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우리말은 계통에 따른 한국어의 어휘 분류 가운데 한자어 및 외래어,
외국어가 아닌 한국어의 고유어로 여겨지는 것을 가리킨다.
'고유어', '토착어', '토박이말', '순한국어'라고도 한다.
'고유어'라는 단어는 물론이고, '순한국어'라는 낱말도 한자어이며
'순(純)우리말'은 완전한 고유어와 한자어가 섞인 혼종어이다.
'토박이말' 역시 한자 '土'가 들어 있다.
한자를 완전히 배제한 고유어로는 '민우리말', '맨우리말'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용례가 거의 없다.
다만 순우리말을 지칭하는 표현이 꼭 순우리말일(자기정합어) 필요는 없긴 하다.
학문적으로 특정 단어가 한국어 고유 계통인지를 판단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고대 문헌 자료의 부재로 인해 한국어의 진화 과정을 뚜렷이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순우리말이라고 여겨지는 단어들이 실제로는 타 언어의 차용어,
즉 외래어인 경우도 굉장히 많다.
대표적으로 가방, 망토, 빵, 조끼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일례로 다음의 시를 보면서 순우리말이 아닌 단어를 찾아보자.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 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 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윤동주, 〈새로운 길〉
한자로 적을 수 있는 “내일”(來日)을 제외하면 전부 순우리말로 된 시처럼 보인다.
허나 “바람"은 상고한어 風 *prəm과 연관되었다는 설이 존재하며 도리어 "내일"이
한자 來日에서 유래했다는 것은 후대에 재해석된 어원이고 실제로는 순우리말 "내흘"이
비슷한 음가와 의미를 가진 한자어로 대치되었다는 주장도 제기된 바 있다.
이와 비슷한 사례는 매우 많다. 많은 이들이 천둥은 순우리말,
우레는 한자어일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이다.
호랑이와 범, 귤과 수박이 순우리말, 한자어, 그 합성 중 어느 것인지 바로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이처럼 우리말의 여러 단어나 표현이 순우리말인지
아닌지의 여부를 명확히 가려내는 것은 의외로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고유어는 당연히 방언 역시 품고 있다.
예컨대 '오름'은 오늘날 제주 방언에만 남아있으나 산봉우리를 뜻하는 고유어 어휘이다.
한문 - 한국어의 양층언어 사회에서 지방의 언어는 구어로서 하층에 머문 시기가 길었기 때문에
방언에서 한국어의 고유어를 찾을 수 있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이 경우 "해당 방언에서만 특이하게 고유어를 쓴다"라기보다는 본래는
중앙에서도 고유어를 사용했으나 한자어에 밀려 사라진 경우가 많다.
방언에 옛꼴[古形]이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신라 향가 혜성가의 '岳音'을 '오름'으로 읽는 연구자들도 있는데
해당 가설을 채택할 경우 순우리말(이자 현대에는 방언인) '오름'이라는 낱말은 비록 오늘날에는
제주 방언에만 남아있으나 과거에는 경주 일대에서도 사용했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본래 한자어이거나 외래어인데 유입된 지 오래 되었거나 발음이 변하는 등의 이유로
어원 의식이 약화되어 고유어로 오인되는 낱말들은 귀화어라고 부른다.
반대로 고유어를 한자어로 오인하는 경우도 많다.
과거 고유어를 한문으로 음역하는 과정에서 그럴싸한 한자를 가져다 붙인 것일 뿐이다.
이 경우 뜻은 그럭저럭 통하기 때문에 전문가가 아니면 판단하기 어렵다.
실제로 한자 표기가 있어서 공식적으론 한자어로 여겨지지만 해당 표기에 쓰이는
한자의 의미와 낱말의 의미가 전혀 안 맞는 경우가 종종 있다.
또한 고유어 발음이 같은 의미의 한자어 발음에 추가되는 경우도 있는데
이 경우엔 한자 표기가 있어도 고유어로 여긴다.
한자어와 관계
한국어의 경우 한자를 표기의 수단의 하나로 오랫동안 써온
동북아시아의 전통 때문에 한자어의 비중이 높은 편이다.
