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지킴이 우수사례 공모에 오늘 제출 했습니다
PS :- 최종 수정하여 오늘(19일) 우편으로 보냈습니다.
수 신 :- 문 화 재 청 장 귀중
302-701 대전광역시 서구 선사로 139 문화재청
성 명 :- 임 충섭(林忠燮)
소 속 :- Kuwait 정부 치과병원
지킴이 문화재 :- 진천 농다리
연 락 처 :- q8imcs@empal.com
국내 ☏ 011-338-7861
참고 웹사이트 :- http://blog.empas.com/q8imcs/
주 소 :- (국내)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구미동 202번
무지개 마을 LG 아파트
214동 1402호
(직장)
IM CHUNG SEOP
DENTAL CENTER
MINSTRY OF HEALTH
P.O.BOX 525 DASMAN 15456
K U W A I T
옛말에 “亂世에 英雄난다” 했습니다.
생각조차 하기 싫었던 걸프전쟁(1990년 8월-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사건)으로 인하여 본의 아니게 戰地를 탈출하여 한국을 어렵게 가게 되었고 그때부터 시작한 공부로 해서 “문화재 지킴이-진천 농다리”라는 호칭을 얻게 되었으니, 분명 난세(亂世)로 인하여 문화재 지킴이 되었음을 말할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진천 농다리는 지방유형문화재 제28호 (1976. 12. 20) 로서, 천 년 전에 축조된 돌다리로서 고향 충북 鎭川郡 文百面 九谷里 601-32 세금천(洗錦川)에 위치해 있으며 중부고속도로 상행선을 타고 가다보면 증평과 진천 인터체인지 중간쯤에서 오른쪽 창밖 개울 위에 걸쳐져 있는 신비스런 다리입니다.
高麗 초엽시대의 옛 다리 이지만 원형을 유지한 채로 붉은색 自然石으로 지어진 石橋입니다.
교각의 모양이 기어가는 지내 발 모양을 한 길이 93.6m 나 되는 국내에서 가장 긴 돌다리로 일명 지내다리 라고도 합니다.
농다리(鎭川籠矯)는 내 것도, 네 것도 아니고 林氏門中의 재산도 아니며, 임씨 문중에서 관리를 하고 있는 것도 아닌 우리 모두의 文化財로서 잘 보존 하여, 다음 오는 천 년대에도 후손들에게 잘 물려주어야 할 유구(悠久)한 文化遺産으로 忠淸北道와 鎭川郡에서 잘 관리 하고 있습니다.
농다리가 위치한 洗錦川 변에서 동북쪽으로 약 400m 정도에 위치한 곳에 농다리 역사와 함께 한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 (鎭川林氏-집성촌) 주민들에 의해서 천여 년 동안 文化財로 지정되기 이전까지는 농다리에 부분적 水害가 있을 때마다 官廳의 지도 없이 無 補修 ․ 自發的으로 九谷里 주민들에 의해서 보수를 해왔기에 그곳 지방민들께는 애환이 많이 서려있는 다리이기도 합니다.
필자인 제가 농다리가 위치한 건너편 마을(鎭川郡 草坪面 畵山里)에서 태어났기에, 어릴 적 엄마 따라서 外家를 갈 때와 이모님 집을 갈 때, 그리고 진천 장날에 엄마 따라 장 구경 갈때 농다리를 건너 다녔고, 鎭川 中學校 3년을 농다리를 건너다니며 여름 더운 날이면 옷을 훌렁 벗고 사촌형(중학교 동기동창)과 함께 농다리 아래에서 멱을 감고 집에 가가도 했고, 겨울이면 세금천의 얼음 위에서 얼음치기를 하며 동심을 키워오기도 했던 필자와 아주 특별한 인연으로 정감이 가는 다리입니다.
어린 시절 어른들로부터 임 장사(林 壯士 : 고향마을 어른들은 ‘장군’을 ‘장사’라고 표현하기도 함)가 놓았다는 이야기는 자주 듣고 자랐지만 어렸기에 별로 큰 관심 없이 흘려들었을 뿐입니다.
