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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통춤의 분류와 유형, 지역적 분포
1. 춤의 분류
1) 개요
2) 기능상 분류
3) 직능상 분류
4) 예술학적 분류
5) 사회과학적 분류
2. 춤의 유형
1) 종교 의식 춤
2) 민속춤
3) 교방 춤
4) 궁중 정재 춤
3. 지역적 분포
1) 개요
2) 풍토적 조건
3) 역사와 풍속적 조건
4) 사회 환경적 조건
1. 춤의 분류
1) 개요
서양에서는 오락 춤을 지칭할 때 귀족들이 추는 춤은 사교춤이라 하고 농민들의 춤이라 할 수 있는 민중적인 집단 춤은 민속춤이라는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다. 또한 일본에서도 춤을 분류할 때 의식 무용이나 예능인들이 추는 춤은 민속춤이라 하지 않고 전자를 종교 의식 춤이라 하고 후자는 오사시키부요(藝者라는 기녀가 추는 춤이다)라 구분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의식 춤과 예능 춤과 민속춤이 구분되지 못하고 있다. 의식 춤인 무당춤이나 불교 춤도 민속춤으로 통용되고 있으며, 예인들이 추어 온 살풀이춤이나 승무, 태평무와 같은 춤도 민속춤에 포함되어 있다. 물론 우리 춤을 크게 분류해 보면 음악에서 정악(正樂), 속악(俗樂), 아악(雅樂)과 민속악(民俗樂)으로 나누듯이 전통적인 춤도 궁정 무용과 민간 무용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춤의 학문적 체계상 좀더 세분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가령 무당춤의 경우 굿판에 모인 사람들은 민중이지만 춤추는 사람이 주로 무당이고 춤추는 목적도 종교 의식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의식 무용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 춤의 경우에도 재식(齋式)에 참가한 사람들은 서민 대중이지만 춤추는 사람은 승려들이고 종교적 의식을 목적으로 추기 때문에 이 춤 또한 의식 무용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교방 춤인 살풀이춤이나 승무, 태평무와 같은 춤을 구경하는 사람들은 일반 대중이지만 춤추는 사람은 직업적 춤꾼이다. 또한 개인적 미의식에서 창조된 공연 예술적 성격을 띤 춤이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서 예능적인 공연 무용이라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우리 춤은 대부분이 총체적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춤을 분류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춤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춤의 분류가 선행되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나라 전통적인 무용의 분류는 기능상의 분류법을 위시하여 직능상의 분류법, 예술학적 분류법, 사회과학적 분류법 등 네 가지로 나누어 분류해 보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생각된다.
2) 기능상 분류
기능상의 분류는 춤추는 목적과 그 춤의 사회적 기능에 따라 분류하는 방법이다.
기능상의 분류법은 크게 궁중 정재 춤, 종교 의식 춤, 민속춤, 교방 춤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렇게 분류해 본 이유는 궁중 무용의 경우 궁 안에서 왕실에 경사가 있을 때 엄한 의식 절차에 따라 춘 축제적 의식 무용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또 종교 의식 춤은 무당들이 굿을 할 때 춤추거나 승려들이 절에서 제사 지낼 때 추는 춤, 유교에서 묘제(廟祭)를 지낼 때 추는 춤 그리고 장례를 지낼 때 추는 춤 등 종교적 목적에 따라 춘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또한 민속춤은 춤추는 목적이 세시 풍속에 따라 서민들이 농사 지을 때나 마을 공동 제사를 지낼 때, 또는 명절날에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 축제를 벌이는 등 춤이 생활과 결부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마을의 공동체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 비하여 광대, 창우, 기녀들이 추는 교방 춤의 경우 이 춤을 향유한 계층은 양반 또는 일반 서민층이지만 표현한 사람들은 예술가이다. 또한 춤추는 목적이 예술성을 관객에게 보여 주는 공연 무용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기능상의 분류법을 좀더 세밀하게 분석해 보면 궁중 정재 춤의 경우 당악 정재와 향악 정재로 나누어지고, 종교 의식 춤은 무속 춤의 경우 강신 무당이 추는 신무(神舞)와 세습 무당이 추는 축원무로 나누어진다. 또한 불교 춤은 나비춤(고기 춤), 타주 춤, 법고춤, 바라춤으로 나누어지고, 유교 무용은 문무(文舞)와 무무(武舞)로 나누어진다. 그리고 장례 춤은 다시래기, 방상씨 춤, 희다지 춤으로 나누어진다.
민속춤의 경우 대동 춤의 성격을 가진 춤으로 농악 춤, 탈춤, 소리 춤으로 나누고 개인적 장기 춤으로 허튼춤과 사람을 풍자한 병신춤과 동물을 모의한 춤으로 나눈다. 이어서 교방 춤은 살풀이춤을 비롯하여 승무, 태평무, 검무, 한량 춤, 남무와 같은 춤으로 나누어진다.
3) 직능상 분류
전통적인 우리 춤은 춤추는 사람들의 신분이나 직업(직업인과 반직업인)에 따라 춤의 성격이 달라진다. 그러므로 이러한 성격을 분명히 하기 위한 것이 직능상의 분류법이다. 이러한 분류법은 종교인들이 추는 춤으로 무속 춤과 불교 춤을 들 수가 있고, 민중적인 무용으로는 농악, 탈춤, 소리 춤과 같은 집단 무용과 서민들의 개인 장기 무용 등이 있다. 또한 예술인들이 추는 무용은 마당 판에서 추는 탈춤, 전정(殿庭)판에서 추는 정재 춤과 일무 등이 있고 마루판에서 추는 창우, 기생들의 무용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춤들은 그 성격이 어떻게 다른가 하는 점이다. 종교인의 무용에서 무속 춤은 그 춤이 강신 무당의 것인 경우 춤이 신과 접신하기 위한 춤, 접신이 되어 신령이 몸에 스며들면 신체가 되어 가지각색의 주술적인 신 놀이 춤을 추고 마지막에는 예언을 하거나 사람들에게 복을 주는 춤을 춘다. 따라서 강신 무당이 추는 춤은 사람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권력자로서의 수직적인 춤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반하여 세습 무당이 추는 춤은 신들릴 수가 없는 무당이기에 신을 맞이하여 신을 즐겁게 하고 신의 뜻을 사람들에 전달하는 축원적인 춤으로 일관한다. 따라서 이러한 춤은 신을 향하여 신을 즐겁게 하는 춤이 주종을 이룬다.
승려들의 춤은 일차적으로 부처님께 공양드리는 것이 목적이고 나아가서는 자기들 스스로의 수양은 물론 대중이 보살이 되게 하는 포교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민중이 추는 집단 무용과 개인 장기의 춤들을 춤의 편성에 있어서 집단 개념을 갖는다. 여기서 집단 개념이란 다수라는 개념과 협동이라는 개념을 포함하고 있어서 집단 형식의 춤이 아니라 개인 형식의 춤이라 하더라도 집단적 조직 속에서 한 사람이 추는 형식일 경우도 집단 개념의 춤에 포함시킬 수 있다. 또한 민중의 춤은 개인적 사고보다는 온 겨레가 창조한 춤이기 때문에 춤의 창작자는 개인이 아니라 다수이며 따라서 그들의 미의식에서 나온 공동 창작 춤이라 할 수 있다.
다음 마당 판에서 추는 광대 춤이나, 전정(殿庭)판에서 추는 교방기(敎坊妓)의 춤, 마루판에서 추는 창우, 기녀의 춤 등을 막론하고 이들 예술인의 춤은 한결 예술적이고 직업성과 전문성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
4) 예술학적 분류
종교 의식 춤과 민속춤 그리고 교방 춤과 궁중 무용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춤추는 목적과 사회적 기능이 각각 다르다. 그러나 이들 무용을 살펴보면 나름대로 춤에 따라 예술성을 가지고 있다. 가령 무속 춤, 유교 무용과 같은 종교 의식 춤과 농악, 탈춤과 같은 민속춤 그리고 궁중 무용과 교방 춤과 같은 춤이 그 예가 되겠다. 따라서 예술학적 분류법으로 이들 춤을 보면 종교적 예술 무용, 민속적 예술 무용, 고전적 예술 무용으로 해석할 수 있다.
5) 사회과학적 분류
우리나라 춤은 향유하는 계층에 따라 춤에 담겨 있는 정신과 심성이 다르다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지배 계층인 양반들이 향유한 춤들은 그 지배 질서의 유지나 권위의 과시를 위한 이념적인 춤인 데 반해 서민 계층의 춤들은 공동체적 대동 춤인 동시에 갈등 해소를 위한 풍자적인 춤이다. 그러나 이러한 양 계층의 대립적인 성격이나 기능이 다른 춤을 예능인의 미의식에서 재창조한 춤도 있는 것이다.
