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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강 |
꼬강Kogan Claude1926~1959
클로우드 꼬강은 프랑스 남부 출신의 여성 등산가다.
알프스의 여러 어려운 루트를 선등했고, 히말라야·안데스·그린란드에서도 활약했다. 1951년 안데스의 끼따라루(Quitaraju·6040m)를 등반하고, 1952년 살칸타이(Salcantay·6081m)와 기네쉬 히말(Ganesh Himal·7406m)을 초등했다. 1954년 스위스와 프랑스 합동대의 초오유(8153m) 원정에도 참가하여 정상을 공격했으나, 7700m 지점서 기상악화로 퇴각한다. 이 고도는 당시 여성이 오른 최고의 기록이다. 1959년 8명의 여성들로 구성된 국제여성합동등반대를 조직하여 1954년의 실패를 설욕하기 위해 초오유에 재도전했으나, 4캠프 주위에서 벨기에 여성대원과 함께 눈사태에 쓸려 사망했다.
꾸지Cauzy Jean1923∼1958
프랑스 산악인. 전자·항공 기술자다.
6급의 등반가로 지적이며 독창적인 성격의 소유자다. 1950년 에르조그(Maurice Herzog)가 지휘하는 안나푸르나(8091m) 원정대에 참가했다.
테레이(Lionel Terray)와 함께 1954년 초모뢴쪼(Chomo lonzo·7790m)를, 1955년 마칼루(8482m)를 각각 초등한다. 1955년 등반 중 낙석에 맞아 타계했다.
끄로Croz MichelCroz Michel
미쉘 끄로는 프랑스 르뚜르(le Tour) 출신의 안내인이다.
젊은 나이에 일찍 사망하여 활동기간이 짧았으나, 수많은 훌륭한 초등을 이루어내어 알프스 황금시대를 장식했다. 1864년 바르데 제크렝(Barte desecins), 에끼유다르장띠에르(Aigdargentiere), 1865년 당 블랑슈(Dent Blanche), 그랑 조라스(Grandes Jorasses)의 윔퍼 피크(Whymper Peak) 서봉 초등이 유명하다.
1865년 7월 14일 윔퍼(E·Whymper)의 마터호른(4478m) 원정대에 참가하여 초등에 성공했으나, 하산 도중 7명을 연결했던 로프가 낙석에 맞아 끊어지면서 추락한다. 일행 중 4명이 1200m 아래 마터호른 빙하로 떨어져 죽었는데 끄로도 이때 함께 사망했다.
마터호른은 알프스 4000m급 봉우리 중 마지막 난봉으로 남겨졌던 봉우리다. 이때의 등반으로 알프스 황금시대(피크 헌팅시대)가 막을 내리고 은의 시대가 개막된다.
◇노턴 |
노턴Norton Edward Felix1884∼1954
에드워드 페릭스 노턴은 1924년 영국3차 에베레스트(8850m) 원정대의 대장이었다.
1854년 난공불락으로 여겨왔던 베터호른(Wetterhorn·3710m)을 초등하여 알프스 황금시대를 개막시킨 알프레드 윌스(Wills Alfred)경의 손자다. 그는 조부의 산장에서 등반활동에 눈을 떴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군인으로 인도에서 복무했다.
1922년 2차 에베레스트 원정대에 참가하여 말로리(G·L·Mallory)·소머벨(Somervell) 등과 함께 무산소로 8225m까지 진출했다.
인류가 산소 보급기 없이 8000m 선을 넘은 최초의 기록이다. 1924년 3차 원정에서는 병으로 쓰러진 부르스(C·Bruce) 대장을 대신해서 원정대장이 되었으며 그도 직접 등반에 참가해 북면 대꿀르와르의 8572m까지 올랐으나 말로리와 어빈(A·Irvine)이 정상 공격 중에 행방불명되자 철수한다. 당시 노턴이 오른 8572m의 기록은 1953년 에베레스트가 정복되기 전까지 인간이 오른 최고 높이였다.
에베레스트에 관한 그의 해박한 지식은 이후 에베레스트 원정에 많은 도움을 주었으며 1953년 헌트(J·Hunt)대의 초등정에도 큰 공헌을 하였다.
저서로 1925년 발행된 'The Fight for EVEREST' (1924)가 있다.
다이렌퍼스Dyhrenfurth Norman1919∼
미국 산악인. 노만 다이렌 퍼스는 히말라야 등반사의 권위자인 스위스의 군터 오스카 디렌푸르트(G·O·Dyhrenfurth)의 아들이다. 스위스 태생으로 미국에 귀화하여 영화제작에 종사하면서 부친과 함께 히말라야 탐험에 관심을 기울였다.
1952년 스위스 2차 에베레스트 원정대(대원 19명·비용 40만불·장비와 식량 27톤·포터 909명·셰르파 32명·총인원 1000명)를 조직하여 지휘한다.
이 등반대는 에베레스트 등반 사상 처음으로 에베레스트 트래버스를 실현한 팀이다.
각기 다른 루트로 오른 두 팀이 정상에서 합류하여 함께 하산한다. 위테이커(J·Whittaker)와 셰르파가 1차 공격에 성공하자, 시간·장비·대원이 충분했으므로 누구도 시도해보지 않은 야심찬 계획을 세운다. 서릉팀과 반대편인 남동릉팀으로 두 팀을 나누어 오르게 한 뒤, 정상에서 랑데부하기로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긴다.
언솔드(W·Unsold)와 혼바인(T·Hornbein)이 서릉팀으로 등정한 후, 남동릉으로 오른 비숍·저스타드와 정상에서 만난 후 함께 하산하는 획기적인 횡단기록을 성공시킨다. 서릉의 ‘혼바인 꿀르와르’는 당시의 혼바인 대원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늦은 시간에 정상에서 합류한 네 사람은 밤12시에 8500m 고소에서 맨몸으로 비박하고, 사고 없이 하산했다.
그 후, 다이렌퍼스는 1971년 국제합동대를 조직하여 에베레스트 남서벽에 도전했으나, 팀워크 부재로 인한 대원들간의 불화와 질병, 악천 후 등이 원인이 되어 실패한다.
데지오Desio Ardito1897∼?
아르디토 데지오는 이태리 밀라노대학의 지질학 교수이자 등산가다.
K2 초등 당시 이태리원정대의 대장을 지낸 인물이다. 알프스와 카라코룸(Karakorum) 등의 산악지대에서 지리학 및 지질학 조사를 했다.
1954년 이태리는 45년 전 아브루찌공(Duke of Abruzzi)이 시도했다가 실패한 K2 초등정을 목표로 대규모 원정대를 조직한다. 대장인 데지오를 포함해서 11명의 등반대원과 3명의 과학자로 구성된 이 원정대는 폐렴으로 인한 대원 한 명의 사망과 악천후를 무릅쓰고 초등에 성공한다.
콤파뇨니(A·Compagnoni)와 라체델리(L·Lacedelli)는 정상 공격 중 산소가 바닥나자 산소 없이 등반을 계속해서 정상을 밟았다.(후일 산소를 사용했음이 밝혀졌다.) 이태리의 초등정 성공은 데지오의 뛰어난 조직력과 대원들간의 팀워크가 밑바탕이 되었다.
당시 이태리원정대는 팀 전체의 팀워크와 단결된 정신을 존중해서 정상에 오른 두 사람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 등정자 두 사람의 이름이 알려진 것은 오랜 세월이 흐른 뒤였다.
◇뒬퍼 |
뒬퍼Dulfer·Haken1893∼1915
한스 뒬퍼는 독일의 선구적인 등반가다.
뮌헨에서 의학과 법률학을 전공했다. 마우어 하켄(Mauer Haken)과 오토 헤르조그(Otto Herzog)가 고안한 카라비너, 뒬퍼가 개발한 뒬퍼지츠(Dulfersitz) 기술 등 삼위일체를 이룬 인공등반 기술을 동부알프스 북부지방에서 실용화시켰고, 난이등급-뒬퍼가 초안한 난이등급은 후에 벨첸 바하(W·Welzenbach)에 의해 완성된다-을 초안했다.
