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어서 62
십법계(十法界) 의보(依報)·정보(正報)는 법신(法身)의 부처로서 일체삼신(一體三身)의 덕(德)이라 알고 일체(一切)의 법(法)은 모두 이는 불법(佛法)이라고 통달(通達)하고 해료(解了)하는 이것을 명자즉(名字卽)이라 하며 명자즉(名字卽)의 위(位)에서 즉신성불(卽身成佛)하는 고(故)로 원돈(圓頓)의 교(敎)에는 차위(次位)의 차제(次第)가 없느니라·고(故)로 현의(玄義)에 가로되「말대(末代)의 학자(學者)는 많이 경론(經論)의 방편(方便)인 단복(斷伏)에 집착(執着)하여 쟁투(爭鬪)하니 물의 성(性)이 차가움과 같은 것도 마시지 않고서는 어찌 알리요」이상(已上). 천태(天台)의 판(判)에 가로되「차위(次位)의 강목(綱目)은 인왕(仁王)·영락(瓔珞)에 의(依)하고 단복(斷伏)의 고하(高下)는 대품(大品)·지론(智論)에 의(依)함」이상(已上). 인왕(仁王)·영락(瓔珞)·대품(大品)·대지도론(大智度論) 이 경론(經論)은 모두 법화이전(法華已前)의 팔교(八敎)의 경론(經論)이니라. 권교(權敎)의 행(行)은 무량겁(無量劫)을 지나 승진(昇進)하는 차위(次位)이므로 위(位)의 차제(次第)를 설(說)하였다. 이제 법화(法華)는 팔교(八敎)를 초과(超過)한 원(圓)이므로 속질돈성(速疾頓成)으로서 심(心)과 불(佛)과 중생(衆生), 이 셋은 나의 일념(一念)의 심중(心中)에 섭입(攝入)하여 심외(心外)에 없다고 관(觀)하면 하근(下根)의 행자(行者)조차도 역시 일생중(一生中)에 묘각(妙覺)의 위(位)에 들어감이니·일(一)과 다(多)와 상즉(相卽)하면 일위(一位)에 일체(一切)의 위(位)가 모두 구족(具足)하는 고(故)로 일생(一生)에 들어가느니라. 하근(下根)조차 이와 같으니 하물며 중근(中根)의 자(者)랴, 하물며 상근(上根)에 있어서랴, 실상(實相) 외(外)에 결코 다른 법(法)이 없으며, 실상(實相)에는 차제(次第)가 없는 고(故)로 위(位)가 없다. 통틀어 일대(一代)의 성교(聖敎)는 일인(一人)의 법(法)이므로 자신(自身)의 본체(本體)를 능(能)히 잘 알지어다, 이것을 깨달음을 부처라 하고 이에 미혹(迷惑)함은 중생(衆生)이로다. 이것은 화엄경(華嚴經)의 문(文)의 의(意)이니라. 홍결(弘決)의 六에 가로되「이 몸속에 고루 천지(天地)를 모방(模倣)함을 아느니라. 머리가 둥근 것은 천(天)을 본떴고 발이 모남은 지(地)를 본떴음을 알며·몸 속이 공허(空虛)함은 즉(卽) 이는 허공(虛空)이니라. 배가 따뜻함은 춘하(春夏)에 준(準)하고, 등이 딱딱함은 추동(秋冬)에 준(準)하며·사체(四體)는 사시(四時)에 준(準)하고 대절(大節)의 十二는 十二月에 준(準)하며, 소절(小節)의 三百六十은 三百六十日에 준(準)하고, 코의 숨의 출입(出入)은 산택계곡(山澤溪谷) 중(中)의 바람에 준(準)하며, 입의 숨의 출입(出入)은 허공(虛空) 중(中)의 바람에 준(準)하고 눈은 일월(日月)에 준(準)하며, 개폐(開閉)는 주야(晝夜)에 준(準)하고 두발(頭髮)은 성진(星辰)에 준(準)하며, 눈썹은 북두(北斗)에 준(準)하고 맥(脈)은 강하(江河)에 준(準)하며, 뼈는 옥석(玉石)에 준(準)하고 피육(皮肉)은 지토(地土)에 준(準)하며, 모(毛)는 총림(叢林)에 준(準)하고 오장(五臟)은 천(天)에 있어서는 오성(五星)에 준(準)하며, 지(地)에 있어서는 오악(五岳)에 준(準)하고 음(陰)·양(陽)에 있어서는 오행(五行)에 준(準)하며, 세간(世間)에 있어서는 오상(五常)에 준(準)하고 내(內)에 있어서는 오신(五神)에 준(準)하며, 행(行)을 닦음에는 오덕(五德)에 준(準)하고 죄(罪)를 다스림에는 오형(五刑)에 준(準)하니, 이르되 묵(墨)·의(劓)·비(剕)·궁(宮)·대벽(大辟) 이 오형(五刑)은 사람을 여러 가지로 이를 아프게 하며 기수삼천(其數三千)의 벌(罰)이 있음 이를 오형(五刑)이라 함 주령(主領)에는 오관(五官)이라 하며, 오관(五官)은 하(下)의 제(第)八의 권(卷)에 박물지(博物誌)를 인용(引用)함과 같으니 이른바 구맹(苟萌) 등(等)이니라. 천(天)에 올라가서는 오운(五雲)이라 하고, 화(化)해서는 오룡(五龍)이 됨이라. 심장(心臟)을 주작(朱雀)이라 하며, 신(腎)을 현무(玄武)라 하고 간(肝)을 청룡(靑龍)이라 하며, 폐(肺)를 백호(白虎)라 하고, 비(脾)를 구진(勾陳)이라 함」또 가로되「오음(五音)·오명(五明)·육예(六藝)·모두 이에서 일어나니, 또한 응당(應當) 내치(內治)의 법(法)을 알지어다. 각심내(覺心內)에 대왕(大王)이 되어서는 백중내(百重內)에 있으며, 나가서는 즉(則) 오관(五官)에게 시위(侍衛)받음. 폐(肺)를 사마(司馬)라 하고 간(肝)을 사도(司徒)라 하며, 비(脾)를 사공(司空)이라 하고, 사지(四支)를 민자(民子)라 함이라. 좌(左)를 사명(司命)이라 하고, 우(右)를 사록(司錄)이라 하며, 인명(人命)을 주사(主司)함이라. 내지 배꼽을 태일군(太一君) 등(等)이라 한다고 선문중(禪門中)에 널리 그 상(相)을 밝힘」이상(已上). 인신(人身)의 본체(本體)를 자세히 살피면 이와 같으니라. 