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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는 너무 광활한 유적지라 한꺼번에 다 볼 수는 없어 이번
관광중엔 동해권으로 하루코스를 잡아 돌아보기로 했다
< 감포항의 일출>
사실, 동해 문무대왕 수중릉에서 뜨는 장엄한 일출을 보고 싶었는데 (광고가 멋있길래~)
아뿔싸 ~~ 어이하리~ 가는 길에 시간을 놓쳐 그만 감포 앞바다에서 일출을 만났다
그래도 오랜만에 보는 오메가 일출 , 해야 ~반갑다 굿모닝~^^
< 문무대왕암>
삼국통일의 엄청난 과업을 달성한 위대한 문무대왕도 동해를 노략질하는 왜구의 등쌀엔 무던히도
지긋지긋 했나 보다 "나 죽으면 화장하여 동해에 장례하라~ 그럼 동해의 용이 되어 왜구를 물리치고
신라를 보호하겠다"고 한 유언에 따라 유골을 모신 대왕암 ,자나 깨나 죽으나 사나 나라 걱정을 한
문무대왕" 얼마나 신라사랑이 불 같았으면 넋 조차 바칠래라?
아니 어쩌면 잘한다 잘한다 하면 행주도 풀을 맥인다는 속담처럼 삼국통일의 자부심이 팽배한
나머지 죽음 너머까지 자신의 책임감을 과시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 음냐 ~
잠시 불경한 생각으로 백사장에 앉아 하늘을 보니 푸른 물결 넘실대는 파도와 파란 하늘에
용처럼 뻗친 흰구름이 비장하기 그지없다. 조상의 빛난 얼을 함부러 폄하하면 벌 받지
왕이시여. 나의 불경한 주디를 치소서 .. -_-)*
<이견대>
바다를 떠나 문무대왕 수중릉이 바라 보이는< 이견대>를 갔다 .근데 친구한테 이견대 사진을
찍으랬더니 어찌 요따구로 찍었냐? 안내문으로 다 가리고 정자지붕만 쬐끔...ㅉㅉㅉ
어쨌든 이견대는 문무왕의 혼이 깃든 대왕암을 바라보는 언덕에 자리잡은 정자로 삼국유사의 기록에
신문왕은 호국용이 된 부왕 문무왕을 위해 감은사를 축조하고 바다에 나타난 아버지龍 으로부터 세상
을 구하고 평화롭게 할 수 있는 옥대와 <만파식적>이라는 피리를 하나 받았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이다 .창과 활보다 아름다운 음악소리로 왜구의 마음을 교화하려고?
음악은 무기보다 강하다? 뭐 ~ 그럴 수도 있겠다
항상 삐딱한 시선으로 사물을 분석하고저 하는 예리한 지적욕구(?)로 인해 생각이 많으니 늘 배가
고프다. 감포 바다에 왔으니 싱싱한 회 한접시로 뱃속에 바다를 넣은 뒤 이제 내륙으로 들어갈란다.
배고파서 꽁치를 다 뜯어 먹어서 볼썽 사납지만..회는 셋이 먹다가 둘이 죽어도 모를 만큼 맛있었다 ,끙"
<골굴사>
배가 든든하니 산으로 오르자 ~영치기 영차 ~~근처에 있는 골굴사로 향했다.골굴사는 약 1500년 전
인도에서 건너온 광유성인 일행이 함월산 지역에 정착하면서 창건하였다는데 이는 불국사보다 약
200년 먼저 창건된 셈이다 ~와~!
