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12.blog.daum.net%2Fimage%2F5%2Fblog%2F2008%2F08%2F08%2F23%2F22%2F489c566b09c4f%26filename%3Dda_mebok-002.gif) |
[10-09-06] I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묵상 I 루카 6,6-11
6다른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그곳에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7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8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 하고 이르셨다. 그가 일어나 서자 9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 10그러고 나서 그들을 모두 둘러보시고는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그렇게 하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11그들은 골이 잔뜩 나서 예수님을 어떻게 할까 서로 의논하였다. |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12.blog.daum.net%2Fimage%2F25%2Fblog%2F2008%2F08%2F08%2F23%2F22%2F489c566b844d7%26filename%3Dda_mebok-003.gif)
|
[오늘의 독서 및 복음 묵상주제] : 학 교 <독서 : 1코린 5,1-8 / 복음 : 루카 6,6-11>
대학입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국어 · 영어 · 수학 점수다. 학생들은 고교 시절 내내 이 주요과목에 매달리고, 이 세 과목 점수가 그들의 인생을 쥐락펴락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그런지 다른 과목, 특히 수능시험과 거리가 먼 과목들은 아이들의 관심 밖일 수밖에 없다. 아이들은 그 시간에 국어 · 영어 · 수학책을 펴놓고 노골적 ( ?) 으로 공부한다. 오로지 이 세 과목 점수를 어떻게 하면 잘 받을 수 있느냐를 훈련시키는 장소가 되어버린 것이 지금 학교의 현실이다.
우리 인생에서 학창시절이 차지하는 비중은 너무나 크다고 할 수 있다. 학교생활을 통해 세상을 배우고 추억을 만들고 친구를 만들고 꿈을 꾼다. 그래서 우리는 시간이 지난 후에도 학교생활을 그리워한다. 가장 돌아가고 싶은 시절로 학창시절을 꼽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 아이들에게 학교는 기억하기 싫은 곳, 심지어는 ‘교도소’ 라고 부를 정도로 끔찍한 ( ?) 곳이 되어가는 것이 참으로 슬프다.
오늘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에게 안식일이 갖는 중요한 의미를 병자의 치유를 통해 명쾌하게 가르쳐 주신다. 학교도 바로 이런 곳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학생들에게 세상에 대해, 인생에 대해, 선 (善) 에 대해, 미래에 대해 명쾌하게 가르쳐 주는 곳이 되어야 할 것이다. 국어 · 영어 · 수학 점수를 얻는 방법을 알려주는 곳이 아니라 …............◆
[말씀자료 : 이석재 신부(안법고등학교 교목실)]
|
[다해]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I 묵상기도방(사이버기도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12.blog.daum.net%2Fimage%2F7%2Fblog%2F2008%2F08%2F08%2F23%2F22%2F489c56693dddb%26filename%3Dda_icon01.gif) |
시작기도 : -
사랑하는 예수님, 당신은 제 보물이오니 제가 당신 사랑을 받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그 어떤 것보다도 더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을 배반했던 일과 죄로 인해 당신과 멀어졌던 일을 깊이 뉘우칩니다. 당신이 지극히 선하신 분임을 깨닫게 도와주소서. 당신을 떠나지 않도록 해주소서. 살아 있는 동안 당신을 사랑하고 기쁘게 해드리며 살고 싶습니다.
|
오늘의 기도지향 : 자연환경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주님,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대자연이 인간의 욕심과 온갖 공해로 파괴되고 있사오니 자연의 소중함을 깨닫고 보존하여 본래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도록 해주소서.
오늘의 복음 : [다해]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루카 6,6-11
6다른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그곳에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7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8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 하고 이르셨다. 그가 일어나 서자 9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 10그러고 나서 그들을 모두 둘러보시고는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그렇게 하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11그들은 골이 잔뜩 나서 예수님을 어떻게 할까 서로 의논하였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13.blog.daum.net%2Fimage%2F22%2Fblog%2F2008%2F08%2F09%2F00%2F52%2F489c6bb40b3d7%26filename%3Dda_icon05.gif)
영적독서 : 완고한 독재자 파라오
나는 파라오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맏이라는 사실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열 가지 재앙 중 맏이를 죽이는 마지막 재앙 이야기가 늘 소름끼쳤기 때문이다. 주일학교 교실에 앉아 이런 생각을 하곤 했다. ‘그래, 앤디 존슨, 너도 역사에 남을 수 있을지 몰라. 빌리 홈즈, 너도. 물론 나 역시 그렇지.’ 나는 내가 모세 시대 이집트에 태어나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했지만 한편으로는 누군가 자신의 권위와 권력을 지키기 위해 가족을 위험에 빠뜨렸다는 사실에 화가 나기도 했다. 파라오가 바로 그런 인물이다. 그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밥 하트만 | '성경 속 빛나는 조연들' 중에서>
|
|
[다해] 연중 제23주간 월요일(2010-09-06) I 복음묵상방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12.blog.daum.net%2Fimage%2F7%2Fblog%2F2008%2F08%2F08%2F23%2F22%2F489c56693dddb%26filename%3Dda_icon01.gif) |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공동체에게 불륜과 자만에 대하여 걱정을 하면서 꾸중한다. 부도덕한 자에 대하여 용납하지 않고 단죄를 선언한다. 그리고 악의와 사악이라는 묵은 누룩이 아니라, 순결과 진실이라는 누룩 없는 빵을 가지고 축제를 지내자고 권고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관한 율법에 대하여 인간을 살리고 자유스럽게 하는 법률로 해석해야 함을 보여 주신다.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 주신 것은 그 본보기이다. 그러나 낡은 체제에 길들여진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골이 잔뜩 나서 예수님을 없애 버릴 궁리를 하기 시작한다(복음). |
<요한과 함께하는 묵상> : † 예수께는 불리하나 우리에겐 유리하니...
앞서간 복음들에서 보았듯이 예수님의 공생활이 본격화되고 예수님 주위로 사람들이 모여들수록 예수와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유대교 지도자들 사이의 논쟁은 갈수록 그 골이 깊어간다.
지금까지 루가복음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예수께서 중풍병자를 치유하면서 죄의 용서를 먼저 운운한 일(5,20), 예수의 제자들이 나름대로의 종교적 집단을 구성하고 있으면서 전통적인 단식과 기도를 소홀히 한다는 일(5,33), 안식일에 예수의 제자들이 밀이삭을 잘라 비벼먹은 일(6,1)로 안식일 규정을 범한 것 등은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논쟁의 빌미를 제공하기에 충분하다.
