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과 작은딸이 다녔던 메릴랜드 주 하이포인트 고등학교 맞은편 길건너
재향군인 회관 앞에 세워둔 1950년 한국전쟁 때 사용했던 직경 105mm 곡사포는 추럭 뒤에 달고 다닐 수가 있는데 원래는 국방색이었다.
타이어는 속이 찬 통배기 고무로 되어 있어서 펑크 나거나 갈라질 염려는 없다.
동종의 포열 뒤쪽에 붙은 공이치기 정4각형 쇳덩어리는 한국전쟁 때 누가 주워다 주어서 아버님께서 철공소에서 쇠를 두드릴 때 모루쇠(anvil)로 30년간 사용 하셨다.
내가 가보로 보관을 하려했었는데 한국방문때 가보니 고물장사에게 100관짜리 프레써기계, 바이스등 모든 기계와 수공구들을 팔아넘긴 상태이어서 마음이 허전했다.
1950년 한국전쟁에 사용했을 법한 직경105mm 대포껍질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니 내가 골동품상회에서 구입했는데 한국전쟁 종전 후 엿장수들이 모아오면 대게 유기공장에서는 녹인후 놋그릇을 만들어 팔았지만 아버님께서는 이 탄피의 아랫쪽을 자른 후 재떨이를 만들어 팔았고 위쪽을 펴면 정4각형의 철판이 되는데 세숫대야를 수동으로 만들어 팔았으며 더 잘게 자른 후 말아서 황소목에 다는 풍경을 만들어 김천 우시장에다가 팔았었는데 지금 이 상태로일지라도 두드리면 학교에서 사용하던 종소리와 꼭 같은 소리가 난다.
이색적인 전출-7
어릴 적에 내가본 16살 정도의 키가 작은 소년병의 인민군은 어깨에 멘 긴 1917년식 소제 장총 모시나간 개머리판이 땅에 끌릴 정도이고 북쪽으로 후퇴하는 여정을 줄이기 위해 속보로 걷는 것을 보았는데 걷는 그들은 산길이어 속도가 느리니 인천을 넘지 못했을 것이니 지리산 공비가 되었을 것이다.
인민군은 교전 없이 간선도로를 따라 서해안으로 내려와 한때는 남한의 영토가 영천, 경주까지 직사각형으로 줄어드니 이대통령도 일본으로 나르려는 긴박한 상황에, 부산이 적의 수중에 떨어지기 직전까지 갔지만 미군이 제공권을 장악하니 인민군은 보급이나 행동에 상당한 제약을 받게 되고 병참선도 길어지게 된다.
넓은 남한 땅은 비록 인민군의 차지지만 북한으로부터 조달되는 길어진 병참선은 둔화될 수밖에 없었는데 공명, 명성, 존경의 대상이던 맥아더의 인천상륙 작전(Cromite operation)으로 퇴로가 막히고 보급로가 끊어지니 인민군은 전의를 잃고 장비들을 버리고 후퇴하는데 한국군 측으로 볼 때 패주로 이었던 것이 승전로 로 바뀌니 인민군은 지리산 공비가 되는데 이는7천명으로 추산되었단다.
‘팔만대장경도 모르면 빨래판이다.’라는 책이 있다.
1951년12월 18일에 있었던 해인사에 얽힌 이야기를 서상순 그 당시 중위가 쓴 글을 인용하면 정찰 임무는 미군의 정찰기(L-19; 세스나)가 하고 적을 발견 하면 한국공군기가 기총소사와 폭탄을 투하 하게끔 된 것은 불문율인데 지리산 옆 해인사에 남부군 패잔병들이 웅거 한 것은 아마도 ‘국보를 불태우지는 않을 것’이라는 신념에서 온 것이리라.
4인승 세스나 연습기와 카메라 가방이 보인다.
내가 우리집을 사진으로 담아보려고 전세를 난 세스나 연습기.
아래쪽을 찍을 수가 없으니 옆유리를 열고 손을 내밀고 촬영을 했는데 상승기류가 굉장했다.
헬리콮타를 사용했더니 기체가 흔들려서 실페를 했고 도합 4회를 전세내어서 결국 성공을 했는데 산이 없는 넓은 세상을 내려다보는 관광을 한셈이다.
