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고택ㅡ>서산마애불ㅡ>보원사터 5층석탑ㅡ>개심사ㅡ>간월도 간월암
추사 김 정희 선생은 조선 후기 대표적인 실학자이자 서예가로,
'만인보', '한양지', '난중일기'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업적을 남겼다.
그의 생가인 예산 추사고택은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1786~1856)가 여덟 살 무렵까지 머물던 곳으로,
조선 후기 양반 가옥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한국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추사 집안은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한 당대의 세도가로,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가 추사의 11촌 대고모였다고 하니 그 위세를 짐작할 만하다.
그러나 개인의 행복이 집안의 영광과 늘 같은 것은 아니어서,
그는 여덟 살 때 친부모와 헤어져 큰아버지에게 양자로 보내지는 아픔을 겪는다.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는 삶의 불가피성은 그의 전 삶을 관통하는 운명 같은 것이었다.
어머니와 첫째 부인을 아직 어린 가슴에 묻어야 했고, 양아버지와 스승 박제가의 죽음도 어린 나이에 감내해야 했다.
이런 개인적인 아픔은 성인이 되어서까지 이어져,
입신한 뒤에는 정치적 핍박으로 유배지를 떠도는 파란 많은 인생을 꾸려야 했다.
<세한도>에는 그의 쓸쓸한 삶이 오롯이 그려져 있다.
추운 겨울, 한기 서린 한 그루 소나무로 그려진 그의 고독한 삶이 그토록 높은 평가를 받았다는 사실은
예술이 가지는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남쪽을 보고 앉은 사랑채 앞에는 지나치기 쉬운 볼거리가 하나 있다.
'石年(석년)'이라고 쓰여 있는 돌기둥이다. 돌과 시간이 합쳐지며 묘한 힘을 느끼게 한다.
'石年'이 추사의 글씨로 알려져 있지만, 돌기둥의 아래쪽에 그의 서자인 김 상우의 이름이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돌기둥은 그의 아들 때에 세워졌을 가능성이 많다.
그러니 글씨도 아들 김 상우의 것이 아닐까 한다. 부전자전의 실력을 보여 준다.
아무튼 여기에 해시계를 올려놓고 하루의 시간을 가늠했을 것이다. 실사구시(實事求是)를 내걸었던 추사의 고택답다.
추사고택이 현재 자리에 있게 된 데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추사의 증조부로 영조의 사위였던 김 한신이 주변 신료의 질시를 받아
서울에 있던 집을 옮겨 올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고,
두 번째는 영조가 직접 용궁리 일대의 땅을 하사하고 충청도의 53개 군현에서
한 칸씩의 건립 비용을 염출해 53칸의 집을 지어 주었다는 주장으로 뒤의 의견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아무튼 건물이 지어진 영조 연간은 성리학의 위세가 그래도 아직 쟁쟁할 때였다.
그래서인지 안채에서는 성리학자의 고집이 느껴진다.
ㅁ자 형태의 집 평면만이 아니라 지붕, 벽체가 거의 완벽한 대칭을 이룬다.
그러나 여러 가지 방법으로 대칭이 주는 긴장감을 해소하고 있어서 부분적으로 살펴보면 집 어디에서도 쉽게 대칭을 찾을 수 없다.
중정을 중심으로 대청이 있지만, 좌우로 방을 엇갈리게 배치하고 광창(光窓, 빛을 들이는 창)이나 문의 위치에 변화를 주고 있다.
성리학을 수용하여 ㅁ자집을 채택했지만, 생활을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瑞山 龍賢里 磨崖如來三尊像.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에 위치한 바위에 새겨진 삼존불상(마애불)으로 백제의 불상 조각 작품으로 추정한다.
세 불상이 모두 입가에 오묘한 미소를 머금어
흔히 백제의 미소라 불리는 불상으로 국보 제84호로 지정되었다.
태안 동문리 마애삼존불입상과 함께 백제를 대표하는 불상으로,
태안 마애여래삼존상보다는 조금 더 이후 시기 작품으로 추정한다.
본래 바깥세상에는 알려지지 않은 잊힌 불상이었다가 1959년에서야 세상에 알려졌다.
삼존상이 있는 서산 가야산은 백제시대부터 개심사 등 여러 절이 창건된 일대에서는 유명한 산이다.
현재는 절터만 남은 사적 제316호 보원사지(普願寺址)도 가야산에 있는 오래된 절 터이다.
보원사는 여러 기록과 현재 남아있는 유물들을 보면 백제 때부터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상당 기간 융성했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와 쇠퇴한 절이다.
학자들이 절 터를 발굴조사하던 1959년 4월 어느 날,
국립부여박물관 관장 홍 사준은 인근 마을 주민들에게 혹시 절에 관련하여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는지,
산에서 부처님이 새겨진 바위나 석탑 따위를 본 적이 있는지 물어보고 다녔는데.