유대교 지도자들과의 논쟁이 격렬할수록 손해를 보는 측은 예수님이시다. 그런데도 예수께서는 논쟁을 피하지 않으시고 정면으로 맞으신다. 왜 그러실까? 답은 우리 인간을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논쟁이 격렬해질수록 우리가 얻는 것이 있다. 그것은 예수와 그의 아버지 하느님에 관한 진면목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물론이고 유대교와의 격렬한 논쟁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나아가 야훼 하느님이 누구신지를 더욱 명확히 공부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의 아들이 바로 안식일의 주인이다.”(6.5)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바로 천지창조의 완성과 안식과 축복의 날인 제7일(창세 2,1-3)의 주인이시라니 이 얼마나 통쾌한 말씀인가 말이다.
오늘 복음은 또 다른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병자를 치유하는 일을 놓고 예수와 율법학자, 바리사이파 사람들과의 논쟁을 전해준다. 루가는 이 대목을 마르코복음에서 베끼면서 약간의 내용만 수정하였다.(마르 3,1-6; 마태 12,9-14)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예수 앞에 오른손이 오그라들어 먹고 사는 데 많은 불편을 가진 병자가 있었던 것이다.
복음서들은 모두 율사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물론 회당의 모든 사람들이 예수의 행동을 예의주시함을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안식일에 대한 엿보는 무리들의 생각과 예수의 생각이 크게 대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의 의도는 분명하다. 그분은 하늘이 무너져도 병자를 고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일단 병자를 회중 가운데 세우고 질문을 던지신다. 이 질문은 사뭇 흥미롭게 들린다.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라고 하였느냐? 악한 일을 하라고 하였느냐? 사람을 살리라고 하였느냐? 죽이라고 하였느냐?”(9절)
두말할 것 없이 착한 일을 하고 사람을 살리는 것이 답이다. 여기에 무슨 잔소리가 필요한가. 그런데 더 흥미롭고 한편 부끄러운 일은 율법을 꿰뚫고 있는 유대교 지도자들이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잔뜩 화가 나서 예수를 어떻게 하려고 의논했다는 것이다.(11절)
이미 예수께서는 자신을 안식일의 주인으로 선포하셨다.(5절) 오늘은 안식일의 핵심정신을 다시 한번 밝혀주신다. 착한 일을 하고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라는 것이다.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일(창세 2,2-3; 출애 20,8-11)과 할례를 받는 일(창세 17,10-11)은 야훼께 대한 유대인들의 가장 중요한 신앙행위의 지침들이다. 동시에 이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신앙심을 저울질하는 종교적 기준이 되기도 한다. 안식일 법을 지킨다는 것은 이 날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는 것을 이 날에 금지된 일을 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런 생각이 예수께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당신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반문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질문은 다소 과장된 표현일 수도 있다. 혹자는 예수께서 굳이 안식일 법을 어기지 말고, 안식일을 피해 다른 날을 택하여 좋은 일을 하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루가 13,14 참조) 그러나 꼭 알아두어야 할 점은 예수께 있어서 내일은 없다는 것이다. ‘지금’과 ‘여기’외에 다른 것은 없다. 오늘이 안식일이 아니라 할지라도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좋은 일을 하고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 결론이다.
하느님께서 엿새 동안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렛날에 모든 일에게 손을 떼고 쉬셨다(창세 1,2)고 해서 이렛날을 무위도식(無爲徒食)하는 날로 생각하면 착각이다. 이 날은 창조의 완성을 의미하는 날이기에 거룩한 날이고 다른 날보다 복(福)이 많은 날이다. 이 날이 유다인들에게는 토요일이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주일(主日)이다. 따라서 이 날은 죽은 무행(無行)의 날이 아니라 살아있는 행위(行爲)의 날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 사명의 핵심이 바로 세상에 ‘생명을 주는 일’, ‘사람을 살리는 일’에 있지 않는가? 이들 일은 안식일에 더욱 더 행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내 생명만 챙기고 나만 살자고 하는 행위는 안식일의 정신에 크게 어긋남을 알아야 한다. 예수께서 오늘 행위로 말미암아 자신에게 불리하고 결국에는 스스로 죽임을 당할 것을 내다 보시면서도 안식일에 사람을 살리시는 뜻을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다.................◆
[말씀자료 : 박상대 신부 /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12.blog.daum.net%2Fimage%2F6%2Fblog%2F2008%2F08%2F08%2F23%2F22%2F489c566bec874%26filename%3Dda_mebok-004.gif)
|
<야곱과 함께하는 묵상> : † 안식일에 할 일과 하지 못할 일을 결정할 권한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여러가지 금지 조항을 만들어 놓고는 사람들의 일상의 사소한 일까지 단죄를 했습니다. 일례를 들어 지난 토요일에 묵상했듯이, 그들은 안식일에 밀을 따먹은 제자들이 그 금지 조항을 어겼으며, 주님은 그 일을 방조했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다윗의 예를 들어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바리사이들이 안식일을 준수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금지 조항에 얽매이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안식일에 할 일과 하지 못할 일을 결정할 권한을 가진 주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안식일에 일어난 또 다른 논쟁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라는 말씀을 통해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1. 고발할 기회를 찾는 사람들
다른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그곳에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루카 6,6-7)
주님은 다른 안식일에 다시 회당에(아마도 카파르나움의 회당) 들어가셨습니다. 루카는 이 때에 주님께서 "회당에서 ~~ 가르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실 때에 회당 안에 한쪽 손이 오그라들어서 못쓰게 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루카는 이 사람이 "오른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그 회당 안에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주님을 고발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지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이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바리사이들이 만들은 율법 예규에는 안식일에 생명이 위급한 사람을 제외한 어떤 종류의 병자로 고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규정을 따르면 한쪽 손이 마른 사람을 안식일에 고치는 일은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2. 어느 것이 옳으냐?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 하고 이르셨다. 그가 일어나 서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루카 6,8-9)
주님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자기를 고발하기 위해서 기회를 엿보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두려워하여 병 고치는 일을 회피하거나 은밀하게 일을 처리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이 그 일을 볼 수 있도록 그 사람을 한 가운데에 일으켜 세웠습니다.
