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사태 보니까 '시스템 관리자들이 지구를 다스릴 때' 라는 소설이 생각나네요. 코리 닥터로우는 실제로 SysAdmin 을 했고 말이죠.
아래는 CC-NC-SA 이니 대충 읽으시면 됩니다. 번역판입니다.
시스템 관리자들이 지구를 다스릴 때
새벽 2시 펠릭스의 핫라인이 울렸을 때, 켈리가 뒤척이며 그의 어깨를 때렸다.
“잠들기 전에 망할 놈의 전화부터 껐어야지.”
“오늘 비상대기조야.” 그가 말했다.
“당신이 무슨 의사인 줄 알아? 겨우 시스템 관리자 주제에.”
그녀는 침대 끝에 앉은 그를 걷어찼다. 펠릭스는 모른 척하고 잠자리에 들기 전, 바닥에 벗어놓은 바지부터 챙겨 입었다.
“내 직업이야.” 그가 말했다.
“그 인간들, 당신을 얼간이 공무원처럼 부려먹잖아. 내 말이 틀렸어? 당신도 이제 아빠야. 어떤 놈 포르노서버가 다운될 때마다 한밤중에 그런 식으로 달려갈 거냐고? 전화 받지 마!”
사실 옳은 말이었다. 어쨌든 전화는 받아야 했다.
“메인라우터가 반응이 없습니다. BGP가 불통입니다.”
시스템 기계음이 이해할 리는 없지만 그래도 그는 욕설을 내뱉었다. 그러면 적어도 기분은 조금 풀린다.
“잘하면 집에서 고칠 수도 있겠어.”
그가 중얼거렸다. 해당 UPS에 로그인한 다음 라우터를 재부팅하면 그만이다. UPS는 별개의 넷블록내에 있으며 독립적이고 안정된 전원공급 장치에 독립된 라우터를 쓰고 있다.
켈리도 이제 침대에 일어나 앉았다. 침대머리에 기댄 모호한 그림자.
“결혼하고 5년 동안 한 번도 집에서 고치는 데 성공한 적이 없었어.”
이번엔 그녀가 틀렸다. 지금껏 이것저것 고친 게 어디 한두 번이던가. 하지만 소란을 피우지 않고 조심스레 처리한 탓에 기억하지 못할 뿐이었다. 아니, 그녀가 옳을 수도 있다. 새벽 1시 이후의 로그는 늘 그 사실을 증명해 주었다. 결국 해당 케이지까지 차를 몰고 가서야 고쳤으니 말이다. 무한 보편 심술통 법칙 및 펠릭스의 법칙.
5분 후 펠릭스는 운전대를 잡았다. 결국 집에서 고치는 건 불가능했다. 개별 라우터의 넷블록 역시 오프라인 상태였기 때문이다. 지난번엔 어떤 정신 나간 건설노무자가 트랙터를 몰고 메인 도관을 뚫고 데이터 센터까지 들어가는 바람에, 50명의 시스템 운영자들과 함께 박살난 센터에 서서, 1주 24시간 내내 1만 개의 전선을 다시 연결하는 불쌍한 직원들을 닦달해야 했다.
차를 모는 동안 전화는 두 번 더 울렸다. 그는 스테레오를 켜둔 채, 보다 위태로운 오프라인 네트워크 기반의 싸구려 스피커로 기계음의 상황보고를 들었다. 그리고 켈리도 전화했다.
“하이.” 그가 인사했다.
“아양 떨지 마. 그런다고 용서할 줄 알아?”
그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좋아, 아양 없음.”
“사랑해, 펠릭스.” 그녀가 말했다.
“난 영원한 자기 종이야, 켈리, 딸랑딸랑. 어서 자.”
“2.0이 깼어. 우리 날라리 아기는 젖꼭지만 빨려고 태어났나 봐.”
그녀의 자궁에 있을 때 아기 이름은 베타 테스트였다. 그리고 양수가 터졌을 때 그는 전화를 받고 사무실을 뛰쳐나가며 소리쳤다. 드디어 골드 마스터를 진수했다! 아이가 첫울음을 울기도 전에 사람들은 2.0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잠을 깨워 미안해.”
그가 사과했다. 이제 곧 데이터 센터였다. 새벽 2시라 도로는 텅 빈 채였다. 그는 속도를 줄이고 차고 입구에 차를 세웠다. 지하에 들어가면 켈리와의 통화가 끊기고 말 것이다.
“날 깨워서가 아냐. 자기는 7년 동안이나 거기 있었고 밑에 세 명이나 있잖아. 그러니까 그 사람들한테 전화하라는 얘기야. 자긴 할 만큼 했으니까.”
“내가 원치 않는 일을 부하직원들한테 떠넘길 수는 없어.”
“자긴 그렇게 했잖아. 밤에 혼자 깨어나기 싫어서 그래. 허전하단 말이야.”
“켈리……”
“이젠 화내는 것도 지쳤다. 그냥 자기가 옆에 있는 게 좋아. 그럼 달콤한 꿈을 꾸거든.”
“오케이.” 그가 말했다.
“오케이라니?”
“간단한 문제야. 당신한테 악몽을 꾸게 할 수야 없지. 난 할 만큼 했어. 지금부터는 휴일을 보장할 경우에만 야간 호출에 응할게.”
그녀가 웃었다.
“시스템 관리자들한테 휴일이 어디 있어?”
“이번엔 있어. 약속해.” 그가 장담했다.
“자기가 최고야. 오, 이런, 2.0이 지금 막 내 잠옷에 코어덤프 파일을 쏟아냈어.”
“내 아들답군.” 그가 자랑스럽게 내뱉었다.
“누가 아니래?”
그녀가 전화를 끊었다. 그는 데이터 센터 주차장으로 차를 몰았다. 배지를 대고, 눈꺼풀을 뒤집어 망막 스캐너가 졸음에 절은 눈동자를 제대로 볼 수 있게도 해주었다.
그는 기계 앞에 서서 과라나 메다포닐 초코바와 깨끗한 방을 위한 엎지름 방지컵에 담긴 치명적인 자판기 커피 한 잔을 뽑았다. 그러고는 초코바를 게걸스럽게 씹으며 커피를 홀짝인 다음 내부 입구에 손바닥 장문을 읽히고 잠시 자세를 곧추세웠다. 문이 쉿 소리와 함께 열리며 에어록의 양압 공기가 훅 하고 불어왔다. 마침내 그가 내부 성소 진입에 성공했다.
그곳은 아수라장이었다. 케이지는 한 번에 두세 명의 시스템 관리자가 작업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큐빅 공간은 하나 건너 서버와 라우터와 드라이브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는데, 지금은 그 사이들에도 20여 명의 관리자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건 이해불가의 슬로건이 적힌 검은색 티셔츠와, 전화기와 다목적 장비들로 가득한 벨트들의 정기총회였다.
보통 때라면 케이지의 좁은 폐쇄공간은 추울 정도였으나 지금은 사람들의 체온으로 과열 지경이었다. 그가 들어서자 대여섯 명이 고개를 들고 그중 둘이 그의 이름을 부르며 인사를 보내왔다. 그는 사람들과 케이지 사이를 뚫고 방 뒤쪽의 아던트 서버랙들이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팀장님.” 반이었다. 오늘 대기조도 아닌데?
“웬일이야? 내일 우리 둘 다 헤맬 필요는 없잖아.”
펠릭스가 따졌다.
“네? 아, 제 개인서버가 저기 있어요. 새벽 1시 30분경에 다운되었고 프로세서 모니터가 절 깨우시더라고요. 연락만 해주셨으면 팀장님까지 오실 필요 없었을 텐데 이럴 줄 몰랐죠, 뭐.”
펠릭스의 서버, 그러니까 다른 다섯 동료와 공유하는 상자는 한층 아래의 랙에 들어 있었다. 그는 그 역시 오프라인인지 궁금했다.
“어떻게 된 거지?”
“대규모의 플래시웜 공격. 제로데이 약점2이 있는 놈 하나가, IPv6를 포함해, 모든 IP블록의 몬테카를로 분석도구를 돌리는 망의 윈도 박스를 모조리 공격했습니다. 대형 시스코 장비들이 모두 v6에 관리 인터페이스를 돌리는데, 동시분석이 열 건 이상이면 완전히 나가자빠지거든요. 한 마디로 거의 모든 인터체인지가 다운되는 겁니다. DNS도 꼬이고…… 누군가 지역전송을 완전히 감염시킨 것 같아요. 오, 그리고 팀장님 주소록 모두에게 아주 기막힌 내용의 이메일과 인스턴트메시징 전송이 이루어지면서 일라이자가 완전히 먹었어요. 팀장님 로그 이메일과 메시지를 입력해 트로이를 열도록 한 거죠.”
“맙소사.”
“예, 맞습니다.”
반은 2유형의 관리자로 180센티미터의 키에 댕기머리와 껄떡대는 목젖이 인상적인 친구다. 앙상한 가슴을 덮은 티셔츠엔 ‘네 무기를 골라라’의 문구와 RPG 사의 다면체 주사위들이 그려 있었다.
반면에 펠릭스는 1유형 시스템 관리자였다. 뱃살만 30킬로그램쯤 나가고 군턱에 덥수룩한 턱수염을 길렀다. 그의 티셔츠엔 ‘안녕 크툴루' 가 적혀 있고 입 없는 헬로키티 스타일의 크툴루가 그려 있다.
그들은 이미 15년간이나 알고 지냈다. 유즈넷에서 처음 인사하고, 다수의 토론토 프리넷 맥주 파티와, 한두 번의 스타트랙 총회에서 만나다가 결국 펠릭스가 아던트의 부하직원으로 반을 끌어들였다. 반은 믿음직스러우며 또 체계적이다. 전기공학 훈련을 받은 덕분에, 지금껏 그가 취한 모든 조치를 일시와 더불어 상술한 스프링노트만도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심지어 이번엔 PEBKAC도 아니에요.”
반이 말했다. PEBKAC. 키보드와 의자 사이, 즉 최종사용자의 문제라는 뜻이다. 이메일 트로이목마는 그 범주로 떨어진다. 사람들이 의심스러운 첨부파일만 열지 않는다면 이메일 트로이는 과거사가 될 거라는 얘기지만 시스코 라우터들 모조리 먹어치운 벌레는 루저와도 무관했다. 그렇다면 얼간이 기술자들 문제일 수밖에 없다.
“그럼, 마이크로소프트 오류야. 새벽 2시에 문제가 생기면 얼간이 사용자 아니면 얼간이 마이크로였으니까.
그들은 결국 인터넷에서 빌어먹을 라우터들을 뽑아버려야 했다. 펠릭스가 한 건 아니지만, IPv6 인터페이스를 셧다운한 후 라우터를 모두 재부팅시키고 싶어 몸이 근질거린 건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일을 한 사람은 두 험상궂은 지옥의 관리자였다. 두 사람은 마치 미뉴엣맨 로켓 격납고 경비원들처럼 동시에 두 개의 열쇠를 돌려 그들의 케이지에 접근했다. 캐나다의 장거리 트래픽 중 95퍼센트가 이 건물을 경유한다. 때문에 미사일 격납고보다 보안이 철저할 수밖에 없었다.
펠릭스와 반은 아던트 박스를 한 번에 하나씩 온라인으로 업로드했다. 프로그램들은 이제 웜 분석의 맹타를 받고 있었다. 라우터를 온라인으로 전환하면 다운스트림 게이지는 공격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인터넷 상의 박스는 어느 것이나 바이러스에 질식하거나 바이러스 공격을 만들어내며 두 경우 모두일 수도 있다. 펠릭스는 백 번의 타임아웃 후에 간신히 국립표준기술연구소(NIST)와 버그 트랙에 접속해, 약간의 커널 패치를 다운받았다. 이제 그가 맡은 기계가 담당하는 웜바이러스의 부하를 줄일 차례였다. 벌써 오전 10시. 산돼지 엉덩이라도 뜯어먹을 만큼 배가 고팠으나, 그의 커널을 다시 컴파일하고 기계를 온라인에 복귀시켰다. 반의 긴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날아다녔다. 그는 각 라우터의 부하통계를 측정하는 내내 혀를 삐쭉 내밀고 있었다.
“그리도에선 200일 간의 업타임을 기록한 적도 있었죠.”