레이백(Layback) 등반기술과 로프를 이용한 뒬퍼지츠라는 현수하강 기술도 개발했다. 1912년 플라이쉬방크(Fleishbbank) 동벽, 1913년 치마그란데(Cimagrande) 서벽을 등반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전사했다. 그는 1912년부터 22세의 젊은 나이로 전사할 때까지 3년 동안에 인공등반기술을 체계화한다. 뒬퍼가 고안한 뒬퍼지츠는 암벽에서 자일에 매달려 하강하거나 루트를 변경할 때 옆으로 이동하는 펜듈럼(Pen-dulum 진자식 횡단기술)까지도 포함하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기술이다.
뒬퍼는 등반뿐만 아니라 피아노를 자유자재로 다룰 줄 아는 음악적인 소양도 풍부했던 인물이다.
드 소쉬르de Saussure H· B1740∼1799
제네바(Geneve)의 부유한 언어학자이자 자연과학자다.
근대 알피니즘의 아버지라 불린다. 1760년 샤모니를 방문하여 몽블랑(4807m) 초등자에게 상금을 제안해 이 산의 초등에 크게 기여했다. 몽블랑은 그가 제안한 26년 후인 1786년 8월 8일에 수정 채취업자인 짝 발마(Jacgue Balmat)와 의사인 미셸 빠가르(Michel Gabriel Paccard)에 의해 초등된다. 소쉬르는 몽블랑 초등정 1년 후인 1787년에 올라 제2등을 기록한다.
그는 학문적인 목적으로 알프스를 두루 여행했다. 그가 근대 등반의 선구자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알프스 역사가인 쿨리지(Coolidge William Augustus Brevoor)는 그와 플라시두스아 스폐사 신부(Father Placidus a Specha)로부터 근대 알피니즘이 시작되었다고 평가했다. 현재 샤모니에는 몽블랑 등정을 기념하는 드 소쉬르와 발마의 동상이 서있다.
저서
디렌푸르트Dyhrenfurth 1886∼1975
군터 오스카 디렌푸르트는 독일 출신으로 1939년에 스위스로 귀화한 고생물 및 지질학자이자 산악인이다. 1963년 미국 에베레스트 원정대를 이끈 노만 다이렌퍼스의 아버지이며, 그의 부인은 씨아캉리(Siakangri 7315m) 서봉을 초등정하여 당시 여성으로는 최고봉 등정 기록을 세웠다. 1930년 국제원정대를 조직하여 캉첸중가(8598m) 서면에 도전했으나 눈사태로 실패하고, 씨아캉리와 종상피크(Jongsang Peak 7473m)를 초등했다.
40여 년간의 히말라야 연구로 이 방면에 세계적인 권위자가 되었으며 이에 대한 방대한 책을 저술했다.
독일 태생인 디렌푸르트의 부친은 독일 내에서 손꼽히는 재벌이었다. 그는 이런 부친의 막강한 부를 배경으로 히말라야 개척기에 여러 차례의 원정과 저술을 통하여 히말라야 연구에 큰 공헌을 하였다. 부레스라우 대학에서 14년간 지질학과 고생물학 교수를 역임했다.
그는 히틀러 나치 정권이 집권하자 대학 교수직을 버리고 중립국인 스위스로 망명하여 스위스 국적을 취득한다. 히말라야를 무대로 하는 영화제작 사업에 투자하면서 가산을 탕진했다.
히말라야 문헌 중 1952년 발간된 'zum Dritten Pol'이 그의 대표작이다. 이 책은 'The Third Pole-제3의 극지'란 제목의 영역판으로 출간되었다.
딤베르거Diemberger Kurt1932∼
쿠르트 딤베르거는 오스트리아 등반가다.
1942년경부터 마터호른, 아이거(Eiger)를 비롯하여 알프스에서 많은 등반활동을 했다. 1957년 마르크 슈묵크(Marcus Schmuck)가 이끄는 소규모의 브로드피크(8047m) 원정대 일원으로 참가하여 헬만 불(H·Buhl)과 함께 정상에 올라 초등정을 이루었다. 이는 8000m 봉우리에서 이룩한 최초의 알파인 스타일(Alpine Style) 등반이다.
그들은 포터와 산소 없이 등반했다. 그는 이 등반을 마치고 헬만 불과 함께 초골리사(Chogolisa·7665m)를 등반했으나, 헬만 불이 눈처마 붕괴로 사망한다.
1960년 다울라기리(8167m)를 초등함으로써 당시로서는 8000m급 거봉을 2개 이상 오른 몇 안돼는 등반가가 되었다. 그는 힌두 쿠시(Hindu Kush)의 티리히 미르(Tirich Mir 7708m) 서벽을 등반하고, 티리히 서(西)4봉을 초등했고, 그린란드·아프리카·안데스에서도 활동하였다. 또 1978년 미국의 마칼루(8481m)와 에베레스트(8850m) 원정대에도 참가하였다.
커빙턴(M·Covington)이 1980년에 설립한 판타지 리지 알피니즘(Fantasy Ridge Alpinism)의 등산학교 초청강사로 일하고 있다. 그는 1986년까지 브로드피크·다울라기리·마칼루·에베레스트·가셔브룸2·K2 등 8000m봉 6개를 등정했다. 딤베르거는 1950년대 초기에 이미 슈퍼 알피니즘을 실천한 현대와 근대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한 등산가다.
그는 1986년 한국대의 K2 원정 때, 한국대가 힘들게 작업해 놓은 비좁은 캠프 사이트 한가운데를 비집고 들어와 텐트를 쳐서 눈총을 받기도 했다.
당시 54세의 노장으로 영국 여성 줄리 튜리스(Tulis)와 K2를 등정한 후 늦은 시간까지 하산하던 중 구조대에 의해 전진 캠프에서 구출되어 한국대의 치료를 받고 하산한다. 결국 튜리스는 사망했고, 그는 동상에 걸린 손가락 2개를 절단했다.
저서 'Summits and Secrets' 1971년 발행.
오이겐 귀도 라머 Lammer Eugen Guido1862∼1945
오이겐 귀도 라머는 오스트리아의 등산가이자 비엔나 대학 교수였다.
그는 로리아(A·Lorria)와 함께 단독등반, 가이드레스 등반(Guideless Climbing) 등 대담한 등반 활동을 한 등산가다. 그는 낙석과 같은 외적 위험도 등반의 일부라고 여겼으며, 산장을 포함한 모든 인공적 구조물의 철거를 주장할 정도로 자연주의를 신봉했다. 20대 전후에는 거의가 단독등반으로 일관했으며, 기존의 루트를 피하여 새로운 루트 개척에 도전하였다.
1884년 푸스슈타인(Fussteine) 북동릉, 1885년 그로스페네디거(Grossvenediger) 서벽을 초등했고, 1887년에는 바이스호른(Weisshorn 4506m), 찌나로트호른(Zinarrothorn 4221m)을 단독등반했다. 마터호른 서벽(4478m) 등반을 시도하던 중 눈사태를 만났으나,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1893년 그로스페네디거 북서벽, 1883년 21세 때 그로스글로크너(Grossglockner 3798m) 동벽을 초등한다. 1898년에는 힌테러 브록코겔(Hinterer Broclkogel) 북릉을 초등했다. 특히 이 등반은 당시로서는 가장 높은 수준의 등반이라 할 수 있다. 라머는 루드빅푸르첼러(Ludwigpurtscheller), 에밀찌그몬디(E·zsigmondy) 등과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등반을 거부하고 극한적인 벽등반을 추구했다. 이로 인하여 많은 비난을 받았으나, 자기 주장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그의 ‘죽기 아니면 살기(Do or Die)’식의 극적인 등반태도는 1930년대의 전통적 등반방식을 고수하려는 등반가들의 감정을 자극하는 것이었으나, 등반 장비의 개발로 이러한 논쟁은 무의미하게 되었다.
그는 전형적인 19세기말의 독일·오스트리아계 등산가의 한사람으로 투쟁적인 등산가라는 평을 받고 있다.