서민들은 고된 일과 양반들의 횡포에 시달리며 살고 있어서 이러한 한을 풀기 위해서 사람들이 모이면 노래와 춤을 추었다. 따라서 서민들은 춤추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직접 춤을 춘다. 남성들은 농악 판이나 탈판을 벌여 춤추고 여성들은 강강술래 판을 벌여 춤을 춘다. 양반들의 횡포를 비판하거나 풍자하는 춤을 추기도 하고, 맺힌 한을 풀고 단합하기 위해 춤을 춘다.
그러나 양반들이 향유한 춤들은 자기들 스스로가 추는 것이 아니라 국가 이념이나 통치 수단으로 어떠한 의식을 베풀고 거리에서 추는 춤을 즐기는 춤이다. 따라서 서민 대중의 춤은 직접 추는 것인 데 비하여 양반들이 향유한 춤들은 직접 추지 않고 지켜보는 춤이다. 그런데 광대, 창우, 기녀 집단들이 추는 춤은 서민 대중의 흥겹고 멋들어진 춤과 양반 계층이 향유한 화려하고도 우아한 춤의 특징을 융합시켜 예술적인 민족 무용을 형성한 것이다.
2. 춤의 유형
1) 종교 의식 춤
아무래도 종교는 세상의 관심이 되는 점에서는 가장 오래 된 것이고 동시에 가장 새로운 과제로서 부담을 가지고 있다 하겠다. 과학이 고도로 발달한 오늘날에 있어서도 종교로 인하여 여러 가지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어서 극히 심각한 문제를 던지고 있다. 이는 종교가 불가사의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삶을 중단하지 않는 한 종교도 영원히 소멸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종교를 해명하기 위해서 여러 방면에서 연구해 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여전히 그 본질은 신비에 싸여 있다. 인간은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신이 될 수 없으므로 종교는 영원히 본질을 잡을 수 없는 괴물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종교가 인간과 직접 접촉하게 되는 것은 구체적인 생활 영역에서이다. 돌연히 생긴 재해와 질병 때문에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게 되므로 하루 빨리 회복을 빌고 또한 일상생활에서 신의 노여움을 풀어 줌으로써 신변의 안정을 꾀한다.
사람들은 이렇게 생활 속에서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초자연적인 존재, 신의 힘을 실감하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들에게는 종교가 필요했고, 그 종교는 인간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온 것이다.
우리나라 춤 중에서 민간 신앙과 관련을 가지고 있는 춤은 민속춤이다. 특히 농악은 조령숭배(祖靈崇拜) 신앙, 삼신 신앙, 성주 신앙, 조왕 신앙, 터주 신앙, 칙간 귀신[則神] 신앙, 수문신(守門神) 신앙 등과 관계가 깊다. 특히 가신(家神) 신앙은 정월 보름날 농악대 등이 가가호호를 다니면서 집돌이를 할 때 제물을 차려 노래와 춤으로 신을 대접하고 집안의 무사를 축원한다.
또한 부락제와도 춤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부락제의 신은 산신(山神), 동신(洞神), 성황신(城隍神)이 가장 많다. 부락제의 형태는 은산 별신제, 강릉 단오제, 경기도 도당 굿, 경상도 지방의 별신굿, 전라도 지방의 당굿 등이 대표적인 제사이다. 이러한 제사는 신성(神聖) 기간 설정이라는 기능, 공동체적 기능, 정치적 기능, 축제적 기능 등을 가지고 있다. 예컨대 첫째는 신성 기간을 설정하여 마을을 깨끗이 함으로서 신 앞에서 심신을 정화하여 새해 새 출발을 하는 것이고, 둘째는 화목과 담합이다. 셋째는 제의(祭儀) 후에 마을 유지나 노인 등은 음주하고 화목한 가운데 마을 일을 의논한다. 넷째는 축제적 기능이다. 제의와 음복(飮福)이 끝나면 난장이 되어 가무하는 가운데 서로 기쁨을 나눈다.
그런데 이러한 마을 제사에서는 무당들이 굿을 벌여 가무하기도 하고 농악이나 탈춤을 추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한 종교 의식 춤은 원시적이고 소박한 민간 신앙적 차원을 넘어서 좀더 종교 의식으로서 체계적이고 형식화되어 있는 춤을 말한다. 즉 무속 의식 춤, 불교 의식 춤, 유교 의식 춤, 장례 의식 춤이 그것이다.
이러한 춤들은 넓은 의미에서 볼 때 민속 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민속춤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좁은 의미에서 볼 때 민속춤의 본질은 민중이 참여하여 직접 춤추는 것인데 반하여 종교 의식 춤은 무속 춤인 경우 무당이 춤추고, 불교 춤은 승려들이 추며 유교의 춤은 궁중 예인들이 추었다. 또한 불교 춤은 상두꾼이나 무가(巫家) 사람들이 춘 것이다. 따라서 종교 의식 춤은 민중의 춤이 아니고 특정한 종교 예인들의 춤이다. 또한 그 춤이 민속춤과는 달리 종교 의식이라는 전문성과 직업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춤의 분류법과 춤의 개념 설정을 위해 구분한 것이다.
종교 의식 춤에서 가장 대중성을 띤 춤은 무속 춤과 불교 춤이다. 그 이유는 이 춤의 향유 층이 서민 대중이기에 그러하고 유교 춤은 양반 계층이 향유한 춤이기에 대중성이 없다.
따라서 대중 종교 춤은 신에 축원하는 춤 이외에도 예술을 통한 포교적 목적과 관중이 축복을 주는 춤을 위주로 추고 있으며 양반들의 유교 춤은 유교의 이념을 바탕으로 하여 예악(禮樂)적 의식을 통해서 나라를 다스리는 이념적 의미를 가진 춤이라 할 수 있다.
2) 민속춤
민속춤이란 한마디로 말해서 민족의 기층문화의 한 영역을 차지하는 예능이라고 말할 수 있다. 기층이란 밑바탕, 원초적인 것 또는 근원적인 것을 의미하므로 이러한 문화에서 잉태된 민속춤은 민족 문화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민속춤은 역사성과 전통성을 떠나서는 이해될 수 없고, 그로부터 단절되어 지속성을 지니지 못하거나 민족 문화로서의 고유성을 잃게 되면 민속춤으로서의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따라서 민속춤은 살아 꿈틀거려야 하며 문화 일반의 형성과 발전 또는 변모에 깊은 영향력을 미치는 모태이자 생성 기반이 된다.
우리 춤에서는 춤을 향유하는 층이나 춤추는 사람, 춤추는 목적과 기능에 따라 춤의 명칭도 달라진다. 예컨대 지배 계층인 양반들에 의해 향유되던 춤에는 궁중 정재, 유교의식에서 춘 일무(佾舞) 그리고 창우(倡優) 등을 시켜서 즐기던 교방 춤과 같은 것들이 포함된다. 평민 계층, 특히 부녀 계층이 향유한 춤에는 무속 춤이나 불교 의식 춤과 같은 신직자(神職者)의 춤이 있다. 이와 같이 춤의 개념은 향유 방식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
그렇다면 민속춤은 어떤 계층에 의해 어떠한 향유 방식으로 이어 내려온 춤이며 그 실체는 무엇일까?
민속춤을 향유해 온 계층은 농민, 어민, 상인과 천민 등 소위 피지배 계층인 서민 대중이었으며 향유 방식은 감상하는 것보다는 직접 참여하여 춤추는 것이었다. 우선 민속춤은 춤의 편성에 있어서 집단 개념을 갖는다. 여기서 집단 개념이란 다수라는 개념과 협동이라는 개념을 포함하고 있어서 집단 형식의 춤이 아니라 개인 형식의 춤이라 하더라도 집단적 조직 속에서 한 사람이 추는 형식일 경우도 집단 개념의 춤에 포함시킬 수 있다.
다음으로 민속춤의 표현 형식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민속춤은 개인적 사고보다는 온 겨레가 오랫동안 생각해서 창조한 춤이기 때문에 춤의 창작자는 개인이 아니라 다수이며 따라서 그들의 미의식에서 나온 공동 창작 춤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민속춤은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소멸되지 않고 민중에게 공감을 주는 춤이 된 것이다. 따라서 민속춤은 누구의 강요에 의하거나 명령에 의해서 추는 춤이 아니라 스스로 참여하는 춤인 것이다.
그런데 민속춤은 그 고유성이 지속되는 경우도 있지만 춤에 따라서 변모하는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면 종교 의식성이 있는 춤인 경우 원초적으로는 무속에 바탕 하나 시대에 따라 불교나 유교와 습합되어 변천하기도 한다. 연희적인 면에서 볼 때, 주술적인 춤에서 전투적인 춤, 오락적인 춤 또는 예술적인 춤으로 변천하는 수도 있다. 또한 우리나라 탈춤이나 일무, 궁중 정재무와 같이 중국 춤과 융합하여 오늘의 우리 춤이 된 것도 있다. 따라서 민속춤은 고유성과 외래성이 융합되면서 더욱 좋은 춤이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현존하고 있는 민속춤의 전통성 해명에 있어서 유의해야 할 점은 시대성이다. 우리에게는 과거에 민속 문화의 단절기가 있었고, 또 현대에 와서는 외래문화에 밀려 민속춤이 사라져 가는 위기에 처해 있거나 지나치게 왜곡되는 현상이 빚어짐으로써 우리 춤의 전통성 해명에 있어서 시간적 지속성이 문제가 되고 있다. 가령 어느 시기의 춤까지를 전통적 원형성이 있는 춤이라고 볼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는데, 1910년까지를 전통 문화 시대로 설정한 임동권의 견해를 참고할 수 있다.
