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요한 밤
지금으로부터 약 200년 전, 멀리 알프스 산맥에 위치한 한 산골마을에서 있었던 일이다. 구체적으로는 1818년 12월 어느 날, 모차르트의 고향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약 20km 떨어진 오베른도르프에서였다.
크리스마스 축제를 앞두고 요제프 모어라는 이름의 젊은 신부(神父)가 평소 가깝게 지내던 프란츠 그루버 선생에게 제안을 하나 했다.
“선생님, 사람들을 위해 뭔가 함께 만들어 보시죠!”
그루버 선생은 이웃 마을 학교 교사로 주일엔 오베른도르프 성당(聖堂)에서 오르간 반주자로 봉사를 하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인 12월 24일, 모어 신부는 그에게 ‘Stille Nacht, heilige Nacht 슈틸레 나흐트, 하일리게 나흐트’로 시작되는 가사를 넘겼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어둠에 묻힌 밤
주의 부모 앉아서 감사기도 드릴 때
아기 잘도 잔다. 아기 잘도 잔다.”
바로 이 성탄곡 가사였다. 그루버 선생은 무슨 영감을 받았는지 이 노랫말에 즉각 곡을 붙였다. 그렇게 우연히, 그리고 불과 몇 시간 만에 완성된 성탄절 노래,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은 그날 저녁예배 시간에 최초로 세상에 울려 퍼졌다. 그것도 오케스트라는커녕 오르간도 고장이 난 바람에 조촐한 기타 반주에 맞춰.
이 노래가 전 세계로 전파되는데 기여한 사람은 1859년 독일어 가사를 영어로 번역, 미국에 소개한 그곳 성공회 주교(主敎) 존 프리먼 영이었다.
우리나라에는 한국전에 참전한 미군들을 통해 알려져, 요즘은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대표적인 캐럴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영광에 둘린 밤
천군천사 나타나 기뻐 노래 불렀네.
왕이 나셨도다. 왕이 나셨도다.”
성탄전야에 참으로 잘 어울리는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은 세상에 태어난 지 약 백년 후인 1914년 12월 24일, ‘기적’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벨기에 이프르 전선(戰線)에서 대치중이던 독일군과 영국군을 감동시켜 이른바 ‘크리스마스 정전(停戰)’을 이끌어냈던 것이다.
최근에도 금년엔 크리스마스를 계기로 “우크라이나 영토에 있는 러시아 포로와 러시아 영토에 구금된 우크라이나군에게 친척들이 보낸 편지와 소포를 인도주의적으로 교환”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도 이제는 예전과 같은 감동을 주지 못하고 있다.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 커지고 있는 반기독교 정서, 무엇보다 그리스도교의 강력한 보루였던 유럽대륙에서 진행되고 있는 탈기독교 현상 때문이다.
여기까지는 많이 알려진 이야기. 그러나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다들 생소할 것이다. 오랫동안 나 혼자 가슴에 품고 있었던 의문에 관한 것이니까.
“무슨 의문?”
그렇다. 나에겐 이 곡을 들을 때마다 떠오르는 의문이 몇 가지 있다.
“왜 이 노래가 예수님이 세상에 태어나신지 무려 1800여 년이 지난 그 시점에, 그것도 베들레헴이나 나자렛에서 멀리 떨어진 유럽의 한 마을에서 태어났을까?”
“혹시 그 즈음 그 인근에 태어난 제2의 예수라도 있었던 건 아닐까? 그래서 ‘세상의 빛’이 된 그 인물을 찬양하기 위해 이 노래가 태어난 건 아닐까?”
참 유치할 수도 있고 엉뚱할 수도 있는 질문. 그러나 세상엔 기적과 같은 우연의 일치라는 게 종종 있지 않았던가? 더구나 그 시기는 전 세계적으로 재림예수를 고대하는 천년왕국운동이 최고조로 활발했던 시기가 아닌가!
그래서 내가 신화적 상상력을 동원해 던진 질문은 다음과 같다.
“만에 하나,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이 ‘예스!’라면, 그즈음 태어난 ‘제2의 예수’는 누구일까?”
만약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 작곡가와 작사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즈음 태어난 제2의 예수, 장차 ‘세상의 빛’이 될 인물을 찬양하기 위해 ‘스스로’ 자신을 드러냈다면, 그 주인공은 누구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아 보인다. 그런 인물은 필히 역사 속에 자신의 지문을 남겼을 것이니까. 전 세계를 망라한 인명사전 속에서 1818년, 강보에 싸여 잠들었던 인물들. 그들 가운데 그럴만한 후보를 물색해서 백 명,십 명, 세 명 이렇게 후보군을 좁혀 들어가면 된다는 말이다.
만약 누군가 이 질문을 20세기 중반, 세상에 던졌다면, 그 후보들 가운데 가장 유력한 인물은 분명 카를 하인리히 마르크스였을 것이다. 그는 1818년 5월 5일,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인근에 위치한 프로이센 (오늘날의 독일) 트리어에서 세상에 태어났다. 즉 그해 성탄절, 7개월 된 아기의 몸으로 강보에 쌓여 있었다는 말이다.
마르크스가 누군가? 1999년과 2005년 발표된 영국 BBC 라디오 여론조사 결과, 각각 “지난 세기 가장 위대한 사상가”와 “이 시대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 선정이 되기도 한 인물이 아닌가!
그러나 그건 – 해당 여론조사에 왜곡이나 조작이 없었다 하더라도 – 영국 이야기. 이제 그는 후보군에서 완전히 탈락했다. 한때 그를 구세주로 여겼던 사람들조차 거의 모두 그런 환상에서 깨어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가장 강력한 후보로 남아 있는 인물은 누구일까? 1818년 12월 당시, ‘부모가 곁에 앉아서 감사기도 드릴 때, 잘도 잠을 잤던 아기들’. 그 중에서 마르크스를 제외한 인물들 가운데 있을 수 있는 제2의 아기 예수!
이 글을 읽는 독자는 각자 한번 도서관을 뒤지거나 구글링을 해보기 바란다. 나는 물론 찾아보았고 결론까지 내렸다.
평생 이 주제를 연구하고 탐색한 학자로서, 나는 그 주인공이 1817년 11월 12일, 페르시아 (오늘날 이란) 테헤란에서 태어난 미르자 호세인 알리, 즉 바하이신앙의 창시자 바하올라 외엔 달리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찬송가가 멀리 알프스 산골마을에서 최초로 울려 퍼질 당시 막 돌을 넘겼던 아기. 바하올라는 1863년, 본인이 직접 재림 예수라고 밝히기까지 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유분수지, 이게 대체 무슨 말일까?
“미친 놈!” 혹은 점잖게 “상상력이 선을 넘었다”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겠고, 어불성설이라고 화를 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떤 판단이든 그것은 각자의 몫이다.
아무튼 나의 주장이 옳다면,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은 머지않아 단순한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실로 불가사의한 동시성[synchronicity]의 한 사례로 널리 인구에 회자될 것이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주 예수 나신 밤
주의 얼굴 광채가 세상 빛이 되었네.
왕이 나셨도다. 왕이 나셨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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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mr66TH0W0J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