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전통사회의 이해 중간고사 예문에 대한 풀이
1. 조몬시대 사회의 특징
조몬시대의 사회에서는 빈부나 계급의 차가 없었다. 그것은 당시의 주거 규모나 구조에 큰 차이가 없다는 점과 매장이 공동묘지에 이루어졌고 또한 부장품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 짐작할 수 있다. 일정한 부를 축적한 촌락의 지도자도 있었지만 재분배 경제 시스템에 의해 재분배 되었을 것이다. 채집 경제의 생활은 자연 조건에 크게 좌우되며 불안정하였고 노령자는 적고 여성이나 유아의 사망률이 놓았다.
2. 조몬 시대 유물
조몬시대 유물은 토기나 석기와 같이 의식주 등의 생활에 직접 관계되는 제 1 도구와 의례나 정신세계를 반영하고 있는 물품들인 제 2의 도구로 나뉜다. 제 2의 도구는 당시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비추는 물품들이며, 이들을 통하여 조몬 문화의 독자성과 개성을 알 수 있는데 대표적인 도구 중의 하나가 토우이다. 토우는 사람의 형체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도 있지만 간략하게 부분만 나타낸 것도 있는데 이는 조몬인들이 실체를 파악할 수 없었던 존재를 형상화한 것이라고 본다.
3. 조몬시대의 장례법
조몬시대에는 시신을 곧게 펴서 묻는 신전장과 몸을 굽혀서 묻는 굴장이 공존하는데 어떤 방식으로 묻을 것인가는 출신이나 가계에 따라서 이미 정해져 있고 매장 방식의 차이는 그러한 출신의 차이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4. 야요이 문화의 특징
벼농사와 금속기의 사용을 특징으로 한다. 또한 야요이 토기라 불리는 고온에서 서성한 얇은 적갈색 경질토기가 나타났다. 야요이 문화에는 청동기와 철기가 동시에 전래되었고 직물, 반월형석도, 마제 외날 석부 등 중국에서 기원한 것이 많다. 한반도 남부의 고인돌과 동일한 계통의 것이 규슈 북부에서 발견되고 있는 점이나, 쌀농사가 동남아시아에서 양자강 하류역, 한반도 남부를 거쳐 규수 북부에 전해진 것으로 생각되는 점 등으로 미루어, 야요이 문화는 한반도 남부에서 형성된 문화의 직접적인 영향 아래 성립된 것으로 추측된다.
5. 야요이 시대 사회생활의 변화
야요이 시대는 농경 사회로 발전하였고 야마타이국을 맹주로 하는 소국의 통합체가 형성되었다. 야요이 시대는 금속 문화와 농경문화가 전래되어 북규슈로부터 서일본 전체로 확산되면서 시작되었다. 벼농사의 전래와 더불어 좁은 지역에 많은 사람들이 밀집해서 살 수 있게 되었고 또 노동력과 잉여 농산물 등이 집적되면서 빈부의 격차, 계층, 수장이 발생하였다. 이 시대에 후대까지 이어지는 벼농사를 중심으로 한 농경의례가 생겨나기 시작하였으며, 동탁과 같은 청동 제기들은 그러한 농경의례를 위한 주술적인 도구였다.
6. 야마타이국의 특징
야마타이국은 2세기 후반 일본 열도에서 일어난 혼란이 진정되고 약 30개의 소국이 통합체로 형성되면서 맹주로 떠오른 소국 중 하나이다. 야마타이국에는 주술에 능하고 종교적인 권위를 갖춘 히미코라는 여왕이 있었다. 야마타이국에서는 시원적인 형태의 조세 제도가 나타났고 신분 질서, 정치 조직도 강화되고 있었던 것 같다. 야마타이국에는 히미코에 이어 남왕이 즉위하였으나 국내가 혼란하여 다시 여왕 이요가 즉위하자 나라가 평화롭게 된 것으로 이는 남자에 의한 왕권 세습제가 아직 확립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7. 히미코
히미코는 주술에 능하고 종교적인 권위를 갖춘 야마타이국의 여왕이었다. 그는 239년 위 황제에게 사신을 보내고 ‘친위왜왕’이라는 칭호와 금인, 견직물, 동경 등을 받고, 그 권위를 배경으로 하여 국내에 군림하였다. 그녀는 결혼을 하지 않고 외부 사람들과 직접 접촉하지 않았다. 그녀가 죽은 후에 지름이 100m 가까운 무덤을 만들었으며, 100여 명의 노예를 함께 묻었다고 전한다. 최근에는 히미코의 무덤에 관한 기술을 전방후원분의 축조와 연관시키는 학설도 제기되고 있다.