이 시기에는 실학사상이 등장하였으며 기독교와 같은 외래 종교가 들어왔으나 우리 사회나 생활에 근본적으로 변화를 일으키지 못한 것은 그것이 전통적인 생활과 의식에 의해서 봉건 사회가 유지되어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대의 민중적인 춤은 민속춤으로서의 전통성이 인정된다.
그러나 고려조나 조선조의 춤이라 할지라도 민중 문화로서의 문화적 역할을 담당하지 않고 어느 특수 사회나 한 개인의 춤이 된 경우 민속춤으로서의 특징을 상실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외래의 것이 혼합되었다 하더라도 전통적 원형을 바탕으로 하면서 보편화되어 민중의 생활 속에서 전래한다 하면 민속춤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최상진이 서양인은 개인을 출발점으로 하는 인간성인 데 비해 한국인은 우리와 자신의 관계로 인간성을 인식한다고 말하고 있듯이 한국의 민속춤은ꡐ우리 춤’으로서의 특징을 지닌다.
민속춤이라 하면 어디까지나 일국일민족(一國一民族)의 춤을 대상으로 하는 호칭이다.
민속춤의 원류는 종교적 의미와 공통체적 의미 그리고 오락과 표현적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 민속춤을 예능의 역사에서 볼 때 고대에는 주술과 종교 의식적 동작으로 춤을 추었으며 고려 시대에는 무예적인 동작으로 춤을 추었던 것이다. 또한 조선 시대의 민속춤은 농경 모의적 동작을 비롯하여 한층 오락적이면서도 예술적인 동작으로 춤춘 시대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민속춤의 대중성을 논의할 때에는 고대적 원형성 그 자체는 크게 문제시되지 않으며 다만 춤의 사회적 기능에 있어서 생활과 결부된 민중이 참여한 대동 춤이라는 점에서 변동이 없는 춤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견지에서 민속춤을 가리켜 영어로 명명할 때에는 코리안 포크 댄스라 칭하고, 민속춤의 동의어로 대동 춤, 누리 춤, 우리 춤, 마을 춤, 두레 춤, 민중 춤, 서민 춤, 대중 춤이라는 말을 곁들여서 쓰기도 한다.
3) 교방 춤
교방이라는 기관은 원래 중국 당나라 때 궁정 내에 설치된 것으로 여기서는 주로 춤과 음악을 가르쳤다. 교방은 장관사(長官使)의 감독 아래 있었으며, 박사가 기녀와 악공들에게 춤과 음악을 가르쳤는데, 여기서 학습한 기녀와 악공들은 궁정에서 베푸는 각종 연희에 나아가 무악을 상연하는 일을 맡았다. 당대에 설립된 중국 교방의 전통은 오대(吳代)를 경유하여 북송대(北宋代)에 이르러서는 연향악의 교습소로 전환되었다. 이 때에는 기녀뿐만 아니라 남녀 악공까지 교습 대상에 포함시켜 확대된 교육 기관으로 변모되었다. 북송 말에는 교방이라는 이름 대신 교악소(敎樂所)라 하여 일반인을 대상으로 악공을 모집하여 교육시켰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교방이 처음 등장한 시기는 발해 시대로 보인다. 《금사(金史)》에 따르면, 발해 멸망 이후 발해악이 송․금나라 궁중에 전승되었다. 특히 발해 교방 30여 명이 금의 교방 50여 명, 문수서(文繡署) 여공 50여 명 등과 함께 활약했다는 기록은 발해무가 금나라 궁중에서 전승되었음을 말해 준다. 여기서 발해 교방은 발해무를 담당한 무용수로 해석되며 발해 시대에 이미 춤과 음악을 전문적으로 공부하고 연행하는 일단의 무리들이 있었다고 추정된다.
발해는 옛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해마다 사람들이 모여 가무를 즐겼고, 이러한 행사의 주요 향수층은 발해를 이끌어가는 상류 지배층인 고구려 유민들이었다. 이렇게 발해에 악가무가 성행하였다는 점과 이를 전문적으로 담당한 무용수와 악공이 존재하였다는 점 그리고 궁중의 춤을 맡은 교방이 존재했음은 발해의 악무가 고구려의 전통을 물려받은 것으로 보아 교방 내지는 교방과 유사한 형태의 기관이 이미 고구려 시대에도 존재하지 않았나 추측해 볼 수 있다. 그것은 고구려의 고분 벽화에 보이는 무용도나 고구려 무용이 중국의 궁중과 귀족 사회에서 크게 애용되고 있었음이 여러 중국 문헌에 나타나고 있음으로도 알 수 있다. 그 예로써 수․당 시기의 고려악(고대의 악은 무용을 포함하는 개념이었음)은 궁정 연악(宮庭宴樂)에 포함되어 당대 유명했던 칠부기(七部伎)․구부기(九部伎)․십부기(十部伎)의 하나로 연출되었다는 점이나 당나라의 재상 양재사(楊再思)가 고려 춤에 능란하였다는 기록이나 당나라의 시인 이백이 고구려무를 찬미한 시편 등을 남겨 놓고 있어 당대(唐代)의 상류층에 고구려무가 얼마나 유행했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렇게 고구려 시대 궁중의 향연이나 귀족의 연희에 가무가 빈번히 등장하였으며 다양하고 수준 높은 예술성을 자랑한 무용이 있었다는 것은 바로 전문적인 직업 무용단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무용수를 일반적인 기녀의 성격과 동일선상에서 이해한다면 고구려 시대에 이미 춤과 음악을 전문적으로 전담하던 교방 내지는 이와 유사한 기관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 시대 무용수 배출을 위한 일단의 기관이 있었음은 거의 동시대인 신라 시대 음성서를 통해서도 짐작해 볼 수 있다. 신라 진흥왕대 설치된 음성서에는 무척(舞尺)․가척(歌尺)․금척(琴尺)․가척(茄尺) 등이 존재했는데, 여기서 척(尺)은ꡐ자이’,ꡐ장(匠)이ꡑ,ꡐ차비(差備)ꡑꡐ잡이ꡑ등으로 풀이되며 따라서 무척은 춤 잡이, 가척은 노래 잡이, 금척은 가야고 잡이 등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교방 및 이와 유사한 기관에 존속되어 가무를 담당했던 이들을 통칭하여 일반적으로 기녀라 부른다. 기녀란 전통 사회에서 제도적으로 존재했던 특수 직업여성을 이르는 말로 이들은 춤과 노래로 각종 연회에 출연하여 지배층 남성들에게 기쁨을 주는 역할을 맡았었다. 기녀는 시․서․화는 물론, 예절과 가무 등을 습득하여야 했고 이는 기녀로서의 제몫을 다하는 도구였으며 특히 가무는 기녀로 행세하기 위해 기본적으로 배워야 하는 기본 과목에 속하였다. 따라서 기녀란 지배층 남성의 전유물로서 퇴폐적이고 향락적인 존재로 사회 통념상 부정적으로 인식되어 왔다.
가무를 담당한 기녀는 고려 시대에 다양한 유형으로 나타난다. 첫째는 관에 적을 둔 기녀로서 궁중에 설치된 교방(敎坊) 소속의 교방기(敎坊妓)와 지방 관청에 적을 둔 지방기(地方妓)로 구분되었다. 둘째 관에 매이지 않고 기업(妓業)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던 사기가 있었다. 셋째, 사가(私家)에 기거하면서 관기와 마찬가지로 춤과 노래를 익혀 사대부들을 받들던 가기(家妓)가 있었다. 이외 재(才)와 색(色)과 미(美)를 갖춘 남자들이 기녀와 같은 일을 하는 남기(男妓) 등이 있었다.
고려 시대에는 교방기로 하여금 궁중의 가무를 담당케 하였는데, 현종대에 궁중 교방 궁녀가 100여 명을 헤아린다고 한 점으로 보아 이미 그 이전에 교방이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 말에는 궁중 연희의 규모와 격식이 한층 호화롭게 변모하면서 충렬왕대에는 각 지방의 무녀와 관기 중에서 색예가 뛰어난 기녀를 뽑아 궁중 교방기를 보충하였다. 교방기는 미와 재예를 겸비한 관청의 기녀와 관비 또는 무당 등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들은 여악의 담당 기관이며 교습소였던 교방을 통하여 가무를 전문적으로 습득하여 연출하는 일을 맡았다.
