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나무, 숲에 관한 시모음 36)
겨울나무의 꿈 /김재진
한 철 자지러지게 피고자
무서리 내리던 밤 고독과
서릿발 같던 마음 다독여
무던히 인내하던 겨울나기
따스한 봄볕 한 줌 움 틔우고
꽃잎도 꼼지락꼼지락 피어나
이렇듯 아름다운 세상 보았기
숨비소리 지속하면 좋으련만
성근 꽃잎이 투 뚝 떨궈진다
갈바람에 속절없이 나뒹군다
허투루 지는 꽃잎은 애가 타고
소슬바람에 낙엽 되어 짠하다
저무는 노을빛이 하냥 곱듯이
안산에 붉게 물들어 내리는 것은
짧은 인연에 긴 여운을 남겨서
꿈결 속 아련한 그리움 되리다.
겨울나무 /서금순
산골의 겨울은 나목과 함께 온다
벌거벗은 가지 끝엔
차가운 바람이 울다가고
간간이 구름도 머물다 간다
연초록으로 빛나는
봄물 오른 나무도 예쁘지만
따스한 외투 한 벌
장갑이나 목도리조차
걸치지 않은 채 자신의 민낯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겨울나무는 의연하다
새들이 가지를 흔들어도
허허 웃어넘기고
뺨을 때리는 세찬 바람과도
윙윙 그네를 타고
하늘과 달과 별들의 속 이야기도
가만히 들어준다
소복소복 하얀 눈 내리면
비로소 따스한 솜옷도 입을 테지
홀로 드러나기 보다 기꺼이
배경이 되어 줄줄 아는
아름다운 조연
깊어지는 겨울
아침을 흔들어 깨우며
쉼없이 흘러가는 계곡 속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가 함께 흘러가는
겨울나무
겨울나무 /안영준
하나 망설임 없이 제 몸 불사르고
본분을 드러내는 나무도
많은 아픔은 있을 것이다
만고풍상을 견디며
청춘을 몸 바치고 느지막이
싸늘한 옷을 걸치고 있는 나무는
사리 몇 량쯤은 품고 있을 것이다
벌거숭이의 몸으로
당당하고도 용맹스러울 수 있음은
가장 참된 수행길 일 것이다
엄동의 혹한에서
성장통을 겪으며 동안거 들어
도량을 베풀며 득도 수행 중이다
겨울나무 /이재환
잎 다 시집 보내고
앙상한 가지만 남기고
외롭게 쓸쓸히 서 있구나
식구들 출근하고
텅 빈 집에 홀로 있으니
나도 네 신세와 같구나
겨울숲은 저 홀로 정정하다 /고재종
쑥대밭 된 희망을 끌고 뒷산에 오르는데
눈발 한점 없이 쟁명한 소한
바람 하나는 온통 쟁쟁한 울음이도다
텅 빈 들길을 지나 이윽고 들어선 산 초입엔
성성하던 백발 죄다 뜯기고 긴 꽃대궁과 잎새만
바싹 벼린 바람의 날에 씻기고 있는 억새밭
그곳에서 장끼와 까투리 앓는 소리를 듣는다
그 사랑자리가 꼭 살 베이는 억새밭이어야 했는지
다만 메마른 것은 늘 메마른 바람을 부른다
좀더 올라 떼찔레며 칡덤불 얼크러진
그곳에 우수수 쏟아진 붉은머리오목눈이떼
그들이 콕콕 찍는 빨간 열매는
그 무리에 비하면 양이 너무 적겠다
새들에게도 겨울양식은 늘 부족할 것이다
새야 새야 그러나 저 빽빽한 잡목숲에
아직 손가락만한 크기의 어린 떨기나무들은
발가벗은 어린아이와도 같이
회초리도 휙휙 후리며 겨울을 잘 나고 있다
도리깨를 만들던 간부태나무, 열매기름을 짜서
석유 대신 쓰던 산초나무, 잎을 찧어 냇물에 풀어
그 독으로 고기를 잡던 때죽나무, 김치에 넣어
향을 내던 잰피나무, 싸리비 매던 싸릿대,
열매의 빨간 빛이 너무 좋던 마가목과
참빗살나무, 깨금나무, 정금나무, 갈매나무랑
이름이 반짝이던 나무들도 그 이름까지
다 벗어버린 정갈함으로 바람에 씻기고 있다