한자가 탄생하기 이전부터 각 지역의 사람들은 그들만의 고유한 말의 뜻과
소리를 가지고 있었고 그 표기만을 한자라는 문자를 빌려서 썼기 때문에
처음 사유가 탄생했을 때 있던 순우리말은 주로 새로운 개념이 들어올 때 따라 들어오거나
외래어의 형태로 자리잡은 한자어와 같이 쓰이면서 섞이게 되었다.
한국어에서 한자어는 대략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문어로 쓸 때는 그 비중이 더 올라가지만, 구어를 쓸 때는 비중이 내려가며 인터넷
커뮤니티나 위키는 문어로만 쓰는 특성 때문에 한자어 비율이 확 늘어보이게 된다.
한자문화권인 한국, 일본, 만주, 베트남 등에서는 모두 한자어가 뿌리깊게 자리잡았는데
그 이유는 한자는 21세기에 영어가 그렇듯 꽤 오랫 동안 동아시아에서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표기방식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상업의 발달과 교역의 증대, 제도의 도입 등을 통해 새로운 개념이 만들어진 다음
그것들이 문서로 전해질 때 언어도 함께 수입되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문적인 많은 어휘들이 책과 함께 들어오면서 사회에 퍼져 한자어를 이용하여
고유어에는 없는 새로운 개념들을 지칭할 수 있게 되었다고 특정 언어의 공식적 사용이
그 언어를 쓰는 사람에게 바로 더 나은 정신세계를 의미할 수는 없었고 특정 집단의
존재적 탁월성까지 확보해 주는 것은 아니었다.
이는 한자라는 표기형식을 가져와 쓰기 이전에도 사람의 뜻과 입으로 내는 소리가
한민족에게 독자적으로 존재하고 있었고 그 집단이 가진 사유의 탁월성은 어떤
언어체계 안에서 얼마나 자신을 갈고 닦고 지식을 쌓아가느냐의 문제이지 언어라는
도구 자체의 효율성이나 사용빈도로 결정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말 또한 문화의 일부이므로 문화의 상대성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어느 말이 다른 어떤 말보다 말 그자체로 더 우월할 수는 없다.
누군가는 어휘의 갯수만을 문명 사이의 발전도를 비교하기도 하는데 단어의
숫자는 문명의 정도와 복잡도를 설명하는데는 유용하고 어떤 분야에서 얼마나
많은 연구가 다양하게 진행되었는지를 나타낸다는 척도로는 타당하지만
새로운 개념을 다른 언어로 받아들일 때 초기 번역이 고유의 사유체계에 맞게
제대로 짜맞춰지지 않았을 경우 용어 자체에 대한 뉘앙스가 달라 혼동을 초래하고
추후 학습의 비효율성을 초래할 가능성이 더 클 위험성도 있다.
그러므로 단어의 숫자와 문명 수준의 상관관계에 대한 얘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그 어떤 개념을 들여올 때 자주적인 입장에서 일일이 뜻을 기존의 것에 맞게 조직,
번역하고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내는 과정이 지식인 내부나 국가의 입장에서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인식되고 처리되었는가 하는 것이지 절대적 숫자의 문제는 아니다.
그 가장 좋은 예가 21세기가 들어서면서 인터넷이 대중적으로 널리 보급되었을 때
갈무리라는 말 대신 저장이라는 한자어를 쓰게 되어 그 이후 바뀐 생활습관 안에서
순우리말이 설 자리가 없게 된 것 등이 좋은 예이다.
고유어를 한자어에 비해 아래로 내려다 보게 되는 것은 자기 언어로 다른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 가장 손 쉬운 이해의 방법이라 믿지 못하는 교육적
불신과 함께 외래 단어를 빌려와 널리 쓰게 되었다는 것이 이미 우리에게
유사한 개념이나 문제가 없었을 것이라고 믿는 착각 때문이다.
문화의 교류시 외부에서 단어가 오고가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그 말에 담긴 뜻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전달하는 것이 단순한 어휘의 숫자보다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자기 말을 잘 구사하고 영어도 잘할 때 더 교양있는
사람으로 대접받는 것처럼 고유어의 선택과 사용은 특정 언어를 버리는 문제가 아니라
둘을 아울러 더 나은 것을 만들어내는 각 시대에 놓인 창조적 과제라 할 수 있다.