지방기는 교방기와 같은 관기로서 지방관에 적을 둔 기녀를 말한다. 고려 초 지방관은 가족을 동반할 수 없었는데, 이러한 여건에서 지방관을 받들고 수발한 이가 바로 지방기였다. 지방기의 주된 역할은 지방관이 타향에서의 생활에 불편함이 없도록 시중 드는 일이었으며 때로는 가무로서 지방관들을 위로하는 일이었다. 지방기 중에서 가무가 뛰어난 예기(藝妓)는 외국 사신의 접대와 국가적인 대규모의 연회에 참가해야 하는 의무가 주어지기도 하였다.
사기(私妓)란 관에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기업(妓業)을 할 수 있는 존재로 때로는 관기처럼 가무를 습득하여 나례나 사대부들이 베푸는 대소연회에 참가하여 기예를 뽐내기도 하였다. 가기(家妓)란 사가(私家)에 예속해 있으면서 관기와 마찬가지로 가무를 습득하여 주인이 베푸는 연회에 나아가 춤과 노래를 연출하였다. 고려 말 무신 정권 이후에는 사대부의 개인 연회에도 가무가 성행했는데, 사대부들은 가기를 두는 것을 상례로 여기기도 하였다. 남기(男妓)들은 기녀와 마찬가지로 궁중에 머물며 가무를 담당하였다. 고려 시대의 남기는 조선 시대에도 존속했는데 외연찬에서의 무동 정재가 바로 남기의 존재를 말해 준다.
조선 시대에는 여악 제도를 통해 고려 시대 교방의 전통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조선의 여악은 태종 6년(1406)에 설치된 의녀 제도(醫女制度)에서 비롯되었다. 내외법이 엄격했던 조선 시대 왕실과 양가의 부녀자들은 병이 나도 남의(男醫)의 진찰을 꺼려 생명을 잃는 경우가 허다했다. 따라서 여의(女醫)의 양성이 필요했으며 각 지방의 관비 중에서 똑똑한 자를 가려 뽑아 제생원에 소속시키고 글과 의술을 가르쳤다. 이들 중 특히 용모가 빼어난 자를 선출하여 가무를 학습시키고 궁중의 각종 연회에 참여하도록 하였는데, 의녀는 바로 고려 시대 관기와 다름없는 존재였다. 기녀의 교육 과정은 매우 엄격하여 15세에 기안(妓案)에 올라 가무를 학습하였으며 재주가 출중하면 서화도 익혔다. 일류 기생이 되려면 사범들에게 호된 기합을 받으며 어려운 전수 과정을 감수해야만 했고 이러한 교육 과정을 거쳐 각 지방 관아에 배치되면 기생의 우두머리격인 수행 기생에게 복종해야 했다. 조선 시대 여악의 존속에 대한 찬반론은 계속 제기되었으나 한말까지 여악은 그대로 지속되었다. 연산군대에는 기녀의 전성기였는데 이 때 각 지방에서 뽑아온 기녀수가 1천여 명에 달했고, 운평, 가평, 흥청이라는 이름이 주어지는 등 기녀 사회에 등급이 부여되었다. 이에 따라 일정액의 봉족이 지급되기도 하였다. 한말 기녀는 일패․이패․삼패 등 등급을 매겨 구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 왕조의 몰락으로 교방청은 폐지되고 관기들은 서울을 비롯하여 여러 지방으로 흩어지고 권번(券番)이나 기생 조합(妓生組合)을 조직하여 부자들의 생일잔치나 회갑연에 불려가 가무함으로써 주연(酒宴)에 추어진 예술적인 사랑채 춤이 된 것이라 보아진다.
《조선미인보감(朝鮮美人寶鑑)》에 따르면 1900년 초에 서울에는 한성 권번을 위시하여 대정 권번․한남 권번․경화 권번 등이 있었고 전국 각지에 소규모의 기생 조합이 있었는데 기녀의 수는 서울이 2백 명으로 가장 많았고, 평양이 156명이었으며, 대구에 120명이 있었다.
그런데 기방 무용의 종류는 서울의 경우 정재 춤이 42종류로 나와 있으며 그 밖에 승무․검무․입무․남무 등이 있다. 그러나 지방에서는 승무․검무․입춤․남무․남중속무(지금의 살풀이춤) 등은 추었으나 정재 춤은 추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교방 춤의 종류는 살풀이춤(수건 춤 또는 입춤)을 비롯하여 승무, 검무, 태평무, 남무, 한량 춤, 승전무와 같은 것이 남아 있는데 이러한 춤은 비록 양반들의 주석(酒席)에서 춘 것이지만 그 춤은 예술적으로 다듬어져 있었으므로 공연 예술로도 훌륭한 춤들이었다. 이 춤들은 교방청에서 다듬어졌지만 예술적으로 발전한 것은 교방이 폐지된 후의 기방(妓房)이었으므로 이른바 판소리, 가야금 산조, 삼현육각과 같이 개인적 멋과 기예능이 높은 수준에 있는 춤이라 할 수 있다.
4) 궁중정재 춤
궁중 무용은 통일 신라 시대부터 고려를 거쳐 조선 시대에 이르는 동안 창제되어 궁중에서 춘 춤이다. 이는 《고려사(高麗史)》 악지(樂志)와 《악학궤범(樂學軌範)》, 《진연의궤(進宴儀軌)》, 《진찬의궤(進饌儀軌)》, 《진작의궤(進爵儀軌)》 등의 문헌에 기록되어 전하는데 그 종류는 50여 종이 된다. 정재(呈才)라 함은 원래 재주를 드린다는 말로 이것은 비단 춤뿐만 아니라 땅재주, 줄타기 등 모든 재예를 드린다는 뜻이었는데 이것은 차츰 궁중 무용의 대명사처럼 통용하게 된 것이다. 정재란 용어는 태종 2년(1402) 6월조에 정재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고 그 뒤 성종 24년(1493)에 편찬된 《악학궤범》을 비롯하여 각종 《진연의궤》 및 고종 30년(1983) 《각정재무도홀기》에 궁중에서 연행되는 춤을 한결같이 정재라는 말을 곁들여 쓰고 있다.
정재에는 중국 계열의 당악 정재와 우리나라 사람들이 창조한 향악 정재가 있다. 당악은 중국의 역대 제국이 그 나라마다 그들의 습속과 생활 등을 그 나라의 국악으로 표현하고 개창한 속악, 즉 향악인데, 이것이 우리나라에 유입되자 통칭하여 당악이라 불리었으며 발생은 춘추 시대 이전에 이미 시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고루한 형식을 벗어나 구체화되기는 당나라 때부터 인 것으로 추측된다.
이와 같이 당나라에서 행한 정재 춤이 고려 시대를 거쳐서 조선 시대로 들어오면 유교의 영향을 받아 예악적(禮樂的) 의식 무용으로 엄하게 왕실에서 거행된다.
《악학궤범》에 전하는 시용향악정재도의(時用鄕樂呈才圖儀)에 따르면, 조선 초기의 향악 정재는 보태평(保太平), 정대업(定大業), 봉래의(鳳來儀), 아박(牙拍), 향발(響쮖), 무고(舞鼓), 학무(鶴舞), 학연화대처용무합설(鶴蓮花臺處容舞合設), 교방가요(敎坊歌謠), 문덕곡(文德曲) 등의 10가지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 중에서 아박(牙拍)은 《고려사》 악지에 전하는 동동사(動動詞)를 부르며 추던 동동을 두 손에 드는 무구(舞具)인 아박(牙拍)으로 그 이름만 고친 춤이다. 또 무고(舞鼓)도 고려에서 전한 춤이다.
처용무는 신라 헌강왕 때부터 비롯하여 고려 시대까지 한 사람이 추던 것에서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오방 처용무로 발전한 춤이다.
조선 중기 이후 연행되던 향악 정재는 광수무(廣袖舞), 검기무(劒器舞), 건무(巾舞), 공막무(公莫舞), 선유락(船遊樂), 엽무(葉舞), 첨수무(尖袖舞), 초무(初舞) 등을 들 수 있다.
여기에 비하여 조선 초기에 창작된 당악 정재는 금척(金尺), 수보록(受寶錄), 근천정(覲天庭), 수명명(受明命), 하황은(賀皇恩), 하성명(賀聖明), 성택(聖澤), 육화대(六花隊), 곡파(曲破) 등 9종으로 그 무보(舞譜)가 《악학궤범》에 수록되어 있다.
이 중 육화대와 곡파는 고려 시대의 춤으로 전승이 잘 되지 않았는데, 세종 이후에 복원한 것이다.
조선 중기의 당악 정재는 풍정도감의궤(豊呈都監儀軌), 숙종 기해년의 《진연의궤》, 영조 갑자년의 《진연의궤》마다 기록이 다르게 나타나고 있으나 대체적으로 조선 전기의 춤들이 계승된 것으로 보아진다.
