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커피전문점 신메뉴 같은 이름 '에스피오나지(espionage)'는 프랑스어에서 수입한 영단어입니다. 뜻은 첩보 활동 또는 스파이 행위. 그러니까, 스파이의 첩보 활동을 다룬 영화를 에스피오나지 장르라 부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흔히 스파이 영화나 첩보물이라 부르는 장르와는 뭐가 다를까요? 괜히 유식한 척 하려고 어려운 말만 골라 쓰는 거 아니냐는 의구심이 들 수도 있겠습니다만, 실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스파이가 등장하는 영화들을 크게 두 부류로 나눈다면 '007 시리즈'나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처럼 어느 정도는 판타지가 가미된 첩보 활극과, 신분을 감추고 활동해야 하는 스파이의 고충을 현실적으로 다루는 영화들로 정리할 수 있을 텐데요. 넓은 의미에서는 이 두 종류 모두를 퉁쳐서 에스피오나지 장르라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에스피오나지 영화라고 하면 후자의 좁은 의미, 즉 리얼한 스타일의 스파이물을 주로 가리킵니다. 요컨대 흔히 말하는 스파이 영화와 에스피오나지 영화의 차이는, '스파이'와 '간첩'이 주는 뉘앙스 차이에 가깝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넓은 의미에서의 첩보 영화는 1차 세계대전 무렵부터 동서진영 안 가리고 제작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첩보 영화들이 쏟아져 나오고 에스피오나지 장르가 분화된 시기는 1950년 이후 냉전시대부터입니다. 1962년 [007 살인 번호]가 발표되면서 첩보 영화의 황금기가 열렸는데요. 그로부터 3년 후, 제임스 본드에게 딴지를 거는 영화 한 편이 등장하여 첩보 장르에 새 바람을 불러일으킵니다. 바로 마틴 리트 감독의 [추운 곳에서 온 스파이]인데요. 존 르 카레의 소설을 각색한 이 영화는 홍보 카피에서부터 "제임스 본드는 잊어라!"는 문구를 내세웠을 만큼 007 시리즈 특유의 영웅주의와 낭만주의를 정면으로 배격했습니다.
동독에 잠입하여 적국의 거물을 제거해야 하는 영국 이중첩자의 이야기인 이 영화 [추운 곳에서 온 스파이]에는 눈을 끄는 화려한 액션도 없고 첨단 장비의 향연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다만 속이고 속여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만 하는 스파이들의 피도 눈물도 없는 공작과 술수만이 이어지죠. 로맨스가 등장하긴 합니다만 어디까지나 절박함 속에서 갈구한 비극적인 사랑이지, 보이는 족족 미녀를 후리고 다니는 제임스 본드의 낭만주의와는 거리가 멉니다. 그리고 이렇게 인간으로서의 스파이에 초점을 맞춘 영화는 '체제나 이념 같은 거 다 필요없고, 개인이 장땡이다'는 주제의식으로 나아갑니다. 전체적으로 어둡고 모호한 스타일로 40년대 누아르 필름들의 영향 또한 강하게 보여준 이 영화는 에스피오나지 장르의 교과서로 불리고 있습니다.
이후 에스피오나지 장르는 80년대 말 공산권 국가들이 몰락하기 전까지 판타지 첩보물과 함께 스파이 영화의 한 축으로 굳건히 자리하게 됩니다. 영국의 정보요원이 작전수행 중 국제 무기밀매상에게 아이를 납치당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편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는 돈 시겔 감독의 영화 [블랙 윈드밀]이나, 평범한 물리학자가 해외 출장 중 스파이들의 첩보전에 휘말리는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찢어진 커튼], 철없는 두 청년이 CIA의 기밀을 KGB에 팔아 돈 좀 만지려다가 양쪽 모두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는 존 슐레진저 감독의 [위험한 장난] 등이 이 시기 에스피오나지 영화들의 대표작들로 꼽힙니다.
베를린 장벽까지 무너진 1990년 이후부터 에스피오나지 장르는 당연하게도 퇴조의 길을 걷게 됩니다. 하지만 에스피오나지의 스타일과 자양분은 놀랍게도 판타지 첩보물에 고스란히 흡수되는데요. 냉전시대의 종결과 함께 적들이 사라졌고, 그것은 스파이 활극의 위기로도 이어질 뻔했습니다. 그러나 보이는 적들이 사라진 대신 내부의 적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여, 어느덧 스파이들은 나라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생존을 위해 싸우게 되죠.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이 부활시킨 냉전시대 인기 TV 시리즈 [미션 임파서블]이나 [본 아이덴티티]를 필두로 한 제이슨 본 시리즈 등에는 이러한 에스피오나지 장르의 색채가 많이 녹아 있습니다. 심지어 최근에 발표된 두 편의 007 시리즈 [카지노 로얄]과 [퀀텀 오브 솔라스]에도 에스피오나지 스타일이 강하게 묻어나오는 걸 보면 세상이 참 많이 바뀌긴 한 모양입니다.
세상이 제아무리 바뀌었어도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냉전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90년대 이후 에스피오나지 성향의 영화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간첩을 소재로 한 영화나 드라마들은 그 전에도 숱하게 제작되었습니다만, 반공을 국시로 삼았던 만큼 남한 체제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내용을 담지 않으면 안 되었으니까요. 국경에서 한 첩자가 살해되는 장면부터 [추운 곳에서 온 스파이]를 연상시키는 한석규, 고소영 주연의 정통 에스피오나지 영화 [이중간첩](2002)이나 최근 개봉한 송강호, 강동원 주연의 [의형제] 등을 이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겠습니다.
르누아르의 [특별석 La Loge](The Theatre Bo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