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차르트의 콘서트 아리아 엑술따떼 유빌라떼는 1773년 1월 작곡돼 테아티노 수도회 미사에서 처음 연주되었으며
2개의 아리아와 그 사이의 레치타티보, 그리고 마지막의 할렐루야로 이뤄져 있다. 모짜르트는 17세 생일을 며칠 앞둔 1773년 1월17일 후세에
길이 사랑받을 걸작을 발표하였다. 밀라노의 성 안토니오 성당에서 초연된 14분 길이의 모테트 기뻐하라, 환호하라(엑술따떼, 유빌라떼)가
그것이다.
모차르트의 유명한 콘서트 아리아인 는 1773년 1월
테아티노 수도 참사회원의 미사를 위해 즉흥적으로 작곡되었다. 이 곡은 2개의 아리아와 그 사이의 레치타티보, 그리고 마지막의 화려한 알렐루야로
이루어져 있다.
작사가는 알려지지 않고 있는데, 그 가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환호하라,기뻐하라 달콤한
노래를 부르는 너의 복된 영혼이여 천지가 너희의 노래에 화답하고 또한 내 노래가 칠현금으로
반주하도다. 환호하라,기뻐하라.
온화하게 햇볓이 내리쬐는 날이 밝게 빛나고 구름과 폭풍도 사라졌으며 예상하지 못한
평안이 정의로운 자들에게 찾아 왔도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 사방을 뒤덮었지만 일찍이 무서움에 떨었던 너희 기뻐하는
자들이여 이제 일어나서 이 화려한 아침에 한 아름의 백합을 바치도록 하라.
모든 처녀들의 왕인 당신은 우리에게 평화를
주십니다. 당신은 마음의 탄식을 가져오는 고통을 경감시킵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의 네 곡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악기들과 소프라노 한 사람의 연주로 이루어지는데, 대단한 성악적 기교를
요구하는 알렐루야 가 특히 유명하다. 모짜르트는 당시 자신의 오페라에서 주인공을 맡았던 카스트라토 (여성의 목소리를 내는 거세남성
가수)라우치니를 위해 이 곡을 작곡했다.
이 <엑술따떼, 유빌라떼>는 14분이 넘는 매우 긴 곡인데, 그 때문인지는 잘모르겠지만 맨 뒷부분인
<알레루야>만 따로 불려지는 경우도 꽤 있다. <알렐루야> 부분은 채 3분이 안된다. <엑술따떼, 유빌라떼>라고
하면 생소한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되고 또 전 곡을 들어본 사람도 별로 없을지 모르지만 <알렐루야>부분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귀에
익숙할 것이다.
원래는 카스트라토인 베난지오 라우지니가 부르도록 작곡되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많은 유명한 여자 가수들에 의해
불려지고 있다.
Emma Kirkby 엠마 커크비(소프라노)
영국출신의 소프라노인 에마 커크비는 원전음악 분야에서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고 있는, 우리시대의 최고의 소프라노
가수중의 한분으로 영화 "샤인"중에 나왔던 비발디의 "세상엔 참 평화 없어라" 와 같은 노래로 우리들의 귀에도 매우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엠마 커크비의 레퍼토리는 12세기의 힐데가르트 폰 빙엔 등 중세 음악, 존 다울랜드·토머스 탈리스 등
영국 르네상스 음악, 비발디·바흐·헨델 등 바로크 칸타타와 종교 음악들, 모차르트의 아리아와 모테트·미사곡 등에 광범위하게 걸쳐있습니다. 이
분은 미성의 소유자들인 조수미나 에디뜨 마티스와 같은 소프라노들과는 또다른 의미에서 '천상의 목소리"라고 찬사를 받고 있으며 나이가 들어감에도
여전히 좋은 노래를 들려 주고 있습니다.
커크비는 잉글랜드의 서레이주 캠벌리에서 태어나 옥스퍼드에서 고전문학과 성악을 공부했다. 직업음악인이 되자마자
그녀는 이 음악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던 앤드류 패롯, 크리스토퍼 호그우드, 앤소니 룰리 같은 이들과 함께 오랫동안 문서고에서 먼지 쌓인 채
보관되어 오던 음악들을 신속하게 이 시대로 들고 나왔다. 그것도 몇몇 작곡가의 작품들을 발췌 하는 것이 아닌 전체 레퍼토리를 통째로 가져 나오는
방식으로 패롯, 호그우드, 룰리 같은 이들 은 그녀를 일러 간단명료하게도 '고음악 전문 소프라노' 라 하였다.