8. 야마타이국의 특징 6번 참조
9. 야마토 정권의 국제 관계
야마토 정권은 5세기 중반에 서쪽 규슈 북부에서 동쪽 간토에 미치는 지역에 정치적인 통일체로 성립된 정권이다. 그 당시 국제 정세는 중국에는 남북조 시대가 시작되었고 동아시아의 여러 민족은 중국의 지배를 벗어나 통일국가로 나아가던 때이다. 야마토 정권은 4세기 후반부터 5세기 초에 걸쳐서 앞선 생산 기술과 철 자원을 획득하기 위하여 한반도 변한제국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야마토 정권은 대외 문물 창구를 확보하기 위해 당시 가야 제국을 압박하고 있었던 백제, 신라와 분쟁을 일으키기도 하고 나아가서는 고구려와의 전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의 사정은 광개토대왕 비문에 보인다.
10. 하니와
하니와는 적갈색을 띤 하지키 계통의 토기로 원통형의 것과 여러 가지 형상을 갖춘 것이 있다. 장식은 고분의 바깥에 나열하였는데 제작 동기에 대해서는 흙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 혹은 기대형 토기가 발전한 것, 장례 행렬을 본뜬 것, 순장을 대신하는 것 등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어 있다.
11. 전방 후원분
전방 후원분은 고분 시대를 대표하는 분묘 형식으로, 원형 분구의 한쪽에 장방형 내지 사다리꼴의 시설을 덧붙인 형태이다. 대형인 경우에는 2~3단의 층이 져 있으며 정상 부분은 평탄하게 만들어져 있어 그 곳에서 각종 의례를 치른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3세기 말 내지 4세기 초에 출현한 전방후원분은 기나이를 중심으로 오키나와 훗카이도 도호쿠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일본 열도의 대부분에 분포하고 있으며, 야마토 정권의 대왕을 정점으로 하여 전국 각지의 수장들의 묘제로 채택되었다. 시기적으로 변질되기는 했지만 전방후원분의 축조 및 그 곳에서 치러지는 의례는 당시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적 ․ 사회적 ․ 종교적 의의를 가졌던 것으로 추측된다.
12. 쇼토쿠 태자의 업적
원래 이름은 우마야도 황자로 마구간에서 태어난 왕자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요메이 천황의 아들이자 스이코 천황의 조카로서, 592년에 황태자가 되어 당시의 정치를 섭정하였다. 『삼경의소(三經義疏)』를 편찬하였다고 전하고 “세상의 모든 것이 헛되며 부처만이 진실”이라는 말을 남겨 외래 종교인 불교를 비로소 제대로 이해하고 연구한 인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불교의 수용에 적극적이었던 쇼토쿠 태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전설들이 일찍부터 생겨났으며, ‘구세관음보살’ 즉 세상을 구하기 위하여 인간으로 태어난 관음보살로 생각하는 ‘태자 신앙’의 대상으로서 널리 세간의 존경을 받았다. 그의 어머니는 금으로 만든 옷을 입은 신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인간으로 태어나고자 한다는 태몽을 꾸었고, 아기를 가진 지 12개월 만에 마구간 앞에서 그를 낳을 때 궁중이 푸르고 붉은 빛으로 뒤덮였다고 전한다. 또 4개월 만에 말을 하고, 2살이 되던 해에는 동쪽으로 합장하고 염불을 외었다고 하며 5살 때는 이미 『논어』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고 전한다. 이처럼 일찍부터 신비화 ․ 성인화의 길을 걸은 쇼토쿠 태자는 불교가 민간에 퍼지면서 최초의 불교 숭앙자로서, 특이한 능력을 가진 존재로 여겨져 일반인들의 존경을 받게 되었다. 지금도 일본의 사찰이나 신사에서 심심치 않게 쇼토쿠 태자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도 그러한 까닭이다.