그때는 그저 사람들이 오고가는 평범한 다리일 뿐이었고, 여름이면 멱 감고 겨울이면 얼음판위에서 놀다가는 재미있는 놀이터였을 뿐, 천여 년이 되었는지, 임 장군이 놓았는지 석교로 가장 오래된 다리인지는 알지도 못했고 관심 밖의 사항이었습니다.
어릴 적 다리를 본 것은 농다리 뿐이기에, 한강의 다리도 그리고 세계의 有數한 다리들도 모두 농다리와 같은 모양 일 것이라는 것밖에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 제가 농다리에 특별히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78년 3월부터 쿠웨이트 정부 치과병원에 취업되어 근무 하던 중 1990년 8월 2일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무력으로 침공하여 본의 아니게 Kuwait를 목숨 걸고 탈출하여 피난 겸 귀국하게 되여 한국에서 일 년 동안 있었습니다. 한국에 있는 동안 鎭川林氏 족보에 나타난 선조님들의 業績에 대한 공부를 할 때부터이었습니다.
걸프 전쟁이 끝나면 다시 쿠웨이트로 돌아가야 할 입장이라 한국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없어 서울 용산구 한남동 집에서 서초구 반포동에 위치한 국립 중앙도서관을 거의 매일 출근하다시피 하며 필요한 鎭川林氏 관련 자료를 찾으며 공부를 하였습니다.
자료를 찾기 위하여 서울대학교의 규장각 및 성남의 정신문화연구원에도 가서 자료를 찾아보았고, 충북대학 도서관, 단국대학교 도서관, 충북 중앙도서관, 진천 도서관에도 필요 할 때마다 찾아가 자료를 찾아보곤 했습니다.
때로는 충북대학교의 교수님을 찾아뵙기도 했고, 쿠웨이트에 있으면서 한국의 대학교 史學科 홈패지는 내 홈패지를 방문하듯 수시로 인터넷으로 접속하여 자료를 찾아 모았습니다.
진천의 鄕土史學을 연구하시는 몇 분과 지속적으로 한국으로의 휴가 때마다 만나 뵙고 자문도 구하면서 鎭川林氏의 역사 및 농다리에 대한 지식을 넓혀갔었습니다.
오늘 이렇게 문화재지킴이 우수사례를 적을 수 있음은 인터넷이라는 매개체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쿠웨이트에 앉아서 한국 도서관의 자료를 열람하고, 한국의 박물관을 방문하여 알고 싶은 내용을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하고 했던 모든 것이 인터넷의 발달로 가능했습니다.
이 글을 빌어 언제나 질문에 친절하게 답해주신 청주국립박물관의 학예연구사님께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한국에서 대학 다니는 우리 아이들에게도 수시로 제가 필요 하는 도서관 자료를 알려주고는 복사를 해서 쿠웨이트로 보내달라고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부탁을 하여 그네들에게도 많은 시간을 빚을 지고 있기도 합니다.
모든 분들께 감사하며 농다리 역사가 바로 기록 되게 된 것으로 인사를 대신합니다.
언젠가 기억 할 수 없을 만큼 오래전에 도서관을 방문하여 자료를 찾던 중 좀 이상한 것을 발견했었습니다.
林衍장군의 遺蹟에 관련된 항목에서 농다리 축조 자와 관련된 내용을 검은색 매직펜으로 고의적으로 누군가에 의해서 지운 것을 발견하고 왜 지웠을까?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농다리에 대해서도 관심을 두게 되었던 것입니다.
농다리 자료를 찾는 중 의외로 많은 곳에서 북진세력 축조 설이 정설(定說)이고, 임 장군 축조 설이 이설(異說)인 것으로 기록된 곳이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어릴 적 어른들께 듣고 자란 것은 ‘임 장사’가 놓았다는 것인데, 北進勢力 축조 설을 처음 접하고 보니 혼란스러웠었습니다.
