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독서감상문 9권
1. 책명 : 직지 대모
2. 지은이 : 송주성
3. 출판사 : 한국소설가협회(초판발행일 2018년 11월 23일)
4. 쪽수 : 276쪽
5. 읽는 기간 : (2023.1.27.~1.29.)
6. 독서 감상
제목 : 한 사람의 집념이 결국 직지가 세계 최고의 금속 활자임을 인증받은 것인가?
0. 직지에 관련된 소설을 여러 권 읽었다. 2013년에 읽은 책으로 오세영 작가의 구텐베르크의 조선이라는 책에서는 조선시대 장영실의 제자가 유럽으로 건너가 금속 활자 만드는 방법을 전수했다는 내용이며 2019년도에 읽었던 김진명 작가의 직지 아모르네트라는 책이다. 물론 오세영작가의 글은 직지와 직접 관련은 없으나 김진명 작가의 글은 직지와 직접 관련이 있는 글이다. 직지는 상권과 하권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직지 아모르네트는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있는 직지 하권이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금속 활자에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을 김기연 기자의 사건의 파헤침을 통해 증명한 것이라면 김미수 작가의 소설 직지는 직지 상권을 발견되었다는 내용이 방송국에 방영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며 그 사실을 제공한 문화재 전문가 정진무라는 이를 통해 다시 한 번 직지의 출처 사실이 궁금하게 느끼게 만들었으나 이 글은 그게 주된 내용이 아니라 직지를 발간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글이었다. 그런데 이번 글은 프랑스로 유학 가서 결국 프랑스로 귀화한 박병선 박사의 끈질긴 집념으로 직지 하권을 프랑스 국립도서관 지하 서고에서 발견하였으며 그 직지가 독일의 쿠텐베르크가 발명한 금속 활자보다 무려 78년 앞선 1377년에 고려에서 발명한 금속 활자임을 증명하여 유네스코 세계 기록유산에 등록하게 한 자랑스러운 한국인 박병선 박사의 행적을 그린 글이다. 그녀는 오로지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는 자신에게 이병도 교수가 “프랑스에 가면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함락하고 약탈해 간 외규장각의 도서를 찾아 보라.”는 부탁을 실천하기 위하여 처음에는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거의 하루를 보내다시피 지냈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병인양요는 1866년 프랑스 군대가 리델 신부의 안내를 받아 강화도를 점령한 후 11월 22일 철군할 당시에 외규장각에 보관 되어 있던 책 6,000여 권을 불태우고 그중 342권을 가져갔는데 그것을 찾아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외규장각 도서를 찾기 위해 국립프랑스 도서관을 찾다가 대학 동기인 쟌느와 앙드레의 도움으로 프랑스국립박물관에 특별사서로 근무하게 된다. 물론 그 당시 이미 프랑스로 귀화한 상태이다. 그러니까 박병선 박사는 조국은 한국이지만 국적은 프랑스인셈이다. 더구나 한자 해독을 할 수 있기에 동양 고서적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거기에서 그녀는 국립박물관 지하 서고에서 동양 서적을 정리하는 일을 했는데 그들은 점령한 국가에서 약탈해 온 서적들을 쓰레기처럼 취급했다. 한자를 해석하는 사람들이 극소수에 불과해 내용을 파악하지 못하기에 귀중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다가 오래되어 폐처분한 것 아닐 것인가? 그 나라에서는 아주 귀중한 문화재일 텐데 말이다. 아무튼 박병선은 그곳에서 직지를 발견한 것이다. 어두운 방에서 70년 이상을 살았던 직지가 햇빛을 보는 순간이다. 직지는 직지심체요절로 금속 활자본이다. 1377년 고려 우왕 때 충주 외곽의 흥덕사에서 금속 활자로 발간된 유일한 책이다. 그전까지는 1455년 독일의 마인츠에서 쿠텐베르크가 발간했다고 한 42줄 성경이 전부였다. 