균 기자, 그런데 노 대통령과 언론의관계가 좀 좋지 않을 것이다, 이런 것은 취임 전부터 예상은 됐었던 일 아닙니까?
- (윤상 기자) 그렇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장관 시절이나 대선 후보 시절부터 일부 언론과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워왔습니다. 참여정부 초기부터 특유 어법을 동원하며 언론에 대한 공세를 펴기 시작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 이후 국정 토론회에서 언론 보도행태를 거칠게 비난했습니다.
- (참여정부 2차 국정토론회 2003.8.1) 부당한 방법으로 짓밟아놓고 항의한다고 또 한 번 더 밟고 맛 좀 볼래 뒷조사하고, 가족 뒷조사하고, 집중적으로 조지고... 이런 횡포가 우리 사회에서 용납돼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정의의 문제입니다.
- 노대통령의 이런 부정적 언론관은 사실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 (노대통령 해양수산부 장관시절 발언 2001.2.7) 이제는 정치권이 언론과 전쟁을 할 때도 됐다. 언론과의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
- (노대통령 해양수산부 장관시절 발언 2001.2.9 오마이뉴스) 언론들이 나에게 이지메를 가하고 있다. 더 이상 굽신거리지 않겠다. 내가 언론과의 전쟁불사라고 말한 진의는 조폭적인 언론의 횡포와 맞서 싸워야 한다는 뜻이었다.
- 노대통령과 보수언론의 악연은 지난 사실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2001년 김대중 정부가 주요 언론사에 대해 전면적인 세무조사에 들어가자 야당과 해당 언론사들은 언론탄압이라며 거세게 반발했습니다. 그러자 노무현 당시 해양수산부 장관은 언론과의 전쟁불사론을 제기하고 나섰습니다.
- 전쟁불사 발언은 큰 파문을 일으켰고 보수언론들은 장관직 사퇴를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당시 노 장관은 조폭적 언론에 맞서야 한다며 맞대응에 나섰습니다.
- 노 대통령과 보수언론의 악연은 지난2002년 12월 19일 대통령 선거 당일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당시 노무현 후보와 단일화에 합의했던 정몽준 씨가 투표를 7시간 앞두고 후보단일화를 철회하자 조선일보는 정몽준, 노무현 버렸다 라는 제목의 사설을 내보냈습니다.
- (조선일보 사설 2002.12.19 ‘정몽준, 노무현 버렸다’) 정씨가 노후보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 것은 결국 이런 근본적 차이를 인식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지금 시점에서 분명한 것은 후보 단일화에 합의했고 유세를 함께 다니면서 노무현 후보의 손을 들어줬던 정몽준씨 마저 ‘노 후보는 곤란하다’고 판단한 상황이다. 이제 최종 선택은 유권자들의 몫이다.
- 노 대통령은 취임 이후 국회에서 가진 첫 국정연설에서 이 사설을 염두에 둔 듯한 대언론 발언을 쏟아냈습니다.
- (노대통령 첫 국정연설 2003.4.2) 그동안 대통령 선거 때마다 되풀이됐던 언론의 편파적인 보도에 대해서는 한마디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군사정권이 끝난 이후에도 몇몇 족벌언론들은 김대중 대통령과 국민의 정부를 끊임없이 박해했습니다. 저 또한 부당한 공격을 끊임없이 받아왔습니다. 그 피해는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고통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 고통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발언은 이제 대통령으로서 적절한 대응수단을 강구하겠다는 의지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취임 초기 언론과의 화해를 권유하는 외부보고서가 전달되기도 했지만 노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 이후 언론유화책을 건의하는 보고서는 더 이상 올라오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KBS-1 미디어 포커스 (2007. 2. 25)
(참여정부 4주년 특집) 언론이 본 대통령, 대통령이 본 언론
2001 - 삼성전자 4기가 디램 첫개발
신문용지 3만2천장을 한개의 칩에 저장할 수 있는 차세대 첨단 디램 기술인 4기가 디램 반도체 제품기술이 삼성전자에 의해 세계최초로 개발됐다.
삼성전자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7일(현지시각) 열린 국제반도체학회(ISSCC)에서 머리카락 굵기의 1천분의 1에 해당하는 0.10미크론(㎛) 초미세 공정기술을 적용한 차세대 4기가 메모리 반도체제품 기술개발 논문을 발표했다고 밝혔다.
이번에 발표된 기술개발 내용은 고집적도 대용량 메모리의 특성을 소화해 낼 수 있도록 하는 미세증폭회로 및 안정화 회로 관련기술과 저전력화와 고속동작을 가능하도록 하는 복합설계 기술 등이다.
4기가 디램반도체는 용량이 총 42억9천만비트로 1개 칩에 영문글자 5억개, 신문지 3만2천장, 단행본 640권, 정지화상 1600장, 64시간의 음성데이터를 저장할 수 있으며 현재 상용화되고 있는 64메가의 60배 정도에 해당한다.
삼성전자는 이번에 개발한 0.10미크론 기술을 기흥공장에서 양산중인 256메가 및 128메가 디램 제품에 적용할 경우 60% 이상의 원가절감 효과가 예상돼 반도체원가 경쟁에서도 확고한 우위를....
Submitted by 김태중 on 금, 2001/02/09 - 10:47am. /KLDP
2009년] 김연아, 4대륙 선수권 대회 우승
'피겨퀸' 김연아(19.고려대 입학예정)가 2009 국제빙상경기연맹(ISU) 4대륙피겨선수권대회 여자 싱글에서 한국 선수로는 사상 첫 금메달의 주인공이 됐다.
김연아는 7일(이하 한국시간) 오후 캐나다 밴쿠버 퍼시픽콜리시움 실내빙상장에서 치러진 대회 여자 싱글 프리스케이팅에서 116.83점을 얻어 쇼트프로그램 점수(72.24점)를 합쳐 총 189.07점으로 우승했다.
이로써 김연아는 자신의 첫 4대륙 대회 데뷔 무대에서 우승과 더불어 쇼트프로그램 역대 최고점 기록(72.24점)까지 세우는 성과를 거뒀다.
김연아에 이어 개최국 캐나다의 조애니 로셰트(23)가 183.91점으로 은메달을 차지했고, 쇼트프로그램에서 6위까지 밀렸던 지난 대회 챔피언 아사다 마오(19.일본)가 프리스케이팅에서 분발하면서 176.52점으로 동메달을 건졌다.
쇼트프로그램 때와 달리 점프 미스와 스핀에서 아쉬움을 남겼고, 기대했던 '꿈의 200점' 돌파는 다음 기회로 미뤄야만 했다.
정열적인 붉은 드레스를 입고 은반 위에 선 김연아는 배경 음악 '세헤라자데'에 맞춰 아라비아 공주로 변신, 첫 과제인 트리플 플립-트리플 토루프 콤비네이션을 깨끗하게 처리했다.
하지만 쇼트프로그램에서 내려졌던 어텐션(!) 마크가 또 한 번 첫 번째 점프에 내려지면서 기본점 9.50점에 가산점이 0.6점에 그쳤다.
판정에 나선 9명의 심판 중에서 6명이나 가산점을 줬고, 감점을 준 심판이 아무도 없었을 정도로 정상적인 점프였지만 테크니컬 패널은 에지에 주의해야 한다는 판단을 내리고 말았다.
김연아는 이어 지금까지 유일한 '아킬레스건'이었던 트리플 루프를 자신 있게 시도했지만 착지 불안으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이내 냉정을 되찾은 김연아는 연이어 트리플 러츠-더블 토루프-더블 루프 콤비네이션 점프를 시도했지만 첫 번째 트리플 러츠와 마지막 더블 루프가 다운그레이드돼 3.22점에 그쳤다. 200점 돌파의 희망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김연아는 플라잉 싯스핀을 레벨 4로 처리하고 더블 악셀-트리플 토루프 콤비네이션 점프와 트리플 러츠에서 가산점을 챙기면서 연기의 절정을 달렸다.
하지만 플라잉 콤비네이션 스핀과 마지막 콤비네이션 스핀이 각각 레벨2와 레벨3에 그치면서 190점대 진입에는 실패했다.
키스앤크라이존에서 점수를 기다린 김연아는 종합 1위를 알리는 장내 방송에 활짝 웃음을 지으며 양손으로 손을 흔들고 갈고 닦은 영어로 인터뷰까지 깔끔하게 마치고 시상대에 올랐다.
김연아는 "트리플 루프에서 실수를 했지만 시도한 사실 자체에 만족한다"라며 "밴쿠버 교민 응원 감사하고 큰 힘을 얻었다"라고 밝혔다.
또 4조에서 가장 먼저 연기를 치른 아사다 마오는 쇼트프로그램에서 보여줬던 점프 난조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프리스케이팅 1위(118.66점)로 6위에서 3위까지 뛰어올라 동메달을 따내는 저력을 발휘했다.
아사다는 애초 첫 번째 연기과제로 해왔던 트리플 악셀-트리플 루프(때로는 더블 루프) 콤비네이션 점프를 한 단계 낮춰 트리플 악셀-더블 토루프 점프로 시도하려고 했지만 첫 번째 트리플 악셀의 타이밍이 맞지 않아 1회전반으로 처리하면서 후속 점프를 하지 못해 0.8점을 얻는 데 그쳤다.
연이은 두 번째 트리플 악셀에서는 가산점을 받으며 깨끗하게 성공했지만 난도가 낮은 트리플 토루프를 또다시 2회전으로 뛰는 실수를 하면서 점수를 깎였다.
하지만 쇼트프로그램에서 부진했던 세 차례 스핀에서는 두 개를 레벨4로 처리하고 스파리얼에서도 레벨 4를 받으면서 118.66점을 얻어 총점 176.52을 얻었다.
쇼트프로그램 2위를 차지해 역전우승을 노렸던 개최국 캐나다의 조애니 로셰트(23)는 스핀 세 개를 모두 레벨4로 처리했으나 점프에서 두 차례 실수하면서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편 한국의 김현정(군포 수리고.121.64점)과 김나영(연수여고.120.28점)은 각각 14위와 16위를 기록했다.
이영호 기자 horn90@yna.co.kr (밴쿠버=연합뉴스) /한겨레 2009-02-07 오후 02:52:41
2000] 타르야 할로넨(Halonen, Tarja, 1943.12.24~ ), 핀란드 사상 첫 여성 대통령에 당선
← Tarja Halonen
핀란드 사상 첫 여성 대통령이 탄생했다. 집권당인 사민당 출신인 현직 외무장관 타르야 할로넨이 그 주인공이다. 할로넨은 2000년 2월 7일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중도당의 에스코 아호 전 총리를 누르고 임기 6년의 대통령직을 수행하게 됐다.
할로넨의 대통령 당선은 1994년 여성 국방장관이 대통령에 도전했다가 실패한 뒤를 이은 도전에서 성공한 것이었다. 할로넨은 "이번 선거결과는 남성이나 여성이나 어느 자리에서도 동등하게 일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 것이며, 여성들의 사기를 높여줄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짧은 머리에 다소 큰 체격의 할로넨은 다정하고 자연스러운 미소로 만나는 사람들에게 쉽게 진지함과 친근함을 느끼게 했다. 정통 사회민주주의자로 동성애자협회 회장을 맡기도 하는 등 사회 소수세력들의 권리를 적극 옹호해 온 할로넨은 1979년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법무-보건-외무장관 등을 역임하면서 현실주의적 시각도 잃지 않고 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개인적인 매력과 함께 핀란드가 여성들의 정치 참여가 매우 활발한 나라라는 점도 그가 대통령으로 당선될 수 있는 배경이었다. 핀란드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여성의 공직 진출권을 인정한 나라로 2000년 당시 여성의원수가 스웨덴, 덴마크에 이어 세계 3위였다. 할로넨은 3월 1일 취임식을 가졌다. /조선
1999년] 후세인 요르단 국왕 사망
← 후세인 [Husayn Ibn Talal, 1935.11.14~1999. 2. 7]
요르단을 46년간 통치해 온 후세인 이븐 탈랄 국왕이 1999년 2월 7일 오전 11시43분 타계했다. 시신은 수도 암만의 하셰미트 묘소에 안장되었으며 요르단 정부는 40일간의 공식 애도기간을 선포했다. 8일 열린 영결식에는 한국의 김종필 총리를 비롯, 클린턴 미국 대통령,옐친 러시아대통령 등이 참석했다.
후세인 국왕은 46년간의 통치기간동안 뛰어난 외교수완으로 `화약고` 중동의 평화를 이끌어 온 거인이었다. 1953년 17세에 왕위에 오른 후세인은 냉전과 40년에 걸친 아랍-이스라엘 분쟁의 틈바구니에서 약소국 요르단의 발전을 일궈냈다. 그의 왕위 등극은 험난한 인생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1951년 조부 압둘라 국왕은 한 회교사원에서 팔레스타인 극단주의자에 의해 암살됐다.