13. 다이카 개신
다이카 개신은 나카노오에 황자 나카토미노 가마타리가 유력 호족을 배제하고 천황을 중심으로 한 중앙 집권 체계를 확립 시킨 사건이다. 7세기경 중국에서는 수를 이어 강대한 중앙 집권 국가인 당이 흥기하였고 그에 영향을 크게 받은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도 서로 항쟁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렇게 동아시아에 있어서 국제적인 긴장이 극도로 고조되었던 시기에 한반도 삼국의 움직임에 자극을 받은 왜는 다이카 개신을 일으킨 것이다. 다이카 개신으로 왜는 개혁 정치가 시작되었고 이 사건이 끝난 뒤 효덕천황이 즉위하여 나니와로 천도한 다음 해 정월 다이카 개신의 조칙을 반포했다.
14. 백촌강 전투
백촌강 전투는 왜의 병사들이 백제에 파견되어 벌인 전투를 이른다. 660년 7월, 한반도에서는 백제가 당 ․ 신라의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수도 사비성이 함락되었으며, 의자왕도 사로잡히는 지경에 이르러 멸망하게 되자 백제유신들은 백제 부흥을 위하여 왜(倭)에 구원군을 요청하였다 이에 왜는 2만 7,000명의 병사를 파견하여 백촌강 유역에서 전투를 벌였다. 전투는 대패하였고 백제의 재건 노력은 무산되었다. 이에 백제의 많은 유민들은 왜로 망명하였다.
15. 아스카 문화
아스카 문화는 일본 최초의 불교문화이다. 남북조 시대의 불교문화와 백제와 고구려의 불교문화가 일본에 전해져서 개화한 것이다. 아스카 문화로 인해 일본에 최초로 건립된 사원이 호코지이다. (588년에 건립되기 시작) 호코지는 탑을 중심으로 3개의 금당을 배치하였는데 그 형식은 고구려 사찰과의 연관성을 엿볼 수 있고 세부에서는 중국 남북조 시대의 양식을 볼 수 있다. 호코지는 아스카 시대 건축 양식의 특색을 잘 갖추고 있다. 이 시대 조각으로는 호류지에 있는 불상들과 옥충주자 등이 뛰어나다. 한 가지 특이한 사항은 그 시대에는 왜에 불교가 전래되었지만 왕실이나 국가가 직접 관장한 것이 아니라 소가씨라고 하는 유력 호족의 주도 아래 불교가 있었다는 것이다. 왕실이 적극적으로 불교를 받아들이게 된 것은 소가씨가 타도된 이후이다. 신라의 경우 이차돈의 순교 후 비로소 불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과 같다.
16. 덴무천황과 천황호칭과의 관계
다이카 개신에서 표명된 율령제적인 고대 국가의 건설은 전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덴무의 등장으로 급진전을 보게 된다. 기적같이 내란을 승리로 이끈 그는 살아서 이미 신으로 추앙되어 천황이라는 호칭으로 불린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천황이라는 용어가 사용된 것이 중국에서는 674년 이후 측전무후 시대였고 왜에서는 681년 덴무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덴무를 천황으로 호칭하게 된 것은 모든 신하 중에 최상위 신을 태양신(아마테라스오미카미)으로 두고 천황을 그 후손으로 본 것이다. 이 때부터(덴무 지통 때) 왜라고 불리어 오던 국호도 일본이라 부르게 되었다.
17.아마테라스오미카미
아마테라스오미카미는 태양신으로 천황가문의 조상신이다. 일본은 천황을 최고의 신인 아마테라스오미카미의 후손 혹은 그 현현(天神)으로 보았다. 실제 일본에는 천황을 신화적으로는 태양신이자 최고의 천신으로 또 하늘을 인격화한 신이기도 한 아마테라스오미카미로 보고 있다.