그런 역사적 사건을 뒤집으려면 명확한 증거가 필요하다. 이때부터 박병선 박사는 그 일에만 매진한 것이다. 더구나 1972년 ‘세계 도서의 해’ BOOKS 전시회에 출품할 작품을 찾던 중 직지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직지가 미지의 나라 고려에서 금속 활자로 인쇄되었다는 사실을 이미 1900년 파리만국박람회 대한제국관에 전시를 했으며 그 당시 전시회를 취재한 프랑스의 역사예술고고학회지 <옛날 종이>는 “직지는 금속 활자의 발명국이 독일이 아니라 한국이라는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다.”라고 썼지만 그 당시는 유럽 사람들은 세계 문화의 중심은 유럽이 아니라 동양의 조선에 발명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았기에 결국 직지는 그 박람회에서 인정받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박병선 박사의 끊임없는 도전으로 인하여 결국 유네스코에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스운 일은 이런 사실이 한국에 알려지자 서지학회 교수라 했던 두 명은 박병선 박사가 직지가 금속 활자임을 인정해달라고 편지를 보냈을 때 직지는 금속 활자본이 아니라 목판본이라고 오히려 박병선 박사를 힐책까지 한 자들이 그 직지가 금속 활자라는 사실을 자신들이 고증했다고 학술지에 올려버린 것이다. 참 학자들이 뻔뻔하기 그지없다. 박병선 박사의 고진감래가 빛을 발해야 함에도 그러지를 못했으니 참 억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 후 이제는 외규장각 도서를 찾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그녀는 베르사유궁전 파손된 책이나 폐지를 보관한 창고에서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를 찾게 된다. 프랑스에 발을 딛은 지 20여 년 만이다. 총 297권을 찾아 한국의 특파원인 신기자에게 모든 사실을 알려 한국에서는 그 기사가 대서특필된 것이다. 하지만 그로 인하여 박병선 박사는 도서관에서 해고되었고, 한국에도 들어갈 수 없는 형편이 되어 그녀는 프랑스에서 준 연금으로 근근이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이 외규장각 도서를 반환하기로 했고 그로 인하여 그녀는 귀국하지만 그의 몸은 만신창이가 된다. 그녀의 마지막 희망은 병인양요에 관련된 책을 서술하고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이다. 과연 그녀의 뜻대로 되었을까? 결말이 없어 아쉽지만 그래도 직지를 찾아서 인증받기까지의 과정을 작가의 투철한 사명감으로 잘 기록한 것을 보고 참 초보 작가로서 대단한 업적을 남겼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사실에 입각한 소설이었고. 결과적으로 박병선 박사가 직지의 대모가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박병선 박사가 발견한 외규장각 도서 297책이 이미 반환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다고 했다. 직지는 아직도 프랑스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한다. 참 안타까운 일이다. 상권을 발견하면 좋겠지만 아무튼 직지에 관련된 책을 또 한 권 끝냈다.
# 책을 읽고 나서 참고할 사항
0. 프랑스 국립도서관은 1368년에 설립되어 프랑스 혁명 당시 압류한 도서가 30만 권을 넘었으며 1793년 민간도서관으로 자리매김하였다. 1926년 국립도서관으로 지정되어 프랑스에서 발간되는 모든 서적을 보관하였다. 인쇄본, 필사본, 인쇄물과 세계 각국의 서적들과 고서적을 합하면 3,000만 권이 넘었다. (본문 16쪽)
0. 파리 2구에 위치한 리슐리외 도서관은 루브르 박물관과 가까운 거리였다. 파리의 중심가 리슐리외가에 있었다. 또한 19세기 초에 건축된 도서관으로 화재와 장서의 보관과 도난을 방지하기 우해 철제로 지어졌다. 철제로 거대한 원형 아치 천장을 만들고 건물의 측면에는 빙 둘러 책장을 만들어 도서를 4층으로 진열하고 건물 중앙 한복판에 책상을 배치하였다.