반이 말했다. 그리도는 그 랙에서 가장 오래 된 고참으로 서버에 스타워즈 등장인물 이름을 붙이던 시기 때 들어왔다. 그 이후로 스머프 이름을 붙였고 그 이름들이 떨어지자 맥도날드랜드의 등장인물이 등장했는데, 반의 랩톱 맥치즈 시장이 시초였다.
“그리도는 다시 일어날 거야. 난 저 아래층엔 업타임 5년이 넘은 486이 한 대 있는데, 그걸 재부팅하라면 가슴이 찢어지고 말 거다.”
“세상에, 486은 어디에 쓴대요?”
“안 써. 하지만 5년 업타임의 기계를 누가 셧다운 시키겠나? 자네 할머니 안락사 시키라는 얘기나 매일반인데.”
“배고프네요.”
“좋아, 자네 박스를 올리고 내 것도 한 다음, 레이크뷰 런치에 가서 아침 피자를 사주지. 그리고 남은 하루는 휴가야.”
“나쁠 거 없죠. 이런, 팀장님, 이렇게 천사표이시면 우리가 불평할 재미가 없잖습니까? 우리 같은 놈들은 그저 구덩이에 처박고 짓밟아야 해요. 그렇게 당해도 싼 놈들 아닙니까?”
“팀장님 전화입니다.”
반의 말에 펠릭스도 486의 내장에서 빠져나왔다. 놈은 도무지 작동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지금은 스팸서버를 운영하는 친구한테 사정해서 얻어낸 파워공급 장치를 맞추려 씨름하던 참이었다. 휴대전화는 기계 뒤로 가기 위해 낑낑거리다가 벨트에서 떨어졌었는데, 그걸 반이 대신 받아 건네주었다.
“헤이, 켈리.” 하지만 전화기에서 들린 건 훌쩍거리는 울음소리였다. 설마, 잡음이겠지? 2.0이 욕실에서 물장난하는 중인가? “켈리?”
전화가 끊겼다. 그가 다시 전화하려 했으나 반응이 없었다. 벨소리도 음성 메시지도. 결국 그의 전화도 탈이 나 ‘네트워크 에러’라는 메시지가 떴다.
“망할.”
그가 투덜대며 전화기를 허리에 찼다. 분명 언제 집에 오는지 묻거나, 아니면 집에 올 때 뭔가 사오라는 부탁일 것이다. 안 되면 음성메일이라도 남기겠지.
전원공급기를 실험하고 있을 때 전화벨이 다시 울렸다. 그가 황급히 전화를 받았다.
“켈리? 이봐, 무슨 일이야?”
그는 목소리의 불안감을 어떻게든 지우려 했다. 죄의식 때문이었다. 기술적으로 말해서, 아던트 서버를 복구한 것으로 아던트 파이낸셜에 대한 의무는 끝이 났다. 공임이야 회사에 청구할 생각이지만 어쨌든 지난 세 시간은 순전한 개인 용무였다.
전화기에서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켈리?”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고 발끝이 마비되는 기분이었다.
“펠릭스, 애가 죽었어. 오, 맙소사, 죽었다고.”
우는 목소리라 잘 들리지 않았다.
“누구? 누가 죽었다는 거야, 켈리?”
“윌.” 그녀가 대답했다.
윌? 윌이 누구지? 그리고 순간 털썩 무릎을 꿇었다. 내내 2.0이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윌리엄은 출생신고서에 기록한 이름이다. 펠릭스가 병든 야수처럼 고통의 신음을 터뜨렸다.
“나도 아파. 더 이상 서 있을 수가 없어. 오, 펠릭스, 사랑해. 너무나.”
“켈리? 무슨 일이야? 왜 그래?”
“모두, 모두가…… TV에 채널이 두 개만 남았어. 맙소사, 펠릭스, 창밖은 정말로 「새벽의 저주」의 한 장면처럼 보여……”
그녀가 토하는 소리가 들렸으나, 전화가 끊어지며 흡사 에코플렉스처럼 그 소리를 씻어버렸다.
“끊지 마, 켈리!”
그가 외쳤지만 신호는 또 끊기고 말았다. 911을 때렸지만 통화를 누르자마자 전화는 다시 네트워크 에러를 토해냈다.
그는 반에게서 맥치즈 시장을 빼앗아 486 네트워크 케이블에 연결한 다음, 윈도에서 파이어폭스를 띄워 시경 사이트에 접속해 들어갔다. 마음은 급했지만 그나마 아직 미칠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온라인 신고 게시판을 찾았다. 펠릭스는 한 번도 냉정을 잃은 적이 없었다. 언제나 문제를 해결했고 문제가 꼬인다 해도 절대 흥분하지 않았다.
그는 게시판을 찾아내 버그 보고서를 작성하듯 켈리와의 대화를 상세히 적고 ‘신고’ 버튼을 눌렀다.
반이 그의 어깨 너머로 내용을 읽었다.
“펠릭스……”
“맙소사.”
펠릭스는 케이지 바닥에 앉아 있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반이 랩톱을 받아 뉴스사이트를 시도했으나 모두 접속 불가였다. 뭔가 끔찍한 일이 일어난 건지, 아니면 네트워크가 슈퍼 버그로 헤매는지조차 알 도리가 없었다.
“집에 가야겠어.”
“태워드릴게요. 가는 도중에 사모님께 계속 전화하세요.”
그들은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건물 내부의 몇 안 되는 창문 하나가 그곳에 있었다. 두터운 감시창. 그들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밖을 엿보았다. 수요일치고는 차가 많지 않았다. 그런데 경찰은 평소보다 더 많은 건가?
“오, 이런……” 반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CN 타워 동쪽으로 거대한 바늘처럼 치솟은 흰색의 건물이 마치 진창에 꽂은 나뭇가지처럼 비스듬해졌다. 타워가 움직인 걸까? 그랬다. 정말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천천히, 하지만 북동쪽의 파이낸셜 지역으로 쓰러질수록 속도도 빨라졌다. 타워는 순식간에 굉음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그들은 먼저 충격을 느끼고 그 다음에 소리를 들었다. 이윽고 그 여파에 건물 전체가 요동을 쳤다. 붕괴 현장에서 먼지구름이 일더니 세계 제2의 구조물이 건물들을 차례로 무너뜨리면서 다시 엄청난 굉음이 이어졌다.
“브로드캐스트 센터가 무너지고 있어요.”
반이 말했다. 이번에는 CBS 건물이었다. 사람들이 사방으로 달아나며 돌벼락에 깔렸다. 작은 감시창으로 보니, 마치 파일 공유 사이트에서 깔끔한 컴퓨터 그래픽 영화를 다운받아 보는 기분이었다.
관리자들도 이제 그들 주변으로 몰려 붕괴현장을 보겠다며 아우성이었다.
“무슨 일이에요?” 그들 중 하나가 물었다.
“CN 타워가 무너졌어요.”
펠릭스가 대답했다. 자기 목소리가 너무도 아련하게만 들렸다.
“바이러스 때문인가?”
“뭐? 웜바이러스?”
펠릭스가 그를 노려보았다. 2타입의 뱃살 두둑한 젊은 관리자였다.
“웜바이러스는 아닙니다. 전 도시가 바이러스로 고립되었다는 이메일을 받았어요. 생물무기라고 적혀 있었죠.”
그가 펠릭스에게 블랙베리 휴대폰을 내밀었다.
캐나다 식약청이 전송한 이메일이었다. 펠릭스는 내용에 신경 쓰느라 조명이 모두 꺼졌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다. 그가 깨달은 건 블랙베리 휴대폰을 주인한테 돌려줄 때였다. 그가 결국 나지막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잠시 후, 비상전력이 치고 들어오자, 시스템 관리자들이 계단을 향해 우르르 몰려나갔다. 펠릭스는 반의 손을 잡고 뒤로 끌어냈다.
“우선은 케이지에서 기다리는 게 좋겠어.” 그가 말했다.
“부인은요?” 반이 물었다.
펠릭스 역시 구토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케이지로 돌아가야 해, 어서.”
케이지에는 미립자 공기정화기가 있었다.
그들은 2층의 대형 케이지를 향해 달려 올라갔다. 두 사람이 들어가자 문이 쉭 소리를 내며 닫혔다.
“펠릭스, 댁에 가셔야……”
“생물무기랬어. 슈퍼버그. 필터가 작동하는 한 이곳은 안전할 걸세.”
“예?”
“IRC 서버에 접속해 봐.”
두 사람은 작업을 개시했다. 반은 맥치즈 시장을, 그리고 펠릭스는 스머펫을 이용했다. 그들은 채팅채널들을 훑어 익숙한 이름들이 나오는 방 하나를 찾아냈다.
> 펜타곤 붕괴. 백악관 붕괴.
> 샌디에이고 이웃들이 피를 토하며 발코니로 나와요!
> 누군가 ‘거킨 건물’을 공격, 은행원들이 쥐떼처럼 달아나고 있음.
> 일본의 긴자 거리가 불길에 휩싸였다는 얘기도.
펠릭스가 타이핑을 했다.
‘여긴 토론토. CN 타워의 붕괴를 목격함. 생물무기 얘기를 들었는데 확산속도가 너무 빠릅니다.’
반이 그 글을 읽고 말했다.
“얼마나 빠른지 모르잖아요. 어쩌면 우린 3일 전에 노출되었을 수도 있어요.”
펠릭스가 눈을 감았다.
“그렇다면 우리한테도 징후가 나타나겠지.”
> EMP 탄이 홍콩을 휩쓴 것 같아요. 파리 실시간 영화가 완전히 먹통이 되고 넷블록도 라우팅이 먹히지 않아요.
> 토론토라고 했나요?
낯선 이름이었다.
> 예, 프론트 거리.
> 여동생이 토론토 대에 있는데 전화가 안 됩니다. 대신 좀 걸어주시겠어요?
> 여기도 불통이에요.
펠릭스는 네트워크 에러를 바라보며 타이핑했다.
“맥치즈 시장에 소프트폰이 있습니다. 깜빡했네요.”
반이 말하며 인터넷 전화 어플리케이션을 띄웠다.
펠릭스는 그에게서 랩톱을 받아 집 번호를 눌렀다. 벨이 한 번 울렸지만, 결국 이태리 영화의 앰뷸런스 사이렌 같은 삑삑 소리만 토해냈다.
> 전화 통화 불가.
펠릭스가 다시 타이핑을 했다.
반을 올려다보니 그의 어깨가 흔들리고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세상이 끝나고 있어요.”
한 시간 후, 펠릭스는 IRC를 빠져나왔다. 애틀랜타도 불타고 맨해튼은 링컨 플라자를 내다보는 웹캠들이 모두 불에 탈 정도의 핫존이었다. 다들 이슬람을 비난했으나 결국 메카 역시 불구덩이가 되고 사우디 왕족들은 성 앞에서 교수대에 매달렸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의 두 손이 떨렸다. 반은 케이지 한쪽 구석에서 조용히 훌쩍이고 있었다. 다시 한 번 집과 경찰서에 통화를 시도했으나 벌써 스무 몇 번째인가 실패만 거듭할 따름이었다.
그는 아래층의 서버에 접속해 메일을 확인했다. 스팸. 스팸. 스팸. 또 스팸. 자동 스팸들. 그리고…… 아던트 케이지의 침입 탐지 시스템으로부터 긴급 메시지가 하나 있었다.
그가 얼른 메일을 열었다. 누군가 무리하게, 반복적으로 그의 라우터를 쑤시고 있었다. 웜의 신호와는 달랐다. 루트를 역추적한 결과 공격은 그와 같은 건물에서 비롯되었다. 아래층 케이지의 시스템이었다.
그에 대한 절차는 익히 알고 있다. 그래서 침입자를 포트스캔한 결과 1337 포트가 열려 있음을 알아냈다. 1337은 해커 번호/기호 대체코드로 “leet” 또는 “elite”이며, 웜의 진출입을 허용하도록 개방한 포트 종류다. 그는 1337 포트의 알려진 스플로이트를 모두 검색해 리스너를 확인하는 식으로, 해킹으로 손상된 서버의 지문인식 운영 시스템을 기초로 범위를 좁힌 다음 기어이 잡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건 케케묵은 웜바이러스로 모든 서버가 몇 년 전 이미 패치를 마친 종류였다. 상관없다. 아무튼 지금 클라이언트가 있지 않은가. 그는 그 웜을 이용해 서버 내에 직접 루트계정을 만들어 로그인한 다음 주변을 둘러보았다.
