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황사는 통일신라시대 때 창건되었던 사찰이며 불교의 해로유일설을 뒷받침하는 창건설화가 전해내려온다. 부도전의 부도조각이 특이하다.
미황사는 우리나라 불교 해로유입설을 뒷받침하는 고찰로서 옛날에는 크고 작은 가람이 20여동이나 있었던 거찰이거니와 대웅전은 보물 제947호로서 그 규모나 정교함에 있어서 매우 훌륭한 건물이다.
신라시대 의조화상이 창건했다는 이 곳은 1692년 숙종 18년에 병조판서를 지낸 민암이 지은 '미황사 사적기' 에 창건에 얽힌 전설이 전하고 있다.
의조화상의 꿈에 금인(金人)이 나타나 소가 누워 일어나지 않은 곳에 절을 세우라는 말대로 처음 소가 누운 자리에 통교사를 짓고 그 다음 자리에 미황사를 지었다. 미황사란 이름은 소 울음소리가 아름다워 아름다울 미(美)를 취하였고 금인의 황홀한 빛을 상징하여 황(黃)자를 취해 지었다고 한다.
▲ <자하루>
▲ <대웅보전> 염주를 굴리 듯 한 발 한 발 미황사 입구 돌 계단을 타고 오르면 바다처럼 푸른 하늘, 우뚝 솟은 달마산과 그 아래 대웅보전의 팔작 지붕이 춤을 추듯 흔들리며 다가온다. 보물 제947호로 지정된 대웅보전은 1982년에 보수 공사 중 발견된 "대법당중수상량문"(1754년 작성)에 의하면 응진전과 함께 1751년에 중수되었다. 오랜 세월에 씻겨 건물 외부의 단청이 지워지고
나뭇결이 보드랍게 살아 대웅보전을 찾는 이에게 소박한 아름다움과 따뜻함을 전해준다. 법당 안에는 목조삼존불(석가모니불, 아미타불,약사여래불)이 모셔져 있다. 대웅전의 닷집은 이 곳이 부처님의 집임을 만천하에 드러내듯 장엄화려의 극치를 구가하고 있으며, 법당안에는 소종과 법고, 법고대, 괘불등이 봉안되어 있다. 또한 천장에는 범어(인도 싼스크리스트어)로 쓰여진 글자와 일천불의 벽화가 있는데 국내에서 보기드문 수작이다. 특히 천장 곳곳에 그려진 천불의 부처님 때문에 미황사 대웅전에서 세 번만 절을 올리면 한 가지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부처님이 천 분이시니 세 번이면 삼천 배가 되니 어찌 이루어지지 않는 소원이 있으랴? 대웅보전은 미황사 창건설화에 나오는 배(인도에서 경전과 부처님상을 싣고온 배)를 상징하기도 하고, 반야용선의 의미도 있는데 이는 중생계에서 부처님의 세계로 건너는 배를 상징하기도 한다. 미황사의 대웅전은 위에서도 내려다 볼 수 있는데 대웅전과 응진당 사이의 계단에서 대웅전을 바라보면 온 세상의 업을 이고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것 같고 그 시간이 서쪽 바다로 해 떨어질 무렵이라면 마음속 찌꺼기는 산산이 부서져버릴 것이다.
▲ <응진당> 대웅보전에서 석축을 따라 올라가면 작은 규모의 응진전이 외벽 담을 두르고 서 있다. 미황사의 副佛殿인 응진당(보물 1183호)은 석가모니부처님, 좌우에 아난, 가섭존자가 모셔져 있고 16나한상, 인왕상, 시자상, 동자상 및 불패가 모셔져 있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응진당 내부 벽면에 수묵(水墨)으로 그려진 나한 벽화는 유려한 선맛이 선필(禪筆)의 경지를 보인다.
건축연대는 1982년 대웅전 보수공사 때 대들보에서 나온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데 대웅전과 같은 해인 1751년 상량(上樑)된 것으로 18세기 중엽의 건물이다.