한자는 문법적인 특성상 새로운 단어를 쉽게 만들 수 있고, 그 형태도 짧고 간결하다.
또한 한문은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전문적이고 학문적인 영역에서 유일하게 보편적인 언어다.
그래서 우리들은 순우리말보다 한자로 어떠한 개념을 지칭하는 것이 더 익숙하다.
그래서 새로운 개념을 들여올 때 순우리말보다 한자어로 이름을 붙이는 것이 더 쉽다.
언어 순화 운동이 제대로 된 순화어를 만들지 못하고 복잡한 한자어나 어정쩡하고
어색한 순우리말만 제시하는 것은 것은 한국 고유어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고 그 동안
한자에 의존한 언어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 맞물렸기 때문이다.
영어에서도 로망스어(라틴어와 프랑스어), 그리스어에 순수 게르만 계열 낱말이
밀려나는 것에서 보듯이, 이는 우리나라만의 사례가 아니다.
로망스어에서 온 단어가 전체 어휘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순수 게르만계 어휘는 비중이 25%에 불과하다.
그리스어 역시 학문 분야에서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한다.
영어 화자들 사이에서도 프랑스어, 라틴어, 그리스어에서 온 단어가 보다 품격있고
지적으로 우월하다는 인식이 존재한다.
한국어로 표기된 체계적인 문헌은 훈민정음이 창제된 15세기에 등장하였고
일찍이 등장한 이두나 구결은 한국어의 음절 수가 많다는 한계로 가나처럼
고유명사를 표기하는 데까지 이르지 못하였다.
향가를 비롯한 문학 작품에 쓰인 향찰의 경우 우리말을 보다
온전히 표기할 수 있었지만 현전하는 자료가 극히 적을 뿐더러
표기법이 번거로운 탓에 고려 중기 이후 빠르게 소멸하고 말았다. 거기에
한문이 높은 지위를 차지하였기 때문에 고유어가 한자어로 많이 대체되었다.
지명의 경우 경덕왕이 757년에 전국 지명을 한문식으로 바꾼 것이 유명하다.
다만 경덕왕 문서에서도 나오듯이 경덕왕 혼자서 모든 지명을 바꾼 것은 아니고
이후 고려-조선 시기에도 한자로 지명을 붙이고 심지어 중국의 지명을 그대로 붙이는
(강릉, 양양 등) 등의 일이 이어졌다.
또한 기존에 고유어로 훈독하던 지명 표기들조차 조선 후기 이후 점차
음독하게 되면서 한문식 지명은 더욱 늘어나게 되었다.
동사의 경우에도 조선 후기까지 고유어 동사표현을 한자어 + '-하다' 식으로
바꾸어 부르는 일이 많았다. 개중에서는 '열다'를 '개(開)하다'나
'여리다'를 '약(弱)하다' 따위로 바꾼 것이 있다. 기미독립선언서와 같은
글을 보면 정말 어미와 조사만 한국어로 쓴 정도이니 한글전용에 대한
일부의 요구가 나오는 배경이 되기도 한다.
현대에는 공공기관의 경우 뜻이 같으면 되도록 순우리말을 쓰도록 권장하는 추세이다.
공영방송 등지에서는 뜻이 같은 단어들 가운데 순우리말을 우선해서 쓴다.
예를 들어 뉴스 끄트머리에 아나운서가 “시청해주신 여러분, 고맙습니다.”를 말하는데,
이는 “감사합니다” 대신 뜻이 같은 순우리말 “고맙습니다”를 쓴 것이다.
언어순화 운동
상술했듯 한국에서는 한자어에 밀려서 고유어가 많이 사라지기도 했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기초적인 단어가 일본식 어휘로 대체되는
등의 역사를 가졌기 때문에 언어순화 운동이 상당히 힘을 얻고 있다.
하지만 문화적으로 교류하면서 외래어가 유입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로,
외래어의 유입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바람직하지도 않다.
정도의 문제가 될 수밖에 없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