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 남아 있는 성곽을 가끔 보러 가는데 일반적으로 4개의 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에 남문에 보이는 편액은 대부분 진남루라 되어 있는데 언제 부터 생긴 것인지
물으면 대부분 임진왜란 이후라는 답을 듣곤 하였는데 그에 대한 의문이 많이 들었다.
그리고 사찰에도 진남이라는 것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기림사에 있다.
기림사는 임진왜란 때 승병과수병의 근거지로 활용되면서 생겨난 이름으로 추정되고 있다.
성문의 남문에만 보이는 진남 이라는 용어는 언제 부터인가에 대한 글을 써 보려 한다.
진남이라는 중국에서 벼슬 할 당시 최치원의 계원필경에 보인다.
계원필경집 제17권 / 계(啓)ㆍ장(狀)
시를 헌정하면서 올린 글〔獻詩啓〕
수성비(收城碑)
공업은 이미 〈정북부〉에 드러났고 / 功業已標征北賦
위명은 이제 진남비에 세웠도다 / 威名初建鎭南碑
동주와 나란히 썩지 않을 줄 알고 말고 / 終知不朽齊銅柱
더군다나 유종이 색사를 엮었음에랴 / 況是儒宗綴色絲--출처 고전번역원 db
위에서 보듯이 중국에서 벼슬을 하고 있을 당시 최치원이 수성비라는 詩에서 진남이라는 글이 보여
진남이라는 것은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서 진남은 어디 일까 생각 하여 보면 지금의 베트남 북쪽인 안남으로 생각되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안남은 중국 삼국지에 제갈공명이 칠종칠금의 고사 있을 정도로 남쪽에 중국 남쪽에서
많은 전쟁이나 괴롭혔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서는 진남이라는 글은 고려사에서는 보이지 않으며 조선 초기 허조의 시에서 보이는데 고려말이나
조선초기에도 왜구의 만행이 계속되었기에 왜구를 토벌 할 목적으로 진남이라는 명문을 쓴 것으로 보이나
언제 부터 쓰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육지로 올라는 왜구를 방비 하기 위하여 진남이라는 글을 남문 문루에 걸었다고 어디 까지나 추정 되지만
중국에서 부터 내려온 것을 조선에서 많이 쓴 것으로 생각되며, 진남이라는 글이 있는 성곽 남문에
많지 않다는 생각도 하여 보는데, 임진왜란 이후로 현재의 시점에서 성곽을 보수 정비하면서
남문의 문루에 쓰여진 편액을 모르는 경우에는 대부분 진남루 이라는 명문을 많이 넣은 것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다른 생각으로는 남쪽의 적은 우리나라 지도의 형세상 왜구 외에는 없으므로 진남이라는 것은
왜구를 방비하고 쳐부수는 목적을 잊어 버리지 않게 위하여 남문의 편액에 진남문 , 진남루 이름을
걸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임진왜란 후유증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그래서 남문에 진남문이라 진남루라 편액이 쓴 것으로 생각되나, 어디 추정 인것은 그에 대한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