18. 하쿠오 문화의 특징과 산물
7세기 후반 덴무 ․ 지토 두 천황의 시대에는 율령적인 국가가 형성되는 시대적인 분위기가 강했다. 그 분위기를 배경으로 한 새로운 기운이 넘치는 한 문화가 일어났는데 그것이 하쿠오 문화이다. 하쿠오 문화의 특징으로는 국가가 불교를 통제하게 되면서 문화 자체에 불교적인 성격이 많이 드러난다. 또한 율령과 역사서가 편찬되고 신체가와 일본어의 표기방식이 변화된다. 하쿠오 문화는 불교문화로써 7세기 전반의 아스카 문화와 8세기의 덴표 문화 사이에 위치하며 아스카 문화가 한반도의 영향 아래 있었던 반면 하쿠오 문화는 중국 수 ․ 당의 영향 아래 있었다. 이 시기 불교 확산에 공헌한 사람은 덴무 천황이다. 그는 하쿠오 시대의 4대 사찰을 건축했다. 미술에는 초기 당 문화의 영향을 엿볼 수 있는데 금동불상과 금당 벽화, 고분 벽화가 그것이다. 소가노 이시카와노마로에 의해 사찰 야마다데라가 건설되는데 이는 왕실과 국가가 불교를 관리하게 되는 것을 보여 준다. 이 후 사원과 승려는 국가의 감독아래 놓이게 되고 대사가 건립되고 호국법회가 합리화 되지만 이는 불교가 통제됨을 알린다. 681년에 덴무천황은 제기(제황일계, 계보, 궁궐일기, 계보 기록, 왕실에 관련된 여러 가지 일기)와 상고 제사를 비교하여 기록하게 하였는데 이는 『고지끼』와 『니혼쇼키』를 편찬하는 자료로 이용되었다. 『고지키』는 천황가의 역사를 중심으로 하여 기록한 역사서이고 『니혼쇼키』는 일본 국가의 역사를 중심으로 기록한 역사서이다. 한편 한자를 빌어 사용해 오던 일본어에도 변화가 있었다. 682년에는 한자의 음과 훈을 정리한 『신지』라는 책이 편집되어 한자를 보다 원활하게 일본어로 표기하게 되었다.
19. 쇼무천황
쇼무천황은 724년에 겐쇼의 뒤를 이어 즉위하여 729년 연호를 덴표라고 하여 이른바 덴표 시대의 막을 연 천황이다. 쇼무의 치세를 중심으로 하는 시대를 나라 시대라 한다. 이 시대의 쇼무천황은 중국의 선진적인 법률 체계인 율령제를 전국적으로 시행하려고 노력했고 견당사를 당으로 파견하여 중국 문물 유입에 애를 썼다. 그로 인해 당이나 신라 발해를 경유하여 유입된 각종 물품들이 정창원에 보관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쇼무천황 시절 불교문화가 크게 개화 되었고 문헌은 정부의 조직력으로 체제에 맞게 편찬되었다. 그 시기에 귀족들의 한시집이자 일본 최초의 한시집인 가이후소와 일본인들의 정서를 노래한 와까를 모아 둔 만요슈도 편찬되었다.
20. 덴표문화의 특징
덴표문화란 원래 덴표(天平)라는 말이 들어가 있는 연호가 시행되었던 시대(729-767)를 중심으로 한 문화를 가리키는 문화사적 혹은 미술사적 시대 구분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나라 시대 즉 8세기 전체의 문화를 지칭하는 용어로 쓰면서 정치적 시대 구분인 나라시대와 같은 뜻으로 쓰기도 한다. 나라시대에는 율령이 편찬 율령제가 전체적으로 추진된 시기였다. 중앙집권적인 체제가 만들어졌을 때 나타나는 문화가 덴표문화이고 이 시기에는 중요 문헌들도 편찬해 내기 시작하면서 일본의 문화가 크게 개화하기 시작하였다. 불교가 일본 국가 이데올로기로써 자리매김하기 본격화 되고 전국 각지에 고구분지(國分社)와 도다이지(東大事)가 건설 되고 만요슈와 일본어를 한자로 표기하는 가나가 만들어졌다.
21. 만요슈
만요슈는 전 20권의 시가집으로 약 4,500수의 시가가 실려 있다. 이는 760년경에 편찬된 것으로 생각되며 629년에서 759년 사이에 지어진 것들을 중심으로 실려 있다. 그 속에는 집단 속에서 발생하여 구전되어 온 노래와 개인들이 창작한 와카가 실려 있는데 와카의 형식이 성립된 시기는 진신의 난 이후이다. 시가의 작가는 천황이나 귀족, 일반 서민, 변방을 수비하는 병사에 이르는데 이러한 작자의 다양한 변화는 문자 사용 층의 확대와 연관이 있었다.
22. 나라시대 불교의 특징
나라 시대는 일본이 율령제에 입각하여 고대 국가를 형성하고 확립한 시기였다. 그 때문에 불교는 정치적인 통일의 수단으로서 이용되었고 국가가 불교를 보호한다는 국가진호를 위한 불교라는 성격이 더욱 두드러졌다. 승려들은 국가 진호를 위한 법회 및 기도를 행하는 동시에 인도 및 중국에서 생겨난 다양한 불교 이론의 연구를 발전시켰다. 그와 함께 나라의 여러 큰 절에는 남도 육종으로 불리는 여러 학파가 형성되었다. 육종이 확인되는 것은 750년경이라고 한다. 도다이지에는 육종을 연구하는 승려 집단들이 논쟁도 하고 협력하여 연구도 하였다. 법상종과 삼론종의 대립은 나라 시대 말기에 격심하게 되어, 양자의 대립은 헤이안 시대까지 계속되었다.
