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 용산기지/광복 후 미군 주둔지
1. 8.15 광복 후 미군 주둔
2. 2017년 12월 31일까지 미군기지 경기 평택. 오산으로 이전 완료 예정
- 서울시 미군기지 자리에 공원 조성게획
3. 용산(龍용용산)이란 이름 : 용산구와 마포구에 걸쳐 있던 산의 봉우리와 산세가 마치 용, 이무기를 닮았다 해 붙여짐.
* 고려 이인로의 용산 모습 묘사 글
"봉우리가 굽이굽이 서려서 혀ㅇ상이 푸른 이무기 같다"고 글로 묘사.
4. 용산 미군기지의 경과
- 독서당 자리 : 조선시대 집현전 학자들의 공부공간.
- 조선초에는 전국에서 조세(곡식)를 조운선으로 거두어 들여 용산 창고에 보관
- 국가의 군량미와 군수물자 보관(원효로 3가 인근)
5, 용산기지 외국군대 주둔
ㄱ. 고려 13c말 중국에 원 건국(몽골 황제 쿠빌라이 칸)
- 고려 침략, 고여 왕을 자신의 사위로 삼음.
- 일본 정벌 병참 기지(군사작전에 필요한 병사와 인력, 군수물자 를 보급, 지원하는 부대 근거지)
를 용산에 둠.
ㄴ. 조선말기 청군과 일본군 주둔/흥인지문 가토 기요마사
- 임란때는 평양전투에서 패한 고니시 유키나카(숭례문으로 입성) 원효로, 청파동 일대에 잠시 주둔
- 임오군란(1822, 6.10) : 신식군대와의 차별을 견디지 못한 구식군대 반란
* 임오군란을 계기로 3000여명 청군 들어와 용산 주둔 - 창덕궁 단봉문을 통해 이천해서 충주까지 도망 후 명성황후 청에 군대 요청 : 일본군 몰아 냄. 흥선대원군 임오군란 배후 조종 인사로 지목 청나라로 강제압송.
-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군 승리 이후에는 청군 물러가고 일본군 주둔 : 1895년 10월 8일 경복궁 건청군 곤녕합에 미우라 명성황후 시해(을미사변) - 그때 용산에 주둔한 일본군들이 동원 됨.
ㄷ. 1905년 러일전재 승리 일본 용산에 수만명 주둔 가능한 병영 건립 및 1904년 2월 이지용과 맺은 한일의정서를 내세워 용산 땅 300만평 헐값에 매입 및 그중 115만면 군사기지로 사용,
- 조선 주둔 일본군 사령부, 조선총독부 관저, 일본 20사단 사령부 설치 및 일본군 약 2만면 주둔
- 용산은 일제가 조선 무력통치하고 만주 침략의 후방기지로 활용
ㄹ. 1945년 해방 일제 패망 후에는 미 7사단 용산 주둔, 일본군 주요시설 접수 및 잠시 머물다가 떠남.
- 6.25전쟁 발발 미군 들어와 1953년 휴전협정 체결 이후 1953년 8.15일 부터 미군 용산에 오늘까지 주둔.
6. 한일의정서 : 1904년 2월 23일/친일파 이지용
- 러일전쟁(1904년 1월)발발 대한제국 중립선언
- 일본 대한제국을 자기편화 밀 전쟁 승리 해 유리한 고지 점령을 위해 강제로 의정서 체결.
* 대한제국은 일본에 충분히 편의를 제공하고, 일본은 이 목적을 위해 군사 전략상 필요한 지점을 일정기간 사용할 수 있다.(친일파 이지용, 1904년 2월 23일) : 이 의정서를 근거로 용산에 군대 주둔 및 일본군사령부, 조선총독부 총독이 머무는 관저 건립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