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 살로메 Lou Andreas-Salome 1861~1937
철학자 니체와 시인 릴케라는, 시대를 대표하는 지성들과 정신분석학파의 창시자인 프로이트까지 사로잡은 여인이 있습니다. 그 이름은 루 살로메, 그녀는 당대 최고의 천재들에게 창조적 영감을 주었던 독일인 여성 작가로 남성들을 파멸로 이끈 마성의 여인이었죠. 그녀가 쓴 몇 권의 작품에서 루의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엿볼 수 있지만, 정작 그녀를 유명하게 만들었던 것은 시대를 대표하는 천재들과의 격렬하고도, 비정상적인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1861년 제정 러시아의 수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난 루의 아버지는 막강한 러시아 장군이었습니다. 당시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예술적, 문학적의 황금시대를 맞이해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등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대문호과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이 시대를 아우르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지적, 예술적 활동의 중심지에서 루는 부족함 없이 성장했습니다. 이런 그녀가 처음 청혼을 받은 것은 18세 때로 상대는 스승이었던 43살의 헨리 길로트로였습니다. 그는 루에게 형이상학, 논리학, 문학, 종교학, 예술학, 철학 등 서구 문화의 넘치는 지식을 심어준 사람이었습니다. 루는 길로트를 깊이 존경했지만, 그가 자신에게 육체적인 욕망을 느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의 절망적인 사랑
1880년 길로트와 헤어진 루는 러시아를 떠나 취리히 대학에 입학을 합니다. 그리고 휴양차 간 로마에서 철학자 파울 레(Paul Ree)를 알게 되었습니니다. 레는 루의 이지적인 용모와 학문을 향한 욕구, 정열에 빠져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지만, 이번에도 루는 자신을 향한 사랑을 거절합니다. 이때 루는 레의 프로포즈를 거절하면서 좀 독특한 제안을 했는데요, 당시 러시아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유명하던 ’가상 결혼’, 그것도 남자 한 명을 더한 세 사람의 동거를 말이지요.
고심하던 레는 자신의 스승인 니체에게 부탁을 했고, 1882년 4월, 니체가 로마에 도착합니다. 이때 니체는 서른 일곱 살, 루는 스무 한 살, 레는 서른 두 살이었습니다. 로마에 도착한 니체는 루에게 첫 눈에 빠져들었습니다. ’우리가 어느 별에서 내려와 이렇게 만나게 된 것은 운명입니다’ 그녀를 처음 본 니체가 한 말, 이렇게 한 여자를 사랑하는 두 남자의 이상한 동거가 시작되었습니다.
1882년 여름, 루는 니체의 초대로 그의 별장에서 한 달을 머물었죠. 니체는 루에게 깊은 사랑을 느꼈고 프로포즈를 합니다. 니체는 그 당시를 ’내 인생에 새로운 여명이 빛나고 있음을 느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니체는 후에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루를 ’이 지상에서의 이상’으로 칭송하기도 했습니다. 니체는 루에게 청혼했고, 루는 거절했습니다.
베를린으로 돌아온 루는 레와의 동거에 들어갑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니체는 심한 상처를 받았습니다. 질투와 배신감에 사로잡힌 니체는 루에게 수십 통의 편지를 쓰고, 그녀의 사생활을 폭로한다는 협박을 하기도 합니다. 또한 지인들에게 루를 비난하는 편지를 썼고, 레에게는 결투를 신청하기도 했습니다. 자신을 루에게 조종당했다는 말에 비유했던 니체는 루에 대한 극심한 미움에 사로잡혀 결국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며 10년이 넘는 세월을 광기 속에서 살았습니다.
근대 철학사에 실존주의 사상을 확립시킨 니체, 주체할 수 없이 격정을 터트렸던 한 여인의 대한 깊은 상처는 이 위대한 철학자에게 평생을 방랑 생활로 전전, 절대 고독 속에 스스로를 내던진 삶을 살게 했습니다.
루를 두고 니체와 사랑의 싸움을 벌여 승리했던 파울 레, 하지만 그들의 만남의 주도권은 항상 루였습니다. 그리고 동거한 지 5년만에 레는 루로부터 카를 안드레아스라는 동양언어학자와 결혼을 하겠다는 통보를 받게 됩니다. 루에게 버림받은 레는 4년 뒤, 두 사람의 추억이 깃든 바닷가 절벽에서 투신 자살합니다.
레를 버리고 선택한 남자 안드레아스, 하지만 그와의 결혼도 정상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26세의 루에게 반해있던 41세의 안드레아스가 자신과 결혼해 주지 않으면 자살하겠다며 가슴에 칼을 찌르는 소동을 벌인 끝에 이루어진 결혼이었습니다. 하지만 루는 ’섹스는 하지 않고, 다른 남자와의 자유로운 교제는 허락한다’는 조건을 내세웠고, 그녀를 손에 넣기 위해 안드레아스는 이런 결혼 조건에 동의합니다. 루는 후에 결혼 생활을 ’서로에게 맞추는 것이 아니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살고 있다’라고 회고하면서 남녀가 완전히 평등하게 서로의 재능을 존중하고 협력하는 공동생활로 표현합니다.
