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세지감.(2)
隔世之感 은 그리 오래지않은 동안에 풍습이나 풍속이 크게 바뀌어 딴세상이 된것같은 느낌이다. 1. 수명.
내가 어렸을때 외할머니가 환갑을 맞으셨다. 외삼촌들은 넓은마당에 차양을 치고 멍석을 깐후
여러날동안 친척친지, 이웃과함께 성대한 잔치를 벌였다. 그때, 집안어른이 환갑을 맞는일은 아주 드물었고 그만큼 온가족의 경사이기도 했다.
지금은 60이 노인대접을 못받지만 그때의 평균수명은 45-48세 정도였다. 지금의 과학은 인간의 최대수명을 120세로 보고있다.
신문에 게재되는 유명인사들의 부고를 보면 대부분이 90세이후에 별세하고있다.
그런데 정말 오래사는것이 좋기만 한것인가. 오래사는것과 건강하게 오래사는것은 별개의 문제다.
깊이 생각해볼 일이다. 2. 출산과 자녀.
지금은 거의 모든가정이 외동이다. 셋정도 되면 원시인 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내가 어렸을때는 셋은 보통이고 다섯, 많게는 일곱인집도 흔했다.
'제먹을것은 타고난다' 는게 그때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지금 온 나라가 저출산때문에 야단인것을 보면 정말 격세지감이 절로든다.
지금 저출산의 가장큰 요인은 아이 기르기가 힘들고 무엇보다 돈이 많이들기 때문이다.
애하나 대학입학 시키고나면 그 에미는 폭삭늙는 세상이다. 3. 남존여비.
길을가다 교차되는 지점에서 남여가 만나면 여자쪽이 그 자리에 서서 남자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길을가다 여자가 남자앞을 먼저 지나가면 '재수없다' 고 했다.
여자들 이름중에 '이월이', '삼월이', '오월이' 등 출생한 달의 이름으로 부르는 경우는 허다했다.
남자아이가 나면 돈을주고 작명소에서 작명했지만 여자애는 제대로 된 이름갖는것도 어려웠다. 불과 두세대전까지 그랬다. 4. 박정희 시대.
지금의 집권세력인 586을 운동권이라고 부른다. (사실은 김일성의 주체사상 신봉자들이다.)
특히 박정희의 집권시대를 군부독재라고 부르면서 민주화 투쟁을 했다고 선전한다.
그런데 그 시절을 살았던 나와 내친구들은 그때가 군부독재였고 시민이 탄압받았으며 여러가지 생활의 제약을 받았다는 그들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런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정말 특별히 불편했던 기억이 없다.
심리적 으로는 지금이 더 불편하다. 딱하나 불편했던건 자정에서 새벽4시까지의 통행금지였다.
우리모두는 그때 온몸으로 산업화현장에서 일에 매달렸으며 나라가 발전하는 시대를 살았다.
조선백성이 단군이래 하루세끼 쌀밥을 배부르게 먹은것도 박정희의 통일벼 덕이었다.
나는 그것을 박정희의 가장 큰 업적이라고 생각한다. 5. 군대.
근자 군대급식이 문제가 되면서 음식이 담긴 식판의 사진을 보게됐다.
내가 사병으로 최전방부대에 복무했을때 그런 식판은 꿈에도 상상할수 없는 음식이었다. 춥고배고픈 자유당 군대를 생각하면 그렇다.
보리밥에 소금된장국, 배추잎 하나라도 들어있으면 횡재였다. 그나마 양이적어 항상 배가 고팠다.
그래서 우리들은 먹는 꿈을 많이 꾸었으며 나는 특히 중국집의 찐빵꿈을 많이 꾸었다.
피복도 모자라 나는 USMC 표시도 선명한 미해병대 군복상의 를 입고있었으며
구두는 월남의 고 딘 디엠 대통령이 선물했다는 월남화를 신고있었는데 위는 가죽이고 바닥은 쇠로된 징이 박혀있는 구두였다. 6. 병원.
내가 어렸을때 병원은 의사한분이 거의 모든과목을 다 봤다. 글자그대로 만병통치 선생님이었다.
내가 맹장수술을 했을때 수술후 쇠로만든 등근틀을 배위에 놓고 그 위에 이불을 덮었으며 개스가 나올때까지 물을마시지 못했다. 그 갈증은 정말 참기힘든 고통이었다.
내옆 병상에도 내 또래가 맹장수술을 하고 누워 있었는데 부모가 자리를 비운사이
그애 할머니가 '독한것들 애가 목이 탄다는데 물을 안준다' 면서 손자에게 물을주어 마시게 했다. 결국 재수술을 했다.
그때는 모든 내복약이 가루로되어있어 지금의 정제보다는 먹기가 힘들었다. 7. 장유유서.
어른앞에서는 안경을 벗어야 했고 (건방져 보인다는 이유로) 술잔을 받아도 돌아앉아 마셔야했다.
담배도 어른앞에서는 피울수 없었다. 어른과 아이 사이의 '차례' 는 아주 엄격했으며 모든 인간관계의 기본 이었다. 8. 넝마주이.
그때는 등에 망태를 메고 긴 집게를 들고다니는 넝마주이가 있었다. 지금 우리가 재활용을 위해 분리배출하는 모든 물건은 넝마주이라면 다 가져가는 것들이다.
그때는 특별히 버릴 쓰레기도 별로 없었고 넝마주이들은 가끔 남의 빨래를 훔쳐가곤했다.
버릴게 없었다는 것은 그만큼 가난하게 살았다는 얘기다. 9. 검은찝차와 두루마리화장지.
그때 고위관료들은 미군에서 불하된 찝차를 개조, 검은색을 칠한뒤 타고다녔다. 조수석이 지정 좌석이었다.
그런데 좌석앞 손잡이 옆에 걸게가 있었고 거기에 미군부대에서 유출된 흰색의 두라마이 화장지를 걸고 다녔다. (우리에게는 아직 화장지가 없었다.) 거의 모든차가 그랬고, 그게 자랑이었다. 10. 파자마.
여름이면 집앞에 평상을 내다놓고 저녁때면 동네사람들이 거기에 걸터앉아 모기를 쫓으며 얘기를 나눴다.
그때 파자마가 있는 사람은 그걸 입고나와 사람들에게 자랑했다. 파자마는 귀했기 때문에 충분히 구경꺼리였다. 지금생각하면 있을수 없는 일들이 일상이었던 옛날 얘기다.
지금의 우리사회는 서구기준으로도 그들과 비슷하거나 더 잘살고있다. 그래서 격세지감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살고있는 오늘도 내일이면 다음 세대들에겐 격세지감이 될 것이다. 무식한 귀신은 부적도 몰라본다. ㅡ 한국속담.
by/yorowo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