한 주민에게서 인(印)바위에 가면 웃는 산신령 조각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당시 그 주민은 삼존상이 산신령과 그의 두 부인들이고,
우측에 있는 부인이 앉아서 턱을 괴고 놀리자 좌측에 있는 부인이 화가 나서 돌을 쥔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삼존상을 확인한 홍 사준은 이 사실을 학계에 보고했고,
이렇게 해서 1500년간 산 속에 있던 삼존상이 세상에 드러났다.
높이 10 m가 넘는 거대한 암벽을 깎아 만든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은
풍부한 입체감과 독특한 스타일로 유명하다.
삼존상은 높이 2.8 m 석가여래입상을 중앙에 두고 양쪽에 높이 1.7 m 협시보살을 두었는데
우측의 보살은 보통의 보살입상이지만 좌측의 보살은 특이하게도 반가사유상의 형식으로 조각되었다.
반가사유상은 6~7세기 무렵 한반도에서 크게 유행하면서 불상으로 많이 제작되었지만
마애불 중에서는 사례가 매우 드물다.
보원사지 5층석탑은 보물 제104호로 높이 900㎝이고 기단은 2중기단으로
상층에는 팔부중상이 하층에는 사자상이 얕은 부조로 조각되어 있다.
상층기단 위에는 별석을 끼워 5층의 탑신부를 받치고 있으며,
초층 탑신에는 우주와 문비가 모각되어 있다.
2층 이상의 탑신은 체감이 완만하며, 옥개석은 넓고 끝이 반전되어 백제석탑의 단면을 볼 수 있다.
상륜부에는 찰주가 남아 있으나 부재는 노반만 남아 있다.
탑의 형식으로 보아 고려 초기에 보원사가 중건될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마음을 바꾸라는 개심사가 아닌 마음을 열라는 뜻의 개심사(開心寺)는 충남 4대 사찰중의 하나로써
654년(의자왕 14) 혜감(慧鑑)이 창건하여 개원사(開元寺)라 하였다.
1350년(충숙왕 2)처능(處能)이 중창하고 개심사라 하였으며, 1475년(성종 6)에 중창하였다.
그 뒤 1740년(영조 16) 중수를 거쳐 1955년 전면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웅전의 기단만이 백제 때의 것이고 건물은 조선 성종 6년(1475)에 산불로 소실된 것을
조선 성종 15년(1484)에 다시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보물 제143호인 대웅전은 창건당시의 기단 위에 조선 성종 15년(1484)에 중창한 다포식과
주심포식을 절충한 건축양식으로 그 작법이 미려하여 건축예술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1963년 보물로 지정된 대웅전을 비롯하여 1984년 충청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명부전,
1997년 충청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심검당, 무량수각(無量壽閣)·안양루(安養樓)·팔상전(八相殿)·객실·요사채 등이 있다.
가람배치는 북쪽의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심검당과 무량수각의 당우를 놓고 그 전방에 누각건물을 배치하고 있어,
조선 초기의 배치법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이 밖의 문화재로는 대웅전 앞의 오층석탑과 청동 향로가 있다.
솔직히 개심사는 동양에서 유일하게 핀다는 청벚꽃이 유명하고 ~
영주 부석사 배흘림 기둥보다는 조금 작은 규모지만 배흘림 기둥을 볼 수 있는 절이다.
(참고: 배흘림기둥은 기둥의 중심부가 상·하부에 비해 더 굵어 중심부에서 위, 아래로 갈수록
점점 굵기가 얇아지는 형태의 기둥으로 서양권에서는 엔타시스(entasis)라고 한다.
배흘림기둥은 일반적으로 아래에서 1/3 지점이 가장 두꺼우며, 사람의 착시현상을 보정하여 주는 효과가 있고
기둥이 지붕을 탄력있고 안정적으로 받혀주는 듯하게 보이는 효과를 준다고 한다.
한국의 경우 고구려의 고분벽화에서 배흘림기둥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으며,
부석사 무량수전, 수덕사 대웅전 등의 목조 건축물에서 배흘림 양식을 볼 수 있다고 한다.)
간월암은 부석면 간월도리에 위치한 작은 암자로
조선 초 무학대사가 창건하였으며 송 만공 대사가 중건하였다고 한다.
다른 암자와는 달리 간조시에는 육지와 연결되고 만조시는 섬이 되는 신비로운 암자로,
만조시에는 물 위에 떠 있는 암자처럼 느껴지며 주위 자연경관과 옛 선조들의 숨결을 함께 느낄 수 있는 고찰이다.
첫댓글 역시 이사도라 대장님 답게 미리 사전 예습 공부? 자료도 올려주시고~~
수고에 감사드려요 ~^^
노래 너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