이때만 해도 저에게는 임 장군이 축조했다는 근거 자료도 없었고, 또한 三國期의 북진세력 축조와 관련된 어떤 자료도 없이 다른 분들이 웹사이트에 올려놓은 글을 읽는 정도일 뿐 文化財에 관한 역사에 문외한(門外漢)인 저로서는 별 도리가 없었습니다.
걸프 전쟁이 끝나고 쿠웨이트에 다시 돌아올 때는 그 동안 수집했던(주로 도서관 자료 복사)자료들을 갖고 와서 틈틈이 공부하며 정리하였습니다.
정리하면서 미심쩍고 더 알아보고 싶은 것은 모두 항목별로 정확한 리스트를 만들었고, 만들어진 리스트의 알고 싶은 내용들을 찾기 위해 다음 년도에 한국으로의 휴가 때는 2/3 정도를 도서관에서 보내면서 자료를 찾아 좀 더 깊이 있고 전문적으로 공부를 했었습니다.
이렇게 공부할 때가 참 즐거웠었고 보람도 많았습니다.
저의 직업과 전혀 무관한 문화재에 관하여 한국과 쿠웨이트를 오가면서 공부를 할 수 있었었던 것은, 우선 한국의 도서관 시설이 잘 되어있고 또한 인터넷의 발달로 가능했습니다.
제가 인터넷을 할 줄 알고 사용할 수 있었기에 모두가 가능했습니다.
모르고 있던 어떤 것을 알고 싶어 목말라 할 때 스스로 공부를 통하여 지식을 습득했을 때의 기쁨은 공부를 해보지 않고는 체험할 수 없는 귀한 산물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공부가 어려운 만큼 기쁨 또한 倍加한다는 사실도 터득했습니다.
공부를 해본 자만이 공부하는 방법을 알게 되듯, 도서관을 자주 이용하다보니 우선 도서관 이용시 심적 부담감이 없어지며, 어느 곳에 어떤 자료가 있고, 어떤 자료를 찾게 되면 원하는 자료를 쉽게 찾을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공부한 것이 2006년 올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다행히 쿠웨이트 정부 공무원 신분인지라 휴가를 많이 주는 것도 한국에 가서 공부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1998년 휴가 때로 기억됩니다.
쿠웨이트에서 자료를 정리하며 공부하는 중 농다리 축조와 관련된 자료가 기록되어 있을만한 史書들의 목록을 압축하여 작성하여보았고 한국의 우리 아이들에게 부탁을 했지만 찾지를 못했습니다.
한국으로의 휴가 때 우선적으로 국립중앙도서관에 가서 저 나름대로 작성한 목록 순서대로 꼼꼼히 찾던 중 2종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때의 기쁨은 어떻게 형용할 수가 없을 정도이었습니다.
국립중앙 도서관에서 찾은 자료는 1932년에 찬(撰) 한 鎭川郡誌였던 『常山誌』로서 교량 편에서 농다리(籠橋) 항목을 발견했고, 역시 같은 해에 『朝鮮寰輿勝覽』 교량 편에 진천 농다리가 기록되어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常山誌』와 『朝鮮寰輿勝覽』에 기록된 籠橋항목은 진천 농다리 를 기록한 현존하고 발견된 史書중 가장 오래된 것이기에 그 價値는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예전에야 농다리 관련 古書 자료들이 많이 있었겠지만 高麗史의 叛逆傳에 林衍장군이 기록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그의 업적과 관련된 것은 王政 시대의 史觀들께서 고의적으로 삭제 또는 축소해서 史書에 기록했을 것으로 쉽게 짐작되며 많은 귀중한 자료들이 산실(散失)되었을 것으로 유추(類推)해 볼 수 있습니다.
농다리와 관련하여 많은 史書를 찾아보았지만 한정된 휴가 기간에 찾아보는 것은 한계가 있었지만 그래도『常山誌』와 『朝鮮寰輿勝覽』처럼 핵심적인 내용을 직접적으로 찾은 것은 큰 수학이었고 결실이었습니다.
