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운세] 2월 9일 토요일(음력 12월 29일 丙午)
2월 9일 오늘의 역사
2010 - “시간이 갈수록 고독했던 조각가 권진규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전시장서 동료·친구 등 좌담회 “선생님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 고독해지셨던 것 같아요.”(장지원) “작품을 굉장히 사랑하신 분이라 고독하신 분은 아니었다고 생각해요.”(김정제) 1973년 서울 동선동 자기 작업실에서 자살한 ‘비운의 조각가’ 권진규(1922~73)씨의 생전 모델로, 친구로, 조수로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 9일 덕수궁미술관 회의실에 모였다. 덕수궁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권진규전’의 딸림행사로 국립현대미술관이 마련한 이날 좌담회에는 작품의 모델이었던 장지원(63)씨와 김정제(58·사진)씨, 말년에 교분을 나눈 클래식 애호가 안동림(78)씨, 조수 원수영(63)씨가 참석해 권진규에 대한 각자의 기억을 더듬었다. 미술 교과서에도 실린 <지원의 얼굴> 모델인 장씨는 65년 홍익대 1학년 당시 기초실기 조각시간 강사로 들어온 권씨의 모습을 기억했고, 안씨는 30년 전 이규호 화백, 서울대 박혜일 교수와 함께 찾은 동선동 권씨의 집을 떠올렸다. 권씨가 숨지기 직전 유서를 보낸 사람 중 한명인 김씨는 전화로 음악을 들려주던 ‘로맨틱한 권진규’의 모습을 기억했다. 이날 권씨가 만들어준 자신의 데스마스크와 유서 등을 공개한 김씨는 “선생님이 작품을 위해 목숨을 끊겠다고 한 적은 몇 번 있었다. 철이 없을 때라 선생님이 그러면 농담으로 ‘한번 해보세요’라고 하기도 했었다”며 죽음을 예감했던 일화들을 소개하기도 했다. 조각과 드로잉 등 140여점이 출품된 ‘권진규전’은 28일까지 계속된다. 연합뉴스 /한겨레 2010-02-09 오후 10:27:06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03942.html (권진규전 :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 : 2009.12.22~2010.2.28)
2010 - 경기 시흥서 규모 3.0 지진 기상청은 9일 오후 6시8분께 경기 시흥시 북쪽 8㎞ 지점에서 규모 3.0의 지진이 발생했다고 밝혔다. 이 지진으로 시흥은 물론 인근 서울과 경기지역에서 놀란 주민들이 관계기관에 전화를 걸어 지진 여부를 확인하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진앙지는 시흥시 대야동 은계초등학교 부근인 북위 37.45도, 동경 126.80도로 2~3초 동안 진동이 감지됐다. 서울 부근에서 진동이 감지된 것은 1978년 이후 세번째이며, 올해 들어 국내에서 발생한 지진으로는 일곱번째다. 일반적으로 리히터 규모 3.0의 지진이면 사람들이 느낄 수 있는 유감지진 수준이다. 그러나 저녁 7시30분 현재까지 이번 지진으로 인명 및 재산 피해는 발생하지 않은 것으로 기상청과 경기도, 소방당국은 파악하고 있다. 올해 들어 한반도에서 규모 3.0 이상의 지진이 일어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동안 충남 당진(1월5일)에서 규모 2.6, 평양(1월10일) 2.1, 경북 상주(1월23일)에서 규모 2.1의 지진이 발생했다. 특히 진앙지인 시흥지역에서는 2~3초 동안 ‘크르르 쿵쿵’ 하는 소리와 함께 건물과 유리창이 흔들리는 지진이 감지됐으며 아파트 등 고층건물에서 지진을 많이 느꼈다. 권은중 기자 details@hani.co.kr /한겨레 2010-02-09 오후 09:17:10
2010 - 낸드플래시, 이제 ‘20나노’ 시대 30나노급보다 생산성 두배 메모리 반도체가 올해 안에 20나노급 초미세 공정의 양산 시대에 접어들 전망이다. 하이닉스반도체는 20나노급(1나노미터=10억분의 1m) 기술을 적용한 64기가비트(Gb) 낸드플래시 제품(사진) 개발에 성공했다고 9일 밝혔다. 이로써 삼성전자와 아이엠(IM)플래시테크놀로지(인텔과 마이크론 합작사) 등 주요 낸드플래시 업체들이 올해 들어 모두 20나노급 기술 개발에 성공했다. 이들 업체는 올해 안에 본격 양산을 시작할 예정이다. 반도체 칩은 회로의 선폭을 최소화 해 집적도를 높일수록 생산성과 원가, 성능이 앞선다. 낸드플래시는 주로 휴대용 전자기기에 쓰이는 메모리 반도체로, 해마다 집적도가 빠르게 향상돼 디(D)램 시장을 대체하고 있다. 20나노급 낸드플래시는 30나노급 대비 2배 가까이 생산성이 높다. 디램의 경우, 삼성전자가 최근 업계 처음으로 30나노급 개발에 성공해 올 하반기 양산 예정이며, 하이닉스는 올 연말께 30나노급 제품을 개발해 내년께 양산할 계획이다. 하이닉스는 뉴모닉스(인텔과 에스티마이크로 합작사)와 협력해 30나노급 낸드플래시를 개발한 지 6개월만에 연속적으로 20나노급 개발에 성공했다. 박성욱 하이닉스 부사장은 “올 3분기부터 낸드플래시 전용라인인 청주공장에 1조원을 투자해 생산능력을 두배로 늘릴 계획”이라며 “주로 통신기술에 적용됐던 노이즈(간섭현상) 제거기술을 적용해 공정을 더욱 미세화하는 연구를 추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낸드플래시의 경우 디램과 달리 업체간 미세화 공정 수준이 엇비슷해 치열한 개발 선점 경쟁이 지속될 전망이다. 디램보다 반도체 셀 구조가 단순하기 때문에, 10나노급 미세공정 수준까지 집적도를 끌어올릴 수 있을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글 김회승 기자 honesty@hani.co.kr, 사진 하이닉스반도체 제공 /한겨레 2010-02-09 오후 09:03:15