후세인은 몸이 불편한 아버지로부터 1년 만에 왕위를 물려받았다. 최대 시련은 1967년 `6일전쟁`에서 이집트 편에 선 것이었다.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에 참패하는 바람에 요르단강 서안과 동예루살렘을 잃게 된다. `평화의 중재자`로서 후세인의 면모는 1998년의 중동평화협상에서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후세인에게 긴급 지원을 요청했다. 후세인은 아픈 몸을 이끌고 중재에 나서 와이리버 협정을 성사시켰다. /조선
후세인 요르단 국왕의 사망소식을 접한 두 요르단 국민이 후세인 메디컬 센터 밖에서 오열하고 있다. /조선
후세인 [Husayn Ibn Talal, 1935.11.14~1999.2.7]
중동지역의 평화 전도사로 불린 후세인 요르단 국왕이 1999년 오늘 63살을 일기로 숨을 거뒀다.
후세인 국왕의 장례식은 국민들의 애도 속에 성대하게 치러졌다.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옐친 러시아 대통령,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 등 세계 40여 개 나라 정상들이 찾아와 조문했다.
후세인 국왕은 1998년 병중에서도 교착상태에 빠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협상을 중재해 '와이리버'협정을 성사시키기도 했다. /YTN
1998년] 일본 나가노에서 제18회 동계올림픽 개막식
← 전이경 선수
제18회 동계 올림픽 경기대회(The 18th Olympic Winter Games)는 1998년 2월 7일부터 22일까지 일본의 나가노[長野]에서 열렸으며, 경기는 7개 종목, 68개 세부종목이 실시되었다. 20세기의 마지막 동계 올림픽이자 제11회 삿포로[札幌] 대회 이후 26년만에 일본에서 다시 개최되었으며, 72개국의 임원·선수 3,500여 명이 참가했다. 날씨가 나빠 경기가 여러 차례 연기되고 약물복용 파동, 지진 등 악재가 겹치기도 했으나 첨단 하이테크 기술과 환경보존이라는 2가지 개념이 조화를 잘 이룬 대회로 평가되는데, 일본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대회준비를 위해 시설에 100억 달러, 경기운영에 10억 달러를 투자했다.
경기에서는 독일이 스키 알펜종목과 스피드 스케이팅에서 우세를 나타냈으며, 개최국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권 국가의 도약이 두드러졌다. 동계올림픽 출전 50년간 금메달 3개에 불과한 일본은 홈의 이점을 안고 금메달 5개, 은메달 1개, 동메달 4개로 7위로 뛰어올랐다. 네덜란드의 G.롬메 선수는 스피드 스케이팅 남자5,000·1만m에서 세계신기록을 작성하며 최고스타로 떠올랐고, 아이스하키에서는 체코가 러시아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스키 알펜종목에서 오스트리아의 H.마이어 선수는 활강에서 넘어지는 바람에 3관왕은 놓쳤지만 슈퍼대회전·복합에서 우승하여 ‘스키 황제’가 되었고, ‘동계올림픽의 꽃’ 피겨 스케이팅 여자 싱글에서는 16세의 미국선수 T.리핀스키가 라이벌인 M.콴(미국)을 누르고 우승했다.
한국에서는 빙상·스키·바이애슬론·루지 4개 종목에 올림픽 출전 최대인 63명의 선수단을 파견했는데, 쇼트트랙에서만 금메달 3개, 은메달 1개, 동메달 2개를 획득하여 종합성적 세계9위로 3회 연속 세계10위권에 진입했으며, 그 이외의 종목에서는 부진을 면치 못했다. 쇼트트랙에서는 총 6개의 금메달 가운데 3개를 획득했고, 역대 대회를 통틀어서도 총 16개 가운데 9개를 차지하여 세계최강임을 재확인했다. 전이경 선수는 쇼트트랙 여자1,000m·3,000m 계주 우승으로 2관왕에 오르면서, 동계·하계올림픽을 통틀어 한국선수로는 최초로 올림픽 4관왕에 오르는 신기원을 세웠다. 또 김동성 선수는 쇼트트랙 남자1,000m에서 금메달을 획득했으며, 채지훈·이준환·이호응·김동성 팀은 5,000m계주에서 캐나다(7분 06초 07)에 0.7초 차로 뒤져 아깝게 2위를 차지했다.
독일은 지난 대회 소련에 당했던 패배를 설욕하며 금메달 12개로 다시 대회 우승을 차지했고, 노르웨이(금메달 10개)·러시아(9개)가 그 뒤를 이었다. 북한은 제16회 알베르빌대회에 이어 6년만에 스피드 스케이팅과 쇼트트랙 2종목에 출전했지만 메달 획득에 실패했다./naver
1992 한국-투르크메니스탄, 국교 수립
투르크메니스탄은 한국과 1992년 2월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하여 주 러시아 대사가 직을 겸임하고 있다. 2007년 6월 8일 주투르크메니스탄 상주대사관 (대사대리 상주)이 개설되고 1993년 이후 경제협력 등 양국간 협력이 증진되고 있다. 2006년 10월 한-중앙아 문화교류협회 공연단이 독립 15주년 행사에 참가하여 민간 교류가 활성화되었으며 2007년 문화, 경제사절단이 상호 방문하였다. 2006년 대한 수출은 179만 달러, 대한 수입은 597만 달러이다. 수출품은 시멘트·자동차·합성섬유사가 주종을 이룬다. 1995년~1997년간 7만 달러 정도의 우리나라의 물자지원, 1997년~2006년간 총14명의 연수생 초청이 이루어졌다. 재(在)투르크메니스탄 거주 고려인이 약 1,000명으로 추산되고 있어 중앙아시아 다른 국가와 마찬가지로 고려인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
1992년] 마스트리히트조약 조인
유럽공동체(EC) 12개 회원국이 1992년 2월 7일 네덜란드 마스트리히트에서 1991년 12월 EC 정상들이 합의한 EC 단일시장 및 단일통화-정치통합 실행을 골자로 한 유럽통화조약을 정식 조인했다.
마스트리히트 시청에서 거행된 이날 조인식에는 자크 들로르 EC위원장과 에곤 클렙시 유럽의회 의장을 비롯, 1992년 의장국인 포르투갈의 아니발 카바코 실바 총리, 1991년 하반기 의장국 네덜란드의 루트 루베르스 총리, 차기 의장국 룩셈부르크의 자크 상테르 총리와 각국 외무·재무장관들이 참석했다.
3백13페이지에 이르는 본문과 부속문서로 돼 있는 EC 통합조약은 늦어도 1999년까지의 역내 단일통화 도입을 규정하고 있으며 유럽의회의 권한증대, 외교안보 분야에서 회원국간 결속 강화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각국의 이견과 덴마크의 비준거부 등으로 비록 당초목표인 1993년 1월보다 10개월 늦은 1993년 11월 조약이 발효됐으나 EC 12개 회원국 3억4천6백만 유럽인들의 정치-경제적 운명은 이제 역사상 그 어느때 보다도 긴밀히 묶어지게 됐다.
발효와 함께 EC는 유럽연합(EU)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마스트리히트 조약은 1999년까지 EU 회원국이 단일통화를 채택하고 정치적인 권한의 상당부분을 통합기구에 위임한다는 계획을 담고 있어 각국의 반대가 심했으나 우여곡절 끝에 1993년 10월 독일이 마지막으로 비준해 실효를 보게됐다. /조선
1986년] 필리핀 17년 만에 대통령선거
필리핀의 미래를 결정할 대통령선거가 1986년 2월 7일 실시됐다. 마르코스(Marcos, Ferdinand)로서는 대규모 반정부운동과 공산게릴라의 준동, 미국무성의 압력 등으로 마지못해 실시한 선거였다. 투표부터 개표에 이르기까지 전과정은 부정선거로 얼룩졌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와 민간 선거감시기구와의 개표결과는 큰 차이가 있었고 예상대로 마르코스는 재선됐다.
그러나 아키노(Aquino, Corazon, 1933~ )는 이것을 인정하지 않았고 양측의 대립이 심각해져 시민들의 대규모 시위가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22일에 이르러 사태가 급반전됐다. 마르코스의 측근이었던 엔리레 국방장관과 라모스 참모총장대행이 마르코스에 반기를 들었고 가톨릭의 신추기경도 반정부입장을 표명했다. 24일 마르코스는 필리핀 전역에 비상사태를 선언했지만 아키노를 지지하는 흐름은 막을수 없었다. /조선
1984년] 제14회 동계 올림픽 개막 (2.7~19, 유고 사라예보)
제14회 동계 올림픽경기대회(The 14th Olympic Winter Games)는 동구권에서는 처음으로 개최된 대회로, 제1차 세계대전의 근원지인 유고슬라비아의 사라예보(Sarajevo)에서 동계 올림픽 사상 최대인 49개국의 선수·임원 1,5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1984년 2월 7일부터 19일까지 13일에 걸쳐 열렸다. 경기는 10개 종목, 39개 세부종목이 실시되었다. 비동맹국에서 열린 대회답게 한국과 북한, 중국과 타이완이 함께 출전했으며, 동독이 소련과 북유럽 3국을 누르고 처음으로 세계정상에 섰다.
오랫동안 눈이 오지 않아 우려했지만 대회 2일 전 폭설이 내려 경기가 무난하게 진행되었다. 핀란드의 M.헤멜라이넨 선수는 5·10·20km 크로스컨트리에서 우승하여 여자 스키에서 첫 3관왕이 되었다. 한국에서는 남녀 선수 15명이 스키, 스피드 스케이팅, 피겨 스케이팅 외에 처음으로 바이애슬론에 출전했으나 입상권에는 들지 못했으며, 다만 동유럽 공산권과의 경기를 통하여 스포츠 외교면에서 성과를 얻은 데 만족해야 했다. 대회 우승은 금메달 9개의 동독이 차지했고, 소련(금메달 6개)·미국(4개)·핀란드(4개)·스웨덴(4개)이 그 뒤를 이었다. /naver
1984 MMU 첫 사용
MMU는 등에 짊어지는 큰 가방처럼 생긴 장치로 우주 공간을 이동할 때
사용한다. 1984. 2. 7 미국의 우주비행사 매캔들리스는 우주 왕복선 챌린저
호를 떠나 MMU를 사용하여 처음으로 우주에서 헤엄을 쳤다. 생명줄도 없이
우주 공간에 떠 있는 사람, 바로 인간 인공 위성이 된 셈이다.
1981년] 서양화가 이종우(李鍾禹) 사망
1899.12.22 ~ 1981.2.7
호 설초(雪蕉). 황해도 봉산(鳳山) 출생. 평양고보를 졸업 후 17년 도일, 1923년 도쿄[東京]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중앙고보(中央高普)에서 교편을 잡았다. 1924년 제3회 조선미술전람회(약칭 鮮展)에 《자화상》과 《추억》을 출품하면서 화단에 데뷰하였다. 1925년 한국인으로서는 처음 파리에 유학하여 슈하이에프연구소에서 수학, 1927년 살롱 도톤전에 《모부인(某婦人)의 초상》 《인형이 있는 정물》 등을 출품하고, 1928년 귀국하여 제l회 개인전을 가졌다. 그 후 한동안 활발한 작품활동을 하는 한편 경신학교(儆新學校), 평양의 삭성회(朔星會)회화연구소, 다시 중앙고보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1933년 서화협회 간사가 되었으며, 1934년 선전(鮮展)에서는 《추억》으로 3등상을 받았다. 1945년 조선미술협회 회장, 1951년부터는 홍익대학 교수 등을 역임하고, 1960년 예술원 회원이 되었으며 문화훈장 대통령장, 예술원 공로상을 받았다. 작품경향은 초기의 고전적 사실화풍과 후기의 정감적이고 자연관조적인 동양적 취향으로 대별된다. /naver
1979년] 근현대 동양화단 채색화의 대가 김은호(金殷鎬) 사망
1892년 6월 24일 ~ 1979년 2월 7일
인천 출신이며 아호는 이당(以堂)이다.
인천관립일어학교를 졸업한 뒤 인흥학교에서 측량을 공부했다. 측량기사의 조수로 일하고 고서를 베끼는 일을 하다가 이왕직에서 운영하는 미술학교인 서화미술회에 편입하여 화가가되었다. 서화미술회 편입에는 사학자이며 서예가인 현채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김교성의 도움이 있었다. 뛰어난 인물 묘사 실력으로 송병준, 대한제국 순종 등의 얼굴을 그리면서 점차 이름을 얻게 되었다. 1919년 3·1 운동에 참가했다가 체포된 적도 있으나, 1920년대 후반 일본에 유학하여 일본식 채색화 기법을 익히면서 친일본적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즐겨 그린 그림은 〈승무도〉 연작으로 대표되는 미인도와 신선도, 화조도 등이다.
중일전쟁 발발 직후인 1937년에 애국금차회의 활동 모습을 담은 〈금차봉납도〉를 제작하여 조선총독부 총독 미나미 지로에게 증정하는 등 태평양전쟁 기간 중 미술계에서 적극적인 친일파로 활동했다. 조선미술가협회의 일본화부에 참가하여 전쟁 지원을 위한 친일 미술 작품을 심사하거나 전시하는데에도 여러 차례 참여했다.