비록 복사본이지만 제 스스로 직접 복사하여 귀중한 자료를 저도 소장하게 되었다는 것에 대하여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계속 국내는 물론 국외에 있는 석교(石橋)를 인터넷을 통해 크고 작음, 그리고 축조연대를 가리지 않고 모두(징검다리 포함)검색하여 진천 농다리와 축조기법을 비교 분석하는 작업도 병행하였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石造 유적이 많이 남아 있을 것으로 짐작되는 동남아시아 쪽 국가의 문화관광과 관련된 정부 부처 의 홈패지 및 그곳의 한국 대사관 홈페지에 글을 올려 오래된 교량을 찾는다는 글도 올렸고, 동남아시아 쪽을 상대로 하는 각 여행사에도 글을 올려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으며, 동남아시아의 교민회와 종교 관련 홈페지에도 글을 올려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었습니다.
제가 직접 인터넷을 통하여 찾아다니며 얻은 자료 외에는 동남아시아 쪽에서는 별 소득이 없었습니다. 이유는 그쪽의 인터넷 발달이 우리 한국 만큼 발달하지를 못해 웹상에 많은 자료를 올리지를 못한 것을 판단됩니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꼭 제가 직접 동남아시아 쪽과 중국을 여행하며 옛 다리를 찾아볼 예정입니다.
한번은 농다리 업무와 관련된 관계자를 만나야할 일이 있었는데 제가 수집한 자료를 보더니 그분도 처음 보는 자료들이 많은지라 어떻게 자료를 구하였는가? 질문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때만도 제 스스로 홈패지를 만들 실력이 되지 못했습니다.
다른 분들이 만든 홈패지 중 문화재 (歷史)관련 홈패지를 이곳저곳 방문하여 제가 공부한 내용을 게시판에 올려 왜곡 되고 있는 농다리 축조시기 및 축조 자에 관하여 바로 잡아보고자 노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2003년부터 물고기가 물을 만나듯 웹 사이트 엠파스에서 “진천 농다리(籠橋)” 라고 하는 불로그를 제가 직접 만들었고 심혈을 기울여 운영하였습니다.
농다리 홍보는 물론, 농다리 역사에 관한 자세한 글을 올리고 있고, 농다리와 관련된 질문에 답을 해주고 있으며, 농다리 관련 뉴스 및 농다리 사진을 올리고 있습니다.
농다리 간련 종합 웹 사이트라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의 많은 농다리 관련 자료를 올리고 있습니다.
오늘 현재까지 방문자가 약 69000여명 정도 되었습니다.
1999년쯤 인터넷을 통하여 진천군청 홈페지에 방문하여 보니 문화재 항목에 농다리 북진세력 축조 설이 기록되어있었습니다.
문화체육과 담당자분께 북진세력 축조설의 근거자료를 알려줄 것을 요청하는 메일을 보냈고, 답신으로 북진세력 축조설의 근거 자료라며 『鎭川金庾信將軍史蹟 學術調査報告書』를 알려주었습니다.
질문의 답을 받고(진천군청 홈패지) 진천군청에 관련 자료(보고서)를 복사본이라도 한 부 보내달라고 몇 차례 간청을 했지만 아무런 소식이 없어 고향의 鎭川林氏 문중의 대표되시는 분에게 부탁 드려 어렵게 한 부 구하여 등기 우편으로 쿠웨이트로 보내 주셔서 자세히 볼 수 있었습니다.
보고서의 내용 중 농다리 관련 자료는 제가 평소 공부하여 알고 있던 내용과는 많은 부분에서 상충(相衝)하였습니다.
보고서에서 기록하고 있는 핵심적 근거 자료로 제시하며 “「金庾信의 百濟攻擊路 硏究」『史學志』 6집, 1972” 을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사학지 6집 에 중요하고 자세한 내용이 있을 것으로 판단하여 사학지 6집 찾기에 전심전력 하였습니다.
해외에서 인터넷을 통하여 전문적인 학술지를 찾는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외국에 거주하는 비전문가(歷史)인 일반인(醫療人)으로서 한계를 느꼈고, 포기 할 까도 몇 번 망설였지만 여태까지 저 스스로 보였던 열정이 아까워 다시 마음을 다잡고 찾기를 계속했습니다.