당시 광유스님 일행들이 자국(인도)사원 양식을 본따서 창건한 전형적인 석굴사원으로 인도의 아잔타
석굴,티벳의 돈황 ,중국의 운강석굴처럼 여러 개의 동굴군으로 형성된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한 석굴사원
이란다 .유일하다면 그럼 석굴암은 다른형탠가 ? 아마 석굴암은 동굴군 사원이 아니라서 그런가 보다
<요 사원이 바로 천년의 미소를 간직한 석굴사원이라 자랑하는 곳이다 >
조선시대 토함산 산중일기를 쓴 정시한 선생의 기행문에도 당시 골굴사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여러
채의 목조와가로 지어진 전실을 연결하는 회랑이 있고 단청을 한 석굴사원의 모습은 한폭의 병풍을 보
는 것처럼 아름답다"고 찬탄하였다
<마애여래좌상>
골굴사의 주불인 마애여래좌상은 보물 58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동해안의 문무대왕수중릉을
향하여 조성되었으며 관음굴 지장굴 약사굴 라한굴 신중단 칠성단 산신당 등의 굴법당들이 있다
루프와 철제계단으로 오르고 좁다란 굴로 통과 "아~ 후들후들 떨리는 내 다리여~!!"옛날엔 철제
난간도 없었을텐데 이런델 어찌 다녔을꼬? 아마 옛날 신도들은 불공 드리러 가기 전에 암벽등반
코스부터 마스터 했어야겠구나 싶다
고개들어 위를 보니 가파른 절벽에 저리 단단한 암석을 후벼파서 석굴을 만든 정성이 대단하다
인도에서 온 개척자 (?) 스님들이 고생 깨나 하지 않았을까?
그쪽 암석은 나뭇꼬쟁이로 후벼도 잘 파지는 사암이지만 여기 암석은 돌중에 돌, 단단한 화강암이
아니던가? 맘대로 후벼지지 않는 암굴을 파면서~왜 시작을 했던고! 앗뜨거 ~~후회도 많이 했을 터이다
후덜덜거리는 다리를 추스리며 절을 구경하고 내려오는데 웬 음악소리와 함께 무예공연을 하나보다.
올라갈까? 망서리니 내 다리가 싫다 하네? 못보니 인연이 아니로고 굿바이 하니 아쉽더라~~
웬일인고 했던 의문이 팜플렛을 보니 곧 풀렸다,골굴사는 요즘 옛날 화랑들이 수련하던 심신수행법
인 선무도의 총본산으로 선무도를 전승 보급하는 불교무술 및 불교의 방 전문지도자를 양성하고 있었다
선무도는 불교의 사미타와 위빠사나를 함께 닦는 지관 수행법과 신라 화랑들에게 전수된 심신수련법
으로서 고려,조선시대 외침에 항거했던 승군들의 무예가 전승된 불가의 전통문화란다
산업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심신을 치유하는 참선(명상)과 선호흡, 선요가, 선기공 선무술은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가꾸는 붇다의 에너지라고 ~ 템플스테이도 하는데 1박 2일 5만원이란다
선무도 화랑사관학교도 운영하니 관심을 가진 자 알아보라 ,나는 이제 기림사로 가노라 ~~
<함월산 기림사>
기림사는 원래 31 본산(本山)의 하나로 불국사를 비롯한 60개의 말사를 감리한 거찰이였단다
근데 광복 이후 교통의 불편과 불국사의 복원으로 그 사세가 상대적으로 위축되어 지금은 거꾸로
불국사의 말사가 되어 있다고 한다 (자존심 상하겠다ㅉㅉ)
한편,함월산 기림사는 지리상 왜구가 동해를 거쳐서 서라벌로 침입하는 길목에 위치해 있어
임진왜란 때 승군의 지휘본부가 있던 곳으로서 <진남루>를 보니 호국사찰임을 알 수 있다
<대적광전 (보물 제 833호) 유명한 문화재>
대적광전은 기림사의 본전으로 신라 선덕여왕 때 창건되어 조선 인조 7년 (1629)에 중수된 조선시대
대표적 불전이다,대적광전은 지혜의 빛으로 세상을 비춘다는 비로자나불을 모신 법당인데 선덕여왕
12년(643)에 처음 건립되었고 조선조 인조와 정조 때 크게 조성했으나 철종 때 큰불이 나서 경내 모든