로그인된 사용자는 또 하나 있었다. ‘scaredy.’ 프로세스모니터를 확인해 보니 ‘scaredy’는 펠릭스를 공격하는 수백 개의 프로세스와 다수의 컴퓨터를 만들어놓고 있었다.
펠릭스가 대화창을 열었다.
> 내 서버는 그만 쑤시지그래.
그가 기대한 건 고함, 변명, 거부 따위의 반응이었다. 그보다는 놀라는 쪽이었다.
> 지금 프론트 스트리트 데이터 센터입니까?
> 그렇소.
> 맙소사 내가 마지막 생존자인 줄 알았습니다. 여긴 4층이에요. 밖에 생물무기 공격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정화실에 갇혀 있죠.
펠릭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 내가 추적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공격한 거요?
> 예.
> 기막힌 수로군.
영리한 친구야.
> 여기는 6층이고 옆에 동료가 있소.
> 아는 게 있으신가요?
펠릭스는 IRC 로그를 붙여넣기 하고 상대가 읽을 때까지 기다렸다. 그때 반이 일어나 어슬렁거리기 시작했다. 두 눈이 반짝였다.
“반?”
“오줌이 마려워요.” 그가 말했다.
“문을 열면 안 돼. 저기 휴지통에 마운틴듀 빈 통이 있을 걸세.”
“알았습니다.”
반이 대답했다. 그는 좀비처럼 휴지통으로 걸어가 페트병을 꺼내고 등을 돌렸다.
> 내 이름은 펠릭스입니다.
> 윌이에요.
문득 2.0이 생각나며 뱃속이 천천히 공중제비를 돌기 시작했다.
“펠릭스, 아무래도 나가야겠어요.”
반은 그렇게 말하곤 정말로 에어록 문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펠릭스는 키보드를 떨어뜨리고 부랴부랴 달려가 그가 문을 열기 전에 붙잡았다.
“반, 날 봐. 날 보란 말이야, 반!”
그가 동료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초점을 잃고 번들거리는 눈이었다.
“가야 해요. 고양이들 먹이를 못 줬거든요.”
“저 밖에 뭐가 있다. 빠르고도 치명적인 무기가. 그래, 어쩌면 바람에 날려갔을지도 모르지. 그래서 지금은 안전한지도. 하지만 상황이 확실하거나 선택의 여지가 없을 때까진 여기 앉아 있어야 해. 앉아, 반. 앉아!”
“추워요.”
사실이었다. 펠릭스의 팔도 온통 소름이 돋고 두 발은 얼음덩이 같았다.
“서버 환기창에 기대 앉아. 배출열을 이용하면 좀 나을 거야.”
그는 랙 하나를 골라 기대앉았다.
> 무슨 일 있습니까?
> 아무 일도…… 물건을 조금 정리했어요.
> 언제 나갈 수 있을까요?
> 글쎄, 모르겠군요.
그리고 한동안 어느 쪽도 타이핑하지 못했다.
펠릭스도 마운틴듀 병을 두 번 이용하고 반도 한 번 더 찾았다. 펠릭스는 다시 켈리와의 통화를 시도했다. 시경 사이트는 다운되었다.
결국 그도 서버에 등을 기대고 두 무릎을 끌어안은 채 아기처럼 울고 말았다.
잠시 후, 반이 옆으로 건너와 앉아 펠릭스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다들 죽은 거야, 반. 켈리와 아들, 가족이 모두……”
“아직 확실하지 않아요.” 반이 대답했다.
“아냐, 확실해. 맙소사, 다 끝난 거야, 응?”
“몇 시간만 더 버티다가 나가봐요. 곧 정상을 회복할 거예요. 소방서가 혼란을 수습하고 군대도 움직이겠죠. 금세 좋아집니다.”
펠릭스의 갈빗대가 아팠다. 2.0이 태어난 이후 한 번도 울어본 적이 없었다. 그는 무릎을 더 꼭 끌어안았다.
그때 문이 열렸다.
눈에 핏발이 잔뜩 선 관리자 둘이 안으로 들어왔다. 하나는 ‘나는야 또라이’ 티셔츠 차림이고 다른 자는 캐나다 전자 프론티어 셔츠를 입고 있었다.
“나오세요. 모두 꼭대기 층으로 갈 겁니다. 계단을 통해서.” 또라이가 말했다. 펠릭스는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여기 이 건물에 미생물이 있다면 우리도 감염되었을 겁니다. 어서 가요. 우리도 따라갈 테니.”
“6층에 또 한 명 있습니다.”
“윌, 예, 우리가 찾아냈습니다. 그도 올라가고 있어요.”
또라이는 대형 라우터의 전기코드를 뽑았던 지옥의 관리자 중 하나였다. 펠릭스와 반은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발소리가 황량한 건물을 울렸다. 케이지의 냉기를 겪은 후라 계단은 사우나처럼 느껴졌다.
옥상에 식당이 있었다. 작동 가능한 화장실도 있고, 물과 커피, 그리고 자판기용 먹을거리도 있었다. 어느 곳이나 시스템 관리자들이 줄을 서 있었는데 다들 서로의 시선을 피했다. 펠릭스는 그중 윌이 누구일까 생각하다가 자판기 줄에 합류했다.
그는 잔돈이 떨어지기 전에 초코바 두 개와 커다란 바닐라 커피 한 잔을 뽑았다. 반이 두 사람을 위한 테이블 공간을 확보해, 펠릭스는 물건들을 내려놓고 이번엔 화장실 줄에 끼었다.
“나 먹을 거 조금만 남겨두게.”
그가 반 앞에 초코바 하나를 던지며 말했다.
모두 자리를 잡고, 볼일을 보고, 먹고 있을 때쯤 나는야 또라이와 그의 친구가 다시 나타났다. 그들은 배식구 끝의 현금등록기를 치우고 또라이가 그 위에 올라섰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조금씩 잦아들었다.
“제 이름은 유리 포포비치, 이 친구는 디에고 로젠바움입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선 분명한 사실부터 말씀드리죠. 이 건물은 이미 세 시간 동안 비상용 발전기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라면, 이곳이 중앙 토론토에서 전력이 남아 있는 유일한 건물이지만, 기껏 3일 정도만 버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 밖에는 기원을 알 수 없는 생물무기가 퍼져 있죠. 몇 시간 내에 사망할 정도로 치명적이며, 연무 형태라 오염된 공기를 통해 전파됩니다. 오늘 새벽 5시 이후로 이 건물의 외문을 연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제 지시가 있을 때까지 아무도 열면 안 됩니다.
전 세계 주요도시를 강타한 공격에 위기 대응체계도 대혼란에 빠졌습니다. 공격은 전자, 생물학, 핵폭탄 및 재래식 폭탄 등으로 이루어졌으며 범위 또한 무척 광범위합니다. 전 보안 엔지니어입니다. 그리고 제 고향에서는 이런 식의 집단 공격은 대개 기회주의적으로 여깁니다. 그룹 A의 끔찍한 핵사고 처리를 다들 무시한 덕에 다음엔 그룹 B가 교각 하나를 날려버리는 식이니까요. 기가 막히게 철저한 공격이죠. 동부시각 새벽 2시, 도쿄의 옴 진리교 세력이 지하철에 가스를 살포했습니다. 우리가 파악한 최초의 사건입니다. 물론 사건의 직접적인 계기가 오스트리아 대공일 수는 있겠지만, 이런 종류의 무차별 폭력의 배후가 옴진리교일 수는 없습니다. 그들에겐 정보전의 예가 없고 이 정도 규모의 동시다발 공격을 취할 만한 조직적 통찰력도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그들은 너무 약합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예견 가능한 미래를 기다려야 합니다. 최소한 생물무기의 정체가 파악되고 흩어질 때까지만이라도 말입니다. 그 동안은 랙을 유지하고 네트워크를 관리할 것입니다. 이는 중요한 산업기반이므로 99.999퍼센트의 업타임을 확보해야 합니다. 위기 상황에서 그 일을 완벽히 해내는 게 우리 임무니까요.”
관리자 한 명이 손을 들었다. 녹색 헐크 티를 입었는데 제일 어린 축이어서인지 무척 대담해 보였다.
“누가 죽어서 그쪽한테 왕위를 물려준 겁니까?”
“내가 담당하는 일은, 주 보안 시스템, 만능 케이지 열쇠, 그리고 외부 문의 암호 따위입니다. 어쨌든, 문은 지금 모두 잠겨 있습니다. 처음에 사람들을 이리로 모아 모임을 주선한 게 저였죠. 다른 사람이 이 일을 맡는다 해도 상관은 없습니다. 어차피 엿 같은 일이니까. 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에요.”
“옳은 말씀입니다. 그리고 저도 그쪽만큼은 해낼 수 있습니다. 제 이름은 윌 사리오라고 합니다.”
포포비치가 애송이를 내려다보았다.
“에, 얘기를 마저 하게 해주겠소? 그 다음엔 당신한테 자리를 양보할 테니까?”
“아, 당연히 끝내셔야죠.”
사리오는 등을 돌려 창밖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펠릭스의 시선도 그곳으로 이끌렸다. 기름 연기가 도시 여기저기 타오르고 있었다.
결국 포포비치의 추진력도 꺾이고 말았다.
“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로 그겁니다.”
그가 대충 얼버무렸다.
잠시 정적이 흐르자 애송이가 얼른 돌아보았다.
“오, 그럼 제 차례인가요?” 몇몇 사람들이 키득거렸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세상이 끝장나고 있어요. 누군가 중요한 산업기반들을 동시다발로 때려 부수고 있죠. 하지만 이런 공격이 이렇게 죽이 잘 맞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인터넷. 모든 공격이 기회주의적이라는 이론이 맞는다 해도, 어떻게 해서 기회주의적 공격이 몇 분 안에 조직화될 수 있는지 짚어봐야 할 겁니다. 바로 인터넷이죠.”
“그래서, 인터넷을 셧다운해야 한다는 얘기요?”
포포비치가 가볍게 비웃었으나 사리오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입을 다물었다.
“어젯밤의 공격으로 하마터면 인터넷이 죽을 뻔 했었죠. 주요 라우터에 가벼운 디도스 공격이 있었던 겁니다. 약간의 DNS만 건드리면…… 하, 그럼 목사 딸처럼 순식간에 허물어지는 겁니다. 경찰과 군인은 기계치 무리에 불과합니다. 네트가 뭔지도 몰라요. 우리가 인터넷을 다운시키면 공격의 위력을 떨어뜨릴 수 있을 겁니다. 디펜더만 살짝 교란시켜도 끝나는 일입니다. 때가 되면 다시 구축하면 되니까요.”
“지금 농담하나?”
다시 포포비치였다. 그의 입이 딸 벌어졌다.
“논리적인 결론이죠. 어려운 결정일수록 사람들은 대개 논리를 외면하려듭니다. 그건 사람들 문제예요. 논리가 아니라.”
사리오가 빈정댔다.
웅성거리는 목소리들이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다.
“조용!” 포포비치가 울부짖었다. 소란이 1와트 정도 조용해졌다. 포포비치가 카운터 바닥을 발로 구르며 다시 소리치자 마침내 어느 정도 질서가 잡혔다. 그는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있었는데, 얼굴이 시뻘게졌다. “한 번에 한 사람씩!”
머물자는 사람도 있고 나가자는 사람도 있었다. 케이지에 숨거나, 보급품을 조사하고 보급담당을 선발해야 한다는 얘기도 나왔다. 밖으로 나가 경찰이나 병원 자원봉사자들을 찾아야 한다는 사람도 있고 수비대를 구성해 정문을 지켜야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펠릭스는 자신도 모르게 불쑥 손을 들었다. 포포비치가 그를 지명했다.