커크비는 그에게 쏟아지는 찬사와 대중적 관심에도 불구하고 디바가 될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오랜 세월동안
그녀가 변함없는 관심으로 주력해 온 것은 헤아릴 수 없는 마드리갈과 이와 유사한 성악 작품들을 화석이 아닌 살아있는 음악작품으로 사람들에게
선보이고 관심을 일으키는 작업이었으며 바로 이 때문 에 그녀의 경력은 앙상블 연주가, 콘서트 가수라는 타이틀로만 메워졌다. 사실 커크비는 디바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군림하지 않는 자세에 음악만을 생각하는 장인정신과 고음악 해석의 기준으로 삼을만한 음표와 가사의 표현법등이 그를 이루는
요소들이다. 그녀의 노래는 너무도 자연스러워 마치 대화를 나누듯 쉽고도 편하다.
'고음악 운동'이라는 다소 느슨한 명칭의 음악운동이 그 모습을 드러내던 4반세기쯤 전에 몇몇 평론가들은 "숲을
보지 못하고 지엽적인 표현에 매달린다."는 등의 문장들을 가지고 이 음악운 동에 참여했던 연주가들을 평가하곤 했다. 그러나 이들은 그들의 기량을
계속 향상시켜 나갔고 여타 직업 음악가들의 세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적자생존의 법칙은 여기에도 적용되어 능력이 모 자라는 이들은 자연스럽게
도태되었다.
하지만 이 시절에도 발군의 기량으로 뚜렷하게 전면에 나서는 일단의 연주인들이 있었다. 이들 중의 하나가 바로
소프라노 엠마 커크비였다. 분명한 주관과 판단으로 끊임 없는 발전과 변화를 거듭한 음악 인생을 걸어 커크비이기 때문에 그녀가 초기에 보여주었던
독특함이 어떤 것이었는지 이 시점에서 회상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자, 여기 소년 합창단 단원의 것이라 할 만한 순수한 음색을 가졌으면서도 고도의 수사법과 문 장법을 연상시키는
테크닉을 갖추었던 소프라노가 있었다. 많은 이들이 커크비에게는 매우 다행 스럽게도 자연스럽고도 오염되지 않은 음색, 풍미 가득한 해석, 아름다운
음정, 그리고 분명하 고도 정확한 가사전달을 높이 평가했고 또 좋아했다. 한 마디로 엠마 커크비는 여러가지 형식중의 하나로 머물러 있던 스타일을
찬미받을 만한 그리고 결국에는 깊은 사랑으로 애호하게 될 가창법의 한 전형으로 탈바꿈시켰던 것이다.
엘리 아멜링(Elly Ameling, 1933~)
1933년 네덜란드의 로테르담에서 시계와 보석을 취급하는 상공인의 딸로 태어난 아멜링은 본명 '엘리자베스
사라'라는 지극히 여성스럽고 평범함 이름이 붙혀 졌는데 음악 팬들에게는 '엘리'라는 애칭이 더욱 친숙하게 들린다. 1956년 네덜란드의
헤르토겐보쉬 성악 콩쿨에서 최고상을 거머쥐면서 만인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는데 사실 이것은 공식적인 주목의 시작일 뿐, 학생 시절부터 출연했던
라디오 음악 프로그램등 그녀의 이름은 이미 알려질만큼 알려져 있었다.
아멜링에게 이 콩쿨의 또 다른 의미가 있으니 1956년 이 경연 대회를 아주 특별한 것으로 만든 사건의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조 빈센트, 엘리자베스 횡겐등 쟁쟁한 성악가들이 심사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는데, 사실 이들은 심사에 그리 몰골할 필요가
없었다. 워낙 빼어나게 돋보이는 아멜링이라는 젊은 여 가수가 있었기에 1등상을 누구에게 줄것인지는 누가 보더라도 자명한 사실 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종 결과를 발표하기 위한 심사위원들의 회의는 꽤 오랜 시간을 끌었고 그 끝에 나온 발표는 1등을
'하리나 루콤스카'에게 수여 한다는 것이었다. 객석은 술렁거리기 시작했고 급기야 심사위원들을 질책하는 성난 고함소리들이 터져 나오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심사위원장의 뒤 이은 발표는 객석을 환호의 도가니로 바꾸어 놓았다.