그때 마침 따다다다닥 따다다다닥
소리 들려 고개 번쩍 드니 아아 거기
오동나무를 온통 구멍내고 있는 청딱다구리여
너 일하는 소리 있어 숲도 비로소 이 세상이다
네 소리에 홀려 걷다보니 바스락바스락
이윽고 가랑잎 속에 푹푹 발 빠지는 걸 몰랐다
참나무숲인 걸 몰랐다, 바스락거리는 것은
발 밑만이 아닌 숲 전체인 것이니
갈참 굴참 물참나무 상수리나무 도토리나무들
대개는 황갈잎 추하게 달고 한없이 바스락거리며
숲속의 정정한 고요를 여지없이 흔들고 있는
겨울숲에도 욕심으로 타락한 것들 너희다
아니다 아니다 참나무밭엔 돌보지 않은 무덤들
하나 둘 흙무더기로 주저앉은 무덤들
또또 애장무덤들 많아서, 어쩌면 그 슬픔으로
저 참나무잎들 참말로 떨어지지 못하고 우는도다
오호 그래서 죽음은 서러운 것이다
어느 무덤 둘레에 심은 산수유나무의 따내지 않은
그 열매를 쪼으고 있는 곤줄박인가 어친가 하는
그 새도 묻힌 자의 한 영혼인지도 모르겠다
삐비비비 우는 소리에 저승내음이 묻었다
그러다 나는 어느 순간 새하얀 나라에 들도다
내 어릴 적 마을사람들이 공동으로 개간하다
돌자갈 많아 버린 그 개간지터에 심은
은사시나무떼 무단히 하늘 찌르게 자라서
그 시원히 벗어버린 알몸들이 새하얀하다
그 하얀 몸이 황갈색 조선숲 속의 이방인 같다
사람은 어리석어 숲속에다가 부조화를 연출했도다
이윽고 이윽고 나는 청설모를 쫒아간다
한 열마리나 되는 청설모떼가 쏟살같이 나타나
그 뒤를 허억허억 쫒았으나 청설모는 그만
나무와 나무 위로 몸을 날리며 사라지고
내 영혼은 마침내 웅엄한 교향악 속에 들었도다
머언 광야를 달려온 듯 웅웅대는 청솔바람소리
그 장엄의 소리는 꼭이 시원에서 들려오는 소리
아니고선 저러할 수 없는 청솔바람소리
그러다가도 또 어느 순간엔
쏴아쏴아 지친 몸에 찬물 쏟아붓는 소리이다가
솨알솨알 쑥대밭된 희망을 빗질하는 소리이다가
급기야 부리부리한 눈 부릅뜨게 하여, 어느
먼 정신에게로 뜨거이 치닫게 하는 청솔바람소리
나 그 솔숲에 강렬한 경건함으로 서 있노라니
겨울숲은 다 벗어버리고 저 홀로 정정하다
겨울숲은 울음 깊어 저 홀로 성성하다
겨울숲은 제 품엣것들 모두 제 삶으로 엄정하여
나 그만 쩡쩡 추운 겨울숲에서 온몸 달아오른다
그 뜨거움에 겨워 계곡으로 미끄러져 내려가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뭔가 기척을 느껴 돌아보니 거기
웬 꽃사슴 한마리가 나와 눈을 딱 마주친다
저기 언덕 위 농장에서 뛰어나왔는지
웬 꽃사슴 한마리가 도망칠 줄도 모르고
어쩌자고 눈을 데굴데굴 굴려 나에게 웃는다
사람이 마음 씻으면 꽃사슴하고도 웃는다
산 내려오는 길 아이처럼 싱싱해져
나 홀로도 경건하게 깊어진 뒤 싱싱해져
쟁명한 하늘 쟁쟁하던 바람도 그윽해졌도다
겨울나무 /김정윤
세월의 톱니바퀴에
갈가리 낡은 수피 자락을
훈장처럼 걸친 고목
속살 파고드는 칼바람에
비틀거리며
달빛에 쓰러진
발가벗은 그림자를 밟고 서서
봄여름 가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떨어져 나간
그 많은 이별을 감내하고
닳아버린 연골
휘어진 팔을 흔들며
마지막 남은
잎새의 이별을 배웅하고 있다
한평생
자식만을 위해 살아온
눈물로 얼룩진
어머니의 삶 같은 인생사를
순리에 순응하는 것이라며
숙명처럼 여기며
삶의 희망으로 찾아올
차디찬 겨울을 버티고 서있다.
