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느헤미아, 김교신(金敎臣)의 종교인식
- 우리는 오직 성서를 배워 성서를 조선에 주려 하노라 -
누구에게나 인생에서 좋은 스승, 부모, 배우자, 친구를 만나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은 없을 것이다. 물론 한 민족이 훌륭한 지도자를 만나는 것도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나부터 좋은 스승, 부모, 배우자, 친구가 되는 게 쉽지 않은 시대를 살고 있다. 더구나 지금 이 나라에는 존경하고 따를만한 지도자가 없다는 사실이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한다. 왜 우리에게는 이란의 호메이니, 남아공의 만델라, 태국의 푸미폰 같은 지도자가 없을까.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심지어 진리와 양심의 최후 보루라고 해야 할 종교계도 우리가 믿고 따를만한 진정한 지도자를 찾기 어렵다. 참으로 우리는 지도자 빈곤의 시대를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에게도 기라성 같은 민족의 지도자들이 있었다. 안창호, 이승훈, 김구, 이승만 등등....그 가운데 일제 강점기, 성서조선을 절규하며 불꽃처럼 치열하게 살다 간 김교신이 있었다. 약육강식, 힘의 논리만 지배하던 20세기 전반기의 한반도와 일본열도는 참으로 암울한 공간이었다. 하지만 그 고난의 시대, 그 절망의 공간에 어둠을 밝힌 진리의 등불들은 있었다. 복음과 크리스천의 양심으로 군국주의 일제의 폭력에 온몸으로 저항했던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 가가와 도요히코(賀川豊彦)가 일본에 있었다면 식민지 조선에는 김교신이 있었다. 그는 온 민족이 노예의 시간 속에서 절망하고 탈진하고 있을 때 ‘성서조선’을 외치며 복음으로 희망의 불씨를 살려냈던 이 민족의 그리스도인 선각자였다. 이를 통해 김교신은 기독교 신앙의 크기와 깊이를 온몸으로 보여 준 인물로 한국 개신교사에 그 이름을 남긴다.
김교신은 1901년 4월 18일 함흥에서 출생했다. 젊은 날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세이쇼쿠(正則) 영어학교를 거쳐 동경고등사범학교에서 공부했다. 이후 그는 동경고등사범학교 영어과에서 지리박물과로 전과해 졸업했다. 하지만 그에게 다가온 인생의 전환점은 우치무라 간조를 성서연구회에서 만난 때였다. 그가 기독교로 입신(入信)하고 일본교회의 분열과 갈등을 목격한 이후의 일이었다. 김교신 역시 우찌무라나 도요히코처럼 제도권 교회에 크게 실망하면서 갈등의 시간을 경험할 때였다. 이후 김교신은 ‘도처가 교회요 일상이 예배’라는 신념 아래 일생을 무교회주의자로 살아갔다. 나아가 그는 민족과 종교의 일치라는 신념 하나로 오히려 역사와 영성의 만남을 통해 신앙의 위기를 극복해 나갔다. 요컨대, 김교신이 보여준 거듭남(born again)의 종교인식과 이른바 ‘조선산 기독교’의 틀은 결국 믿음의 선각자 우치무라 간조와의 만남을 통해 이루어진 셈이다.
김교신의 무교회주의는 우치무라 간조의 무교회주의를 조선의 상황에 맞게 재해석하고 적용한 것이다. 그의 종교운동은 서구식 교회주의, 즉 신앙의 본질과 관련 없는 외적형식을 비판하고 오직 ‘성서중심’을 강조하면서 잡지(성서조선)의 간행, 평신도 성서연구모임을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특히 그는 성서해석에서 문자주의적 해석을 비판하면서 근대적 성서비평의 차원에서 헬라어 성서로 공부했다. 또 선교사들이 이식한 교파주의를 극복하고 신앙의 민족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우리의 강토, 언어, 문화, 전통 종교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통해 우리 민족의 체질에 맞는 기독교 신앙을 표현하고자 노력했다. 무교회주의는 제도권 교회와 일제로부터 모두 비판을 받았지만 기독교 신앙을 부정한 ‘이단’이라는 주장은 무교회주의 운동의 교회사적 의미를 간과한 비판이라는 지적을 받는다.