그런데 이 금강불괴(金剛不壞)의 몸을 생멸무상(生滅無常)의 몸이라 생각하는 벽사(僻思)는 비유(譬喩)컨대 장주(莊周)의 꿈의 나비와 같다고 석(釋)하셨느니라. 오행(五行)이란 지수화풍공(地水火風空)이며 오대종(五大種)이라고도 오온(五蘊)이라고도 오계(五戒)라고도 오상(五常)이라고도 오방(五方)이라고도 오지(五智)라고도 오시(五時)라고도 하는데, 오직 일물(一物)·경경(經經)의 이설(異說)이며, 내전(內典)·외전(外典)·명목(名目)의 이명(異名)이니라. 금경(今經)에 이를 개회(開會)하여 일체중생(一切衆生)의 심중(心中)의 오불성(五佛性)·오지(五智)의 여래(如來)의 종자(種子)라 설(說)했으니 이는 즉(卽)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의 오자(五字)이니라. 이 오자(五字)로써 인신(人身)의 체(體)를 만드느니라, 본유상주(本有常住)이고 본각(本覺)의 여래(如來)이며, 이를 십여시(十如是)라 하고 이를 유불여불(唯佛與佛)·내능구진(乃能究盡)이라 함이라, 불퇴(不退)의 보살(菩薩)과 극과(極果)의 이승(二乘)은 조금도 모르는 법문(法門)인데 원돈(圓頓)의 범부(凡夫)는 초심(初心)부터 이를 아는고(故)로 즉신성불(卽身成佛)하니 금강불괴(金剛不壞)의 체(體)니라. 이로써 분명(分明)히 알았노라, 천(天)이 무너지면 내 몸도 무너지고, 지(地)가 갈라지면 내 몸도 갈라지며, 지수화풍(地水火風)이 멸망(滅亡)하면 내 몸도 또한 멸망(滅亡)함이라. 그런데 이 오대종(五大種)은 과거(過去)·현재(現在)·미래(未來)의 삼세(三世)는 바뀔지라도 오대종(五大種)은 바뀌는 일은 없다. 정법(正法)과 상법(上法)과 말법(末法)의 삼시(三時)는 다를지라도 오대종(五大種)은 이는 一로서 성쇠전변(盛衰轉變)이 없느니라. 약초유품(藥草喩品)의 소(疏)에는 원교(圓敎)의 이(理)는 대지(大地)이고, 원돈(圓頓)의 교(敎)는 하늘의 비로다. 또 삼장교(三藏敎)·통교(通敎)·별교(別敎)의 삼교(三敎)는 삼초(三草)와 이목(二木)으로 되니 그 까닭은 이 초목(草木)은 원리(圓理)의 대지(大地)에서 생(生)겨나 원교(圓敎)인 하늘의 비에 양육(養育)되어서, 오승(五乘)의 초목(草木)은 무성(茂盛)하지만 천지(天地)에 의(依)하여 내가 무성(茂盛)해졌다고 알지 못하는 고(故)로 삼교(三敎)의 인천(人天)·이승(二乘)·보살(菩薩)을 초목(草木)에 비유(譬喩)하여 부지은(不知恩)이라고 설(說)했느니라. 고(故)로 초목(草木)의 이름을 얻어·이제 법화(法華)에서 처음으로 오승(五乘)의 초목(草木)은 원리(圓理)의 모(母)와 원교(圓敎)의 부(父)를 아느니라. 일지(一地)의 소생(所生)이므로 모(母)의 은(恩)을 아는 것과 같고, 일우(一雨)의 소윤(所潤)이므로 부(父)의 은(恩)을 아는 것과 같으니 약초유품(藥草喩品)의 의(意)는 이와 같으니라.
석가여래(釋迦如來)·오백진점겁(五百塵點劫)의 당초(當初)·범부(凡夫)로 계셨을 때에 자신(自身)은 지수화풍공(地水火風空)이라 아시고서 즉좌(卽座)에 깨달음을 여셨느니라. 후(後)에 화타(化他)를 위하여 세세(世世)·번번(番番) 출세(出世)·성도(成道)해서 재재(在在)·처처(處處)에 팔상작불(八相作佛)하고, 왕궁(王宮)에 탄생(誕生)하여 수하(樹下)에서 성도(成道)하고, 비로소 부처가 되는 모습을 중생(衆生)에게 알리고 사십여년(四十餘年)에 방편교(方便敎)를 만들어 중생(衆生)을 유인(誘引)하였다. 그 후(後) 방편(方便)의 모든 경교(經敎)를 버리고 정직(正直)인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의 오지(五智)의 여래(如來)의 종자(種子)의 이(理)를 설(說)해 나타내어 그 중(中)에 사십이년(四十二年)의 방편(方便)의 제경(諸經)을 뭉쳐 넣어서 일불승(一佛乘)으로 뭉쳐, 인일(人一)의 법(法)이라 이름하니, 일인(一人)의 신상(身上)의 법(法)이니라. 다수인(多數人)이 꾸미지 않은 바른 문서(文書)를 만들어, 확실(確實)한 판인(判印)이 있는 삼세제불(三世諸佛)이 계승(繼承)해 온 문서(文書)를 석가불(釋迦佛)로부터 상전(相傳)받았을 때에 삼천삼백만억나유타(三千三百萬億那由佗)의 국토상(國土上)의 허공(虛空)속을 꽉 메운 수많은 보살(菩薩)들의 정수리를 다 어루만지고, 때를 지적(指摘)하여 말법근래(末法近來)의 우리들 중생(衆生)을 위해서, 분명(分明)히 그 연유(緣由)를 설(說)해 들려주며 부처의 양여장(讓與狀)을 가지고 말대(末代)의 중생(衆生)에게 확실(確實)히 수여(授與)하여라고 은근(慇懃)히 세 번이나 같은 말을 설(說)하시자, 많은 보살(菩薩)들은 모두가 몸을 굽히고, 머리를 조아려 세 번이나 같은 말이었기에 각기(各其) 내가 뒤질세라 승순(承順)의 답(答)을 드렸던 바 부처는 마음 편히 생각하시어 본각(本覺)의 도(都)에 돌아가시었다. 삼세(三世)의 제불(諸佛)의 설법(說法)의 의식(儀式)·법식(法式)에는 오직 같은 말로써 때를 지적(指摘)한 말대(末代)의 양여장(讓與狀)이므로 다만 오로지 후오백세(後五百歲)를 가리키어 이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로써 성불(成佛)하는 때라고 양여장(讓與狀)의 면(面)에 기재(記載)하신 승계(承繼)의 증문(證文)이니라.