건물과 동종이 소실될 때 대적광전만 화를 면하였단다
정면으로 5칸, 측면3칸이며, 지붕은 사람 (人) 자 모양인 단층 맞배지붕으로 다포식 건축양식이다
절집 구경이 흥미로운 것은 그 화려한 건축기법을 살펴보는 것인데 지금이야 돈만 많으면 지붕에
금칠을 한들 누가 뭐라고 하겠느냐마는 옛날엔 계급에 따라 집칸도 함부러 못 짓던 때에 절 만큼은
마음껏 공력을 들일 수 가 있었으니 ~인간의 왕이 사는 곳이 궁궐이라면 하늘의 신이 머무는 곳이
절집이기에 그 모든 건축기법과 가람배치의 구조와 웅장함이 궁궐과 비슷하였으니 불심 깊은
장인들이 평생의 공력을 마음껏 다함에 혼 깃든 걸작품들이 탄생할 수 있었슴이렸다 ~
<예쁜 약사전>
기림사가 있는 함월산은 석굴암이 있는 토함산과 서로 달을 토해내고 머금는 관계라니 재밌는 해석이
다. 풍수로 볼 때 기림사는 용이 날아 오르고 봉황이 춤추는 듯 뭇봉오리가 둘러싼 가운데 물길이
열려 이루어진 광활한 명당으로 신령스러운 거북이 물을 마시는 영구음수형이란다
가끔 이땅의 모든 명당은 사찰이 다 누리는게 아닌가 싶어 좀 약오를 때가 있다 .그렇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까이꺼 내가 개인적으로 집을 짓고 살지 못하는거 대찰이 들어섬에 잠시 다리를 쉬고 경치를 감상
할 수 있는 기회를 누림도 혜택이라 감사하자 , 아미타불~~똑똑 똑또그르....!!! -_-;;
고색이 찬연한 단청과 문살무늬 하나하나 온갖 정성으로 빚은 공력,
참으로 종교적 신심은 예술적 걸작을 이루는 요구필인 듯,
기림사의 보물 <삼존불상 >
< 재밌는 천수관세음보살>
손이 엄청 많다~자비의 저 손으로 모든 중생의 눈물을 딱아준다는 뜻일게다
함월산 기림사는 신라초기 인도 범마라국사문 광유성인이 창건한 선종의 고찰
옆의 골굴사와 같이 불교현지인 인도에서 파견나온 스님,광유성인이 지었나보다
기림사는 전설이 많기로 유명한데 어디 그 전설을 한번 알아보자
우선 천년에 한번 핀다는 우담바라 꽃" 이 있다는데? 어 난 봇봤는데 ~ 어딨었지?
그리고 예로부터 다섯개의 샘이 유명하다는데 ... 이슬같은 물로 차를 끓여마시면 으뜸이라는 감로수
그냥 마셔도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화정수,마시면 기개가 커지고 신체가 웅장해져 장군을 낸다는 장군수
눈이 맑아진다는 명안수, 물빛에 반해 까마귀도 마신다는 오탁수 등등의 약수가 있는데 ..
그 가운데 장군수는 조선시대 이곳에서 역적모의가 발각되어 나라에서 샘의 물줄기를 막아버렸다는 둥
혹시 장군이 날까 두려워한 일본이 그랬다는 둥...전설이 전해지니 일단 한번 마셔보시길 ...
또 , 신문왕이 감은사의 앞바다 대왕암에서 용으로부터 옥대와 만파식적을 만들 대나무를 얻고는 기림
사 서쪽 시냇가에 와서 수레를 멈추고 점심을 들고 쉬는데 마침 태자 (후에 효소왕)가 와서 이 옥대의
한쪽 한쪽이 모두 진용(眞龍)입니다 ~ 옥대의 한쪽을 떼서 물에 넣어 보소서~"한지라 한쪽을 떼어 물에
넣으니 곧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삼국유사에 전해진다니 공갈도 유분수 , 믿어도 되나요?
허긴,전설이란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혹세무민한 우스개농담 같지만 지금처럼 과학적 식견이 없던
시절,전쟁과 기근 천재지변으로 인한 공포심을 위안하는덴 종교와 더불어 필요한 유언비어였을테지
그런 생각으로 다시 길을 떠났는데 ,
어머? ..자스트 몬!!!
잠깐 도로에서 바라보이며 날 오라 손짓하는 수줍은 저 탑은 무엇인고?
스톱!!!!!!!!