한국의 큰 서점에 문의 목적으로 국제 전화한 통화료도 상당히 많았습니다.
비전문가가 전문 학술지를 찾아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 이라는 것은 찾아보지 않으신 분은 도저히 이해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 글을 작성하며 조금 전 최근의 사정은 어떤가 알아보느라 관련 자료를 검색어로 검색을 하니 인터넷에 바로 떠오르는데, 제가 필요로 하여 찾을 때는 왜 그렇게도 검색이 되지를 않아 고생을 하게 했었는지 모르겠네요.)
한국 휴가 중, 어렵게 도서관에 근무하시는 司書님들의 도움으로『史學志』 6집, 1972 를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찾았습니다.
책을 모두 복사하는 것은 기본이었고, 복사된 것으로 자료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수없이 많이 읽어야했고 숙지(熟知)해야 했습니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밀지도(1/50.000)가 필요하여 서울 종로에 있는 중앙지도 판매소에서 충북 보은에서 경기도 이천까지의 지도를 여러 장 구입하기도 했습니다.
군사이동 軍事路를 알아보고 또한 사학지 6집, 에 나타난 地名을 표시하기 위해 1/50.000 정밀지도를 여러 장 구입하여 한국으로의 휴가 중에는 집안의 한쪽 벽면에 지도를 常時 달아놓고 필요한 위치를 표시해가면서 보기도 하였습니다.
지금도 한국으로의 휴가 때는 제일먼저 하는 작업이 지도(폭 약 1m 세로 2.5m 정도)를 벽면에 걸어놓는 작업부터 합니다.
2002년 5월경 고향마을에 농다리 지킴이회 및 농다리 보존회가 결성되어 임영은 님이 회장으로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는 소식을 우연한 기회에 듣게 되었고, 한국 휴가 중 바로 고향에 내려가 농다리 지킴이 임영은 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임영은님도 농다리 사랑에 남다른 열정으로 농다리와 관련된 사업을 주관하며 각종 행사를 하고 농다리 홍보에 그분의 다른 어떤 것 보다 최우선적으로 열심히 하시며 Daum에서 진천농다리 카페도 운영하고 있는 분임을 알았습니다.
농다리와 관련하여 제가 하는 일과 임영은 회장님이 하는 일의 내용은 달랐지만, 뜻과 목표는 하나이기에 남과 북의 이산가족이 만난 것처럼, 얼마나 기뻤던지 우리 서로의 그때 기분은 천군만마(千軍萬馬)를 얻은 양 무척 기뻤고 엄청난 힘이 솟았습니다.
그 동안 제가 공부한 모든 자료를 임영은 회장에게 모두 e-메일을 통해 알려주어 함께 共有하게 되었고 최근에도 새로운 자료를 알게 되면 모두 임영은 회장님께 보내드려 함께 하고 있습니다.
농다리 보존회 및 지킴이 회가 더욱 활성화되어 지금까지 임영은 회장님의 주도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임영은님이 주도하는 진천 농다리 보존회 회원들이 J교수님을 찾아뵙고 농다리 축조와 관련된 많은 의견 교환도 하였으며 농다리 축조 자 및 축조시기에 관하여 진천군청 담당자와 농다리 보존회, 농다리 지킴이회가 모두 문서로 합의하고 “高麗初 林將軍 築造”로 史書에 기록 된 대로 바르게 수정도 했습니다.
최근에 진천농다리 역사에 관하여 진천군청 홈폐지에 林衍장군 축조 설과 신라말기의 三國期 북진세력 축조 설을 병행 기록했던 것을 三國期 북진세력 축조 설을 완전 삭제하고 史書(常山誌)에 기록된 내용을 바탕으로 “高麗 初 林將軍 築造”로 수정 보완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인터넷 백과사전에도 필자가 지속적인 자료를 보낸 결과 三國期 북진세력 축조 설을 삭제하고 史書(常山誌)에 기록된 내용을 바탕으로 高麗 初 林將軍 築造로 수정했습니다.