안락행품(安樂行品)에는 말법(末法)에 들어와서 근래(近來)·초심(初心)의 범부(凡夫)가 법화경(法華經)을 수행(修行)하여 성불(成佛)하는 방법(方法)을 설(說)해 놓았느니라. 신(身)도 안락행(安樂行)이고, 구(口)도 안락행(安樂行)이고, 의(意)도 안락행(安樂行)이니라. 자행(自行)의 삼업(三業)도 서원안락(誓願安樂)의 화타(化他)의 행(行)도 동일(同一)하게 후(後)의 말세(末世)에 있어서 법(法)이 멸(滅)하려 할 때라고 운운(云云), 이는 근래(近來)의 때이며 이상사소(已上四所)에 있느니라. 약왕품(藥王品)에는 이소(二所)에 설(說)해지고 권발품(勸發品)에는 삼소(三所)에 설(說)해졌느니라. 모두 근래(近來)를 지적(指摘)하여 물려 놓아두신 바른 문서(文書)를 쓰지 않고서 범부(凡夫)의 말에 의해 우치(愚癡)의 마음에 따라 삼세제불(三世諸佛)의 양여장(讓與狀)에 배반(背反)하여 영구(永久)히 불법(佛法)을 배반(背反)한다면 삼세(三世)의 제불(諸佛)은 얼마나 본의(本意)가 없어지고 분하며 마음 아프고 한탄하며 슬프게 생각하시리요. 열반경(涅槃經)에 가로되「법(法)에 의(依)하되 사람에 의(依)하지 말라」고 운운(云云), 애처롭고 슬프구나, 말대(末代)의 학자(學者)는 불법(佛法)을 습학(習學)하여, 도리어 불법(佛法)을 멸(滅)함이라. 홍결(弘決)에 이를 슬퍼하여 가로되「이 원돈(圓頓)을 듣고 숭중(崇重)하지 않음은 참으로 근대대승(近代大乘)을 배우는 자(者)의 잡람(雜濫)에 의(依)하기 때문이니라. 하물며 상말(像末)에 정(情)이 엷고 신심(信心)이 과박(寡薄)하여·원돈(圓頓)의 교법(敎法)이 경장(經藏)에 넘치고, 함(凾)에 차는데도 잠시도 사유(思惟)하지 않고, 즉 눈을 가리게 되어 헛되게 살고 헛되게 죽으니, 오로지 어찌 가엾지 않으리」이상(已上), 동사(同四)에 가로되「더구나 원돈(圓頓)의 교(敎)는 본시(本是) 범부(凡夫)에게 주어짐인데 만약(萬若) 범부(凡夫)를 이익(利益)케 하려 하지 않았다면, 부처는 어찌 스스로 법성(法性)의 토(土)에 주(住)하며 법성(法性)의 몸으로써 모든 보살(菩薩)을 위해 이 원돈(圓頓)을 설(說)하지 않고서 어찌 모든 법신(法身)의 보살(菩薩)을 위해 범신(凡身)을 시현(示現)하여 이 삼계(三界)에 나타나셨겠느뇨, 내지일심(乃至一心)은 범(凡)에 있으니 즉(卽) 수습(修習)할지어다」이상(已上), 결국(結局) 기심(己心)과 불신(佛身)과 一이라고 관(觀)하면 속(速)히 부처가 되느니라, 고(故)로 홍결(弘決)에 또 가로되「일체(一切)의 제불(諸佛)은 기심(己心)은 불심(佛心)과 다르지 않다고 관(觀)하심에 의(依)하는 고(故)로 부처가 될 수 있었노라」고 이상(已上), 이를 관심(觀心)이라 하니 실(實)로 기심(己心)과 불심(佛心)과 일심(一心)이라고 깨달으면 임종(臨終)을 장애(障礙)할 만한 악업(惡業)도 없고 생사(生死)에 머물게 될 망념(妄念)도 없느니라.
일체(一切)의 법(法)은 모두 이는 불법(佛法)이라고 알고 나면 교훈(敎訓)해야 할 선지식(善知識)도 필요없고 생각하는 마음, 말하는 말, 행(行)하는 행위(行爲), 거동(擧動)이란 거동(擧動), 행주좌와(行住坐臥)의 사위의(四威儀) 소작(所作)은 모두 부처의 마음과 화합(和合)해서 일체(一體)이므로, 죄과(罪過)도 없고, 장애(障碍)도 없는 자재(自在)의 몸이 되는데, 이를 자행(自行)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자재(自在)인 자행(自行)의 행(行)을 버리고 흔적도 없는 무명망상(無明妄想)인 벽사(僻思)의 마음에 주(住)하여 삼세(三世)의 제불(諸佛)의 교훈(敎訓)을 배반(背反)하므로 어두움에서 어두움으로 들어가, 영구(永久)히 불법(佛法)을 배반(背反)하는 것을 슬퍼하고 슬퍼할지니라. 지금 되돌려서 생각을 바르게 하여 깨달음에 돌아가면 즉신성불(卽身成佛)은 자신(自身) 이외에는 없다고 알았노라. 나의 마음의 거울과 부처의 마음의 거울과는, 오직 일경(一鏡)이라 할지라도 우리들은 이면(裏面)을 향(向)하여 나의 성(性)의 이(理)를 보지 못하므로 무명(無明)이라 하고, 여래(如來)는 표면(表面)을 향(向)하여 나의 성(性)의 이(理)를 보셨느니라. 고(故)로 명(明)과 무명(無明)은 그 체(體)가 오직 一이니라. 거울은 하나의 거울이라 해도 향(向)하는 방법(方法)에 따라 명매(明昧)의 차별(差別)이 있다. 거울은 이면(裏面)이 있다 해도 표면(表面)의 장애(障碍)로 되지 않으며, 다만 향(向)하는 방법(方法)에 의(依)해서 득실(得失)의 둘이 있으니, 상즉융통(相卽融通)하여 일법(一法)의 이의(二義)니라. 화타(化他)의 법문(法門)은 거울의 이면(裏面)을 향(向)함과 같고, 자행(自行)의 관심(觀心)은 거울의 표면(表面)을 향(向)함과 같으니, 화타(化他)의 때의 거울도 자행(自行)의 때의 거울도 나의 심성(心性)의 거울은 오직 하나로서 다름이 없다. 거울을 즉신(卽身)에 비유(譬喩)하고, 표면(表面)을 향(向)함을 성불(成佛)에 비유(譬喩)하며, 이면(裏面)을 향(向)함을 중생(衆生)에 비유(譬喩)함이라. 거울에 이면(裏面)이 있음을 성악(性惡)을 단절(斷絶)하지 않음에 비유(譬喩)하고, 이면(裏面)을 향(向)할 때·표면(表面)의 덕(德)이 없음을 화타(化他)의 공덕(功德)에 비유(譬喩)하며, 중생(衆生)의 불성(佛性)이 나타나지 않음에 비유(譬喩)하느니라. 