“제 이름은 펠릭스 트레몬트입니다. 뭐 하나 읽어드릴까 해서요.” 그가 테이블에서 일어나며 PDA를 꺼냈다. “‘피부와 강철의 지친 거인, 산업세계의 정부들이여, 나는 정신의 새로운 고향, 사이버 공간에서 왔다. 미래를 위해 요구하노니, 과거의 잔재들이여, 우리를 건드리지 말지어다. 그대들은 환영받지 못하나니 우리가 있는 곳에서 그대의 주권은 존재치 않는다. 우리에겐 어떠한 선출 정부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므로, 이에 그대들에게 자유 그 자체와 동일한 권위로서 선언하노라. 우리가 건설 중인 범세계적 공용공간은 그대들이 강요하려는 바의 독재로부터 원천적으로 독립함을 선포하노라. 그대들에겐 우리를 지배할 도덕적 권리도, 그동안 우리를 괴롭혀온 어떤 공권력도 존재치 않노라. 통치자는 피통치자들의 동의로부터 정당한 권력을 부여받아야 하는 바, 그대들은 우리의 동의를 구하지도 또 얻지도 않았도다. 우리는 그대들을 원한 적이 없다. 그대들은 우리를 모르고 또 우리의 세계도 알지 못하는 도다. 사이버 공간은 그대들의 경계 내에 속해 있지 않다. 그러니 공공주택 프로젝트를 처리하듯, 그대들이 건설할 수 있다고 오판하지 말라. 그건 불가능하다. 그건 자연의 행위로서 우리의 공통된 행위를 통해 스스로 성장할 것이다.’ 사이버 공간의 독립선언문입니다. 이미 12년 전에 작성된 것인데, 내가 읽은 가장 아름다운 글 중 하나였죠. 제 자식도 사이버 공간이 자유롭고, 또 그 자유가 현실세계에 영향을 미쳐 더 자유로워질 수 있는 세상에서 키우고 싶었답니다.”
그는 크게 숨을 들이쉬며 손등으로 두 눈을 문질렸다. 반이 어색하게 그의 구두를 두드렸다.
“내 사랑스러운 아들과 아름다운 아내는 오늘 죽었습니다. 수백만이 죽었겠죠. 도시들은 모두 그야말로 불지옥에 빠져 지도상에서 사라졌습니다.”
그가 잠시 훌쩍거리곤 다시 숨을 들이쉬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전 세계 이런 건물에 모여 있습니다. 어젯밤 재앙이 몰아칠 때 웜바이러스를 치료하려 했을 테니까요. 우리는 독립 세력입니다. 식량과 물도 있고. 네트워크도 우리 것입니다. 나쁜 자들이 그렇게 잘 다루는 동안 좋은 사람들은 눈치도 못 챈 바로 그 네트워크 말입니다. 우리 모두 네트워크를 걱정하고 돌보는 과정에서 비롯된 자유를 사랑합니다. 우리는 세상이 알고 있는 가장 중요한 조직통제 수단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이제 세상에 하나뿐인 정부와 가장 가까운 집단도 바로 우리입니다. 제네바는 분화구가 되고 이스트 강은 불에 휩싸였으며 유엔은 날아갔으니까요. 사이버 공간의 블로그 공화국은 기본적으로 이 재앙을 상처 없이 이겨냈습니다. 우리가 불사, 불멸의 괴물 기계를 다루는 관리자들이므로, 더 나은 세계를 재건할 잠재력도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게 아니면 전 살아갈 의미 하나 없는 놈입니다.”
반의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박수갈채를 보내지는 않았지만 그보다 더 가치 있는 행동을 보여주었다. 한동안 존경의 염을 담은 정적을 유지해 준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되죠?”
포포비치의 말도 전혀 냉소적이지 않았다.
뉴스그룹이 제일 빨리 채워졌다. 그들은 스팸파이터들이 거주하는 news.admin.net-abuse.email에 이름을 올렸다. 전면 공격에 맞서 단단한 동지애 문화가 형성된 곳이기도 했다.
새로운 그룹은 alt.november5-disaster.recovery로, .recovery.governance, .recovery.finance, .recovery.logistics 그리고.recovery.defense가 그에 소속되었다. 잡탕 alt.계층과 그 안에 기생하는 모든 떨거지족에게 축복을!
시스템 관리자들이 여기저기서 등장했다. 구글 플렉스가 온라인에 올라 있고, 용감무쌍한 퀸콩도, 거대한 데이터 센터를 휩쓸고 다니며 죽은 서버들을 교화해 주고 재부팅 스위치를 때리는 롤러블레이드 대원들을 이끌고 등장했다. 프레시디오의 인터넷 아카이브는 오프라인 상태였으나 암스테르담의 미러사이트는 살아 있었는데, 그들은 그 차이를 거의 알지 못하도록 DNS를 리디렉트해 두었다. 아마존은 죽었고 페이팔은 살아 있었다. 블로거, 타이프패드, 라이브저널 모두 남아, 공포에 휩싸여 전자 울타리로 모여든 생존자들이 포스팅한 수백만 개의 게시물로 채워졌다.
플리커의 포토스트림은 기가 막혔다. 펠릭스는 한 여자와 아이가 미생물로 인해 끔찍하게 일그러진 채 부엌에 죽어 있는 사진을 보고 얼른 수신거부를 했다. 켈리와 2.0을 닮은 건 아니지만 사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의 온몸이 하릴없이 떨렸다.
위키피디아는 살아있었으나 부하가 걸려 버벅거렸다.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스팸이 쏟아지고 웜바이러스들도 네크워크를 돌아다녔다.
.recovery.logistics는 대부분의 행동이 취해지는 계층이었다.
> 뉴스그룹의 투표기능을 이용해 지역선거를 할 수 있습니다.
펠릭스는 가능하다고 확신했다. 유즈넷 뉴스그룹의 투표는 특별한 장애 없이 20년 이상 유지되어 왔다.
> 지역 대표를 선출하고 그들로 하여금 수상을 지명토록 하는 겁니다.
미국인들은 세계 대통령을 고집했으나 펠릭스는 맘에 들지 않았다. 너무 당파적인 생각이었다. 그의 미래는 미국의 미래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미국의 미래는 백악관과 함께 종지부를 찍었다. 그는 그보다 더 넓은 울타리를 짓고 싶었다.
프랑스 텔레콤의 프랑스인 관리자가 온라인이었다. 유럽방송연맹의 데이터 센터도 제네바를 두드린 폭격 속에서 살아남아 펠릭스보다 영어구사 능력이 좋은 심통쟁이 독일인들로 가득 채워졌다. 그들은 카나리워프의 BBC 생존자들과도 잘 어울렸다.
그들은 .recovery.logistics에서 잡탕영어로 대화를 했는데 펠릭스한테도 힘이 되었다. 일부 관리자들은 오랜 세월의 경험을 바탕으로 어리석은 상호비방을 잠재웠다. 일부는 쓸 만한 제안을 내놓기도 했다.
놀랍게도 펠릭스가 미쳤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 가능한 한 빨리 선거를 하는 게 좋겠어요. 늦어도 내일. 시민들 동의 없는 통치는 부당합니다.
수 초 내에 그의 서버에 대답이 당도했다.
> 장난해요? 시민들의 동의? 내가 오해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통치할 사람들은 대부분 내장을 쏟고 뻗거나 책상 아래 숨어 있지 않으면 폭격에 충격을 받아 거리를 헤매고 있을 거예요. 그 사람들이 언제 투표를 하죠?
펠릭스는 그녀의 말이 옳음을 인정해야 했다. 퀸콩은 예리했다. 여성관리자가 많지 않다는 사실이야 말로 진정한 비극이었으며, 퀸콩같이 영리한 여성을 현장에서 배척한다면, 더 큰 참극이 될 것이다. 새 정부에 여성의 비율을 맞출 방안을 궁리해야겠다. 각 지역에 여성과 남성을 각각 1인씩 선출할 것을 요구하라.
그는 즐겁게 그녀와의 대화에 임했다. 선거는 다음 날 있을 것이며, 그가 꼼꼼히 챙길 일이다.
“사이버 세계 수상? 왜요? 이왕이면 글로벌 데이터 네트워크의 그랜드 푸바라고 하지 그래요. 훨씬 뽀대도 나고 소리도 그럴듯하잖아요. 적어도 그 정도는 되어야죠.”
윌은 식당 위쪽 바로 옆자리에 잠자리를 배당받았다. 반은 그 반대쪽이었다. 방에서 처리 못한 똥 냄새가 났는데, 최소 하루 이상 씻지 못한 스물다섯 명의 시스템 관리자들이 한 방에 꾸역꾸역 처박혀 있으니 오죽하겠는가. 물론 그들 중엔 며칠 이상 씻지 않은 이도 없지 않을 것이다.
“닥쳐, 윌. 넌 심지어 인터넷을 끊어버리겠다고 한 놈이야.”
반이 으르렁거렸다.
“땡. 난 인터넷을 끊어버리겠다고 하는 놈이에요. 현재시제.”
펠릭스가 한 눈을 게슴츠레 떴다. 너무나 피곤해 마치 눈썹으로 역기라도 들어 올리는 기분이었다.
“이봐, 사리오, 내 정강이 맘에 들지 않으면 네 의견을 내라고. 여긴 내가 개지랄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투성이야. 그리고 난 그들도 존중한다고. 그들도 경쟁자로 나서거나 아니면 경쟁자를 지지하니까. 그건 자네 선택이야. 하지만 불평불만은 메뉴에 없다네. 자 자자고. 아니면 일어나 자네 정강을 포스팅하든지.”
사리오가 천천히 일어나 앉더니 베개로 사용하던 재킷을 펼쳐 입었다.
“잘 먹고 잘 사시죠. 난 여기서 나갈 테니.”
“저 친구, 떠나지 않을 줄 알았건만.”
펠릭스가 중얼거리며 돌아누웠다. 하지만 오랫동안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선거에 대해 고민했다.
그 외에도 선거에 뛰어든 사람은 많았는데 일부는 아예 시스템 관리자도 아니었다. 와이오밍의 여름별장에 피신 중인 미국 상원의원도 비상발전기와 위성전화를 지닌 덕분에, 용케 뉴스그룹을 찾아와 링 안으로 모자를 던졌다. 이탈리아의 일부 무정부주의자 해커들도 밤새도록 그룹을 드나들며, 엉망진창의 영어 실력으로 신세계 ‘통치’의 정치적 파산에 대한 장광설들을 포스팅했다. 펠릭스는 그들의 넷블록을 보고 그들이 토리노 인근의 인터렉션 디자인 학원에 짱박혀 있다고 확신했다. 이탈리아는 큰 피해를 당했으나 이 무정부주의자 집단은 용케 그 작은 마을에 둥지를 틀었던 것이다.
놀랄 만한 숫자가 인터넷을 셧다운 시키자는 주장을 지지했다. 펠릭스로서는 그게 과연 가능한지조차 의심스러웠지만 그래도 세상을 완전히 끝장내자는 심정만큼은 이해했다. 왜 아니겠는가? 모든 정황으로 보아 지금까지의 작업은 재앙, 폭력, 편의주의의 비탈길이었고, 그 모든 것이 인류의 종말을 부추기는 것처럼 보였다. 테러리스트의 사소한 공격에 대한 과민성 정부로의 반격도 도를 넘어섰는데…… 머지않아 그들이 세상을 먹어치울 것이다.
그는 인터넷을 셧다운시키는 논리를 생각하며 잠이 들었고 네트워크의 마지막 수호자가 되는 악몽을 꾸었다.
그가 잠을 깬 건 바스락거리는 종이 소리 때문이었다. 돌아보니, 반이 일어나 앉아 야윈 팔을 열심히 긁고 있었다. 재킷은 돌돌 말린 채 무릎 위에 놓여 있었다. 그의 팔은 이미 소금에 절인 쇠고기 빛깔에 비늘 모양을 하고 있었다. 식당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마지막 햇살 속에서 피부 조각이 거대한 구름처럼 춤을 추었다.
“뭘 하는 거야?”
펠릭스도 일어나 앉았다. 반이 살갗을 긁자 그도 덩달아 가려워졌다. 머리를 감은 지도 3일이라, 이따금 이나 벼룩이 보금자리를 튼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전날 밤 안경을 빼고 귓등을 문질러 봤을 때도 손가락이 두터운 피질로 번질거렸는데 이틀만 샤워를 하지 않아도 귓등에 여드름이 생기고, 때로는 커다란 종기가 생겨 켈리가 결국 인상을 찌푸리며 터뜨리곤 했었다.