율사와 바리사이들은 은밀하게 일을 하고 있었지만, 주님은 공개적으로 행동하셨습니다. 주님은 바리사이들에게 이렇게 질문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앞에서 말한 대로 바리사이들의 입장은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생명에 위험이 없었기 때문에 안식일에 고쳐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안식일의 주인이신 주님의 생각은 그들과는 달랐습니다. 그 사람은 생명에는 지장은 없었지만, 그의 마른 오른 손으로 인해 많은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안식일에 고통받는 자들을 고치는 일을 선하게 여기셨습니다.
안식일은 사람들을 위해서 주신 날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병으로 고통 받는 자를 자유롭게 하는 일은 안식일의 정신에 합당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에 무죄한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주님이 보시기에는 오히려 그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될 악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한심스러운 마음으로 그들을 바라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고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양심을 통해 전달되는 진실한 소리에 억지로 귀를 막고 있었습니다.
이 때에 마태오는 마르코와 루카가 기록하지 않은 한 가지 이야기를 추가하고 있습니다. 마태오는 이때에 주님께서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에게 양 한 마리가 있는데, 그 양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다고 하자. 그러면 그것을 잡아 끌어내지 않겠느냐?(마태 12,11)"고 질문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양이 구덩이에 빠지면 그 양을 구하기 위해서 구덩이에서 꺼내도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양보다 더 귀중한 사람을 안식일에 병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일은 당연히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진 양은 구해도 된다고 가르치고, 고통받는 병자는 고치면 안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그들의 규정이 얼마나 모순된 것인지를 지적하셨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사랑과 자비를 베풀지 않고 고통받는 형제들을 그대로 방치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양보다 더 천하게 대접했습니다.
3. 병자 치유와 바리사이들의 반응
그러고 나서 그들을 모두 둘러보시고는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그렇게 하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그들은 골이 잔뜩 나서 예수님을 어떻게 할까 서로 의논하였다. (루카 6,10-11)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하느님께서 축복으로 주신 안식일을 무자비한 날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행위가 타당한 것인지를 묻는 주님의 말에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양심의 소리를 외면하고 주님을 죽일 기회만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고통 당하는 형제에게 동정을 느끼는 대신 의인을 잡아죽이려고 벼르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그들의 가증스럽고 위선된 모습을 분노와 슬픈 마음으로 바라보셨습니다. 마침내 주님은 손 오그라든 사람에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손을 뻗어라."... 손 오그라든 사람은 주님의 명령대로 그의 손을 주님께 내밀어 폈습니다. 그러자 그의 손은 즉시 정상으로 회복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그를 고쳐주심으로 안식일에 사람들이 고통 당하는 형제를 고쳐주는 일에 선한 일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인들이 주일을 자비가 없는 무자비한 날로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주일은 소극적으로 아무 일도 안하는 날이 아니었습니다. 주일은 자기 일을 쉬고 적극적으로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날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주일에 적극적으로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해야 합니다.
신자들은 주일에 수동적으로 금지된 규정을 준수하려고 하는 대신, 적극적으로 안식일의 주인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신자들이 주일에 가만히 앉아 있기보다는 영과 육체가 고통받고 있거나, 사람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도와 주어야 합니다. 이러한 일이 바로 주일을 거룩하게 만드는 참된 길입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고통 당하는 병자가 낫게 된 것을 보고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고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주께서 병자를 고친 것을 보고 골이 잔뜩나서(분노하여) 밖으로 나가서 주님을 죽일 방법을 모의했습니다. 마르코는 이때에 바리사이들이 주님을 죽이려고 헤로데 당원과 의논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헤로데 당은 사악한 헤로데에게 충성을 바치고 그 일을 지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헤로데 당원들은 주님의 혁명적인 행동이 나라의 안녕을 위협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도 주님을 제거하는 일에 바리사이들과 협력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고통 당하는 형제는 외면하고, 의로운 사람을 죽이기에 급급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주신 축복된 안식일을 의인을 죽이는 사악한 날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4. 묵상종합(안식일의 참된 의미)
오늘 복음에서 안식일에 관한 논쟁을 다시 묵상했습니다. 오늘묵상의 주제는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라고 하였느냐? 악한 일을 하라고 하였느냐? ...라는 말입니다. 물론 이런 규정은 율법에 나오지 않습니다. 안식일은 창세기에서 전하는 데로 하느님께서 엿 세 동안 세상을 창조하시고 하루를 쉬신 것을 기념하여 일을 하지 않고 쉬면서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는 날이 안식일 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규정을 십계명을 통해서 주일을 거룩히 지켜라... 라고 알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주일은 쉬면서 하느님께 찬미를 드림이 마땅합니다. 그러므로 한 주 동안 지친 몸을 쉬고 또 이처럼 쉼과 그밖의 모든 것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다시말하면 우리의 육체를 위해서라면 모든 육체적인 노동을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만약에 사제에게 주일에 혼배성사를 청하는 사람이 있어도, 병자가 병자성사를 청해도, 한 주간동안 열심히 일한 자신을 위해서 휴식을 취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안식일의 주인은 사람의 아들입니다. 우리 자신이 쉼을 통해서 새로운 힘을 얻기 위함도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기 위함인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님께 악의를 품은 것도 자신들이 안식일의 주인인 듯이 착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랬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 무엇 때문이고 누구를 위한 일인지 알았더라면 그처럼 오류에 빠지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적어도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얼마나 컸던지 짐작이라도 했더라면 그처럼 악의를 품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율법의 수호자임을 자처했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율법은 자신들을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존재원인이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존재를 위태롭게 하는 율법의 질서를 흐트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율법이 자신들의 존재를 유지시켜주는 수단이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곧 율법의 주인이 자기 자신이 되었고 마찬가지로 그들이 율법의 주인인 사람의 아들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 손이 오그라든 병자를 치유해 주시고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고 사람을 살리라고 가르쳐주신 것은 안식일의 주인이 하느님과 당신 자신임을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안식일의 참된 휴식의 의미와 어떻게 하느님께 찬미를 드려야 하는지 오늘 복음에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안식일의 참된 휴식을 누릴 줄 알고 어떻게 하느님께 찬미를 드려야 하는지 묵상해 봅시다................◆
[말씀자료 : 두올 /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12.blog.daum.net%2Fimage%2F6%2Fblog%2F2008%2F08%2F08%2F23%2F22%2F489c566bec874%26filename%3Dda_mebok-004.gif)
|
<보나와 함께하는 묵상> : † 손을 뻗어라
천하를 호령하던 알렉산더 대왕은 죽으면서 다음과 같이 유언을 했다고 합니다. "내가 죽거든 두 손을 펴 관 밖으로 내어 놓으시오. 인생은 ‘공수래 공수거’ 빈손 들고 왔다가 빈손 들고 가는 것임을 온 백성이 볼 수 있게 하시오."
