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비로소 왜 이 소설을 두고, <음향과 분노>로 노벨상을 수상한 월리엄 포크너가, "현대문학의 최고봉"이라고 상찬(賞讚)했는지를 알 것 같다. 홀든 콜필드! 방황하는 청소년이라면 누구든지 자신을 홀든과 동일시(同一視, identification)하고 싶을 정도로 이 소설은 10대의 심리를 정치(精緻)하게 묘사하고 있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고등학교에서 퇴학당한 홀든이 스펜서 선생의 집에서 상담을 받는 것으로 시작된다. 나는 바로 이 장면에서부터 홀든에게 매료되기 시작했다. 앙상하게 마른 가슴이 다 내보일 정도로 대충 걸쳐진 스펜서 선생의 목욕가운은 홀든을 무척이나 거북스럽게 만들었고, 당사자 앞에서 굳이 큰소리로 엉망인 시험 답안지를 반복해서 읽는 그의 행위는 홀든을 미쳐버리게 할 정도로 충분히 가학(加虐)적이었으며, 선생님의 입장에서는 준엄한 충고겠지만 학생의 입장에서는 그저 지겨운 잔소리에 불과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읊어대는 그의 모습에 홀든은 그만 질려버렸다. 도저히 못 견디겠다. 어서 이 곳을 빠져나가고 싶다 - 아마 기성세대의 구태의연함에 그런 것이리라.
기숙사를 떠나기 전에 홀든은 우연히 룸메이트인 스트라드레이터가 제인 갤러허와 데이트를 할 것이라는 말을 듣는다. 참고로 제인 갤러허는 홀든이 알고 있던 여자로 호감의 대상이었다. 언제나 사내들이 그러하듯, 홀든은 그녀와의 문제 때문에 룸메이트와 육체적으로 대판 싸운다. 물론 홀든의 일방적인 패배였지만 말이다. 소설 내내 제인 갤러허가 스트라드레이터와 성관계를 가졌는지, 그리고 집에는 잘 들어갔는지를 걱정하는 홀든의 소심한 모습에서 "나는 홀든처럼 소심하지 않다." 라고 자신 있게 외칠 사람 몇이나 있으랴. 홀든의 순수함에 영화 <말레나>의 그 소년이 오버랩 되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청소년기의 특징을 크게 두 가지 관점에서 본다면, 하나는 신체적인 성숙으로 대표되는 성(姓)에 대한 관심이고, 다른 하나는 정신적인 영역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하는 자기 정체성(正體性)의 추구이다. 당연히 우리의 홀든도 예외는 아니었다. 여자에 대한 관심이 한껏 고조되어 있던 홀든은 호텔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모리스로부터 한 창녀를 소개받는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홀든은 막상 그녀와 맞닥뜨리자, 돈은 지불하겠으니, 성관계는 관두고 그냥 이야기만 하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되돌아온 것은 그녀의 냉담한 거절뿐이었다. 그 후 홀든은 설상가상으로 그녀와 모리스에게 사기까지 당한다. 무려 5달러씩이나! 오 불쌍한 홀든, 돈을 뺏긴 것도 모자라 모리스로부터 구타까지 당했으니 그 억울한 심정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으리.
사회에 진출하기 전, 오랜 기간 - 중, 고등학교가 이 기간에 속함 - 주변인으로 남아있어야 하는 청소년에게 흔히 찾아오는 것이 소외감이다. 소외감은 마치 바늘과 실의 관계와 같아 항상 외로움을 동반한다. 아마 소외감의 다른 이름을 외로움이라 명명(命名)해도 큰 무리는 없으리라. 그런 의미로 본다면 위에서 언급한대로 홀든이 창녀와 관계를 맺지 않은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녀와 대화를 함으로서 조금이나마 그 무렵의 외로움을 달래고자 한 것이 하나의 이유였음에는 틀림없다.
이 소설은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홀든이 화자(話者)이다. 홀든의 눈에 비쳐진 주위 친구들과 어른들은 위선으로 완전군장(完全軍葬)하고 있고, 세상은 온통 허위의식으로 뒤범벅이 된 곳이다. 당연히(?!) 그에 대한 불만을 한참 동안이나 늘어놓고 있는 홀든에게, 우리의 깜찍한 피비는 반문한다 - 오빠는 너무 싫어하는 게 많아, 혹시 좋아하는 건 없어? 홀든은 누구한테도 보여주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러운 여동생 피비에게 이렇게 답한다. - 어른들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호밀밭에서 재미있게 놀고 있는 아이들이 앞뒤 생각 없이 마구 달려도 절벽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보호해주는 일을 온종일 하고 싶다고. 그게 좋다고.
이쯤에서 눈치 빠른 분들은 내가 왜 앞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부분을 아무 설명 없이 그냥 건너뛰었는지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렇다! 홀든은 자기 정체성을 이 희망 없고 위험천만한 세상으로부터 아이들의 순수함을 지켜주는 "호밀밭의 파수꾼"으로 설정했던 것이다.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지독한 냉소로 일관하던 홀든이 저런 말을 했을 때 솔직히 적잖이 놀랐다. 서늘한 감동이 느껴졌다고나 할까.
물론 많은 청소년들이 홀든과 같은 시절에는 결코 현실과 양립할 수 없는 이상을 꿈꾼다. 홀든의 소망 역시 대단히 비현실적이다. 언젠가는 아이들도 기성세대의 질서와 불합리한 현실에 "투항"할 것이고, 그들의 순수함도 퇴색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지만 우리도 한번쯤은 홀든이 품었음직한 그 소망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 그런 고민이 없는 사회는, 끝내 유토피아는 도래하지 않을 거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유토피아를 추구하지 않는, 그런 "닫힌 사회"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출해 평생 혼자 살겠다는 홀든의 "결연한 쿠데타"도 결국 너무 귀여워 깨물어주고 싶은 여동생 피비의 순수함 앞에서 맥없이 "진압"당하고 만다. 모든 것에 지극히 냉소적인 홀든도 사랑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나 보다. 어쩌면 이런저런 공감대들이 나를 포함한 전세계 독자들로 하여금 홀든을 좋아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원동력인지도 모른다. 새삼 작가의 탁월함이 느껴진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여느 대문호(大文豪)들의 그것처럼 삶에 대한 끝 모를 통찰력으로 나를 기죽이지도 않았고, 그들이 향유하고 있는 깊은 관념으로 나를 압도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친구들에게 흔히 들을 수 있는 매우 흥미로운 경험담처럼 내용이 가볍고 재미있었으며, 근엄하지도 딱딱하지도 않은 매우 쉬 읽히는 간결체에 힘입어 빠르게 읽어 내려갈 수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넘긴 다음에도 아주 긴 여운이 남는 것을 보면 그리 호락호락한 책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혹시 지금 당신은 세상을 향해 조롱과 냉소를 퍼붓고 싶은가. 가슴속에서는 세상에 대한 반항이 질풍노도(疾風怒濤)와 같이 일고 있지 않는가. 세상만사 뜻대로 되는 것 하나도 없다고 고래고래 고함이라도 외치고 싶은 심정인가. 만약 그렇다면 당신은 홀든과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2001/11/28 (jty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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