응진당 마당은 사찰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이라 이 응진전 마당에서 내려다보는 전경은 일품이다. 특히 해질 녘 진도와 그 밖의 뭇섬들이 붉은 바닷물 위로 떠 있는 모습은 가히 절경이다. 1993년 도지정 문화재에서 보물로 승격되었고 2001년 보수공사를 마쳤다.
▲ <명부전> 대웅전 바로옆이 명부전이다
▲ <세심당>
▲ <삼성각> 미황사의 삼성각은 산신(山神)·칠성(七星)·독성(獨聖)을 함께 모시는 전각이며 산신탱화, 독성탱화, 칠성탱화가 모셔져 있다..산신(山神)은 한국의 토속신 산신령에 해당하는 호법선신으로 미황사 삼성각에 모셔놓은 산신탱화(삼성각 정면 좌측)는 화면 왼쪽에 호랑이를 걸터앉은 산신과 그 좌우에 동자와 여인이 자리한 구도이다. 동자와 여인은 독성탱화의 것과 모습이 흡사하다.
화면 하단 오른쪽에 기록된 화기란에 불기 2970년 해남군 송지면 大竹里에 거주하는 金仕琡 일가가 시주한 내용이 기록되었다. 불기 2970년은 1943년이다. 크기는 가로 112cm 이고 세로 97cm 이다. 독성은 천태산(天泰山)에서 홀로 선정을 닦아 독성(獨聖)·독수성(獨修聖)이라 불린 나반존자(那畔尊子)를 일컫는다. 미황사 삼성각에는 독성탱화(獨聖幀畵)(삼성각 정면 우측)를 모신다. 그림은 천태산과 소나무·구름 등을 배경으로 희고 긴 눈썹을 드리운 스님이 왼손에 염주를 들고 앉아 있고 차를 달이는 동자와 여인이 등장한다. 화면 하단 오른쪽에 기록된 화기란을 보면 완도읍에 사는 이유복과 장순복이 아들을 얻은 기념으로 시주한 듯 하며 신미년 오월이라는 간지로 보아 1943년을 말한 것으로 여겨진다. 크기는 가로 112cm이고 세로 97cm 이다. 칠성은 수명장수신(壽命長壽神)으로 일컬어지는 북두칠성을 뜻하며, 본래 중국의 도교사상과 불교가 융합되어 생긴 신앙이다. 미황사의 칠성탱화(삼성각 정면)는 화면 중앙에 가득하게 치성광여래를, 그 좌우에 일광 월광보살을 그렸다. 하단 중앙에 기록된 화기란에 의하면 1943년에 제작된 것을 알 수 있다.
▲ 달마산은 해남군에서도 남단에 치우쳐 긴 암릉으로 솟은 산이다. 두륜산과 대둔산을 거쳐 완도로 연결되는 13번 국도가 지나는 닭골재에 이른 산맥은 둔덕같은 산릉을 넘어서면서 암릉으로 급격히 모습을 바꾼다.
이 암릉은 봉화대가 있는 달마산 정상(불썬봉)을 거쳐 도솔봉(421m)까지 약8㎞에 거쳐 그 기세를 전혀 사그러트리지 않으며 이어진 다음 땅끝 (한반도 육지부 최남단)에 솟은 사자봉(155m)에서야 갈무리하는 것이다.
달마산을 병풍 삼아 서록에 자리잡은 미황사 는 이 산과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다. 신라 경덕왕 8년(749)인도에서 경전과 불상을 실은 돌배가 사자포구(지금의 갈두상)에 닿자 의조 스님이 100명 향도와 함께 쇠등에 그것을 싣고 가다가 소가 한 번 크게 울면서 누운 자리에 통교사를 짓고 다시 소가 멈춘 곳에 미황사 를 일구었다고 한다.
어여쁜 소가 점지해준 절인 동시에 경전을 봉안한 산이라는 뜻이다.