2010 - 휴대전화 5분이면 충전 끝 조재필 교수, 플렉서블전지 핵심기술 개발 편의점 등에서 고속으로 충전하면 5분 만에 100% 충전할 수 있는 새로운 기술이 국내 연구진에 의해 개발됐다. 조재필(43) 울산과학기술대 교수(차세대전지기술융합연구단 단장)는 9일 나노 크기의 공 모양 실리콘 분말에 탄소(카본) 껍질을 입혀 응집 없이 균질하게 분산시키는 방법을 연구해내 휴대폰 충전시간을 기존보다 6분의 1로 단축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했다고 밝혔다. 연구팀은 카본과 실리콘의 전구체(어떤 물질에 선행하는 물질)를 녹인 용액을 고압·고온 처리할 경우 5~20나노미터의 입자가 만들어지면서 카본 껍질이 입혀져 입자끼리 뭉치지 않으면서 빠른 시간 안에 전자를 통하는 성질을 띠게 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전지 음극에 현재 쓰고 있는 구리나 알루미늄 포일 대신에 고분자를 쓰고, 그곳에 나노 크기의 홈을 판 뒤 카본 껍질의 나노 분말을 삽입하면 쉽게 구부릴 수 있는 차세대 플렉서블 전지를 만들 수 있다고 조 교수는 말했다. 조 교수는 “카본껍질층을 지닌 나노 입자가 고르게 퍼져 있으면 전기 전도성이 크게 높아져 현재 3시간 정도 걸리는 휴대폰 충전시간이 30분 이내로 짧아질 수 있다”며 “현재 휴대폰을 20~30분 만에 고속충전을 할 경우 사용효율(시간)이 60% 정도밖에 나오지 않는 데 비해, 새로운 기술을 적용하면 5분 만에 100% 충전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연구팀의 연구 결과는 응용화학 학술지인 <안게반테 헤미> 9일치 속보에 게재됐다. 이근영 선임기자 /한겨레 2010-02-09 오후 07:01:49
2009 화왕산 ,대보름 억새 태우다 산불 일어남 이 날 오후 6시 15분쯤 경남 창녕군 창녕읍 화왕산 (火旺山·해발 757m) 정상 부근에서 억새 태우기행사 가 진행되던 중 해발 742m 배바우 근처에서 갑자기바람 방향이 바뀌어 불길이 방화선(防火線)을 넘어관람객들 쪽으로 번졌다. 그러자 이를 피하려던 관 람객 4명이 불에 타 숨지고 63명은 절벽에서 떨어지거나 화상을 입는 등 크게 다쳤다. 사고는 행사 진행요원들이 화왕산 정상 둘레 2.7㎞에서 동시에 억새에 불을 붙인 지 10분쯤 뒤 발생했다. 배바우 근처에서 타던 불길이 갑작스러운 역풍으로 방화선을 지나 관람객들 쪽으로 밀려들자 관람객들이 동요해 우왕좌왕했고, 수십 명이 달아나다 넘어지는 등 뒤엉키 면서 절벽으로 떨어지거나 불에 탔다. 이날 행사에는 전국에서 1만5000여명의 관람객이 참가했었다. 당시 현장에는 행사 주최측인 창녕군과 소방서, 경찰서 공무원 등 114명이 안전요원으로 배치돼 있었으나 순식간에 번지는 불을 막지 못했다. 또 창녕군은 불이 관람객들 쪽으로 번지거나 산불로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둘레 2.7㎞의 화왕산성 주변에 너비 25m 안팎의 방화 선을 구축하고 억새 등 불에 탈 만한 식물 등을 미리 제거했으나 불길을 막는 데는 무용지물 이었다. 이에 따라 행사 주최측의 현장통제 계획이 허술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억새 태우기는 화왕산 정상 화왕산성 내 18만여㎡의 억새밭을 불태우는 것으로, '화왕산에 불이 나야 풍년이 들고 재앙이 물러간다'는 전설에 따른 것이다. 창녕군과 창녕지역을 근거로 한 배바우산악회가 국태민안(國泰民安)을 위해 1995년 처음으로 억새를 태웠으며, 1996 년·2000년·2003년·2006년에 이어 올해는 여섯 번째 행사다.
[경남CBS 이상현 기자]
2007 - 올 1월 세계기온, 116년만에 최고 올해 1월은 세계적으로 기온이 가장 높았던 1월이었다고 일본기상청이 9일 발표했다. 일본기상청은 올 1월 세계 평균기온이 예년보다 섭씨 0.45도 상승해 지난 1891년 기상관측 이후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특히 동부 러시아와 북유럽의 기온 상승이 두드러진 것으로 나타났다. 기상청은 이산화탄소의 증가에 따른 지구온난화, 엘니뇨 현상, 주기적인 온도변화가 이상고온 현상의 원인으로 보인다고 말했다.일본의 1월 평균 기온도 평년보다 섭씨 1.44도 높아 역대 4번째로 따뜻했다고 기상청은 덧붙였다. 일본의 1월 평균기온이 가장 높았던 해는 평년보다 2.09도 높았던 지난 1989년이다. /조선
2007 - 박찬호, 뉴욕 메츠 입단 한국인 메이저리거 `맏형' 박찬호(34.전 샌디에이고 파드리스)가 뉴욕 메츠에 새 둥지를 틀었다.
박찬호의 국내 매니지먼트사인 팀61(대표 김만섭)은 9일 자유계약선수(FA) 박찬호가 메츠와 1년 간 옵션을 포함해 총 300만 달러에 계약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박찬호는 지난 1994년 LA 다저스에서 처음 빅리거로 데뷔한 뒤 2002년 텍사스 레인저스, 2005년 샌디에이고를 거쳐 네 번째 팀에 몸 담게 됐다. 박찬호는 톰 글래빈과 올랜도 에르난데스에 이어 제3선발로 메츠 선발진의 주축으로 활약할 것으로 보인다. 내셔널리그 동부지구에 속한 메츠는 뉴욕 양키스와 함께 전통의 명가. 1962년 팀 창단 후 1969년과 1986년 두 차례나 월드시리즈를 제패했다. 2000년 `지하철시리즈'로 불린 양키스와 월드시리즈 때는 1승4패로 챔피언 반지를 내줬다. 지난 해 동부지구 1위로 포스트시즌에 올라 LA 다저스를 꺾고 리그 챔피언십시리즈에 진출했으나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 3승4패로 져 월드시리즈 진출에는 실패했다. 홈구장은 셰이스타디움(5만5천700명 수용 규모). 서재응(30.탬파베이 데블레이스)이 지난 1998년부터 2005년까지 8년 간 몸담았던 팀이라 한국 팬에게도 친숙하다. 박찬호는 앞서 `선발로 뛸 수 있는 서부지구 팀'을 원했다. 그러나 기대했던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가 배리 지토와 랜디 존슨을 영입하면서 길이 막혔고 친정팀 샌디에이고는 최근 제6선발 자리를 제의했다. 그러나 에이전트를 스캇 보라스에서 제프 보리스로 바꾼 후에도 FA 계약 소식이 없었던 박찬호는 샌디에이고의 제의를 거절했고 마침내 선발 주축으로 뛸 수 있는 동부지구의 메츠를 선택했다. 뉴욕이 다저스의 근거지인 로스앤젤레스 다음으로 한인 동포가 많은 점도 계약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졌다. 박찬호는 오는 16일 메츠 캠프가 있는 미국 플로리다주 포트세인트루시로 이동, 훈련에 합류한다.