자행(自行)과 화타(化他)는 득실(得失)의 역용(力用)이니, 현의(玄義)의 一에 가로되 「살바실달(薩婆悉達)·조왕(祖王)의 활을 당겨 팽팽함을 이름하여 역(力)이라 하고 칠개(七個)의 철고(鐵鼓)를 부수고 하나의 철위산(鐵圍山)을 관통(貫通)하여 땅을 뚫고, 수륜(水輪)을 통과(通過)함과 같음을 이름하여 용(用)이라 함 자행(自行)의 역용(力用)이니라 모든 방편교(方便敎)는 역용(力用)의 미약(微弱)함이 범부(凡夫)의 궁전(弓箭)과 같다. 왜냐하면 옛날의 연(緣)은 화타(化他)의 이지(二智)를 받아 이(理)를 비춤이 고루 미치지 않으며, 신(信)을 생(生)함이 깊지 않고 의심(疑心)을 제(除)함이 다하지 못함이라 이상(已上) 화타(化他). 지금의 연(緣)은 자행(自行)의 이지(二智)를 받아서 부처의 경계(境界)를 극(極)하고, 법계(法界)의 신(信)을 일으켜 원묘(圓妙)의 도(道)를 더하며 근본(根本)의 혹(惑)을 끊고 변역(變易)의 생(生)을 손실(損失)함이라, 다만 생신(生身) 및 생신득인(生身得忍)의 양종(兩種)의 보살(菩薩)을 함께 이익(利益)케 할 뿐만 아니라, 법신(法身)과 법신(法身)의 후심(後心)의 양종(兩種)의 보살(菩薩)도 또한 함께 이익(利益)하니, 화(化)의 공(功)은 광대(廣大)하고 이윤홍심(利潤弘深)함은 확실(確實)히 이 경(經)의 역용(力用)이니라 이상(已上) 자행(自行)」 자행(自行)과 화타(化他)의 역용승렬(力用勝劣)이 분명(分明)함은 물론(勿論)이니 상세하게 이것을 보아라, 일대성교(一代聖敎)를 거울에 비춘 교상(敎相)이로다. 극불경계(極佛境界)란 십여시(十如是)의 법문(法門)이며, 십계(十界)에 서로 구족(具足)하여 십계(十界)·십여(十如)의 인과(因果)·권실(權實)의 이지(二智)·이경(二境)은 나의 몸 안에 있어서 일인(一人)도 누락(漏落)됨이 없다고 통달(通達)하고 해료(解了)하여 불어(佛語)를 남김없이 깨닫느니라. 기법계신(起法界信)이란 십법계(十法界)를 체(體)로 하고, 십법계(十法界)를 마음으로 하며, 십법계(十法界)를 형상(形相)으로 하셨다고, 본각(本覺)의 여래(如來)는 나의 몸 속에 있었다고 믿음이라. 증원묘도(增圓妙道)란 자행(自行)과 화타(化他)의 둘은 상즉원융(相卽圓融)의 법(法)이므로 주(珠)와 광(光)과 보(寶)의 삼덕(三德)은 오직 하나의 주(珠)의 덕(德)임과 같아서 잠시도 서로 떨어지지 않으니, 불법(佛法)에 부족(不足)이 없으므로 일생중(一生中)에 부처가 된다고 경희(慶喜)의 마음을 더하느니라. 단근본혹(斷根本惑)이란 일념무명(一念無明)의 잠에서 깨어나, 본각(本覺)의 생시(生時)에 돌아오면 생사(生死)도 열반(涅槃)도 함께 어제의 꿈과 같이 흔적도 없음이라. 손변역생(損變易生)이란 동거토(同居土)의 극락(極樂)과 방편토(方便土)의 극락(極樂)과 실보토(實報土)의 극락(極樂)의 삼토(三土)에 왕생(往生)한 사람·그 토(土)에서 보살(菩薩)의 도(道)를 수행(修行)하여 부처가 되려고 바라는데·인(因)은 변하고 과(果)는 바뀌어 차례로 전진(前進)해 올라가서 겁수(劫數)를 거쳐 머나먼 성불(成佛)을 기다림을 변역(變易)의 생사(生死)라고 하느니라. 하위(下位)를 버림을 사(死)라 하고 상위(上位)로 나아감을 생(生)이라 하며, 이와 같이 변역(變易)하는 생사(生死)는 정토(淨土)의 고뇌(苦惱)인 것이로다. 그래서 범부(凡夫)인 우리들이 이 예토(穢土)에서 법화(法華)를 수행(修行)하면, 십계호구(十界互具)·법계일여(法界一如)이므로 정토(淨土)의 보살(菩薩)의 변역(變易)의 생(生)은 줄고 불도(佛道)의 행(行)은 증가(增加)하여 변역(變易)의 생사(生死)를 일생중(一生中)에 짧게 해서 불도(佛道)를 성취(成就)하므로 생신(生身) 및 생신득인(生身得忍)의 양종(兩種)의 보살(菩薩)·증도손생(增道損生)하느니라. 법신(法身)의 보살(菩薩)이란 생신(生身)을 버리고 실보토(實報土)에 거(居)하느니라. 후심(後心)의 보살(菩薩)이란 등각(等覺)의 보살(菩薩)이니라. 단(但) 적문(迹門)에서는 생신(生身) 및 생신득인(生身得忍)의 보살(菩薩)을 이익(利益)케 하며, 본문(本門)에서는 법신(法身)과 후신(後身)의 보살(菩薩)을 이익(利益)케 하느니라, 단(但) 지금은 적문(迹門)을 열어서 본문(本門)에 섭(攝)하여 하나의 묘법(妙法)으로 하는 고(故)로 범부(凡夫)인 우리들이 예토(穢土)의 수행(修行)의 행(行)의 힘을 가지고 정토(淨土)의 십지등각(十地等覺)의 보살(菩薩)을 이익(利益)케 하는 행(行)인 고(故)로 화(化)의 공(功)이 광대(廣大)하니라 화타(化他)의 덕용(德用). 이윤홍심(利潤弘深)이란 자행(自行)의 덕용(德用) 원돈(圓頓)의 행자(行者)는 자행(自行)과 화타(化他)와 일법(一法)도 누락(漏落)됨이 없이 일념(一念)에 구족(具足)하여 횡(橫)으로 시방법계(十方法界)에 편만(遍滿)하는 고(故)로 넓은 것이며, 종(縱)으로는 삼세(三世)에 걸쳐 법성(法性)의 연저(淵底)를 극(極)하는 고(故)로 깊으니라. 이 경(經)의 자행(自行)의 역용(力用)은 이와 같으며, 화타(化他)의 제경(諸經)은 자행(自行)을 갖추지 않으므로 새가 편익(片翼)을 가지고서는 하늘을 날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고(故)로 성불(成佛)하는 사람도 없다. 지금 법화경(法華經)은 자행(自行)·화타(化他)의 이행(二行)을 개회(開會)하여 부족(不足)이 없으므로 새가 이익(二翼)을 가지고 날면 장애(障碍)가 없듯이 성불(成佛)에 막힘이 없다. 