▲ 해남까지 가서 해남 공용버스터미널에서 수시로 운행(직행 1시간 50분, 직통 1시간 30분 소요) 해남에서 미황사까지 운행하는 버스 1일 5회 운영 (해남교통전화 061- 533-8826)
▲ 송지면 중리 해안가는 주변의 바닷가 풍경이 매우 뛰어나다. 이곳은 또한 신비의 바닷길로 유명해 대섬까지 바닷물이 빠지면 많은 관광객들이 이곳에서 조개잡이 등으로 바다를 체험할수있다. 이러한 뛰어난 자연경관으로 인해 지난 2000년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MBC드라마 ' 허준 '이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이곳 주변의 뛰어난 경관과 함께 인기드라마 허준의 유배지 촬영장이 일약 인기관광지가 되어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기지 않고 있다. 이곳 송지면 중리 바닷가는 개발이 안된 순수한 어촌의 모습과 함께 천혜의 뛰어난 주변경관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허준 외에도 영화 '싸울아비'촬영 등이 이루어져 조그마한 어촌마을이 관광지가 되고있다.
▲ * 교통/입장료 해남까지 가서 해남 공용버스터미널에서 수시로 운행하는 송호리 땅끝마을행 완행버스를 이용한다. (2시간 40분 소요)
▲ <송호해수욕장> 송호해수욕장은 땅끝마을로 가기 전에 펼쳐저 있는 해남의 가장 대표적인 해수욕장이다. 송호(松湖)는 해변가로 노송이 무성하고 바닷가의 고운 모래와 맑고 잔잔한 물결이 호수 같다고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 송호 해수욕장은 모래가 곱고 수심이 얕아 아이들이나 가족들이 놀기에 좋으며 수백년된 해송(海松)이 풍치림(風致林)을 이루고 있다. 제방을 따라 약 1km가량 이어져 있어 송림 숲 아래에서 야영을 하기에 적합하다. 이 송림 숲은 현재 전라남도 기념물 제 14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수령이 약 2백년 가량 된 6백여그루의 소나무가 해안방품림의 기능으로 펼쳐져 있다.
자연적 조건만큼이나 편의시설 또한 깔끔하게 마련돼 있는데 샤워장, 세면장, 화장실 등 공공시설과 여러곳의 민박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다.
▲ 해남까지 가서 해남 공용버스터미널에서 수시로 운행하는 송호리 땅끝마을행 완행버스를 이용한다. 피서객이 많이 찾는 여름시즌에는 광주에서 송호리해수욕장까지 1일 24회 운행되는 버스가 갈두항까지 연장운행된다. (2시간 40분 소요)
▲ <땅끝마을 전망대> 이곳은 한반도의 최남단으로 북위 34도 17분 21초의 해남군 송지면 갈두산 사자봉 땅끝이다. 한반도 최남단 [땅끝]이라는 지리적 특수성으로 지역관광의 중심지로 주변의 수많은 수목과 기암괴석이 이루는 천혜의 자연적 경관과 더불어 남해안 관광의 구심적 역할을 수행하여왔다. 우항리 공룡화석지, 두륜산 대둔사 등과 더불어 해남의 주요한 관광명소로 인근의 송호해수욕장과 연계되어 관광지로서의 최적의 위치로 노령산맥의 줄기가 내뻗은 마지막 봉우리인 해발156.2m의 갈두산 사자봉 정상에 위치한다. 22km에 달하는 해안 관광도로가 연계되어 있어 다도해의 절경 이루며 대지의 북으로는 우거진 송림이 있고 동남서로는 시야의 막힘이 없는 드넓고 푸른 바다가 펼쳐지고, 남으로는 드넓은 대양의 시점으로서 흑일도, 백일도, 보길도, 노화도 등 다도해 섬들을 바라볼 수 있으며, 날씨가 쾌청한 날에는 추자도 및 제주도를 바라볼 수 있다. 또한 일출과 일몰을 한 장소에서 볼 수 있는 한반도 전역에서 유일한 곳이다.