2005 <학교종> 작사 작곡가 김메리[1940.~2005.2.9.]여사 사망, 김 할머니의 딸 조귀인씨는 “어머니가 주무시다가 조용히 숨을 거뒀다”고 말했다. 김 할머니는 15년 전 중풍으로 쓰러져 걷지 못하게 되자 대외활동을 중단하고, 자서전 ‘학교종이 땡땡땡’ 집필을 시작했다. 1996년 자서전을 낸 뒤 출판 기념회에 참석차 서울을 잠시 방문하기도 했다. ‘학교종’ 노래를 만든 것은 광복을 맞은 1945년. 이화여전 음악과 교수로 있던 할머니가 초등학교 1학년용 음악 교과서를 만드는 작업에 참여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됐다. 할머니는 전차 속에서 초등학교 어린이들이 입학식날 처음 등교하는 정경을 떠올리면서 작사·작곡했다고 밝혔다. 김 할머니는 1904년 서울에서 태어나 이화여전을 졸업한 뒤, 1930년 미국 미시간대학에 전액 장학금을 받고 유학을 가서 음악 석사 과정을 마쳤다. 미시간주에서 사업을 하던 조오흥씨와 1936년 서울에서 결혼했으나, 총독부는 1939년 친미파인 조씨를 강제추방하면서 김 할머니는 출국을 금지시켜 한동안 혼자 살았다. 이화여전 음악과장으로 재직하던 김 할머니는 1947년 남편이 살고 있는 미시간주로 건너갔다. 그는 나이 들어서도 새로운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49세 때는 미국 웨인대학 대학원에서 생화학과 미생물학 공부를 마친 뒤, 1953년부터 1977년까지 병원에서 의학 연구원으로 제2의 인생을 보냈다. 1977년 73세의 나이에도 ‘인생 은퇴’를 거부하고 평화봉사단에 자원해서 3년 동안 아프리카 서부지역의 라이베리아에서 봉사활동을 펼쳤다. 1978년 당시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이 라이베리아를 방문, 최고령 봉사단원인 김 할머니에게 “여기서 뭐하고 있느냐”고 묻자 “당신 어머니처럼 살고 있다”고 농담을 주고받기도 했다. 그는 위생 식기들이 있으면 라이베리아의 열대병을 줄일 수 있다고 믿고 ‘라이베리아로 숫가락을 보내자’는 캠페인을 전개했다. 그는 또 미국 미시간주와 뉴욕주 4곳에 한인교회를 설립하는 등 미국 내 한인들을 위한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그는 이러한 공로로 이화여대로부터 1980년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다. (조선일보[발자취] 2005-02-12 뉴욕=김재호특파원 http://www.chosun.com) *1995 '학교종' 작사-작곡한 김메리[1940. ~2005.2.9.] 여사 귀국 작곡가 김메리할머니 미서 귀국]; -45년 우연히 악상떠올라… 2년후 미로; 한국문화보급 힘써… 내일 출판기념회; 고국에 온 「학교종이 땡땡땡...」-『학교종이 땡땡땡 어서 모이자/선생님이 우리를 기다리신다. 』 우리나라 어린이가 즐겁게 따라 부르고 있는 「학교종」의 작사-작곡가 김메리 할머니(92.뉴욕거주)가 1일 오후 4시20분 김포공항을 통해 내한했다. 김할머니는 공항에서 『50년 넘게 어린이들이 「학교종」을 불러 매우 기쁘다』면서 손을 흔들며 「학교종」을 본래 가사대로 직접 불렀다. 『학교종이 땡땡친다 어서 가보자/선생님이 문에서 기다리신다』…. 김할머니가 「학교종」을 작사-작곡한 것은 광복 첫해인 45년. 당시 김할머니는 현제명、 김성태선생과 함께 음악교과서 만드는 작업을 하면서 초등학교 1학년용 음악교과서를 맡았다. 「학교종」은 전차속에서 우연히 만들어졌다. 『어린이들이 처음 등교하는 정경을 떠올리는데 갑자기 「학교종」의 가사와 멜로디가 저절로 어우러져 나왔어요. 』 1904년 서울에서 태어나 배화학교를 졸업한 김할머니는 잠시 논산 보통학교 교사로 일하다 1930년 미시간대로 유학、 영문학을 전공했다가 1년후 전공을 음악으로 바꿨다. 이어 1934년부터 13년간 이화여전 음악과 교수와 이화여대 음악과장을 맡은 뒤 웨인주립대에서 화학과 미생물학을 다시 전공、 20년간 병원에서 근무했다. 78년 칠순을 넘긴 김할머니는 평화봉사단원을 자원、 아프리카 라이베리아에서 2년 넘게 봉사활동을 했고、 자선사업단체인 「육영선교회」를 만들어 한국문화보급에도 힘썼다. 89년 뇌일혈로 쓰러졌으나 기적적으로 건강을 회복해 지금도 뉴욕 한인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로 어린이들을 지도하고 있다. 김할머니는 3일 서울 힐튼호텔에서 열리는 자서전 「학교종이 땡땡땡」 출판기념회에 참석키 위해 왔으며、 오는 15일 출국한다. <조선일보[사회] 1996-05-02 서교기자 db1.chosun.com >
2003년] 아시아 최고의 스트라이커 ‘황선홍’ 공식은퇴 발표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개막 솔트레이크시티
2001 - 우리 나라 전국 144개 모든 통화권 지역을 고속 대용량(155Mbps∼5Gbps)의 광케이블로 연결한 초고속 정보통신망이 구축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은 20세기말 세계경제가 눈부신 발전을 이루는데 기반이 되었으며 정치,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인터넷은 기업의 경제활동은 물론 개인에게도 필수적인 생활도구가 되고 있어 인간의 삶과 경제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으며 사람들의 생활 뿐 아니라 문화와 가치관까지 바꾸는 변혁의 매체로 등장하고 있다. 인터넷은 지식기반 경제사회에서 생산·구매·물류·재고관리·고객관리 등 모든 분야에 있어서 폭넓게 활용되는 등 경제활동 방식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으로 작용하고 있으며 2000년 12월 현재 전세계 인터넷 이용자수가 4억명을 돌파하고 있다.
2001년] 미국 핵잠수함과 일본의 수산고교 실습선, 하와이 앞바다에서 충돌
2000 - 한국 뇌사 공식 인정 MBC TV `다큐스페셜 - 희생`에서 뇌사자 장기이식의 사례를 인터뷰하고 있다. /조선 한국 뇌사 공식 인정 우리나라에서도 뇌사가 공식적으로 인정됐다. 정부는 2000년 2월9일 국무회의를 열어 ‘장기 등 이식에 관한 법률 시행령’개정안을 의결, 장기 매매를 임의로 알선하거나 교사하면 2년 이상 징역에 처한다고 발표했다. 시행령은 장기 기증자 및 이식 대기자에 대한 모든 정보를 국립장기이식관리기관에서 통합, 관리함으로써 장기를 이식받을 사람을 신속하고 공정하게 선정토록 했다. 미국은 장기공유정보체계를 민간단체가 관리하고 일본은 장기알선업체가 대신한다. 정부가 장기이식을 주도하는 것은 우리나라가 처음이다. 또, 그동안 무법상태에서 행해졌던 뇌사자 장기기증이 합법화되면서 뇌사자 장기의 배분에서 효율성과 형평성을 꾀할 수 있게 됐다. 세계적으로 뇌사가 처음 인정된 것은 1971년 핀란드의 국민보건국이 `시체 조직의 적출에 관한 훈령`을 공포하면서부터였다. 이때까지 뇌사를 법적으로 인정한 나라는 미국, 프랑스, 영국, 핀란드, 일본, 대만 등 16개국이었다. 뇌사를 공식 인정하는 `장기 이식에 관한 법률`이 시행된 이후 나온 첫 뇌사판정자는 2000년 2월15일 인천 가천의대 부속 길병원에서 나왔다. /조선9일부터 뇌사 공식인정 9일부터 공식적으로 뇌사(腦死)가 인정된다.