조선 후기에 창작된 향악 정재의 경우 순조 시대 때 정재 무용이 가장 현란하게 꽃피었다. 익종(翼宗) 시대를 중심으로 많은 춤을 새로 창작하였으며 또한 옛 춤을 복원하여 재연한 것도 꽤 있다. 이 시기에 창작 또는 재연된 향악 정재 춤은 가인전목단(佳人剪牧丹), 경풍도(慶豊圖), 고구려무(高句麗舞), 관동무(關東舞), 만수무(萬壽舞), 망선무(望仙舞), 무산향(舞山香), 박접무(撲蝶舞), 보상무(寶相舞), 사선무(四仙舞), 첩승무(疊勝舞), 영지무(影池舞), 춘광호(春光好), 춘대옥촉(春臺玉燭), 춘앵전(春鶯轉), 침향산(沈香山), 향령무(響鈴舞), 헌천화(獻天花) 등 18종목이다.
순조 때 많은 향악 정재를 창작할 즈음, 당악 정재의 특징 중의 하나인 죽간자(竹竿子)를 도입한 정재 장생보연지무(長生寶宴之舞), 연백복지무(演百福之舞), 제수창(帝壽昌), 최화무(催花舞)의 네 가지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재는 죽간자와 구호의 형식을 택했을 뿐, 춤사위, 반주 음악 등이 향악 정재와 조금도 다름이 없다.
이밖에 고종 때는 각 지방에서 추어 온 사자춤과 항장무(項莊舞)가 궁으로 들어와 일종의 무용극으로 엮은 정재가 되었다. 또한 세종 29년(1447) 6월 세종이 종묘제에서 춘 일무(佾舞)를 정재 형식으로 만들어 문무는 보태평이라 하고 무무는 정대업이라 하였다.
정재의 상연은 진연이나 진찬 의식에서 행하였는데, 의식이 시행될 때는 왕의 윤허가 필요했다. 그래서 그 윤허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왕세자가 부왕의 윤허를 바라는 상소문을 올렸다. 왕은 상소문과는 달리 민심의 동찰에서 불가를 결정하였고 윤허가 안 될 경우에 왕세자는 다시 재소(再疏)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상소하고 진연이 아닌 진찬 의식으로 그 규모를 작게 하는 수도 있었다. 진연의 장소는 일정하게 고정되지 않았으나 외연은 명정전에서, 내연은 자경전(慈慶殿)에서 주로 풀었다고 한다. 의식의 절차는 매우 엄격하게 다스려졌다. 예로서 외연인 경우는 9작(爵)까지의 절차가 있는데, 내연인 경우는 7작밖에 안된다. 이것은 왕과 왕후의 구별도 있겠지만, 어떤 면에서 보면 남존여비의 유풍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의식의 절차를 외진연의 경우에서 살펴보자. 첫 번째 북이 울리면 병조에서 모든 준비물을 제도에 맞게 나열하고 사복사정(司僕寺正)은 수레를 대령하고 좌우 문원관은 왕세자의 치사함(致詞짞)을 그리고 궁관들은 흑단령을 입고 궁문밖에 배열하며, 예모관은 내엄(內嚴)을 찬청(贊請)하게 된다.
두 번째, 북이 울리면 근시(近侍)와 호위하는 관원들은 각각 흑단령과 기복(器服)을, 종친 및 백관들은 흑단령을 입고 합문 밖에까지 나가 출영을 기다린다. 예모관이 출영 준비의 가부를 아룀에 따라 익선관, 용포를 입은 왕세자는 준비된 수레를 타게 된다. 이 때에 상례의 역할은 왕세자를 인도하는 일이다. 또 좌통례는 합문 밖에서 중엄(中嚴)을 계청(啓請)함에 따라 왕은 내전으로 든다. 이에 따라 이 날의 주역이 될 악사와 공인, 협율과 낭인들이 제자리에 들게 된다.
세 번째 북이 울리면, 종친․문무 삼품 이하 참관 및 삼품 이하의 백관들이 배위에 들게 된다. 그리고 좌우 통례의 인도에 따라 왕이 거동을 하게 되면, 악공들은 피리 불고 북을 두드리면서 전문(殿門)으로 들어오고 이어 악사장은 지휘봉을 휘두르면서 고축헌(鼓祝軒)을 가작(架作)한다. 한편 찬의는 창을 하면서 4배 하고 왕세자 이하 모든 백관들이 몸을 구부린다. 이 때 정재악이 시작되고 사찬원 제조가 주기를 올리면 민악과 함께 풍악이 느리게 울리면서 전악사와 전상공인 그리고 무동들은 제 위치로 나간다.
이와 같은 절차가 진행된 다음 1작에서 9작까지의 정재 의식이 시작된다. 1작에서 제조가 왕세자에게 수주를 먼저 진상하면 종친 및 문무 백관이 모두 꿇어앉게 되고 찬의는 창을 부른다. 왕세자가 잔을 받아 천천만수(千千萬壽)를 올린다는 치어와 함께 왕에게 잔을 올리면 악이 울리고 왕이 잔을 비우면 제조는 탕(湯)을 올리게 된다.
다시 2작의 진상은 의정 고관이 잔을 올릴 때 왕의 분부가 내려지고 이어서 악이 연주되는 가운데 비로소 정재춤을 춘다.
3작은 제신이 잔을 올리고 왕이 잔을 들 때 악이 연주되고 잔을 내릴 때 정재춤이 시행되는 등 9작까지 정재무는 그때 그때에 따라 다른 종목의 춤들을 행한다.
정재무는 이러한 의식에서 자라왔으므로 거기에 알맞은 형식과 춤사위가 형성되었다. 예로서 외연 때는 무동들이, 내연 때는 기녀들이 참가하였다. 기본 배열도 왕을 향한 곡진(曲陣), 오방진(五方陣), 직진(直陣), 예진(銳陣), 방진(方陣) 등의 대형과 거기에 따른 무원의 배치도 춤을 인도하는 죽간자(竹竿子)와 왕모(王母), 선모(仙母) 등으로 불리는 중무(中舞)와 그것을 보좌하는 원무(元舞) 협무(挾舞)로 조직되어 있으며 춤의 진행 과정은 기승전결 등 그 형식이 뚜렷하다.
이러한 진행 과정에서 당 향악을 막론하고 구호, 창, 치어(致語) 등을 읊게 되는데, 당악 정재에선 한자로 된 운문체의 정형시로 되어 있고, 향악 정재는 한글과 한자가 혼용된 산문체로 되어 있다. 그러나 향․당악 모두 구호와 치어를 보면, 대부분 군왕의 성덕을 찬미하거나 아니면 왕가(王家)나 나라의 태평 성대를 축원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색이다.
음악의 편성은 주로 연례악으로는 향당악교주(鄕唐樂交奏), 보허자(步虛子), 여민락(與民樂), 함녕지곡(咸寧之曲), 평조회상(平調會相), 수제천(壽齊天) 등이 쓰인다.
정재 반주에 쓰이는 악기는 삼현육각으로 피리, 대금, 해금, 장구, 북들로 편성된다. 그리고 당악 정재는 당피리 등 당악기가 중심이 되며 그 가락은 완만하고 음악의 변화가 적다. 또 향악 정재는 향악을 반주 음악으로 사용하는데 악기의 편성은 향피리 등의 향악기가 중심이 되며, 그 가락은 당악에 비해 다소 매끄럽고 부드러우며 화려하고 음악의 변화가 없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와서는 당악과 향악의 뚜렷한 구분이 없어지게 되었다.
정재의 내용은 춤의 처음과 끝 또는 춤의 중간에 부르는 노래로써 설명한다. 이 노래의 종류로는 창사(唱詞), 치어(致語), 치사(致詞), 구호(口號) 등이 있으며 춤이 시작되어 제일 먼저 부르는 것을 선구호(先口號)라 하고, 춤이 끝나고 퇴장하기 직전에 부르는 것을 후구호(後口號)라 한다.
구호는 죽간자가 부르고 무원이 부르는 것을 창사라 한다. 그리고 중무가 부르는 것을 치어라 한다. 그러나 조선 말기에 이르러서는 구호, 치어, 창사의 구분없이 모두 창사로 통일하고 있다. 그런데 치어나 창사는 치하하는 말이고 구호는 시일장(詩一章)으로 되어 있으며 이 두 가지 모두 송축하는 내용이라고 하였다. 창사는 어떠한 사(詞)를 노래로 부른다는 뜻으로써 춤 추다가 중간에 부르는 노래였으나 조선 말기에 이르러서는 옛날의 구호와 치어에 해당되는 것까지 모두 창사의 용어로 통일되고 있다.
궁중 정재에 있어서는 악가무일체(樂歌舞一體)라 하여 춤의 내용을 노래로써 설명하며 춤의 진행도 음악에 따라 좌우되었다. 음악을 연주하는 악사들이 지휘하는 집박 악사가 박으로 무용도 함께 지휘하는 것이다. 박을 한 번 치면 음악이 시작되고 박을 또 한 번 치면 춤이 시작된다. 또한 창사를 부르기 전과 끝날 때는 박을 세 번 친다. 그리고 춤이 끝날 때도 세 번 친다. 이렇게 정재무는 음악과 함께 움직여지는 것이다.
