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사상에서 가져온 목원대학교 김흥수 명예교수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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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근대적 자유와 기독교(2)
글 싣는 순서
1. 종교의 자유
2. 종교의 자유에서 인권으로
3. 통일 운동과 반공주의
* 이 글은 필자가 2023년 2월 18일 네이버문화재단의 열린연단(자유와 이성)에서 행한 강연 원고 전문이다. 이 강연에서는 자유의 관점에서 우리나라 기독교의 역사를 살펴보고 있다. 분량상 세 차례로 나누어서 싣는다.-편집자
종교의 자유에서 인권으로
근대 인권 운동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절망으로부터 탄생했다.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으며, 전쟁터와 강제 수용소에서는 그 어디에서도 자유와 평등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 절망의 세계에서 1948년 모든 사람의 자유와 평등한 권리와 존엄을 말하는 〈세계인권선언〉이 만들어졌다. 1948년 〈세계인권선언〉에 이어 ‘자유권’으로도 불리는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 규약〉(International Covenant on Civil and Political Rights)이 생명권, 자결권, 개인의 자유, 사생활 보호, 이동의 자유 등을 포함한 새로운 인권 체제를 강화했다. 이 규약은 개인이 지닐 수 있는 여러 시민적, 정치적 권리를 국제적 차원에서 보장하기 위한 것으로, 1966년 12월 채택되었으며 1976년 3월 발효되었다. 〈세계인권선언〉과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 규약〉은 종교 자유의 중요성을 상기시켰다.(“모든 사람은 사상 양심 및 종교의 자유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 그러나 여기서 종교의 자유는 가장 중요한 개인의 권리로 간주되지 않고 언론과 출판의 자유, 인종과 성별 평등 같은 문제들이 더 중요해졌다. 이런 경향은 1960년대 후반부터 나타났다.1
인권 중시 경향은 1940년대 이후 세계 개신교를 이끌어온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에큐메니컬 운동에서도 나타났다. 1970년 전후로 에큐메니컬 운동에서 교회들은 제3세계가 직면한 문제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1970년대 중반부터는 해방신학의 영향하에서 종교 자유보다는 사회적, 경제적 권리에 더 큰 관심을 가졌다.2 WCC의 이런 변화는 제3세계에서의 군사독재 정권의 부상, 해방신학의 등장, 세계대전의 상호 작용에서 비롯되었다. WCC는 1973년 칠레 쿠데타로 발생한 1만여 명의 정치적 난민을 국외로 이동시키는 구호 활동에 참여한 후 1974년에는 국제앰네스티(Amnesty International)와 함께 인권 운동의 지원에 나섰다. 이 시기에 추방된 라틴아메리카계 사람들이 WCC에서 일자리를 잡았다. 아르헨티나의 변호사 레오폴도 닐루스와 우루과이의 감리교 해방신학자 훌리오 데 산타 아나(Julio de Santa Ana, 1934-2023)는 1970년대 초부터 WCC의 스태프가 되었으며, 브라질의 교육자 파울로 프레이리도 1970년대에 WCC에서 아프리카 지역의 교육 고문으로 활동했다. 이들 중에서 한국교회도 여러 번 방문한 레오폴도 닐루스와 미국인 드웨인 C. 엡스는 여러 차례의 회의, 특히 1974년 개최된 ‘인권과 기독교의 책임’(Human Rights and Christian Responsibility) 회의를 통해서 남미의 의견이 반영된 WCC의 인권 개념을 재정립했다.3 1975년 가을 나이로비에서 열린 WCC 총회는 ‘인권과 기독교의 책임’ 회의에서 도출된 인권 개념을 받아들여 인권 침해의 근본 원인을 정치적·경제적 구조에서 찾았다. 그리고 인간을 위해 일한다는 것은 부당한 구조가 없는 사회를 위해 일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를 통해 WCC는 개인의 존엄성과 사회정치적 구조의 문제를 융합했다.4 나이로비 WCC 총회에 참가한 한국 대표들은 WCC에 “제3의 흐름”이 뚜렷해진 것을 발견했다.5
WCC 인권 운동의 이러한 흐름 속에서 WCC 나이로비 총회가 열리기 직전, WCC는 1975년 11월 제네바에서 한국 문제에 관한 긴급 모임을 소집, 한국교회의 민주화 운동과 인권 운동을 지원하는 방안을 협의하였다. 여기서 한국 대표들은 ‘한국민주화기독자동지회’를 결성하고 김재준 목사를 의장으로 선임하였다.6 그 후 한국민주화기독자동지회는 WCC의 인권 운동과 한국교회의 민주화 운동을 연결해주는 중요한 고리가 되었다. 국제앰네스티는 정치적 콘텍스트에 대한 관심을 최소화하면서 개별 수감 사례에 초점을 맞췄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WCC는 해방신학의 접근 방식을 통해 인권 침해의 사회적 근원에 대해 주의를 기울였다.