“긁어요. 맙소사, 온몸이 간지러워 미치겠어요.”
그가 이번엔 머리를 긁기 시작했다. 비듬이 구름같이 일어나며 살갗에서 벗겨낸 때와 뒤섞였다.
펠릭스는 반의 백팩에서 맥치즈 시장을 꺼내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이더넷 선 하나를 꽂았다. 그는 이 일과 연관된다고 생각되는 모든 걸 검색했다. ‘간지러움’ 40,000,000건. 좀 더 복합적인 검색어를 시도하자 범위가 좀 더 구체적으로 좁혀졌다.
“스트레스성 습진 같은데?”
마침내 펠릭스가 진단을 내렸다.
“습진 같은 건 없어요.” 반이 항변했다.
펠릭스는 흰 가루로 덮인 성난 피부 사진들을 보여주었다.
“스트레스성 습진.” 펠릭스가 표제를 읽어주었다.
반이 자기 팔을 비교해 보았다.
“습진, 맞네요.”
“수분을 유지하고 코티손 연고를 바르라고 적혀 있어. 2층 화장실에 있는 구급함을 쓰면 될 거야. 거기서 봤으니까.”
다른 시스템 관리자들과 마찬가지로, 펠릭스는 사무실, 화장실, 부엌, 창고 등을 샅샅이 뒤져, 화장지 한 롤과 서너 개의 초코바를 숄더백에 감춰놓았다. 식당의 식량은 암묵적 합의에 따라 공유하기로 한 터라 서로 탐식과 축재(蓄財)의 징후를 감시했다. 물론 아무도 없는 곳에선 여전히 탐식과 축재가 행해졌다.
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빛에 드러난 얼굴은 눈이 크게 부풀어 오른 듯 보였다.
“메일링 리스트로 항히스테민제를 수배해 볼게.”
펠릭스가 말했다. 첫 번째 모임이 끝나고 몇 시간 내에 건물의 생존자들을 상대로 네 개의 메일링 리스트와 세 개의 위키를 확보했는데, 그 후 며칠 동안 하나로 통일한 바 있었다. 펠릭스는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친구 다섯으로 이루어진 작은 메일링 리스트를 사용 중이었으며 그중 둘은 다른 나라의 케이지에 갇힌 터였다. 모르긴 몰라도 다른 관리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선거 꼭 이기세요.”
반이 펠릭스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비척거리며 다른 곳으로 떠났다.
펠릭스도 일어나 지저분한 창문으로 걸어가 밖을 내다보았다. 토론토는 여전히 불타고 있었고 불길도 전보다 더 거셌다. 그는 토론토 사람들이 포스팅할 만한 메일링 리스트를 찾으려 했으나, 그가 찾아낸 건 다른 데이터 센터의 다른 천재들이 운영하는 곳뿐이었다. 저 밖에 인터넷 포스팅보다 더 긴박한 문제들에 매진하는 생존자들이 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집 전화도 대부분 작동했으나 두 번째 날 이후로는 걸어본 적이 없었다. 음성메시지로 켈리의 목소리를 50번쯤 들었을 때는 작전회의 도중에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물론 그 혼자만 그런 건 아니었다.
선거일. 긴장을 풀고 심호흡을 할 시간이다.
> 초조해요?
> 아뇨.
펠릭스가 타이핑을 했다.
> 솔직히 승부엔 별로 관심 없어요. 그냥 우리가 이 일을 한다는 게 기쁜 거니까. 대안이라 봐야 엉덩이를 뭉개고 앉아 다른 누군가 문을 빠끔히 열어주기를 기다리는 일뿐이잖아요.
커서가 정지했다. 퀸콩은 지연시간이 매우 높은 네트워크 세팅을 사용했다. 그녀는 구글 플렉스 주변의 구글로이드들을 조종해 어떻게든 그녀의 데이터 센터를 끊기지 않게 만들었다. 국외 케이지 중 세 곳은 오프라인이 되고 그와 관련된 중복 네트워크 링크 두 개가 증발했다. 그녀로서는 다행인 게 초당 조회수가 상당히 떨어진 셈이다.
> 아직 중국이 남아 있어요.
퀸콩은 대형 게시판에 칼라판 세계전도를 붙인 후 초당 구글 조회 수에 걸어두는 마술을 활용, 시간에 따른 트래픽 감소를 총천연색 차트로 기록했다. 수많은 비디오클립을 업로드해 역병과 폭발이 세상을 어떻게 휩쓸었는지 보여주기도 했다. 최초의 트래픽 증가는 상황을 파악하려는 사람들 때문이었으나, 역병이 휩쓸면서 조회수는 암울한 경사를 이루며 꺾여 내려갔다.
> 중국은 아직 90퍼센트가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어요.
펠릭스가 고개를 저었다.
> 그들 책임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 아뇨.
그녀는 다시 뭔가를 입력하려다가 포기했다.
> 물론, 아니에요. 난 포포비치 가설을 믿어요. 위장으로 상황을 이용하는 개자식들이 있지만 중국은 다른 누구보다도 강하고 민첩하게 그들을 진압했죠. 어쩌면 전체주의 국가의 유용성을 찾아낸 건지도 몰라요.
펠릭스는 참다못해 다음과 같이 입력했다.
> 당신 사장이 보지 못해서 다행이네요. 당신네들이야 말로 중국의 죽의 방화벽에 가장 열정적인 참여자 아닙니까?
> 내 생각은 아니었어요.
그녀가 입력했다.
> 그리고 사장도 죽었네요. 다들 죽은 모양이에요. 베이 지구가 완전히 박살난 데다 지진까지 닥쳤거든요.
길로이에서 세바스토풀까지 캘리포니아 북부를 휩쓴 강도 6.9의 지진을 기록한, 지질연구소 자동 데이터스트림을 보았었다. 몇몇 웹캠은 피해규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가스 본관 폭발, 장난감블록을 힘껏 걷어찬 것처럼 허물어진 내진 건축물들. 구글 플렉스는 일련의 대형 스프링강 위로 떠올라 접시에 담긴 젤리처럼 흔들렸지만, 서버 랙들은 제자리를 지켰다. 그들이 겪은 최악의 피해는 날아다니는 전선절단기를 맞고 눈이 퉁퉁 불은 시스템 관리자뿐이었다.
> 죄송. 깜빡했습니다.
> 아니에요. 우리 모두 사람들을 잃은걸요.
> 예. 예. 아무튼 선거 걱정은 안 합니다. 누가 이기든 최소한 우린 뭔가를 했으니까요.
> 골빈당이 뽑히면 그도 공염불이겠죠.
골빈당은 인터넷을 셧다운시키려는 무리를 일컫는 일부 관리자들의 은어다. 그 용어를 만들어낸 당사자가 바로 퀸콩인데, 지금껏 일을 해오면서 만난 얼간이 IT 매니저들을 싸잡아 씹는 집합명사로 사용했을 것 같았다.
> 그렇게는 안 될 거예요. 그저 지치고 슬픈 종족일 뿐이잖아요. 당신의 인정이 없으면 승리는 불가능해요.
위성전송 팀, 생존한 대양횡단 팀과 더불어, 구글로이드들은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다. 퀸콩의 인정은 갑작스러운 선물이었다. 그가 감사 이메일을 보냈을 때 그녀는 간단히 “골빈당한테 맡길 순 없잖아요.”라고 답했다.
>gtg
그녀가 연결을 끊었다. 그는 브라우저를 띄우고 google.com을 불러냈다. 브라우저가 먹통이었다. 다시, 그리고 다시 시도하자 구글의 메인페이지가 돌아왔다. 정전, 웜, 또 다른 지진…… 뭔지는 모르지만 퀸콩의 작업장을 때린 것이다. 구글의 로고에 있는 O들이 버섯구름을 뒤집어쓴 지구 혹성들로 바뀌어 있었다. 기가 막혔다.
“먹을 것 좀 있습니까?”
반이 물었다. 서너 시쯤 되었을까? 데이터 센터에선 시간이 흐르는 것 같지 않았다. 펠릭스는 주머니를 두드려보였다. 병참 담당을 선발했으나 이미 자판기 먹을거리가 완전히 털린 후였다. 그도 샌드위치 두 개를 챙겨 상하기 전에 후다닥 처리해 버렸었다.
“초코바가 하나 남았군.” 그가 중얼거렸다.
그날 아침 느슨해진 허리띠를 느끼곤 잠깐 기뻐하기는 했다. 하지만 하필 켈리가 그의 비만을 놀리던 생각이 떠오르면서 홧김에 초코바 두 개를 먹어치웠더랬다. 이제 남은 건 단 하나뿐이다.
“오.”
반이 탄성을 흘렸다. 그의 얼굴은 전보다 홀쭉하고 앙상한 어깨도 더 처져 보였다.
“여기. 펠릭스한테 한 표를.”
펠릭스가 초코바를 내밀었다.
반은 초코바를 받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예. 나도 팀장님한테 이놈을 돌려주며, ‘아니, 받을 수 없어요.’라고 말하고 싶습니다만…… 솔직히 너무 배가 고픕니다. 그래서 받아먹을 생각이에요, 괜찮죠?”
“괜찮네. 먹으라고 준 거야.”
“선거는 어떻게 되어가요?”
반이 물었다. 그는 포장지까지 깨끗하게 핥았다.
“모르겠어. 한동안 확인도 못했네.”
몇 시간 전만 해도 근소한 차이로 앞서고 있었다. 이런 일에는 랩톱이 없는 게 크나큰 핸디캡이다. 케이지마다 그와 비슷한 사람들이 열두 명은 달라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와이파이 기반의 일용할 양식도 챙기지 못한 채 집을 나선 불쌍한 사람들.
“완전히 박살나실 겁니다.”
사리오가 옆으로 미끄러져 들어오며 말했다. 그는 잠 안 자기, 엿듣기는 물론, 유즈넷 악플러답게 현실 세계에서 시비를 일으키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가 주먹을 들더니 손가락 하나씩 펼치는 식으로 요점을 강조해 나갔다.
“몇 가지 기본적인 사실을 이해하는 사람이 승자가 될 거예요. 첫째, 테러리스트들이 인터넷을 이용해 세상을 파괴하므로, 우리도 최우선으로 인터넷을 파괴해야 한다. 둘째, 내가 틀렸다 해도 어차피 허튼 짓이다. 이제 발전기 연료도 바닥난다. 셋째, 그게 아니라면, 구세계가 회복되었다는 얘기가 될 터이니 그 신세계니 뭐니 하는 개소리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 더. 밖으로 나가지 못할 핑계를 찾기도 전에 식량부터 떨어질 것이다. 이봐요, 아직 세상을 회복할 기회는 남아 있습니다. 인터넷을 죽여 악당들이 도구로 이용하지 못하게 만들면 되니까요. 아니면 아저씨 타이타닉 함교에 갑판의자나 잔뜩 끌어다놓고 그 잘난 ‘사이버 독립세계’의 단꿈을 꾸시던가요.”
문제는 사리오 말이 옳다는 사실이었다. 이제 이틀 후면 연료는 떨어질 것이다. 지금껏 네트워크의 간헐적인 전력이 발전기의 수명을 늘려주고 있었다. 그리고 인터넷이 혼란을 부추기는 기본도구로 활용되고 있다는 가설을 믿는다면, 당장 전선을 뽑아버리는 게 여러 가지로 상책일 수도 있다.
하지만 딸과 아내가 죽은 마당에 구세계를 재건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가 원하는 건 새로운 세계였다. 구세계엔 그의 자리가 없다. 더 이상은 아니다.
반이 생살을 긁는 바람에, 찐득거리고 곰팡내 나는 공기 속에서 비듬과 살 조각이 소용돌이쳤다. 사리오가 그를 향해 입을 삐죽 내밀었다.
“더러워. 우린 재생공기를 호흡하고 있다는 사실 좀 신경 쓰시죠? 어떤 나병에 걸리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공기 속에 살포하는 건 엄연히 반사회적 테러입니다.”
“사리오, 네놈이야 말로 반사회적 테러단의 대빵이야. 꺼져, 멀티툴로 심장을 도려내기 전에.”
반이 으르렁거렸다. 그는 긁다말고 피스톨처럼 차고 있는 연장대를 두드리기까지 했다.