그는 “등산이란 스스로 위험 속에 뛰어 들어 산의 위험과 싸우는 것이야말로 영웅적인 행위이며, 인간 정신의 승리를 가져오는 것이며, 이것이 등산의 최고 기쁨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니체(F·W· Nietzsche)를 숭배했고, 말년에는 열렬한 나치주의자가 되었다.
저서 'Jungborn': 극한을 추구하는 인간 행위와 등반 활동을 신비적으로 묘사한 내용의 책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청춘의 샘>이란 제호의 역서가 간행되었다.
또한 그는 과학적 관리방법을 등반 훈련에 활용하기 위해 <등산가를 위한 테일러 시스템>을 집필하였다.
라슈날, 루이 Lachenal, Louis 1920∼1955
프랑스 산악인. 알프스 가이드 출신으로 1948년 샤모니 가이드조합 멤버가 되었다.
1950년 에르조그(M. Her-zog)와 같이 안나푸르나(8091m) 초등정을 이룩했다. 이는 인류가 8000m에 오른 최초의 거봉 등정 기록이다. 그와 에르조그는 정상 등정 후 폭풍설 속을 헤매며 하산하던 중 5캠프에 대기 중이던 레뷔파와 테레이에 의해 구조되었다. 목숨을 건 이들의 하산과정은 영광과 비극이 점철된 극적인 드라마였다.
당시 그들은 정상 등정 전에 복용한 흥분제 멕시톤(Maxiton)의 영향과 심한 동상으로 자제력을 잃은 상태였다. 라슈날의 발가락 동상은 그 후 14차례의 절단 수술을 받은 후 회복됐다.
1955년 에르조그와 함께 마리넬리 꿀르와르를 통해 몬테로자(Monte Rosa)를 등정하였으며, 이들은 동상으로 손가락과 발가락이 잘린 자신들이 다시 등반할 수 있음을 확인하고 매우 기뻐했다. 그러나 그해 말 라슈날은 발레블랑쉬(Vall’ee Blanche)의 빙하에서 스키활강 도중 크레바스에 빠져 추락사한다.
그의 등반 경력을 살펴보면 1946년 그랑드조라스 북벽 워커측릉 제4등, 1947년 아이거북벽 제2등, 트레올레 북벽 제2등, 쁘레디엘 서벽 제2등, 1949년 피즈바딜레 북벽은 제6등으로 7시간만에 등반했다
저서 'Carnetss du vertige' 1956년(모리스 에르조그가 편집) 'Vertigo Note Books' (영문판)
◇ 레뷔파, 가스통 |
레뷔파, 가스통 Rebuffat Caston 1921∼1985
프랑스를 대표하는 산악인 중의 한사람. 유명한 알프스 가이드다.
프랑스 마르세이유(Marseille)에서 출생, 깔랑끄(Calangue)에서 등반활동을 시작하여 1942년 가이드가 되었고, 1946년 샤모니 안내인협회의 인정을 받았다.
그는 육군 고산병학교를 졸업했으며, 국립스키등산학교(ENSA)강사에 선임됐으나 가이드 생활을 위해 강사직을 포기했다.
레뷔파는 1920∼30년대에 초등되었던 알프스의 어려운 루트들을 1940년대에 재등하여 주목받기 시작한다. 1945년 그랑드조라스 북벽 워커능(Walker spur) 2등, 1949년 피츠바딜레(Piz Badile), 그리고 1952년 아이거 북벽(Eiger Wand), 1950년 모리스 에르조그가 이끄는 안나푸르나 초등반에도 참가했다.
당시 리오넬 테레이(L. Terray)와 한조가 되어 5캠프에 대기하던 중 정상을 오르고 거의 빈사상태에서 하산하던 에르조그와 라슈날을 구조한다.
4캠프로 향하여 괴로운 하산을 시작할 때 레뷔파는 고글을 잃어버려 설맹에 걸린 상태에서 장님처럼 헤매면서 동상에 걸린 동료를 업고 하산했다.
1956년 에귀뒤미디(Aigdu Midi)에 레뷔파 루트를 개척했으며, 국립등산스키학교 교장을 지냈다. 그는 등반활동 이외에도 많은 산악저술과 영화제작에 몰두하여 11권의 책과 4편의 산악영화를 제작하였다.
우리나라에는 <설과 암>, <별빛과 폭풍설(Etoiles Tempetes)>등이 번역되어 많은 산악인들에게 사랑 받았다. <별빛과 폭풍설>은 산악문학을 한 차원 높인 책으로 수많은 독자들이 산을 동경하도록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설과 암>에서 첫 산행에서 맛보았던 흥분을 다음과 같은 간결한 문체로 전달하고 있다.
“동반자의 선택은 등반의 선택만큼 중요하다.”
또한 그가 평생을 바쳐온 등반의 세계를 다음과 같이 글로 남겨 독자의 공감을 얻어내기도 하였다.
“산은 하나의 다른 세계다. 그것은 지구의 일부라기보다는 동떨어져 독립된 신비의 왕국인 것이다.
이 왕국에 들어서기 위한 유일한 무기는 의지와 애정뿐이다.”
또한 <설과 암>에서는 기술 위주의 등반에 집착하려는 최근의 경향을 꼬집기라도 하듯이 정신을 바탕으로 한 기술개발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테크닉은 등정의 감격을 위한 최종 수단이 되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고산의 세계는 체육관의 스케일로 축소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이 상태로 다가서는 길은 얼마나 먼가? 알피니스트들은 강한 근육, 강철같은 손가락, 완벽한 테크닉을 갖추지 않으면 안되지만 이러한 것은 단순한 도구에 불과하다. 알피니스트는 무엇보다 먼저 생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인간에게는 육체와 영혼이 있다. 높은 봉우리는 인간에게 활동과 명상을 제시하고, 인간 속에 잠들어 있는 꿈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그의 <하늘과 땅(Entre Terre et Ciel)>은 영화로 만들어져 1961년 이탈리아 트렌토(Trento)에서 열린 제10회 국제산악영화제에서 대상을 받기도 했다.
레뷔파가 산악계에 남긴 공적은 직업가이드로서의 등반활동 뿐만 아니라 저서와 영화를 통해 등산의 대중화에 성공함으로써 산악계와 일반인의 의식을 바꾸어 놓은 점에 있다.
그는 그의 저서 속에서 수많은 금언들을 쏟아냈다. 한때 레뷔파는 우리나라 50∼60대 산악인들의 우상이기도 했다.
그의 역서 <설과 암>(교진사)은 산악인들의 애독서였으며, 성서와 같은 존재였다. 빨간 실크머플러를 목에 두르고 니커보커 차림에 눈송이 모양의 무늬를 넣은 검정바탕의 스웨터 차림을 한 모습은 산악인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유행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몽블랑 마시프>라는 그의 저서 표지에 등장하는 로프를 손에 감아쥐고 침봉 끝에 서있는 사진은 수많은 젊은 클라이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는 9년 동안 암으로 고생하다가 1985년 알프스의 별빛으로 승화했다.
저서 'Etoiles et Tempetes' 1954년, 'Du Mont Blanc a 1Himalaya' 1955년, 'Neige etroc' 1959년, 'Entre Terre et ciel' 1961년, 'Cervin, cime Exemplaire' 1965년, 'Glace Neige et Roc' 1970년, 'Mon Blanc Massif' 1975년
레이, 기도 Rey Guido 1861∼1935
곡예등반(Acrobatic climb- ing)을 보급한 이탈리아 등산가다.
북이탈리아 트리노 출신으로 실업가·작가·탐험가이기도 하다.
유명 산악사진작가 겸 탐험가인 빅토리오 셀라(V. Sella)와 사촌간이다. 1880년대부터 1900년대 초에 걸쳐 알프스에서 가이드 마키냐 형제와 함께 폭넓은 등반 활동을 했다.
당시 새로운 등반 방식인 인공등반을 추구한 대표적인 등산가다. 그는 이탈리아·프랑스·스위스 등지의 여러 봉을 등반했고, 몬테로사(Monte Rosa)와 마터호른(Materhorn) 등반에 특히 열중했다. 1890년부터 마터호른의 푸르겐 능(Furrgen Ridge)에 수차례 도전하였으나 실패했고, 1899년 에뜨리에(Etrier·줄사다리)를 사용해서 남동능선으로 등반 성공했다. 푸르겐 능은 머메리가 1880년에 도전했으나 실패한 능선으로 잘 알려진 곳이다.