인권에 대한 관심은 한국교회에서도 1970년대부터 나타났다. 「기독교사상」(1961년 2월)에서는 1960년대 초반 공산주의와의 대결의 새로운 차원이 논의되었는데, 필자들(강원용, 박형규, 박상증)은 “공산주의와 대결하는 동시에 우익 독재나 독점 자본주의와도 대결”하려면 한국 사회에서의 자유와 정의의 구현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1970년대에 더욱 확산되어 갔다. 기독교 사회 운동 세력들은 평화적 대결에서 승리하려면 우선 남한 사회의 자유와 인권의 보장, 그리고 사회 정의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으며, 그래서 민주화와 인권 수호가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교회가 한국 사회의 이런 문제들에 직접 뛰어든 것은 박정희 정부의 유신 헌법과 함께 찾아왔다. 1973년 5월 ‘한국 기독교 유지(有志) 교역자 일동’으로 발표된 〈1973년 한국 그리스도인 선언〉은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가 유대 땅에서 눌린 자들, 가난한 자들, 멸시받는 자들과 함께 사신 것처럼 우리도 그들과 운명을 같이 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라고 다짐하고 한국의 현 통치 세력이 “양심의 자유와 신앙의 자유를 무너뜨리고 있”는 현실을 고발하였다. 이 선언은 기독교 반체제 운동의 신학적 근거이자 행동 원리가 되었다.
이 선언 발표 한 달 전 서울 남산에서 기독교 민주화 운동의 시발점이 된 부활절 연합예배가 있었다. 남산음악당은 1970년대 들어 종종 유신 정권에 저항하는 장소로 이용되고 있었다. 7월 6일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공안부의 발표에 의하면, 4월 22일 10만 명의 신도들이 참석한 가운데 남산음악당에서 열린 부활절 예배 때 구속자들은 군중 속에서 “민주주의의 부활은 대중의 해방이다”라는 등의 삐라를 뿌렸다. 그 일로 6월 말부터 박형규 목사 등 4명이 내란 음모 혐의로 구속되었다. 이 사건은 유신 체제 이후 군사 정권에 도전한 첫 번째 사건이었다. 8월 1일에는 미국교회협의회, WCC, 아시아기독교협의회 대표단 4명이 서울에 도착, 당국의 감시하에서 이 사건을 조사하였다. 이 사건은 이렇게 세계 교회가 한국교회의 인권 운동, 민주화 운동과 연대하는 첫 계기가 되었으며, 그 후 기독교 인권 운동을 이끈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구속자들의 인권에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도 되었다. 이것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인권 운동이 처음부터 정치적 자유권에 집중하였음을 보여준다.7 이 사건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총무 김관석)는 11월 비밀리에 ‘신앙과 인권’ 협의회를 개최했다. 한국교회에서 인권을 주제로 열린 첫 세미나였다. 여기에는 발표와 설교를 맡은 김재준(설교), 유석종(언론과 인권), 김용준(학원과 인권), 이태영(여성과 인권) 외에도 언론계, 학계, 노사, 여성, 교계, 법조계에서 34명이 참석하였다. 여기서 발표한 인권선언은 인권 확립을 위해 교회가 투쟁에 나설 것을 다짐한 것으로 인권을 “하나님이 주신 지상의 가치”, “개인의 생존의 근거이며 사회발전의 기초”라고 주장하였다.