약왕품(藥王品)에는 십유(十喩)를 가지고 자행(自行)과 화타(化他)와의 역용(力用)의 승렬(勝劣)을 판정(判定)하였는데, 제일(第一)의 비유(譬喩)에 가로되, 제경(諸經)은 제수(諸水)와 같고 법화(法華)는 대해(大海)와 같음 운운(云云) 취의(取意), 실(實)로 자행(自行)인 법화경(法華經)의 대해(大海)에는 화타(化他)인 제경(諸經)의 중수(衆水)를 받아들임이 주야(晝夜)로 끊임없이 들어간다 할지라도 증가(增加)하지 않고 감(減)하지 않는 불가사의(不可思議)의 덕용(德用)을 나타낸다. 제경(諸經)인 중수(衆水)는 잠시 동안도 법화경(法華經)이란 대해(大海)를 받아 넣는 일이 없다. 자행(自行)과 화타(化他)와의 승렬(勝劣)은 이와 같으니 一로써 모든 예(例)로 하라. 상기(上記)의 비유(譬喩)는 모두 부처의 소설(所說)이며 사람의 말을 넣지 않았느니라. 이 뜻을 이해(理解)하면 일대성교(一代聖敎)를 거울에 비추어 흐림없으니 이 문석(文釋)을 보고 어느 누가 미혹(迷惑)하리요, 삼세(三世)의 제불(諸佛)의 총감문(總勘文)이니 결(決)코 사람의 회석(會釋)을 끌어넣지 말 것이며, 삼세제불(三世諸佛)의 출세(出世)의 본회(本懷)이며 일체중생(一切衆生)·성불(成佛)의 직도(直道)이니라. 사십이년(四十二年)의 화타(化他)의 경(經)을 가지고 세운 바의 종(宗)들은 화엄(華嚴)·진언(眞言)·달마(達磨)·정토(淨土)·법상(法相)·삼론(三論)·율종(律宗)·구사(俱舍)·성실(成實) 등(等)의 제종(諸宗)이며, 이들은 모두 법화(法華) 이전(已前)의 팔교(八敎) 중(中)의 교(敎)이고, 모두 이는 방편(方便)이며, 겸(兼)·단(但)·대(對)·대(帶)의 방편유인(方便誘引)이니라. 삼세제불(三世諸佛)의 설교(說敎)의 차제(次第)이니 이 차제(次第)를 밝혀서 법문(法門)을 말해야 하며 만약 차제(次第)에 어긋 나면 불법(佛法)이 아니니라. 일대교주(一代敎主)인 석가여래(釋迦如來)도 삼세제불(三世諸佛)의 설교(設敎)의 차제(次第)를 밝혀서 일자(一字)도 어김없이 나도 또한 이와 같다고 하여·경(經)에 가로되 「삼세제불(三世諸佛)의 설법(說法)의 의식(儀式)과 같이 나도 지금 또한 이와 같이 무분별(無分別)의 법(法)을 설(說)함」 이상(已上). 만약 이에 어긋나면 길이 삼세(三世)의 제불(諸佛)의 본의(本意)에 배반(背反)하며, 타종(他宗)의 조사(祖師)가 각기(各其) 자기(自己)의 종(宗)을 세워 법화종(法華宗)과 다툼은 잘못 중의 잘못이며, 미혹(迷惑) 중(中)의 미혹(迷惑)이니라.
징타학(徵佗學)의 결(決)에 이를 파(破)하여 가로되 산왕원(山王院) 「대저 팔만법장(八萬法藏)·그의 행상(行相)을 총괄(總括)함에 사교(四敎)를 벗어나지 않으니, 처음에 밝힌 바와 같으며, 장통별원(藏通別圓)은 즉(卽) 성문(聲聞)·연각(緣覺)·보살(菩薩)·불승(佛乘)이니라. 진언(眞言)·선문(禪門)·화엄(華嚴)·삼론(三論)·유식(唯識)·율업(律業)·성구(成俱)의 이론(二論) 등(等)의 능소(能所)의 교리(敎理)가 어찌 이 사(四)를 초과(超過)하리요. 만약 초과(超過)한다고 한다면 어찌 외사(外邪)가 아니리요. 만약 벗어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즉 타(他)의 소기(所期)를 물어 아시라 즉사승(卽四乘)의 과(果)니라. 연후(然後)에 답(答)에 따라서 극리(極理)를 물어 밝혀라, 우리의 사교(四敎)의 행상(行相)을 가지고 비교하여 생각해서 결정(決定)하라. 그의 소기(所期)의 과(果)에 있어서 만약 우리와 어긋나면 따라서 즉(卽) 이를 따져라. 또한 화엄(華嚴)의 경우는 오교(五敎)에 제각기(各其) 수인(修因)·향과(向果)가 있어 초(初)·중(中)·후(後)의 행(行)·하나 같지 않고 일교일과(一敎一果) 이것이 소기(所期)로 됨이라. 만약 장통별원(藏通別圓)의 인(因)과 과(果)가 아니라면 이는 불교(佛敎)가 아닌 것이니라. 삼종(三種)의 법륜(法輪)·삼시(三時)의 교등(敎等)·중(中)에 대해서 정(定)할지니라. 그대 무엇으로써 소기(所期)의 승(乘)으로 하느뇨. 만약 불승(佛乘)이라고 한다면 아직 성불(成佛)의 관행(觀行)을 보지 못했으며, 만약 보살(菩薩)이라고 한다면 이는 또 즉리(卽離)의 중도(中道)와 다르니라. 그대는 확실히 어느 것을 취(取)하겠느뇨. 만약 이(離)의 편을 취(取)한다면 과(果)로서 성취(成就)될 것이 없고, 만약 즉시(卽是)를 요(要)한다면 부처를 예(例)로 하여 이를 힐난(詰難)하라, 잘못하여 진언(眞言)을 외울지라도 삼관일심(三觀一心)의 묘취(妙趣)를 회득(會得)하지 않으면 아마도 별인(別人)과 같아서 묘리(妙理)를 증(證)하지 못하므로 다른 소기(所期)의 극(極)을 쫓아 이(理)에 준(準)하여 우리 종(宗)의 이(理)니라 따져라. 인명(因明)의 도리(道理)는 외도(外道)에 대(對)하며, 다분(多分)은 소승(小乘) 및 별교(別敎)에 있는데, 만약 법화(法華)·화엄(華嚴)·열반(涅槃) 등(等)의 경(經)에 비(比)한다면 접인문(接引門)이며, 임시(臨時)로 기(機)에 대하여 만들었으니 마침내는 인진(引進)하느니라, 사소(邪小)의 도(徒)로 하여금 회(會)하여서 진리(眞理)에 이르게 함이라. 고(故)로 논(論)할 때는 사의격목(四依擊目)의 뜻을 가지되, 이를 집착(執着)하는 일 없을지어다. 또 모름지기 타의(他義)를 가지고 자의(自義)에 대검(對檢)하여 따라서 시비(是非)를 결정(決定)하라. 