2000 - 주한미군, 독극물 포름알데히드를 용산기지 하수도로 방류 (주한미군 사령부 7월14일 공식 인정) /조선
주한미군 한강 독극물 무단 방류 사건(駐韓美軍漢江毒劇物無斷放流事件)은 2000년 2월 9일 용산 미8군 기지 영안실에서 군무원이 독성을 가진 발암물질인 포름알데히드를 무단으로 한강에 방류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맥팔랜드에 대한 처벌이 실질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대한민국 사법부에 대한 무시 행위로 대한민국 국민들의 반미감정을 고조시켰다. 사건 개요 영안소 부책임자인 미육군 민간부 군무원 앨버트 L. 맥팔랜드(Albert L. McFarland)가 시신처리 방부제로 사용하는 20박스 분량의 포름알데히드 470병 (223리터)을 싱크대를 통해 하수구에 버리도록 지시했다. 유독물질인 포름알데히드는 별도의 정화시설이 없는 용산 기지의 하수구를 지나 한강으로 그대로 흘러 들어갔다. 사건 경과 이 사건은 포름알데히드같은 유독물질을 별도의 정화 처리 없이 한강에 버렸다는 점에서 많은 관심을 받았다. 2000년 7월 녹색연합이 독극물을 한강에 무단 방류하도록 지시한 혐의로 맥팔랜드를 고발했으나, 검찰과 법무부는 기소를 미루다가 2001년 3월이 되어서야 벌금 500만원에 약식 기소했다. 이에 4월 5일 법원이 직권으로 맥팔랜드를 정식재판에 회부했다. 그러나 기소가 된 이후에도 사건의 당사자 맥팔랜드가 소파(SOFA) 규정을 핑계로 '공무중 발생한 일이기 때문에 재판권은 대한민국이 아니라 미군에 있다'며 법정에 불출석하며 재판을 거부하는등 대한민국 사법부를 무시하는 듯한 인상을 주었기 때문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4월 15일 미군당국은 법무부에 공무증명서를 제출하여 맥팔랜드가 대한민국의 재판에 응하지 않을 것을 밝히자, 법원도 미군의 처사가 법원을 모독한 것이라 하여 단호히 재판을 진행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8월 22일에는 법원 집행관이 맥팔랜드에 대한 공소장을 전달하려 했으나 용산 미군기지 앞에서 미군들로부터 문전박대를 당하기도 했다. 첫 재판은 2003년 12월 12일에 열렸는데, 이는 사건 발생 3년 10개월, 정식 재판에 회부된지 2년 9개월만이었다. 미군 당국은 맥팔랜드가 미8군 영내에 기거하는 지도 알 수 없다고 밝혔기 때문에, 1심은 궐석재판으로 진행되었고 2004년 1월 9일 맥팔랜드에게 검찰이 구형한 벌금 500만원보다 훨씬 무거운 징역 6개월을 선고했다. 애초에 미군 당국은 맥팔랜드에 대한 1차 재판권은 미군에 있다는 주장을 계속 했으며, 이 사건에 대해 대한민국의 재판권을 인정할 수 없으며 항소도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항소만료 시한 하루를 앞두고 맥팔랜드가 항소하였고, 기소된지 3년 9개월만인 2004년 12월에 항소심 법정에 처음으로 출두했다. 결국 2005년 1월 18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항소 1부(재판장 정덕모 부장판사)는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맥팔랜드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사건의 영향 한강에 유독물질을 무단 방류하도록 지시했다는 사실외에도, 미군 군무원이 대한민국의 사법기관을 무시하는 듯한 행위를 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특히 사건의 당사자가 소파 협정을 핑계로 재판에 응하지 않으려 하면서 미군 장갑차 여중생 압사 사건과 함께 대한민국의 반미감정을 증폭시켰으며, 결국 맥팔랜드에 대해 실질적인 처벌이 이루어지지 못하면서 소파 협정의 불평등성에 대한 논의가 형성되었다. 같이 보기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에서, 한강에 나타난 괴물은 이 사건의 미군이 한강에 버린 발암물질때문에 돌연변이가 생겼다고 나온다. 봉준호 감독은 이 사건에서 영화의 모티브를 얻었음을 밝히기도 했다. /위키백과
1999 빈민 운동가 제정구 의원 별세(1944년 3월 1일 - 1999년 2월 9일) 5공화국 출범 이후에도 빈민 운동과 민주화 운동을 계속하여 1986년에는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하였다. 이후 재야운동의 정치권 진입을 위해 1988년 한겨레민주당을 창당하고 대표를 지냈으나 13대 국회에서 낙선하였다. 1992년 김대중의 신민당과 이기택이 민주당(꼬마민주당)이 합당한 민주당 공천으로 경기시흥-군포에 출마하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95년 지방선거 이후 민주당이 김대중 주도로 를 이후 1996년에도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1997년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을 지지한 노무현, 김원기등의 통추 주류와는 달리 양김정치 청산의 취지로 이철 등과 함께 이회창을 지지 대통령을 꿈꾸던 현대의 정주영이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오전 10시 서울 광화문 국민당사 회의실에서 열린 의원총회에 참석, 앞으로 정치를 하지 않겠다. 대신 경제를 하겠다.고 말함으로써 정계은퇴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1997 - 아르테아가 부통령, 에콰도르 대통령에 선출 로살리아 아르테아가. /조선 아르테아가 부통령, 에콰도르 대통령에 선출 1997년 2월 9일 위기에 빠진 에콰도르 정국을 이끌고 갈 신임 대통령으로 미모의 법률가 출신 로살리아 아르테아가 부통령이 선출됐다. 이로써 반정부 시위와 총파업, 대통령탄핵에 이어 군부 쿠데타설로까지 치닫던 에콰도르의 정국 위기는 일단 해소됐다. 의회결정에 따라 그녀는 에콰도르 헌정사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 기록되게 됐다. 그녀는 법률가와 교육자 경력을 가진 여성 정치인으로 교육부장관을 거쳐 1996년 7월 7일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이번에 축출된 압달라 부카람 후보(46)의 러닝메이트로 출마, 부통령에 당선됐다. 그러나 부카람이 경제정책 실패와 온갖 기행으로 원성을 사자 일찌감치 독자노선을 걸었다. 지식인층과 각 정당에 지지기반을 쌓은 그는 대통령 탄핵으로 빚어진 난국을 수습할 해결사로 나서게 됐다. 아르테아가는 늘 웃음짓는 얼굴처럼 온건하고 합리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조선
1996 - 일본 이케다 외무장관 독도 망언
1996년] 한-중 해저광케이블 개통
1992 - 제16회 동계올림픽 개막(프랑스 알베르빌) 제16회 프랑스 알베르빌 동계올림픽 개막식 모습. /조선 제16회 동계올림픽 개막(프랑스 알베르빌) 제16회 동계올림픽대회가 1992년 2월 9일 프랑스 알베르빌(Albertville)에서 개막돼 16일간의 열전에 들어갔다. 65개국 2천6백여명의 선수단이 참가한 이번 대회에서 통일후 첫 출전한 독일이 종합우승을 차지했다. 1948년 스위스 생모리츠 동계대회에 첫 출전한 이래 44년동안 계속 출전해온 한국은 김윤만 선수가 남자 1천m 스케이팅 경기에서 은메달을 따 동계올림픽 사상 첫 메달을 획득한데 이어 남자1천m 쇼트트랙에서 김기훈선수와 이준호선수가 나란히 금메달, 동메달을 따냈다. 한국은 이번 대회에서 금2, 은1, 동메달 1개로 세계 10위를 차지해 아시아 정상으로 군림하던 일본(11위)을 처음으로 제치는데 성공했다. /조선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 3당 합당, 민주자유당 창당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 3당이 1990년
1월 22일 합당선언을 한 후 1990년 2월 9일 서울 여 의도 중소기업회관에서 전당대회 수임기구 합동회 의를 열어 합당을 의결, 민주자유당으로 창당됐다. 이로써 민자당은 모두 2백16석(민정계 1백27, 민주 계 54, 공화계 35)의 의석을 보유하게 돼 개헌선 1백 98석을 크게 웃도는 거대야당으로 공식 출범했다. 정한 당헌을 채택, 공동대표 3인에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씨를 만장일치로 선출했다. 그후 5월 9일 열 린 제1차 전당대회에서 노태우 대통령을 당총재로, 김영삼, 김종필, 박태준씨를 최고위원으로 각각 선출했다. 총 276석 중 148석만을 얻어 여대야소 정국이라는 위기상황에 직면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3당을 통합해 거대야당을 탄생시킨 직접적인 배경이 됐다. 민주자유당은 김영삼 정권 때인 1995년 12월 다시 신한국당으로 당명을 변경했다.