그가 처음 등반을 시작했을 때는 가이드 없이 했으나 1885년 콜뒤제앙 등반 중에 동생을 잃고 마키냐 형제를 가이드로 고용하여 많은 산행을 함께 하면서 평생 동안 깊은 우정을 쌓았다. 그는 오르기 힘든 암벽구간에서 인공등반을 최초로 시도하면서 줄사다리와 피톤을 사용했다.
당시 고전적인 등반을 추구하던 영국인들의 냉소와 비아냥거림에 전혀 개의치 않고 산을 새로운 방식으로 오른다는 신념을 가지고 행동했다.
20대엔 이탈리아·스위스·프랑스에서, 30대엔 몬테로자와 마터호른 주변에서, 40대엔 샤모니와 돌로미테 주변에서 활동하면서 곡예등반을 보급했다.
50대엔 전쟁 중에 입은 부상으로 등산을 그만두고, 마터호른이 바라보이는 산장에서 산을 음미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몬테로자의 크레스타 레이(Cresta Rey)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것이다. 그의 부상은 1차대전 중에 적십자활동을 하다가 입은 교통사고였으며, 등산 활동을 마친 뒤에는 평생을 즐겨 오르던 마터호른 가까이에서 살면서 마터호른을 초등한 에드워드 윔퍼를 흠모하고 존경하면서 산장에서 일생을 독신으로 보내다가 사후 고향 트리노에 묻혔다.
저서 'The Matter horn' 1907년, 'peaks and precipices' 1914년
로빈스, 로열 Robbins, Royal 1936∼
미국의 전설적인 탁월한 클라이머다. 요세미티와 알프스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암벽등반에서 등반 윤리를 강조한 자유등반의 대표주자다.
로빈스는 1957년 5일간에 걸쳐 요세미티의 하프돔(Half Dom) 북서벽에 루트를 개척했고, 1959년 엘캐피탄(Elcapitan)의 살라데월(Sala the Wall)을 자유등반으로 개척했으며, 1964년에는 노스아메리카월(North America Wall)을 취나드, 프로스트와 함께 볼트 38개로 9일 만에 올라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67년에는 엘캐피탄의 서벽도 개척했다.
1965년에는 등반무대를 알프스로 옮겨 존 할린과 함께 드류(Dru) 서벽과 남서 필라(South west pillar) 루트를 개척했으며, 유럽에 요세미티 등반기술과 신장비를 전파했다. 이 루트는 고도의 기술과 담력을 필요로 하는 루트로 스카이훅(Sky Hook), 러프(Rurp), 봉(Bong)을 비롯한 혁신적인 요세미티 등산장비가 사용되었다.
1967년 엘캐피탄의 서벽 등반에서는 주마를 이용한 색홀링(Sac Hauling)기술을 개발하여 등정하였으며, 취나드와 함께 클린 클라이밍(Clean climbing)을 제창했다.
1968년 엘캐피탄의 뮤어월(Muir Wall)을 10여일에 걸쳐 단독 초등반했다. 1970년에는 하딩(W. Harding)이 300여 개의 볼트를 박으며 개척한 엘캐피탄의 얼리모닝 라이트(Earlymorning Light)를 6일에 걸쳐 재등반하면서 하딩이 초등시 박아놓은 대부분의 볼트를 제거해 하딩과 심한 논쟁을 벌인다. 그는 거벽등반에서 두 개의 주마를 이용한 색홀링 시스템을 개발했고, 암장의 훼손을 줄이는 너트(Nut)의 이점을 최대한 활용하여 1967년 엘캐피탄의 서벽 등반에 이런 점들을 활용해 클린 클라이밍을 시도하였다.
그는 거벽등반에 이용되었던 시지택틱스(Siege tactics) 방법을 반대했으며, 일회 돌파론(Single push theory)을 주장했다. 등반활동의 창조성과 예술성, 윤리성을 강조한 자유등반의 대표자로 손꼽힌다. 러버즈 리프(lovers Leap) 등산학교를 세우고 요세미티 계곡에 로빈스 등산장비점도 운영했다.
롱스타프, 토머스 조오지 Longstaff Thomas George 1875∼1964
영국의 위대한 초기 히말라야 탐험가·의사·박물학자다.
알프스·히말라야·코카서스·캐나디언 록키·셀커크스 이외에도 북극탐험을 5차례, 히말라야 탐험을 6차례나 한 인물이다.
그는 이튼학교를 졸업하고 옥스퍼드 의대에 진학했다. 1895년 알프스지역을 여행했고, 1903년 코카서스 탐험시 쉬카라 서봉(Shkara West·5200m)을 초등정하였으며, 1905년에는 히말라야 난다데비(Nanda Davi)를 돌아 상투아리(Sanctuary) 부근까지 탐험한 후 난다데비 동봉(7434m)과 난다코트(Nanda Kot·6867m) 등정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만다.
1907년 리쉬강가 강(River Rish Ganga)을 통해 상투아리에 들어가려 했으나 실패하고, 트리슐(Trisul, 7122m)을 초등하였다.
이 등정이 인류 최초의 7000m봉 등정 기록이다. 1909년 카라코룸 지역에 들어가 시아첸 빙하(Siachen Glacier)와 테람캉그리(Teram kangri·7463m)를 발견했다. 1910년 캐나디언 록키의 아씨나보인(Assiniboine·3618m)을 등정했다. 이후 군에 입대하여 심라총영사부 참모장교를 역임했으며, 1916년에는 인도변방국경경비대 길기트 지역 부사령관까지 역임한 후 1919년에 퇴임했다. 1922년에는 영국의 2차 에베레스트 원정대에 기술고문으로 참가하였다.
그는 수많은 탐험체험들을 잡지에 기고했으며, 한 인간으로서는 유례 없는 탐험과 여행을 했다. 그는 자유스러운 여행과 탐험을 즐겼으며, 그 지방의 문화와 원주민을 사랑하고 그들과 잘 융합했다. 1929년 그가 이룩한 히말라야 업적에 대해 왕립지리학협회가 골든메달을 수여했다.
후에 왕립지리학협회 부회장을 역임했고, 알파인클럽 회장을 지냈다.저서 'This my Voyage' 1949년
◇ 말로리,조오지 허버트 레이 |
말로리, 조오지 허버트 레이 Mallory George Herbert Leigh 1886∼1924
에베레스트와 함께 영원한 미스터리를 남긴 영국산악계의 전설적인 인물.
영국 체셔루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캠브리지 대학을 졸업하고 에베레스트 원정대에 참여하기 전까지는 교사생활을 했다. 영국과 알프스에서 등산 활동을 한 뒤 초기 에베레스트 등반대에 참여하여 제1차(1921년), 제2차(1922년), 제3차(1924년)까지 연속하여 원정대에 참가했다. 그에게 등산을 가르친 사람은 영국 최고의 산악인으로 꼽히는 제프리원스롭 영(Young Geofrry winthrop)이다. 윈스롭 영은 1차대전 중 한쪽 다리를 잃고도 의족으로 마터호른을 오른 인물이기도 하다.
두드러진 등반기록은 없으나 인상적인 외모와 성격, 지적이고 재치가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였다. 어느 등산가도 그만큼 많은 일화나 미스터리를 남긴 등산가는 없었다. 오늘날 만인에게 회자되는 “Because it is there” 라는 말은 그가 남긴 명언이다.
이 말은 3차 원정을 떠나기 전에 필라델피아의 한 강연에서 청중 중 어느 부인이 “왜 에베레스트에 올라가길 원하는가?”라는 질문에 답변한 말이다. 그는 이 말을 남긴 후 제3차 원정에서 어빈과 함께 6캠프(8220m)를 떠난 후 정상 부위의 구름 속으로 자취를 감춘 채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이로부터 75년이 지난 1999년 그의 시체가 정상 부위에서 발견되어 그의 망령은 또 한번 세상을 놀라게 했다.