어쨌든 결혼은 했으나 그녀의 남성편력은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사실 루는 정신적으로 끌리는 남자와 육체적으로 끌리는 남자를 확실히 구분하고 있었고, 정신적 교류를 한 남자와의 육체적 관계는 철저하게 거부했습니다.
후에 독일 사회민주당 창시자인 에고르크 레데부르크가 그녀의 첫 애인이 되었고, 얼마 후 빈의 의사 프리드리히 피넬레스가 뒤를 이었죠. 후에 루는 피넬레스의 아이를 임신했지만, 유산을 합니다. 루는 피넬레스의 청혼을 거절하고 남편에게 돌아갔고, 피넬레스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습니다.
젊은 시인과의 교제
1897년 5월, 루는 뮌헨대학을 다니며 시를 발표하던 한 젊은 시인을 만납니다. 그의 이름은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때 릴케의 나이 21살, 루는 36살이었습니다. 릴케를 처음부터 루에게 애정을 느꼈고, 루 역시 젊은 릴케의 정열에 매료되었습니다. 세계문학사상 가장 고매한 정신의 소유자로 일컬어지는 릴케는 그녀를 평생토록 존경하고 흠모했습니다. 릴케에게 루는 처음으로 자신의 본질을 이해해주는 여성이었죠. 두 사람은 만난 지 한 달만에 3개월 동안 동거를 했고, 루의 남편 안드레아스와 함께 셋이서 러시아 여행을 가기도 합니다.
결별 후에도 릴케와 루는 수시로 만났으며, 4백여통의 편지를 교환했죠. 언제나 릴케의 작품을 가장 처음 읽는 사람은 루였고, 그녀는 릴케의 훌륭한 조언자였습니다. 1926년 릴케는 죽음의 순간에도 루를 잊지 못했음을 고백, 그녀를 찾았다고 합니다.
릴케와의 결별, 레의 자살 소식으로 힘들어하던 루는 옛 애인인 피넬레스에게서 마음의 안식처를 발견합니다. 두 사람은 동거에 들어갔고 41살의 루는 그의 아이를 임신했죠. 피넬레스는 루의 남편 안드레아스에게 사실을 알리자고 루를 설득합니다. 하지만 이혼할 뜻이 없음을 밝히고 아기를 낙태시킵니다. 피넬레스는 그녀를 떠났고, 평생 독신으로 살았죠.
지그문드 프로이트 Sigmund Freud
점차 정신이 이상해지는 릴케를 지켜보면서 루는 정신분석학에 관심을 가집니다. 그녀가 파울 브예레의 소개로 프로이트를 만난 것은 1911년, 바이마르에서 열린 국제 정신분석 학회에서였습니다. 당시 정신과의사 파울 브예레는 루의 연인이었죠. 루는 프로이트의 연구에 깊은 감동과 존경을 표현했고, 프로이트는 루를 빈의 정신분석 학회 회원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녀의 출현은 니체와 프로이트, 빈과 독일 문학과 정신 분석 사이의 연관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었죠.
이때도 루의 마력은 또 한 번 힘을 발휘합니다. 상대는 프로이트의 유능한 제자인 젊은 타우스크 박사였습니다. 하지만 한 때의 열정이 지나고 루가 남편에게 돌아가버리자 자살을 선택해버리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이트와의 교류는 계속되었습니다. 프로이트는 정신적 연인이자, 후원자로서 루와의 관계를 평생토록 지속했습니다. 그녀는 1930년 남편 안드레아스가 죽고 7년 뒤,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평생을 수많은 사람들의 연인으로 남성들을 파멸의 길에 이르게 했던 루 살로메, 철학자 니체와 시인 릴케라는, 시대를 대표하는 지성들과 정신분석학파의 창시자인 프로이트... 그 외에도 그녀의 연인이었던 많은 사람들은 파멸하거나, 자살, 또는 평생을 그녀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한 삶을 살았습니다. 도대체 그녀에게는 어떠한 마력이 있었던 걸까요?
모든 사랑은 영원을 갈망합니다. 그러나 루 살로메의 삶은 유동적인 사랑의 향연이었습니다. 그녀의 사랑은 상대의 내면 깊은 곳에 파고 들어가 그들을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루 살로메, 그녀는 남성을 파멸로 이끈 마력을 지닌 여인이었지만, 지적, 예술적, 창조적 영감의 원천으로 위대한 지성인들의 작품과 함께 역사의 한 페이지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