그렇습니다. 인간은 두 손을 움켜쥐고 태어났다가 이 세상을 떠날 때에는 먼지 한 톨 손에 쥐지 못하고 두 손을 활짝 편 채 세상을 떠납니다. 인생의 욕심과 허무를 보여주는 하나의 위대한 상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손! 이것은 하느님이 인간에게만 주시는 선물입니다. 일찍이 희랍의 철학자 아낙사고라스는 "인간이 동물을 지배할 수 있음은 이 손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에서 '도구적 인간'이란 말이 나온 것입니다. 사실 인간은 이 손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선인이 되기도 하고 악인이 되기도 합니다. 이 손을 얼마나 능력있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위인이 되기도 하고 범인이 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손은 그 사람의 능력과 인격을 대표합니다. 그러므로 때로 문제해결의 열쇠를 쥔 사람은 "내 손 안에 있다"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모자랄 때 우리는 손이 모자란다고 말합니다. 어떤 일에 능한 사람을 우리는 선수라고 합니다. 선수란 '뽑혀진 손'이란 뜻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과 관계를 끊을 때 손을 뗀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복음에서 우리는 이토록 중요한 손이 오그라든 불구가 된 한 사람을 보게됩니다. 예수께서 그를 불쌍히 여기시어 오른손 오그라든 사람에게 "그가 오른손을 펴자, 다른 손과 같이 성하게..."해 주셨습니다.
1. 손 오그라든 환자의 의미
여기서 손이 오그라졌다는 것은 손 놀림에 자유스럽지 못함을 의미합니다. 펴야할 때 펼 수 없고 오무려야 할 때 오무릴 수 없고 잡아야 할 때 잡지 못하는 병이 곧 손 오그라든 병입니다. 분명히 내 지체 중의 한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대로 조정하지 못한다는 것은 불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전해져 오는 얘기에 의하면 오늘복음의 불구자는 석공이었다고 합니다. 석공은 손으로 벌이를 해서 먹고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한쪽 손이 병들었기 때문에 일을 할 수가 없어 온 가족이 주린 배를 움켜쥐고 낙심과 눈물로 나날을 보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시점에서 손 오그라진 환자들이 누구입니까? 도움을 요청해야겠으나 손을 내밀 수 없는 사람, 기도에 메마른 손, 화해의 손을 내밀어야 하겠으나 옹졸함 때문에 웅크리고 있는 손, 가족이나 이웃을 주께로 인도할 힘이 없어 무력한 손, 한번 움켜쥔 것을 펼 줄 모르는 인색한 손, 마땅히 붙잡아야 할 것을 붙잡지 못하고 썩어진 세상만 붙잡고 사는 구원받지 못한 손. 이 모든 것이 손 오그라든 병 치유를 받아야 할 손들입니다. 복음성가 중에 "오늘 나는" 이라는 노래는 용서하고 화해하고 높여주고 세워주어야 함에도 그러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한탄하며 주님께 자신의 손을 맡기는 결단의 노래입니다. "주님께 맡긴 채로"라는 노랫말로 맺고 있습니다.
돈은 가지고 있으나 기쁨이 없는 불구자들 지위는 가지고 있으나 평안이 없는 불구자들 명성은 있으나 공헌이 없는 불구자들 받은 은혜는 많으나 내어놓을 수 없는 불구자들 이들 모두가 오른 손이 오그라든, 즉 손을 제대로 쓸줄 모르는 환자들입니다.
사람의 손을 닮은 앞발을 가진 동물은 원숭이 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원숭이만이 쌀이나 콩 같은 것을 앞발로 집을 수가 있다고 합니다. 이것을 이용해서 사냥꾼들은 원숭이를 잡는다고 합니다. 큰 야자 열매의 껍질에 구멍을 내놓고는 한줌의 쌀을 넣어 둡니다. 그러면 원숭이는 구멍으로 앞발을 밀어 넣는 데까지는 어려움이 없습니다만 쌀 한줌을 움켜쥐고 나면 앞발이 나오지를 않습니다. 사냥꾼이 성큼성큼 다가와도 이 어리석고 욕심 많은 원숭이는 앞발을 펴지 않기 때문에 간단한 덫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잡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침내 원숭이는 제 욕심의 포로가 된 채 그대로 팔려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우리 자신의 모습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먹을 것 때문에 썩어질 재물 때문에, 걱정과 근심의 보따리를 두 손 가득히 움켜쥐고 자유를 버린 채 오그라진 손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흔히 우리가 주님의 손을 잡고 살아간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이 세상의 걱정거리를 꼭 쥐고 있지는 않습니까?
똑똑하다는 사람일수록 흔히 물욕과 명예와 허세의 포로가 된 줄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래서는 결국 그렇게 영리하다는 원숭이가 제 꾀에 빠져 팔려 가듯이 우리도 욕망의 노예가 되어 멸망의 구덩이 속으로 끌려 들어갑니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오늘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손을 뻗어라!"고...말입니다.
2. 오그라든 손을 뻗어라.
바로 이런 사람들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엄숙한 명령이 여기에 있습니다. 루가 6,13절 말씀! "그리고 나서 그 불구자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손을 뻗자 다른 손과 같이 성해졌다."
이 사람, 이 손이 어떤 손입니까? 손을 내밀 수 있을 만큼 힘이 남아있는 손이 아닙니다. 도무지 능력이 없는 마르고 시든 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손을 내밀어 뻗어라고 명령하십니다. 지금까지 불가능했던 그것을 해 보라는 겁니다.
