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라 4대왕 석탈해가 죽어서 백성을 지키는 신이 됐다고 해서 사당의 명칭도 숭신전으로 지어졌다. 숭신전의 홍살문과 출입문
신라 4대 석탈해왕은 용성국에서 철기문화를 가지고 신라로 들어온 사람이며, 알에서 태어났다는 것과 죽어서 신이 됐다는 등 여러 설화의 주인공으로 전해지고 있다.
탈해는 청동기에 머물러 있던 진한 땅에 상륙해 앞선 철기문화를 보급하며 토착민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삶을 영위하며 지도자의 길을 걸었다.
우선 호공이 살고 있던 삶의 터전을 지혜로 빼앗아 자신의 주거지로 삼았다. 또 뛰어난 지략으로 남해왕의 눈에 들어 공주와 결혼하면서 신라 왕궁 깊숙이 파고들어 실권을 행사하기에 이르렀다.
마침내 남해왕이 아들과 사위 누구든 덕이 있는 어른이 왕위를 이어야 한다고 유언을 남겼지만 석탈해는 처남이었던 유리왕에게 왕위를 양보했다. 유리왕에 이어 62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왕위에 오른 석탈해는 남해왕과 마찬가지로 계림에서 얻은 김알지에게 왕위를 이을 것을 명했지만 알지는 왕좌에 오르지 않았다.
석탈해는 23년 동안 왕위에 있으면서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는 또 죽어서도 백성들을 지키는 동악의 신이 됐다.
후손들은 월성에 그를 모시는 사당을 지었지만 지금은 소금강산자락으로 옮겨 숭신전이라는 편액을 걸고 제사를 올리고 있다.
↑ 석탈해가 용성국에서 배를 타고 처음 상륙한 곳으로 전해지는 하서지역에 유허비와 함께 세워진 하마비
◆기록 속의 석탈해
석탈해 신라 4대 임금은 2대 남해왕의 사위다. 남해왕의 아들 3대 유리왕이 죽자 유리왕의 매부였던 석탈해가 62세라는 늦은 나이에 왕위를 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신라의 왕위를 잇는 권력 이양은 서로 양보하는 미덕을 보이며 순조로웠다. 남해왕이 궁중에서 중요한 일을 척척 처리하는 똑똑한 석탈해를 사위로 맞아들여 왕위를 잇게 하려 했지만 탈해는 처남인 유리왕에게 왕위를 양보했던 것처럼 말이다.
탈해왕은 또 계림에서 김알지를 얻어 현명한 그를 태자로 책봉하고 왕위를 이을 것을 희망했지만 알지 또한 유리왕의 둘째 아들인 파사왕에게 왕위를 양보하고 끝내 왕좌에는 오르지 않았다.
박혁거세 이후 남해왕, 유리왕, 석탈해왕, 파사왕으로 이어지는 169년 동안 왕위가 순조롭게 이양되면서 제도적인 정비를 비롯 군사력을 키워 외세의 침략을 막는 등으로 나라의 운영도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 경주시 동천동 금강산자락에 위치한 석탈해왕릉
탈해왕은 용성국의 왕자로 신라에서 자리를 잡아 늦은 나이에 왕위에 올라 23년 동안 재위하면서 마한, 백제, 가야, 왜구 등의 침입을 받았지만 이겨냈다. 또 나라 이름을 계림으로 바꾸어 안정적이며 평화롭게 운영했다.
특히 탈해왕의 백성 사랑은 남달라 죽은 이후에도 나라를 지키는 동악의 호국신이 됐다. 신라시대는 물론 고려, 조선시대까지 토함산에 석탈해왕의 사당을 지어 그를 추모하며 제사를 지내왔다.
↑ 신라 호공의 집터였던 월성 터전을 석탈해가 꽤를 내어 자신의 집터로 만들었다. 그곳에 처음 숭신전이 있었던 흔적
◆석탈해 흔적
석탈해왕의 흔적은 그의 탄강지, 월성터, 숭신전과 왕릉, 토함산 사당 등의 유적으로 남아 있다.
경주 양남면 나아리 월성원자력본부 남쪽에 석탈해왕이 처음 용성국에서 배를 타고 상륙했다는 것을 기념해 세운 유허비가 있다. 조선시대 헌종이 비석과 비각을 세워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유허비는 경북도 기념물 제79호로 지정됐으며 비각을 지어서 관리되고 있다.
삼국유사는 석탈해의 탄강지를 계림동 하서지촌 아진포라고 기록하고 있다. 지금도 하서리라는 지명을 가진 마을이 탄강지 남쪽에 있다. 해풍을 막아주는 소나무숲이 우거진 곳에 옹기종기 마을이 형성돼 있다.
↑ 석탈해가 서라벌 중심지역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던 월성 남쪽의 천연해자와 성터
경주시 동천동 소금강산 자락 소나무숲 우거진 곳에 석탈해왕릉이 있다. 숲에 둘러싸인 높이 4.5m, 넓이 15.5m 규모의 아담하고 평범한 고분 형태로 조성되어 사적지로 지정·관리되고 있다.
석탈해왕릉 바로 남쪽 100m 지점에 조선시대 전통양식의 형태로 석탈해왕을 배향하는 사당 숭신전이 있다. 신도와 인도를 구분해 지은 출입문 밖에는 붉은 나무로 홍살문을 높게 세워두고 있다.