구분 개인 단체 어른 1,000 700 군인&청소년 700 500 어린이 500 300 망원경 1회2분 500원
▲ <갈두산 봉수탐>
이곳은 육지의 최남단 갈두산(葛頭山,해발156.2m) 정상에 위치한 봉수대(烽燧臺)이다. 갈두산 봉수는 광무(光武) 10년(1906) 영암군(靈巖郡)에 속하였던 송지면(松旨面)이 해 남군(海南郡)에 이속(移屬)됨에 따라 편입된 지역이다. 이곳 갈두산 봉수대는『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동국여지지(東國與地志)』에 “동쪽으로 강진현(康津縣) 좌곡산(佐谷山, 현 북일 면 봉태산), 서쪽으로 해진군(海珍郡) 화산(花山, 현 해남 화산면 관두산(館頭山))에 준하여 설치”된 것으로 전하고 있으며, 조선초에 설치되어 고종(高宗)때 폐지(廢止)된 것으로 보인다.
봉수제도는 삼국시대(三國時代)부터 시작되어 조선시대(朝鮮時代) 세종(世宗)의 4군6진 개척과 더불어 확립되었다. 봉수는 낮에는 연기(煙氣), 밤에는 횃불로써 국가의 급한 소식을 왕에게 전달하는 동시에 해당지역에도 알려 적(賊)의 침략(侵略)에 대비했던 군사통신방법(軍事通信方法)으로 그 수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조선시대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평상시에는 1개의 홰, 적이 나타나면 2홰, 경계에 접근하면 3홰, 경계를 범하면 4홰, 접전하면 5홰를 올리도록 했다. 그러나 만약에 적이 침입했을 때 안개·구름·비바람으로 인하여 봉수가 전달되지 않을 경우에는 화포(火咆)나 각성(角聲) 또는 기(旗)로써 알리거나 봉 수군(烽燧軍)이 직접 달려가 알리도록 했다. 갈두산 봉수대는 당초 원형을 알아볼 수 없도록 파괴되어 있었던 것을 복원한 것으로 자연석을 이용하여 막돌로 쌓았으며 봉수의 직경은 4.5m내외이다. 봉수대의 하부는 바 위돌을 사용하고 상부로 올라갈수록 작은 돌을 이용하여 축조하였다.
▲ <모노레일> 주차장에서 전망대까지 모노레일이 설치되어 있어 또 다른 즐거움이 있다. 오르내리는 시간 : 6분,어른 - 4000원
▲ <땅끝탑비>
글 손광은 글씨 하남호
이 곳은 우리나라 맨 끝의 땅 갈두리 사자봉 땅 끝에 서서 길손이여 땅끝의 아름다운을 노래하게 먼 선 자락 아스란 백령도, 흑일도, 당인도 장구도, 보길도, 노화도, 한라산까지
수묵처럼 스며가는 정 한 가슴 벅찬 마음 먼 발치로 백두에서 땅끝까지 손을 흔들게 수천년 지켜온 땅 끝에 서서 수만년 지켜갈 땅 끝에 서서 꽃밭에 바람일 돗 손을 흔들게 마음에 묻힌 생각 하늘에 바람에 띄워 보내게
▲ <땅끝탑에서 바라다본 보길도>
▲ <땅끝마을전망대에서 바라다본 전망1> 전망대에 오르면 북으로는 달마산으로 이어지는 망집봉, 개재봉, 언제나봉 동이 첩첩산중을 이루고 동으로는 흰 물살을 가로지르며 보길도,백일도 등을 오가는 유람선이 드나드는 갈두항과 마을이 장난감처림 내려다보인다. 멀리로는 마치 수만 위의 수석처럼 바다 위에 있는 백일도,동화도,도군 상황봉이 바라보인다. 남으로는 흑일도 오른쪽 뒤로 노화도,보길도,넙도 등이 그림처럼 시야에 들어오며, 서쪽으로는 양도, 어룡도. 장구도 등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 <해남 땅끝 자연사 박물관> 세계적인 패류와 산호류, 어류, 포유류, 갑각류, 화석류, 파충류에서 육지 곤충에 이르기까지 25,000여점을 한곳에 전시해 명실공히 남도 최고의 종류를 갖춘 땅끝 해양자연사 박물관
전시품 ▷ 패류 1200여종 2만점 ▷ 산호류 50여종 1000여점 ▷ 어류 500여종 700여점 ▷ 갑각류, 화석 등 300여점 ▷ 곤충류, 파충류, 척추동물 등 1000여점 ▷ 현장학습관 : 각종 박제품과 전시물품 제작, 수리과정 등 을 살펴볼 수 있는 해양교실 운영
관람시간 계 절 요 일 시 간 하 절 기 월 ~ 일 AM9:30 ~ PM10:00 동 절 기 월 ~ 일 AM9:30 ~ PM 6:00
땅끝 해양 박물관 구 분 개 인 단 체 어 른 3,000원 2,500원 중/고등학생 2,000원 1,500원 어린이 1,000원 800원
▲ <상어관> 국내최고의 용상어를 비롯하여 톱상어 철갑상어등 다양한 상어와 파충류, 바다거북이 종과 가오리류가 전시 되어 있으며 크기는 대형 3m45cm서 부터 다양하게 표본박제 되어 있습니다.