인터넷의 자료 중 농다리와 관련된 잘못된 자료를 인터넷을 통해 고치는 작업을 현재까지도 계속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컴퓨터를 할 수 있는 그날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1996년 10월 한국으로의 휴가 중 문중 어르신들께서 鎭州人 임희(林曦) 선조에 대한 연구를 해보라는 부탁을 받고 도서관의 많은 자료를 찾아 정리하면서 평소에 모르고 있던 부분을 많이 알았습니다. 자료를 정리하고 프린트를 하여 진천임씨 문중의 어른들께 나누어 드리기도 하였습니다.
문중 어른들께서는 임희 선조가 우리 진천임씨의 시조님이며 어느 왕비의 아버지인 것만 알았지 그 외에 자세한 내용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제가 공부하면서 임희 선조님이 고려 초에 군사요충지였던 진천지방이 豪族으로 태조가 고려를 건국하는데 큰 공을 세워 건국 후 6일 만에 단행된 인사발령에서 병부령 이라는 관직으로 등용되었고 혜종의 장인으로서 의화왕후 임씨의 부친이 된다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그 당시 호족장이라면 톡목 공사의 많은 인력을 동원 할 수 있는 권력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저런 일로 진천임씨 화수회로부터 총회가 있을 때 공로패를 두 번이나 받기도 했습니다.
常山誌와 朝鮮寰輿勝覽의 자료 중 고려 초엽시대의 임씨 선조 임장군이라 함은 바로 林曦 장군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임영은 농다리 지킴이 회장님을 처음 만나고 조금 지나서 농다리 역사와 관련된 立石을 만들어 세웠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드렸고 임영은 회장님은 소용 경비를 임씨문중에서 마련하여 2005년 4월 19일에 농다리 由來碑를 建立하게 되었습니다.
유래 비에 적을 글의 초안을 작성하였고 고향의 농다리 보존회와 지킴이 회에서 수정하여 碑文으로 적어 넣기도 했습니다.
농다리 유래비가 세워지기까지는 임영은 회장님의 노고가 컸었습니다.
2002년 8월에는 제가 처음으로 진천군에 “진천 농다리 기념우표”를 만들면 좋겠다는 건의 사항을 드렸는데 2004년 9월에 실제로 2년 만에 농다리 기념우표가 발행되기도 했습니다.
정통부에서는 앞으로 5년 동안 전국의 오래된 옛 다리를 계속 시리즈 우표로 제작하겠다고 발표를 하기도 했었습니다.
현재 제가 영어와 아랍어를 동시에 사용하는 문화권에 거주하고 있는 잇점을 최대한 살려서 앞으로도 농다리와 관련하여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이 있습니다. 계획대로 하나하나 실천에 옮길 것입니다.
농다리 관련 공부를 하면서 도서관의 古書室에서 어쩌다 자료를 하나 찾게 되면 漢文을 읽는 것이 여간 어려웠던 것이 아닙니다. 워낙 한문도 몰랐지만 28년째 해외 생활을 하며 그나마 알고 있던 한문도 모두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농다리 공부를 하고는 늘 옥편과 씨름을 해야 했고 인터넷 옥편을 많이 이용해야했습니다. 이제는 어느 정도 한문 해독을 할 수 있을 정도까지 되었습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것을 직접 체험을 한 셈이지요.
서울대학교의 규장각(奎章閣)에 자료를 찾으러 갔을 때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자료를 찾는다는 욕심 하나로 그곳에 무작정 갔었지만 그곳이 어떤 곳인지를 미리 알았더라면 갈려고 꿈도 갖지를 못했을 것입니다.
처음 규장각 자료실에 들어서는 순간 아차! 잘못 왔구나 하는 생각부터 들었습니다.
자료를 찾고 계신 분들이 모두 머리칼이 하얗게 변한 연세가 많으신 분들로 老 敎授님들처럼 보였습니다.
司書들 외에 젊은 사람은 저 뿐이었었기 때문 자료를 찾는 동안 그분들에게 혹 방해가 되지나 않을까 얼마나 조심스러웠는지…….