23. 도다이지 (東大事)
도다이지는 현재 나라시의 동쪽에 있는 사찰로 화엄종의 총본산이다. 헤이조쿄의 동쪽에 있었기 때문에 도지라고 하였고 ‘금광명 사천왕 호국사’, ‘소코쿠분지’ 등의 별칭도 있다. 743년에 쇼무천황이 화엄경의 교리에 입각하여 비로자불 대불을 만들 것을 발원하면서 745년부터 조영을 시작하여 대불 개안식은 752년에 인도의 승려 보리선나, 당나라 승려도선 등이 행하였다. 현재에도 나라 시대에 만들어진 법화당, 정창원, 8각등롱 등과 가바쿠라 시대에 만들어진 남대문, 금강역사상, 에도 시대에 재건된 대불전 등 수많은 문화재가 있어서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특히 대불전은 현존하는 목조 건물 중 가장 큰 것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24. 교키(668-749)
교키는 이즈미 출신으로 최초의 민중 불교의 지도자이다. 속성은 다카시씨라고 하며, 백제 도래인계이며 모계도 도래인 출신으로 생각된다. 생가는 호족이었으나 15세에 출가하여 야마토의 야쿠시지에 들어가 기엔 ․ 도쇼에게서 불교를 배웠다. 그는 스승 도쇼를 따라 각지역으로 다니면서 민간 포교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정부로부터 포교활동을 여러 차례 금압당하였지만 그에 대한 민중들의 존경과 지지는 두터웠다. 그는 쇼무천황의 대불 건립 사업에 참가하였다.
25. 고지키
고지키는 제왕들의 역사와 선대의 이야기들을 정리해 둔 책이다. 이 책은 신들의 시대를 다룬 1권, 진무에서 오진까지를 다룬 2권, 닌토쿠에서 스이코까지를 다룬 3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책은 신화와 전승, 고대가요 등을 포함하고 있으며 일본 고대의 언어, 습관, 민요, 신화 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 책은 진신의 난을 승리로 이끈 덴무의 령으로 제작되었는데 711년에 히에다노 아레가 암송하는 내용을 오노 야스마로가 채록한 것이다.
26. 니혼쇼키
니혼쇼키는 720년에 편찬된 일본 최초의 正史이다. 전체 30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크게 신대 2권과 인대 28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인대는 덴무에서 지토 천황까지를 편년체에 입각하여 순한문으로 기록하였다. 재료로는 제기와 구사를 비롯하여 한반도와 일본의 고기록, 사원이나 개인의 기록, 씨족의 가전 등 다양한 사료를 망라하였다. 특히 6세기경까지는 한반도 관계 기록이 많은 점도 중요한 특징이다. 일본 고대사의 근본 사료일 뿐만 아니라, 한국 고대사 연구에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27. 정창원
정창원은 도다이지의 경내에 있는 나라 시대의 창고이다. 정창원에는 쇼무천황이 죽은 후 그 황태후였던 고묘시가 기증한 천황의 물품과 나전제품, 악기, 무기, 등 여러 가지의 물품들이 있다. 그리고 당나라, 신라의 물품도 있고 서아시아나 동남아시아의 물품도 있어 8세기대의 각종 물품의 타임캡슐이라고도 할 만 하다.
28. 이세신궁
이세신궁은 원래 이세 지역의 지방 신을 모신 신사로 덴무 이후부터 고대 국가의 중핵적인 신사가 되었다. 덴무가 진신의 난을 일으킨 후 이세신궁에 요배하고 승리를 기원하여 그 영험으로 승리하였다하여 천황가에서 중요시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세신궁은 이처럼 성립 초기에는 천황가의 우지가미라는 색채가 강하였으나 8세기에 신기 제도가 성립되면서 전국의 신사 중에서 최고의 지위가 부여되어 국가적인 성격을 갖기에 이르렀다.