▲ <고래상어> 고래상어는 어류중 가장 대형어류에 속하며 이빨은 퇴화되어 흔적정도밖에 없으며 멸치류 정도의 소형 어류를 주식으로 먹고 살며 성질이 매우 온순한 온대성 상어이다. 체장은 7m 80cm 입니다. 대양에서는 어류군단을 끌고다니는 대양의 어장으로 불리운다.
▲ <패류관> 패류관은 전세계바다에 서식한 바다의 보물인 희귀하고 다양한 고둥과 조개류가 천연칼라그대로1.200여종이상 수만점이 전시되었습니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 22교구 본사 대흥사(大興寺)는 근대 이전 대둔사와 대흥사로 불리었다가 근대 이후 대흥사로정착되었다. 해남 두륜산(頭輪山)의 빼어난 절경을 배경으로 자리한 이 곳 대흥사는 한국불교사 전체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도량으로서 특히 임진왜란 이후 서산(西山)대사의 의발(衣鉢)이 전해지면서 조선불교의 중심 도량이 되었다. 풍담(風潭) 스님으로부터 초의(草衣) 스님에 이르기까지 13 대종사(大宗師)가 배출되었으며, 만화(萬化) 스님으로부터 범해(梵海) 스님에 이르기까지 13 대강사(大講師)가 이 곳에서 배출되었다. 암울했던 조선시대의 불교 상황을 고려한다면, 이들의 존재는 한국불교의 오늘이 있게 한 최대 원동력과도 같은 것이었다. 대흥사는 호국불교(護國佛敎)의 정신이 살아 숨쉬고 있는 도량이다. 서산대사의 구국 정신은 이미 잘 알려진 내용이지만, 지금 경내에 자리하고 있는 표충사(表忠祀)는 개인의 수행에 앞서 국가의 안위를 보다 우선시했던 한국불교의 전통을 대표하는 전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매년 지역 내의 여러 학생들은 이 곳에 모여 호국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각종 행사에 참여해 오고 있다.
대흥사 경내와 산내 암자에는 중요한 성보문화재가 상당 수 존재한다.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국보 제 308호), 탑산사 동종(보물 제 88호), 북미륵암 삼층석탑(보물 제 301호), 응진전 삼층석탑(보물 제 320호), 서산대사 부도(보물 제 1347호), 서산대사 유물(보물 제 1357호), 천불전(전남유형문화재 제 48호), 천불상(전남유형문화재 제 52호), 용화당(전남유형문화재 제 93호), 대광명전(전남유형문화재 제 94호), 관음보살도(전남유형문화재 제 179호), 표충사(전남기념물 제 19호) 등의 지정문화재와 그 외 성보 문화유산이 대흥사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대변해 주고 있다. 조선중기 이후 수많은 선승(禪僧)과 교학승(敎學僧)을 배출하면서 한국불교의 중심도량으로 성장한 대흥사, 한국불교의 가장 대표적인 호국도량의 위상을 간직하고 있는 이 곳 대흥사는 지금도 성불(成佛)과 중생구제의 서원을 간직한 뭇스님들의 정진이 끊이지 않는 청정수행도량이다
▲ <일주문>
▲ <대흥사 부도탑> 부도탑안에는 보물 제1347호 서산대사부도탑이 건립되어 있다
▲ <천불전> 대흥사 천불전은 순조 11년(1811)에 불에 탄 뒤 2년 뒤에 다시 지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내부의 중앙에는 목조 본존불이 모셔져 있으며, 6년의 기간에 걸쳐 만들어진 천 개의 불상이 배열되어 있다.
