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나는 성산가야
김 성 문
성산가야(星山伽倻)는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지역에 있던 가야국 중 하나였다. 성산가야의 기원은 삼한 시기 변한 땅인 성주 지역에서 청동기문화를 바탕으로 형성되어 서서히 성장해 건국한 고대 왕권 국가이다.
성산가야 시조 신화는 『삼국유사』에 의하면, “하늘에서 자주색 끈 하나에 여섯 개 둥근 알을 김해 구지봉에 내렸다. 여섯 개 둥근 알 중에서 태어난 한 동자인 벽로(碧露)가 서기 42년에 성산가야를 세워 시조가 됐다.
성산가야는 벽진가야라고도 한다. 이는 성주군 벽진면의 지명을 따른 것으로 추측한다. 성산가야의 지역명은 시대에 따라 성산군, 벽진군, 경산(京山), 현재는 성주이다.
벽진국(碧珍國)이란 국명도 나타난다. 1425년, 세종 7년에 경상도관찰사 하연, 대구군사 금유 등이 세종의 명으로 간행한 필사본 ‘경상도지리지’ 성주목 항목에 ‘이곳은 옛날에 벽진국이라고 불렸는데 지방 전승이다.’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성주군을 중심으로 벽진국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성산가야의 왕 세계는 김영창 『6가야국사실록』에 1세 벽로왕, 2세 이차왕, 3세 유충왕의 기록만 전해지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 가야사에 관한 모든 서적을 없앴기 때문에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성산가야의 실체는 틀림없이 있었으나 현재 남아 있는 유적과 유물은 아주 적다. 고분군으로는 성주읍 성산동, 월항면 용각리, 금수면 명천리 등에 고분군이 있다.
성산동 고분군은 성주읍 동남쪽 성산리 928 일원에 해발 383.4m인 성산의 능선 따라 있다. 고분군에는 129기나 있고, 학계에서는 서기 5~6세기경 지배층의 무덤으로 추정한다. 1963년 사적 제86호로 지정됐다. 고분의 묘장 형태는 한 봉토 내에 두 사람 이상을 매장한 순장에 의한 다장묘이다. 별도의 순장곽을 설치하거나 부곽의 한구석에 순장한 형태이다. 주실인 석실에는 크기에 비해 유물이 빈약하고, 부곽에는 넘칠 정도로 많은 유물을 부장하고 있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1986년 계명대학교박물관에서 성산동 고분군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출토된 유물은 대부분 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다. 여러 종류의 항아리, 접시류, 마구류, 장신구류 등이다. 전시한 금귀걸이를 보는 순간 성산가야 왕비가 사용한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손잡이 달린 항아리 속에는 고둥이 가득 담겨 있었다. 대가야 지역에서도 닭, 생선 뼈가 굽다리 접시에 담긴 채로 출토됐다. 가야인들의 먹거리를 엿볼 수 있다.
2017년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한 성산동 고분에서 출토된 토기를 관람했다. 몇 점의 토기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긴 목 항아리는 현재 음식을 담는 그릇으로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섬세하고 실용적이었다.
성산동 고분군 입구에 2021년 5월에 개관한 ‘성주 성산동 고분군 전시관’이 있다. 전시관에는 기증, 기탁한 유물들이 많다. 상설 전시관에는 성산리 차동골에서 출토된 유물이 매우 많다. 시신의 얼굴 쪽에서 나온 깃털로 만든 부채도 있다.
깃털 부채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의하면, ‘큰 새의 깃을 장례에 부장품으로 하는데, 죽은 사람의 영혼이 하늘로 날아올라 가라는 뜻이다.’는 기록이 있다. 사람이 죽으면 육신을 벗어난 영혼이 다른 세계로 날아간다고 본 것으로 영혼의 존재와 사후 세계를 인정한 것 같다.
전시한 금동관은 벽진면 가암리에서 출토된 것으로 국보급인데 1976년 2점이 발굴됐다. 보관하던 사람이 1점은 부서지자 벽진면 해평동 냇가에 버리고, 1점만 가지고 있다가 압수됐다고 한다.
전시관 실내에는 고분 발굴 현장을 생생하게 볼 수 있는 영상도 있고 사진 자료도 있다. 고분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야외 전시장에는 차동골과 선남면 장학리 고분의 모형도 볼 수 있다.
성산가야는 발굴된 고분의 유물로 볼 때 신라 권역의 토기와 공통된 것이 많다. 4세기 후반부터 대구 등 신라 문화권과 교류가 깊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성산가야는 신라의 것을 받아들이면서 성산가야 나름대로 문화적 특성을 지켜온 고대 국가이다.
성산가야 고분 발굴에서 나온 환두대도, 금동관, 금귀걸이 등으로 보아 성산가야는 화려한 문화를 꽃피웠다.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성산가야라는 역사를 가진 국가였는데 사적(史的)인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분은 남아 있어 성산가야의 유산이자 역사 자료가 되고 있다. 이들 고분에서 그 당시의 유물이 출토되므로 나름대로 당시의 문화를 짐작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생각한다. 성주 지역에 산재해 있는 4세기 이전 고분도 많이 발굴 조사하여 성산가야의 역사를 되찾는 일이 시급하다.
첫댓글 가야사에 관해 계속 작품을 올려주시니 문외한 저도 관심을 조금이나마 갖게 되었습니다. 이글 모두 모아 작품집 내시면 우리 역사를 보는 눈이 달라질 것 같습니다.
관심 가져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식민 사학자에 의해 왜곡된 가야사가 조금이나마
바로 잡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훌륭한 멘트가 큰 힘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