12월에는 서울YMCA 강당에서 에큐메니컬현대선교협의회 주관으로 인권 관련 개신교와 천주교 연합예배가 있었다. 이 예배에는 신구교 신도 500명이 참석하였으며, 김수환 추기경이 강론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김관석 총무가 강연을 맡았다.8 이 강연에서 김관석은 정치적 인권 문제가 시급하다면서 “자유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싸워서 빼앗는 것”이라는 점, 인권에 한계가 있다면 그 한계는 정부가 정하는 것이 아니며 “내가 애써서 피땀을 흘리면서 얻은 자유가 바로 우리 자유의 한계”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김관석의 말은 인권의 범위와 내용을 누가 규정하느냐 하는 것인데 정부 권한이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이 강연에서 김관석은 경제적 상황을 이유로 개인의 자유가 제한될 수 없다면서 피의 대가로 얻은 우리의 자유는 결코 GNP나 외화로 환산할 수 없는 우리의 본래적인 자유라는 점도 역설하였다. 김관석은 이렇게 정부 측의 자유와 경제 문제의 연계를 차단하려고 했다.9 김관석의 인권론은 그 시기 WCC의 선교론 및 인권론과도 무관한 것은 아니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1974년 5월 “인권의 유린을 방지 또는 제거하는 책임”을 수행하기 위해 인권위원회를 창설하였다. 박정희 정권은 반공 이데올로기를 이용하여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는 경우가 많았고, 민주화 운동 진영에서는 이를 인권 운동으로 대응했다. 이 과정에서 1974년 12월 국무총리 김종필이 기독교계의 인권 이해를 비판하고 나섰다. 김종필에 의하면, 어떤 사람들은 자유의 제한은 있을 수 없고 인권은 천부라고 말하지만, “자유에도 분수에 맞는 제한이 있어야 하며 무제한의 자유는 허용될 수 없다.”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인권은 천부적인 것이고, 투쟁을 통해 획득되며, 인권의 보장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반공의 명분이 없으며, 인권의 존엄성은 개개의 인간에게 주어지고, 현재 한국에서 가장 시급한 인권의 문제는 정치적·종교적 자유의 확립이라고 반격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가 조직된 직후 한국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조직되었다.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원주 교구장 지학순 주교가 구속되자 1974년 9월 조직되었으며, 명동성당에서 열린 창립 기도회에서 유신 헌법 철폐와 민주 헌정 회복, 긴급조치의 전면적인 무효화, 국민의 생존권과 기본권 존중, 서민 대중을 위한 경제 정책 확립을 요구하는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1978년 이후에는 개신교와 천주교를 포함한 기독교계의 인권 운동이 시민사회와의 연대로 확장되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정치적 인권 운동은 온건한 사회 개혁 노선이었다. 사회학자 이영숙에 의하면, 도시산업선교(Urban-Industrial Mission)는 1970년대 초부터 노동조합의 결성과 노동자 교육, 노동자들의 단체 행동을 지원하였는데, 이것 역시 노동 조건을 개선하고 폭발 직전의 노사 간 갈등을 해결하려고 시도한 중간자의 역할로 특징지을 수 있다.10 1978년 9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발표한 〈산업선교 신학 선언〉은 도시산업선교가 산업화 사회에서 짓밟힌 인권을 회복시키며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한 데나리온의 계약(마 20:13)을 이행하도록 하는 일이라고 천명했다.
한국 사회에서 중간 집단의 역할에 주목한 이는 크리스챤아카데미의 강원용 목사였다. 그는 크리스챤아카데미의 대화 운동과 중간 집단 교육을 통해서 우리 사회의 양극화가 해소되고 민주주의가 점진적으로 발전하기를 기대했다. 1970년대 초부터 진보적 개신교 지도자들은 대중 사회의 정치에 관한 윌리엄 콘하우저의 이론에 영향을 받아 대중의 이익을 증진시키기 위한 중간 조직의 형성이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었는데,11 강원용이 이 일을 주도해나갔다. 그는 좌우 진영으로 극심하게 양분된 해방 공간에서도 김규식과 여운형을 중심으로 좌우 합작 운동이 추진될 때 조선기독교청년회전국연합회(회장 김규식)의 정치부장으로 활동했는데, 이 단체는 김규식의 지지 기반이 된 단체였다. 1946년 6월 당시 남한 단독 정부를 반대하고 납북 협상을 공개적으로 지지한 기독교 단체는 조선기독교청년회전국연합회가 유일했다.
이 시기 등장한 선교의 자유는 신앙 혹은 양심에 기초한 정치적 저항과 관련해 등장했다는 점에서 기존의 종교의 자유와 달랐다. 선교의 자유는 확대된 선교 개념, 즉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로부터 나왔다. 이 용어는 독일 신학자가 만든 말이다. 전통적으로 선교란 교회가 기독교를 다른 종교의 신자나 불신자들에게 전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교 개념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일들에 직접 개입하시므로 우리도 세상에서 일어난 일들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개념하에서 선교의 목표가 복음 전도에서 사회 정의와 평화로 바뀌었다. 하나님께서 정의, 평화, 창조질서의 보전과 회복을 지향하듯이 우리도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1972년 12월 방콕에서 이런 신학이 논의되었다. WCC가 주최한 방콕 대회는 선언문을 통해 구원이 경제적으로는 착취에 맞서서 경제적 정의를 이루기 위한 투쟁 가운데서, 정치적으로는 정치적인 압제에 대항하여 인간의 존엄성을 찾기 위해 투쟁하는 가운데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강조했다. 한국교회에서는 이때 ‘사회 구원’이란 용어가 많이 사용됐지만, 그 용어는 이미 예수교서회에서 간행된 번역서 『신약사회론』(New Testament Sociology, 1928)에서 쓰였으며, 한국 기독교에서 본격적인 사회 운동이 시작된 것은 1920년대부터이다. 이 시기에 사회복음이라는 것이 소개되고 있었는데, 사회복음 주창자 월터 라우센부쉬의 『예수의 사회훈』(Social Principles of Jesus)이 한국어로 번역된 것은 1930년이었다. 라우센부쉬의 생각에 “경제적 민주주의 없는 정치적 민주주의는 돈을 걸지 않는 약속어음이며, 고기 없는 냄비이며, 실체 없는 형식”이었다. 사회복음이 주로 산업 사회의 노동자에 관심을 기울였다면, 하나님의 선교론은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 영역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한국교회는 이 선교론에 입각하여 1970년대부터 민주화 운동, 인권 운동, 노동 운동을 해왔다.