▲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산8-1에 위치한 산이다. 두륜산(703m)은 해남의 영봉이며 여덟개의 높고 낮은 연봉으로 이루어진 규모있는 산이다. 북서쪽으로 경사가 완만하고 빼어난 경관을 이루며 산행코스가 험하지 않아 2~3시간 정도면 가련봉 정상에 오를 수 있다.
8개 암봉이 이룬 연꽃형 산세를 이루고 있다. 두륜산은 가련봉(703m)을 비롯해 두륜봉(630m), 고계봉(638m), 노승봉(능허대 685m), 도솔봉(672m), 혈망봉(379m), 향로봉(469m), 연화봉(613m)의 8개 봉우리로 능선을 이루었다. 이 여덟 봉우리는 둥근 원형으로, 마치 거인이 남해를 향해 오른손을 모아 든 듯한 형상이다.오른 손을 가지런히 펴고 엄지를 집게손가락에 붙인 다음 손가락 끝을 당겨 오목하게 물을 받을 듯 만들면 영락없는 두륜산의 지세가 된다.
두륜산은 대둔산이라고도 불렀는데 이는 산이란 뜻의 '듬'에 크다는 뜻의 관형어 '한'이 붙어 한듬→대듬→대둔으로 변한 것으로 풀이한다. 때문에 과거 대둔사는 한듬절로 불리기도 했다. 대둔사지에 의하면, 두륜산은 중국 곤의 '륜'과 백두산의 '두'자를 따서 두륜산으로 불리다가 나중에 두륜산으로 변했다고 한다.
두륜산행은 여러 고승 대덕의 발자취를 뒤따라 적당히 땀을 흘리며 산봉을 오르면 되는 산행이라기보다는 유유자적한 소요에 가까운 행위가 된다. 사계절 언제 찾아도 좋은 산이기도 하다. 이른 봄은 지천으로 핀 동백, 여름에는 울창한 수림과 맑은 계류가 가을에는 찬란한 단풍이 길손을 맞아준다.
▲ 유적지에는 선생이 시문에 열중하던 해남윤씨(海南尹氏) 종가(宗家)의 고택(古宅)과 녹우당(綠雨堂)(사적 제167호), 그리고 그의 선조 어초은사당(魚樵隱祠堂) 외에 고산사당(孤山祠堂) 및 추원당(追遠堂)이 있고 유물전시관(遺物展示館)에는 윤공재자와상(尹恭齋自畵像)(국보 제240호)을 비롯하여 해남윤씨가전고화첩(海南尹氏家傳古畵帖) (보물 제 481호), 윤고산수적관계문서(尹孤山手蹟關係文書)(보물 제 482호) 지정(至正) 14년 노비문서(奴婢文書)(보물 제 483호) 등 소중한 유물이 있다.
▲ <고산 유산도 유적 :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 이 곳은 조선조의 문신(文臣)이요, 국문학상 대표적인 시조시인으로 일컫는 윤선도尹善道(1587-1671) 선생의 유적지(遺蹟地)이다. 선생의 자(字)는 약이(約而), 호(號)는 고산(孤山)또는 해옹(海翁)이다.
선생은 광해(光海)4년(1612)에 진사(進士)되고, 4년후 성균관유생(成均館儒生)으로서 권신(權臣)의 횡포를 지탄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벽지에 유배되었다. 광해 15년에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자 석방되어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에 취임하였으나 곧 사직하고 이곳 향리(鄕里)에서 학문에 정진하였다.