광복 후에는 뚜렷한 친일 경력 때문에 대부분의 미술인들이 망라된 조선미술건설본부에서 제외되었으나, 이후 다시 미술계의 중심에 복귀했다. 김은호는 일찍부터 후진 양성에 관심을 보이고 후소회를 통해 제자를 많이 배출하여 동양화단에서 단단한 인맥을 갖고 있었다. 운보 김기창이 대표적인 김은호의 제자이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을 지냈고 문화훈장을 수여 받았으며 , 3·1 문화상(1965)과 예술원상(1968)도 수상했다.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1차 명단 미술 부문에 선정되었다. 문화예술계 인사를 많이 선정하지 않은 2002년 발표 친일파 708인 명단에도 미술 분야에 심형구와 함께 포함되어 있다. 두드러진 친일 이력과 일본풍으로 의심받는 화풍과 관련하여, 김은호가 그린 논개와 춘향의 영정을 철거하자는 주장과 논란이 있었다. /위키백과
1974 - 그레나다, 영국으로부터 독립
그레나다 독립에 관한 관련기사. /조선
그레나다, 영국으로부터 독립
중남미 카리브해상의 작은 섬 그레나다가 1974년 2월 6일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1498년 콜럼버스가 처음 발견한 그레나다는 1655년 프랑스 식민지였다가 1783년 영국령으로 편입됐다. 1958년 서인도제도 연방에 가입하였으나 1962년 연방의 해체로 다시 영국령 윈드워드 제도에 편입됐다. 1967년 자치정부가 수립돼 마침내 이날 영국연방의 일원으로 독립하게 됐다.
독립헌법에는 영국 국왕이 임명하는 그레나다의 총독과 양원제 국회에 관한 조항이 마련됐다. 1983년 친소련파에 의한 군사쿠데타가 일어났으나 미국은 그레나다에 건설중인 비행장이 소련의 기지로 이용될 것을 우려해 카리브 해안 6개국과 연합하여 그레나다를 무력 침공, 정권을 무너뜨리고 신국민당의 블레이즈가 이끄는 친미 정권을 탄생시킨 후 1985년 철수했다. /조선 (2월 6일)
그레나다 독립
1974년 2월 7일 그레나다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에 의해 처음 발견된 그레나다는 베네수엘라에서 북쪽으로 약 160km 떨어진 카리브 해 동부에 자리잡은 서인도제도 최남단 섬이다. 아라와크족이 원주민으로 거주하던 그레나다를 가장 먼저 지배한 것은 1498년 남아메리카에서 이주해온 카리브 인디언들이었다. 1650년에는 프랑스 총독 마르티니크가 프랑스 회사로부터 이 섬을 사들여 세인트조지에 주거지를 세웠다. 1672~1762년은 프랑스 국왕의 지배를, 이후 18세기 후반과 19세기 동안에는 영국의 통치를 받았다. 1885∼1958년은 영국령 윈드워드 제도 정부의 본거지였다가 1958∼62년에 서인도제도 연방의 일원이 되었다. 1967년 영국과 연합하여 자치주가 되었고, 1974년 2월 7일에는 독립주가 되었다. 독립헌법에는 영국 국왕이 임명하는 그레나다의 총독과 양원제 국회에 관한 조항이 마련되었다. 1984년 12월 총선거를 통해 민주자치정부가 수립되었다. /브리태니커
1973년] 한국에 4-H운동 보급한 미군 군정관 앤더슨 사망
앤더슨 [Anderson, Charles A., ?~1973.2.7]
한국에 4H 운동이 처음 소개된 것도 미군정 때였다. 1947년 경기도 군정관이던 찰스 앤더슨(Charles A. Anderson) 중령은 구자옥(具滋玉) 경기도지사와 함께 4H 운동을 경기도에 도입하기로 하고 각 시군에 농촌청년구락부를 결성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첫 싹을 틔운 4H 운동은 1952년 정부가 국책사업으로 채택함으로써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전쟁으로 황폐해진 산업을 일으키기 위해 1953년 발족한 한미재단에 예비역 대령이 된 앤더슨 씨가 고문으로 부임(1954년)하면서 4H 운동은 날개를 달게 됐다.
1954년 민간후원단체인 한국4H구락부중앙위원회가 결성됐고 제1회 4H중앙경진대회가 서울에서 열렸다. 정부의 정책적 후원을 바탕으로 4H 운동은 전후 복구와 농촌 재건 운동으로 자리 잡았다.
앤더슨 씨는 1973년 2월 7일 숨을 거두었으나 4H 운동은 새마을운동과 결합해 농어촌 환경 개선과 생산기반 시설 정비, 자급기반 확충 등에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면서 그의 뜻을 이어갔다. 당시 농어촌에는 네잎 클로버 문양과 함께 4H 표어를 안방에 걸어놓지 않은 집이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후 4H 운동은 급격한 공업화와 도시화, 농어촌 인구의 감소 등으로 위축돼 지금은 새로운 활로를 모색해야 하는 상황을 맞고 있다.
윤종구 기자
jkmas@donga.com (책갈피 속의 오늘) /동아일보 2006년 2월 7일
1974년] 그레나다(Grenada) 독립
← 그레나다 국기
1974년 2월 7일 그레나다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에 의해 처음 발견된 그레나다는 베네수엘라에서 북쪽으로 약 160km 떨어진 카리브 해 동부에 자리잡은 서인도 제도 최남단 섬이다. 아라와크족이 원주민으로 거주하던 그레나다를 가장 먼저 지배한 것은 1498년 남아메리카에서 이주해온 카리브 인디언들이었다. 1650년에는 프랑스 총독 마르티니크가 프랑스 회사로부터 이 섬을 사들여 세인트조지에 주거지를 세웠다. 1672~1762년은 프랑스 국왕의 지배를, 이후 18세기 후반과 19세기 동안에는 영국의 통치를 받았다. 1885∼1958년은 영국령 윈드워드 제도 정부의 본거지였다가 1958∼62년에 서인도제도 연방의 일원이 되었다. 1967년 영국과 연합하여 자치주가 되었고, 1974년 2월 7일에는 독립주가 되었다. 독립헌법에는 영국 국왕이 임명하는 그레나다의 총독과 양원제 국회에 관한 조항이 마련되었다. 1984년 12월 총선거를 통해 민주자치정부가 수립되었다./브리태니커
1972 파월 청룡부대 지휘본부와 주력부대, 부산항으로 귀환,
*[국군의 베트남 전쟁 개입] -한국정부는 1964년 9월, 이동외과병원(移動外科病院) 장병 130명과 태권도 교관단 10명을 처음으로 베트남에 파견하였다.
이어 1965년 1월 8일에는 각의(閣議) 결정에 의해 베트남에 비전투원 2,000명으로 구성된 군사원조단을 파견하겠다고 발표하였다. 이 파견결정은 베트남 정부와 베트남전쟁에 개입하고 있던 미국 정부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이 군사원조단은 전재복구를 위한 공병부대와 자체 경비병력으로 이루어졌으며, 부대 명칭은 "비둘기부대"였다.
비둘기부대는 그 해 1월 26일 국회에서 파병 동의안이 가결되고 2월 5일에 결단, 2월 25일에는 제1진이 사이공(지금의 호치민)에 도착하였다. 비둘기부대의 파견에 이어 베트남 정부는 다시 전투부대의 파병을 요청해 왔다.
이에 한국 정부는 1965년 7월 2일 "6·25전쟁 당시의 우방의 파병에 보답한다"는 명분으로 파병을 결정하고 육군 2개 연대 규모의 ★ "청룡부대"를 각각 편성하였다. 청룡부대는 그 해 10월 9일 베트남에 도착하여 나트랑에 주둔하였다.
그리고 "맹호부대"는 10월 22일 서울에서 환송식을 갖고 11월 20일 퀴논에 도착하여 여기에 주월한국군 사령부가 설치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한국군 전투부대가 대거 베트남에 파견되고 또 그 활약상이 내외에 알려져 국위를 높이 선양하게 되자, 점차 한국군 증파의 필요성이 인정되었으며 1966년 2월 22일에는 험프리 미국 부통령의 방한을 계기로 다시 한국군 1개 연대와 1개 사단, 그리고 이를 지원하는 지원부대의 증파를 요청받게 되었다.
이에 국회 본회의는 여야 간의 많은 논란 끝에 3월 20일 증파동의안을 가결하였다.
같은 해 4월 16일 먼저 "혜산진부대(惠山鎭部隊)"가 퀴논에 상륙하여 맹호부대와 합류, 1개 전투사단을 편성하였으며, "백마부대"는 그 해 8월 15일 제1진이 나트랑에 상륙함으로써 주베트남 국군의 수효는 군단급 규모로 증가되었고, 미국 다음 가는 규모의 파병국이 되었다. (출처: 두산백과)
을지 청룡부대 용사들...
최전방 철책선에서 나라를 지키는 모습... 자랑스럽습니다.
항상 안전하고 건강하기 바랍니다. (충성)
용사의 다짐
남아의 끓는 피 조국에 바쳐
충성을 다하리라 다짐했노라
눈보라 몰아치는 참호 속에서
한 목숨 바칠 것을 다짐했노라
전우여 이제는 승리만이
우리의 사명이요 갈 길이다
우렁찬 기상나팔 울릴 때마다
줄기차게 샘솟는 새로운 용기
벅차고 고될 수록 즐거운 나날
부모형제 지키는 보람에 산다
전우여 이제는 승리만이
우리의 사명이요 갈길이다
1968 - 박대통령, 경전선 개통식에서 250만 향군무장 천명
향토예비군 연혁
1961.12.27 - 향토예비군설치법 제정 공포(총 6개 조항)
1968.02.07 - 박대통령, 경전선 개통식에서 250만 향군무장 천명
1968.02.20 - 각의에서 향토예비군설치법 시행령 의결
1968.03.31 - 예비군편성 및 조직완료
1968.04.01 - 대전공설운동장에서 박대통령 임석하에 (향토예비군) 창설식
1968.04.05 - 전국지역 및 직장예비군에게 무기지급
1968.05.29 - 향토예비군설치법 개정 공포(전면기정:총 6개 조항16개 조항)
1968.06.24 - 공비 소탕작전에 최초로 참가(강원도 고성군 현내작전)
1968.07.24 - 국방부 인력차관보 산하에 예비군국 창설(예비군계획과, 동원관리과)
1968.11.02 - 울진, 삼척지역 공비소탕작전 참가
1968.12,28 - 예비군편성 및 조직완료
1969.03.01~03.31 - 전시동원체제와 향토예비군체제에 부함된 갑호부대(현 동원예비군)와 일반예비군
부대(현 향방예비군)로 구분 편성
1970.08.30 - 향토예비군설치법 개정
1975.09.01 - 전투 및 전력화 예비군 편성
향토예비군-연혁 yebigun1.mil.kr/homepage /Google
경전선 개통(진주-순천 80.5km)
1968년 오늘, 진주-순천 80km 구간 철도가 착공 44개월 만에 완공됐다.
하동역 광장에서 열린 기념식에 진주와 순천에서 각각 천여 명의 주민대표들을 태운 열차가 도착해 영・호남의 우의를 다졌다.
진주-순천 간 철도 공사는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일환으로 이뤄졌다.
경전선의 역사는 1905년 5월 삼랑진과 마산을 잇는 '마산선' 개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어서 1923년 12월 마산∼진주간이, 1922년 7월 송정∼순천 구간이 개통됐다.
이후 46년이 흐른 1968년 진주-순천 구간이 이어지면서 경부선 밀양 삼랑진과 호남선의 광주 송정을 잇는 경전선 전체 315km가 완성됐다. /YTN
1967년] 신민당 창당
← 김대중
1967년 2월 7일 전통야당의 맥을 이어받은 신민당이 창당되었다. 야당계열인 민중당과 신한당의 합당 형태로 창당된 신민당은 인권존중, 반독재민주주의 국가 완성, 민생안정, 사회악 일소, 민주적 평화통일 등을 강령으로 내세웠다. 1970년 9월 29일 임시전당대회에서 김대중이 대통령후보로 지명되어 선거 돌풍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그뒤 유진산계와 반유진산계로 양분됨에 따라 법정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1972년 유신헌법으로 국회가 해산하고 정당활동이 중지된 뒤, 반유진산계의 일부 의원들이 민주통일당을 창당했다. 1974년 김영삼이 총재가 되면서 대여 강경노선을 전개했으나 1976년 이철승이 당권을 장악한 뒤부터는 대여 온건노선인 중도통합론을 지향했다. 김영삼이 총재가 된 1979년 이후 신민당은 김대중의 동교동계와 김영삼의 상도동계로 분열되다가 1980년 10월 27일 제5공화국 헌법 공포와 함께 해산되었다./브리태니커
통합야당 신민당 창당, 당수에 유진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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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당의 대통령후보로 지명된 윤보선(오른쪽)씨와 당수로 선출된 유진오씨가 당원들의 환호속에 악수하고 있다. |
한국 현대사에서 `야당의 대명사`였던 신민당이 1967년 2월 7일 창당했다. 창당과 함께 당
수에는 유진오씨가, 대통령후보에는 윤보선씨가 선출됐다. 민중당과 신한당의 합당 형태로
창당된 신민당은 이후 자유당과 한국독립당을 흡수해 명실공히 한국의 대표적인 야당으로
서 반독재 민주주의의 선봉에 나섰다.
