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에 대해 - 4. 인식론(개요)
by 메피스토
4. 인식론
4.1. 개요 - 자연화 된 인식론
들뢰즈의 이론은 전체에 걸쳐 자연주의와 전체론
을 핵심으로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인식론에서 자연주의는 소위 "자연화 된 인식
론”이라 불립니다. 들뢰즈가 인식론에서 자연주
의를 취하면서 목적론적인 인식론을 비판합니
다. 목적론적 인식론의 목표는 보편성과 공통감
을 정초하는 것입니다. 즉 어떻게 공통된 것을 인
식할 수 있고, 그에 따라 보편적인 지식들을 산출
할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인식론입니
다. 들뢰즈는 목적론적 인식론을 비판하며 인식론은 여러 이질적인 능력들이 관여하는 과정이며,
공통성이나 보편성은 발생 과정에 있는 한 단면
일 뿐이라고 지적합니다.
또한 들뢰즈는 인식론에서도 여전히 전체론자입
니다. 존재론에서와 마찬가지로 초점은 발생이
나 생성, 새로운 인식의 창발 과정에 맞춰져 있습
니다. 단, 존재론에서 그랬듯이 끊임없이 발생하
고 운동하는 영역이 있다고 해서 준안정성을 유지
한다는 사실에 대한 설명이 배제되는 것은 아닙니
다. 목적론적 인식론을 비판하다 보니 이 부분은
어렴풋하게만 다뤄지지만, 들뢰즈는 명백하게 이
념의 발생이 (준안정적인) 구조를 발생시키는 것
이기도 하며, 이는 구성요소들의 연관관계 속에
서 발생하여 전체의 체계를 형성하는 동적 과정으
로 설명합니다.
들뢰즈가 자연주의의 입장 하에 독자적인 인식과
정론을 제시하고자 했다면, 시차를 두고 들뢰즈
를 읽는 입장에서는 들뢰즈가 접해보지 못한 경험
적 증거들과 발견들을 종합하여 들뢰즈 인식론을
재구성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들뢰즈 인식론의 중요한 요소들을 뽑아보면, 인식이 단박에 이뤄
지는 것이 아니고, 여러 능력들이 종합되는 한편
경쟁하기도 하는 장이며, 의식되지 않은 것들이
관여하기도 합니다. 이렇듯 역동적인 복잡계를
상정하는 들뢰즈의 자연주의 인식론은 인지과정
을 동역학적 시스템으로 보는 신경과학, 인지과
학으로 재해석 될 수 있을 것이고, 그래야 “자연
주의”로서 본연의 의미가 퇴색되지 않을 것입니
다.
한편 들뢰즈는 목적론적 인식론을 비판하는 데 열
을 올리며 자연주의 인식론을 내세웠지만, 규범
적 인식론은 잘 보이지 않는 면이 있습니다. 즉 지
식의 정당화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별로 말해주는
게 없습니다. 물론 들뢰즈의 관심사는 지식의 정
당화가 아니라 새로운 것을 배우는 역동적 과정이
긴 하지만, 인식론 분야의 한 주제가 빠져 있다는
점은 아쉬운 부분입니다. 단, 그의 작품에 남겨진
단서들은 있습니다. 이를 재조합해보는 과정을
통해 규범적 인식론을 채워가 보겠습니다.
들뢰즈에 대해 - 4. 인식론(비교) :
by 메피스토
4.8. 비교
인식론 분야에서 “자연주의”와 “전체론”이란 키
워드 하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콰인일 겁니
다. 콰인은 지식들이 거대한 관계망을 이루고 있
으며, “자연화된 인식론”을 지향하기도 했습니
다. 그러나 이는 명제론적인 지식을 중심으로 한
것이고, 한편으로 콰인의 전체론은 반증주의에
대한 방어적인 의미가 커서 창발과 역동성을 밝히
기 위해 전체론을 취하는 들뢰즈와는 차이가 있
을 수밖에 없습니다.
제 해석에서 가장 유사한 건 라투르와 해킹입니
다. 지식이 인간, 자연 행위자들의 포괄적인 연합
으로서 지탱되는 것으로 본다는 점에서 라투르의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이야말로 들뢰즈의 존재의
일의성(힘 즉 존재) 테제와 가장 잘 어울리는 과학
철학입니다. 한편 해킹은 “관망자”라는 과학자
이미지를 비판하며 실험의 창조성과 지식의 기초
가 되는 숙련된 관찰의 독자성과 중요성을 강조합
니다. 실험은 그저 가설을 검증하는 도구가 아니
라 끊임없는 시도와 시행착오를 거치며 잘 작동하
는 어떤 원형을 창출해내는 과정이란 점에서, 들
뢰즈의 ‘배움’과정이나 판단과정이론(원형이론)
과 어울립니다.
앞서 말했듯 숙련 등의 암묵적 영역에 누적된 강
도가 지식의 배경을 이룬다는 점에서 마이클 폴라
니의 개인적 지식/암묵적 영역 개념도 떠오르게
합니다.
