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서점의날 학술대회 기조연설
"작은책방
열풍에 이어 지역 중형서점에 기대한다"
김병록 / 백창화 (숲속작은책방 대표)
2014년, 충북 괴산 시골마을에 작은 서점 문을 열었습니다. 서점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던 초보자가 시골에서 책을
팔아 먹고 살겠다고 덤볐더니 많은 분들이 위로 섞인 격려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러나 격려의 한 편에서 또 많은 분들은 이렇게 생각하셨을 것
같습니다.
“얼마나 가겠어, 저러다 곧 말겠지, 아직 젊은데 벌써 시골로 가서 저 부부 괜찮을까?”
그리고 일 년, 저희조차 신기했던 시골마을 서점 창업의 경험을 책으로 담아냈더니 전국이 뜨거웠습니다. 이때를 즈음해
저희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전국에 작은 책방들의 창업 열풍이 불었습니다. 가히 열풍이라고 표현하는 게 어색하지 않은 것은 2015년 당시 저희
부부가 출간한 책 “작은책방, 우리 책 쫌 팝니다”(남해의봄날) 본문 뒤에 부록으로 수록한 작은책방의 수가 약 70 여 곳이었는데요. 2년이
지난 올해 6월, 같은 책 개정판 뒤에는 무려 180 여 곳의 책방 주소가 실렸습니다. 역시 같은 기간 ‘퍼니플랜’에서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전국에 작은 서점이 220 여 곳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2년 사이에 150곳 이상의 새로운 책방이 문을 연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SNS
등에는 매일 새로운 책방 창업 소식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흡사 가을 바닷가에 전어떼 밀려오듯 출판동네에 작은책방이라는 유령들이 출몰하고 있는
것입니다.
책방을 열고 일 년이 지났을 때 오랜 관록을 지닌 서울의 한 중형서점 대표님께서 책방을 방문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무엇이든 3년을 지나지 않은 건 믿지 않아요.”
적어도 3년은 버텨내야 서점인으로서 나와 말을 섞을 자격이 된다 라는 뜻이었지요. 이제 갓 시작한 겁 없는 처지에 무슨
말을 못하겠는가, 3년을 버티면서 우리 서점계의 엄혹한 현실에 눈을 뜨고, 그러고도 살아남는다면 그때 서점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숲속작은책방은 올 봄에 만 3년을 지나고, 이제 4년차 서점으로 진입합니다. 우연하게도 이 시점에 서점인 선배님들과
전문가들을 모신 자리에서 모두발언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전히 부족하고, 아직도 출판 생태계와 복잡하게 얽혀있는 유통 현실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살아남은 자의 자격으로 조금은 서점에 대해, 서점인에 대해, 서점문화에 대해 이야기할 최소한의 근거는 갖추었을까 자문하며 이
자리에 섭니다.
새로운 서점문화의 싹이 트고
있다
길게는 약 5년 전 무렵부터 짧게는 도서정가제가 실시된 최근 2-3년 내, 우리 나라 서점계에 작은 싹이 움트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과거에 없었던 새로운 서점 문화를 만들어가려는 노력들이 곳곳에서 엿보입니다. 인쇄문화의 쇠락, 독서인구의 감소, 출판계
매출부진 같은 어두운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 요란합니다.
그 몸부림 가운데 최근 특이할만한 것으로 작은 서점 열풍에 이은, 대기업의 ‘리딩(reading) 마케팅’이 있습니다.
단순히 책이나 독서를 끌어온 것이 아니라 책이라는 상품에 공간을 덧씌운 ‘리딩 스페이스(reading space) 마케팅’입니다.
이미 현대카드에서 디자인 라이브러리를 시작으로, 뮤직 라이브러리, 트래블 라이브러리, 쿠킹 라이브러리 등 책으로
일상문화를 디자인하는 새로운 개념의 공간을 만들었는데요. 최근 작은서점 열풍을 바탕으로 대형 쇼핑몰과 유명 호텔에서도 책공간을 만들고 있습니다.
코엑스 전시장에 등장한 ‘별마당 도서관’ 부산 힐튼호텔에 등장한 ‘아난티 코브’가 화제를 불러 일으키며 주변 상권을 활성화하는 핵심 동력으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기존 대형 서점의 공격적인 공간 확장도 주목할만합니다. 교보, 영풍, 서울문고 등 오프라인 빅3 서점이 작년과 올해에
걸쳐 신규 매장을 30곳이나 오픈했습니다. 알라딘은 중고서점을 지난해만 17개 늘려 총 37개 매장을 운영 중이고, 예스24도 2년 새 5개의
오프라인 중고매장을 열었습니다. 이들 대형서점은 매장 숫자만 확대한 게 아닙니다. 교보문고는 오고 싶고 머물고 싶은 공간을 만드는 걸 최우선
목표로 내걸고 심지어 ‘도서관형 서점’을 표방하기도 합니다. 새로운 서점문화의 트렌드를 주도했다고 평가받는 일본의 츠타야서점과 대만의 청핀서점을
벤치마킹한 이 새로운 공간들은 장단점이 뚜렷하지만 어쨌든 독자들의 마음을 얻는데는 성공했습니다. 알라딘 중고서점은 어떤 신간서점보다도 분위기가
쾌적하고 부산에 새로 문을 연 예스24 매장과, 인터파크가 주도하는 한남동 블루스퀘어 안에 있는 북파크 서점의 공간 혁신은 화려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이 자리에서 제가 이들 공간의 기업적 과제와 목표, 마케팅에 대해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기업의 어떤
숨은 의도가 있는지에 상관없이 이제 도서관이라는 이름을 달았든, 서점이라는 이름을 달았든 ‘책이 있는 공간’에 대한 기업의 지향점과 소비자
욕구의 접점은 뚜렷하게 입증된 것 같습니다.