1970년에는 40대 기수론의 한 사람이었던 김대중씨가 대통령후보로 선출돼 선거돌풍을 일
으키기도 했으나 그 뒤 유진산계와 반유진산계로 양분돼 분열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1974년 김영삼씨가 총재로 선출되면서 대여 강경노선을 펼치던 신민당은 1976년 중도통합
론을 주창한 이철승씨가 당권을 잡으면서 대여 온건노선으로 전환했다. 다시 1979년 5월
김영삼씨가 총재로 선출되자 신민당은 선명 야당을 기치로 내걸고 강경노선으로 선회했다
1979년 10월 신민당사에서 YH무역 여공들의 회사폐업반대 농성은 유신체제를 와해시키는
도화선이 됐다. 10.26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고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 세력이 전면
에 등장한 1980년, 제5공화국 헌법 공포와 함께 해산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1966년] 박정희대통령 동남아순방 등정
박정희 대통령이 1966년 2월 7일부터 18일까지 12일간 말레이시아를 비롯, 태국과 자유중국 등 동남아 3개국을 공식 순방하고 상대국간의 우의증진과 경제협력문제 등을 논의했다. 박 대통령은 2월 9일 첫 순방국인 말레이시아의 국회의사당 귀빈실에서 라만 수상과 공식회담을 하고 월남사태와 관련된 자유 아시아의 공동방위문제와 양국의 경제협력문제 등에 관해 의견을 교환했다.
이어 박대통령은 4일간의 태국방문 중 타놈수상과 한 정상회담에서 태국은 통한에 대한 한국정부정책을 지지했다. 또 월남을 지지할 필요성을 재확인하고 문화교류에 관해서도 협의했다. 박 대통령은 마지막 순방국인 자유중국에서 장개석총통을 만나 자유아시아의 안전과 번영을 위해 긴밀한 협조를 통해 유대강화에 최선의 길을 모색할 것에 합의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조선
1965 - 미국, 베트남 `북폭` 개시
베트남 역사
1960.12. 민족해방전선(NLF, 속칭 베트콩) 결성
1962.01. 미국, 사이공에 “남베트남 사원조사령부" 를 설치
1963.11. 쿠테타로 남베트남 응오딩지엠 정권 붕괴
1964.08. 통킹만사건 발생, 미군기 북베트남 어뢰정 기지 공습
1965.02. 미국군 북폭개시, 미국의 전쟁개입(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
1968.01.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일제 공세 (구정대공세)
1968.05. 미국, 북베트남, 파리에서 평화회담 시작
1969.01.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사이공정권을 포함한 파리회담 시작
1969.06. 남베트남해방전선을 주체로한 “남베트남 임시혁명정부"성립
1969.09. 호치밍 주석 서거
1973.01. 미국, 북베트남, 남베트남, 남베트남임시 혁명정부, 파리에서 평화 협정에 조인
우리와 닮은 베트남 역사
베트남과 우리의 역사는 놀라우리만큼 닮아있다.
중국과 프랑스 등 열강에 의해 식민지 지배를 받고 또 만주사변으로 시작된 일본의 침략으로 실질적인 지배를 받던 베트남은 1945년 일본의 2차 세계대전 패망으로 독립이 되었고 이후 남과 북으로 분할되었다가 미국과 전쟁을 치른다.
베트남은 중국 한나라 등에 의해 식민지 지배를 당하면서(BC 111~AD 938) 중국으로부터 교육제도, 한자 및 서적, 행정제도, 제방축조술, 토지개발법 등을 도입했고 유교, 도교, 불교 등의 종교를 수용했다.
중국의 남하군을 박당강 전투에서 물리치고 독립을 쟁취한 응오왕조를 시작으로 마지막 응우엔 왕조까지 베트남은 전통왕조시대(939~1858)를 거치다가 프랑스령 식민시대(1859~1954)를 맞게 된다.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베트남까지 침략한 일본군은 1940년 베트남에 진주했다. 1945년 3월 일본군은 프랑스 식민당국을 추출하고 베트남을 직접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45년 8월 2차세계대전에서 패망한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고 같은해 9월 2일에 호치민은 베트남 민주공화국이 독립했음을 선언한다.
그러나 1945년 9월 연합군이 베트남에 진주했다.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위해 북위 16도선 이북의 베트남 땅에는 20만의 장개석군이, 이남에는 영국군이 각각 진주했으며 1946년 1월에는 영국군은 프랑스 군에게 북위 16도선 이남의 베트남 땅에 대한 전권을 이양했다.
1946년 2월에는 프랑스-중국협정에 의거해 프랑스군은 북위 16도선 이북의 베트남에 대한 관리권을 획득했으나 같은 해 12월, 베트민군이 하노이에서 일제히 봉기해 제 1차 인도차이나 전쟁(대불전쟁)이 발발했다. 1950년 1월에는 중국과 소련이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승인하고 2월에는 미국과 영국이 베트남국(바오다이 정권)을 승인했다.
1954년 5월에는 디엔비엔푸가 함락, 프랑스에게서 완전 해방되고 1954년 월 북위 17도선을 잠정 군사분계선으로 해 베트남을 남과 북으로 분할하는 제네바협정이 조인되었다.
이후 1955년 남부에는 응오 딘 지엠을 초대대통령으로 한 미국이 지원하는 베트남이 성립되었고 1956년 5월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에 통일선거 실시를 위해 협의할 것을 제의했으나 남베트남을 이를 거부했다.
1960년 1월 북베트남은 신헌법을 공포하고 12월에는 민족해방전선(NLF, 속칭 베트콩)이 결성되었고 1963년에는 미국의 묵인아래 진행된 쿠데타에 의해 남베트남 응오 딘 지엠 정권이 붕괴했다. 쿠데타로 부패하고 타락한 정권은 붕괴됐으나 이후 남베트남 정권은 쿠데타를 일으킨 장군들이 서로 정권을 잡으려 싸워 새로 제정되는 법안이 며칠 만에 파기되기도 하는 등 혼란에 혼란이 거듭된다.
이런 상황에서 1964년 8월에는 미군기가 북베트남 어뢰정 기지를 공습하는 통킹만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미국은 북베트남에서 도발했다고 발표를 했으나 이는 1990년대 이후 닉슨 대통령이 폭격받았다고 주장한 것이 명분을 만들어 의회의 승인을 받고 여론 형성을 시켜 전쟁을 일으키기 위한 자작극이라고 밝혀지기도 했다.
1965년 2월 미군이 북폭을 개시하면서 전쟁에 개입하여 제 2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시작됐다. 미국은 최신식 무기로 정면대결을 펼치면 절대 지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단시간에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그러나 철저히 베트남 민중들의 도움을 받았던 민족해방전선의 군인들은 지형 등을 이용한 게릴라전으로 최신식무기의 기를 떨어트리고 1968년 1월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이 미국의 허를 찌르며 베트남 최대 명절인 음력설에 일제히 공세를 시작, 승기를 잡는다.
이를 계기로 1968년 5월 미국과 북베트남이 파리에서 평화회담을 시작하고 1969년 1월에는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이 주체가 된 ‘남베트남 임시혁명정부’가 수립되었으며 1973년 1월 미국, 북베트남, 남베트남, 남베트남 임시혁명부가 파리에서 평화협정에 조인했다.
그러나 1975년 4월 30일 북베트남군에 의해 사이공이 함락되면서 마침내 베트남은 통일되었고 1976년 4월 26일 남북통일 총선거를 실시하고 7월 2일 베트남 사회주의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참고자료-베트남, 베트남 10000일간의 전쟁, 호치민 평전 등)
우리와 닮은 역사 가진 베트남
<김양희 기자의 베트남 일기2>
김양희 객원기자 yang275@hotmail.com /통일뉴스 2007년 09월 08일 (토) 13:46:53
1964년] 비틀즈 미국 상륙. 비틀즈 열풍 시작
← 비틀즈의 첫 미국 발매 앨범 'Introducing The Beatles (US)'
1964년 2월 7일 낮 1시 30분, 미국 케네디 공항에서 영국의 4인조 그룹 비틀즈가 모습을 드러냈다. 20세기 청춘문화의 상징이 된 비틀스가 미국 정벌에 나선 것이다. 공항에는 비틀즈를 보기위해 3,000여 명의 소녀들이 몰렸으며 9일 밤 비틀즈가 출연한 TV 프로그램 '에드 설리번쇼'는 7,300만 명의 미국인이 시청할 정도로 대성황을 이뤘다.
포크송과 트위스트에 식상해 하고 케네디 암살 후 새로운 영웅을 원하던 미국은 비틀즈에 열광했다. 영국 가수는 미국에서 성공 할 수 없다는 징크스를 깨며 2월 첫 주에 전미 히트 차트 1위에 오른 비틀즈는 4월 4일의 빌보드 차트 랭킹에서는 1위부터 5위까지 모두 차지할 정도로 인기를 누렸다. 미국에 상륙한 1964년에만 18주동안 전미 차트 1위를 독점한 비틀즈는 미국 싱글 레코드 판매의 60%를 차지하고 자신들의 헤어스타일, 인형, 기타 등을 유행시켰다.
비틀즈는 1956년 고등학생인 존 레넌이 '퀴리멘'이라는 록그룹을 조직하면서 시작됐다. 존 레넌은 곧 폴 매카트니(1957년), 조지 해리슨(1958년)을 합류시켜 영국 리버풀과 독일 함부르크를 오가며 명성을 쌓았고, 마지막으로 링고 스타가 합류해 멤버가 갖춰졌다. 19~22살의 더벅머리 4인조는 1962년 EMI사와 계약을 맺고 비틀스라는 이름으로 데뷔 싱글 'Love Me Do'를 발표하며 등장했다.
1970년 4월 10일 해체하기까지 9년간 공식적으로 211곡을 발표하며 전 세계의 팬들을 열광과 흥분으로 몰아간 비틀즈는 해체와 함께 전설로 남게 됐다. 앨범 판매량은 20세기 최대 음반판매 기록인 1억 6,000만장이었다./조선
1964년] 한국-케냐(Kenya) 국교 수립
← 케냐 국기
한국은 1963년 8월 15일 주(駐)케냐 대한민국총영사관을 개설하고 12월 12일 케냐 승인 후 1964년 2월 7일 양국간 외교관계 수립과 함께 총영사관을 대사관으로 승격하였다. 1989년 12월에는 주한 케냐명예총영사관이 개설되었다.
케냐는 비동맹주의 온건국가로서 독립 이후 친한적 정책을 추구하여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한 남북한 직접 대화, 남북한 UN(United Nations:국제연합) 동시가입, 북한의 IAEA(International Atomic Energy Agency:국제원자력기구) 핵사찰 수용 등 한국의 기본입장을 지지해왔다.
그러나 비동맹국가라는 입장 때문에 UN 등에서 한국에 대해 소극적으로 동조 입장을 취해오다가 1982년 8월 대통령 전두환의 케냐 방문, 1983년 10월 미얀마 아웅산묘소폭파암살사건 등을 계기로 적극적인 지지 입장으로 선회하였다. 또한 1990년 9월 대통령 다니엘 아랍 모이(Daniel Arap Moi)의 방한으로 양국의 협력관계가 더욱 강화되었다. (케냐 대한민국대사관) /naver
1960 - 제4대 대통령 선거전 돌입
1960년 오늘 3.15 부정선거로 유명한 제4대 대통령선거전이 시작됐다.
이틀 전 자유당은 이승만 대통령과 이기붕 민의원 의장을 각각 정부통령 후보로 등록했다.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자유당 유세에 6만여 명의 시민이 모였다.
연사들은 자유당이 관권선거를 조장한다는 민주당의 주장을 중상모략이라고 비난했다.
민주당도 이에 맞서 조병옥 박사와 장면 최고위원을 정・부통령 후보로 추대했다.
그러나 일주일 뒤 조병옥 후보가 미국에서 병사함에 따라 민주당은 장면 후보의 단독출마로 선거를 치렀다. /YTN
1951 산청. 함양.거창. 양민 학살사건
기자는 지난 20년 동안 지리산 자락에 있는 경남 산청군 금서면 방곡마을을 세 번 들렀다. 첫 번째는 1989년 4월의 어느 봄날, 당시 월간 < 말 > 새내기 기자 시절, 뜻한 바가 있어 산청읍에서 하루에 두 차례 다니던 시외버스를 타고 물어물어 깊은 산중에 있는 방곡마을에 스며들었다. 그 무렵 공포와 감시에 가위눌린 마을 주민 10여 명과 나흘 밤낮을 사랑방 대담과 현장 취재를 번갈아 한 끝에 세상에 내보낸 보도가 산청·함양에서 벌어진 700여 양민학살사건이었다.
이승만 정권 시절 양민을 적으로 보고 작전을 수행한 이상한 부대가 하늘 아래 있었다. 지리산 자락에 자리한 가현, 방곡·점촌 사람들을 몰살하고 그 아래 5개 마을 사람들을 반으로 나눠 무차별 사살했다.
1951년 2월7일의 일이었다. 국군 11사단 9연대 3대대가 지리산 공비 토벌작전인 이른바 '견벽청야'라는 작전을 수행하면서 산청군 금서면 가현 방곡마을과 함양군 휴천면 점촌마을, 유림면 손곡리 지곡리 서주리마을 등에서 무고한 민간인 705명을 집단학살했다. 바로 그 부대가 사흘간 행군을 더한 끝에 거창군 신원면으로 넘어가 주민 719명을 다시 집단학살했다.