일본에서 귀국 후 그는 양정고보 등 몇몇 학교에서 지리를 가르치면서 유달영, 손기정을 비롯한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그리고 일제의 가혹한 식민 통치기에 김교신은 『聖書朝鮮』이라는 기독교 잡지를 발간해 젊은 학생들에게 기독교 정신에 바탕을 둔 성서적 민족혼을 일깨웠다. 이로 인해 일제 당국에 의해 불온 인물로 낙인찍혀 교직에서 추방된다. 그의 스승 우찌무라 간조가 걸었던 길이었다. 게다가 ‘성서조선’이 저 유명한 ‘조와(弔蛙)’ 필화사건으로 폐간되면서 그는 일제에 의해 옥고를 치르는 수난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감옥에서도 그는 하루에 주기도문을 300번씩 암송하면서 매일같이 새벽기도와 냉수마찰로 영육 간 절제를 실천했다. 출옥 후 김교신은 함흥 질소비료공장 조선 노무자의 숙소를 관리하는 주택계장이란 직장을 얻는다.
그는 당대 최고 지식인의 모든 자존심을 흔쾌히 포기한 후 조선인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신념으로 살았다. 그는 죽는 날까지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강제 징용된 동포들에게 기독교의 참된 신앙과 독립정신을 고취했다. 이를 위해 조선 노동자를 위한 야학을 열고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김교신의 삶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건강을 돌보지 않은 헌신적 봉사로 그의 몸은 날로 더욱 쇠약해졌다 그러던 중 1945년 4월 25일 해방을 넉 달 남짓 앞두고 당시 그가 머물던 함흥지방을 엄습한 장질부사에 걸려 45세의 젊은 나이로 죽음을 맞았다.
김교신이 그의 일생을 통해 심혈을 기울인 것은 ‘성서조선’의 간행이었다. 그는 ‘성서조선’에 모든 것을 바쳤고 이것은 그의 삶에서 최대의 것이요 전부였다. 비록 158호에 이르기까지 적자로 일관되기는 했지만 ‘성서조선’은 김교신의 종교인식을 남김없이 담아낸 결정체였고 이른바 ‘조선산 기독교’의 상징이었다. 김교신은 먼저 서구우월주의에 빠져있는 미국 선교사들의 조선 인식을 비판했다. 조선을 구원할 기독교는 오직 조선인의 심성(心性) 안에서 직접 체득된 것, 그러한 존재로 변화된 조선인에 의해 전파되는 기독교, 그런 기독교가 조선인의 정신세계를 심화시키고 조선의 역사를 변혁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조선인이 성서를 통해 깨어 일어나 그들 스스로 성서를 조선인에게 나눌 수 있을 때 비로소 조선을 성서적 진리 안에 세울 수 있다고 주장했다.
김교신은 하나님을 소문으로 만나는 것에 그치지 않았고 직접 만났던 그리스도인이었다. 이를 통해 그리스도를 단순히 따라다니는 ‘군중’의 한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의 삶을 형성해가는 ‘참 제자’가 된 것이다. 그 결과 그는 기독교란 무엇보다 ‘잘 죽자.’는 종교, 그러므로 부활을 통해 질적으로 다른 삶을 살자는 종교라고 인식했다. 실로 그는 기독교의 종교적 진리에 대해 제대로 질문하고 제대로 대답함으로써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참 진리를 가르친 선각자였다. 이제 ‘성서조선’에서 밝힌 김교신의 종교인식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오늘의 신자를 향해 ‘그대가 믿는 자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란 어떤 것입니까? 교회 명부에 이름이 있는 것이요. 주일과 기도회에 열심히 참석하는 것이요. 날마다 성경을 보고 목소리 높여 찬미하고 장강유수(長江流水)처럼 기도하는 것이요. 연보하고 구제하는 것입니까......
오늘의 신자를 향해 ‘그대가 예수 믿는 목적이 무엇이냐?’라고 물으면 곧 대답하기를 ‘죄 속함을 입어 영생에 들어가기 위하여’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이 그렇습니까? 그보다 생활이 나아지기 위해, 남의 신용을 얻기 위해, 인격 수양을 위해, 사회사업을 하기 위해 믿는 자가 더 많지 않습니까? 그 증거로는 저희 중에 자기의 죄를 슬퍼하는 자가 없습니다. 그들은 죄라면 살인강도나 간음, 사기, 도둑질 같은 법률상의 죄로만 알 뿐이요, 그것이 없는 한 자기는 의인(義人)인 줄로 압니다. 기도할 때는 습관처럼 ‘저는 죄인이오나......’ 그러나 머리를 들면 자기는 죄인이라는 생각이 사라집니다. 영생을 원한다고는 하나 이것은 노인에겐 욕심이고 젊은이에겐 공허함입니다. 불신자가 누리는 세상의 영화는 다 누린 후 천당에 가서 불신자가 못 가지는 복락을 또 한 가지 얻자는 것이니 욕심의 변태가 아니고 무엇이며 몸은 비록 죽으나 정신은 후세에 남는 것이라고 하니 텅 빈말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신앙은 안에 있는 것이요 밖에 있지 않으며 양심에 있고 행동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통회(痛悔)하는 영혼이요, 제사가 아닙니다. 고로 모든 교회의 규범을 다 지키고 외형의 행동을 선히 하여도 ‘나’를 하나님께 바치지 않는 이상 신앙은 아닙니다. 내 영혼이 구원 얻기 위하여, 내 인격이 높아지기 위하여, 내 가족, 내 민족이 잘 살기 위하여 하나님을 부르는 것은 아무리 열심이 있고 경건이 있어도 신앙은 아닙니다......그리고 이처럼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사람이 자기중심이 되는 것은 다 죄이기 때문입니다......’
