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형상
<에베소서 2:10>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준비하신 것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면서 살아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칸트는 어렵지만, 이율배반이라는 개념은 더 어려워 보인다. 이 이율배반은 칸트의 비판철학을 따라다니는 근본적인 문제다. 다시 말해서 이율배반은 순수 이성에도 있고, 실천이성에도 있고, 판단력에도 있다. 이율배반은 인간의 사유에는 극과 극이 만나는 일이 항상 일어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세계는 무한하다고도 할 수 있고 유한하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둘 다 증명할 수 없는 주장이다. 또 실천이성의 이율배반에서 우리는 덕을 도야하는 데 그 이유는 행복을 위해서다. 하지만 덕을 도야하는 과정은 고통스럽기 때문에 결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다. 또 어떤 예술작품을 평가할 때, 우리는 모든 표현 요소들이 완벽한 조화를 느낄 때 그것을 훌륭한 작품이라고 평가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어떤 요소가 그 조화를 깨뜨릴 때도 미학적 쾌락을 느낀다.
이런 모순은 왜 발생하는가? 칸트는 이성의 한계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즉 주관성의 형식은 물 자체의 객관성이 존재하는 방식과 별개이기 때문에 주관은 결코 객관과 일치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렇게 칸트가 주관과 객관을 영원히 분리해 놓았기 때문에 철학은 코페르니쿠스적으로 전환된다. 칸트 이전의 철학적 관심은 존재론이었다. 즉 객관적 세계가 어떻게 존재하는가를 물었다. 물론 칸트 이전에도 객관적 세계를 인식하는 이성의 능력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세계, 즉 현상이 진짜 세계, 즉 본질과는 다르다고 생각했지만, 바로 이 문제 때문에 철학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이성적 훈련과 조밀한 논리를 통해서 본질에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형이상학이다. 형, 즉 보이는 세계 이상의 본질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칸트는 현상과 본질 사이에 불가능성이라는 빗장을 질러버렸다. 이제 철학은 더 이상 본질에 관해 말하는 게 아니라 주관성의 형식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주관성이라는 기계, 또는 렌즈가 어떻게 생겼길래 우리에게 세계는 그것을 거쳐 우리가 보는 것처럼 나타나는 것일까? 이제 철학의 관심은 인식론이 된 것이다.
하지만 칸트의 직속 후배들은 주관과 객관의 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이를 다시 이어 붙이려 했다. 피히테, 셸링, 헤겔이 그들이다. 칸트 이후 헤겔까지 불과 몇십년 사이에 이루어진 사유의 모험은 인류 정신사에서 가장 위대한 성취를 이룬다. 이를 독일 관념론이라고 한다. 보통 칸트가 분리해 놓은 것을 헤겔이 종합했다고 말한다. 독일 관념론은 과연 헤겔에게서 완성된다. 그런데 헤겔의 종합은 분명 주관과 객관을 다시 연결시켰다. 그래서 형이상학으로 복귀했으며, 따라서 헤겔을 마지막 형이상학자라고 빈정대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헤겔의 철학을 형이상학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칸트 이전의 형이상학과는 완전히 다르다. 사실 정확히 말하면 칸트는 물론 피히테와 셸링까지 형이상학적인 전제를 공유하고 있었다. 그 전제는 바로 객관의 세계는 무한하고 완전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이성은 한계가 있고 불완전해서 그것을 충분히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이다.
헤겔의 혁명은 이를 완전히 뒤집은 것이다. 아니 반만 뒤집은 것일까? 아무튼 주관과 객관의 종합을 실현한다. 헤겔은 인간의 인식력의 한계, 즉 주체의 한계를 대상 세계, 즉 물 자체의 한계로 이전시킨다. 오성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신학의 예를 들면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신을 계시하지만 다 드러낼 수는 없는데, 그 이유는 인간의 인식하는 능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조심해야 한다. 단순히 주체와 대상의 속성이 뒤바뀌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인간의 인식력은 완전하고 하나님이 모자란다는 것이 아니다. 알고자 하는 대상이 알고자 하는 주체와 더불어 라캉의 용어로 말하면 비전체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헤겔은 이를 절대적인 되튐이라는 단 한 번 사용한 개념으로 말했다. 이 말을 풀어보면 세계는 주체와 더불어 총체화할 수 없는 것, 균형과 조화 속에 있는 완전한 객체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며, 주체는 이런 대상과 더불어 분열된, 빗금 쳐진 방식으로 밖에는 존재할 수 없는 그런 것이 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게 헤겔의 종합이다. 헤겔의 종합은 결코 조화로운 전체를 상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헤겔의 종합은 주체나 대상 모두 깨진 상태에 도달한다. 이것이 헤겔의 형이상학이 중세 형이상학과 완전히 다른 전혀 새로운 종합인 이유다.