이른바 거창양민학살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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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정희상 1951년 2월7일 국군 11사단 9연대 3대대가 지리산 공비 토벌작전 중에 산청·함양 주민 705명을 학살하는 장면을 재구성한 미니어처. |
두 번째는 < 시사저널 > 에 근무하던 1995년 5월, 사진기자와 다시 이 마을을 찾아 '1500 양민 스러져간 겨울 골짜기'라는 기사를 냈다. 산청·함양 양민학살사건은 세상에 널리 알려진 거창 양민학살사건의 바로 그 가해 부대가 거창 사건 사흘 전에 저지른 끔찍한 양민학살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역대 위정자들이 이 진실을 역사에서 가위질해버렸다는 사실을 추적해 고발했다. 대대로 지리산 자락에서 살아온 것이 죄가 되고, 흙 파고 씨 뿌린 일이 죄가 되어 자기 나라 군대의 총알에 맞아 죽은 백성들은 산발한 채 원혼이 되어 반세기 동안 하늘을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런 추적 보도 이후 산청·함양에서는 유족들이 살아온 통한의 세월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 이듬해인 1996년 1월5일, 국회에서는 여야 합의로 거창 산청·함양 사건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했기 때문이다. 이후 특별법에 따라 합동묘역 조성 공사가 시작돼 2004년 드디어 학살 현장에 705명의 합동묘역과 추모기념관이 들어섰다.
‘거창양민학살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범인을 처단하라며 시위하고 있다.
← 재경 거창 학우회 대학생들이 ‘거창양민학살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범인을 처단하라며 시위하고 있다.1951년 2월 11일
6.25라는 혼란의 와중에서 수백명의 거창군 양민들이 학살되는 참극이 1951년 2월 7일 발생했다. 이 사건은 1.4후퇴가 시작되면서 빨치산 대공세가 강화되자 거창군 신원면 일대에서 공비토벌 작전중이던 국군 11사단 9연대 3대대가 부락주민 570명을 공비와 내통했다는 이유로 내탄부락과 박산계곡에서 무참히 학살한 사건이다.
한 사병이 엄상섭 의원에게 폭로함으로써 국회차원의 조사가 시작됐지만 계엄사령부는 국군 1개소대를 공비로 가장해 위협적으로 총격을 가하는 등 조사를 방해했다. 그러나 거창 출신 국회의원 신중목의 끈질긴 추적과 재조사로 양민학살사건과 조사방해사건의 진상이 공개되자 내무-법무-국방 3부장관이 사임했고, 9연대장과 3대대장에게는 무기징역이, 경남지구 계엄사령관에게는 3년형이 선고됐다. /조선
이후 이들은 이승만(李承晩) 정권의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으며 김종원은 경찰 간부로 특채되었다. 4·19혁명 직후인 1960년 5월 11일 유가족 70명은 사건 당시의 신원면장 박영보(朴榮輔)를 생화장하는 등의 보복을 가하였다. 이를 계기로 국회는 진상조사를 다시 시작, 거창을 비롯한 인근 함양·산청·문경·함평 등의 양민학살사건을 밝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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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정희상 2004년 산청·함양 사건 희생자 합동묘역과 추모기념관이 들어섰다. 위령탑. |
1948년] 미군정 시기 2·7 사건 발생
2·7 사건은 1948년 2월 7일에 훗날의 대한민국 영역에서 일어난 파업 및 봉기 사건이다. 비판하는 측에서는 2·7 파업이나 2·7 폭동, 옹호하는 측에서는 2·7 구국투쟁으로 부른다.
개요
1948년 5월로 예정된 대한민국 제헌국회 총선을 앞두고 미군정 지역에서 단독 선거가 실시되어 단독 정부가 수립되는 것을 반대하여 총선에 반대하는 흐름이 형성되었다. 남조선로동당이 이같은 여론을 선도했고, 이 사건 이틀 후인 1948년 2월 9일 백범 김구가 〈삼천만 동포에게 읍소한다〉라는 제목으로 단선단정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하는 등 이승만 계열 외에는 이에 동조하는 파벌이 적지 않았다.
미군정에 의해 불법화된 남로당과 민주주의민족전선은 총선 일정이 발표되자 단선단정을 반대하며 2월 7일을 기해 전국적인 대규모 파업을 일으켰고, 이 파업 중 일부가 과격화 되어 경찰과 물리적 충돌을 일으켰다.
이 사건은 두 달 뒤에 큰 인명 피해를 가져온 제주 4·3 항쟁의 전초전이 되었다. 제주 4·3 항쟁과 여순 14연대 반란사건 등 더 규모와 파급 효과가 큰 사건이 연이어 터졌기 때문에, 대한민국 현대사 학계에서는 상대적으로 연구가 깊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개
1948년 2월 5일에 군정장관 A.L. 러치가 미군 철수설을 부인하는 성명을 발표한 이틀 후에 발생했다. 남로당의 단선반대 구국투쟁위원회가 지휘한 노동자 파업을 중심으로, 전기 노동자들이 송전을 중단하고 철도 노동자들은 철도 운행을 중지하며 통신 노동자들은 통신 설비를 파괴하는 방식을 통해 미군정을 압박하며 이루어졌다. 이에 호응한 농민들의 가두 시위와 학생들의 동맹휴학이 더해졌다. 이들의 주장들은 다음과 같다.
1. 조선의 분할 침략 계획을 실시하는 유엔 한국 위원단을 반대한다.
2. 남조선의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한다.
3. 양군 동시 철퇴로 조선 통일 민주주의 정부 수립을 우리 조선 인민에게 맡기라.
4. 국제 제국주의 앞잡이 이승만, 김성수 등 친일 반동파를 타도하라.
경상남도 밀양군에서는 2월 7일 이른 아침에 농민들이 지서 두 곳을 습격하여 경찰이 발포로 맞서면서 10여 명이 사살되고 100여 명이 검거되었다. 합천군에서는 오전과 오후 두 차례에 걸쳐 농민들이 지서를 공격하여 역시 100여 명이 검거되었다.
이와 유사한 충돌이 전국에 걸쳐서 일어나면 2월 20일까지 2주 동안 진행되었다. 약 전체 참가 인원은 약 200만 명이며, 이 과정에서 사망한 사람은 100여 명, 투옥된 사람은 8,500 명 정도로 추산된다.
의의 및 영향
2·7 사건은 자연발생적이며 우발적인 요소가 많았던 대구 10·1 사건과 달리 사전에 충분히 계획되고 준비되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미군정 지배 하에 있던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시에 사건에 돌입할 수 있었다. '단선단정 반대'라는 이해와 공감이 쉬운 구호와 함께 투쟁의 목표 또한 분명히 통일되어 있었다.
2·7 사건을 계기로 미군정 지역에서 미국에 반대하는 세력은 지구전 태세에 들어가게 되었고, 이는 각 지역 산악 지대를 중심으로 조선인민유격대의 초보적 형태를 구성하면서 결국 제주 4·3 사건이라는 무장 봉기로 이어졌다. /위키백과
1944 미국 사회학자 로버트 파크[Park, Robert Ezra, 1864.2.14 - 1944.2.7] 사망,
*펜실베이니아주(州) 하비빌 출생. 과학적 사회학 창설자의 한 사람이다.
1887년 미시간대학교 졸업 후 11년간의 신문기자생활을 거쳐, 1898년 하버드대학교에 입학, 철학을 공부하다가 독일에 유학, 하이델베르크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으로 돌아온 후 10년 동안 흑인교화사업을 하였으며, 1914년 시카고대학교 강사, 1923~1933년 교수 및 학과장을 지냈다.
미국의 사회학을 종래의 철학적 사회학으로부터 귀납법과 연관된 과학으로서의 사회학으로 전환시켰는데, 특히 도시·인종·인격·집합행동·매스커뮤니케이션 등의 연구분야에 대한 실증적 연구로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또한 종래에 미흡하였던 도시에 관한 이론으로서의 인간생태학(人間生態學)을 창시하였고, 도시를 조직적으로 파악하는 방법적 근거를 제시하였다.
이러한 연구를 포괄적으로 집대성한 《과학으로서의 사회학입문 Introduction to the Science of Sociology》(1921, E.W.버제스와 공저)은 널리 읽히고 있다. (출처: 두산백과)
1929년] 한국 동양화가 서세옥(徐世鈺) 출생
호는 산정(山丁).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을 나와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의 초대 작가와 심사위원을 지냈으며 1955년부터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를 지냈다. 서울대 미대 출신 작가들과 함께 묵림회를 창립, 이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1970년부터 국전 운영위원을 역임하고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예총) 부회장 등을 지냈다. 제7회 상파울로 비엔날레, 이탈리아 국제 비엔날레 및 프랑스·독일(서독)·벨기에·말레이시아 등에 초대 출품했다. 1949년 제1회 국전 국무총리상, 제3회 국전 문교부장관상, 1970년 국전 초대작가상을받았다. 대표작으로 〈꽃장수〉(1949)·〈작품〉(1962)·〈장생 長生〉(1970) 등이 있다./브리태니커
1919 송진우 최린 등 비종교계와 종교계 합동으로 독립운동 불멸계획 추진
≪저팬 애드버타이저≫에 재미동포의 활동과 상황이 보도되자, 비밀리에 우리 나라의 독립문제를 토의하였다. 1919년 1월 6일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웅변대회를 개최하여,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우리 나라의 독립을 일본 내각과 각국의 대사관 및 공사관에 청원할 것을 결의하였다.
실행위원으로 최팔용(崔八鏞)·송계백(宋繼白)·전영택(田榮澤)·서춘(徐椿)·김도연(金度演)·백관수(白寬洙)·윤창석(尹昌錫)·이종근(李琮根)·김상덕(金尙德)·최근우(崔謹愚) 등 10명을 선출하였다.
그 뒤 전영택이 병으로 사임하고 대신 이광수(李光洙)·김철수(金喆壽)를 추가로 선출하여 11명이 되었다. 이들 실행위원은 비밀회합을 거듭해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고, 민족대회소집청원서 및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을 작성하였다.
한편, 송계백과 최근우를 국내에 밀파해 최린(崔麟)·송진우(宋鎭禹)·최남선(崔南善)·현상윤(玄相允) 등과 접촉하게 하여 국내에서도 독립운동을 일으킬 것을 청하였다. 동시에, 독립선언서 등 서류 인쇄에 필요한 활자와 운동자금을 마련하여 오도록 하였다.
마침내 1919년 2월 8일 오전 10시, 한국 독립의 필연성과 정당성을 천명한 독립선언서 등을 각국 대사·공사, 일본정부 요인, 귀족원·중의원 양원의원, 조선총독, 신문사, 잡지사와 여러 학자들에게 우송하였다.
이 날 오후 2시,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백관수가 조선청년독립단의 이름으로 11명의 대표가 서명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김도연이 결의문을 낭독하자, 장내는 독립만세 소리와 환호성으로 가득하였다. 독립선언식이 끝날 무렵, 동경 경시청에서 급파된 경찰대가 대회장을 포위하고 장내에 진입하여 유학생들과 충돌, 일대 수라장이 되었다.
이 때 이광수를 제외한 10명의 대표는 일본 경찰에 잡혔다. 이에 유학생들은 전원 귀국할 것을 결의하고 국내에 돌아와, 3월 1일에 일어난 거족적인 독립만세운동에 합류하게 되었다.
1906년] 중국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 출생
← 푸이
1906. 2. 7 중국 베이징[北京]~1967. 10. 17 베이징.
중국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1907~12 재위) 또한 일본이 세운 괴뢰정권 만주국의 황제(1934~45 재위).
청제 때의 연호는 선통제(宣統帝). 1908년 11월 14일에 큰아버지인 광서제(光緖帝)가 죽자, 3세의 나이로 제위에 올라 아버지 순친왕 재풍(載灃)의 섭정을 받으며 3년간 황제로 있었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면서 이듬해인 1912년 2월 12일 제위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푸이가 퇴위함으로써 267년에 걸친 만주족의 중국 지배와 2,000년간에 걸친 황제 지배체제가 끝나게 되었다. 그는 베이징에 있는 궁전에서 계속 살도록 허용되었다. 그는 자신의 호칭으로 헨리라는 이름을 택했고, 이후 서구에서는 헨리 푸이로 알려졌다. 1924년 푸이는 몰래 베이징을 떠나 톈진[天津]에 있는 일본인 조계(租界)로 거주지를 옮겼다. 1932년 3월 9일 만주국의 집정관(執政官)이 되었고, 1934년 만주국 황제로 추대되어 연호를 강덕(康德)이라고 정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인 1945년 8월 소련에 포로로 억류되었다가 1950년 전범 재판을 받기 위해 중국으로 송환되었으며, 1959년 특사로 풀려나 다시 베이징으로 갔다. 베이징에서 식물원의 기계수리상점에서 일했다. 1964~65년에 영어로 된 푸이의 자서전 〈황제에서 시민으로 From Emperor to Citizen〉가 간행되었다./브리태니커
1902 덴마크와 수호통상조약
한국과는 1902년 7월
대한제국 전권대신 유기환(兪箕煥)과 덴마크의 전권대신 A.파블로우 간에 한정수호통상조약(韓丁修好通商條約) 및 부속통상장정(附屬通商章程)이 조인됨으로써 대한제국과의 마지막 수호조약 체결국가가 되었으나, 1905년 대한제국과 일본이 을사조약 체결함에 따라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외교관계가 단절되었다. 광복 후 1952년 6·25전쟁 중에는 유엔군으로 참전하여 병원선 유틀란디아호를 파견해 의료사업을 지원하였으며, 1959년 3월 한국과의 외교가 수립된 후 한국의 산업분야 지도자들을 매년 10명씩 전액 장학금으로 초청하여 농업·핵과학·식물병리 등 67개 분야에 걸쳐 교육훈련을 시켜왔다. 1969년 10월 사증면제협정, 1977년 10월 이중과세방지협정 등 5개의 협정을 체결하였다. 1982년 한국과 덴마크 양국 간의 상사 중재협정이 체결되었고, 1988년 투자보장협정이 체결되었다. 1995년에는 북구3국(덴마크·스웨덴·노르웨이)과 항공협정을 체결하였다.