29. 대상제
대상제는 가을의 수확제에 해당하는 신기 제도 중의 하나이다. 신기제도는 신들을 섬기는 제도로 일본의 민간 신앙이 고대 국가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재구성되었다. 고대 국가가 제도적인 측면에서 정비되는 과정에서 신기 제도는 제정일치 및 신사 우선이라는 관념 아래 특히 중시되었다. 조정에서 행하는 제전에는 항례적이고 국가적인 제전과 임시 제전이 있다. 그 제전은 중요성에 따라 따사(大祀) 중사(中祀) 소사(小祀)로 나누어졌는데 이 중 가장 중요시 된 제전은 가을의 수확제에 해당하는 대상제였다. 천황이 즉위하면 재위 기간 중에 한 번 대상제를 임시의 제전으로 행하는데 덴무 시대부터는 즉위 후의 임시 제전을 대상제로 고쳐 불렀다.
30. 고닌 조간 문화의 특징
고닌 조간 문화는 헤이안 시대 전기에 해당하며 전대의 덴표문화를 계승하면서 그 뒤에 나타나는 국풍문화와의 교량 역할을 한다. 그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당나라 문화의 영향을 받아 귀족들 사이에서는 중국의 문학과 역사에 대한 공부가 성 행하였고 한시문집이 편집되었다.
둘째, 가나문자가 생겨나고 목조 조각 기술이 발달하였다.
셋째, 천태종과 진언종 등 새로운 불교가 나타났다.
넷째, 밀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독자적인 밀교 예술이 나타났다.
한시문의 융성은 당나라 문화를 흡수한 덴표문화와의 연속성을 보여 주는 것이지만 천태종과 진언종의 전파는 나라 시대 불교의 특징인 진호국가 불교로부터의 탈각을 꾀하는 것이었다.
31. 간무천황
간무천황은 수도를 불교사찰 등 구세력의 영향력이 강한 나라지방에서 천도함으로써 율령정치를 재건하고자 하였다. 그는 784년 헤이안쿄로 천도해 새로운 수도에서 정치 개혁을 추진하였는데 이 정치개혁은 문화면에서도 변화를 초래하여 다양한 문화가 전개되는 계기가 되었다.
32. 사이쵸
사이쵸는 당에서 불교를 배워와 천태종을 연 사람이다. 사이쵸는 804년 견당사 일행을 따라 당나라에 유학해 천태교학과 선과 밀교를 배워 805년에 돌아왔다. 사이쵸가 시작한 일본의 천태종은 ‘완전한 가르침’ 이라는 뜻인 원교(圓敎)를 중심으로 계(戒),선(禪), 밀(密)의 4가지를 종합한 것이다. 사이쵸는 아주 완화된 대승계를 채용하여 사람은 모두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사이쵸가 세운 히에이잔 엔라쿠지는 불법 연구의 최고학부로써 많은 인재를 키웠다. 사이쵸는 의상과 원효에 비교 될 만한 인물이다.
33. 쿠가이
흥법대사 쿠가이는 804년 당나라에서 많은 밀교 경론과 의식에 사용하는 법구를 가지고 806년에 귀국하여 진언밀교의 선교에 주력했다. 그는 고야산지를 열었고 도다이지에 진언원을 세웠다. 쿠가이가 당나라에 건너간 시기는 밀교가 새로운 불교로 주목을 받고 있던 때였으나 그 뒤 중국에서는 널리 전파되지 않고 현재에는 티베트 문화권과 일본에만 밀교가 남아있다. 쿠가이가 전한 불교는 ‘정순밀교’이다. 밀교는 오직 한 마음으로 수행하면 이 세상에서 살아 있으면서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불교로써 밀교에서는 이를 ‘즉불성불’이라고 하는 단어로 표현하고 있다.
34. 신불습합
신불습합은 외래 종교인 불교가 일본의 토속 신앙인 신기 신앙과 결합한 것으로 부처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신의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하는 믿음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외래 종교인 진언종은 모든 것에서 신성을 발견하는 애니미즘이나 신과 일체가 되어 신의 의지를 전달하는 샤머니즘과 같은 종래의 토속 신앙과도 통하는 것이 있었다. 토속 신앙은 민간 신앙이다. 진언 밀교는 민간 신앙과도 깊이 결합해 민중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35. 요세기즈쿠리
헤이안 시대에는 말법사상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불상을 갖기를 원했다. 그래서 대량의 불상을 만들어야 했다. 대량의 불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기술이 필요했는데 그 기술은 다음과 같다. 두 개 이상의 나무를 이용해 밑그림을 그린 후 서로 붙여 조각한 후 옷칠을 한 후 금박을 붙여 만든 불상이다. 이 형식으로 불상을 최초로 만든 사람은 조조이고 두 개 이상의 나무를 붙여 만들 수 있기에 보다 큰 불상을 만들 수 있었다. 대표적인 불상으로는 평등원 봉황당의 아미타여래상이다.