인조6년(1628) 별시문과(別試文科)의 초시( 初試) 에 장원한 후 봉림(鳳林)과 인평(麟坪)을 모시는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되고 한성서윤(漢城庶尹)과 예조정랑(禮曹正郞)을 역임하는 등 수차에 걸쳐 나라에 중용되었다. 병자호란(丙子胡亂) 후에는 주로 완도(莞島)의 보길도(甫吉島)와 해남(海南)의 수정동(水晶洞) 및 금세동(金鎖洞)에 은거하여 자연에 들어 원림(苑林)을 경영하고 산중신곡(山中新曲)과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등 불후(不朽)의 명작을 이루어 조경문화(造景文化) 및 국문학(國文學)의 발전에 큰 공을 남겼다. 그 사이 효종(孝宗)의 부름으로 벼슬에도 나아갔으나 당쟁으로 다시 유배당하는 등 많은 파란을 겪다가 현종(顯宗) 12년에 85세로 졸(卒)하였는데 숙종(肅宗)원년에 신원되어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종되고 시호를 충헌(忠憲)이라 하였다.
이곳 유적지에는 선생이 시문에 열중하던 해남윤씨(海南尹氏) 종가(宗家)의 고택(古宅)과 녹우당(綠雨堂)(사적 제167호), 그리고 그의 선조 어초은사당(魚樵隱祠堂) 외에 고산사당(孤山祠堂) 및 추원당(追遠堂)이 있고 유물전시관(遺物展示館)에는 윤공재자와상(尹恭齋自畵像)(국보 제240호)을 비롯하여 해남윤씨가전고화첩(海南尹氏家傳古畵帖) (보물 제 481호), 윤고산수적관계문서(尹孤山手蹟關係文書)(보물 제 482호) 지정(至正) 14년 노비문서(奴婢文書)(보물 제 483호) 등 소중한 유물이 있다.
뒷산 중로에 있는 비자나무숲(천연기념물 제 241호)은 약 500년전 선생의 선조가 이루어 놓은 수림(樹林)으로 알려져있다
▲ <녹우당> 사적 제 167호로 지정된 해남 윤씨의 종가 연동 녹우당은 호남지방 사대부의 대표적인 가옥으로 고산 윤선도가 시작에 정진했던 곳이다. 해남의 상징적인 고건축물의 오랜 역사의 흔적은 5백년된 늙은 은행나무에서부터 시작된다. 녹우당도 이 은행나무 잎이 바람에 떨어지는 모습이 비오는 것과 같다하여 녹우당이라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그 동안 땅끝 해남을 아끼고 사랑 해 주시고 찾아주신 국민 여러분들과 고향 향우 여러분께 고개 숙여 인사 올립니다.
저는 1975년부터 34년동안 해남군과 우리나라 관광지,풍물,역사등을 꾹내뿐만 아니라 널리 해외에까지 소개 해온 민간외교관 김은식 입니다.
1988년에는 130여개국의 친구와 저명인사들에게 5,000년의 아름답고 찬란한 문화재와 '서울올림픽'을 알려 파키스탄 지아울하크 대통령으로부터 친서와 국빈초청을 받은 바 있습니다.
1986년과 1988년 두 차례의 TV방송과 지역 신문에 수차에 걸쳐 소개 된 바 있습니다.
평소 땅끝 해남인 고향을 아끼는 마음에서 땅끝 해남에서 생산되는 쌀,잡곡,절임배추,해남황토고구마,해산물,전통된장,전통고추장,김부각,뽕잎 차,녹차,연잎 차등 해남에서 생산되는 농.수산물을 판매 함으로써 해남군 농민들에게 보탬이 되고 힘을 실어 드리기 위해 인터넷을 통해 구매 가능한 농.수산물 제품은 다 취급 판매 할 예정 입니다.
앞으로 정말 정직하고 성실하게 고객님들의 입맛에 맞게 최선을 다해 정진하고 노력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