*나구초코예에서 출생했다. 철도원의 아들로 태어나, 1935년 수운(水運)기술전문학교와 페트로자보드스크 주립대학 및 당 간부학교를 졸업하였다. 1939년 소련공산당에 입당, 콤소몰(공산주의청년동맹)에서 활약, 1940년 카렐로핀 자치공화국의 콤소몰 제1서기가 되었고, 1953∼1957년 헝가리 주재 대사관의 참사관에 이어 대사를 역임하였다. 1957∼1962년 당 중앙위 사회주의국 당 연락부장, 1961년 소련공산당 중앙위원, 1962∼1967년 당 중앙위 서기, 1963년 중소(中蘇)회담 대표, 1967∼1973년 당 정치국원 후보, 1973년부터 정치국원을 지내는 한편, 1967년부터 국가보안위원회(KGB) 의장을 역임하였다. 1976년 상급대장(上級大將)이 되었으며, 동유럽 및 중국문제 전문가로 활약하였다. 1982년 5월 당 중앙위원회 서기로 선출되었고, 11월 L.I.브레주네프가 사망하자, 전격적으로 공산당서기장에 선출되었으며, 1983년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국가원수)에 선출됨으로써 1인체제를 굳혔다. 1953년 스탈린이 죽은 후 흐루시초프가 권력을 완전장악하기까지는 5년이 걸렸고, 1964년 흐루시초프 실각 후 브레주네프가 1인독재체제를 굳히는 데는 무려 13년이나 걸렸던 전례에 비추어 보면, 안드로포프의 7개월 만의 1인체제 구축은 크렘린 권력투쟁사에 하나의 ‘신화(神話)’를 낳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1983년 8월 갑작스런 중병으로 일선에서 물러났고 K.U.체르넨코가 뒤를 이었다. (출처: 두산백과)
1972 삿포로 동계 올림픽에서 첫 남북대결 삿포로라는 도시명은 홋카이도 토착인 아이누족(族)의 말에서 유래한다. 시가지는 이시카리[石狩]평야, 도요히라강[豊平川]이 형성하는 선상지에 자리한다. 기후는 대체로 냉량하여 1월 평균기온 영하 4.1℃, 8월 평균기온 21.7℃, 연평균기온 8.2℃이며, 연강수량은 1,141mm이다. 겨울에는 평지에 1~2m, 산악지대에 3m 이상의 적설로 스키를 즐기는 사람이 많다. 삿포로의 도시건설은 1869년에 착수되었으며, 시가지는 바둑판처럼 정연한 가구(街衢) 구획을 보인다. 1886년 도청이 설치되어 홋카이도의 행정중심지가 되었다. 1972년 동계올림픽대회 개최를 계기로 지하철·지하상가·지역난방이 완공되었으며, 세이칸[靑函]터널의 개통과 신지토세[新千歲]공항 개항 및 고속도로의 정비 등으로 교통의 요충지가 되었다. 1980년을 기준으로 3차 산업인구가 77%를 넘었지만 2차 산업인구는 26%에 불과하여 소비도시적인 경향이 짙으나, 일대의 농림업을 바탕으로 한 맥주·우유제품·목재가공·식품가공 및 인쇄·출판·금속가공 등 공업이 이루어지며, 특히 치즈·버터·아이스크림 등 우유제품 생산이 많다. 시내교통은 주로 전차·버스에 의존하고, 남북·동서 방향의 지하철이 있다. 시가지 중심부를 동서로 통하는 너비 105m의 대로에는 가로수와 화단이 이어지고, 개척공로자의 동상·기념비 및 텔레비전 탑 등이 있어 오도리공원[大通公園]이라고 부른다. 그 밖에 시내에는 1878년 설치한 시계탑과 옛 도청청사 등 유서 깊은 건물 및 식물원 등이 있다. 1972년 동계올림픽경기대회를 개최하여 조잔케이[定山溪]온천·데이네[手稻]지구·마코마나이[眞駒內]지구에 경기시설이 정비되어 있다. 또한, 2002년 한일월드컵이 열린 축구경기장 삿포로돔이 있다. 매년 2월 초에 열리는 눈축제 때는 아름다운 얼음조각이 길가에 전시된다.
1969 - 보잉사 B747 첫 비행 성공 [어제의 오늘]1969년 보잉사 B747 첫 비행 성공ㆍ최초 2층 객실, 세계의 하늘 장악 1969년 2월9일 보잉사의 초대형 여객기 B747이 미국 시애틀 북부의 보잉 비행장에서 첫 시험 비행에 성공했다.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여객기의 등장이었다. B747은 종전의 대형 여객기종이던 B707보다 2.5배 컸다. 한 번에 승객 400명 이상을 태울 수 있었고 객실에는 사상 최초로 2층을 도입했다. 여객과 화물 수송 등 다용도 활용이 가능했던 B747은 등장과 함께 세계의 하늘을 장악했다. 승객 수요가 많은 장거리 노선은 모두 B747 몫이었다. 70년 1월 B747을 띄운 팬암을 비롯해 대한항공·영국항공·일본항공·캐세이패시픽 등 주요 항공사들이 앞다퉈 이 여객기를 도입했다. 최근 기종인 400 시리즈를 포함해 B747은 지난해 12월 기준으로 모두 1418대가 생산됐다. 최희진 기자 daisy@kyunghyang.com /경향신문 2010-02-08 17:38:17
1968 - 김수환 주교, 한국 교회 최초의 시국 담화문 발표 김수환 주교는 1968년 2월 9일 한국 교회에서는 처음으로 대 사회적 발언을 한다. 노동자들의 인간 존엄성을 되찾기 위해 나선 것이다. 가톨릭노동청년회(JOC; Jeunesse Ouvriere Chretienne)의 총재주교였던 그는 합법적 노동조합을 탄압하고 노동자를 불법 해고한 ‘강화 심도직물 사건’에 맞서 ‘사회 정의와 노동자 권익 옹호를 위한 주교단 공동 성명서’를 발표했다. 성명 발표 이후 정부가 사태 수습에 나서 6일 후 해고자들이 전원 복직되는 것으로 사태는 일단락됐지만 이후로도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생존권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절규는 끊이지 않았다. 그때마다 김 추기경은 그들을 큰 품으로 끌어안았다.