'저를 포함한 심사위원 전원은 이 아름다운 네덜란드 소프라노에게 보통의 1등상을 수여 할수 없다고 생각 합니다.
따라서 엘리 아멜링에게는 매우 탁월한 1등상을(First with Distinction)수여하는 바입니다.'
이후 아멜링이 받았던 이 특별항 영예는 그후 이 콩쿨의 전통으로 굳혀지게 되었다. 아멜링은 1958년 스위스
제네바 국제 경연대회에서 연거푸 우승함으로써 그 기반을 더욱 공고히 하게 되었고 1961년 암스테르담에서 첫 공식 독창회를 시작으로 1995년
고별 연주회를 가질때까지 35년 동안 독일 가곡을 가장 잘 소화해내는 가수로서 인정을 받아 왔다.
마지막으로 그라모폰에 실렸던 아멜링 녹음에 대한 평을 그대로 옮겨 보겨본다. '아멜링은 자신이 어떤 작품을
노래해야 할 지에 대한 선택에서 언제나 올바르다. 이 음반에 실린 노래들고 언제나처럼 만족스럽고, 일부는 정말 행복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그녀가 노래하는 모든 작품들은 그녀와 너무나 잘 어울리는 것들이다. 그녀의 음성은 순수 그 자체이며 인토네이션 또한 너무나 사실 적이다.
멜로디속에서 드러나는 감성은 해가 갈수록 더욱 진해져 가고 있다.'
체칠리아 바르톨리 [Bartoli, Cecilia, 1966.6.4~]
이탈리아 로마에서 로마 오페라 합창단원인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10대 시절부터 노래를 하기 시작했으며 어머니가
그녀의 유일한 교사였다. 19세 되던 1985년 바리톤 레오 누치(Leo Nucci)와 함께 텔레비전 쇼에서 노래 부른 것을 계기로 활동을
개시했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이나 다니엘 바렌보임(Daniel Barenboim)과
같은 지휘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두 지휘자는 그녀가 볼프강 모차르트(Wolfgang Mozart)와 조아키노 로시니(Gioacchino
Rossini)의 까다로운 콜로라투라 레퍼토리에 완벽하게 어울리는 풍부한 재능을 지닌 가수라고 인정했다.
그녀가 맡은 역할에는 로시니가 작곡한 《세비야의 이발사 Il Barbiere di Sevigla》의 로시나,
역시 로시니의 《라 체네렌톨라 La Cenerentola》의 타이틀 롤,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 Le Nozze di Figaro》의
케루비노와 《코시 판 투테 Cos fan Tutte》 도라벨라 등이 있다.
흔히 소프라노가 맡는 역인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 Don Giovanni》의 체를리나와 《코시 판 투테》의
데스피나도 맡기 시작했다. 《나를 사랑한다면》(18세기 이탈리아의 연가집), 그리고 로시니와 모차르트의 아리아와 가곡 모음곡집을 비롯한 여러
리코딩은 크게 히트했으며 고전음악의 베스트셀러 차트를 장식했다. 그러나 준비가 갖추어져야만 새로운 역을 맡고 매 시즌마다 출연 회수를 제한하는
등 자기 관리에 신중하다.
1993년 4월 휴스턴그랜드오페라와 함께 로시나 역으로 미국에 데뷔한 이후 전세계에 걸쳐 여러 차례 매우
성공적인 공연을 가졌고 다수의 리코딩 역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1996년에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데스피나 역으로 출연했다. 20세기 말
가장 많이 인구에 회자되는 오페라계의 새로운 일원이 되었으며 음역이 넓고 고른 풍부한 음성, 희극적인 역할을 제대로 소화하는 활달한 연기자로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글출처:
웹사이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