“예, 나도 반사회적인 건 맞아요. 아스퍼거 증후군도 있는데 벌써 4일이나 약을 못 먹었답니다. 근데, 형씨는 왜 그 모양이쇼?”
반이 조금 더 긁었다.
“이런, 몰랐다. 미안해서 어쩌냐?”
사리오가 박장대소를 했다.
“오, 잘났어, 정말. 모르긴 몰라도 이 무리의 4분의 3은 경계성 자폐증후군일 겁니다. 나요? 난 그냥 개자식이죠. 하지만 진실을 두려워하지는 않는다오. 그 점에선 형씨보다 낫단 말이요, 엉?”
“꺼져, 골빈당 당수.” 펠릭스가 위협했다.
펠릭스가 역사상 최초의 사이버 제국 수상으로 선출되었을 때 연료는 하루 분도 채 남지 않았다. 첫 번째 개표가 투표과정을 스팸하는 보트로 방해받는 바람에, 결국 귀중한 하루를 날리고 두 번째 투표를 붙여야 했다.
하지만 그때쯤 모든 게 정말로 헛지랄로 보이기 시작했다. 데이터 센터의 절반이 죽고, 퀸콩의 구글 조회수 지도는 점점 더 오프라인으로 바뀌며 어두워지는 세상을 보여주었다. 그래도 아직 새로운 조회와 상승 중인 트래픽 순위표는 남아 있었다. 주로 건강, 피난처, 보건, 자기 방어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웜으로 인한 부하는 줄었다. 가정용 PC 유저들의 전력이 대부분 끊긴 덕에 좀비 PC들이 활동을 못한 덕분이었다. 백본들은 아직 깜빡거리며 살아 있으나 그들 데이터 센터에서 보내온 자료들은 점점 더 절박했다. 펠릭스는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지만 대양횡단 전파중계소의 지구 위성국 사람들은 누구나 마찬가지였다.
물도 점점 고갈되어갔다.
포포비치와 로젠바움이 찾아왔다. 축하 메시지 몇 통에 답하고, 뉴스그룹에 진부한 수락 연설을 포스팅하기 전이었다.
“문을 열 생각이에요.”
포포비치가 말했다. 그 역시 살이 빠지고 추레하고 더러워졌다. 체취가 마치 여름날 어시장 뒤쪽의 쓰레기통에서 무럭무럭 피어나는 김 같았다. 물론 펠릭스라고 다를 리는 없을 것이다.
“정찰 나가시게요? 아니면 연료 확보 차원입니까? 좋은 생각입니다. 자원자를 모아보죠.”
로젠바움이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가족들을 찾으러 갈 생각입니다. 저 밖의 괴물이야 불에 탔겠죠. 하긴 위험이 그대로라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이곳엔 미래가 없으니까.”
“네트워크 관리는 어쩌시게요? 라우터들은 누가 지키죠?”
펠릭스가 물었지만 사실 대답은 뻔했다.
“모든 걸 열 수 있는 루트패스워드를 드리죠.”
포포비치가 말했다. 그는 두 손을 떨었고 두 눈은 몽롱했다. 데이터 센터에 갇힌 다른 흡연자들처럼 그 역시 한 주 동안 금단증세에 시달려야 했다. 카페인 상품도 이틀 전에 떨어졌기에 흡연자들의 고통은 말이 아니었다.
“그리고 난 여기 남아 온라인을 사수하란 말입니까?”
“아직 의욕이 남아 있다면야 누구든 상관없겠죠.”
펠릭스는 시간을 낭비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선거는 고귀하고 용맹스러운 행위로 보였다. 하지만 돌이켜보니, 지금까지의 일은 내분의 명분에 불과했다. 그 시간에 차라리 다음에 어떤 일을 할지 궁리했어야 했다. 그나마 이젠 다음에 할 일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말릴 수가 없군요.” 그가 말했다.
“예, 못해요.”
포포비치가 돌아서서 나갔다. 로젠바움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펠릭스의 어깨를 꼭 끌어안았다.
“고마워요, 펠릭스. 아름다운 꿈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고요. 어쩌면 뭔가 먹고 연료를 얻은 다음에 돌아올지도 모르죠.”
로젠바움에게는, 재앙이 닥친 후 며칠간 인터넷 메신저로 연락하던 여동생이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대답이 없었다. 시스템 관리자들도 작별인사의 기회라도 챙긴 부류하고 그렇지 못한 부류로 나뉘었다. 그리고 서로 상대방이 훨씬 행복하다며 우겼다.
그들은 내부 뉴스그룹에 그 얘기를 포스팅했다. 결국 컴퓨터광들이 아닌가. 그리고 지상 층에서 약간의 의장행사가 있었다. 두 영웅이 이중문을 통과하는 광경을 지켜보는 컴퓨터광들. 두 사람은 키패드를 조작해 덧문을 들어올렸다. 안쪽 문이 열렸다. 그들은 전실로 들어가 뒷문을 닫았다. 그리고 마침내 현관문도 열렸다.
밖은 밝고 맑았다. 텅 비었다는 사실만 아니라면 모든 게 정상 같았다. 가슴 아플 정도로.
두 사람은 머뭇머뭇 세상에 발을 내디뎠다. 한 발, 또 한 발. 그리고 돌아서서 관중들을 향해 손을 저었는데, 그 순간 둘 다 목을 부여잡고 몸을 비틀더니 그대로 바닥에 허물어져버렸다.
“이런……”
펠릭스가 미처 고함을 치기도 전에, 그들은 먼지를 털며 일어나더니 배가 끊어지도록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손을 흔들고 돌아섰다.
“이런, 사이코들.”
반이 투덜대며 팔을 긁었다. 두 손 모두 길고 빨간 손톱자국들로 가득했다. 옷을 뒤덮은 비듬이 가루설탕을 뿌려놓은 듯 보였다.
“재미있잖아.” 펠릭스가 말했다.
“맙소사, 배고파 죽겠어요.” 그가 농담하듯 내뱉었다.
“운 좋은 줄 알아. 우린 먹어치워야 할 패킷이 잔뜩 남았거든.”
펠릭스의 대답이었다.
“너무 천사표시라 불평할 재미가 없다니까요, 대통령 각하.”
반이 이죽거렸다.
“수상이야. 그리고 자넨 투덜이 스머프가 아니라 부수상이라네. 내 지명 리본커터이자 각종 이벤트의 대리 시상자이기도 하고.”
둘 다 기분이 좋았다. 포포비치와 로젠바움의 탈출에 잔뜩 들뜬 분위기였다. 조만간 모두들 나가려 하겠지?
어차피 연료부족으로 예정된 수순이지만, 연료가 바닥날 때까지 기다릴 이유가 뭐란 말인가.
> 오늘 아침 직원 절반이 떠났어요.
퀸콩이었다. 구글은 여전히 트래픽이 많았다. 물론 구글이 스탠포드의 책상 아래 맞춤형 PC들을 잔뜩 끼워 맞추던 시대보다 훨씬 줄어들기는 했다.
> 우리도 4분의 1로 줄었네요.
펠릭스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포포비치와 로젠바움이 떠난 지 불과 하루. 하지만 뉴스그룹의 트래픽은 제로 수준까지 떨어졌다. 펠렉스와 반은 사이버 공화국을 갖고 놀 시간조차 없었다. 포포비치가 넘긴 시스템들을 배우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캐나다 네트워크 백본들을 위해 중앙 교환기로 사용하는 초대형 라우터들이었다.
이따금 누군가 뉴스그룹에 포스팅을 했으나, 대개 작별인사였다. 누가 수상이 되고 네트워크를 셧다운할 것이며 식량을 훔쳐가는 자가 누구냐의 논쟁은 이미 오래 전에 끝난 터였다.
뉴스그룹을 다시 띄웠지만 진부한 메시지뿐이었다.
> 솔라리스에 폭주 현상
> 어, 하이. 전 그냥 별 볼일 없는 MSCE입니다. 지금은 이곳에 깨어 있는 유일한 사람인데, DSLAM 넉 대가 지금 막 다운되었네요. 아무래도 법인 고객들을 상대로 얼마나 청구할지를 계산하는 고객 계정 코드가 있는 모양인데, 벌써 1만 개의 스레드를 까놓고 스왑 영역을 모조리 먹어치우고 있어요. 그냥 죽이면 되는데 그럴 수가 없네요. 이 빌어먹을 유닉스 서버가 써먹을 만한 주문이 없을까요? 그러니까, 우리 고객 중 누구도 돈을 낼 것 같지가 않거든요. 코드를 작성한 사람한테 묻고 싶지만 어차피 죽었을 겁니다.
페이지를 다시 불러내자 대답이 있었다. 짧고 권위 있고 또 유용한 답변이었다. 얼간이들이 쓰레기 질문이나 포스팅하는 요즘엔 거의 보지 못할 고품질의 대답이었다. 묵시록이 전 세계 운영자 공동체의 고객지원 정신을 일깨워준 모양이다.
반이 어깨 너머로 화면을 보았다.
“맙소사, 저 새끼한테 저런 면이 있었나?”
그가 다시 메시지를 보았다. 윌 사리오의 답변이었다.
그는 곧바로 채팅창에 들어갔다.
> 사리오, 네트워크를 죽이려고 하면서 왜 서버 수리를 도와주는 거지?
> /흐흐/ 이런 수상 각하. 그저 컴퓨터가 아마추어 손에서 고생하는 게 못마땅했던 모양입죠.
그는 그 안에서 퀸콩과의 채널로 건너갔다.
> 얼마나 됐죠?
> 내가 잠든 후? 이틀. 연료가 바닥나기 전? 사흘. 식량이 거덜난 후? 이틀.
> 맙소사. 나도 어젯밤 한잠도 못 잤어요. 여기도 손이 부족하거든요.
> asl? 이름은 모니카. 사는 곳, 파사네나. 숙제하다 물렸어요. 내 사진 다운 받으실래요???
요즘은 트로이봇이 IRC를 뒤덮고는 트래픽이 있는 창마다 치고 들어왔다. 이따금 대여섯이 서로 채팅 중인 걸 볼 수도 있었다. 악성코드가 똑같은 악성코드에 침투해 트로이목마를 다운로드하려는 걸 보면 기분이 묘했다.
그들은 동시에 봇을 채널 밖으로 차버렸다. 그래도 스크립트는 남았고 스팸도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 스팸이 줄지 않는 이유가 뭐죠? 데이터 센터 절반이 날아갔는데?
퀸콩은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타이핑을 시작했다. 그녀의 지연시간이 커질 때마다, 그는 구글 홈페이지를 새로 불러야 했다. 짐작대로 다운 상태였다.
> 사리오, 식사는 좀 했나?
> 각하께서 저보다 두 끼는 더 굶으셨을 겁니다.
반이 맥치즈 시장한테 돌아갔지만 그도 같은 채널에 들어왔다.
“개새끼, 그래 너 잘났다, 인마.”
사실 반은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까 입김만 훅 불어도 넘어갈 것처럼 보이는 데다 목소리도 힘이 없고 잔뜩 갈라졌다.
> 헤이, 콩, 괜찮아요?
> 괜찮아요. 그냥 개자식 하나를 쫓아냈죠.
“트래픽이 어떤가, 반?”
“오늘 아침보다 25퍼센트 떨어졌어요.”
그가 대답했다. 한 무리의 노드가 그들을 통해 라우팅되었다. 아직 전력이 끊이지 않고 또 전화회사의 중앙처리장치가 살아있는 지역의 가정이나 기업고객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이따금 펠릭스는 연결점을 도청해 넓은 세계의 뉴스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있는지 확인해 봤지만 거의 모든 경우가 자동 트래픽이었다. 네트워크 백업, 업데이트. 그리고 스팸. 온통 스팸이었다.
> 스팸이 아직 증가하는 이유는 스팸을 막는 서비스가 만드는 서비스보다 빨리 붕괴되기 때문입니다. 웜에 대항하는 쪽은 한두 군데 집중되어 있지만, 웜은 수백만의 좀비 컴퓨터에서 만들어지니까요. 루저들이 쓰러지거나 달아나기 전에 PC를 끄기만 했어도.
> 이런 상승비율이라면, 저녁 무렵엔 오직 스팸만 라우팅되겠어요.
반이 목청을 가다듬었다. 고통스러운 목소리.