우리나라와 덴마크의 총 교역규모는 1999년에 919백만달러까지 크게 증가한 바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의 외환위기가 끝나면서 덴마크로부터의 수입이 증가한데다, 우리나라의 선박수출이 크게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2000년에는 698백만달러, 2001년에는 553백만달러로 감소추세를 보였으나 2003년에 수출이 활발한 신장세를 보여 교역규모가 증가세로 전환되었다. 2004년 들어 수출이 무려 90.7%나 증가하였고, 수입 또한 16.6%나 증가하여 교역규모가 최초로 10억불을 넘어 11억불에 달하게 되었다. 무역수지는 2000년대 들어 우리나라가 적자를 기록하였으나 2004년에 최초로 흑자로 전환되었다. 2005년에는 다시 적자로 전환되었는데 이는 돼지고기, 닭고기, 의약품 등의 수입이 많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2004년 대(對)덴마크 수입은 471백만 달러이고, 수출은 639백만 달러이다. 우리나라의 대 덴마크 주요수출상품은 승용차, 선박, 컴퓨터 및 관련 부품, 무선전화기, 진공청소기 등이며 주요 수입상품은 돼지고기,의약품, 발전기, 밍크모피, 화학기계 등이다.
2007년 1월 현재 교민수는 260여 명이고, 체류자는 69명이다. 북한과도 1973년 수교하였다.
1898년] 한국 독립운동가 민필호(閔弼鎬) 출생
1898. 2. 7 서울~1963. 4. 14.
본관은 여흥. 호는 석린(石麟). 1910년 휘문의숙을 졸업하고, 이듬해 상하이[上海]로 건너가서 1912년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졸업했다. 같은 해 신규식(申圭植)이 설립한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하면서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1919년 4월 13일 상하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뒤, 같은 해 7월 신규식의 딸과 결혼하고 신규식의 비서로 일했다. 1923년 10월부터는 임시정부 재무총장 이시영(李始榮)의 비서로 13년 동안 재무의 실무책임을 맡아 경비조달에 진력했다. 1937년 10월 난징[南京] 교통부의 전정사(電政司), 12월 장제스[蔣介石] 시종실의 암전연구소(暗電硏究所) 총무로 일했다. 그뒤 임시정부 의정원의원을 지내고, 한국독립당 선전부장이 되어 〈독립신문〉을 복간, 발행했다. 한편 중국정부와 협의해 임시정부 무장경비대를 조직했다.
해방 후에도 중국에 계속 머무르면서 임시정부 요인의 귀국을 주선하는 한편, 임시정부 주화대표단(駐華代表團) 부단장으로 교포들의 교육과 보호에 힘썼다. 1948년 국민당정부와 함께 타이완으로 건너갔다가 1949년 우리 정부로부터 초대 중화민국 총영사에 임명되었다. 신병으로 사임하고 1957년 7월 귀국한 뒤 중일전쟁중 충칭[重慶]에 창설된 한중문화협회(韓中文化協會)를 재건해 한국·중국 간의 우호와 문화교류를 위해 노력했다. 저서에 〈한중외교사화〉가 있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브리태니커
1896년] 독립운동가 유득신(劉得信) 출생
1896. 2. 7 서울~1950.
이명(異名)은 홍익수(洪益洙). 배재학당(培材學堂)을 졸업하고 교회부속학교 교사로 봉직하다가 간도로 건너가 류허 현[柳河縣] 신흥학교(新興學敎)를 수료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1912년 3~7월에 일본 도쿄 신학회[東京神學會]에서 그리스도교에 관한 교육을 받고 귀국한 후 경상남도 고성군 대하면 송강학교(松江學校) 교사로 잠시 재직했다.
1920년 10월경 김상옥(金相玉)의 권유로 암살단에 가입한 뒤 김상옥으로부터 권총 1정과 탄환 3발을 받았다. 그해 10월 10일 엄준(嚴俊)과 함께 경기도평의원 임원상(林原相)으로부터 군자금을 징수해 김상옥에게 주었으며, 10월 30일에는 이만응(李晩應)으로부터 군자금을 징수해 임시정부 특파원 홍준(洪俊)에게 건네주었다. 그뒤에도 서울과 경기도를 중심으로 정구창(鄭求昌)·김영두(金永斗)·이범렬(李範烈)·김만원(金萬源) 등에게서 군자금을 징수했다. 1921년 1월 동대문경찰서의 추적을 받아 엄준이 먼저 체포되었으며, 그도 1월 17일 김경배(金敬培)의 집에서 체포되었다. 1921년 11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2년형을 언도받고 복역했다.
1968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브리태니커
1887 영국 군함 거문도에서 철수
1885년] 미국 작가 싱클레어 루이스 출생
← Lewis, (Harry) Sinclair, 1885. 2. 7 ~ 1951. 1.10
1885년 2월 7일 미네소타주(州) 소크센터에서 출생하였다. 예일대학교 재학 중 U.싱클레어를 중심으로 시작된 실험적 사회주의 공동생활체인 헬리컨 홈 콜로니(Helicon Home Colony)에 참가하였다. 졸업 후 편집 조수, 파나마에서는 운하공사장·건축공사장·신문사 등에서 일하면서 각지를 전전하다가 드디어 최초의 장편소설 《우리 회사 사원 렌 Our Mr.Wrenn》(1914)을 발표하여, 사실주의 수법·유머·풍자 등을 개성적인 재능으로 잘 표현함으로써 알려졌다. 이어서 3편 정도의 장편소설을 발표한 후 이상주의 기질의 젊은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여 중서부의 시골 특유의 인습적이고 독선적인 사고방식 및 규격화된 미국생활을 풍자한 문제작 《메인 스트리트 Main Street》(1920)를 발표하여 일약 유명해졌다.
이후 중서부의 전형적인 도시를 무대로 인습적인 분위기에 한때 반역하지만 결국은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던 토지·가옥 중개업자를 묘사한 《배빗 Babbitt》(1922), 주위의 상업주의와 싸워가면서 끝까지 과학정신으로 살려고 하는 세균학자를 다루어 퓰리처상을 받은(루이스 자신은 상을 거절하였다) 《애로스미스 Arrowsmith》(1925), 종교계의 위선을 폭로한 《엘머 갠트리 Elmer Gantry》(1927), 어느 자동차 제조업자의 전통과 예술에의 각성을 소재로 한 《도즈워스 Dodsworth》(1929) 등의 역작을 잇달아 발표하여 1930년 미국작가로서는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그 후의 주요작품에는 여류 사회사업가를 주인공으로 한 《앤 비커즈 Ann Vickers》(1933), 호텔업자를 호의적으로 그린 《예술작품》(1934), 파시즘의 위협에 대하여 경고를 던진 《그것은 이곳에서는 일어날 수 없다》(1935), 중년의 재판관과 그의 젊은 아내를 중심으로 부부생활의 문제를 취급한 《캐스 팀벌렌 Cass Timberlane》(1945), 흑인문제를 다룬 《피의 선언 Kingsblood Royal》(1947), 《단편집》(1935) 등이 있고, 사후(死後)에 《서간집》(1952) 등이 출판되었다. 루이스는 미국생활은 물질적 ·정신적으로 모두 규격화되어 있다고 하여 일상용어를 교묘하게 활용하며 미국생활의 이모저모를 풍자적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동시에 미국인의 형태를 희화적(戱畵的)으로 그려냄으로써 새로운 미국문학을 힘차게 대변하였다. /naver
1870 오스트리아 정신의학자 알프레드 아들러 출생
1870 오스트리아 정신의학자 알프레드 아들러[Adler, Alfred, 1870.2.7 - 1937.5.28]출생,
*빈 출생. 헝가리계 유대인으로 빈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한 후, 빈의 교육연구소원, 빈교육학교 강사를 거쳐, 1929년 컬럼비아대학의 객원교수가 되었다. 처음에는 S.프로이트의 연구서클에 참가하여 그 영향을 받았으나, 그 후 독자적인 ‘개인심리학(individual psychology)’을 수립하였다.
그는 성본능을 중시하는 프로이트의 설에 반대하여, 인간의 행동과 발달을 결정하는 것은 인간존재에 보편적인 열등감 ·무력감과 이를 보상 또는 극복하려는 권력에의 의지, 즉 우월의 요구라고 하였다.
나폴레옹은 키가 작았기 때문에 위대해졌고, 색약(色弱)은 이따금 대(大)화가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입장에서 신경증의 생성, 가정에서의 인간관계, 경쟁을 본질로 하는 현대문화 등에 관하여 고찰하였다. 그의 설에는 프로이트에게서 볼 수 있는 심각성은 없으나 그 대신 건강성이 있으며, 실험적 검증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주요 저서로 《신경쇠약의 특색에 관하여 ber den nerv sen Charakter》(1912) 《개인심리학의 이론과 실제 Praxis und Theorie der Individual psychologie》(1924)가 있다. (출처: 두산백과)
1812년] 영국 작가 찰스 디킨스 출생
← Charles (John Huffam) Dickens
1812년 2월 7일 태어남 / 1870년 6월 9일 죽음
"다른 사람에게 허비한 날이라고 해서 자기 자신에게 허비한 날은 아니다." - 찰스 디킨스
디킨스는 영국의 위대한 소설가로 <올리버 트위스트 Oliver Twist>(1838), <데이비드 카퍼필드 David Copperfield>(1849~50), <위대한 유산 Great Expectations>(1860~61)과 같은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어렸을 때는 궁핍에 시달려 학교에도 거의 다니지 못했으며 구두약 공장과 상표를 붙이는 공장에서 일하기도 했다. 15세에는 변호사 사무실의 사환이 되었다가 속기를 배워 이듬해 법원의 속기사로 들어갔다. 이후 신문사의 통신원이 되어 글을 쓰는 직업을 갖게 되었다. 사회의 부조리 및 서민들의 애환과 단순한 흑백의 변증법, 뛰어난 유머가 담긴 작품들을 발표해 생전에도 큰 인기를 누렸다. 심각한 인물뿐만 아니라 우스꽝스러운 인물 등 각양각색의 인물들을 창조해내 이미 20대부터 셰익스피어에 비견되기도 했다./
브리태니커디킨즈는 어린 시절에 구두약 제조 공장에서 일하기도 했고, 1828년에는 민사법정 속기사로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 '포플라 소조의 만찬회'로 문단에 데뷔, 1836년에는 '픽윅 페이퍼즈'로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합니다.
그의 작품의 특징은 '부조리한 사회에 대해 대항'한다는 것이며, 특히 사회의 상류층과 하급계층이 미묘하게 어우러지면서 과연
무엇이 역사의 주체가 되는지 해답을 제시해줍니다. 또한, 그는 인물 개개인의 행동과 대사를 통한 심리묘사와 적절한 우연의 배
치에 탁월한 감각을 보입니다. 게다가 그런 우연은 그냥 우연으로서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작품 안에서 하나의 상징으로 모아집니
다.
"연수입 20파운드에 지출이 19파운드 19실링이라면 결과는 행복하다.
연수입 20 파운드에 지출이 20파운드 6실링이라면 결과는 불행하다."
1799년] 중국 청나라의 6번째 황제 건륭제 사망
← 건륭제
건륭제(乾隆帝, 강희(康熙) 50년 음력 8월 13일 (1711년 9월 25일) ~ 가경(嘉慶) 4년 음력 1월 3일 (1799년 2월 7일))는 청나라의 제6대 황제(재위 1735년 ~ 1796년)로 1644년 명나라가 멸망한 직후 청나라의 팔기군이 산해관으로 들어간 다음 중국 대륙을 실질적으로 통치한 정통 황조로서의 네 번째의 중국 청나라 황제이기도 하다. 성은 애신각라(愛新覺羅), 휘는 홍력(弘曆), 묘호는 고종(高宗), 시호는 법천융운지성선각체원입극부문분무흠명효자신성순황제(法天隆運至誠先覺體元立極敷文奮武欽明孝慈神聖純皇帝), 짧은 시호로는 순황제(純皇帝)이며, 연호는 건륭(乾隆)이다. 또한 만주어로는 압카이 워히여허 한(Abkai Wehiyehe Han), 몽골어로는 텡게린 테트게센 칸(Tengeriin Tetgesen Khaan)이라 불리기도 한다. 제4대 황제 강희제(康熙帝)의 손자이자 제5대 황제인 옹정제(雍正帝)의 넷째 아들이며, 옹정제의 후궁 출신인 효성헌황후 뉴호록씨(孝聖憲皇后 鈕祜祿氏)의 소생이다.