하나님의 선교 개념과 더불어 한국교회의 현실 참여에 영향을 미친 것은 서구와 남미 교회들에서 형성된 정치신학과 해방신학, 그리고 한국의 민중신학이었다. 개신교 진영에서 정치신학이란 말을 쓴 사람은 위르겐 몰트만이었다. 그의 『희망의 신학』(현대사상사, 1973),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한국신학연구소, 1979) 등이 번역되었다. 『희망의 신학』은 현재에 혁명을 일으키는 미래를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그리스도교는 단지 부록에서만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리고 완전히 종말론이요, 희망이며, 앞을 바라보는 전망이요, 앞으로 나아가는 행진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현재의 타개와 변혁이기도 하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에서 하나님은 스스로 십자가에 달려 십자가를 진 사람들과 고통을 함께 지는 존재이다. 구스타보 구티에레스의 해방신학은 종속 이론과 정치신학에 의존했다. 해방신학자들은 1960년대 라틴아메리카의 사회 모순을 설명한 종속 이론을 적극 수용하여, 구조화된 대량 실업과 문맹, 막대한 외채,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의 근본 원인을 종속적 대외 관계와 부패한 국가권력에서 찾았다. 해방신학은 1970년대 초반부터 국내에 소개되었으며 1977년에는 구티에레스의 『해방신학』이 번역, 출간되었는데, 1920년대에 한국에 소개된 사회복음이 미국의 경제 불평등을 배경으로 삼았다면, 해방신학은 남미의 경제 불평등을 배경으로 한 신학이었다. 몇몇 한국 신학자들은 1975년경부터 민중신학을 논의하였다. 이것은 1970년대 중반까지 한국교회의 인권 운동은 민중신학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디트리히 본회퍼의 신학이 미친 영향도 컸다. 고범서가 본회퍼의 『옥중서간: 반항과 복종』을 번역, 간행한 것이 1967년이었다. 1970년대에 신학생들과 젊은 목회자들은 본회퍼의 『옥중서간』과 『나를 따르라』를 많이 읽었다.
주(註)
1 존 위티 주니어, 정두메 옮김, 『권리와 자유의 역사』(IVP, 2015), 536.
2 Bastiaan Bouwman, “From religious freedom to social justice: the human rights engagement of the ecumenical movement from the 1940s to the 1970s,” Journal of Global History (2018): 255.
3 이 회의 자료집에는 1973년 11월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발표한 ‘인권 선언’도 소개되었다.
4 Bastiaan Bouwman, 앞의 글, 270.
5 노정현, “나이로비 총회의 모습”; 강원룡·서광선, “나이로비 총회를 검토한다,” 「기독교사상」 통권 214호 (1976년 4월).
6 김흥수, “한국민주화기독자동지회의 결성과 활동,”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27호 (2007년 9월).
7 손승호, “유신체제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인권 이해,”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43호 (2015년 9월): 235.
8 김흥수, 『자유를 위한 투쟁: 김관석 목사 평전』(대한기독교서회, 2017), 166.
9 1966년 조사에 의하면 교수 및 언론인들의 60%가 “경제 발전을 위해 개인의 자유가 희생되어야 한다.”라고 응답하였다. 홍승직, 『지식인의 가치관 연구』(삼영사, 1972), 9. 이영숙, “한국 진보적 개신교 지도자들의 사회변동 추진에 대한 연구(Ⅱ),” 「기독교사상」 통권 388호 (1991년 4월): 123에서 재인용.
10 이영숙, “한국 진보적 개신교 지도자들의 사회변동 추진에 대한 연구(Ⅱ),” 129.
11 위의 글, 127. 콘하우저의 『대중사회의 정치』는 1965년에 번역되었다.
김흥수|한국교회사를 전공하였다.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소장, 한국YMCA전국연맹 이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목원대학교 명예교수이며, 「기독교사상」 주간으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