숭신전은 처음 월성 안에 조성되어 있었지만 1980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다. 1906년 ‘숭신전’ 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홍살문을 지나 영녕문과 경엄문을 지나야 숭신전에 이를 수 있다. 영녕문 입구에는 1921년에 세운 ‘신라석탈해왕비명’ 비와 비각이 있다.
신라시대 동악이라 불렸던 토함산 정상에서 석탈해왕의 유골로 소상을 만들어 사당에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고 전한다. 토함산 정상에 2020년 발굴조사에서 사당터와 통일신라시대 기와, 고려시대 명문기와, 분청사기, 토제마, 철제마, 청동방울 등의 유물이 나와 기록이 사실로 증명되면서 신화가 역사로 바꿨다.
↑ 석탈해가 죽어 토함산의 산신이 됐다는 설화가 전한다. 토함산 정상부근에 석탈해 사당이 있었던 곳
◆스토리텔링: 신이 된 왕
석탈해는 용성국의 다섯 왕자 중 네 번째 왕자다. 용성국에서는 왕자가 18세가 되면 군사적 세력이 될 100명의 친위부대를 붙여준다. 그리고 왕자의 지혜와 친위부대의 전력을 평가해 태자로 선정했다.
석탈해는 다섯 왕자 중에서 단연히 두드러지는 무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실력을 드러내지 않았다. 왕자들 간의 불필요한 견제를 우려했기 때문이다. 탈해의 지혜는 형제들이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고 깊었다. 왕과 일부 대신들은 이미 이러한 탈해의 자질을 간파하고 있었지만 모른 체하고 있었다.
반면 둘째 왕자 고루는 체격이 우람하고 무술 실력도 상당히 뛰어난 편이었지만 과격하고 저돌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참을성 없는 급한 성격은 직속 친위대 부하들마저 두려워할 정도였다.
↑ 석탈해왕이 죽어 산신된 후 토함산을 지켰다고 전해진다. 토함산 정상
탈해가 10살이 되기 전부터 고루는 왕좌에 대한 욕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미리부터 경쟁상대를 없애려는 기류가 형성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왕과 왕비는 물론 대신들까지 왕자들의 전쟁을 막기 위해 고루의 눈치를 살피는 지경에 이르렀다.
탈해가 성장하면서 뛰어난 자질이 고루의 눈에 드러나 제거될 것을 왕과 왕비는 크게 걱정하고 있었다. 왕은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훌륭한 스승을 탈해에게 보내 무예수업과 인성적인 교육까지 은밀하게 진행하게 했다. 덕분에 탈해는 타고난 자질을 십분 발휘해 그를 가르치는 스승도 깜짝깜짝 놀랄 정도로 빠르게 성장했다.
이 같은 탈해의 놀라운 성장을 스승은 왕에게 은밀히 보고했다. 탈해의 빠른 성장이 화가 될 수 있다는 걱정도 함께 전했다.
탈해는 또 놀라울 정도로 지혜로웠다. 자신이 익힌 무예를 실전에 사용할 수 있는 무술로 둔갑시켜 친위부대원 중에서도 뛰어난 장군 10명에게 아무도 모르게 개별적으로 전수했다.
↑ 석탈해왕의 사당터가 발견된 토함산 정상의 동해가 훤히 보이는 전경
탈해는 22세가 되던 해 왕과 왕비를 방문해 새해 인사를 드리고, 용성국을 떠나 다른 나라를 건설해 운영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용성국을 이끌 훌륭한 형들이 있고, 형제들과 다투기는 싫다면서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간곡하게 부탁해 허락을 얻어내고는 하직 인사를 올렸다.
탈해는 이미 오래 전부터 자신이 용성국에서는 왕이 돼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고 다른 나라를 개척할 계획을 친위부대 수석 보좌진과 협의하며 진행하고 있었다. 본격적인 왕위 계승자 결정을 위한 행사가 진행되기 전에 나라를 떠나기로 했던 것이다.
탈해와 100명의 친위부대는 무기와 식량을 5대의 배에 나누어 싣고 항해를 시작했다. 큰 파도에도 견디기 쉽게 바람이 거세어지면 5대의 배를 하나로 결합하는 지혜 또한 탈해의 머리에서 나왔다. 6개월의 긴 항해 끝에 탈해군단은 사계절이 뚜렷하고 아름다우며 농사하기 좋은 땅 서라벌 하서항에 당도했다.
하서항으로 상륙한 탈해는 어민들에게 가져온 보석들을 나눠 주며 친화정책을 펼쳐 토착민들과 함께 살아가기로 했다. 친화력과 리더십이 뛰어난 탈해의 지혜에 토착주민들도 금방 하나가 되어 새로운 기술을 배워 고기를 잡고, 농사를 배웠다.
수시로 노략질하며 사람까지 상하게 하던 왜구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탈해군단은 쉽게 토착 주민들을 흡수할 수 있었다. 탈해의 친위부대는 하서지방에 튼튼하게 뿌리를 내렸다.
다시 서라벌 본토로 진출한 석탈해는 타고난 지혜로 남해왕의 눈에 들어 그의 사위가 됐다. 나라의 중요한 일을 도맡아 처리하면서 유리왕에 이어 62세 되던 해에 왕위를 이어받아 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주변의 나라들과 전쟁을 통해서 과감하게 통폐합하기도 하면서 영토를 넓히고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게 너그러운 정책을 펼쳤다. 석탈해는 이어 죽어서도 신라의 백성을 보살피는 동악의 신이 됐다.
*신라사람들의 내용은 문화콘텐츠 육성을 위해 스토리텔링한 것이므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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