차라리, 너의 왼손으로 오른손을 문질러 보라든지, 안수를 받고 예물을 드리라든지, 그 오그라든 손을 씻어보라든지 한다면 이해가 되고 해 볼만도 한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불가능하다고 믿고 살던 그 일을 지금 해보라 말씀하셨고, 본문의 주인공은 불가능한 순종을 시도했습니다. 어기적 거리며 손을 뻗는 그 순간 마른 혈관에 피가 흐르고 죽은 신경이 새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손을 뻗어라!"고 말씀하실 때 우리는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쁨으로 순종하든지 주님의 명령을 거절하든지. 순종하면 능력을 얻습니다. 우리가 불순종하면 손 오그라든 불구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복음의 "손을 뻗어라"는 말씀은 우리 신자와 교회를 향하여 각자 모두에게 하시는 말씀하십니다. 무슨 뜻입니까?
(1). 손을 뻗어라는 말은 손을 내밀어 펴서 구원의 주님을 붙잡으라는 말입니다.
태초부터 인간의 손은 범죄하는데 사용이 되어졌습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땄습니다. 그 아들 카인은 손으로 동생 아벨을 죽였습니다. 이 손은 주님을 판 손이요. 우리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손입니다. 이 손은 병든 손이요. 마땅히 해야할 일을 하지 못하는 오그라든 손입니다. 이 손은 주의 일에 쓰이지 못한 채 말라벌린 손입니다. 마땅히 손을 내밀어 회개해야할 손들입니다. 힘을 얻어야할 손입니다.
어떻게 인간이 살아갈 수 있습니까? 이 시간 주님께 손을 내밀어 도움을 요청하십시다. 용서를 구하십시다. 주머니에 두 손을 넣은 채 구걸하는 사람은 동정을 받지 못합니다. 구걸하는 사람은 반드시 손을 내밀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향해 손을 내미는 것은 주님의 도움을 받기 위한 행동표현입니다. 주님을 향해 도움의 손을 들어 요청했던 사람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분에 넘치는 도움을 받았습니다. 한 사람도 거절당하지 않았습니다. "네 손을 뻗어라" - 네 자신이 구원을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이 시간 여러분의 오그라든 손을 내밀어 주님을 만지십시오. 12년 동안 하혈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밀치고 밀리는 군중 속에서 주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자신의 병이 나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수많은 군중들 틈에서 죽을 힘을 다하여 손을 뻗어서 주님의 옷자락 끝을 만졌습니다. 과연 그의 믿음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교회에 올 때 주님을 만지기 위해 옵니다. 주님은 미사를 통해 우리를 만져주십니다. 부끄럽다 말하지 말고 아픈 손을 내밀어 주님을 만지십시오. 주님께서 고쳐주십니다. 주님이 만나주십니다. 주님이 채워주십니다.
(2). 이웃을 향해 손을 뻗어라는 말입니다.
이제 이 손은 움켜쥐기만 하는 손이 아니라 이웃을 향하여 내어 주는 손이 됩니다. "네 손을 뻗어라"는 이 말씀이 개역성경에는 "네 손을 내밀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이런 교훈이 있습니다. 예리고 도상에서 강도를 만나 신음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제나 레위인의 손은 강도 만난 사람에게 펼 수 없는 병든 손이었습니다. 자비를 요청하는 자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지나가다가 강도 만난 사람의 신음소리를 듣고 가까이 가서 손을 폈습니다. 손으로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붓고 손수 치료하였습니다. 그의 손은 이웃을 향해 펼쳐 있는 손이었습니다.
부자와 나자로의 비유에 나오는 이 부자는 풍요합니다. 자기가 노력해서 얻은 돈입니다. 이 사람은 그렇게 자기가 벌어서 자기가 쓰는 것이니 떳떳하다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호화롭게 사는 옆에는 거지가 앉아서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부자는 한 번도 손을 펴서 따뜻한 빵 덩어리 하나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둘 다 죽었습니다.
부자는 지옥에 떨어지고 이 거지 나자로는 하늘나라에 갔습니다. 부자가 불길에 타는 것이 너무 괴로워서 하느님을 우러러보며 "아버지, 저 나자로를 시켜서 손에 물 한 방울만 찍어서 내 입술을 적시게 하여 주시옵소서"했는데 하느님이 안된다고 하였습니다. "너는 세상에서 그렇게 잘 살면서도 어려운 사람을 위해 손 한번 펴지 않았고 도와준 일도 없는데 이제 와서 그 사람의 손으로 물 한 방울 찍어다가 목이 서늘하게 해 달라고? 네가 주는 손을 편 일이 없는데 누가 도와준단 말이냐?" 네 손을 펴라! 쓰러진 형제, 헐벗은 자매, 배고픈 이웃을 향해 손을 펼 때 거기 행복이 있습니다.
(3). 우리의 손은 예수님을 대신하는 손입니다.
구원받은 우리의 손은 예수님의 손을 대신해야할 손입니다. 예수님의 손이 어떤 손입니까?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던 주님의 손, 병든 자를 고치시며 낫게 하시던 손, 굶주린 자에게 빵을 먹이시던 주님의 손, 죄 지은 여자에게 용서를 베풀던 손, 막힌 담을 허무는 악수의 손, 교제의 손, 불쌍한 자를 위로하시던 주님의 손, 거친 바위를 부둥켜 안고 기도하시던 주님의 손,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의 손... 이 손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물려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 신자들이, 우리 교회가 주님의 손을 대신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주님의 손을 대신할 수 있는 한 공동체를 세우셨습니다. 그 공동체를 주님은 그리스도 당신의 몸이라 불렀습니다.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이요. 주님의 손입니다.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전쟁중의 독일 어느 마을의 교회가 부서져 있었습니다. 폐허가 된 교회를 건축하면서 벽돌로 종각 등을 다시 세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현관 앞에 세운 예수님의 동상은 상처가 컸으며 특히 손이 없어졌습니다. 예수님의 동상을 복구하기 위해 이런 저런 계획을 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사제는 예수님 동상의 팔을 만들지 않고 그대로 두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글을 새겼습니다. "이 동상의 예수님은 손이 없으시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신자들의 손을 가지고 계신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손을 통하여 일하신다. 우리의 손은 곧 예수님의 손이 되어 일 해야 합니다."
(4). 넘어진 자를 붙들어 주라는 말입니다.