차에서 내려 올려다 보니 바로 장항리 폐사지 오층석탑이다 ,답사계획에 없던 석탑을 만남에 마치
횡재를 한 듯 기뻤다는... 바로 줄달음 쳐서 올라 갔다는...
<장항리사지 서 오층석탑 >
아하~안내문을 살펴보니 토함산 동쪽 한 능선기슭으로 절의 이름을 정확히 알 수 없어 마을의 이름인
장항리 를 따서 장항리사지라 한단다 이 절터에 있는 동 .서 5층석탑은 1923년 도굴꾼들이 무너뜨린 것
을 9년 뒤인 1932년에 복원 정비한 것이란다
<깨어진 불상>
이곳에 깨어진 불상이 있었는데 1932년 서탑을 복원하면서 국립경주 박물관 정원에 옮겨 일부를
붙여 세웠다 한다 (윗사진 참조) 바로 요 위에 요런 형태의 불상이 얹혀 있었겠지? 대단한 조각품~
기단 위의 연꽃 좌상의 섬세한 돌조각이 예술이라 넋을 놓고 한참을 들여다 봤다
탑의 모양새는 도깨비형태의 쇠고리가 장식된 두 짝씩의 문을 조각하고 그 좌우에 연꽃 모양
대좌 위에 서있는 인왕상을 정교하게 새기어 희귀한 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조각 수법으로 보아 8세기의 걸작품으로 평가된다
거저 주운 듯한 폐사지 답사를 하고 돌아 나오는 길~ 경덕왕 10년 재상 김대성이 불국사를 지을 때
옛 백제지역 출신의 석공 `아사달과 그의 아내 아사녀'의 애달픈 전설이 서린곳 영지로 가본다
<影池>
불후의 걸작인 다보탑과 석가탑을 완성하기에 여념이 없던 남편 아사달을 찾아 서라벌에 온 아사녀는
이 연못가에서 탑이 완성되기를 기다리다 지쳐 못에 비친 탑의 환영을 보고 아사달을 그리며 물 속에
뛰어 들었다지? 탑을 완성하고 아사녀가 기다리는 영지를 찾아온 아사달은 아내의 죽음을 알고
아사녀를 부르며 못 속에 뛰어들어 죽었다 한다,불쌍해서 우얄꼬 ㅠㅠ
그 뒤로 이 못을 영지라 하였고 그때 못에 그림자가 비친 다보탑을 유영탑 비치지 않는 석가탑을
무영탑이라고 하였다 지금도 못 가에는 옛날 두사람을 위한 영사의 돌부처가 남아 있으며 늦가을
맑은 날 오후에는 불국사가 있는 토함사의 그림자가 못에 비친다는데 내레 확인은 못해봤다
<영지 석불 좌상 >
이 불상은 불국사 석가탑(일명; 무영탑)에 얽힌 전설로 널리 알려진 영지 곁에 있었다
그 전설 따라 이 불상은 아사달이 아사녀의 명복을 빌기 위해 만들었다고도 한다
얼굴조각이 문질러져서 눈 코 입을 정확하게 알아보기 어려웠다
<괘릉>
괘릉은 신라 제 38대왕 원성왕의 능인데 신라 능묘 중 가장 완비된 형식을 갖추고 있다
둘레돌이 울타리처럼 둘러친 속에 십이지신상이 부조되어 있었다
괘릉이라 한 것은 무덤의 구덩이를 팔 때 물이 괴어 널을 걸어 묻었다는 전설 땜에 그리 부르는 거란다
<부조되어 있는 십이지신상의 모습>
황새의 모가지처럼 뒤틀리듯 꺽이여 비스듬이 누워 하늘로 오르는 솔숲 ~ 괘릉의 화표석과 ,문인석
무인석, 돌사자 들과 어울려 소나무 숲이 아름답다, 저 무인석의 얼굴 모습은 서역인(아랍)을 닮았
으니 그 시절 신라가 서역과 활발한 인적교류를 했음을 증명하고 있다 ~아마 신체골격이 신라인보다
튼실한 서역인들을 경호를 위한 무인으로 쓴 것이 아니였을까? 하령 생각 -,-*
히~ 우린 닮았어요~^^쯩말 ~^^*
<선덕여왕릉>
선덕여왕릉 앞에서 잠시 갸웃~!! 좀 전에 본 괘릉 보다 장식이 덜하다 생각했다, 혹시 여왕이라고 차별
하는게야 뭐야? 하고 식식거리고 있는데 ..옆의 답사객 중에 고대 사학과를 나왔다는 어느 남자분이 참
다 못한듯 해명을 자청했다 , 저기요 ~ 남녀 차별이 아니고요~선덕여왕 때는 무덤형태가 원래 이랬답니
다 .. 괘릉 같은 형태는 통일신라 이후의 능묘형태지요~ 켘~ 무식한 하령이 고개가 쏙,머쓱.쩝"