1967 -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 발효 1966년 7월 9일 한국과 미국 간에 한미행정협정(SOFA)이 조인되어 1967년 2월 9일 발효되었다. 한미행정협정의 원래 명칭은 '대한민국과 미합중국 간의 상호방위조약 제4호에 의거한 시설과 구역 및 대한민국 내에서의 합중국 지위에 관한 협정 및 동 부속문서'이다. 한미행정협정의 법적 배경은 1948년 서울에서 서명된 '대한민국 대통령과 미합중국 군대사령관 간에 과도기에 시행될 잠정적 군사안전에 관한 행정협정', 6·25전쟁 때 체결했던 '한국군 통수권 미군 이양에 관한 협정' 등이다. 그러나 1950~60년대에 주한미군에 의한 한국인 살인·상해·폭행·강간 등의 만행이 잇따르고 반미의식이 높아짐에 따라 1962년부터 한미행정협정 실무회담이 시작되었다. 한미행정협정의 주요 내용으로는 시설과 구역, 노무조항, 형사재판권, 민사재판권 등 민사관련 조항 및 합동위원회 등이다. 이 중에서 시설사용권에 대한 소급 인정과 노무원해고의 자율성 인정, 재판권의 포기 등은 대한민국의 권리를 포기하고 있는 불평등조항이다. 형사재판권의 경우에도 주한미군에 전속적 관할권이 있는 경우 한국정부는 전혀 처벌권이 없어 재판권 행사는 거의 불가능하게 되어 있으며, 노무 조항에서도 한국노동법의 적용을 무시하고 있는 등의 문제점이 있다. /브리태니커 (1966년 7월 9일
1909 국무장관 지낸 미국 정치가 딘 러스크 출생, 1909 국무장관 지낸 미국 정치가 딘 러스크[Rusk, David Dean, 1909.2.9 - 1994.12.20]출생, *조지아주(州) 출생. 미국의 캘리포니아대학과 영국의 옥스퍼드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 베를린에 유학하였다. 1934년 캘리포니아의 밀스대학 교수로 있다가, 1940년 육군 정보장교로 응소(應召)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육군장관 보좌관에 임명되었으나, 1946년 국무성으로 옮겨 국제연합담당관을 거쳐 1950년 극동관계 담당의 국무차관보가 되었다. ★한국의 6·25전쟁 때는 전쟁의 확대를 주장하는 원수 D.맥아더의 의견에 반대한 대통령 H.S.트루먼을 도왔다. 1952-1961년 록펠러재단 이사장으로 있다가, 1961년 J.F.케네디 정부의 국무장관에 취임, L.B.존슨 정부 아래에서도 1969년 1월까지 그 직위에 있었으나, 그 후 관계(官界)에서 나와 조지아대학 국제법 교수가 되었다. (출처: 두산백과)
1909년] 국악인 김천흥(金千興) 출생
1904 제물포 전쟁 1904년 2월 9일, 제물포 앞바다에서 일본과 러시아의 함대가 맞붙었다. 당시 제물포는 하루 전에 중국 뤄순항에서 벌어진 러일 전쟁 탓에 전쟁을 피해 밀려든 각국의 함대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일본 군함은 물론 프랑스, 영국, 미국, 러시아의 군함들까지 같이 정박해 있던 제물포 항에서 일본은 각국 함선에 정오까지 제물포항을 떠나라고 최후통첩을 보냈다. 당시 러시아의 전함 바락(노르만인)호와 카레예츠(고려인)호는 자국의 상선 숭가리 (송화강)호와 함께 정박해 있었는데 러시아는 전쟁 당사국이었기 때문에 순순히 일본 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곧이어 러시아 함정과 일본 함대 간의 해상 포격전이 전개됐다. 전함수 14대 2의 열세 에도 불구하고 대응에 나섰던 러시아 함대는 1시간 만에 만신창이가 돼 소월미도로 돌아갔다. 수병 33명이 사망하고 97명이 부상당할 정도로 큰 피해를 입은 러시아 함대 는 항복하지 않은채 침몰하며 자폭했다. 러일전쟁에 가려져 잘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러시아인들이 ‘러시아인의 기개를 세계 에 알린 자랑스러운 날’로 기념하고 있는 전쟁이었다. 러시아에서는 바락호 함장의 동 상을 세우고, ‘바락’이라는 영화와 제물포해전을 기리는 노래를 만들 정도였다. 러일전쟁: 팔미도 앞바다에서 일본과 러시아 함대 교전 팔미도에 한국 최초의 등대가 세워진 것은 1903년 6월 1일. 이후 팔미도와 등대는 한국 근대사의 영욕을 고스란히 간직해 왔다.
1898 독립협회, 종로에서 만민공동회 염 만민공동회는 1898년에 열강의 이권침탈(利權侵奪)에 대항하여 자주독립의 수호와 자유민 권의 신장을 위하여 조직·개최되었던 민중대회입니다.서울 종로 네거리에서 러시아인(人) 탁지부(度支部) 고문과 군부 교련사관의 해고를 요구하고 이승만(李承晩)·홍정하(洪正夏)등 청년 연 사가 열렬한 연설을 하여 대중의 여론을 일으켰습니다. 이 대회는 계속 개최되어 그 해 10월에 는 윤치호(尹致昊)를 회장으로 선출, 정부의 매국적 행위를 공격하고 시국에 대한 개혁안 6 개조를 결의합니다. 즉, ① 일본인에게 의부(依附)하지 말며, ② 외국과의 이 권계약을 대신 (大臣)이 단독으로 하지 말며, ③ 재정을 공정히 하고 예산을 공표하며, ④ 중대 범인의 공 판과 언론·집회의 자유를 보장하며, ⑤ 칙임관(勅任官)의 임명은 중의에 좇 으며, ⑥ 기타 별항의 규칙을 실천할 것 등입니다. 이 개혁안은 국왕에게 제출되어 왕도 처음에는 그 정당성 을 인정하고 그 실시를 확약하였으나 보수적 관료들의 반대로 이에 관계 한 대신들만 파면되고 실현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1898 독립협회, 종로에서 만민공동회[ 萬民共同會 ] 염, *독립협회 주최로 열린 민중대회로 1898년 3월 서울 종로 네거리에서 러시아인(人) 탁지부(度支部) 고문과 군부 교련사관의 해고를 요구하고 이승만(李承晩) ·홍정하(洪正夏) 등 청년 연사가 열렬한 연설을 하여 대중의 여론을 일으켰다. 이 대회는 계속 개최되어 그 해 10월에는 윤치호(尹致昊)를 회장으로 선출, 정부의 매국적 행위를 공격하고 시국에 대한 개혁안 6개조를 결의하였다. 즉, ① 일본인에게 의부(依附)하지 말며, ② 외국과의 이권계약을 대신(大臣)이 단독으로 하지 말며, ③ 재정을 공정히 하고 예산을 공표하며, ④ 중대 범인의 공판과 언론 ·집회의 자유를 보장하며, ⑤ 칙임관(勅任官)의 임명은 중의에 좇으며, ⑥ 기타 별항의 규칙을 실천할 것 등이다. 이 개혁안은 국왕에게 제출되어 왕도 처음에는 그 정당성을 인정하고 그 실시를 확약하였으나 보수적 관료들의 반대로 이에 관계한 대신들만 파면되고 실현을 보지 못하였다. 독립협회는 해산된 후 얼마 동안은 만민공동회라는 이름으로 활약하였다. (출처: 두산백과) *[독립협회 獨立協會] -조선 후기의 정치·사회 단체로 1896년(고종 33) 7월 설립한 한국 최초의 근대적인 사회정치단체이다. 정부의 외세의존정책에 반대하는 개화 지식층이 한국의 자주독립과 내정개혁을 표방하고 활동하였다. 《독립신문》을 발간하여 민중계몽에 나선 서재필(徐載弼)을 중심으로 이상재(李商在)·이승만(李承晩)·윤치호(尹致昊) 등이 적극 참여하였으며, 협회 발족 당시에는 이완용(李完用)·안경수(安壽) 등 정부 요인들도 다수 참가하였다. 초기에는 토론회·연설회 등 민중계몽운동에 힘써서 많은 젊은이들을 모았으며, 나중에는 정치문제에 관심을 표명하고 실천에 옮기게 되었다. 그 해 11월에 모화관(慕華館)을 독립관으로 개칭하여 집회장으로 사용하였으며, 영은문(迎恩門) 자리에 독립문을 세워 독립정신의 상징으로 삼았다. 1897년 2월에는 러시아 영사관에 머물러 있던 고종에게 환궁할 것을 호소하여 이를 결행하게 하였다. 그러나 《독립신문》을 통한 민주·민권 사상의 보급활동이 큰 힘을 발휘하여 지도자의 정부에 대한 비판·비난이 격화되자 당시 회장으로 있던 이완용이 전라북도관찰사로 부임한 것을 계기로 모든 정부관료 회원들이 탈퇴하였다. 