세상은 서로 끌어내리고 헐뜯고 넘어뜨립니다. 그러나 교회는 서로 붙들어 주는 곳입니다. 이제 네 손을 펴라!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손을 펴고 나면 우리는 주님을 대신하여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을 붙들어 줄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누군가가 붙들어 줄 수 있는 손이 있습니다. 누군가 또 나를 붙들어 주어야 바로 서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넘어진 사람들을 찾아보십시오. 주님의 마음을 갖고 이웃을 살펴보면 내 주위에도 상처받아 넘어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못하고 주님과 교제하지 못하고 주께서 보여 주시는 영광을 붙잡지 못하고 목표 없이 인생을 낭비하며 표류하고 있는 낙심자들이 있습니다. 한 때는 교회 안에 있었고 한때는 신자들과 교제를 나누던 이들이 지금은 교회와 담을 쌓고 냉담생활로 지냅니다. 한때는 하느님을 사랑했고 한때는 하느님을 경배했으나 이제는 주님과의 관계가 멀어져 버린 이웃들이 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우리 곁에는 어린 신자들도 있고 어려운 환경속에 지쳐 쓰러진 이웃들도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손을 내밀어 그들을 붙들어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성령 없이 육체를 따라 살게 되면 이웃에게 무관심해 집니다. 성경이 전하는 육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은 단적으로 말해서 이기심의 포로가 된 사람을 뜻합니다. 이런 사람은 늘 자기밖에 모릅니다. 그러나 성령충만하면 주님으로 꽉 차게 되어 주님의 관심이 우리의 관심거리가 됩니다.
(5). 하느님을 섬기는 손이 되라는 말입니다.
우리 손으로 할 수 있는 최고의 영광은 하느님을 섬길 때입니다. 우리의 손이 어떤 손입니까? 예수님께서 피흘려 사신 손입니다. 이 손으로 주님의 살과 피를 받았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피가 묻은 손이 되었습니다. 이 손이 축복의 손이 되었습니다. 영원히 천국에서 주님의 손을 잡고 천상의 집을 거닐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 있는 동안 그 손으로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우리가 재물을 가지고 하늘나라 천국에 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 있는 재물을 천국으로 보낼 수는 있습니다. 우리가 이웃을 데리고 천국에 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 있는 이웃을 하늘나라 백성으로 삼을 수는 있습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이제 구원받은 우리의 손은 주님에게 무엇인가 드릴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동안 하느님으로부터 받기만하던 손이 - 이제 뭔가를 드릴 수 있다면 그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겠습니까? 인색한 손이 되어 오그라진 채 펴지 못하고 인생을 끝내지 말고 손을 펴고 바쳐야겠습니다. 탈출기 23장 15절에 "아무도 빈손으로 내 앞에 나와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려고 손이 펴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더 아름다운 손은 형제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손이 하느님을 섬기는 손입니다. 내 손이 누군가를 천국으로 인도할 수 있다면 그건 이미 내 손이 구원받은 손임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 받은 손은 형제들을 멸망에서 생명으로 인도하고, 세상에서 교회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인도하는 손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손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 있다면 형제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는 손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손이 닿는 곳마다 새 생명이 있고, 참 평화가 있고, 유익을 주는 손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손으로 복음을 주는 손이 되지 못하고 오그라진 채 펴질 줄 모르는 손들이 많이 있습니다. 전도하지 못한 손에 무서운 심판이 있습니다. 에제키엘서 3장 18절에 보면, "가령 내가 악인에게 ‘너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고 말하는데도, 네가 그에게 경고하지 않으면, 곧 네가 악인에게 그 악한 길을 버리고 살도록 경고하는 말을 하지 않으면, 그 악인은 자기의 죄 때문에 죽겠지만, 그가 죽은 책임은 너에게 묻겠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손을 내밀어 죽어 가는 영혼을 구원해 내야 합니다................◆
[말씀자료 : --- 신부 /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12.blog.daum.net%2Fimage%2F6%2Fblog%2F2008%2F08%2F08%2F23%2F22%2F489c566bec874%26filename%3Dda_mebok-004.gif)
|
<미가와 함께하는 묵상> : †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냐?
만약 제가 지금 성직 생활을 그만두게 된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마땅하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당연히 생계를 위해 직업전선에 뛰어들기는 하겠지만 가진 기술도 없고, 가진 재산도 없고, 세상사람이 말하는 배경(백)도 없는터에 과연 무엇을 할지 깊이 고민해 보아야 할 부분입니다. 굳이 일을 찾는다면 지금까지 봉사하는 일을 해 왔기 때문에 아마 그런 종류의 어떤 일을 해보려고 노력해야겠지요.
예를들어 복지센타나 봉사단체에 들어가 몸으로 봉사하는 곳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것도 없으면 하다 못해 몸이라도 건강해야 봉사 일이나, 어떤 새로운 일을 생각해볼 수 있을텐데..., 건강도 그저 그렇고 또 새롭게 사업을 시작하자니 자본이 없고, 특별히 미래를 생각해서 따놓은 자격증도 제대로 없다 보니, 이 성직생활을 버리게 될 경우 거의 절망에 가까운 패배감에 사로잡히게 될 것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분 중에 석공이 한 분 있습니다. 돌을 깨트려서 작품을 만드는 분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이 분의 손에 마비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도 석공에게 있어서 생명과도 같은 오른손에 마비 증세가 나타난 것입니다. 이 분은 지금까지 돌을 깨트리는 일만 하신 분입니다. 한 평생동안 다른 일은 생각해 보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석공으로만 일평생 일을 해 오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찾아온 마비 증세 때문에 오른 손을 쓸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석공은 왼손에 정을 들고, 오른손엔 헤머를 들고서 힘껏 정을 내리치면서 작업을 하게됩니다. 그런데 오른 손에 마비증세가 일어나 헤머를 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더 이상 석공의 일을 할 수 없게 되어 하는 수 없이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그날 이후 그분은 실직자가 되었고, 생활은 점점 어려워지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지금까지 돌을 깨는 것외에 다른 것은 생각해본 일도 없고, 해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분은 석공의 일이 천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월급의 많고 적음을 떠나서 장인(匠人)정신을 가지고 열심히 일을 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통장을 가질만한 여유가 없었고, 그런 이유 때문에 직장을 잃어버리는 순간부터 당장 내일 끼니를 염려해야 할 지경에 놓인 것입니다.
