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 관한 시모음 62)
겨울 미나리 /정군수
얼음장을 들치고
얼음장 밑에서 자란 미나리를
캐 올린다
동상 걸린 손끝에서
시퍼렇게 살아서 푸들푸들 떠는 미나리가
겨울 바람을 멈춘다
허리까지 올라온 장화를 신고
미나리를 캐는 사람들
그들은 인간이 아니다
얼음장 밑에서 자란 미나리다
몸이 추어야 잠을 자고
얼음이 얼어야 키가 크는
조선 토종 미나리다
사람이 미나리를 캐는 것이 아니라
미나리가 사람을 캐고 있다
트럭에 실려가
뉘 집 따뜻한 식탁에 올려질
시리디시린
삶의 뿌리를 캐내고 있다
하얀 계절의 일기 /오광수
어제 이 강가에서 만났던 노래는
반짝이는 옷으로 갈아입고
돌틈속에 숨었답니다.
모질게 구는 바람이
무서워
조롱 조롱 그렇게 숨었답니다.
하얗게 하얗게 쌓인 눈밭엔
아이들의 발걸음 소리도
남은 낱알 찾던 철새의
소리도
숨구멍만 조금씩 내놓은 채
빠끔이 숨어 있습니다.
하늘에서 한 움큼씩 고운 햇살을 주면
천사들의 따스한 손길
따라
뾰족 뾰족 생명들이 고개를 들고
숨었던 소리가 날아다니고
초롱 초롱 보고픔이 꽃이 필 테지요.
앙상한 나무를
마구 때리는 바람도
이젠 지쳐 힘이 없나 봅니다.
숨바꼭질했던 나무의 새 순들이
바람소리보다 더 크게
껍질을 벗는 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겨울에서 여름으로 /최연
수북한 햇살의 전사들을 모두 떨구면서
한 오라기 남은 그늘의 방패마저 훨훨 불사르면서
파란하늘 들여놓은 나무 한 그루
화살촉 같은 바람을 나뭇가지 사이로 숭숭 보내버린다
서슬퍼런 차가움에도 얼어붙지 않는다
툭툭 살을 뚫고 나온 불씨로
꽃잎들 사방에 흩뿌리던 시절 저장해 두고
찬바람에 훌러덩이다
평생토록 불을 다스려 만들어진
울퉁불퉁한 겉면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 보는 것인지,
여러 겹의 옷을 입고 있는 내가
나무의 전략을 들으려고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간 순간
꽁꽁 싸맨 어둔 방에서
겨울눈을 보았다
저 땅 속 아래서부터
아스라하게 흙먼지를 일으키며 진군하는
병사들의 발자국 소리가
내 귓속의 이명처럼 들려왔다
이제 방금, 초록 우거진 숲에 들었다
겨울 초입 /나태주
겨울 초입에 마늘촉을 텃밭에 심듯
내 가슴 흙을 후비고 너의 생각을 깊이 묻었따.
봄 되면 마늘촉 트듯 너의 생각에 새싹이 틀까?
추운 겨울을 그것만으로도 춥지 않게 살았다.
겨울의 길목에서 / 박미리
따스함이
그리운 계절이면
화안한 그 미소가
더욱 그리워져요
사랑하고
또 사랑한다며
꽃처럼 웃던 그 모습
저 바람도 기억하는지
따스했던 우리
그 겨울 속을 데려가네요
기어이
떠나야만 했던 까닭은
지금도 알 수 없지만
보고픔이 더해지는
찬바람의 계절이면
목메인 추억 하나 울고 갑니다
이 겨울을 또 어이할까요?
이 겨울에도 /김정래
이 겨울에도
새벽 찬공기 마시며
변함없이 당신을 그리워 하겠지요
바스락 거리며 구르는
마른 나뭇잎 소리에도 귀 쫑긋이며
당신의 소리인양 생각하겠지요
이파리 떨어져버린
앙상한 가지에
소리없이 내려 앉은 그리움도
이 겨울에도 그렇게
차가운 가슴으로 꼭 안고
당신 생각하며 살겠지요
얼어붙은 거리에
쌩쌩이며 지나가는 바람에
마른 입술 떨면서
이 겨울에도
당신의 포근한 가슴에
아픈 내몸 기대어 그렇게 살고 싶어 하겠지요
겨울 새 /안경애
해가 뜨고, 지는 넓은 하늘 아래서
때론 약하게 강하게
찬바람 헤치며 날아와
나뭇가지 오르내리며
저 새는 무엇을 찾고 있을까
하늘 빛살아 있는 날
깃털 하나 아니 떨구고
엄동설한 아득한 하늘로
외롭게 사라져 가는 너
무성했던 잎사귀와
이별이 아파서일까
벌판 가득
너의 노래가 참 쓸쓸하다.