(본문 28쪽)
0. “이 책은 1377년 꼬레아에서 금속활자로 인쇄하였다.”
누가 기록을 했는지 서명이 없어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기록이 사실이라면 인류의 역사를 바꿀 책이었다. 분명히 금속 활자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금속 활자는 ‘움직이는 쇠글자’라는 뜻이다. 또한 ‘인쇄’라는 분명한 뜻도 나타나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마지막에 쓴 ‘date. 1377’이었다. 1377년에 인쇄했다는 기록이었다, 세계 최초로 금속 활자 인쇄술을 발명하였다는 독일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의 1455년 42줄 성경보다 무려 78년이나 앞서는 금속 활자본이었다. (본문 38쪽)
0.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직지심체요절 권下’이라는 긴 제목을 적고 ‘宣光(선광)칠년정사칠월’(고려 우왕 3년)발행 연월을 정확히 기록하였다. ‘청주목외 흥덕사’ 청주 외곽의 흥덕사로 인쇄처를 밝히고 비구니 묘덕의 시주로 직지가 발행되었음을 분명히 했다. 선광 7년은 북원 연호로 서기 1377년이다. (본문 39쪽)
0. 직지는 참선으로 진리를 통달한 인도와 중국, 한국의 선사들 법어문답을 기록한 책으로 중심 주제는 직지심체 즉 “참선을 통하여 사람의 본성을 알게 되면 마음의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직지의 내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직지가 금속 활자 즉 쇠로 만든 움직이는 글자이며 현존하는 최고의 금속 활자본이라는 것이 매우 중요하였다. (본문 40쪽)
0. 한국의 고대국가 신라의 사찰 불국사에서 1966년 석가탑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무구정광대다라니경> 두루마기가 발견되었는데 751년경에 인쇄한 것으로 확인되었어.
(본문 75쪽)
0. 일본에서 770년에 인쇄된 <백만탑다라니경>이 가장 오래된 목판본인 줄 알았는데.
(본문 75~76쪽)
0. 중국은 868년에 인쇄된 금강경이 가장 오래된 목판본이지. (본문 76쪽)
0. 과거로의 여행이 가능하다면 1377년의 흥덕사로 돌아가 직지를 땀 흘리며 제작할 연화무인, 석찬, 달잠 선인들을 꼭 한 번 만나고 오고 싶었다. (본문 80쪽)
0. 기록대로라면 왈드 포겔이 아비뇽에서 1444년에 알파벳을 금속 활자로 만들었다는 증거가 확실했다. 왈드 포겔은 인쇄 도구를 이용하여 책을 만들어 빌려주고 돈을 받았다.
(본문 81쪽)
0. 이제현은 고려를 대표하는 역사학자였어. 그는 누구보다 문장가로서 조예가 뛰어난 학자였지. 그는 충선왕을 따라 동방을 세 번이나 여행하였는데 아마도 책을 수집하는 여행이었을 가능성이 커. 충선왕은 원나라 손자의 권력을 등에 업고 책을 수집해 만권당을 채웠다고 생각해. 만권당에서는 고려의 왕실과 고려의 역사, 고려의 문물, 고려의 학술, 고려의 책에 대한 토론이 주로 이루어졌다고 고려사와 이제현의 열전에 기록되어 있어.