한 편에서는 출판의 위기를 이야기하고, 독서인구는 줄어들고 있으며, 책은 팔리지 않는 시대에 웬 서점인가 반문합니다.
그러나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서점’은 우리가 알고 있는 전통적 의미의 책을 판매하는 공간으로서 오프라인 서점이 아닙니다. 그 서점은 출판의
위기, 그리고 인터넷 서점의 등장과 함께 이미 몰락했습니다. 지금 새로 만들어지고 있는 서점은 전혀 다른 의미를 품고 있는 새로운 공간의
개념으로서 서점입니다.
2018년 1인당 국민소득 3만불에 도달할 대한민국에, 새로운 시민들의 필요와 욕구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는 서점 혹은
도서관이라는 공간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첫째, 개인의 삶과 문화욕구를 디자인하고 라이프 스타일을
제안하는 복합문화공간입니다. 이미 일본의 츠타야 서점, 다케오시 도서관의 사례로 널리 알려진 바와 같습니다.
둘째, 모든 것이 개별화된 개인주의 사회에서 소통과 접촉을
원하는 취향의 공동체로서 책을 기반으로 한 공간입니다.
셋째, 죽을 때까지 평생교육과 자기계발이 필수화된 고학력 노령화
사회에서 책을 통한 배움과 학습의 교양 공간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공간의 욕구는 바로 ‘리딩 스페이스’ 즉 책을 기반으로 하는 교양과 인문성을 전제하고 ‘시민’으로서의
자기 정체성과 필요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국민소득 3만불 시대, 문맹이 거의 없고 전 국민이 고등교육을 받은 사회에서 우리는 더 이상
수동적인 소비자가 아니라 사회의 주체라는 시민성을 부여받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출판이 위기이며, 독서 인구는 줄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서점과
도서관이라는 공간이 계속 진화 발전된 형태로 이어지고 있는 바탕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시민을 교양하고 함께 성장하는
중형 서점들이 되어주길 기대한다
위에 언급된 공간들에서 빠져있는 곳이 하나 있습니다. 그곳이 바로 지역에 오래 뿌리를 내리고 아직까지 살아남아있는 중형
서점들입니다. 물론 그동안 바닥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버린 곳이 많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숨만 쉬면서 살아있는 곳들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안타깝게도 그 중형 서점들이 살아있다는 증거를 많이 만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작은 서점들은 그 가치와 지향이 뚜렷해서 존재감이 확실합니다. 지역의 풀뿌리로서 이들 공간이 실핏줄처럼
뻗쳐있을 때 민주주의의 기본인 다양성이 살아나고 소수자의 목소리가 존중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한계도 명확합니다. 너무 작은 공간,
그리고 주인장의 취향과 가치에 기댄 소규모 커뮤니티라는 한계입니다.
대기업이 투자한 대형 서점과 기업형 도서관은 대중적 욕구를 만족시키고 공간들의 질적인 수준을 향상하는 긍정적인 효과가
있습니다. 그러나 자본의 논리는 명확하고도 냉정해서 사람들을 의식있는 시민으로 바라보는 게 아니라 기업에 이윤을 가져다줄 소비자로만 인식하고
그에 맞춘 마케팅을 강화할 것입니다. 기업의 이익에 반한다는 판단이 들면 언제라도 공간을 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 사이에서 자본의 논리를 앞세우기보다 시민정신을 고양하고, 소규모 취향 공동체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적정 규모의
공간을 활용한 다양한 형태의 소모임과 문화행사, 교양 강연 등으로 시민과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지역에 뿌리를 내린 중형 서점들일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들 중형 서점이 자기만의 색깔을 갖고 지역 복합문화공간으로서 시민들의 요구에 부응하는 책문화활동들을 펼쳐갈 때 그
지역에 문화가 살아나고 출판의 위기가 극복될 수 있을 것이라 저는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거시적 목표를 갖고 다시 시작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적 분위기가 무르익고, 위로는
대기업이, 아래로는 풀뿌리같은 작은 서점들이 자기 영역을 구축해가고 있는 바로 지금, 중형 서점이 지역에서 자기 자리를 찾아야 합니다. 자기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집 나간 자식을 찾아오듯, 잃었던 독자들을 되찾아오고 책과 문화에서 멀어졌던 지역 주민들의 관심을 환기시켜야 합니다.