정재에서 많이 사용되는 곡은 영산회상(靈山會相)을 비롯하여 여민락(與民樂), 보허자(步虛子) 등이다.
정재의 무보가 나와 있는 《고려사》 악지나 《악학궤범》, 《정재무도홀기》에서 정재가 진행되는 절차를 보면, 기(起), 승(承), 전(轉), 결(結)의 뚜렷한 형식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起)는 무용의 도입부로서 무원들이 나와 인사하고 어떤 내용의 춤을 추겠다는 것을 알리는 형식이다.
승(承)은 춤의 연결부로서 무원들이 여러 가지 대형을 만들면서 춤사위가 활발해지는 대목이다.
전(轉)은 무용의 진행상 중요부로서 춤의 결정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중무자(中舞者)가 주인공이 되어 춤추고 창사도 하는 형식을 이룬다.
결(結)은 종결부로서 무원들이 춤의 끝을 알리고 인사하며 퇴장하는 춤의 끝부분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정재에는 진행 절차의 형식이 있는데 좀더 구체적으로 알아보기 위하여 당악 정재와 향악 정재를 비교해 보고자 한다.
① 기(도입부)
당악 정재는 죽간자가 앞으로 나와 초입 배열하고 춤의 내용을 구호나 치어로 하고 무원을 인도한다. 여기에 비하여 향악 정재는 죽간자가 없이 초입 배열에서 무원들이 배면 복여(排免伏與)로 시작한다.
② 승(연결부)
여기서는 당향악 정재를 막론하고 무원의 창, 무원의 춤, 선모(왕모)의 치어, 선모와 협무의 춤 등 춤이 본격화되고 창사도 하고 여러 가지 대형을 만들기도 한다.
③ 전(중요부)
당향악 정재를 막론하고 왕모나 선모가 구호나 치어를 하는데 이 때 그 춤의 중심 내용이나 주제가 되는 노래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협무와 더불어 회무(回舞)하는 등 주역의 춤이 돋보인다. 따라서 전은 당악 정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④ 결(종결부)
당악 정재의 경우 죽간자가 이러한 정재를 보여 드리게 되어 기쁘다는 식의 구호를 하고 무원들을 인도하여 퇴장한다. 그러나 향악 정재는 무원들이 면복 여퇴(免伏與退)한다.
이렇게 보았을 때, 정재의 진행 절차에서 기(起), 결(結)은 향․당악 정재가 다르고 승(承), 전(轉)은 대체적으로 같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진행 절차에서 향․당악이 다른 점은 당악 정재는 기승전결이 뚜렷하고 절도가 있으나 다소 딱딱한 편이고 향악 정재인 경우는 자연스러운 점이 있다 하겠다.
정재를 위한 춤사위는 《악학궤범》과 《각정재무도홀기》에 나와 있는 것과 김천흥의 증언에 따라 정리해 보면, 왕 앞에서 추기 때문에 고상함과 우아함과 무겁고 예를 갖춘 동작 그리고 절도가 있으면서도 화사한 춤사위로 구성되어 있다.
궁중 정재 춤의 표현 내용과 형태의 특징은 다음과 같은 춤에서 볼 수 있다.
예로서 수연장(壽宴長), 헌선도(獻仙桃)는 군왕의 만수를 기원하는 춤이고 오양선(五羊仙)은 풍년 신화를 나타내는 춤이다.
보상무(寶相舞)는 포구락을 향악 정재로 재구성한 것이고 박접무(撲蝶舞)는 창사나 무복 그리고 춤 동작이 나비를 형용하고 있다. 홀 춤은 춘앵전과 무산향에서 무동 한 사람이 춘다. 만수무(萬壽舞)는 당악 정재인 헌선도를 재창조한 것이고 광수무(廣袖舞)는 고구려 춤이 재현된 것이다. 관동무(關東舞)는 금강산과 동해의 절경을 읊은 시를 춤으로 나타내는 것이며 경풍도(慶豊圖)는 풍년을 기원하고 즐기는 춤이다. 고구려무는 고구려에 관한 시를 통해 옛날을 회상하는 춤이고, 가인전목단(佳人剪牧丹)은 향기가 그윽한 목단꽃을 꺾어 노는 꽃놀이춤이다. 향령무(響鈴舞)는 방울을 들고 추며 아박무(牙拍舞)는 상아로 만든 작은 박을 치면서 춘다. 그리고 육화대(六花隊)와 연화대는 꽃을 주제로 한 춤이며 초무(初舞)는 춤을 추기 전 처음에 서무(序舞)로 추는 춤이다. 정재 춤에서 영지무(影池舞)․학무(鶴舞)․가인전목단(佳人剪牧丹)․선유락(船遊樂)․심향춘(沈香春) 등의 춤은 무대 장치가 있으며 춘대옥촉(春臺玉燭)과 같은 춤은 가설무대인 윤대(輪臺)에서 추는 춤이다.
그런데 이러한 궁중 정재는 전승 과정에서 고려 시대, 조선 초기, 조선 중기 그리고 조선 후기 등 시대에 따라 춤의 내용과 형태를 달리하고 있다. 또 같은 시대의 춤이라 하더라도 문헌 기록에 따라 달리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그 원인은 고려 시대와 조선 초기 또는 중기인 경우 궁중 정재가 형성 단계에 있었기 때문에 춤의 내용이나 형태가 바뀌는 현상이 일어났고 조선 후기의 정재는 종래의 의식적인 춤이 점점 예술적으로 다듬어져서 공연 예술로 발전함으로 생긴 변화 현상이라 보아진다.
이 시대의 정재 춤을 보면 향악 정재와 당악 정재라는 특징적 틀을 벗어나 하나의 궁중 정재로서의 새로운 틀을 창조한 것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정재 음악에서 향․당악의 구분이 없어졌고 곡 이름도 바뀌는 경우가 있다. 춤의 형태에서는 죽간자가 춤을 방해함으로 위치를 바꾸었으며 창사의 가사 내용이 왕에 따라 달리하는 경우가 생겼다. 또 선모․왕모 등 주역과 조역인 원무 또는 협무의 역할이 확실해졌고 창사가 축소되고 춤이 길어지는 등의 변화가 있었다. 이것은 왕의 취향, 주관을 하는 사람들의 이견과 이른바 연출을 담당한 사람의 예술적 욕구에 의해 개작되었다 할 수 있다.
3. 지역적 분포
1) 개요
춤은 지역적, 민족적 특징을 갖는다. 아무리 춤이 본능적인 것이라 하여도 춤을 잘 추는 민족과 잘 추지 못하는 민족이 있고, 춤의 종류가 많은 지역과 적은 지역이 있다. 또한 같은 민족의 춤이라 하더라도 지역 여건에 따라 다르고 개개인의 성격이나 남녀간에 따라서도 다르다.
우리나라는 국토가 작지만 기후적으로 한대와 온대에 걸쳐 있고 산악과 평야 지대가 있으며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 또한 지역마다 풍속이 다르고 말도 다르다. 따라서 노래나 춤도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춤은 풍토적 조건과 풍속적 조건, 사회 환경적 조건과 역사 그리고 개인적 생활 방식과 인생관에 따라서 지역마다 각기 다른 양태를 띤 춤들이 발생하기도 하고 교류를 통해 변천한 것도 있음이 확실하다. 이제 상이한 조건과 지역에 따라 어떠한 춤이 분포되어 있는지 알아보기로 하겠다.
2) 풍토적 조건
우리나라 춤은 풍토적 조건에 따라 지역적으로 다르다. 가령 산악 지대의 춤과 평야 지대의 춤, 북부․중부․남부 지역의 춤이 각각 다르다. 삼국 시대 이전의 원시 생활권은 평북 의주에서 경북 포항으로 선을 그어서 동쪽을 산악 지대라 하여 비농경 생활권으로 보고, 서쪽은 평야 지대라 하여 농경 생활권으로 간주한다.
산악 지대에서는 타지방과의 교류 없이 그 부락에서 자생한 춤들이 그대로 전승되고 있다. 여기서 사는 이들의 성격은 급하며 행동이 거칠고 폐쇄적이며 고지식하다. 따라서 문화적으로도 후진하여 춤도 비교적 적고 발작적이며 단조롭고 빠른 춤이 많다. 이 곳의 춤은 무속 춤이나 농악을 비롯하여 장례 의식의 춤, 소리 춤 그리고 탈춤 등이 있지만 무속 춤은 마을 굿이나 개인 굿에서 하며 농악은 주로 정월 보름의 동제(洞祭)와 지신밟기를 위주로 한다. 그런데 장례 춤은 다른 지역에 비해서 발달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소리 춤과 같은 것은 지게목발 춤이나 고사리꺾기 등 산악 생활을 반영한 춤들이 분포되어 있고 또한 이 곳에는 비교적 고형(古形)으로 보이는 서낭제와 관련한 소박한 향촌형의 탈놀이가 전승되고 있다.