1921년 정찰 위주의 에베레스트 원정에서 그의 능력을 인정받게 되어 2·3차에서도 원정대원으로 선발되어 산악계의 행운아로 불려졌다. 거대한 에베레스트는 그를 압도했다. 그는 북면으로의 등정 가능성을 확인하고 웨스턴 쿰1(western cwm·1953년 헌트가 이끄는 초등대는 웨스턴 쿰을 통해 정상 등정에 성공했다)을 통과하기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말로리는 1924년 노턴(E.F Norton)을 대장으로 한 3차 원정에서 6월 8일 동료 어빈(A.C Irvine)과 6캠프(8220m)를 떠나 정상 등정 시도 중에 실종되었다. 당시 6캠프에 있던 오델(N.E. odell)은 구름 사이로 북동능선 상에서 움직이는 그들을 보았으나 바람이 불고 구름이 잠깐 가린 후 그들의 모습은 사라졌다. 구름이 다시 걷혔을 때 그들의 모습은 사라진 후였으며,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 사고는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겨졌다. 과연 그들은 정상을 밟고 하산 중에 사고를 당한 것인가? 이 문제는 세월이 흐를수록 의문을 증폭시켜왔다.
1933년 영국의 4차 에베레스트 원정대는 북동릉 8229m지점에서 9년 전의 피켈 한 자루를 발견했는데 이것은 1924년에 실종된 어빈의 것으로 밝혀졌다. 1953년 에베레스트를 초등한 힐러리(E.P. Hillary)와 셰르파 텐징(Tenzing Norgay)은 말로리와 어빈이 정상에 오른 어떤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한다.
1960년 중국의 초모랑마(Chomolungma·8850m)원정대의 대장이었던 사점춘(史占春)은 1981년 LA타임지와 인터뷰에서 그의 대원이 북동릉 8500m 지점서 피켈자루로 보이는 나무 방망이와 로프를 발견하였으며, 수백m 밑에서는 산소봄베 2개를 찾았는데 그중 하나에 ‘영국제’라고 씌어져 있었다고 말했다.
“말로리가 정상을 밟았다고 생각하는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의문이라고 답했다. 결과적으로 사고는 8500m지점에서 일어났고, 말로리와 어빈은 이 지점에서 추락한 것으로 보인다.
1999년 말로리 시신 탐색에 나선 다국적 탐색대는 에릭 시몬스(Eric Simonson) 대장 지휘하에 원정에 나섰다.
과연 누가 에베레스트 최초 정복자였는지 밝혀내려는 일념으로 수색에 나선 이들은 5월 3일 에베레스트 북쪽 능선에서 실종 75년 만에 말로리의 시체를 찾아냈고, 시체 발굴기는
시체 발굴에 성공한 에릭시몬스 등반대는 중국 산악인 왕홍바오의 진술에 크게 도움을 받았다.
왕홍바오는 지난 1975년 에베레스트 등정 중 북쪽 루트에서 세계대전 이전 차림새의 영국인 시체를 목격했다며 옷에 손을 대자 바스러졌다고 전해주었다.
말로리의 존재를 몰랐던 그는 이 사실을 1979년에 함께 에베레스트 등정에 나선 일본인 하세가와에게 처음 알렸으나 하세가와는 바로 다음날 눈사태로 사망해 위치 단서가 사라지고 말았다.
에베레스트를 두 번 오른 라인홀트 메스너는
해발 8,500m에 있는 수직의 세컨드 스텝은 당시의 열악한 장비로는 극복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 지점은 세계대전 어떤 원정대도 돌파하지 못한 지점으로 1975년 중국대가 알루미늄 사다리와 하켄을 사용해서 돌파한 곳으로 지금도 이 지점은 자유등반을 허락지 않는 곳이다.
당시 징이 박힌 등산화와 20㎞의 배낭을 멘 채 이곳을 돌파할 수 있었는지는 의문이 앞선다고 했으며, 오후 늦은 시간에 이 지점에 도착한 말로리는 식수와 산소가 바닥이 났고, 산소가 없는 죽음의 지대에서 오래 머문 여파로 근육이 풀리고 마취된 상태에서 비틀거리며 움직였다는 것은 어떤 실수도 치명적인 결과와 연결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결국 그들은 등정에 실패했고, 하산 도중 사망했음이 분명하다고 했다. 말로리 시체가 발견된 지점은 그들이 세컨드 스텝에서 실패했음을 알려주는 증거라고 했다.
또한 그의 고글이 주머니 안에서 발견된 것으로 보아 사고는 일몰 후 어둠 속에서 일어났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말로리의 시체는 유족의 뜻에 따라 수색대가 에베레스트 북쪽 능선에 안장하고 그 장소는 비밀에 부쳤다. 리버트슨(D.Rebertson)은 그를 추모하여 1969년에 'George Mallory' 라는 책을 썼으며, 듀드레이 그린(Dudley Green)은 1990년에 'Mallory of Everest'라는 전기물을 펴냈다.
라인홀드 메스너는 그의 의문의 죽음을 파헤친 '에베레스트 미스테리' (삶과 꿈)라는 책을 펴냈다.
1 쿰(Cwn) : 독일어권의 카르(Kar)와 같은 의미. 영·불권에서는 서크(Cirque)라고 부른다. 말발굽 모양으로 빙하가 침식되어 생기는 반원형의 지형.
◇ 린 힐 |
린 힐 Lynn Hill 1961∼
1961년 미시건주에서 출생. 미국을 대표하는 전문 여성 자유등반가다. 암벽등반의 뛰어난 업적 때문에 1984년 미국 알파인클럽상을 수상했다. 그녀는 세계 최강의 남성 클라이머들조차도 이룩해 내지 못한 엘캐피탄의 노즈(Nose)를 자유등반으로 올랐다. 1994년 루트를 프리화하기 위해 사전연습을 한 뒤 그레이트 루프(Great Roof)피치만을 빼고 나머지 모든 피치를 자유등반으로 올랐다.
스티브 셔튼의 확보를 받으며 등반을 시작한 그녀는 9월 19일 저녁 10시부터 등반을 시작, 23시간 동안 쉬지 않고 모든 피치를 선등으로 마무리 한 뒤, 다음날 저녁 9시에 등반을 끝냈다.
총 34마디의 노즈는 1957년 워랜 하딩이 다양한 인공등반기술을 구사하여 초등했던 루트로 그녀의 자유등반으로 최난도 피치의 등급이 5.13b로 매겨졌다.
그녀는 1995년 키르키즈스탄의 악수산군에서 그랙 차일드와 함께 등반을 하면서 러시아타워에서 페레스트로이카 크랙을 28시간 동안 전 구간을 자유등반(5.12급)했다.
또한 알렉스 로우와 함께 약 1200m의 PK4810을 자유등반으로 초등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3일 동안 이루어진 이 등반은 5.12b급의 고난도 루트개척이었다. 그녀는 1986년부터 12차례의 각종 국제자유등반대회에 나가 9차례나 우승하는 저력을 보여준 슈퍼우먼이다.
마끼 아리쓰네 1894~미상
1920년대 유럽 알프스에서 활동한 일본을 대표하는 산악인.
게이오(慶應)대학 출신으로 미국과 영국에 유학했다.
영국에서 ‘일본등산의 아버지’라 불리는 웨스턴(W.Weston)을 만나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의 권유로 스위스로 건너가 그린델발트(Glindel wald)를 중심으로 등산 활동을 시작한다.
1920년 베터호른(wetterhorn)과 아이거(Eiger)를 오르고, 1921년 몬테 로자(Monte Rosa)와 마터호른(Matterhorn)을 오른 후 아이거 동릉을 초등했다.
그해 말 귀국하여 일본에 본격적인 알프스식 등반방식을 소개하여 일본의 등반기술 향상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1925년 일본 최초의 해외원정대를 이끌고 캐나디언 로키(canadian Rockies)에 가서 앨버타(Mt, Alberta·3619m)를 초등했다.
1950년대 초 일본이 히말라야 8000m급 처녀봉인 마나슬루(Manaslu·8481m) 원정을 계획하는데, 그의 주도하에 히말라야 위원회가 조직되었다.