겨울 하늘 2 /민경대
밝은 빛의 중심은 빛을 발하면서
광원의 크기를 넓히면서
무한 낙하의 법칙으로
내게 떨어지면서
1/2gh2의 기류들이 겨울 팽이처럼
돌면서 지구를 돌리는데
가장 깊은 겨울 하늘아래에서
봄을 품어 올라면서
도르레 연결의 법칙이 적용되면서
가볍게 타르박으로 물을 길러 오은 시간의 잣대에
겨울 성애에 임김으로 호호불더니 겨울 하늘을 본다
겨울은 그리움의 혼불입니다 /(宵火)고은영
잠 못 드는 긴긴 겨울 밤
우리 들은 추억 여행을 위해 길을 나섭니다
하얗게 쏟아지는 눈길을 더듬는 회상은
자리에 누워 시간을 거슬러 올라도
과거의 멋 곳에 닿아도 피곤하지 않습니다
바람의 나락에서 우리는 비로소
삶의 아픈 조각들을 들춰내고
욕되지 않는 숭고한 고해처럼
한 해의 마지막 달에 와서
비로소 용서라는 단어를 나열합니다
삶의 모양이 서러울수록 왜소해지는 강기슭에
외로움을 지피며 밤새 우는 바람소리
어느 신작로 가난하고 초라한 귀퉁이에서 우리는
보고픈 사람들과 애잔한 눈길을 보듬고
깊은 포옹과 행복한 미소로 조우를 하고
감격의 눈물로 시리고 추운 가슴을 뎁혀줍니다
행복과 슬픔의 동시성 속에 아픔으로 굽이치던
단애의 나날들을 위로하고 위로받습니다
고문 같은 삶이어도 우리는 살아야 합니다
슬퍼도 살아야 하고 찰나적 기쁨과
짧은 행복을 위하여도 우리는
살아야 할 가치가 충분합니다
흑백 필름같이 퇴색한 지난날은 고난이어도
웅크린 가슴에 밤이 깊도록 신열 같은 그리움은
겨울로 육화돼는 하얀 눈처럼 곱고 향기로운 전설이 되어
깃털처럼 영혼의 댓돌 위를 밤새 물들입니다
머나먼 여행의 눈길을 걷는 우리는 애달픈 보헤미안
천지에 고독이 우리를 마중하고 징그럽게 외로움을 타는
겨울의 애틋한 샛길에 오늘의 초라한 가슴을 내려놓고
회상의 종착역에서 우리는 밤이 새도록 떠나간 날들과
보고픈 이들을 만나는 아름다운 해후를 합니다
겨울이 오는 소리 /박경석
활짝 불타오르던
풍성한 가을이
찬바람과 함께 떠난다.
나목에 매달린
마지막 잎새 끝
맺혔던 이슬 자욱까지도
까마득 먼데로
사라지는
삭막한 들판은 슬프다.
휘몰아치는
북풍에
하얀 손짓으로
치마자락 잡아보지만
떠나는 아쉬움
한 모서리에
못다한 사연 있으메
오늘도
기다리는 마음
한겨울 추억 /박희홍
얼음처럼 차가운
달 안개 핀 이슥한 겨울밤
누이가 시린 손 호호 불며
달큼 매콤한 배추 꼬랭이를
정갈하게 씻어 오면
아랫목에
옹기종기 둘러앉아
출출한 허기를 달래려
아삭아삭 씹어 먹던
배고픈 설움 생각 나는 추억들
먹을거리 부족해도
오순도순 살갑고 정겹던
그 시절의 동기간同氣間이
가슴 아리게
퍽이나 그립고 그리워라
겨울 서정 /민경대
바람은 간다
너도 간다 이제는 어디에도 없는 시간
밤은 밤의 시간을 알고
거기 산은 없다
산사람은 그리운 시절
거기서 너는 무엇을 아로 있느냐
검은 안경 쓴 사람이 지나간다
강을 건너가자
너울 거리는 시간 오늘은 어제의 연속이다
그라운 사람아 거기서 보느냐
바람이 몹시 가고 마은 시간은
거기서는 밝은 시간이 된다
겨울 우화 /황인숙
네가 나를 경멸한다면
너와 나
우리 둘 중의 하나는
경멸받아 마땅한 인간이야.
그러니,
관두자.
관두자,관둬.
관둬!
설원을 헤매며 큰소리를 치다가
덜덜 떨며 깨어난다.
겨우내내
연탄보다 번개탄을
더 많이 때야 하는 나여.
겨울 손님 /김인숙
유리 창문으로
찬바람이 파고들고
뼛속으로도
허락 없이 치밀하게
불어온다
단단한 뼈의 조직들이
그리움에 숭숭 뚫린
유리창으로 바뀌었는가
바람 소리 휭 덜컹거린다
어두운 꿈길에서
맥없이 깨어나니
곁에 꼭 있을 것만 같은
그대가 보이지 않는다
뼛속 깊이 파고든
바람 소리만 울고 있는데
그대도 오시면 좋겠습니다
겨울 공원 /최진연
여름의 그 짙은
푸르름이 다 날아가
하늘을 새파랗게 물들여 놓았다.
지천으로 떨어져 뒹굴던
생명의 마른 껍데기들도
다 사라졌다.
적막한 죽음이 나라엔
귀신의 휘파람 같은 바람 소리 뿐
비둘기 한 마리 날지 않는다.
방금 유령이 앉았다 간 듯
화선지보다 창백한 햇빛 한 장이
내가 앉으려는 벤치에 깔려 있었다.
어린 바람 한 떼는
새파란 살얼음판 위에서도
스케이트를 잘도 지치고 있었다.
생각해보라 저 껍데기들의 행방과
우리들의 여름 그 짙은 푸르름은
어디로 가서 무엇으로 물들었을까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