어릴 때부터 제왕으로서의 자질이 보여 할아버지 강희제와 아버지 옹정제에게 인정을 받았다. 1735년(옹정 13년), 옹정제가 급사하자 저위비건법에 따라 황위에 올라 먼저 만주족과 한족 대신들의 갈등을 조정하며 내치를 다진 후 대규모 정복 사업과 문화 사업을 펼쳤다. 문화 사업으로는 옹정제 때 마카오로 추방된 예수회 선교사들을 다시 불러들여 북경에 서양식 건물을 짓도록 허락한 것과, 특히 예수회 수도사인 주세페 카스틸리오네에게 서양식 궁전인 원명원을 개·보수를 감독하게 한 것이 있다. 그 자신 역시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아 시와 서화를 즐겼고 각지의 시인과 화가들을 독려하였다. 특히 10년의 세월을 들여 고금의 도서를 수집하여 중국 역사상 최대의 대편찬 사업인 《사고전서》를 편찬함으로서 고서적들을 많이 발굴케 하였으나 문자의 옥도 단행하여 청나라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책들은 모두 금서로 만들었다.
또한 10차례에 걸친 정복 사업을 펼쳐 준가르와 위구르를 복속시키고 티베트, 버마, 베트남, 네팔까지 진출하는 등 현재 중국 영토의 틀을 만들었다. 그러나 집권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시대착오적인 정책을 내놓고 여기에 사치, 반란, 서방과의 부실한 외교, 그리고 희대의 탐관오리로 평가받는 화신을 20여년간 총애하여 말년엔 매관매직과 부정부패가 빈번히 일어나고 국고가 비어 결국 청나라는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1795년(건륭 60년) 말, 자신은 감히 할아버지인 강희제의 재위 기간을 넘을 수 없다며 재위 60년 째에 태상황제로 물러났지만 막후에서 정책 최고 결정권을 행사하여 여전히 실권을 쥐고 있었다. 재위기간 60년에 태상황제로서 실권을 장악한 4년까지 합치면 건륭제는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실권을 장악한 황제였다. 스스로를 십전노인(十全老人, 열 번의 원정을 모두 승리로 이끈 노인)이라 칭하고 그렇게 불리기를 좋아하였으며, 중국 최후의 태평성세인 강건성세(康乾盛世)의 마지막을 장식한 황제이다. 중국의 역대 황제 중 가장 장수한 황제이며 중국 최후의 태상황제로 그의 생모와 신분, 즉 한족의 피가 흐르는지에 대한 의문이 있어서 중국의 역대 황제 중 가장 민간의 전설과 야사가 많은 황제이기도 하다./위키백과
1478 영국 정치가 인문주의자 토머스 모어 출생,
1478 영국 정치가 인문주의자 토머스 모어[More, Thomas, 1477.2.7 - 1535.7.6]출생,
*런던의 법률가 존 모어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 캔터베리 대주교(大主敎) 존 모턴을 섬기고, 나중에 옥스퍼드대학에 입학했으나,아버지의 요구로 중퇴하여 법률가가 되려고 링컨 법학원에 입학하였다.
대학 재학 중에 대륙의 르네상스 문화운동의 영향을 받아, 일찍부터 에라스무스와 친교를 맺었다.
그의 《우신예찬(愚神禮讚)》(1511)도 모어의 집에 묵으면서 쓴 것이다. 법학원 졸업 후 변호사가 되었고, 의회에서도 의석을 차지하였다. 1515년에는 통상(通商)문제로 네덜란드에 건너가, 외교교섭에 수완을 발휘하였다. 이상적 국가상(國家像)을 그린 명저 《유토피아》는 그때의 여행 중에 쓰기 시작하였으며, 이듬해 귀국하여 완성하였다.
그는 탁월한 수완과 식견으로 헨리 8세의 신임을 얻어 1529년에는 대법관(大法官)에 임명되었으나, 왕의 이혼에 끝내 동의하지 않고 1532년 관직에서 물러났다. 1534년 반역죄로 런던탑에 갇혔다가, 1535년에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는 인문주의자로서 해학취미(諧謔趣味)의 소유자로 신랄한 언사를 서슴지 않았으나, 동시에 경건한 그리스도교도이며, 이름난 명문가(名文家)·논쟁가(論爭家)로서 서민 사이에 인기가 있었다. 작품에 《피코 델라 미란돌라전(傳)》(1510)《리처드 3세전》(1543) 등이 있다. 1935년, 로마 교황은 그에게 ‘성인(聖人)’의 칭호를 주었다 (출처: 두산백과)
1477년] 영국의 인문주의자 토마스 모어 출생
← 모어 [More, Thomas, 1477. 2. 7~1535. 7. 6]의 유토피아
토머스 모어(영어:Thomas More, 1478년2월 7일 - 1535년6월 6일)는 잉글랜드 왕국 시기의 법률가, 저술가, 사상가, 정치가이자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인이다. 그는 평생 스콜라주의적 인문주의자로서 덕망이 높았으며, 1529년부터 1532년까지 대법관을 포함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모어는 1516년에 자신이 저술한 책에서 묘사한 이상적인 정치체제를 지닌 상상의 섬나라에 주었던 이름인 유토피아(Utopia)라는 단어를 만들어냈다. 그는 주로 헨리 8세가 주장한 잉글랜드 교회의 수장령을 받아들일 것을 거부한 죄로 정치 경력이 끝남과 동시에 반역죄로 처형당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가 죽은 후 400년이 지난 1935년, 교황 비오 11세는 토머스 모어를 시성하였으며, 이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정치가의 수호성인으로 선언되었다. 가톨릭교회의 성인력에서 토머스 모어의 축일은 존 피셔와 같은 날인 6월 22일이다. 모어는 1980년 영국 성공회의 성인력에도 그의 이름이 올라갔다. 그는 100명의 위대한 영국인 투표 조사에서 37표를 받았다.
토머스 모어는 종교개혁을 부정하고 적극적으로 탄압하였으며, 로마 가톨릭 교회를 통한 평화와 사회정의를 주장하였다./위키백과
1410 (조선 태종 10) 주자소, 서적 간행 판매
책의 최초의 재료가 된 것은 BC 3000년경부터 이집트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파피루스인데, 갈대 줄기로 만든 펜에 검댕이나 숯을 물에 탄 잉크를 묻혀 문자를 썼다. 파리의 국립도서관에는 도덕론(道德論)을 적은 《프리스 파피루스》라는 것이 있는데,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것으로, BC 2200∼BC 2000년경의 파피루스책이다. 지체 높은 사람이 죽었을 때 관에 넣고, 또 장례에 참석한 이들에게도 나누어 주었던 《사자(死者)의 서(書)》가 그 후 나타났는데, 대영박물관(大英博物館)에 소장되어 있는 이것은 BC 1400년경의 것이라고 한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BC 5세기의 아테네에 이미 영리를 목적으로 한 출판자와 서점이 몇 군데 있었고, 고대 로마에서는 지금의 인쇄공에 해당하는 사자생(寫字生)의 동업조합이 BC 207년에 조직되었다고 한다. 그 무렵 로마의 출판자들은 책을 대규모로 수출하기도 하였다. 또, BC 220년에는 파피루스 대신 양피지도 발명되었는데, 이것이 유럽에서는 중세기에 이르기까지 책의 재료로서 사용되었다. 중국에서는 BC 3세기 진(秦)나라 시대에 이미 나무·대나무 등에 붓과 먹으로 문자를 써서 책을 만들었으며, 시황제(始皇帝)가 분서갱유(焚書坑儒)를 행한 것은 유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105년 후한(後漢) 시대에 채륜(蔡倫)이 종이를 발명하였는데, 7세기의 당(唐)나라 초기에 목판인쇄가 발명되자 책은 비로소 종이와 인쇄에 의해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때까지의 책은 손으로 베껴 쓰는 필사본(筆寫本)이었고, 두루마리 형태로 되어 있었다. 그로부터 중국은 특히 송(宋)·원(元)나라 2대에 걸쳐 출판이 크게 번영하여 출판의 선진국이 되었다. 한국에는 중국과 가까운 관계로 종이와 목판인쇄 또는 책 자체가 일찍부터 소개되었는데, 어느 시기가 지난 다음 그것만으로는 수요를 충족할 수 없어 스스로 목판인쇄술을 개발하게 되었다.
751년 이전의 목판인쇄물로 추정되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이 1966년에 불국사 석가탑 속에서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현재 남아 있는 인쇄물 가운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보는 이가 적지 않다. 고려 시대에는 목판인쇄술에 의하여 3차에 걸쳐 대장경이 개판되었다. 한편, 1227년(고종 14)부터 10년간에 걸쳐 《고금상정예문(古今詳定禮文)》 50권 28본(本)을 동활자로 인쇄하였다고 이상국 후집(李相國後集) 《신서상정예문(新序詳定禮文)》 발문에 기록되어 있는데, 일반적으로 한국의 금속활자 인쇄 시작의 시기를 1234년이라 하는 것은 이에 근거를 둔 것이다. 또, 1377년(우왕 3)에 금속활자로 간행된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 권2가 1972년 프랑스 국립도서관 ‘책의 역사’ 전시회에 전시되어, 이 책이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임을 전세계에 공인하게 하였다. 근세 조선의 인쇄술은 고려 인쇄술의 전통을 이어받아, 태종은 1403년(태종 3)에 남산 밑에 주자소(鑄字所)를 설치하고 동활자 10만여 자를 주조하여 많은 활자본을 간행하였다. 이 계미자(癸未字)로 인쇄한 책을 계미자본이라고 한다.
그 후 조선 500년 동안 역대 왕들은 중요한 국가사업의 하나로 동활자 ·철활자 등을 20여 차례에 걸쳐 주조하고 주조한 해의 간지(干支)에 따라 활자 이름을 붙였는데, 세종은 특히 인쇄사업을 중시하여 인쇄 종사자들을 우대하였다. 근세 조선의 수많은 간행본은 크게 관판본(官版本) ·사판본(私版本)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사판본은 다시 서원판(書院版) ·사찰판(寺刹版) ·사가판(私家版) 등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관판본 중에는 판면의 조화 ·문자체 ·지질 및 제책 등 도서미를 갖춘 화려한 것도 많다. 그러나 종래 한국에서는 책이 한 상품으로서 자유롭게 매매할 수 있게 되어 있지 않았다. 관판본은 관비로 출판하여 관계관서나 관원들에게 무료로 배부하였고, 사찰판도 판비를 부담하는 시주(施主)가 따로 있어, 출판된 후 관계자들에게 적당히 나누어 주었으며, 사가판도 자손이나 문인(門人)들이 사비(私費)로 출판하여 관계인사들에게 배부하였기 때문에 서적이 유통과정에 있어 일반에게 널리 보급될 수 없게 되어 있어서, 책을 필요로 하는 일반 독자들에게는 불편한 점이 많았다. 이런 불편을 덜어주기 위하여 역대 왕조에서 몇 차례나 영리목적의 서사(書肆) 설치를 시도하였으나 그 제도가 정식으로 잘 실시되지 않았으며, 때로는 서사를 따로 두어 종이 ·무명 ·쌀 등으로 책값을 대납하게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17세기 중엽부터는 출판지나 출판자의 이름이 적혀 있는 매매 목적의 방각판(坊刻版)으로 볼 수 있는 판본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요즈음의 출판사에 해당할 만한 상호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19세기 초에는 출판지나 상호와 비슷한 이름이 밝혀져 있는 방각본들이 많이 나타났다. 그리하여 19세기 중엽에는 서울의 야동(冶洞) ·홍수동(紅樹洞) ·석교(石橋) ·무교(武橋) 등의 이름이 명시된 신간본과 또는 지방의 완산(完山) ·전주(全州) 등지에서 개판(開板)된 매매 목적의 방각본이 많이 나타났다.
1151년] ‘삼국사기’ 저자 김부식 사망
← 김부식은 송나라에 여섯 달 동안 머물며 송나라 휘종에게 [자치통감]을 선물로 받았다. 김부식은 이를 보며 [삼국사기]에 대한 집필 의지를 다졌을 것이다.
김부식은 신라 왕실의 후예로 증조부 김위영이 고려 태조(太祖)가 경주(慶州)의 주장으로 임명된 이래 경주 일대에 세거하였다. 부친 김근이 좌간의대부로 관직에 진출하였으나 일찍 세상을 떠나 편모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높은 지위의 가문이 아니었기 때문에 김부식과 그의 형제들은 과거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였다.
김부식은 숙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안서 대도호부(安西 大都護府) 사록(司錄)과 참군 녹사(參軍錄事)로 배치되었고, 임기가 끝난 후 직한림원으로 임명되었으며, 좌사간, 중서사인을 역임하였다. 1121년(예종 16년)에는 임금에게 경사(經史)를 강의하는 임무를 맡기도 했다.