“그 문제라면, 그보다 빠를 겁니다, 펠릭스, 우리가 여기에서 나간다 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거예요.”
펠릭스가 그를 보았다. 암갈색 피부 여기저기 시뻘건 염증이 덮여 있었다. 그의 손가락이 파르르 떨렸다.
“물은 충분히 마시고 있나?”
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 종일, 10초에 한 번씩은요. 뭐든 배때기를 채워야죠.”
그가 옆에 물로 가득 채운 펩시맥스 병을 가리켰다.
“자, 회의를 해보지.” 펠릭스가 말했다.
D-데이 때만 해도 모두 마흔셋이었으나 지금은 고작 열다섯이었다. 여섯은 회의소집 요구에 건물을 떠나는 것으로 응답했다. 회의 안건에 대해서라면 굳이 얘기할 필요도 없었다.
“결국 그런 겁니까? 이 모든 걸 포기하자는 거죠?”
화를 낼 힘이라도 남은 건 사리오뿐이었다. 어차피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화를 낼 놈이기는 했다. 목과 이마엔 핏줄이 서고 두 주먹이 크게 흔들렸다. 다른 친구들은 그를 보고는 눈을 내리깔고 일제히 대화에 집중했다. 채트 로그나 실시간서비스 로그엔 관심조차 없었다.
“사리오, 지금 나하고 장난하자는 거냐? 저 빌어먹을 플러그를 뽑자고 한 건 너였어.”
“내가 원한 건 깨끗하게 끝내는 거지. 피를 흘리다가 죽거나 영원히 토하게 하자는 건 아니었어요. 전 세계 서버 관리자 공동체 선언이 있기를 바랐단 말입니다. 인류의 손에 의한 긍정적 행위여야지, 정보량과 악성코드와 웜에게 패배하기를 원한 건 아니라고요. 망할, 저 밖에 벌어진 게 바로 그런 게 아니었던가요?”
옥상 식당은 사방이 윈도였다. 강화 굴절 윈도. 습관적으로 모두 블라인드를 쳐두었는데 갑자기 사리오가 방을 돌아다니며 블라인드를 잡아챘다. 도대체 저렇게 뛰어다닐 힘은 어디서 난 거지? 회의실까지 계단을 오르는 것조차 거의 죽을 맛이었건만.
가혹한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밖은 맑고 밝은 날이었으나 토론토의 지평선 너머로는 어디나 불길이 솟구치고 있었다. 검은색의 모더니즘 유리건물인 TD 타워도 하늘을 향해 불길을 토해냈다.
모든 게 붕괴되고 있었다. 온 세상이.
“이봐요. 우리가 네트워크를 방치해 둔다면 그중 일부는 몇 개월, 어쩌면 몇 년 동안 온라인을 유지하겠죠. 그럼, 누가 그걸 지배하죠? 악성코드. 웜. 스팸. 시스템 프로세스. 영역전송. 우리가 사용하는 도구들은 붕괴되어 지속적인 관리를 요하고, 우리가 버린 것들만 영원히 살아남는 겁니다. 네트워크를 버려 산업쓰레기로 가득한 폐기장으로 만들겠다고요? 그럼 결국 우리의 업보가 될 겁니다. 당신과 나. 그리고 이제껏 키보드를 두드렸던 모든 사람, 모든 지역의 유산 말입니다. 무신 말인지 아시겠어요? 우리는 지금 총 한 방으로 깨끗하게 처리하지 않고, 부상당한 개처럼 천천히 죽어가게 만들겠다는 겁니다.”
반이 두 뺨을 긁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눈물을 훔치는 중이었다.
“사리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온전히 옳지도 않아. 절름발이로라도 살아 있게 두는 게 옳은 일이야. 오랫동안 절룩거리면서 살아 있다 보면 언젠가 누구한테든 도움이 될 테니까. 세상 어디에서든, 사용자에게 패킷 하나라도 보낼 수 있다면 네트워크는 자기 할 일을 하는 게 아니겠나.”
반이었다.
“깨끗한 처형을 원한다면 그렇게 해도 좋다. 수상인 내가 허락할 테니까. 자네한테 루트를 주지. 당신들 모두한테.”
그는 식당종업원들의 화이트보드로 다가갔다. 그날의 특별요리를 적던 보드는, 그 날 이후 며칠 동안 관리자들을 흥분하게 했던 열띤 기술논쟁의 흔적으로 가득했다.
그는 소매로 닦아 깨끗한 공간을 만들고 알파벳과 숫자에 구두점까지 섞인 길고도 복잡한 패스워드를 적기 시작했다. 펠릭스는 그런 종류의 패스워드를 기억하는 재주가 있었다. 이제 더 이상 써먹을 일 없을 재주이겠지만……
> 우리도 떠나요, 콩. 어쨌든 연료도 거의 떨어졌네요.
> 예, 어쨌거나 잘 생각했어요. 그동안 영광이었습니다, 수상 각하.
> 괜찮겠어요?
> 지금껏 젊은 관리자들을 조련해서 내 여성적 요구를 배려하도록 해놓은 걸요. 그리고 식량원을 또 찾아냈는데 앞으로 열다섯이 두 주는 버틸 정도예요. 여긴 지상낙원이랍니다.
> 대단한 분이에요, 콩, 진심으로. 하지만 영웅이 될 생각은 말아요. 나가야 할 때가 되면 나가세요. 저곳에도 뭔가 있어야 할 테니까.
> 몸조심해요, 펠릭스. 저도 진심이에요…… 그런데, 루마니아의 트래픽이 올라갔다는 얘길 했던가요? 어쩌면 다시 일어나는 중인지도 모르겠어요.
> 그래요?
> 예, 그래요. 우린 잘 안 죽잖아요……. 끔찍한 바퀴벌레처럼.
그녀와의 연결이 끊겼다. 파이어폭스를 띄워 구글을 열어보니 다운 상태였다. 새로 고침을 누르고 누르고 또 눌렀으나 구글은 살아나지 않았다. 그가 두 눈을 감았다. 반이 다리 긁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갑자기 타이프 소리도 들려왔다.
“백업했어요.”
펠릭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뉴스그룹에 메시지를 보냈다. 권한을 넘겨주기 전 5인의 친위대를 이끌던 곳이다.
“잘 지키게. 언젠가 돌아올 테니.”
사리오를 빼고 모두 떠날 참이었다. 사리오는 남겠다고 버텼지만 그래도 배웅하러 나오기는 했다.
시스템 관리자들이 로비에 모였다. 펠릭스가 보안문을 올리라고 하자 이윽고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사리오가 손을 내밀었다.
“행운을 빌어요.”
사리오의 손 힘은 대단했다. 세상에, 이런 터무니없는 에너지라니.
“자네도. 어쩌면 자네가 옳을지도 모르겠네.”
“어쩌면이죠.” 그가 대답했다.
“플러그를 뽑을 생각인가?”
사리오는 드롭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머리 위에서 윙윙거리는 랙들의 강화바닥을 꿰뚫어보기라도 하는 표정이었다.
“그야 모르죠.” 마침내 나온 그의 대답은 그랬다.
반이 자기 몸을 긁자 흰 가루들이 햇살에 춤을 추었다.
“자, 가서 약부터 찾아보세.”
펠릭스가 말했다. 그가 문으로 향하자 나머지 관리자들도 따라왔다.
펠릭스는 내문이 닫히기를 기다렸다가 외문을 열었다. 공기에서 잘 깎은 잔디 냄새와 맛이 났다. 첫 번째 빗방울, 호수와 하늘, 세상의 바깥, 오랫동안 소식을 듣지 못한 친구 냄새도 났다.
“잘 가요, 펠릭스.”
다른 관리자들이 인사했다. 그가 짧은 콘크리트 계단 위에서 못 박혀 있는 동안 시스템 관리자들은 벌써 뿔뿔이 흩어지고 있었다. 햇볕이 너무나 따가워 다들 눈물을 흘렸다.
“킹 스트리트에 약국이 하나 있을 거야. 벽돌로 창문을 깨고 코티손 연고를 훔쳐내자고, 오케이?”
“수상 각하시잖아요. 알아서 하세요.” 반이 말했다.
15분 걷는 동안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약간의 새소리와 아련한 잡음, 그리고 전선을 훑는 바람 말고는 들리는 소리도 없었다. 흡사 달 표면이라도 걷는 기분이었다.
“마트에 초코바도 있을 겁니다.” 반이 말했다.
펠릭스의 위장이 꿈틀댔다. 음식이라.
“와우.” 그가 침이 가득 고인 입으로 탄성을 질렀다.
두 사람은 해치백을 지났다. 앞좌석에 말라버린 아기 시체를 안은 여자 시체가 말라가고 있었다. 그의 입 안에 씁쓸한 담즙이 고였다. 다행히 창문이 닫힌 터라 냄새는 심하지 않았다.
며칠 동안 켈리와 2.0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는 무릎을 꿇고 다시 구역질을 했다. 이곳 바깥세계에서 가족이 죽었다. 그가 아는 모든 이가 죽었다. 그 또한 인도에 드러누워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반이 그의 겨드랑이를 끼더니 일으켜 세우려 했다. 하지만 맥이 없기는 그가 더했다.
“나중에요. 어디든 안전한 곳으로 들어가 뭔가 먹은 다음에 하자고요. 하지만 지금은 안 돼요. 알겠습니까, 팀장님? 지금은 안 된단 말입니다!”
모욕에 가까운 언사였다. 결국 그도 일어서야 했다. 무릎이 대책 없이 흔들렸다.
“한 블록만 더 가보죠.”
반은 펠릭스에게 어깨동무를 하게 한 후 그를 이끌고 움직였다.
“고맙네, 반. 그리고 미안해.”
“뭘요. 무엇보다 샤워부터 하셔야겠어요. 창피를 주자는 건 아니지만요.”
“창피는 무슨.”
마트는 철제 보안문이지만 앞 창문부터 찢기고 무자비하게 파손된 터였다. 펠릭스와 반은 틈을 비집고 어두운 상점 안으로 들어갔다. 진열장 몇 개가 넘어져 있기는 했으나 그밖에는 괜찮아 보였다. 현금등록기 옆에서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캔디바가 담긴 진열대를 보았고 서로 달려들어 한 주먹씩을 집어 입 안에 쑤셔 넣었다.
“두 사람 모두 돼지처럼 먹는군요.”
느닷없는 여자 목소리에 둘은 화들짝 놀라 돌아보았다. 여자는 자기만큼이나 커다란 소방용 도끼를 들고 있었다. 실험실 가운에 편안해 보이는 신발.
“필요한 걸 찾았으면 어서 꺼져요. 문제를 일으켜서 좋은 건 없으니까.”
턱은 갸름하고 눈빛이 날카로운 40대의 여자. 켈리와는 전혀 닮지 않았는데, 그건 다행이었다. 그랬다면 그녀에게 달려가 있는 힘껏 끌어안으려 했을 것이다. 생존자가 또 있었다니!
“의사입니까?”
펠릭스가 물었다. 그녀는 가운 안에 청색 수술복 차림이었다.
“어서 꺼지기나 해요.”
그녀가 도끼를 휘둘렀다.
펠릭스가 두 손을 들었다.
“농담 아닙니다. 의사입니까? 아니면 약사인가요?”
“옛날엔 정식 간호원이었죠. 10년 전에. 하지만 지금은 주로 웹디자인을 해요.”
“세상에, 설마.” 펠릭스가 탄성을 질렀다.
“컴퓨터에 대해 아는 여자 처음 봐요?”
“사실, 구글 데이터 센터를 운영하는 친구가 여성이죠.”
“그럴 리가, 여자가 구글 데이터 센터를 운영했다고요?”
그녀도 놀란 표정이었다.
“운영 중이에요. 아직 온라인이니까.” 펠릭스가 말했다.
“말도 안 돼.” 그녀가 도끼를 내렸다.
“돼요. 혹시 코티손 연고 있습니까? 얘기는 해드릴 수 있어요. 내 이름은 펠릭스, 이쪽은 반. 남는 항히스타민제가 있으면 이 친구한테 적선해 주셨으면 합니다.”
“남아요? 펠릭스, 이곳엔 백 년을 쓰고도 남을 양이 있는 걸요. 그 훨씬 전에 유통기간이 지나겠지만. 그런데 네트가 아직도 살아 있다고 했나요?”