참 중요한 경험을 했었습니다.
그 후로도 꼭 찾고 싶은 자료가 있어 한 번 더 갔다 왔습니다.
천여 년 동안의 시공을 초월한 공부를 하다 보니 때로는 제가 高麗 초엽시대의 사람이 되기도 하여 그 문화의 한가운데 서 있는 느낌도 들었고, 농다리 축조 현장의 일꾼으로 작업하는 착각도 하고, 그때 그 당시 사람으로 농다리 축조와 관련된 기록을 하고 있다는 환시(幻視)를 여러 차래 느끼기도 했습니다.
정령(精靈), 저는 농다리에 모든 것을 건 미친 사람임에 틀림없다고 저는 저 자신을 스스로를 진단합니다.
농다리를 공부하다보니 진천 지방의 전체적인 문화재에도 관심을 같게 되어, 최근에는 인터넷으로 찾아 보기도하며 저의 엠파스 “진천 농다리(籠橋)” 불로그에 다른 분들과 함께 하고 싶어 “진천 지역 문화재”라는 테마를 만들어 자료를 올리기도 합니다.
오래간만에 한국으로의 휴가를 가면 다음날부터 도서관에를, 아니면 진천 임씨와 관련된 유적지(강화 고려궁지, 진천 대모산성, 초평 두타산 산성, 농다리…….)를 탐방하니 가족들이 좋아할 리 없었지만 가족들 모두 아빠가 뜻 깊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 해주어 고마웠고 늘 아이들 앞에서 공부하며 노력하는 아빠로서의 모습을 보인 것이 원인이었던지 모두 공부를 잘 합니다.
늘 책을 읽고 쓰고 하다 보니 문장력이 남보다 뛰어난지 쿠웨이트 한인회의 중요한 문서 작성, 감사패 내용 작성, 한인회의 각종 추천서 작성 등을 부탁해와 봉사하기를 지금까지도 합니다.
남들은 골프 치며 즐길 시간에도 저는 인터넷 앞에서 자료를 찾는 것으로 즐거움을 대신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남들보다 인터넷을 잘한다는 소리도 일찍 들어 고장 난 컴퓨터를 보아달라고 부탁 하는 이가 많아지기도 했습니다.
항상 일반 전화선은 인터넷이 연결되어 있으므로 쿠웨이트에서의 모든 통신 수단은 오로지 사용 요금은 비싸지만 핸드폰이 유일한 길이기에 한 달 핸드폰 사용료가 꽤 많다는 사실입니다.
직장에서는 늘 한국인 Mr. IM은 공부하는 책을 많이 읽는 동료로 알려지고 있기도 해서 진천 농다리와 관련하여 공부 하는 것이 저의 생활 전체에 긍정적인 영향을 많이 미치기도 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쿠웨이트에서 임충섭 드림
첫댓글 문화재청에 메일을 주고받아 교분이 있는 분이 '문화재 지킴이 활동사항 공모'가 있다고 여러 차래 권유를 했지만 응모를 하지 않았습니다.
해외에서 문화재에 관심을 갖고 있는 자체가 많은 분들에게 귀감이 된다며 간청을 하기에 몇 일전에 마음의 결정을 하고 적어보았습니다.
추천이 되면 상금과 함께 문화재청 자료집에 기록된다고 합니다. 전국적으로 수없이 많은 문화재 지킴이가 있으므로 기대는 않습니다.
분명 좋은 결과 있을겁니다. 작은 아버님의 노력이 보통인들과는 사뭇 다르거든요. 더구나 외국에 근무하시며 거의 모든 시간을 내 놓으셨으니까요. 문화재청에서 권유하신 분도 그것을 알고 또 그 만한 점수(?)에 미칠 수 있겠다 싶으니 그리 했을겁니다. 좋은 결과 있도록 기도할께요.
정영호 교수님과 관련된 학술적인 내용은 피했으면 좋겠다는 문홰청의 요구가 있어 되도록 피하다보니 핵심적인 내용이 빠저서 좀 싱겁게 밉밋하게 느껴지지만 최선을 다해 적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