집착(執着)하여 이를 원망하는 일 없을지어다 대저(大底)·타(他)는 다분(多分)히 삼교(三敎)에 있으며 원지(圓旨)는 극히 적을 뿐」선덕대사(先德大師)의 소판(所判)은 이와 같으니라. 제종(諸宗)의 소립(所立)은 거울에 비추어 흐림 없으니, 말대(末代)의 학자(學者)는 어찌 이를 보지 않고 함부로 교문(敎門)을 판(判)하느뇨, 대강(大綱)의 삼교(三敎)를 깊이 배울지어다. 돈(頓)과 점(漸)과 원(圓)은 삼교(三敎)이며, 이는 일대성교(一代聖敎)의 총(總)의 삼제(三諦)로다. 돈(頓)·점(漸)의 둘은 사십이년(四十二年)의 설(說)이고, 원교(圓敎)의 一은 팔개년(八箇年)의 설(說)이며, 합(合)해서 오십년(五十年)이니라. 이 외(外)에는 법(法)이 없으니 무엇에 의(依)하여 이에 미혹(迷惑)하랴. 중생(衆生)으로 있을 때는 이를 삼제(三諦)라 하고, 불과(佛果)를 성취(成就)할 때는 이를 삼신(三身)이라 하니, 일물(一物)의 이명(異名)이니라. 이를 설(說)해 나타냄을 일대성교(一代聖敎)라 하고 이를 개회(開會)하여 오직 一의 총(總)의 삼제(三諦)로 성취(成就)할 때에 성불(成佛)하니 이를 개회(開會)라 하고 이를 자행(自行)이라 함이라. 또 타종소립(他宗所立)의 종(宗)들은 이 총(總)의 삼제(三諦)를 분별(分別)하여 팔(八)로 하고, 각각(各各)으로 종(宗)을 세움으로써 원만(圓滿)의 이(理)가 결여(缺如)하여 성불(成佛)의 이(理)가 없음이라. 이런 고(故)로 여종(餘宗)에는 실불(實佛)이 없으므로 이를 타박하는데 의(意)는 부족(不足)하다고 해서 타박함이라. 원교(圓敎)를 취(取)하여 일체제법(一切諸法)을 관(觀)함은 원융(圓融)·원만(圓滿)이며, 십오야(十五夜)의 달과 같이 부족(不足)이 없고 만족(滿足)하여 구경(究竟)하므로, 선악(善惡)도 마다 않고 시절(時節)도 가리지 않으며, 정처(靜處)도 구(求)하지 않고 인품(人品)도 택(擇)하지 않으며, 일체제법(一切諸法)은 모두 이는 불법(佛法)이라고 알고 나면 제법(諸法)을 통달(通達)함이니, 즉(卽) 비도(非道)를 행(行)할지라도 불도(佛道)를 성취(成就)하기 때문이로다. 천지수화풍(天地水火風)은 이는 오지(五智)의 여래(如來)로다. 일체중생(一切衆生)의 신심(身心)속에 주재(主在)하여 잠시도 떨어지는 일이 없으므로 세간(世間)과 출세(出世)와 화합(和合)하여 심중(心中)에 있으며, 심외(心外)에는 결코 다른 법(法)이 없느니라. 고(故)로 이를 열 때, 당장 속(速)히 불과(佛果)를 성취(成就)함에 막힘 없는 도리(道理)가 지극(至極)하니라. 총(總)의 삼제(三諦)란 비유(譬喩)컨대 주(珠)와 광(光)과 보(寶)와 같으니 이 삼덕(三德)이 있음으로써 여의보주(如意寶珠)라고 하며, 고(故)로 총(總)의 삼제(三諦)에 비유(譬喩)함이라. 만약 또 주(珠)의 삼덕(三德)을 각각(各各) 분리(分離)하면 아무 소용(所用)도 없느니라. 격별(隔別)인 방편교(方便敎)의 종(宗)들도 또한 이와 같으니, 주(珠)를 법신(法身)에 비유(譬喩)하고 광(光)을 보신(報身)에 비유(譬喩)하며, 보(寶)를 응신(應身)에 비유(譬喩)함이라. 이 총(總)의 삼덕(三諦)을 분별(分別)하여 종(宗)을 세움을 부족(不足)이라 하여 타박하며 이것을 뭉쳐서 하나로 함을 총(總)의 삼제(三諦)라고 하느니라. 이 총(總)의 삼제(三諦)는 삼신즉일(三身卽一)의 본각(本覺)의 여래(如來)이니라. 또 적광(寂光)을 거울에 비유(譬喩)하고 동거(同居)와 방편(方便)과 실보(實報)의 삼토(三土)를 거울에 비치는 상(像)에 비유(譬喩)함이니, 사토(四土)도 일토(一土)이고 삼신(三身)도 일불(一佛)이라, 이제는 이 삼신(三身)과 사토(四土)가 화합(和合)하여 부처의 일체(一體)의 덕(德)이 됨을 적광(寂光)의 부처라고 한다. 적광(寂光)의 부처로써 원교(圓敎)의 부처로 하고, 원교(圓敎)의 부처로써 생시(生時)의 실불(實佛)로 하며, 여타(餘他)의 삼토(三土)의 부처는 몽중(夢中)의 권불(權佛)이니라. 이는 삼세(三世)의 제불(諸佛)이 오직 같은 말로 감문(勘文)하신 총(總)의 교상(敎相)이므로 사람의 말도 들어가지 않고 회석(會釋)도 없으며, 만약 이에 배반(背反)하면 삼세(三世)의 제불(諸佛)에 배반(背反)하는 대죄인(大罪人)이고, 천마외도(天魔外道)이니라 길이 불법(佛法)에 배반(背反)하는 고(故)로. 이를 비장(秘藏)하여 타인(他人)에게는 보이지 말지어다, 만약 비장(秘藏)하지 않고 함부로 이를 피로(披露)한다면 불법(佛法)에 증리(證理)없고 이세(二世)에 명가(冥加)없으리라, 비방(誹謗)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삼세(三世)에 제불(諸佛)에 배반(背反)하는 고(故)로 이인(二人)이 함께 악도(惡道)에 떨어지리라고 알기에 이를 훈계(訓誡)하노라. 잘 비장(秘藏)하여 깊이 이 이(理)를 증(證)해서 삼세(三世)의 제불(諸佛)의 본의(本意)에 꼭 들어맞아 이성(二聖)·이천(二天)·십나찰(十羅刹)의 옹호(擁護)를 받고 막힘 없이 상상품(上上品)의 적광(寂光)의 왕생(往生)을 이루어 수유간(須臾間)에 구계생사(九界生死)의 꿈속에 돌아와서, 몸을 시방법계(十方法界)의 국토(國土)에 편만(遍滿)하고, 마음을 일체유정(一切有情)의 신중(身中)에 넣어서 내(內)로 부터는 권발(勸發)하고 외(外)로부터는 인도(引導)하여 내외상응(內外相應)하고 인연화합(因緣和合)하여 자재신통(自在神通)의 자비(慈悲)의 힘을 베풀어 널리 중생(衆生)을 이익(利益)케 함에 막힘 없을지어다.