(본문 91쪽)
0. 몬테크로비노는 1305년과 1306년 교황청에 편지를 보내 원나라에서 성경을 인쇄하였다고 보고하였고, 오도릭은 교황청에 동판으로 인쇄한 지폐 <중통원보교초>를 가져가 서양 사람들에게 인쇄한 지폐를 보여준 사람이잖아. (본문 92쪽)
0. 고려에서는 1234년경 <상정예문> 28부를 금속 활자로 찍어 여러 관사에 나누어 보관하였다는 기록이 <동국이상국집>에 남아있어. 또한 1239년 인쇄한 <남명천화상송증도가>라는 목판본이 있는데 그 책에 금속 활자로 인쇄한 <남명천화상송증도가>를 번각하였다는 기록이 분명히 남아있으므로 금속 활자본 <남명천화상송증도가>는 최소한 1239년 이전에 금속 활자로 인쇄되었다는 것이 확실하지. (본문 93쪽)
0. <남명천화상송증도가>에는 첫째, 글줄이 올바르지 않고 삐뚤빼뚤해. 둘째 글자가 옆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지거나 쏠린 글자가 많다. 셋째 글자의 아래 획과 위 획이 닿거나 엇물린 글자가 있어. 넷째, 한 판의 동일한 글자에서 똑같은 글꼴의 글자가 없고 글자 모양은 짜임새와 조리가 있어. 즉 번각본에서 금속 활자 인쇄의 특징이 그대로 나타났다는 것이 금속 활자본이 존재하였다는 증거이지. (본문 94쪽)
0. 대한제국관은 민영찬, 콜랭 드 플랑시, 모리스 쿠랑의 노력 덕택으로 파리만국박람회에서 대상 하나, 금메달 둘, 은메달 열, 동메달 다섯, 장려상 셋을 수상하는 업적을 남겼다. 또한 민영찬은 박람회 조직 및 진행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프랑스 명예훈장을 받았다.
(본문 111쪽)
0. 한국의 역사는 없었다. 세계사는 서양 사람들이 쓴 역사를 거리낌이 없이 그대로 가르쳤으며 동양의 역사는 중국인들의 기록을 받아들여 가르쳤고 한국의 역사는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쓴 역사를 그대로 가르쳤다. 역사는 후세에 기록하는 자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한국의 역사는 일본인들이 쓴 대로 바뀌었다. 그들이 우리의 역사를 올바르게 썼을 일이 없다. 일본에 유리하게 썼을 것이다. 언젠가 한국의 역사는 한국인 학자들에 의해 올바르게 기록될 것이지만 가슴이 아프고 안타까웠다. (본문 118~119쪽)
0. 마가렛 수녀는 교황청의 비밀서고에 보관된 오래된 편지 한 통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그 편지는 1333년 교황이 고려의 왕에게 보낸 편지라고 하였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교황청이 고려와 교류를 했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요한 22세 교황이 쓴 편지였다. ‘레지 꼬룸 데움’ 라틴어였다. 직역하면 ‘고려의 왕’
“존경하는 고려인들의 국왕 전하께
고려왕 당신은 하나님을 잘 섬기는 분입니다. 고려의 왕께서 교황청에서 보낸 사제들을 잘 보살펴주신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 기뻤습니다.” (본문 128쪽)
0. 제국대장공주 [齊國大長公主]1259년에 원 세조 쿠빌라이의 딸로 태어났다. 이름은 홀도로게리미실(忽都魯揭里迷失)이다. 1274년(원종 15) 5월에 충렬왕이 세자로서 원나라에 있을 때 혼인하였다. 그리고 이 해에 충렬왕이 즉위하면서 함께 고려에 들어왔다. 1275년 원성공주(元成公主)로 봉하고, 그의 궁(宮)을 경성(敬成), 전(殿)을 원성(元成), 부(府)를 응선(膺善)이라고 이름 짓고 관속을 두었으며 안동(安東) 경산부(京山府)를 탕목읍(湯沐邑)으로 정하였다. 1276년(충렬왕 2) 9월에 충선왕을, 1277년에 공주를, 그리고 1278년에 왕자를 출산하였다. 1294년(충렬왕 20)에 원나라 성종(成宗)이 안평공주(安平公主)로 봉하였다. 1297년(충렬왕 22) 5월에 원에서 귀국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병이 들어 현성사(賢聖寺)에서 사망하였는데 향년 39세였다. (출처 : 다음백과사전)