김교신의 종교인식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지도자의 삶을 살아야 할 그리스도인의 길이다. 요컨대 김교신은 조선의 느헤미야였다. 성경의 느헤미야는 왕의 술 관원이라는 일신의 영광을 버린 사람이다. 오히려 동족의 비극을 슬퍼하며 하나님 앞에 민족의 회개를 눈물로 기도하고 무너진 예루살렘성을 쌓았던 인물이다. 김교신이 그랬다. 그는 당대 지식인의 보장된 행복을 포기하고 고난으로 얼룩진 지도자의 길을 스스로 걸어간 선각자였다. 그는 식민지 조선의 고통을 복음으로 극복하기 위해 무너지고 짓밟힌 동족의 정신 속에 조선인의 예루살렘 성을 쌓아나간 것이다. 이것이 바로 김교신이 그토록 원했던 성서 위의 조선이었기 때문이다. ‘성서와 조선’이 아닌 ‘성서 조선’, 즉 성서와 한 몸이 된 성서로 쌓아 올린 ‘조선’인 것이다.
구약성경 느헤미야서의 기록은 언제나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준다. 나아가 위기의 시대에 지도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한다. 동시에 지도자는 어떤 역할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하는가를 보여준다. 지도자는 먼저 금식하며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구원의 사역을 시작한다. 하나님은 회개의 기도, 눈물로 간구하는 기도가 없으면 그 어떤 땅 위의 역사도 시작하지 않으시고 이루지도 아니하신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도자에게는 불변의 영적 진리다. 언제 어디서나 지도자의 기도는 노예근성에 젖어 탈진한 민족에게 새 힘을 주고 방황하는 민족에게 생명의 길을 제시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느헤미야의 민족을 위한 기도와 김교신의 동족을 위한 산상 새벽기도, 그리고 그들이 보여 준 거룩한 생명 사랑은 참으로 측량할 수 없는 민족을 향한 사랑의 실천이었다. 기도하는 지도자 한 사람의 힘은 기도하지 않는 한 민족의 힘보다 더 강하다는 말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시는 지도자를 가진 민족보다 더 행복한 민족은 하늘 아래 그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복음적 관점에서 지도자의 개념은 확대해석이 가능하다. 지도자는 지배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지도자는 결코 군림하는 자리, 다스리는 자리가 아니라 베푸는 자리다. 지배자가 법과 힘으로 타인을 복종시킨다면 지도자는 사랑과 희생으로 이끌어 줄 뿐이다. 그래서 이해하고 사랑하고 감싸 안고 기도해 주고 모범을 보여야 할 누군가가 내 주변에 있다면 우리는 누구나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과 희생으로 이끌어 준다면 나는 이미 그의 지도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적 지위의 높고 낮음은 결코 지도자를 판단하는 기준이 아니다. 요컨대, 세상 모든 공동체의 평화와 행복한 인간관계는 우리가 서로에게 지도자의 모습으로 바로 설 때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다. 더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날마다 지도자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왜냐하면 참믿음의 수준에 이른 사람들은 언제 어디에서 머물지라도 이미 다 지도자이기 때문이다.