1952년 첫 정찰 후 1954년과 1955년 두 번의 원정이 있었으나 원주민들과의 불화로 실패한다. 1956년 그를 대장으로 하는 거국적인 원정대가 조직되어 마나슬루 초등정을 성공시킨다. 이 원정의 성공은 일본의 히말라야 원정에 불씨를 지피는 계기를 만든다.
그는 일본산악회의 제4대와 7대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저서 <산행> <피켈의 추억> <마나슬루 등정기> <나의 산행> <마나슬루, 소년 소녀를 위해서>
마느뇨, 기도 Magnone, Guido 1918~미상
1950년대에 활동한 프랑스를 대표하는 산악인.
알프스 최후 과제로 불리던 쁘띠드류(Petit Dru)서벽을 1952년 7월에 초등하여 유명해졌다. 그는 이 등반에서 250개의 피톤을 사용했다. 쁘띠드류 서벽등반은 북면으로부터 볼트를 박아가며 줄사다리를 사용해서 서벽으로 진입 등반에 성공했다. 이는 1950년대 등반 활동의 이정표를 세운 것이었다.
1951년 12월 리오넬 테레이(L.Terray)와 함께 남미 파타고니아(Patagonia)에 있는 난이도 6A1인 피츠로이(Fitz Roy·3441m) 침봉에 고정 로프를 설치하고, 1952년 2월에 초등정에 성공했다.
1954년 마칼루(8481m)를 정찰한 후 1955년 프랑코(J, Franco)가 이끄는 마칼루원정대에 참가하여 9명의 전 대원이 등정에 성공한다.
이 등반은 히말라야 원정사상 유례가 없는 가장 완벽한 등반이었다. 이때의 등반대원들은 당대의 프랑스를 대표하는 쿠지(couzy), 테레이, 프랑코, 마뇨느 등이었다.
1956년에는 무즈타그타워(Muztagh Tower·7232m) 남동릉을 초등반했다.
1959년 프랑코가 이끄는 자누(Jannu·7710m)원정에 참가해 테레이와 함께 정상에 섰다. 저서 'La facewdes Drus' (1953)
◇ 머메리, 앨버트 프레드릭 |
머메리, 앨버트 프레드릭 Mummery, Albert Frederick 1855~1895
현대등반의 기초를 다졌으며 영국산악인 최초로 8000m거봉에 도전했다.
많은 추종자를 거느린 신화적인 인물이다, 콘웨이(W. Conway)는 그를 평하여 “모든 세대를 통한 가장 위대한 산악인”이라고 말했고, 영(G.W. Young)은 “그가 너무 과대평가 되었으나, 등반의 발전에 기여한 그의 공로는 아무도 그를 과소평가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영국 켄트(Kent)주의 도버(Dover)에서 부유한 피혁상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병약한 소년시절을 보냈다. 그의 사회적 배경은 귀족적인 분위기의 영국산악회로부터 배척을 당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를 ‘근대스포츠 등산의 비조’ 혹은 ‘등반사의 일대 반역아’로 불리었던 까닭은, 그가 안전하고 쉬운 루트를 통하여 정상에 오르는 것만을 목적으로 삼던 당시의 일반적인 등산풍조에 대항하여 정상에 오른다는 사실 자체(등정주의)보다 좀더 어려운 루트를 택하는 새로운 모험적인 등반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머메리즘(mummerism·등로주의)을 제창했기 때문이다.
그의 등반편력은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전기에는 안내인 부르게너(A.Burgener)와 동행하였고, 후기에 속하는 1890년대부터는 안내인을 동반하지 않는 가이드레스 등반(guideless climbing)으로 전환하였다.
1879년 위험한 루트로 알려진 마터호른의 츠무트 능선(zmutt Ridge)을 단 한번의 시도로 성공하여 세상을 놀라게 하였으며, 1892년 그레퐁(Grepon), 1893년 당뒤르껭(Dentdu Reguin), 1894년 몽블랑(Mont Bland)의 올드브렌바루트(Old Brenva Route)를 초등했다.
그 외에도 에기뒤쁠랑(Aigdu plan) 북벽과 그랑드조라스(Grandes jorases)의 이롱델르릉(Hirondelles Ridge)에 도전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1895년 머메리는 콜리(J.N.collie), 해스팅스(G.Hastings), 그리고 구르카(Gurkhas)인 라고비르(Raghobir), 고만싱(Gomansingh)과 함께 히말라야의 낭가파르밧(Nanga parbat·8125m)을 원정했다. 규모가 크고 접근이 쉬워 이 산을 택했지만 일반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았으며 자료도 없는 상태였다.
머메리가 그의 부인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보면 이들이 낭가파르밧 등반을 과소평가 한 것으로 보인다.
정찰을 마친 그들은 서쪽의 디아미르벽(Diamir Face)을 목표로 하였으나 식량부족과 구르카인들의 고산병으로 포기하고, 북면의 라키오트(Rakhiot) 계곡으로 가기로 했다. 콜리와 해스팅스는 포터들과 함께 식량보충을 위해 돌아가고, 머메리는 2명의 구르카인들과 서북능선의 디아마꼴(Diama col·6200m)을 횡단하여 라키오트 계곡에서 합류하기로 하였다.
콜리파티가 라키오트에 도착했을 때 머메리 일행은 없었다.
그들은 온 길을 되돌아 출발점에 갔으나 머메리의 빈 텐트만 있을 뿐 그가 돌아온 흔적은 발견할 수 없었다. 그들은 눈사태를 만나 압사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지배적이다.
머메리는 히말라야 최초의 희생자가 됐고, 이 사고는 1934년과 1937년에 연이어 일어난 독일 낭가파르밧 원정대 비극의 전조였다.
저서로는 윔퍼의 <알프스 등반기>와 더불어 산악문학의 불멸의 고전으로 손꼽히는 'My climbs in the Alps and Caucasus' (1895)가 있다.
한국어 번역판으로는 오정환이 옮긴 <알프스에서 카프카스로>가 있다. 이 책은 머메리가 히말라야로 떠나기 직전에 쓴 책으로 사후에 출간되었으며 당시 유럽 산악계의 강한 영향을 끼쳤다.
메르클 빌리 Merkl, Willy 1900~1934
독일의 산악인. 독일의 국유 철도기사였다.
돌로미테를 비롯한 동부알프스에서 대담한 등반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서부 알프스에서도 훌륭한 빙벽등반을 하였다. 1929년 코카서스의 코쉬탄타우(koshtantau) 북릉을 초등정하고 우쉬바(ushba) 남봉을 등정하였다.
뮌헨파(Munich school)의 일원으로 1934년 비극으로 끝난 낭가파르밧 원정대의 대장이었다. 1932년 메르클은 1929년의 벨첸바하(W.Welzenbach) 계획을 답습하여 낭가파르밧에 도전하였다. 6명의 독일인과 보도담당여성을 포함한 2명의 미국인으로 구성된 독일·미국 혼성팀이었다.
그들은 포터의 도주, 악천후, 대원의 질병 등 여러 가지 장애로 많은 시간을 소비하여 결국에는 몬순이 시작되는 6월말에야 겨우 베이스캠프를 설치할 수 있었다.
낭가파르밧이 위치한 서부지역은 몬순이 약간 늦게 분다는 한 가닥 희망을 갖고 등반을 시작했으나 몬순이 불어 닥쳐 7캠프까지 설치한 후 퇴각했다.
1934년 여름, 낭가파르밧에 재도전한 그는 1932년의 원정대원 2명을 포함 8명으로 구성된 강력한 원정대를 조직하였다.
그는 1932년의 루트를 택해 순조롭게 4캠프까지 설치했다. 그러나 대원 드렉셀(A.Drexel)이 폐수종으로 사망하여 그의 장례를 치르고, 또한 셰르파의 식량이 떨어져 추가 공급을 기다리며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
7월 8일, 7480m 지점에 8캠프가 설치되면서 정상 등정은 시간문제처럼 보였으나 몬순의 폭풍설이 불어 닥쳐 어쩔 수 없이 철수해야했다.