그분은 다른 일을 할만한 여력이 없었습니다. 돌 깨는 기술 외에 다른 기술이나 자격증을 소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직장을 구한다는 것도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습니다. 더구나 오른손의 마비증세는 그분의 활동마저 제한시켰습니다. 그러니 직장을 그만두는 순간부터 사실은 먹는 문제로 인해 고통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이 사람이 누구일까요? 여러분도 잘 아는 분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바로 오늘 성경에 나오는 한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루카 6,6을 보면 이렇게 시작을 합니다. "다른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그곳에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우리는 지난주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밭사이를 지나다가 밀을 잘라먹는 것을 바리사이들이 보고 예수님에게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라고 힐책하는 장면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에게 당신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그 밀밭을 떠나서 회당으로 들어가십니다. 이날도 역시 안식일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것은 이제 안식일에 대한 논쟁 장소가 밀밭에서 회당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회당은 율법을 가르치고, 교육을 실시하는 장소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전을 대신하여 기도와 예배를 드렸고, 경우에 따라서는 중요한 일을 결정짓는 회의소나 집회소로 활용되었던 곳입니다. 그러므로 유다인들에게 있어서 회당은 매우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안식일과 절기가 되면 그들은 이곳에 모여서 율법을 듣고, 예배를 드리고, 중요한 사안을 결정지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곳에 가셨을 때가 안식일인 것으로 보아 이날도 많은 사람들이 모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이곳에서 또 다시 안식일에 대한 논쟁을 벌입니다. 왜 그들은 사람들이 많은 이 회당에서 논쟁을 벌이려 하는 것일까요? 이런 경우를 추론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흔히 '똥개도 자기 집앞에서는 50점 따고 들어간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까? 이웃 골목에서는 쪽도 못쓰는 똥개도 자기 집앞에만 오면 마치 자기가 '세퍼트'나 된 것처럼 으르렁거립니다. 어렸을 때, 남의 동네에 놀러갔다가 그 동네아이들에게 한 대 맞은 기억이 있으십니까? 그때 뭐라고 하셨습니까? "너 우리 동네 오면 죽어!"
회당은 바리사이들에게 있어서 자기 집과 같은 곳입니다. 왜냐하면 회당이라는 장소에서 항상 중심 역할을 했던 사람들은 바리사이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도 보면 '그들의 회당'이라는 표현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적어도 50점은 미리 따놓고 시작할 수 있는 좋은 장소입니다. 그러므로 '밀밭'이라는 어웨이(away)경기에서 패한 바리사이들이 이번엔 '회당'이라는 홈(home)경기에서 멋지게 한번 이겨보려고 회당이라는 홈그라운드를 택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을 때, 그곳에는 손 오그라든 병자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여기에 왜 있는 것일까요? 예수님을 궁지로 몰아넣기 위해 의도적으로 바리사이들이 데려다 놓은 것일까요? 물론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았겠지만 적어도 이 안식일에 손 오그라든 사람이 이곳에 온다는 사실은 미리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유독 이사람을 지목하여 논쟁을 벌이려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미 홈그라운드의 이점(利點)을 십분발휘해서 이곳에 어떤 사람이 오며, 그중에 어떤 사람을 지목해서 질문해야할 것인지도 미리 준비해 둔 상태였을 것입니다.
그들의 질문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어도 법에 어긋나지 않습니까?", 즉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옳습니까?"라는 질문일 것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예수님께 질문을 했을 때에는(실제로는 질문은 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그들 나름대로는 예수님께서 빠져 나올수 없는 몇가지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복음 말씀에 "(그들이 예수를) 고발하려고 지켜보고 있었다"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고발하려는 사람이 아무런 대책없이 고발하겠습니까? 적어도 그들 나름대로는 상대방이 어떻게 나올 것인지를 파악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텔레비젼을 통해 인사청문회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청문회에서 질의하는 의원들을 보면 후보자의 능력을 제대로 검증하려는 모습이 아니고, 어떻게 해서든지 후보자를 흠집을 내보고자 하는 의도가 여실히 드러나 보입니다. 오늘 바리사이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 국회의원들의 모습입니다.
밀밭에서 한번 패한 바리사이들이 회당이라는 장소를 택해서 자신들의 패배를 만회해 보려고 했다면 적어도 철저한 준비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손 오그라든 사람을 두고서 예수님을 향해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옳습니까?"라고 질문했을 때에는 보통질문이 아닙니다. 원문에 따라 충실하게 번역을 한다면 이 질문은 "안식일에 병고치는 것이 지금까지 지켜오던 안식일 규례에 합당합니까?"라는 질문입니다.
만약 이 질문에 대해 조금이라도 자기의 안식일 규례에 맞지 않는 이상한 답변을 한다면 이것을 근거로 예수를 고소할 참입니다. 그들의 규례에 의하면 이 당시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행위는 생명이 위급한 경우에만 해당됩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이 질문에 대해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옳다'라고 하면 안식일 규례를 어기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손 오그라든 병자는 생명이 위급한 경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피를 많이 흘려서 생명이 위독한 것도 아니고, 다리가 부러져서 움직일 수 없는 것도 아니기에 바리사이들이 보기에는 지금 당장 고쳐주지 않아도 생명에는 전혀 지장이 없는 사람이므로 이런 사람을 고쳐준다면 안식일 규례를 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지금 회당에 모인 모든 사람들의 눈이 예수님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말씀을 하느냐?에 따라 그들의 행동이 결정될 판국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들이 지금까지 지켜왔던 규례에 어긋나는 말을 한다면 그들은 십중팔구 벌떼처럼 일어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단순히 예수님 한 개인의 대답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자신들이 지켜온 안식일 규례가 잘못되었고, 자기들도 그 잘못된 규례를 지금까지 지켜왔다는 결론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 한마디 잘못하면 몰매 맞기 딱 좋은 장소입니다.
반면에 바리사이들의 논지와 회당에 모여있는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면 안된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렇게되면 지금까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모두 거짓이 되고 맙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쌓아온 그 모든 활동실적이 한꺼번에 무너지고 맙니다.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분은 진정한 메시야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행동에 모순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중차대한 기로에 예수님이 서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뭐라고 대답을 하십니까? 마태오 11절에는 다음 내용을 삽입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에게 양 한 마리가 있었는데 그 양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다고 하자. 그럴 때에 그 양을 끌어내지 않을 사람이 있겠느냐?'하시면서 예수님은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진 양의 예를 들어서 그들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다시말하면, 안식일에 동물이 구덩이에 빠졌을 때, 그 동물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바리사이들은 두가지 규정을 정해놓고 있습니다. 안식일에 동물이 웅덩이에 빠졌을 경우 그 상황이 동물의 생명에 아주 위급하다고 판단되어지면 그 동물을 건져주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위급하지 않을 경우라면 식물을 갖다주어 그 다음날까지 지내도록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왜 이런 규례를 정해놓은 것일까요? 정말 안식일을 거룩하게 구별해서 하느님께 드리기 위해 이런 규정을 정해놓은 것일까요? 사실 엄밀하게 따지면 동물을 건지는 행위도 노동에 속하기 때문에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고, 동물에게 먹이를 던져주는 것도 노동에 속하기 때문에 안식일을 범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이런 규례를 정해놓은 것일까요?