인식을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와 과학문화 전반에
서의 문제로 파악한다면 쿤과도 흡사합니다. 특
정한 사유의 이미지(패러다임) 하에서 세부적인
문제풀이가 이뤄지는 정상과학 하에서 간과되던
강도(변칙사례)들이 점차 누적되다가 이를 설명
해낼 대안이론이 등장하면 패러다음 경쟁 끝에 패
러다임 교체가 이뤄진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한편 쿤의 패러다임 전환에 대해서도 복잡계 이론
을 통해 설명하려는 시도가 있는데, 마크 뷰캐넌
은 『우발과 패턴』에서 “모든 과학적 패러다임
의 집합은 개념들의 네트워크로 조립되어” 있으
며, “그 아래로 수없이 많은 소규모의 좋은 개념
들이 스스로를 입증하여 자리를 잡고” “이 모든
개념들이 모여서 과학의 핵심 구조”를 이룬다고
하면서, “과학의 주요 과업은 더 많이 배우는 것
이다. 다시 말해 좋은 개념의 네트워크를 조밀
하고 완전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합니다(p.280).
즉 과학혁명도 과학적 개념 네크워크가 자기조직
화하면서 임계상태로 점근해나가다가 특이점(대
안이론의 발생 또는 재발견)에 도달했을 때 개념
들의 급격한 재배치가 이뤄지면서 패러다임이 전
환됩니다.
한편 기존의 사유의 이미지(개념망)를 바탕으로
추론하되 정보를 받아들이며 갱신해간다는 점에
서는 베이즈주의와 비슷한 점도 있습니다. 다만
베이즈 네트워크는 이론적 연결망이므로 명제적
지식의 연결망인데, 사유의 이미지는 “사상
mapping"이므로 좀 더 포괄적인 연결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유의 이미지가 혁신되는 것은 결국 감각 자료,
즉 강도에 의한 것이므로 들뢰즈는 외재주의자이
기도 합니다. 다만 정당화 근거가 아니라 발생적
근거로서 감각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이
론적인 초점은 좀 다릅니다.
규범적 인식론에서 “영원회귀의 시험”에 의한 정
당화에 주목한다면, 이는 프래그머티즘 특히 듀
이의 지식론과 유사하고, 한편으로는 셀라스의
“유효한 행위자 논변”을 떠올리게도 합니다. 유
효한 행위자 논변이란 우리는 세계 속의 유효한
행위자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주변 환경
에 관해 어느 정도 신빙성 있는 인지지도를 가져
야 하므로 우리의 인식능력을 어느 정도 신뢰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이병덕, 현대인식론
2013, p.176 참조).
해석에 의해 들뢰즈에게서 추출된 규범적 인식론에 따르면, 지식의 평가기준은 역량이며, 역량
이란 탐구대상과 관측방법, 감각의 연합을 통해
구축되는 연결망의 자율성(카오스의 변칙사례와
대안적, 비판적 이론들의 공격에 견디는 힘)에 의
해 평가되어야 하는데, 이렇게 보면 들뢰즈의 규
범적 인식론은 골드먼의 신빙론(증거주의, 토합
론)에 가까워 보이기도 합니다.
타당성이란 광범위한 참여 하에 이뤄지는 추론과
정이라고 보는 점에서는 브랜덤의 실천적 현상주
의를 연상케 하기도 합니다. 단, 역량에 의한 정당
화 이론에서 참여자의 범위는 힘으로서의 관측장
비와 지식의 대상 자체의 존재도 포함될 것이므
로, 브랜덤이 상정하는 “상호주관성”의 참여자보
다 더 광범위하다고 보입니다. 그러나 결국 관측
장비와 지식의 대상이 인간의 지식이 되기 위해서
는 그들의 입장을 대변할 전문가와 결합되어야 한
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현실적으로는 흡사한 내
용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이병덕, 현대인식론
2013, p.227 참조).
짧은 후기
총론적인 성격인 방법론과 이론적 성격, 개요에
이어 전통적인 철학의 주제로 분류한 존재론과 인식론에 대해 마쳤습니다.
존재론은 사실상 복잡계 과학으로의 재구성이었
고,인식론은 체화된 인지 이론과 네트워크 이론의 조합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단초는 제가 이 카페에 처음 올린 글(ht
tps://cafe.naver.com/anywhereis?iframe u
rl utf8=%2FArticleRead.nhn%253Fclubid%
3D19964480%2526articleid%3D21864)에서
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글을 쓰고 들뢰즈를 다
시 읽으면서 생각이 정리된 결과가 현재 올린 글
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연구자의 길을
걸었다면, 이 주제를 연구하고 싶었을 것 같습니
다.
규범적 인식론을 재구성하면서 가장 많이 참조한
것은 라투르와 해킹이었습니다.
특히 『판도라의 희망』과 『표상하기와 개입하
기』가 중요했습니다.
다른 해석도 있겠지만 라투르는 들뢰즈로부터,
해킹은 라투르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들 해석한
다고 아는데,
제게는 분명 셋이 통하는 부분이 많아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