그러나 맹렬한 폭풍설 속에서의 후퇴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폭풍설 속에서 하산길을 잃고 헤매던 중, 셰르파 니마 누르부(Nima Nurbu)가 죽고, 이어 대원 빌란트(U.wieland)도 쓰러졌다. 메르클과 벨첸바하(w.welzenbach), 그리고 셰르파 앙 체리(Ang Tsering)와 게이레이(Gaylay)는 7캠프에서 굶주리며 밤을 새웠다. 숨진 벨첸바하를 텐트에 눕혀둔 채 나머지 생존자들은 6캠프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완전히 지쳐 기진맥진한 메르클과 게이레이를 두고 앙 체링은 구조를 청하러 4캠프로 내려왔다.
4캠프에 미리 도착해 있던 아쉔브렌너(P. Aschenbrenner)와 슈나이더(E.schneider)는 앙 체링과 함께 메르클과 게이레이를 구조하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했으나 계속되는 폭풍설로 실패하였다. 메르클과 운명을 같이한 셰르파 게이레이의 행위는 고용관계를 떠난 헌신적인 미담으로 전해져온다.
결국 메르클 원정대는 4명의 대원과 셰르파 9명의 목숨을 앗아간 채 비극으로 막을 내린다.
두 차례의 원정실패로 메르클의 지도력은 심한 비난을 받는다. 미지의 봉에 도전해서 눈보라 속에서 숨진 그에게 가해진 이 비난은 너무나 불행한 것이었다.
1953년 메르클의 의형제 헤를리히코퍼(K.M. Herrligkoffer)가 이끄는 원정대는 이 산에 맞서다 죽은 메르클의 한을 풀었다. 불(H.Buhl)이 단독으로 초등정하였는데, 이는 8000m급 봉우리에서 이룩한 최초의 단독 초등정으로 유명하다.
저서로는 'Ein weg zum Nanga parbat' (1936)이 있다. 이 책은 메르클이 죽은 뒤에 의형제인 헤를리히코퍼가 편집하여 발간했다.
메르클원정대의 비극을 다룬 책으로는 한국어 번역판 <비극의 낭가파르밧>(프릿츠 베히톨드 저. 안미정 역)이 있다. 이 책은 생존대원 프릿츠 베히톨드(Fritz Bechtold)가 썼다.
메스너, 라인홀드 Messner, Reinhold 1944~
이탈리아 남티롤(Tyroll)의 빌네스에서 출생한 현존하는 가장 탁월한 등산가.
남티롤 지방에서 등반활동을 시작했다. 그의 등반 토대는 오랫동안 활동해온 알프스 등반에서 기인한 것이다. 본격적인 등반활동은 1970년 낭가파르밧 원정에 참가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그는 이탈리아 파두아대학 공학도로 이 원정에 참가했다.
메스너의 세계등산사적인 업적은 1978년 페터 하벨러와 둘이서 에베레스트를 무산소로 등정하고 연이어 같은 해에 낭가파르밧을 무산소로 단독 등정한 일이다. 이 일로 그는 세계적인 영웅이 되었으며 이때부터 초인이라 불리었다. 1986년에는 세계 최고봉 8000m급 14개봉 모두를 완등하였다.
완등에 소요된 기간은 1970년부터 1986년까지 16년이 소요되었다.
그는 그 동안 50여권에 이르는 등산서적을 저술하는 등 한층 돋보이는 활동을 해왔다. 그는 보나티(W. Bonatti)·불(H. Buhl)·벨첸바하(W.welzenbach)의 정신을 계승하고, 기존의 난이등급에 7급을 첨가하여 스스로 7급 등반을 하면서 산악활동에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그는 익스펜션 볼트(Expansion Bolt)의 사용을 강력히 비난하고, 클린클라이밍(Clean Climbing)을 주장하면서 인간의 능력과 기술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 무산소등반 등을 해냈다. 등산은 보조수단을 쓰지 않고 순수한 수단(By fair means)에 의해서만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이룩한 주요등반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68년 아이거 북릉 초등·마르몰라타 남벽 직등루트 초등.
1969년 알프스 드르와트 북벽 단독 초등.
1970년 낭가파르밧 루팔측벽 초등.
1972년 마나슬루 남벽 초등.
1974년 아콩카구아(Aconcagua·6960m) 남벽 직등루트 단독등반·아이거 북벽 10시간만에 등정·마터호른 북벽 8시간만에 등정.
1975년 히든피크 북서벽 초등(페터 하벨러와 둘이서 최초로 알파인 스타일로 등반).
1976년 매킨리 머터나하트존네벽 초등.
1978년 킬리만자로(Kilimanjaro, 5895m)의 브리치월(Breach Wall)상단 1220m의 브리치 아이시클(Breach Icicle)을 12시간에 직등·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낭가파르바트 디아미르벽 단독 초등.
1979년 K2 등정.
1980년 에베레스트를 북측에서 단독 초등(에베레스트 2회 등정).
1981년 시샤팡마 등정.
1982년 5월 캉첸중가·7월 가셔브룸 2봉·8월 브로드피크 등정. 한 시즌에 8000m급 봉우리 3개 등정.
1983년 초오유 등정.
1984년 6월 25일 가셔브룸 2봉 등정에 이어 6월 28일에 히든피크 종주등반(하강 중 새로운 루트 개척).
1985년 4월 24일 안나푸르나 북서벽을 초등정하고, 21일 뒤인 5월 15일에 다울라기리 등정.
1986년 9월 26일 마칼루를 등정하고, 21일 뒤인 10월 16일에 로체 등정.
이로써 8000m급 14개봉 모두를 올랐다. 두 차례씩 오른 4개봉을 합쳐 모두 18차례나 8000m급 고봉을 올랐다.
그는 무산소, 단독등반, 알파인 스타일, 헤드트릭 등 독특한 등반 형식을 창출해낸 금세기 최고의 등반가다.
저서 'Der7-Grad' 1973년, 'Die Hera usforderung' 1976, 'Die Grossen wnde' 1977, 'Aufbruch ins Abenteuer' 1978, 'EVEREST-Expedition zum Endpunkt' 1979, 'Alleingang Nanga parbat' 1979, 'Arena der Einsamkeit' 1980, 'K2-Bergder Berge' 1980, 'Der GI serne Horizont' 1982, 'Mein Weg' 1982, 'berlebt alle14 Achtta usender' 1987 번역서 <검은 고독 흰 고독> 김영도 옮김, <죽음의 지대> 김영도 옮김, <제7급> 김영도 옮김, <모험으로의 출발> 김성진 옮김, <도전> 김성진 옮김, <나는 살아서 돌아왔다> 김성진 옮김, <자유로운 영혼> 강용순 옮김, <산은 내게 말한다> 강현주 옮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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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우어, 파울 |
바우어, 파울 Bauer, paul1896~미상
독일의 산악인. 위축된 독일산악계의 재건에 힘썼다.
쉐낭거 북벽(schonanger Nordwand)을 초등하고, 베터슈타인(Wetter stein)을 초등했다. 1929년 바우어가 조직한 코카서스원정대는 독일의 등반기술을 러시아에 전수해 주었으며, 러시아 등반기술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두 차례에 걸쳐 캉첸중가(Kangchen Junga·8598m)를 원정했다.
1929년 그가 지휘한 원정대는 캉첸중가 북동릉 정찰에서 7393m지점까지 올랐고, 1931년 재차 시도한 원정대에서는 대원 빈(W.Wien)이 7700m지점까지 올랐으나 대원 한 사람이 사망하여 끝내 실패하고 만다.
1936년 그가 꾸린 시킴(Sikkim)원정대는 시니올추(Siniolchu·6890m)를 초등정하였다. 1934년과 1937년의 두 번에 걸친 낭가파르밧 원정에서 대참사를 겪은 독일은 우수한 히말라야 경험자들을 모두 잃게 되자, 그는 독일산악계의 재건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38년 제4차 낭가파르밧 원정대를 조직한 그는 직접 전면에 나서 진두지휘를 하면서 7300m지점까지 올랐으나 계속되는 악천후로 1934년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철수한다.