불은 붙여졌다, 도화선은 타고 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 불이 일지 못하고 힘없이 사그러질지, 맹렬하게 타오를 수 있을지 결정권을 쥔
곳이 바로 지역 중형 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몇 몇 서점들이 바로 이런 점에 동의해 앞장서서 공간을 리뉴얼하고, 책을 큐레이션하고, 서점 직원을 재교육하며
발빠르게 대응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어쩌다 서점인이 된 후배로서 선배님들의 이런 수고에 크게 박수쳐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시대를 읽지
못하고 자리보전하고 있는 선배님들이 계시다면 어서 빨리 자리를 털고 일어나시라 강권하고 싶습니다.
외환위기가 불어닥쳤던 1998년 이후, 그리고 인터넷 서점이 크게 발전한 2000년대 이후, 끝간데 없이 쇠락해갔던 중형
서점들의 과거를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개인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었던 사회경제적 한계가 뚜렷했었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서점인 여러분께는 존경을 보냅니다.
그러나 지금 과거를 묻지 않고, 다만 현재를 묻겠습니다.
여기 모이신 서점인 여러분,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어떤 일들을 하고 계십니까? 여전히 시대만 한탄하고 정부의
지원정책만 기다리고 계십니까? 책을 읽지 않고 책을 사지 않는 시민들을 한탄만 하고 계십니까? 당장의 생존을 위해 서점 가득 좋은 책은 빼버리고
참고서와 교재만 늘어놓고 계시진 않으십니까? 전국에 공공도서관이 늘어나고 도서정가제가 실시된 이후 나아진 납품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계산기만
두드리고 계시진 않으신가요? 날로 진화하는 책공간들의 모습을 보도를 통해 접하면서도 우리 서점의 매대와 서가는 한 번도 바꾸지 않은 채 그저
바라만 보고 계시는 건 아닌지요?
공간을 혁신하고 스스로의 독서력을
강화하여 건강한 출판 생태계를 복원하길
이제 지역에 제대로 된 동네서점, 지역에 뿌리를 두고 삶의 기반을 둔 중형 서점이 살아나야 합니다. 다행스럽게도 아직
우리 사회는 책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유치원부터 대학교, 그리고 사회에 나와서도 책을 읽어야 한다고 누구나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전제 위에서 우리는 새롭게 책을 보고, 단순히 혼자만 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읽고, 독서동아리를 통해 토론하고, 각계 전문가들과 함께 미래를
이야기할 수 있는 새로운 서점 문화를 만드는데 앞장서면 좋겠습니다.
공간을 혁신하고, 독자들의 요구에 맞춰 책을 선별하고, 서점 직원들이 재교육과 자기계발을 통해 독자들에게 책을 추천할 수
있을 만큼의 독서력을 갖추기를 바랍니다. 외국의 주요 서점을 다녀보면 어느 서점이든 한결같이 ‘서점 직원이 추천하는 책’ 코너가 있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반스앤노블 같은 대형서점은 물론이고, 지역에서 대표적인 중형 서점은 직원들이 직접 손글씨로 자신들의 추천도서에 추천의 글을
써놓았습니다. 독자는 서점원을 신뢰하고, 서점원은 방문객들과 일상의 안부에서부터 독서 상담까지 나누고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온라인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지역 주민들이 동네 서점을 찾는 주요 이유입니다. 서점의 매출이 줄어들면 안타까워하며 주변에 책 구매를 권하는 단골 손님들의 리스트가
이들 동네 서점의 존재 이유입니다.
북클럽, 독서동아리 운영은 빼놓을 수 없는 필수입니다. 연령별로, 세대별로, 관심사별로, 동네 주민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모여 책을 함께 읽고 이야기하는 북클럽의 활성화가 곧 서점 활성화로 이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출판사는 다양한 관점의 책을 출판하고, 독자들은
서점과 북클럽을 통해 의미있는 책을 지지하고, 그렇게 해서 좋은 책이 묻히지 않고 적어도 초판은 소진되어 출판사와 저자가 업을 이어갈 수 있게
되고, 정부는 이렇게 건강한 시민 소모임에 도서구매비용을 지원함으로써 출판 생태계가 의미있는 선순환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불고 있는 서점계의 이 뜨거운 바람이 한때의 모래바람이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를 이
기회에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신발끈을 동여매고 새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내가 먼저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선배님들께서 직접 현장에
나서는 게 두렵다면, 젊은 세대에게 기회를 주면 좋겠습니다. 파격적인 인재 선발과 지원, 직원 재교육으로 사람에게 투자한 결과를 겸허히 기다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나”
한때 유행했던 이 말처럼 그래도 다른 업종 아닌 책이라는 지식상품을 다루는
서점이라는 업종에 뛰어들었던 청춘의 결기를 되살려 ‘명분있는 삶’에 미래를 걸어보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전국 2백 여 곳 작은 책방과
2016년도 서점 통계에 올라있는 전국 2천 여 서점들이 우리 사회의 빛과 등대가 되는 그런 꿈꾸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