인종(仁宗)이 즉위하면서 외척인 이자겸은 국정을 농단하였다. 이 시기 김부식은 이자겸의 전횡에 비례(非禮)를 이유로 반대한 일이 있으나 직접적으로 대항하지는 않고 묵종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는 이자겸 집권기에 순탄하게 승진하였다. 또한 1126년과1127년에 송나라에 사신으로 행차하여 송나라가 몰락하는 과정을 직접 목격하였으며, 박승중(朴昇中)·정극영(鄭克永)과 함께 《예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여 《삼국사기》를 편찬할 수 있는 중요한 경험을 쌓았다. 어사대인(御史大人)·호부상서(戶部尙書)·한림원학사 등을 거쳐 평장사(平章事)에 승진하였고, 수사공(守司空)을 더하였다.
1126년(인종 4년) 이자겸이 피살됨으로써 그의 전횡은 끝났으나 이로 인한 혼란과 궁궐의 소실 등을 이유로 서경파가 득세하였다. 이 시기 김부식은 추밀원사(樞密院使)로 승진하여 재추(宰樞)의 반열에 오르는 등 정치적 지위가 급성장하였다. 묘청 등의 서경천도운동은 1129년(인종 7년) 무렵부터 대두되기 시작하여 서경에 궁궐을 축조하고 인종도 자주 행차하였다. 서경파의 정지상 등은 묘청과 백수한(白壽翰)이 성인이니 모든 정치를 그들에게 물어서 행하자고 하면서 연판장을 돌렸다. 조정 신료 가운데 오직 평장사 김부식, 참지정사 임원애(任元敱), 승선(承宣) 이지저(李之氐)만이 이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서경의 서기(瑞氣)를 조작한 일이 탄로나고, 행차 때의 악천후 등이 잇따름에 따라 김부식 등의 반대파 의견이 우세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김부식 일파는 1134년(인종 12년) 인종의 서경 행차를 막는 데 성공하였다.
↑ 고려 인종 23년(1145년) 김부식 등에 의하여 찬진된 신라·고구려·백제 삼국에 관한 기전체의 정사인 삼국사기 옥산서원본. 전 50권 가운데 권 29의 제1장 작삼국년표 갑자, 을축 부분 및 권 36의 제3장 임성군, 황산군, 비풍군 연혁 부분.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NIKH.DB-fl_001_002_001_0029)>
서경 천도가 불가능해지자 묘청·조광·유담 등은 1135년(인종 13년)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김부식은 토벌군의 원수가 되어 일단 개경에 머물고 있던 서경파 정지상, 김안(金安), 백수한을 처형하고 출전하였다. 김부식은 중군장으로서 좌군장으로 김부의(金副儀), 우군장으로 이주연(李周衍)을 거느리고 서경으로 향했다. 서인들은 묘청·유담들을 죽이고 항복하였으나, 조광(趙匡)이 또 반하므로 서경을 포위하고, 그 이듬해인 1136년에 잔당을 소탕하였다. 반란을 진압한 김부식은 수충정난정국공신(輸忠定難靖國功臣) 칭호와 검교태보수태위 문하시중판상서이부사감수국사상주국 겸 태자태보(檢校太保守太尉門下侍中判尙書吏部事監脩國史上柱國兼太子太保)로 임명되었다. 김부식은 이 전공을 이용하여 정적(政敵)인 윤언이(尹彦頥)를 축출하고 정권을 잡았다.
그 후 집현전 태학사·태자태사(太子太師)의 벼슬과 동덕찬화공신(同德贊化功臣)의 칭호를 더하였다.
1140년(인종 18년) 이후 그의 세력이 약화되고 윤언이가 정계에 복귀하자 위기를 느낀 김부식은 1142년(인종 20년)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김부식이 관직에서 물러난 뒤인 1145년(인종 23년)에 《삼국사기》 50권의 편찬이 완료되었다. 의종이 즉위하자 낙랑국 개국후(樂浪國開國候)로 봉했고, 그 뒤 김부식은 《인종실록》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송나라의 사신 노윤적(路允迪)이 왔을 때 관반사(館伴使)로서 그를 맞아들였고, 같이 왔던 서긍(徐兢)이 그의 《고려도경》에 김부식의 집안을 실어 송나라 황제에게 진상함으로써 김부식의 이름은 송나라에도 유명하였다.
1151년(의종) 5년 77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대각국사의 비문을 지었고, 죽은 뒤 인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문집 20권을 지었으나 전하지 않는다.
(요약) 고려 시대의 유학자이자 역사가인 김부식이 1151년 오늘 사망합니다. 정치가로 호는 뇌천이며, 1096년에 급제하
여 참군사·직한림에 발탁되었고 1134년 묘청이 서경천도설을 주장하고 난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여 수충
정난 전국 공신의 호를 받았습니다. 1145년에는 왕명으로 우리 나라 최초의 정사인 <삼국사기> 50권을 편찬 하였습니
다. 이 밖에도 인종 초년에 <예종 실록>을 편찬하였고, 의종 초년에는 <인종 실록>을 편찬하였습니다.
본문 |
본관 경주. 자 입지(立之). 호 뇌천(雷川). 시호 문열(文烈). 신라 왕실의 후예로서 경주의 주장(州長)인 위영(魏英)의 증손자. 국자좨주 좌간의대부(國子祭酒左諫議大夫) 근(覲)의 셋째 아들. 네 형제가 모두 과거로 진출하였으며, 그 가운데 부일(富佾)·부식·부필(富弼)은 문한(文翰)으로 이름을 날렸다. 1096년(숙종 1)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안서대도호부(安西大都護府)의 사록참군사(司錄參軍事)에 임명되었다가 직한림원(直翰林院)을 거쳐 중서사인이 되었다. 인종 초에 이자겸이 왕의 외조부이자 장인이라는 이유로 권력을 마음대로 하자 이를 저지하였으며, 이자겸이 제거된 뒤 1126년(인종 4) 어사대부가 되었다가 호부상서 한림학사승지를 역임하였다. 1130년 정당문학 겸 수국사로 승진하였고 이어 검교사공 참지정사가 되었으며, 1132년에 수사공 중서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守司空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에 이르렀다. 당시에 묘청(妙淸) 등 서경세력이 천도를 주장하면서 난을 일으키자 원수로서 삼군(三軍)을 지휘하였으며, 출정하기 전에 먼저 개경에 있던 정지상(鄭知常)·김안(金安)·백수한(白壽翰) 등을 죽였다.
장기전을 벌이면서 1년 2개월 만에 반란군을 진압하였고, 그 결과 수충정난정국공신(輸忠定難靖國功臣)에 책록되고 검교태보·수태위·문하시중·판상서이부사·감수국사·상주국 겸 태자태보(檢校太保守太尉門下侍中判尙書吏部事監修國事上柱國兼太子太保)에 승진하였다. 1138년에 검교태사·집현전대학사·태자태사(檢校太師集賢殿太學士太子太師)를 더하였다. 이어 함께 전공을 세운 윤언이(尹彦頤)와 개인적인 불화가 생겨 그가 칭제건원(稱帝建元)을 주장한 것을 탄핵하여 양주방어사(梁州防禦使)로 쫓아냈다가 뒤에 사면되자, 정치적 보복이 두려워 1142년에 사직하였다.
인종은 그의 사직을 허락하면서 동덕찬화공신호(同德贊化功臣號)를 더하여 내렸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 인종의 명령을 받아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체재를 작성하고 사론(史論)을 직접 썼으며, 1145년에 완성하였다. 한림원에 있을 때에는 사륙변려문체(四六騈儷文體)에서 당·송 시대의 고문체(古文體)를 수용하려 하였다. 《고려도경(高麗圖經)》의 저자 서긍(徐兢)은 그를 고금에 밝고 글을 잘 짓는 박학강식한 사람이라고 평하였다. 의종이 즉위한 뒤 낙랑군 개국후에 봉하고 《인종실록》을 편찬하게 하였다. 죽은 후 1153년 중서령이 추증되었으며 인종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문집 20여 권을 남겼으나 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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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0년 - 63대 로마 교황 펠라지오 2세 사망
교황 펠라지오 2세(라틴어:Pelagius II, 이탈리아어:Papa Pelagio II)는 제63대 로마 교황(재위: 579년11월 26일 - 590년2월 7일)이다.
펠라지오 2세는 고트족인 우니길트의 아들이며 게르만족으로서 두 번째 교황좌에 오른 인물이었다. 그는 롬바르드족이 로마를 점령하고 있던 어려운 시기에 교황으로 선출되었으나 비잔티움 제국의 승인을 받지 않고 바로 성성되었다. 부제그레고리오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사절로 파견하여 실수를 설명하고 군대 파견을 요청하였다.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사산조 페르시아와 복잡한 문제를 안고 있었기 때문에 소수의 군대를 파견하면서 롬바르드족을 설득하여 프랑크 왕국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하였다. 이에 펠라지오 2세는 프랑크족 출신인 옥세르의 주교에게 요청하였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마침내 라벤나의 총독은 롬바르드족과 휴전을 맺어 589년까지 지속되었다.
그 사이 펠라지오 2세는 아퀼레이아 분쟁을 종식시키려 하였다. 그레고리오 부제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로마로 돌아와 그 협상 책임을 맡았다. 불행하게도 아퀼레이아의 그라도 주교와 베네치아와 이스트리아의 주교들은 로마 교회와 친교를 맺기를 거절하였다. 라벤나의 총독은 친교를 맺도록 강요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
펠라지오 2세의 재위는 5세기 이래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들이 정기적으로 사용해 온 ‘세계총대주교’의 칭호를 놓고 로마 교회와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 사이에 벌어질 논쟁의 시작이었다. 펠라지오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개최되어 요한네스 4세 네스테우테스 총대주교가 서명한 공의회의 결정을 거부하였다.
이렇듯 위험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도 펠라지오 2세는 로마의 중요한 곳들을 장식하는 데 힘썼다. 그의 사저는 병원으로 개조되어 현재 성 요한 병원(Ospedale di San Giovanni)으로 남아 있다. 그는 590년 테베레 강이 홍수로 범람했을 때 변을 당해 선종하였다. /위키백과
오늘의 탄생화와 꽃말 2/7일
[ 2월 7일 탄생화] 물망초(Forget-Me-Not)
꽃말 : 날 잊지 말아요
지치과
원산지: 유럽
이 꽃에 이름을 붙여 준 사람은 아담이라는 전설이 있습니다. 그가 아직 에덴 동산에서 살고 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튜울립'이나 '패랭이꽃' 등에게 이름 붙이기를 대충 끝내 후 꽃들이 기뻐하는지 어떤지를 확인하기 위해 천천히 동산을 걷고 있자니 작은 꽃이 말을 걸어옵니다.
"내 이름은 뭐죠?" 그러자 아담은, "이렇게 예쁜 꽃을 빼놓다니"하고 한탄했습니다. "다시는 잊지 않겠다. 네 이름은 잊지 말아요란다." 영어 명도 'Forget-Me-Not'이라는 어여쁜 이름입니다.
꽃점: 참된 사랑을 찾는 낭만파.
신경이 예민하고 순수하며 감성이 풍부한 당신입니다.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이 나타나도 현실적인 문제를 회피하기 쉬운 타입이어서 불륜의 상대가 되기 쉽습니다.
유혹을 당하면 순진하게 따르는 것이 문제인데, 조금쯤은 사람을 의식하는 것을 배우지 않는다면 언제까지고 결혼은 꿈일 것입니다. 꿈이란 뒤쫓아 다닐 것이 아니라 두 손으로 꽉 붙잡아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물망초勿忘草 Forget-Me-Not [ Myosotis scorpioides] -쌍떡잎식물 통화식물목 지치과의 여러해살이풀:
유럽이 원산지이고 관상용으로 심는다. 원예에서는 한해살이풀로 취급한다. 전체에 털이 많고 뿌리에서 모여 나온 잎은 거꾸로 세운 바소 모양이며 잎자루가 있다. 줄기에 달린 잎은 잎자루가 없으며 긴 타원 모양이다. 꽃은 5∼6월에 하늘색으로 피고 한쪽으로 풀리는 총상꽃차례를 이루며 달린다. 화관은 5개로 갈라지고 인부(咽部)에 5개의 비늘조각이 있다. 물망초란 영어의‘forget me not’을 번역한 것이고, 영어 이름은 독일어의‘페어기스마인니히트(Vergissmeinnicht)’를 번역한 것이다. 독일의 전설에 따르면, 옛날에 도나우강(江) 가운데 있는 섬에서 자라는 이 꽃을 애인에게 꺾어주기 위해 한 청년이 그 섬까지 헤엄을 쳐서 갔다고 한다. 그런데 그 청년는 그 꽃을 꺾어 가지고 오다가 급류에 휘말리자 가지고 있던 꽃을 애인에게 던져 주고는‘나를 잊지 말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사라졌다고 한다. 그녀는 사라진 애인을 생각하면서 일생 동안 그 꽃을 몸에 지니고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꽃말이‘나를 잊지 마세요’가 되었다. (출처: 두산백과)
[꽃 말] : 날 잊지 마오
[탄생화] : 귀하께서는 참된 사랑을 찾는 낭만파浪漫派로 신경神經이 예민銳敏하시고 순수純粹하시며 감성感性이 풍부豊富하신 분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