따라서 윤치호가 회장이 된 이후로는 이상재·남궁 억·이승만 등 청년층이 중심이 되어 운영되었고, 서재필은 본회원은 아니었으나 뒤에서 지도·후원하였다. 외국인 고문과 교관 초빙을 맹렬히 반대하고, 지하자원 개발권 및 철도부설권을 외국인에게 허용하는 것도 외국 자본주의 밑에 국가경제를 예속시키는 처사라고 규탄하며 고종에게 거부하라는 상소를 올림에 따라 러시아 군사고문관이 본국으로 소환되고 한로은행(韓露銀行)도 개설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폐쇄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와 같이 활동이 왕성해지고 많은 사회단체 중 지도적 역할을 담당하게 되자, 1898년 종로 광장에서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개최하여 시국에 대한 ‘6개조 개혁안’을 결의하고 그 실행을 고종에게 주청하였다. 고종은 처음에 6개조의 실행을 약속하였으나 정부 대신들이 이권에만 눈이 어두워 약속한 지 며칠이 지나도 아무런 실행을 보이지 않았으므로 협회에서는 정부탄핵의 외침이 점점 드높아 갔고, 정부 수뇌급은 불안을 느끼기에 이르렀다. 이에 정부 수뇌급은 “독립협회가 황제를 폐하고 공화제를 실시하려 한다”고 무고(誣告)함으로써 이상재 이하 17명의 독립협회 간부를 체포하게 하였다. 독립협회는 회원을 총동원하여 석방을 요구하였으나, 정부는 어용단체인 황국협회(皇國協會)를 시켜 보부상(褓負商) 수천 명을 서울에 불러들여 독립협회 회원들에게 테러를 가하게 하여 유혈사태를 빚었다. 이에 흥분한 민중은 고관의 집을 습격하는 등 소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11월 고종은 부득이 내각을 개편하고 양 협회 대표자에게 그들의 요구를 모두 수용할 것을 약속하고 해산을 명하였다. 이로써 협회는 해산되었으나, 그 후 만민공동회라는 이름으로 존속하다가 1899년 초 해산하였고, 그 후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와 대한협회(大韓協會)로 그 정신이 이어졌다. (출처: 두산백과)
1890 네덜란드 건축가 야코뷔스 오우트 출생 1890 네덜란드 건축가 야코뷔스 오우트[ Jacobus Johannes Pieter Oud, 1890.2.9 - 1963.4.5 ] 출생 , *암스테르담 공예학교와 델프트 공과대학에서 수학하였다. ‘데스틸파(De Stijl 派)’에 참가하여 구성적인 건축을 발표하였으며, 1920년대에 로테르담시의 집합주택 등 사회적으로 뜻깊은 건축을 기능주의적인 입장에서 만들어 유명하다. 1935년경부터 기능주의 양식을 거부하는 경향으로 나가,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복고적인 작품이 엿보인다. 저서로 바우하우스 총서에 수록된 《네덜란드 건축》(1926)이 있다. (출처: 두산백과)
1881 (조선 고종 18) 고종, 신사유람단 임명
1877 헝가리 작곡가 피아니스트 크리스토프 폰 도흐나니 사망, 1877 헝가리 작곡가 피아니스트 크리스토프 폰 도흐나니[ Dohnnyi Ern, 1877.7.27 - 1960.2.9 ] 사망, *헝가리 포즈쇼니(Pozsony)에서 태어났다. 에른스트 폰 도흐나니(Ernst von Dohnnyi)라고도 한다. 부다페스트의 왕립음악원에서 수학하였으며, 1897년 첫 교향곡도 그 곳에서 연주되었다. 1908∼1915년 베를린음악원에서 강의하였고, 1919년에는 부다페스트필하모닉(Budapest Philharmonic)의 지휘자 및 부다페스트음악원의 부원장을 역임하였다. 1931년에는 헝가리 라디오방송국의 음악감독이 되었다. 1948년에는 헝가리를 떠나 정치적 망명을 하였는데, 그 때부터 10년 이상 그의 음악은 공산화된 헝가리에서 금지되기도 하였다. 아르헨티나에서 음악을 가르쳤고, 1949년부터는 플로리다주립대학교의 상주 작곡가가 되었다. 1955년 미국 시민권을 획득하였다. 요하네스 브람스(Johannes Brahms)로부터 영향을 받은 그의 음악은 후기낭만파적이며, 양식상으로는 보수적이었다. 작품으로 바이올린곡 《루랄리아 훙가리카 Ruralia Hungarica》와 3개의 교향곡, 1개의 발레곡, F단조 모음곡, 3개의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변주곡, 오페라, 현악4중주곡 등의 실내악곡, 2개의 피아노 5중주곡 등이 있다. 피아노 연주자로서는 폭넓게 여행하여 당대의 가장 뛰어난 연주자의 한 사람으로 명성을 확립하였다. (출처: 두산백과)
1874 프랑스 역사가 쥘 미슐레[Michelet, Jules, 1798.8.21 - 1874.2.9] 사망, *혁명의 격동기에 아버지의 인쇄소 일을 도우며 고학, 21세에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국립 고문서보존소 역사부장(1831), 파리대학 교수(1834), 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1838)를 역임하였다. 저서에 《프랑스사(중세) Histoire de France》(6권, 1833∼1867) 《프랑스혁명사 Histoire de la rvolution franaise》(7권, 1847∼1853) 《프랑스사(르네상스∼프랑스혁명 전)》(11권, 1856∼1867) 《19세기사 Histoire du XIXe sicle》(3권, 1872∼1874) 등 역사에 관한 저작이 있으며, 만년에는 서정적인 자연관찰의 책 《새 L’Oiseau》(1956) 등을 썼다. 1952년 나폴레옹 3세의 쿠데타로 파리에서 추방된 이래, 공직에 관계하지 않고 역사 집필에 전념하였다. 역사에서 지리적 환경의 영향을 중시하고 민중의 입장에서 반동적 세력에 저항하였다. (출처: 두산백과)
1865 독일 지리학자 드리갈스키[Drygalski, Erich Dagobert von, 1865.2.9 - 1949.1.10] 출생, *쾨니히스베르크 출생. 베를린대학 ·뮌헨대학의 교수를 지냈다. 1891년 그린란드 서부인 키라야크스아이스표르드의 탐험대를 지휘하였고, 1901∼1903년 독일의 남극탐험을 지휘하여, 현재의 카이저빌헴름 2세 란트에 도착하였다. 1910년 체펠린 백작의 스발바르(스피츠베르겐) 탐험에 참가하여 지형에 미치는 빙하의 영향을 연구하였다. (출처: 두산백과)
1858년] 독립운동가 이종훈(李鍾勳) 출생
1849 - 마찌니 등, 로마 공화국 수립 로마공화국[Repubblica Romana] 1849년 이탈리아의 로마에서 수립된 공화정부. 1848년 11월 교황 비오 9세가 반(反)오스트리아민족전선에서 이탈한 후의 혼란 속에서 로시 총리가 급진파에 의해 암살당하고 그들의 압력을 두려워한 교황은 시칠리아왕국에 보호를 요청, 가에타로 피신하였다. 무정부 상태의 로마를 장악한 임시평의회는 1849년 2월 9일 교황의 속권(俗權) 폐기와 공화국 수립을 선언하였으며, 그후 G. 마치니를 비롯한 3인의 집정관에게 전권이 맡겨졌다. 그들이 취한 사회정책은 대체로 온건하였는데, 농업정책과 헌법제정 등 주목할 만한 계획을 포함하고 있었다. 프랑스의 루이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가 교황 때문에 로마탈환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4월에 공화국과 교황의 화해주선을 신청했다. 주선을 거부한 공화국은 프랑스군에게 포위당하고 남으로는 시칠리아왕국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1개월에 걸쳐 영웅적인 방어전을 계속하였으나 G. 가리발디와 전국에서 지원한 의용군들의 분투끝에 6월말 로마는 함락되고 7월 3일 프랑스군이 입성, 공화국은 붕괴하였다.