믿음의 유형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자신과 가족의 치병구복(治病求福)만을 기원하는 수준이다. 흡사 성서에 매달려 세상에 얹혀서 살아가는 참새 같은 믿음이다. 하지만 나와 가족을 넘어서서 이웃과 나라와 민족을 위해 그리고 사회적 정의를 위해 헌신하는 수준은 성서 위에 바로 서서 세상을 세워나가는 독수리 같은 믿음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원하는 큰 믿음의 길, 그것은 샤머니즘의 수준을 벗어나 느헤미야의 수준, 즉 지도자의 길로 나아가는 믿음이다. 그럼 오늘 이 나라의 숱한 젊은이들이 ‘헬조선’이라고 자조(自嘲)하는 이 땅 위의 교회들과 그리스도인들은 어떤가? 사람들은 지금의 한국교회를 향해 힘과 숫자와 돈을 내세우며 성공을 자랑하는 도그마의 언어로는 더 이상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할 수 없다고 말한다. 또 이 나라의 그리스도인들은 시대의 어둠을 등진 빛, 짠맛을 잃어버린 소금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지금 김교신의 올곧은 믿음의 삶을 되돌아보는 것은 진실로 살아있는 기독교의 참 신앙을 그리워하기 때문이다.
* 이글은 필자가 집필한 『영주중앙교회연보』 3호에 실린 내용입니다. 비록 8년 전 글이지만 오늘의 한국교회와 자신의 종교인식을 위한 유의미한 시사점이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 최익제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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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서조선』의 주요 내용
(1) ‘성서 조선아! 너는 우선 이스라엘 집집으로 가라. 소위 기성 신자의 손에는 거치지 말지니 기독보다 외인을 예배하고 성서보다 회당을 중시하는 자의 집에는 그 발의 먼지를 털지어다. 성서조선아! 너는 소위 기독신자보다 조선 혼을 소지한 사람에게 가라. 시골로 가라. 산촌으로 가라. 거기의 초부(樵夫) 한 사람을 위로함으로 너의 사명을 삼으라.’ / 1927년 7월, 창간사.
(2) ‘봄비 쏟아지는 새벽, 이 바위틈의 빙괴도 드디어 풀리는 날이 왔다. 오래간만에 친구 와군들의 안부를 살피고자 못 속을 구부려 찾았더니 오호라! 개구리 두세 마리 못 꼬리에 떠다니고 있지 않은가? 짐작컨대 지난 겨울의 비상한 혹한에 적은 못 물의 바닥까지 얼어서 이 참사가 생긴 모양이다. 예년에는 얼지 않았던 데까지 얼어붙은 까닭인 듯 죽은 개구리의 시체를 모아 장례하여 주고 보니 못 바닥에 아직 두어 마리 기어 다닌다. 아! 전멸은 면했나 보다.’ 이 글은 가혹한 일제의 식민통치에 저항하는 우리 민족의 끈질긴 생명력과 그의 생명 사랑 사상을 동시에 보여준 김교신 글의 백미라 할 수 있다. / “조와(弔蛙)”, 1942년 3월호.
(3) ‘사랑하는 자에게 주고 싶은 것이 한둘이 아니다. 하늘의 별이라도 따주고 싶으나 인력의 한계가 있도다. 혹자는 음악을 조선에 주며 혹자는 문학을 조선에 주며 혹자는 예술을 주어 조선에 꽃을 피우며 옷을 입히며 관을 씌울 것이나 오직 우리는 조선에 성서를 주어 그 뼈와 힘줄을 세우며 혈액을 만들고자 한다. 같은 기독교도로서 혹자는 기도생활에서 법열의 장을 주창하며 혹자는 영적 경험의 신비의 세계를 역설하며 혹자는 신학지식의 조직적 체계를 애지중지하나 우리는 오직 성서를 배워 성서를 조선에 주고자 하노라. 더 좋은 것을 조선에 주려는 이는 주라. 우리는 다만 성서를 주고자 미력을 다하는 자일뿐이다.’ / “성서조선의 해”, 1935년 4월호
(4) ‘무릇 세상에서 노역 가운데 폭양에 쪼이면서 김매는 일보다 더 괴로운 일은 없다. 아담을 저주할 때부터 시작된 김매기는 노역 중의 노역이니 노역의 왕이 되었다. 그러나 대지를 밟고 앉아 잡초를 뽑아 곡식을 가꾸는 일처럼 건강에 효과적인 일은 천지개벽 이래 다시없을 것이다. 잡초란 무엇인가? 목적한 작물 이외의 것이 모두 잡초다. 고로 마늘 밭에 아욱이 났어도 잡초요 감자밭에 보리가 섰어도 잡초다. 즉, 자기가 섰어야 할 자리에 서지 않은 것은 모두 잡초라 할 것이니 뽑아 제치는 일이 심히 유쾌하지 않으랴. 주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제 자리에 서지 않고 주제넘게 뻗어가는 모든 잡초를 뽑아버리실 것이니 이것을 생각하며 김을 매라.’ / “김매기”, 1940년,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