평야 지역인 서부 지역은 농사가 잘 되고 넓은 평야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생활도 한결 여유가 있고 성격이 유순하며 개방적이다. 또한 평야 지대이기 때문에 교통이 편리하여 문화의 교류가 빈번하므로 춤 또한 같은 유형의 것이 넓게 분포하고 있다. 이 지역의 춤을 크게 나누어 보면 민속춤의 경우 농악, 탈춤, 소리 춤, 모방 춤 등이 있고 교방 춤과 무속 춤도 발달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춤들은 비교적 예술성이 높고 그리 빠르지 않으면서도 흥이 넘쳐흐르고 균형이 잡힌 멋을 가진 춤이 많다. 우리나라의 민속춤은 기후에 따라서 비슷한 유형의 춤들이 분포되어 있다. 북부 지방(관서, 관북, 해서)은 평안도와 함경도, 황해도 그리고 일부 강원도 지방을 말한다. 이 곳의 춤은 대체적으로 무당춤과 같은 종교 의식 춤과 탈춤 같은 민속춤과 교방 춤이 발달되었고 농악이나 소리 춤과 같은 춤은 빈약하다. 그런데 이 곳의 춤들은 비교적 활달하고 용맹스러운 춤사위로 짜여져 있어서 남쪽의 춤과는 대조적이다.
중부 지방(기호, 호서, 관동)은 경기도, 충청도 일부와 강원도(영서 지방)를 포함한 지역을 말하는데 이 곳의 춤 문화권은 경기도가 주축을 이룬다. 말하자면 농악을 비롯하여 탈춤 등이 춤의 중심권에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이 곳의 춤은 서울이라는 양반 문화의 영향권에 위치한 지역이기 때문에 성격도 유순하고 섬세하며 차분하다. 따라서 이 곳의 춤은 교방춤, 탈춤, 농악에서 보듯이 섬세한 기교와 모나지 않고 작은 춤사위로 구성된 차분한 춤이라 할 수 있다.
남부 지방(호남, 영남)은 전라도와 경상도 지방과 같은 온화한 기후를 가진 곳을 말한다. 그러나 이 곳은 지역적으로 소백산맥을 사이에 두고 경상도 기질과 전라도의 기질이 너무나 다르고 생활 방식도 다르기 때문에 춤도 다르다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경상도의 춤은 남성적이고 절도가 있는 춤인 데 비하여 전라도의 춤은 부드럽고 유연성이 있는 여성적인 춤이라 할 수 있다. 또 경상도가 탈춤이 발달한 곳이라면 전라도는 농악과 소리춤이 발달한 곳이다. 그런데 남부 지방 춤의 공통점은 민속춤이 고도로 발달하였고 또한 교방춤도 뿌리가 깊은 곳이다. 따라서 춤의 종류도 많고 가장 흥겹고 멋스러운 춤이 많이 분포되어 있다.
3) 역사와 풍속적 조건
우리나라는 비록 넓은 땅을 가진 민족은 아니지만 지역에 따라 각각 다른 기질과 풍속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풍속과 문화를 크게 나누어 보면 단오 문화권, 단오와 추석 문화권, 그리고 추석 문화권으로 분류할 수 있다.
단오 문화권은 고구려의 역사와 풍속을 바탕으로 한 한강 이북과 강원도 지역이며, 단오와 추석 문화권은 신라의 역사와 풍속을 바탕으로 한 경상도와 일부 충청도와 강원도가 포한된 지역이다. 또한 추석 문화권은 백제의 역사와 풍속을 바탕으로 한 전라도, 경기도와 충청도 일부 지역을 말한다. 이러한 지역에서는 아직도 언어적으로는 삼국 시대의 고어를 쓰고 있을 정도로 그때의 생활과 관습과 문화를 간직하고 있어 춤도 나름대로 모양이 다르다. 따라서 이러한 지역의 춤을 말할 때 고구려 문화권의 춤, 백제 문화권의 춤, 신라 문화권의 춤으로 부르고 있다.
고구려 문화는 기후적으로 한대 지방이고 넓은 국토를 가지고 있었으며 기질이 기마 민족의 영향을 받아 전투적이고 쾌활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들의 춤은 거칠고 활달하며 전투적인 춤을 춘다.
이러한 춤은 오늘날 해서 지방의 탈춤이나 무당춤과 같은 춤에서 볼 수 있는데 이 춤들을 보면 도약 춤이 많아 무폭(舞幅)이 크고 절도가 있으며 손짓춤은 각(角)을 이룬 춤이 많다. 따라서 이러한 고구려적인 춤을 가리켜 사위춤이라 부르고 있다.
백제는 광대한 농토를 가지고 있어서 농경문화가 발달하였고 남중국에서 불교문화를 받아들여 불교문화 또한 발달하였다. 이들은 생활이 풍부하고 문화 수준이 높았기에 기질적으로 유순하고 향락적이며 낙천적인 데다가 예술 감각이 발달하였다. 그러기에 농경에 바탕한 예술과 불교적 예술이 발달하였다.
춤의 경우 이러한 문화적 배경 때문에 부드럽고 우아하며 아름다운 곡선미를 갖춘 이른바 손짓춤이 생활화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손짓의 살풀이춤을 백제적 춤의 특징으로 보는 것이다. 지금도 이러한 춤은 그대로 남아서 오늘의 교방 춤인 살풀이춤이나 승무와 같은 춤으로 이어진 것이라 본다.
신라인은 무뚝뚝하고 담백하며 의리가 있는 인간성을 지니고 있다. 이들은 화랑도를 통해 합심하여 당초에는 소국이었으나 삼국 통일을 이룩하였고 합병 후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 당 문화 등을 받아들여 나름대로 신라 문화를 형성하였다. 이 신라의 문화는 지금도 경상도 문화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 춤의 경우, 고구려의 도무(跳舞)와 절도가 있는 손짓춤 그리고 백제의 부드러운 곡선적인 손짓춤이 복합된 도무와 곡선적인 춤으로 전승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신라적인 춤의 특징은 이른바 덧배 춤이라 할 수 있다.
4) 사회 환경적 조건
우리나라 춤에는 그 지역에서 발생하고 타 지역의 춤이 유입되지 않은 채 그 곳에서만 전승되고 있는 춤이 있는가 하면 타 지역의 춤들과 빈번히 교류되면서 발전한 춤이 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한 사회 환경적 조건에 따른 춤의 분포는 후자의 경우처럼 전승되는 지역을 말한 것이다. 행정 구역에 따른 영향, 교통에 따른 영향, 생활 조건과 경제상의 영향 그리고 지역간의 신앙과도 관계가 깊다고 생각할 수 있다.
춤은 종교적 행사나 축제 때 추기 때문에 그 지방의 행정적 지도나 후원 방향에 따라 춤의 전승 방향이 달라질 수가 있다. 가령 전북의 좌도 농악이던 금산 농악이 오늘날 행정 구역이 개편되어 충청남도로 편입됨에 따라 전북 지방의 좌도 농악과 충청 농악이 혼합되어 전승되고 있는 것이 그 예이다. 이와 같이 민속춤이 전승되는 가운데 각각 다른 도경(道境)에 따라서 춤의 내용과 모양새가 이질화되거나 동질화되는 수도 있다. 이와는 반대로 도경과는 관계가 없이 사람들이 왕래하는 교통 조건에 따라서도 같은 유형의 춤들이 전승되는 수가 많다. 이렇게 하여 발전된 춤을 전파형의 춤이라 한다.
이러한 춤은 해로나 수로 그리고 육로를 통해 춤꾼들이 이동함으로써 형성된 춤의 분포 현상이다. 예를 들어 수로를 통한 전파를 보면 전라도 남해안 지방의 여성 소리 춤이 경상도 해안 지방으로 옮겨간 것이라든가, 어부들이 추는 소리 춤(배치기 등)을 서해안 일대에서 춘다든가, 전라도 남해안 일대의 소리 춤과 동해 일대의 소리 춤 등이 같은 내용과 형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또한 육로로 전파되는 경우는 산악이 없이 도로로 이어지는 경기 및 충청 농악, 전남, 전북으로 이어지는 우도 농악과 좌도 농악 등이 있다.
이 밖에 수로, 즉 강줄기에 따라서도 같은 유형의 춤들이 전파된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경기 농악과 영서 농악이 한강 주변 지역에서는 같다든가, 이 밖에 금강 유역의 농악과 만경강․영산강․섬진강․낙동강 유역의 농악이 각각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농악의 전승 여부의 제일 조건은 마을 공동제(동제와 당제)에 농악대가 동원이 되느냐 안되느냐에 따라 크게 영향 받는다. 왜냐하면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연습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을 제사는 지역에 따라서 농악이 동원되는 곳이 있는가 하면 일부 지역에서는 농악이 동원되지 않기도 한다. 말하자면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와 같은 지역에서는 무당들이 마을 제사를 지내고 경기 및 충청과 경북 지역에서는 무당과 농악대가 합동으로 제를 지내는데 비해 전라도와 경남 지역에서는 농악대가 주축이 되어 제를 지내는 것이다.