이는 유대-기독교 창조론의 한 축인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창세기 1:26 이하)이라는 주제에 새로운 빛을 던진다. 실례를 들어 보자. 우연히 보게 된 왓챠 드라마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의 리뷰에서 인상적인 장면을 만났다. 성격이 맞지 않아 오래 별거하다 이혼하려 한 중년의 부부(한석규, 김서형)가 전기를 맞는다. 함께 찾은 병원에서 아내가 말기 암 상태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남편에게 간병을 부탁한다. 만나면 싸웠지만 여전히 깊이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3 입시생인 아들은 갑자기 가까이 다가온 아버지가 불편하다. 하지만 한석규의 정성스런 치료식에도 불구하고 김서형의 병세는 깊어만 가고 아내는 결국 음식을 입에 댈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어느 날 절망한 한석규가 병원 뜰 벤치에 앉아 오열할 때 그동안 가까워진 아들이 다가온다. 아들은 그동안 대학생이 됐다. 아버지 옆에 앉은 아들은 자책한다. 엄마랑 함께 지내면서도 자기 생각만 하고 살았다고, 자기가 너무 이기적인 것 같다고.... 아들의 자책을 묵묵히 듣던 아버지는 조용히 말한다.
“나 닮아서 그래.”
이것이 지젝이 말하는 헤겔-라캉의 신학이다. ‘헤겔-라캉’이란 헤겔이 본 라캉이자 라캉이 본 헤겔이다. 여기서 헤겔의 종합은 총체화가 아니라 라캉의 비전체가 된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헤겔의 총체화는 결여(무)까지 포함하게 된다. 이는 신학적 의미의 구원 혹은 화해이기도 하다. 지젝은 이를 '아래로의 종합'이라고 한다. 지양(止揚, auf-heben)이 아니라 지락(止落, nieder-heben)이라고 할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창세기의 주장은 더 이상 하나님은 완전한데 왜 인간은 그렇지 못하냐는 추궁을 위한 근거가 되지 못한다. 오히려 인간의 한계는 하나님 스스로 완전을 버리고 한계를 떠맡는 행위, 하나님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온 구원 행위의 근거가 된다. 그 행위는 십자가에서 절정을 이룬다. 하나님은 인간의 결정적인 한계인 죽음에 참여한다. 여기서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의 완전에 대해 말할 수 없다. 아니 하나님의 완전은 결여를 포함함으로써 비로소 그 적절한 개념을 획득한다. 적어도 기독교에서 "하나님의 능력은 약한데서 완전하게 된다."(고린도후서12:9)
그렇게 하나님이 주도하는 화해가 완성된다. 그리고 이 화해를 통해 인간은 하나님과 한계를 공유하지만, 이제 이 한계, 불가능성, 죄의 의미가 새로운 차원으로 열린다. 한계는 우리의 절망에 어떤 정당한 근거도 주지 못하는데, 하나님이 자신의 한계를 통해 인간의 한계를 창조와 가능성의 원천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한계는 바로 이 한계를 극복하는 출발점이지 마침내 도달할 수밖에 없는 끝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끝은 하나님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불확실성으로 열려 있다.
그래서 바울 계열의 저자는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준비하신 것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면서 살아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엡2:10).
수난주간이 절정을 향해 가고 있다. 이 회색빛 시간은 곧 암흑의 절정을 맞을 것이다. 하지만 암흑은 모든 빛깔의 서식지다.
첫댓글 익숙하지 않는 단어와 표현, 역시 철학은 어렵습니다. 목사님의 정성스럽게 올린 말씀 감사히 여러번 읽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시니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