1775 헝거리 수학자 볼리아이( -1856) 출생,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창시자인 야노스 볼리아이의 아버지. 아들이 고등 수학에 관심을 갖도록 하기 위해 젊은이를 위한 명저로 알려진 수학입문서를 썼다. *[로바체프스키기하학 geometry of Lobachevsky] -평행선의 공준 대신에 로바체프스키-볼리아이의 공리를 기초로 하여 세워진 기하학으로 19세기 초 N.I.로바체프스키와 J.보여이는 각각 독립적으로 유클리드의 《기하학원본》의 제5공준(평행선의 공준 또는 공리) ‘한 점 P와 P를 지나지 않는 직선 l이 주어졌을 때, 점 P와 직선 l이 정하는 평면 위에서, 점 P를 지나 직선 l에 평행한 직선, 즉 점 P를 지나 직선 l과 만나지 않는 직선은 단 1개뿐이다’를 부정하고, 그 대신 ‘한 점 P와 P를 지나지 않는 직선 l이 주어졌을 때, 점 P와 직선 l이 결정하는 평면 위에서 점 P를 지나 직선 l과 만나지 않는 2개의 직선이 존재하고, 이들을 XY, X'Y'라 할 때, 두 직선 XY, X'Y' 및 ∠XPX' 내부에 있는 직선들은 모두 l과 만나지 않지만, 점 P를 지나는, 이들 이외의 직선은 모두 l과 만난다’, 즉 평면 위에서 직선 밖의 한 점을 지나 이 직선에 평행한 직선은 적어도 2개 존재한다는 것을 공리(로바체프스키-볼리아이의 공리)로 채택하여, 이것과 《기하학 원본》의 다른 공리로부터 3차원 유클리드공간 내에서의 비유클리드기하학을 창시하였다. 이 기하학을 로바체프스키기하학(볼리아이-로바체프스키 기하학이라고도 한다) 또는 쌍곡선적 비유클리드기하학이라고 하며, 등각사상론(等角寫像論), 곡면의 위상기하학 등 그 응용범위가 넓다. (출처: 두산백과)
1773 윌리엄 헨리 해리슨 미국 제9대 대통령 출생, 1773 윌리엄 헨리 해리슨[ Harrison, William Henry, 1773.2.9 - 1841.4.4 ] 미국 제9대 대통령 출생, *미국의 정치가, 제9대 대통령(재임 1841.3.4∼1841.4.4)으로 버지니아주(州) 출생. 아버지는 미국독립선언서의 서명자이다. 필라델피아에서 의학을 배운 후, 육군에 입대하였다. 1798년 노스웨스트 준주(准州) 행정관, 이어 인디애나 준주의 주지사에 임명되었고, 1812년 미국영국전쟁에서 노스웨스트 준주의 사령관으로 분전하였다. 1816년 연방 하원의원으로 정계에 들어갔고, 1825∼1828년 연방 상원의원을 역임하고 1836년 대통령후보로 나서서 민주당후보 M.V.뷰런에게 패하였다. 1840년 대통령선거에 휘그당(黨)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나 취임 1개월 만에 폐렴으로 사망하였다. (출처: 두산백과) 1621 - 교황 그레고리오 15세, 234대 로마 교황 취임 교황 그레고리오 15세(라틴어:Gregorius PP. XV, 이탈리아어:Papa Gregorio XV)는 제234대 로마 교황(재위: 1621년2월 9일 - 1623년7월 8일)이다. 세속명은 알레산드로 루도비시(이탈리아어:Alessandro Ludovisi)이다. 생애 1554년 1월 9일 이탈리아의 볼로냐에서 태어났다. 1567년 로마에서 예수회의 지도하에 공부하였다. 건강이 좋지 않아 잠시 고향에서 쉰 다음 다시 로마로 돌아가 공부한 후 1571년 볼로냐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학위를 받은 후 성직자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교황 그레고리오 13세와 교황 식스토 5세 치하에서 일하였고 교황 클레멘스 8세에 의해 추기경이 된 후 교황청을 위하여 여러 가지 분쟁들을 해결하였다. 교황청의 명령을 받아 사보이의 카를로 에마누엘레 1세와 에스파냐의 펠리페 3세 사이의 분쟁을 해결하여 두 군주와 교황을 만족시켰다. 교황이 된 그는 동생 오라치오를 장군으로 승진시키고 조카 루도비코를 추기경과 국무성성 장관으로 임명하는 등 족벌주의 정책을 펼쳤다. 그레고리오 15세는 재위 중 교황 선출 방식을 변경하여 남용을 폐지시켰다. 경배나 환호의 방식은 약점이 많았고 일부 추기경들이나 세속 군주들이 다른 추기경들을 동요시킬 수도 있었다. 어떤 경우에는 교황의 선종 전에 이미 모종의 거래를 하는 수도 없었다. 그래서 1621년 11월 26일자로 발표된 칙서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주요 변경 사항들이 있다. 1. 선거는 콘클라베 문을 닫은 후에 실시한다. 2. 후보자는 비밀 투표에 의해 적어도 3분의 2 이상을 얻어야 한다. 3. 각 추기경은 어느 후보자를 칭찬하면서 투표하지 않도록 서약한다. 4. 어느 후보자도 자기를 위하여 투표할 수 없다. 그 다음으로 개혁된 것은 1622년 1월 6일 교황청에 포교성성을 설치하여 외국 선교에 힘쓴 것이다. 이미 전임 교황들에 의해 그 필요성이 인정된 바 있었다. 포교성성은 한 달에 두 차례, 교황과 한 달에 한 번 회의를 열었고 각 선교 지역의 정보와 파견지, 파견할 인물이나 수도회 등을 결정하고 선교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해결하였다. 그레고리오 15세는 모라바를 로마 가톨릭의 세력권으로 편입시키고 예수회를 보호하였다. 1623년 윌리엄 주교를 영국과 스코틀랜드에 교황 대리자로 임명하였다. 그는 영국과 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하여 영국의 왕자 찰스와 에스파냐의 공주의 혼인을 허락하였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위키백과
1614 영창대군 사망(永昌大君, 1606년~1614년) 沆)에 의해 9세에 증살(蒸殺)됨. 1623년 인조반정으로 복권됨 1614 영창대군[永昌大君, 1606 - 1614] 사망, *조선 선조의 아들로 이름 <의>. 인목왕후(仁穆王后)의 소생. 선조의 14왕자 중 막내이며, 유일한 정궁(正宮)의 소생이어서 선조는 이미 세자(世子)로 책봉한 광해군(光海君) 대신 영창대군을 왕세자로 책봉할 것을 영의정 유영경(柳永慶) 등과 비밀리에 의논하였다. 그러나 선조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고 이이첨 등을 등용하였다. 대북파(大北派)의 농간으로 형 임해군(臨海君)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서궁(西宮)에 유폐한 광해군은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을 죽인 데 이어 영창대군도 역모 연루죄로 서인(庶人)으로 강등시켜 강화에 위리안치(圍籬安置)하였다. 1614년 만 8세의 어린 나이에 강화부사(江華府使) 정항(鄭沆)에 의하여 증살(蒸殺)되었다. (출처: 두산백과) 1404 비잔틴 제국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 출생 비잔틴 제국 마지막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 출생(1405 - 1453)1448년부터 치세가 시작되었으며 1453년 메메드 2세의 오스만 제국 군대의 콘스탄티노폴리스(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함락 때 전사 ※비잔틴 제국 :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에 약 1,000년 동안 존속했던 동로마 제국. 비잔틴 제국이라는 이름은 유스티니아누스 왕조가 지중해 탈환을 위해벌였던게르만족 세력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610년 이후부터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팔라이올로구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가 퇴위한 1453년까지를 일컫는 중세 그리스의 동로마 문화권을 의미함
탄생화와 꽃말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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