36. 국풍문화의 특징과 그 산물
일본사에서 헤이안 시대 중기 (10세기 이후 12세기 무렵까지)에 전개한 문화를 국풍문화 또는 후지와라가 정권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후지와라 문화라고 한다. 국풍문화는 문자 그대로 일본풍의 문화를 의미한다. 섬세하고 우아한 아름다움을 갖춘 뛰어난 미적 감각을 주요한 특징으로 들 수 있다. 또 이 시기는 불교가 사람들의 생활 속으로 융화되어 전통적인 원시 신앙과 결합한 신불 습합이 더욱 심화되어 간 시대였다. 그리고 불교는 일본인의 정신적인 측면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정치가 어지러워지고 천재지변이 빈발하는 가운데 귀족들 사이에는 불교의 말법사상이 유행하여 정토교를 널리 보급시키게 되어 일상생활 속에 동화되어 간 불교로 받아들여졌다. 그 산물로는 가나 문자(한자를 변형한 글자)의 성립으로 국문학이 발달되었고 채색을 가미한 일본풍의 그림인 야마토에가 나왔다. 그리고 헤이안 시대 귀족들의 저택양식인 신덴즈쿠리가 지어졌고 궁녀들의 정장에 해당하는 쥬니히토에라고 하는 비단을 여러 겹 겹쳐 입는 일본 복식이 나타난 것을 그 산물로 볼 수 있다.
37. 신덴즈쿠리
헤이안 시대 귀족의 저택을 신덴즈쿠리라고 부른다. 이는 중심이 되는 정전을 신덴이라 불렀기 때문이다. 당시의 신덴즈쿠리식 건물은 지금 남아 있지 않지만, 문헌 자료와 발굴에 의해 그 형태를 알 수 있다. 건물은 신덴을 중심으로 배후에는 여주인이 기거하는 기타노다이가 있고 전체 면적 8,700평 이상인 그 곳에서 의식과 연회를 즐겼다. 대표적인 신덴즈쿠리는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는 11세기 중기에 후지와라노 요리미치가 세운 히가시산조도노이다. 지붕이 일본의 전통 주택양식에 사용하는 회양목 껍질로 되어 있다는 것이 특이한 점이다. 그리고 정원은 일본 헤이안 시대 정원 양식을 볼 수 있는데, 헤이안 시대 정원 양식은 신덴즈쿠리 양식에 따른 정원과 일본 정토교사원에 따른 양식의 정원이 있다.
38. 말법사상
정토교는 말법사상과 관계가 있다. 말법사상은 일종의 말세관을 말한다. 석가모니가 돌아가신 후 교(가르침), 행(행함), 증(성불하는 사람)이 잘 이뤄지는 정법의 시대가 있었는데 그 시대가 지나니 교, 행, 의 두 법은 남아 있지만 증을 얻는 사람은 없는 상법의 시기가 찾아왔다. 또 교법만 있고 행, 증이 없는 말법의 시기가 온다는 불교 교법상의 일조가 역사적 말세관이다.
39. 아미타내영도
아미타내영도는 정토교 미술품이다. 헤이안 시대 후기에 말법사상이 전파되자 사람들은 현세에서 도피해 극락정토에 왕생하고 내세에서 구원을 받고자 희망하게 되었다. 극락 정토에서 왕생하기를 바라면서 공덕을 쌓은 사람은 죽을 때에 아미타여래가 맞이하러 온다고 믿고 있었다. 이러한 신앙에 입각하여 아미타여래가 맞이하러 오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 아미타내영도이다.
40. 평등원봉황원
평등원봉황원은 말법사상에 입각한 정토교를 대변하는 문화재이다. 봉황당이 세워진 것은 1053년으로 섭관 정치 시대 귀족들의 화려한 생활과 우아한 감각을 엿볼 수 있는 장소이다. 봉황당은 연못의 서쪽에 좌우로 날개처럼 펼쳐진 복도와 배후에 꼬리를 가진 우아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며 서 있다. 지붕에 청동으로 만든 봉황이 장식되어 있기에 뒷날 봉황당으로 불리게 되었다. 정면의 문이 열려 있을 때에는 조조가 요세기즈쿠리양식으로 만든 아미타여래가 보인다. 평등원봉황당은 일본 헤이안 시대 귀족들이 생각하던 천국을 이미지화한 것이다.