한국전쟁 때 국방색의 이 비행기를 방구쟁이라고 불렀는데 바아앙- 하고 공중을 몇번 선회하면서 정찰을 하면 영낙없이 쌕새기가와서 폭격을 가했다.
인민군이 빨래를 말리다가 정찰기에게 걸리는 수가 많은데 은신을 주로 대밭을 사용했으며 멸사봉공정신으로 한사람이 이웃동네의 대밭에서 하늘을 향해서 총을 쏘면 그에게 폭격이 가해지고 많은 숫자가 살아남았다.
이 항공기는 날개가 크고 날개의 작동이 수동이어서 엔진이 멈춘 후라도 활공이 가능하니 사고율이 적다.
미국의 새로운 지침은 고적을 중하게 여겨 1990년 이락과 미국의 전쟁 때에도 미그기를 고적 옆에 세워놓으니 공습에서 제외된 적이 있다.
사천 비행장(K-4)의 한국공군에서 발진한 김용환 대령이 이끄는 편대는 미군 관할 정찰기의 신호탄이 해인사 마당에서 솟아나니 절을 불태워 버려야 했었다.
그렇지만 편대장은 다른 비행기들에게 절 부근의 산에 기총소사만 하라고 지시를 하고 본대로 돌아갔는데 그 후 호출을 받고 불려 나가니 예측하고 있었던 일이 일어났단다.
그날 미국 소령인 정찰장교가 나와
“오늘 목표를 알리는 연막탄의 흰 연기를 보셨습니까?”
“예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곳은 사찰이 아닙니까?”
“사찰이 전쟁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귀관은 사찰이 국가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 하십니까?”
“공비보다는 사찰이 더 중요 합니다. 사찰에는 공비와 바꿀 수 없는 8만 대장경이 있습니다. 이것은 세계적 국보이며 공비 몇 백 명을 사살했다고 하여 전쟁을 판가름 나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 절은 1300년의 역사가 있는 국보사찰입니다. 소령께서도 파리와 일본의 경도가 총탄 한발 맞지 않고 오늘도 귀중한 문화재로 남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그 안에는 공비들을 피하여 온 양민이 있었을 것입니다.”
마침 그 미군소령은 얼굴에 누그러지며 미안한 빛을 띠우고 거수경례를 했다는 이야기인데 이것은 팔만대장경을 지켜낸 이야기이며 한사람의 재치가 큰 성과를 거둔 것이다.
휴전 후 내가 근무했던 곳은 교두보(橋頭堡)인 남한의 대성산과 북한의 오성산 사이에 있는 철원 금화 평강을 잇는 철의 삼각지대(iron triangle)이며 이곳은 난공불락(難攻不落)이라고 미군에서 나온 말이며 이곳 민간인 통제선 안의 꼬부라진 외길이 뚫린 백마고지 고개 마루에는 금성지구전투전적비가 있으며 중동부전선의 요충지인 비무장지대에서 나는 국방의무를 완수했다.
백마고지라는 말은 한국전쟁 때 포화 탄우(彈雨)에 산 전체가 파 해쳐져서 나무가 없으니 희게 되고 발이 푹푹 빠질 정도 이었고 수피령이라는 고개 길은 거의 수직에 가까워 지그재그 길이고 스프링 이라는 말과 흡사 했다.
여기의 군용차에는 휴전협정의 조항에 의하여 덮개를 씌울 수가 없는데 이것은 차 속에 중화기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차를 타도 겨울이라면 찬바람을 견뎌야 했으며 비무장지대에 접근 OP(Observation Post; 관측소, 산꼭대기에 설치)나 GP[guard post; 경계초소(4륜 구동의 언덕을 오를 수 있는 지프(jeep)는 GP에서 유래 되었다고 함]에 오를 때는 든든한 깃봉에 크고 흰 깃발을 차에 꽂으면 펄럭이는 소리가 시끄러울 정도(데시벌로 따지더라도 70이상은 되리라)이며 휴전협정SOP(표준처리절차)에 의해서 오직 개인의 기본 화기인 소총만을 휴대할 수가 있는 곳이다.
첫댓글 좋은 글을 봅니다
잘보고 물러갑니딘
잘 읽었습니다.
우리 아버지께서 6.25 전쟁 이야기를 가끔 해 주셨는데
술이 취하시면 전쟁 트라우마로 자식들은 두려워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