겨울나무 /권민경
지금 내가 사람을 만들었다 아니, 아니, 낳지 않고 만들었다 사람이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와
처음엔 어, 어, 했는데 곧 내가 빚었다는 걸 알았다.
닮았다 이 벌판에 내가 가득하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쓸쓸한가 외로움은 오래 징그럽고
억지로 사지가 잘린 나무 어, 그러니까 나, 나였다 모든 신파들이 벌떡벌떡 몸을 세우고 나는
잃어버린 것들이 너무 많아서,
자주 생각했다 저 손과 발이 없는 나무, 나는 보이지 않는 곳을 잘렸기 때문에 눈에 띄지 않고
없는 장기 몇 개 &마음이 잘린 표면이 매끈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이식할 수 없는
내가 잃은 것들에 대해 기록하면 나를 따라 질질 발을 끄는 검은 자음, 모음, 하나하나 나였고
신파였으며 잘린 가지, 뺏긴 못소리, 잘린 갑상선, 난소, 그리고 기타 등등
국민학생인 내가 백마 까페촌에 서 있어. 들어가지 못하는 까페 입구, 음식 이름 옆에 적혀 있
던 기타 등등이라는 글자 나는 그게 기타 치라는 소리인 줄 알았지. 기타 소리 등등등…… 목소
리도 없는데
순진한 내가 떠나가는 동안 등등 속에서 사람들이 벌떡벌떡 일어나 오래 징그러웠다
겨울 나무 /임영조
이젠 더 벗을 것이 없어요.
바람이, 그 환장할 바람이
날마다 정신없이 흔드는 대로
모두 다 벗어 준 알몸인걸요.
날로 높아만 가는 하늘 우러러
선생님, 저요! 저요! 손을 들어도
대답조차 꽁꽁 얼어 버린 마을
너무 춥고 긴 겨울이라
무서운 생각이 자주 들어요.
우리들 고향 四月은
정말 어디쯤 오고 있나요?
겨울나무의 기도 /정연복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푸른
하늘 우러러
드리는
작은 기도 하나.
<빈 가지의
이 몸에
파릇파릇
새잎 돋는
따뜻한
새봄까지
그냥
살아 있게
살아 있게만
하소서>
겨울나무 1 /김주완
화장기 없는 그녀 민얼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네, 도화살(桃花煞)도 홍염살(紅艶煞)도 벗어버리고 맨몸으로 눈보라 맞는 그녀 영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네, 가련하기 때문이네, 벌 받고 서 있는 모습 불쌍하기 때문이네, 잘못들 모두 다 내게 있기 때문이네
겨울나무 묵상 /정연복
오래
정들었던
제 몸의
피붙이들
이제는
빛바랜
한 잎
또 한 잎
비우면
비울수록
하늘에
가까이 가는
겨울나무를
보면서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세요?
겨울나무 /장석주
잠시 들렀다 가는 길입니다
외롭고 지친 발걸음 멈추고 바라보는
빈 벌판
빨리 지는 겨울 저녁 해거름속에
말없이 서있는
흠 없는 혼 하나
당분간 페업합니다
이 들끊는 영혼을
잎사귀를 떼어 버릴 때
마음도 떼어 버리고
문패도 내렸습니다
그림자
하나
길게 끄을고
깡마른 체구로 서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