삼세(三世)의 제불(諸佛)은 이를 일대사(一大事)의 인연(因緣)이라 생각하시어 세간(世間)에 출현(出現)하셨으니, 一이란 중도(中道)니라 법화(法華)니라 대(大)란 공제(空諦)니라 화엄(華嚴)이니라 사(事)란 가제(假諦)이니라·아함(阿含)·방등(方等)·반야(般若)이니라·이상일대(已上一代)의 총(總)의 삼제(三諦)이니라, 이를 깨달아서 알 때 불과(佛果)를 성취(成就)하는 고(故)로 출세(出世)의 본회(本懷), 성불(成佛)의 직도(直道)이니라. 인(因)이란 일체중생(一切衆生)의 신중(身中)에 총(總)의 삼제(三諦)가 있어서 상주불변(常住不變)이니 이를 통틀어 인(因)이라 하느니라. 연(緣)이란 삼인불성(三因佛性)은 있다 해도 선지식(善知識)의 연(緣)을 만나지 않는다면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하고, 나타나지 않으며, 선지식(善知識)의 연(緣)을 만나면 반드시 나타나는 고(故)로 연(緣)이라고 하느니라. 그런데 이제 이 一과 대(大)와 사(事)와 인(因)과 연(緣)의 오사(五事)가 화합(和合)하여, 만나기 어려운 선지식(善知識)의 연(緣)을 만났으니, 오불성(五佛性)을 나타냄에 무슨 막힘이 있을소냐, 봄철이 되어 풍우(風雨)의 연(緣)을 만나면 무심(無心)한 초목(草木)도 빠짐없이 싹이 터 나와서 꽃피고 무성(茂盛)하여 때를 만난 풍경(風景)이니라. 가을이 되어 월광(月光)의 연(緣)을 만나면 초목(草木)은 모두 빠짐없이 열매가 성숙(成熟)해서 일체(一切)의 유정(有情)을 양육(養育)하여 수명(壽命)을 이어가고, 장양(長養)해서 마침내 성불(成佛)의 덕용(德用)을 나타내는데, 이를 의심(疑心)하고 이를 믿지 않는 사람이 있을 손가. 무심(無心)한 초목(草木)조차도 역시 이와 같을진대, 어찌 하물며 인륜(人倫)에 있어서랴. 우리들은 미혹(迷惑)의 범부(凡夫)일지라도 일분(一分)의 마음도 있고 해(解)도 있으며, 선악(善惡)도 분별(分別)하고 시절(時節)도 판별(判別)하는데 숙연(宿緣)에 최촉(催促)되어 생(生)을 불법유포(佛法流布)의 국토(國土)에 받았노라. 선지식(善知識)의 연(緣)을 만나면 인과(因果)를 분별(分別)하여 성불(成佛)할 몸인데 선지식(善知識)을 만난다 할지라도 오히려 초목(草木)보다도 못하여 신중(身中)의 삼인불성(三因佛性)을 나타내지 않고서 묵지(默止)할 까닭이 있겠느뇨. 이번에 반드시 기필(期必)코 생사의 꿈을 깨어나 본각(本覺)의 생시(生時)로 돌아와서 생사(生死)의 고삐를 끊을지니라. 이제부터 이후(已後)는 몽중(夢中)의 법문(法門)을 마음에 두지 말지어다. 삼세(三世)의 제불(諸佛)과 일심(一心)과 화합(和合)해서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를 수행(修行)하여 장애(障碍)없이 개오(開悟)할지니라. 자행(自行)과 화타(化他)의 이교(二敎)의 차별(差別)은 거울에 비추어 흐림이 없으며, 삼세(三世)의 제불(諸佛)의 감문(勘文)은 이와 같으니, 비장(秘藏)하고 비장(秘藏)할지니라.
(삼세제불총감문교상폐립 556~575쪽)
첫댓글 네 가르침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항상 여러가지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십법계(十法界) 의보(依報)·정보(正報)는 법신(法身)의 부처로서 일체삼신(一體三身)의 덕(德)이라 알고 일체(一切)의 법(法)은 모두 이는 불법(佛法)이라고 통달(通達)하고 해료(解了)하는 이것을 명자즉(名字卽)이라 하며 명자즉(名字卽)의 위(位)에서 즉신성불(卽身成佛)하는 고(故)로 원돈(圓頓)의 교(敎)에는 차위(次位)의 차제(次第)가 없느니라·고(故)로 현의(玄義)에 가로되「말대(末代)의 학자(學者)는 많이 경론(經論)의 방편(方便)인 단복(斷伏)에 집착(執着)하여 쟁투(爭鬪)하니 물의 성(性)이 차가움과 같은 것도 마시지 않고서는 어찌 알리요」이상(已上).