“아직 살아 있습니다. 지난 주 내내 우리가 한 일이 그거니까요. 온라인을 지키는 일. 하지만 오래 가지 못할 수도 있겠네요.”
그녀가 도끼를 내려놓았다.
“예, 그렇겠죠. 이렇게 오래 가리라는 생각도 못했으니까. 혹시, 뭐 물물교환할 건 없나요? 별로 필요한 건 없지만 이웃들과의 거래를 통해서나마 정신줄을 붙들고 싶거든요. 요컨대, 문명놀이죠.”
“이웃이 있다고요?”
“적어도 열 명은 돼요. 저기 레스토랑 사람들이 수프를 기가 막히게 만들어요. 야채 대부분이 통조림이긴 해도 그래도 날 고체 연료에서 구원해 줬답니다.”
“이웃도 있고 또 그들과 물물교환도 한다고요?”
“에, 흉내 정도죠. 그 분들 없으면 저도 무척 외로웠을 거예요. 그래서 나도 뭐든 최선을 다하고 있죠. 부러진 손목도 치료했어요. 이봐요, 원더 브레드와 땅콩버터 좀 드릴까요? 그런 건 얼마든지 있어요. 당신 친구 분도 뭐든 드셔야 할 것 같은데.”
“예, 부탁드립니다. 드릴 건 아무것도 없지만 지독한 일벌레들이니 어떻게든 물물교환 방식을 배울 거예요. 혹시 조수는 안 필요하신가요?”
반이 말했다.
“아직은요. 하지만 친구가 있으면 좋겠죠.”
그녀가 도끼날을 빙빙 돌리며 대답했다.
그들은 샌드위치와 약간의 수프를 먹었다. 레스토랑 사람들이 먹을 것을 가져와 인사도 나누었다. 펠릭스는 그들의 코에 주름이 잡힌 걸 보고 안쪽에 아직 작동하는 보일러가 있음을 알았다. 벤이 먼저 들어가 스펀지 목욕을 한 다음 그가 들어갔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도 몰라요. 우리한테는 헬리콥터, 탱크, 심지어 약탈자들까지 있지만 그냥 가만히 있기만 해요.”
그녀의 이름은 로사였다. 그녀는 와인 한 병을 내오고 식기코너에서 휴대용 플라스틱 컵도 가져왔다.
“지금껏 아주 조용히 지내온 모양이군요.”
펠릭스가 지적했다.
“쓸데없는 관심을 끌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저 밖에도 우리처럼 사는 사람들이 많을까요? 모두 모일 수 있다면 뭔가 할 일을 찾을 수도 있을 텐데.”
“아니면, 그들이 우리 목을 베거나요.” 그녀가 말했다.
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 있는 말이군요.”
펠릭스가 일어났다.
“아뇨,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봐요, 지금은 중요한 전환기예요. 무관심을 가장하며 살다가 토굴에서 쓸쓸히 죽어갈 수도 있겠지만 뭔가 더 나은 걸 이룰 수도 있다는 얘기예요.”
“더 나은 것?” 그녀가 다소 목소리를 높였다.
“아, 좋아요. 낫지 않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뭐든 시도는 가능하지 않나요? 아무래도 이대로 시들어가는 것보다 나을 겁니다. 맙소사, 이곳에 있는 잡지를 다 읽고 포테이토칩도 다 먹은 다음엔 어쩌실 겁니까?”
로사가 고개를 저었다.
“말이야 쉽죠. 도대체 뭘 할 수 있다는 거죠?”
“뭐든지. 우린 뭐든 해야 합니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이 조각난 세상을 기워 사람들이 서로 대화할 수 있게 하고, 점점 그 공간을 넓혀가는 거죠. 최선을 다해 사람들을 찾아내고 그들을 돌보는 겁니다. 그럼 그들도 우리를 돌봐줄 겁니다. 물론 망칠 수도 있겠죠. 실패할 수도 있고요. 하지만 포기하는 것보단 실패가 낫습니다.”
반이 웃었다.
“펠릭스, 그거 아세요? 팀장님이 사리오 놈보다 미쳤다는 거?”
“내일엔 제일 먼저 그놈부터 끌어낼 생각이다. 그도 이 일에 일조해야 해. 누구나 다. 종말 따위는 엿 먹으라고 하라고. 세상은 끝나지 않는다. 인류는 종말을 아는 종족이 아니란 말이야.”
로사가 고개를 저었지만 지금은 입가에 가벼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럼 당신은 뭘 할 거죠? 인류의 교황이자 황제?”
“이 분은 수상을 더 좋아해요.”
반이 무대 독백 식으로 말했다. 항히스테민이 그의 피부에 기적을 일으켜, 붉은 멍은 발그레한 핑크빛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보건복지부 장관이 되고 싶어요, 로사?” 그가 물었다.
“맙소사, 게임을 하자는 거군요. 좋아요, 열심히 돕기는 할게요. 단 절대 수상 각하라고 불러달라기 없기에요. 나를 보건복지부 장관이라고 불러도 안 되고.”
“오케이.” 그가 대답했다.
반이 잔을 모두 새로 채웠다. 그는 와인 병을 뒤집어 마지막 몇 방울까지 짜냈다. 세 사람이 잔을 들었다.
“세상을 위하여. 인류를 위하여. (잠시 생각하다가) 재건을 위하여.”
“그 모두를 위해.” 반이었다.
“그 모두를 위해. 인류를 위해.” 펠릭스.
“인류를 위하여.” 로사.
그들은 잔을 비웠다. 펠릭스도 집을 보고 싶기는 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보게 될 켈리와 2.0의 모습을 생각만 해도 뱃속이 들끓었다. 다음 날부터 그들은 재건을 시작했다.
그리고 몇 개월 후, 그들은 다시 시작했다. 간신히 끌어 모은 작은 그룹이 불화로 인해 뿔뿔이 흩어졌기 때문이다. 1년 후에도 다시 시작하고 5년이 지난 후에도 그들은 처음부터 다시 손을 댔다.
그가 집에 가기까지는 6개월쯤 걸렸다. 반은 내내 그를 도왔다. 자전거를 타고 마을을 돌아다닐 때면 뒤에서 그를 호위도 했다. 북쪽으로 가면 갈수록 불탄 나무 냄새는 더욱 강해졌다. 사방에 전소된 건물이었다. 때로는 약탈자들이 약탈한 집을 태우기도 했으나 대개는 숲이나 산에 불이 붙는 것과 같은 자연재해였다. 그들이 집에 다다르기 전에, 건물이 모두 불에 타버린 블록도 여섯 곳이나 되었다.
펠릭스의 옛 주택단지는 그대로였다. 기이할 정도로 깨끗한 건물들의 오아시스는 마치 게으른 주인들이 드디어 옛집을 원래의 산뜻하고, 잘 정돈된 모습으로 복원하기로 마음먹고 약간의 페인트와 잔디깎이 날을 사러 출타 중인 것처럼 보였다.
물론 그보다 조금 심하기는 했다. 그들은 마을 입구에 내려 아무 말 없이 자전거를 끌고 걸어갔다. 나뭇가지를 스치는 바람소리가 을씨년스러웠다. 겨울이 늦기는 해도 상당히 가까워진 터였다. 땀이 바람에 마르자 펠릭스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지금은 열쇠도 없었다. 몇 달, 몇 년 전 데이터 센터에 두고 왔기 때문이다. 문손잡이를 비틀어봤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가 어깨로 들이받자, 문은 깨지는 굉음을 토해내며 녹슨 문설주에서 뜯겨나갔다. 집은 안에서부터 썩고 있었다.
집 안은 고인 물로 가득했다. 거실에도 악취 나는 웅덩이가 10센티미터나 고여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물을 헤치고 나아갔다. 마룻바닥이 발 디딜 때마다 스펀지처럼 가라앉았다.
2층에 오르자 끔찍한 초록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래도 침실 가구는 어릴 적 친구만큼이나 친근하게 느껴졌다.
켈리는 2.0과 침대에 있었다. 누워 있는 모습으로 보아 쉬운 죽음은 아니었던 게 분명했다. 온통 비틀려 있었으니……. 켈리는 2.0을 꼭 끌어안고 있었다. 피부가 끔찍할 정도로 부풀어 올라 거의 못 알아볼 지경이었다. 그리고 냄새…… 오, 이 악취라니!
펠릭스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그는 쓰러질 것만 같아 황급히 경대를 붙잡았다.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감정에 숨을 쉬기도 어려웠다. 분노, 고통, 슬픔? 그가 익사하는 사람처럼 헐떡였다.
모두 끝이 났다. 세상이 끝나고 켈리와 2.0도…… 끝났다. 그리고 그에겐 할 일이 있었다. 그는 그들을 담요로 감쌌다. 반이 조용히 도와주었다. 두 사람은 은 앞마당으로 나가 교대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켈리가 정원을 손질할 때 쓰던 삽이 차고에 있었다. 그때쯤 이미 두 사람은 무덤 파는 전문가가 되어 있었다. 얼마나 많은 시신을 처리해야 했던가. 그들이 땅을 파고 있을 때 의심 많은 개들이 옆집의 무성한 잔디밭에서 그들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개들을 쫓아내는 데도 선수였다.
무덤을 판 후 두 사람은 펠릭스의 아내와 아들을 그 안에 뉘었다. 가족들의 주검에 명복이라도 빌고 싶었으나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지금껏 너무 많은 남자의 아내와 너무 많은 여자의 남편과 또 그만큼의 아이들 무덤을 만들어주었다……. 할 말이 남아 있을 리가 없다.
펠릭스는 도랑들을 뒤져 통조림을 얻고 죽은 자들을 묻었다. 야채를 심고 추수도 했다. 자동차도 몇 대 고쳤으며 바이오디젤 만드는 법도 익혔다. 데이터 센터에 작은 정부를 복원하기도 했다. 작은 정부는 여러 번 만들었지만 이번은 기록을 남기고 유지를 맡을 사람이 필요할 만큼 체계적이었다. 반이 그를 도왔다.
둘은 채팅방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사이버 통일 공화국을 꾸렸던 그 기이한 시절의 친구들을 만나기도 했다. 실세계에서는 아무도 그렇게 부르지 않았지만 당시의 컴퓨터광들에게 그는 여전히 수상 각하였다.
사실 좋은 삶은 아니었다. 펠릭스의 상처는 전혀 회복되지 않았지만 그건 누구나 마찬가지였다. 사방에 질병이 떠돌았다. 갑작스러운 창궐도 적지 않았다.
그래도 그의 데이터 센터는 맘에 들었다. 랙의 부드러운 소음을 들으면서, 더 나은 국가의 첫날은 못 되더라도 적어도 마지막 날은 아니라며 자부도 해보았다.
> 잘 자요, 펠릭스.
> 조금 있다가요, 콩. 백업이 거의 다 끝났어요.
> 당신은 일 중독이라고요.
> 사돈 남 말 하시네.
그는 구글 홈페이지를 ‘새로고침’ 했다. 퀸콩은 벌써 2년 동안 구글을 지켜왔다. 구글의 O는 그녀가 원할 때마다 모습을 바꾸었다. 오늘은 작은 캐릭터 지구였다. 하나는 웃고 하나는 찡그린.
그는 한참을 바라보다가 터미널로 돌아가 백업을 확인했다. 잘 돌아가고 있었다. 작은 정부의 기록은 안전했다.
> 오케이 잘 자요.
> 잘 자요.
문을 빼꼼히 열자 반이 손을 흔들어 주고는 온몸을 있는 대로 비틀며 기지개를 켰다.
“잘 자요, 대장.” 그가 말했다.
“또 밤새도록 그럴 셈이야? 자네도 자둬야지.”
펠릭스가 꾸중했다.
“그렇게 천사표이시면 불평할 재미가 하나도 없잖습니까?”
반이 투덜대고 다시 타이핑을 시작했다.
펠릭스는 어두운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등 뒤에서 바이오디젤 발전기가 윙윙거리며 시큼한 증기를 뿜어냈다. 보름달이 휘영청 떠올랐다. 그가 좋아하는 달이다. 내일은 돌아가 또 다른 컴퓨터를 고치고 다시 엔트로피와 싸울 것이다. 왜 아니겠는가?
그게 바로 그의 일이다. 그는 시스템 관리자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