0. 가례도감의궤 [嘉禮都監儀軌]조선 왕실의 가례를 위해 가례도감(嘉禮都監)을 설치한 것은 1397년(태조 6)부터 나타나므로, 가례도감의궤(嘉禮都監儀軌)도 조선 전기부터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재는 1627년(인조 5) 소현세자와 강빈(姜嬪)의 가례에서부터 1906년(고종 33) 순종과 순정황후의 가례까지 총 20종의 의궤가 남아 있다. 이 중에서 왕세자의 가례는 11종, 국왕의 가례는 9종이다. 의궤의 분량은 초기에는 1책이었지만, 1759년(영조 35) 영조의 가례 이후 2책으로 늘어났다. 영조 대에는 『국혼정례(國婚定例)』와 『상방정례(尙方定例)』가 작성되면서 가례 절차가 정비되었고, 의궤의 기록도 더욱 정밀해지고 체계화되었다.(출처 : 다음백과사전)
0. 적상산사고 [赤裳山史庫]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 적상 산성(赤裳山城) 안에 설치했던 사고. 북방에 위치한 묘향산사고(妙香山史庫)가 후금의 위협뿐만 아니라 사고 관리의 소홀로 소장 도서가 망실(亡失)될 우려가 있었다. 따라서 다른 적당한 장소에 실록을 이치(移置)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다. 1610년(광해군 2) 순안어사(巡按御史) 최현(崔睍)과 무주현감 이유경(李有慶)의 요청에 따라 사관을 적상산에 보내 땅 모양을 살피게 하고 산성을 수리하게 하였다. 1614년 적상산성 안에 실록전(實錄殿)을 건립했으며, 4년 뒤인 1618년 9월부터 실록이 봉안되기 시작, 1633년(인조 11)까지 묘향산사고의 실록을 모두 이곳으로 옮겨서 보관하였다. 1641년에는 선원각(璿源閣)을 건립하고 『선원록(璿源錄)』을 봉안하여 적상산사고는 완전한 사고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병자호란 때 5사고 중 마니산사고(摩尼山史庫)의 실록이 산실(散失)되어 이를 다시 보완하는 작업이 1666년(현종 7)에 시작되었다. 이 때 적상산 사고본을 근거로 등사·교정 작업을 했는데 3도 유생(三道儒生)이 300명이나 동원되었다. 이 사고의 설치를 계기로 사고의 수호와 산성 수비를 강화하기 위해 승병을 모집하고 수호 사찰(守護寺刹)을 건립하는 등 여러 방안이 강구되었다. 사고 설치 직후에는 승려 덕웅(德雄)이 승병 92명을 모집해 산성을 수축하는 한편, 분번(分番)으로 사각(史閣)을 수호하였다. 특히 정묘호란 때에는 사고를 지킬 사람이 없어 승려 상훈(尙訓)이 사고의 서책을 성밖의 석굴(石窟)로 옮겨 보관하다가 전쟁이 끝난 뒤 사고에 다시 봉안하였다. 사고의 수호가 이와 같이 어려워지자 1643년 산성 안에 호국사(護國寺)를 창건해 수호 사찰로 하였다. 조선 말기에 사고가 퇴락해 1872년(고종 9) 실록전과 선원각을 개수했으며, 1902년에는 대대적인 개수 공사를 하였다. 1910년 조선의 주권을 강탈한 일제는 실록을 구황실문고(舊皇室文庫)로 편입해 장서각에 보관시켰다. 그러나 산질(散秩)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고, 그 뒤 6·25전쟁 중에 분실되어버렸다. 실록전과 선원각의 건물이 언제 어떻게 없어졌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선원각은 부근 안국사(安國寺) 경내로 옮겨져 천불전(千佛殿)으로 전해오고 있다. (출처 : 다음백과사전)
# 사전에서 찾은 낱말은 붙임으로 올려놓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