따라서 경기도 이북 지역은 무당들이 마을 제사를 지내고 있기 때문에 농악의 전승력이 약한 형편이다. 그러나 이 지역 이외의 전 지역 농악은 마을 제사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농악이 생활화되었다. 특히 전라도와 경상도 지방의 농악은 예술적으로도 많은 발전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민속춤에 있어서 농악의 분포는 경기 및 충청 농악을 비롯하여 영동 농악, 영남 농악, 호남 우도 농악과 호남 좌도 농악 등 다섯 지역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농악에서 경기 및 충청 농악은 북으로는 황해도와 평안도 지방까지 영향을 주고 있으며 남으로는 경북 김천 지방까지 영향을 주고 있다. 영동 농악은 강원도 동해안 지방의 농악을 말하는데, 이 곳의 농악은 멀리 함경도 지방과 동해안 주변의 영남 농악과 교류되고 있다.
영남 농악은 경상도 농악을 말하는데 이 곳의 농악에서 동해안 쪽의 농악은 영동 농악과 유사한 점이 있고 경북의 북부에 위치한 김천 지방의 농악은 충청 농악, 호남 좌도 농악과도 유사한 점이 나타나고 있다.
호남 지방은 농경문화가 발달한 곳이므로 농악이 가장 발달한 곳이다. 따라서 이 곳은 우도 농악과 좌도 농악, 두 가지 파가 있다. 우도 농악은 익산에서 목포로 이어지는 평야 지대의 농악을 말하고 좌도 농악은 전주, 남원, 여수로 이어지는 산악 지대의 농악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들 농악에서 좌도 농악은 경남 서부 지방의 농악에 영향을 주고 있으며, 한편 호남 농악은 충남 농악에 영향을 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다섯 가지 유형의 농악도 도 경계나 강, 육로나 해로, 산악과 평야와 같은 지역적 환경에 따라 조금씩 다른 농악이 전승되고 있다.
예를 들면 춘천 지역은 같은 강원도이지만 동해안 쪽의 영동 농악과는 달리 경기도 농악권에 있고, 같은 충청도 농악이라 하더라도 충남 농악은 호남 농악과 유사점이 많다. 반하여 충북 농악은 영동과 영남 농악과 교류되고 있다. 그런가 하면 가락이나 춤에 있어서 동해 쪽에 인접한 지역, 즉 동해안 일대의 강원도, 충북, 경북, 경남 지방의 농악은 산악 농악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 비하여 서해안 쪽에 인접한 지역, 즉 전남, 전북, 충남, 경기도 지방의 농악은 평야 농악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탈춤이 전승되고 있는 지역은 평안도, 충청도, 전라도, 제주도를 제외한 황해도, 경기도, 강원도, 경상도 지방이다. 그러나 평안도나 제주도의 경우 무(巫)굿에서 무당들이 탈놀이를 하고 있으며 전라도의 경우는 농악에서 잡색(雜色)들이 각종의 가면을 쓰고 가무극하는 놀이가 있다.
산대계(山臺系)의 탈춤이 옛날부터 전승되어 온 지역으로는 해서 지방의 경우 봉산, 강령, 은율, 황주, 안악, 재령, 신천, 장연, 송화, 기린, 신원, 서흥, 신막, 평산, 옹진, 송림, 추화, 금산, 연백 등 상당히 많은 지방에서 추어 왔다는 기록이 있다. 중부 지방의 춤은 서울 녹번동, 아현동, 노량진, 서울 퇴계원, 서울 사직골, 양주, 서울 송파 등지에서 전승되었다. 오광대는 고성, 통영, 가산, 진주, 마산, 합천, 율지, 의령, 산청, 김해 가락, 창원 진동, 거제 등지에서 전승되어 가고 야유는 수영, 동래, 부산진 등지에서 전승되어 왔다.
향촌계(鄕村系)의 탈춤은 안동 하회 별신굿 탈놀이를 비롯하여 안동 병산, 영양 주곡 등의 별신굿 탈놀이, 강릉 관노 가면놀이, 예천 청단놀이 등 별신굿 탈놀이계와 북청 사자놀이 등이 분포되어 있다. 유랑 예인 즉 사당패의 탈춤은 현재 서울 거주 남사당패가 하고 있지만 옛날에는 경기도 안성과 평택 진위 등지가 중심지였고 충청도 회덕, 당진 등지도 활동한 곳이었다.
소리 춤은 어느 춤보다 더 노동과 생활의 현장인 서민들 사이에서 행하여 온 소박한 춤이다. 따라서 옛날 같으면 많은 지역에서 춘 것이라 할 수 있다. 소리 춤은 그 지역마다 가지고 있는 노동요나 놀이요 등 민요(무용요)에 맞추어 추는 춤이기 때문에 이러한 노래가 있는 곳에는 소리 춤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에 이르러 대부분 소멸되어 버렸고 지금은 몇몇 지방에 잔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소리 춤의 전승 지역을 보면 나름대로 그 지역의 자연 현상과 풍속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가령 남성 춤일 때 강원도의 경우 나무꾼이나 초동들이 산에 올라가 묘판 주변을 이용하여 노는 고사리꺾기가 산악 지역에 전승되어 있고 모내기 춤과 논둑 밟기와 같은 소리 춤은 농경문화가 발달한 곳에 전승되어 왔다. 지게는 농민들의 필수적 생활 기구였기에 대부분의 지역에서 지게목발 춤이 전승되어 왔다. 또한 지역에 따라 막대기춤(발치기)과 같은 것도 있다.
소리 춤은 문헌 기록에 남녀군취가무(男女群聚歌舞)가 있었지만 지금은 서해안 농촌에서 행한 남녀 공동 춤인 배치기 춤이 있을 뿐 모든 춤이 남자들의 춤과 여자들의 춤으로 분화되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춤들 중에서 여성들의 춤이 남성들의 춤보다는 훨씬 많은 것으로 보아 여성들이 남성의 그늘에서 구속 받는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반사적으로 이 고통과 구속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소리 춤이 발달한 것으로 추정할 수가 있다.
이러한 여성들의 소리 춤은 전라도와 경상도 지방에서 많이 발달하고 있으며 특히 전라남도 남해안 지방(해남을 중심으로)에 많은 춤들이 전승되고 있다. 이 지역이 민중 문화가 발달한 곳이라는 점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이 곳의 여성 소리 춤(강강술래)이 고래로부터 이어온 여성 제의(祭儀) 놀이에서 영향 받았기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허튼춤은 춤추는 사람이나 지역에 따라 춤추는 요령과 명칭이 다르다. 보릿대춤은 주로 전라도 지방에 분포되어 있고 절굿대춤이나 도굿대춤은 주로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많이 추고 있다. 또한 황새 춤은 주로 경남 지방에서 추고 있으며 몽두리 춤과 범부 춤은 주로 경상북도 지방의 춤이다.
그리고 함경도 지방에는 손춤이 있다. 손춤은 돈돌날이 소리에 맞추어 주먹을 쥐었다 손바닥을 펴는 춤, 주먹을 쥐었다 손바닥을 펴고 손목을 돌려 정지시키는 춤 등 주먹을 쥐었다 펴는 동작을 다양하게 구사하는 춤인 것이다.
이 밖에 건드름 춤, 어깨춤, 엉덩이춤, 활개춤은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춤이다.
모방 춤 은 흔히 농악 판이나 탈판 또는 굿판에서 추지만 어떤 춤판이든 간에 흥이 났을 때 추는 춤이다. 이 춤은 경상도나 전라도에서 많이 추고 있는데 이 중에서도 사람의 행위를 흉내 내는 병신춤은 밀양 지방에서 많이 추었고, 성모의(性模擬) 춤은 경상도와 전라도 지방에서 추었으며 동물의 모방 춤에서 유래한 학춤은 부산 동래 지방에서, 두꺼비 춤․개구리 춤은 경상도와 전라도 지방에서 주로 전승되고 있고, 오리 춤은 서울․경기도, 곰춤은 전라도에서 전승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춤에서 서울이라는 지역에서는 어떠한 춤이 있었고 그 춤이 왜 서울 지역에 분포되었는지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 먼저 서울이라는 곳은 지리적으로는 우리나라의 중심지이고 자연환경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정치의 중심지로서 왕실이 있다. 따라서 서울은 왕가와 양반들이 득세한 선비들의 도시이다.
따라서 서울에는 고급문화로서의 춤들이 발달한 곳이다. 예컨대 궁중 무용과 유교 의식에서 행하는 일무는 서울에서만 전승되고 있고 불교 춤인 작법 춤과 교방 춤 그리고 무속 춤 등도 발달한 곳이다. 그러나 서울에는 민속춤과 같은 춤들은 그리 문화적 기능을 갖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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