41. 옥충주자
옥충주자는 아스카 시대 공예로 호류지에 있는데 옥충이라는 벌레의 날개로 장식한 불상을 넣어 두는 함이다. 이는 아스카 시대 조각품과 미술품들과 함께 고분 시대 이래 도래인에 의하여 전해지고 양성된 목공예 및 금속 공예 등의 기술이 이 시대에 한층 전보되었음을 말해 준다.
42. 일본과 천황이라는 명칭이 사용된 시기
일본에 있어 천황이라는 명칭이 처음 사용된 것은 덴무천황 때 부터이다. 덴무천황은 진신의 난을 승리로 이끌어 즉위한 왕이다. 진신의 난은 천지천황 사후 왕위계승 문제로 일어난 내란이다. 덴무천황은 그 내란을 기적같이 승리로 이끈 오아마라는 이름의 사람이었는데 그는 왕으로 즉위하여 신으로 추앙 받기 시작하면서 최초로 천황이라는 호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 전까지는 대왕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천황이란 존칭은 덴무가 죽은 후 그의 왕후 지토천황이 공식적인 군주의 호칭으로 법제화 하였다. 하쿠오는 천무천황의 연호이자 7세기 후반 아스카 문화와 8세기 덴표문화 사이의 문화로 당나라의 영향을 많이 받은 불교문화이다.
43. 천황과 도교와의 관계
천황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된 배경에는 도교의 영향이 컸다. 천황이라는 용어는 ‘우주의 최고의 신’ 을 가리키는 도교 용어이다. 이 용어는 기원전 300년경부터 기원후 600년경 까지 사용되었는데 우주의 최고의 지배자라는 뜻으로 ‘천황대제’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44. 동경(구리거울)
고분 시대에 동경이 널리 보급되었는데 거울 역시 도교에서 신비한 능력을 가진 도구로 간주하였다. 옛날 사람들은 거울은 사물을 비추기 때문에 신비한 힘을 가지는 것으로 여겼다. 그 자체가 혼에 비유되거나 악마를 쫓는 힘을 가진 것으로 생각하기도 하였다. 또 거울은 해와 달 즉 하늘의 운행과 함께하고 귀신 즉 죽은 사람과도 큰 힘을 통할 수 있으며 요괴들을 막는 힘을 가졌다고도 믿었다. 그래서 거울의 뒷면에는 큰 힘을 담은 세계를 상징하는 모양을 만들어 넣었고 하늘은 원형, 땅은 사각형이기 때문에 거울 전체를 원형으로 만들어 하늘을 나타내고 중앙에 손잡이를 붙였다. 즉 거울은 당시 사람들이 생각한 우주를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45. 밀교 미술
족자처럼 걸어 두는 만다라는 밀교의 의식을 거행할 때 제단 앞에 걸어 두고 사용한다. 만다라는 여러 가지 불상의 모습이 있는데 불구(佛具)와 불상을 입체적으로 배치하는 가쓰마만다라도 있다. 교토의 도지의 강당 안에 배치된 여러 가지 불상들은 일종의 가쓰마만다라인데 이는 쿠가이의 밀교 사상을 입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끝-
첫댓글 감솨합니다
저도요.. 넘 감사해요.. 복 받으세요.
감사합니다. 퍼 가서 많은 사람에게 유익하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정보 고맙습니다~~~^_^
넘 감사합니다.....복 받으세요...
너무감사해요 축복많이받으세요~~~~~~~~``
감사합니다...
넘 대단하시네여^^ 전 겨우 강의 듣고 교재에 체크한 정도인데....^^; 중간셤 잘 보세요^^
너무 너무 감사합니다.^^*
오우....굉장 하십니다...
아주 많은 도움이 될 자료이네요.. 감사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잘 쓰겠습니다. 행복하세요.
정말 정말 감사해요. 시험 잘 봐서 보답 할께요. 다시 한 번 감사 !!!!!!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당
시험 잘들 치르셨나요? 님들의 댓글로 행복합니다. 님들도 늘 행복하시고 하시는 일들 행운 있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