벌써 서산의 해가 뉘엇뉘엇 지고 있는데 아직 갈 곳이 남아 마음이 급하다
<감은사지 3층 석탑>
감은사터 ~사실 이번에 이쪽 코스를 잡은 것은 이곳을 보기 위함이다
동서로 마주보고 서 있는 삼층석탑은 높이가 13.4 미터로 경주에 있는 탑 중에서 가장 장대하다
삼층석탑은 이중 기단 위에 몸체들을 올린 모습으로 처마밑은 받침이 5단이며 지붕 위는 곡면을
이루어 통일 신라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감은사는 신라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한 뒤 왜구의 침략을 막고자 이곳에 절을 세우기 시작하여 신문왕
2년에 완성한 것이다, 감은사는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문무왕의 유언에 따라 동해의 대왕
암에 장사를 지낸 뒤 용이 된 부왕이 드나들 수 있도록 금당 밑에 특이한 구조로 된 공간을 만들었단다
말하자면 절집 밑이 수로 라는 소린데 ~ 요즘 이명박 대통령의 야심찬 경인운하프로젝트처럼 그 당시
신문왕의 야심작 수로 아니였을까 싶다 ~생각해보라 ~동해의 용이 샤샥 꿈틀거리며 드나들었던 이
수로를! 대단하다 효 와 호국의 의지가 빚어낸 기발한 발상과 상상력이 빚어낸 놀라운 디자인 아닌가!!!
1959년 12월 서탑을 해체보수할 때 3층 몸돌에서 건립당시 설치하였던 매우 정교하고 귀중한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996년에 동탑을 해체보수하였는데 3층 지붕의 상면 사리공에서
금동사리함이 발견되어 신라시대의 문화예술적 가치를 더듬는 잣대인 유물로 전해진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가보고 싶었던 폐사지인 <감은사지 3층 석탑 >에 땅거미 부드럽게 스미는데
둥근 천정의 하늘은 오색의 원구슬처럼 광채를 발하는 시간, 뉘엇뉘엇 지는 석양아래 두팔을 벌리니
잠시 하늘과 땅을 잇는 시간의 결계에 갇힌 듯 몽환스러운 기분에 한껏 빠져든다
경주여행 2편 여기까지...
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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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일출에서 일몰까지 고생 많으셨는데 전 너무 편하게 봐서 죄송한 생각이 드네요~ 감사합니다.
넹~ 감사해요~^^*
하령님의 경주여행기 감명깊게 보았습니다~~~
산산수수님 안녕하세요~~ ^^
많은 공부하고 갑니다...고맙네요~`
에이~~ 밸 말씀을요~~ 제가 고맙지요~~ 안녕 하시지요? ^^
나는 맨날 신문에 깔려 죽을 판인데 신문왕의 감은사에 댕겨 오다니....
ㅋㅋ 긍게 숨 쉬라니깐요.. ㅋ 담엔 잡지왕릉에도 가볼 참 입니당~~ ^^
해박한 지식과 능란한 글 솜씨에 감복하나이다.. 덕분에 잘 보고 갑니다만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석두를 어이하오리까....
감사합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님의 現代史적 편견은 바로 역사에 토를 달아 주셨어
읽는데로 감미롭고 향기가 납니다. 오늘도 한 지방의 또 하나의 자랑과 지리적 역사공부
잘 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