항상 여러가지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십이년(四十二年)의 화타(化他)의 경(經)을 가지고 세운 바의 종(宗)들은 화엄(華嚴)·진언(眞言)·달마(達磨)·정토(淨土)·법상(法相)·삼론(三論)·율종(律宗)·구사(俱舍)·성실(成實) 등(等)의 제종(諸宗)이며, 이들은 모두 법화(法華) 이전(已前)의 팔교(八敎) 중(中)의 교(敎)이고, 모두 이는 방편(方便)이며, 겸(兼)·단(但)·대(對)·대(帶)의 방편유인(方便誘引)이니라. 삼세제불(三世諸佛)의 설교(說敎)의 차제(次第)이니 이 차제(次第)를 밝혀서 법문(法門)을 말해야 하며 만약 차제(次第)에 어긋 나면 불법(佛法)이 아니니라. 일대교주(一代敎主)인 석가여래(釋迦如來)도 삼세제불(三世諸佛)의 설교(設敎)의 차제(次第)를 밝혀서 일자(一字)도 어김없이 나도 또한 이와 같다고 하여·경(經)에 가로되 「삼세제불(三世諸佛)의 설법(說法)의 의식(儀式)과 같이 나도 지금 또한 이와 같이 무분별(無分別)의 법(法)을 설(說)함」 이상(已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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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總)의 삼제(三諦)란 비유(譬喩)컨대 주(珠)와 광(光)과 보(寶)와 같으니 이 삼덕(三德)이 있음으로써 여의보주(如意寶珠)라고 하며, 고(故)로 총(總)의 삼제(三諦)에 비유(譬喩)함이라. 만약 또 주(珠)의 삼덕(三德)을 각각(各各) 분리(分離)하면 아무 소용(所用)도 없느니라. 격별(隔別)인 방편교(方便敎)의 종(宗)들도 또한 이와 같으니, 주(珠)를 법신(法身)에 비유(譬喩)하고 광(光)을 보신(報身)에 비유(譬喩)하며, 보(寶)를 응신(應身)에 비유(譬喩)함이라. 이 총(總)의 삼덕(三諦)을 분별(分別)하여 종(宗)을 세움을 부족(不足)이라 하여 타박하며 이것을 뭉쳐서 하나로 함을 총(總)의 삼제(三諦)라고 하느니라. 이 총(總)의 삼제(三諦)는 삼신즉일(三身卽一)의 본각(本覺)의 여래(如來)이니라.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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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감사합니다!!
이번에 반드시 期必코 生死의 꿈을 깨어나 本覺의 生時로 돌아와서 生死의 고삐를 끊을지니라.
이제부터 已後는 夢中의 法門을 마음에 두지 말지어다.
三世의 諸佛과 一心과 和合해서 妙法蓮華經를 修行하여 障碍없이 開悟할지니라.
自行과 化他의 二敎의 差別은 거울에 비추어 흐림이 없으며,
三世의 諸佛의 勘文은 이와 같으니,
秘藏하고 秘藏할지니라.
三世諸佛總勘文敎相廢立(556~575쪽)
南無妙法蓮華經
南無妙法蓮華經
南無妙法蓮華經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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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 외에 결코 다른 법이 없으며
통틀어 일대의 성교는
일인의 법이므로
자신의 본체를 능히 잘 알지어다
이 깨달음을 부처
미혹함은 중생
금경에 이를 개회하여 일체중생의 심중의 오불성 오지의 여래의 종자라 설해
이는 즉 묘호렌게쿄의 오자
이 오자로써 인신의 체를 만드시니
본유상주이고
본각의 여래이며
이를 십여시,
유불여불내능구진이라 함
불퇴의 보살과 극과의 이승은 조금도 모르는 법문인데
원돈의 범부는 초심부터 이를 아는고로
즉신성불하니 금강불괴의 체
석가여래 오백진점겁의 당초 범부로 계셨을 때에
자신은 지수화풍공이라 아시고서 즉좌에 깨달음을 여셨다
후에 화타를 위하여
세세, 번번, 출세, 성도해서
재재, 처처에 팔상작불하고,
왕궁에 탄생하여 수하에서 성도,
비로소 부처가 되는 모습을 중생에게 알리고
사십여년에 방편교를 만들어 중생을 유인하셨다.
그 후 방편의 모든 경교를 버리고
정직인 묘호렌게쿄
오지의 여래의 종자의 理를 설해
그 중에 사십이년의 방편의 제경을 뭉쳐 넣어서 일불승으로 뭉쳐,
인일의 법이라 이름하니, 일인의 신상의 법
남묘호렌게쿄 !
남묘호렌게쿄 !
남묘호렌게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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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심과 불신을 一이라고 관하면 속히 부처가 된다
「일체 제불의 기심은 불심과 다르지 않다고 관하심에 의하는 고로 부처가 될 수 있었노라」
이를 관심이라 하니
실로 기심과 불심과 일심이라고 깨달으면
임종을 장애할 만한 악업도, 생사에 머물게 될 망념도 없다
일체의 법을
모두 불법이라고 알고 나면
교훈해야 할
선지식도 필요없고
생각하는 마음
말하는 말
행하는 행위
거동이란 거동
행주좌와의 사위의 소작은 모두 부처의 마음과 화합해서
일체이므로
죄과도 없고
장애도 없는 자재의 몸이 되는데
이를 자행이라고 한다
영구히 불법을 배반하는 것을 슬퍼하고 슬퍼할지니라
지금 되돌려서 생각을 바르게 하여 깨달음에 돌아가면
즉신성불은 자신 이외에는 없다고 알았노라
거울은 이면이 있다 해도 표면의 장애로 안되며
다만 향하는 방법에 의해 득실의 둘이 있으니
상즉융통하여 일법의 二義다
화타의 법문은 거울의 이면을 향함과 같고
자행의 관심은 거울의 표면을 향함과 같으니
화타의 때의 거울도
자행의 때의 거울도
나의 심성의 거울은
오직 하나로서 다름이 없다
남묘호렌게쿄 !
남묘호렌게쿄 !
남묘호렌게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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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타의 제경은
자행을 갖추지 않으므로
새가 편익을 가지고서는 하늘을 날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고로 성불하는 사람도 없다.
지금 법화경은 자행, 화타의 이행을 개회하여 부족이 없으므로
새가 이익을 가지고 날면 장애가 없듯이 성불에 막힘이 없다
이번에 반드시 기필코 생사의 꿈을 깨어나
본각의 생시로 돌아와서 생사의 고삐를 끊을지니라.
이제부터 이후는 몽중의 법문을 마음에 두지 말지어다.
삼세의 제불과 일심으로 화합해서
묘호렌게쿄를 수행하여 장애없이 개오할지니라.
자행과 화타의 이교의 차별은 거울에 비추어 흐림이 없으며,
삼세의 제불의 감문은 이와 같으니,
비장하고
비장할지니라.
(삼세제불총감문교상폐립 556~575쪽)
남묘호렌게쿄 !
남묘호렌게쿄 !
남묘호렌게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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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어서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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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법화(法華)🌈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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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교(八敎)를 초과(超過)한 ⭕️원(圓)⭕️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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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질돈성(速疾頓成)📌으로서
🚨심(心)
🚨불(佛)
🚨중생(衆生)
이 셋은
⭕️나의 일념(一念)⭕️의
➡️📌심중(心中)에 섭입(攝入)📌하여
➡️📌심외(心外)에 없다📌고 ➡️관(觀)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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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근(下根)의 행자(行者)조차도 역시
📌일생중(一生中)에 묘각(妙覺)📌의
⭕️위(位)에 들어감⭕️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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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一)과
다(多)와
상즉(相卽)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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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위(一位)에
일체(一切)의 위(位)가
모두 구족(具足)하는 고(故)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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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一生)에 들어가느니라.
南無妙法蓮華經
南無妙法蓮華經
南無妙法蓮華經
항상 여러가지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