사실은 하느님앞에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려는 생각보다는 비록 안식일이라할지라도 재산상의 손해는 보지 않겠다는 생각이 짙게 깔려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에 동물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은 허락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실에 근거하여 예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라도 착한 일을 하는 것은 법에 어긋나지 않는다."
예수님의 논지는 너무도 명석합니다. "구덩이에게 빠진 동물에게도 하다 못해 먹이를 던져주기도 하고, 심지어 목숨이 위태할 때는 건져주기도 하는데 하물며 그보다 더 귀한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것은 더 옳고, 더 합당한 일이 아니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누가 이 말씀에 '아니라'고 반론을 제기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이 말씀이 '틀렸다'고 돌을 던질 수 있겠습니까? 만약 반론을 제기하거나 틀렸다고 주장한다면 자기는 짐승만도 못한 꼴이 되고 맙니다. "나는 하찮은 동물보다도 더 하찮고 형편없는 사람입니다."하고 스스로 광고하는 것이 되고맙니다.
그리고 실제로도 이 석공은 아주 절박한 상태에 놓여있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단지 중풍으로 인한 신체의 마비증세만 보고 "죽을 병이 아니다" 하여 안식일에 이사람을 고쳐주는 것이 합당치 않다고 생각했겠지만, 우리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주님은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이 석공이 가진 유일한 기술은 돌을 깨트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을 더 이상 할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해서 요즘처럼 연금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직장에서 퇴직했다고 퇴직금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그 직장을 그만두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다른 직장을 알아봐야 할텐데 이 사람의 신체는 일할 만한 상태가 아닙니다. 오른손이 마비되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성전의 출입구 곁문(작은문)에서 구걸하는 앉은뱅이가 나옵니다. 그는 나면서 앉은뱅이된 자라고 했습니다. 그가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성전입구에서 성전에 출입하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많이 겪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당시는 어떠했겠습니까?
오른손이 마비되어 더 이상 일을 할수 없게 된 이 사람은 당장 먹는 문제를 걱정해야만 하는 아주 딱한 사정에 놓인 사람입니다. 그가 이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은 두가지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돈이 많이 있으면 됩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는 가진 돈이 없습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석공이 전직이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돈이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한가지 밖에는 달리 길이 없습니다. 무엇입니까? 병을 고치는 것입니다. 마비된 손이 정상으로 돌아와서 다시 일을 하게 되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것만이 이 사람이 살수 있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바리사이들이 보기에는 단지 손 하나를 못쓰는 것에 지나지 않을 수 있겠지만, 당사자에게는 생사가 걸려있는 문제입니다. 물론 지금 당장 죽는 것은 아닙니다. 며칠 굶는다고 사람이 쉽게 죽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 오그라진 사람에게는 지금 이 순간이 생사를 결정짓는 매우 중요한 시기입니다.
바리사이들이 그런 깊은 마음을 알 턱이 없습니다. 배고파보지 않았는데 남이 얼마나 배고픈지 알수 없습니다. 이해하는 척 할 수는 있지만 경험해보기 전에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이 사람이 손 오그라진 것만 가지고 안식일 범하는 문제를 논했습니다. 정말 그가 손 오그라진 것으로 인해 얼마나 고통가운데 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 사람의 깊은 속사정까자도 다 아십니다.
그가 손이 오그라진 이후 얼마나 어려운 생활을 해왔는지 주님은 아십니다. 그는 지금 당장이라도 이 문제가 해결되어져야 할 절박한 상황에 놓여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것을 감히 동물을 건지는 것에 견줄 수 있겠습니까? 동물도 웅덩이에 빠졌을 때 안식일이지만 건져주기도 하고, 먹이도 던져주는데 그보다 더 귀한 사람에게 선을 베푸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이제 아무도 예수님이 하실 행동에 대해 저지하거나 반론을 펼만한 사람도 없고 명분도 없습니다. 오히려 몇마디 거들다가는 자신들이 더 난처한 입장에 놓이게 될 지경입니다. 안방에서 기세등등하게 예수님을 궁지로 몰아가려 했던 바리사이들의 모습이 어떠할 것같습니까? 얼마전 일본과의 축구경기때 원정경기에서도 지고난 뒤, 와신상담(臥薪嘗膽)했지만 홈경기마저 진 우리 선수들의 모습이 어떠했습니까? 지금 바리사이들의 모습이 그런 모습일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십니다. 루카 6,13절에 "그들을 모두 둘러보시고는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그렇게 하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예수님은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그에게 “손을 뻗어라” 하시고는 그의 손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의 손을 치유해주셨지만 그것은 손만의 치유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지금 당면해 있는 가장 절박한 생명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은 우리를 향해서도 동일한 모습으로 다가오십니다.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의 규례에 얽매여서 절박한 상태에 놓여있는 손 마비환자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아셨습니다. 아셨을 뿐 아니라 그를 치유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를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삶의 전 영역에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는지도 아시고,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아십니다. 아실뿐 아니라 해결하실 능력도 소유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바리사이처럼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어도 법에 어긋나지 않습니까?"라는 질문만 계속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도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옳은지를 묻고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주님의 말씀 앞에 순종할 차례입니다. 손 오그라든 자는 '손을 뻗어라'는 말에 두말하지 않고 자신의 손을 앞으로 내밀어 폈습니다. 고쳐주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치료하기 위해 어떤 조치를 취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이기에 그냥 내밀어 폈습니다. 그랬더니 왼손과 같이 마비되었던 오른손이 회복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옳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질 것이 아니라, 그저 순종하는 자세로 손을 내미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12.blog.daum.net%2Fimage%2F6%2Fblog%2F2008%2F08%2F08%2F23%2F22%2F489c566bec874%26filename%3Dda_mebok-004.gif)
| |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