저서 'Im kampf um den HimalaJa' 1931, 'um den kantsch' 1933, 'Auf kundfahrt in HimalaJa' 1937, 'kampf un den HimalaJa' 1952, 'Das Ringen umden Nanga parbat' 1955
발마, 자크 Balmat, Jaques 1762~1834
몽블랑(Mont Blanc·4807m)을 초등정하여 근대 등산의 문을 연 사람이다.
1786년 8월 8일, 발마는 샤모니의 의사 미셀 파가르(Michel Paccard)와 함께 몽블랑을 처음 오른 사람으로 그의 직업은 수정채취업자 겸 사냥꾼이었다.
이 사실이 중요한 것은 몽블랑 등정이 근대적 등산의 개막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발마는 1760년 샤모니를 방문했던 스위스의 소쉬르(H. B. de Saussure)가 몽블랑 초등자에게 상금을 걸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 산을 등정한다.
발마와 파가르는 몇몇의 지방 주민과 함께 현재의 발로산장(Vallot Hut) 위치까지 올랐으나 초등정 때는 다른 루트를 택했으며, 이것은 동반자인 파가르의 의견으로 보인다. 등반 중 발마가 등반을 포기하려 했다는 증거도 있으나 1783년 첫 도전에 실패한 부리는 파가르의 성공을 시샘한 나머지 발마가 이 등반을 주도했다고 주장했다.
부리는 발마를 부추겨 파가르가 설맹과 동상에 걸려 중도에 포기한 채 오르지 못했다고 악의에 찬 허위 사실을 유포했고, 발마 역시 이 역사적인 업적을 혼자 독점하려는 의도에서 거짓 증언과 허위선전을 했다. 발마는 용기와 모험심은 강했으나 성품이 비열하여 혼자서 영웅이 되려고 했다.
이 두 사람의 거짓 증언에 대하여 당대의 대문호 뒤마가 일방적인 모험담을 매끄러운 필치로 써서 세상에 발표하자 대중들은 이 사실을 믿어버렸다.
이후 파가르의 초등정 논쟁은 150년간이나 계속되었다.
샤모니 광장에 몽블랑 초등정을 기념하는 동상이 건립될 당시까지만 해도 몽블랑 등정은 발마 한 사람만이 성공한 것으로 굳어져 있었다.
그래서 파가르는 동상 건립 대열에서 빠져버리고 소쉬르와 발마 두 사람의 것만 세워졌다. 이후 파가르의 동상도 함께 세우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여전히 그 상태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파가르의 등정 의혹에 대해, 그 진상 규명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영국의 유명 산악인 프레시필드(D. W. Freshfield)다. 그는 진실 규명을 위해 집요한 추적을 계속, 드 소쉬르의 증손자가 보관해 온 자료를 찾아내어 100여 년 동안 숨겨져 왔던 진실을 밝혀낸다.
그는 샤모니에 서 있는 소쉬르와 발마의 기념동상 옆에 오랫동안 버려져 멸시를 받아온 진정한 몽블랑 초등자인 파가르를 기념하는 또 하나의 동상을 세울 것을 주장했다.
발마는 몽블랑 초등정 이후 파리 출신 여성 파라디(M. Paradis)와 네 차례나 몽블랑을 오른 후 채광업을 시작했으나 채굴작업 도중 사고로 사망한다.
그의 조카 손자인 오귀스트 발마(Auguste Balmat) 또한 등산 안내인이 되었다. 그는 지성과 헌신적인 책임감을 겸비한 등산가이드로 조부와는 달리 부와 명성에 초연했다.
오귀스트는 1942~43년 빙하학자인 포브스(J. Forbes)와 빙하 탐색을 하고, 1854년 알프스 황금시대를 개막시킨 베터호른(Wetterhorn·3701m) 초등정을 영국 등산가 윌스(Alfred Wills)와 함께 성사시킨다.
베히톨트, 프리츠 Bechtold, Fritz 미상~1962
독일 등산가. 1932년부터 1939년까지 네 차례나 낭가파르밧에 도전했으나 등정에 실패한 인물이다.
1934년 낭가파르밧에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은 빌리 메르클 대장의 동료로 알프스와 코카서스에서 등반활동을 했다. 1932년 제1차 독일·미국 합동 낭가파르밧 원정대에 참가했고, 1934년 제2차 원정(대장 메르클)에도 참가하여 비극의 현장을 직접 체험한 후 ‘비극의 낭가파르밧’이라는 유명한 조난 보고서를 남긴다.
1937년 칼빈(Karlwien)이 이끄는 제3차 독일원정대가 대장을 비롯하여 7명의 대원과 9명의 셰르파가 눈사태로 전멸했을 때, 파울 바우어(Paul Bauer)와 함께 현지에 가서 수색에 참여한다. 1938년 바우어가 지휘하는 제 4차 원정에도 참여했으나 7300m 지점에서 악천후로 철수한다.
1934년 10명의 대원이 사망한 대참사 때, 7캠프에서 고소증세를 보이는 셰르파들을 데리고 먼저 하산하여 목숨을 건진다.
그가 6캠프(6955m)를 통과할 때 엄청난 폭풍설에 휩싸였으나 기적적으로 생환한다.
저서로는 'Deusche am Nangaparbat' (1934), 국내 역서 '비극의 낭가파르밧' (프릿츠 베히톨트, 안미정 역), 'Nanga Parbat Advanture' (영문판·1935)가 있다.
벨첸바흐, 빌로 Welzenbach, Willo 1900~1934
독일을 대표하는 탁월한 등산가. 벨첸바흐, 빌헬름(Wilhelm)이라고도 부른다.
독일 뮌헨 출신으로 문무 겸장의 인텔리 산악인이며, 순수 빙벽등반의 장르를 연 알프스 북벽 등반의 맹장이다. 1924년부터 1933년까지 계속된 그의 북벽 등반 업적은 곧 1920~30년대 세계 등반사의 일부가 되었다.
그가 생전에 오른 북벽 루트들은 현재도 힘든 곳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는 뒬퍼(H. Dulfer)가 초안한 기존의 난이등급에 6급을 첨가하여 근대적인 난이등급 체계를 완성했다.
1932년 동부알프스 빌더 카이저(Wilder Kaiser) 산군의 암장에 난이도를 6급으로 나누어 약 200여 개의 루트를 냈다. 벨첸바흐의 6단계 그레이딩을 벨첸바흐 스칼라(Welzenbach Skala) 또는 알펜 스칼라(Alpen Skala)라 한다. 그는 난이도를 석회암, 화강암, 빙벽 등 세 가지로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스칼라는 등급을 뜻하는 독일어다.
1924년 그로스 비스 바흐호른(Gross wies bachhorn) 서북벽 초등시 동료인 프리츠 리겔레(Fritz Rigele)가 고안한 빙벽용 하켄을 사용해서 등반함으로써 빙벽용 하켄의 일반화에 공헌했다. 두 사람의 만남은 빙벽등반 기술 발전에 길이 남을 기념비적인 일이다.
암벽 틈새에 박는 록 하켄의 발명이 한스 피히틀(Hans Fiechtl)의 공로였다면, 아이스 하켄의 발명과 일반화는 리겔레와 벨첸바흐 두 사람의 공로다.
아이스 하켄의 개발과 보급은 1920년대 유럽 클라이머들에게 구원의 메시지나 다름없었다.
이 용구의 도움으로 눈, 얼음이 덮인 험난한 북벽들이 차례로 정복되었다. 벨첸바흐는 20세에 등산을 시작하여 34세에 낭가파르밧 7캠프에서 죽음을 맞을 때까지 14년 동안에 940여 개의 봉을 등정했으며, 이중 50여 개가 초등반이다. 근대적인 그레이드를 완성했을 뿐만 아니라 아이스 하켄을 보급하여 빙벽등반의 한계를 한 차원 높이는데 공헌한다.
1924년부터 1933년까지 그가 9년 동안에 이룩한 중요 북벽 등반의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24년 그로스 비스 바흐호른 서북벽 초등
1925년 당데랑(Dent d’Herens) 북벽 직등으로 초등. 이는 같은 해 졸레더(E. Solleder)가 이룩한 치베타(Civetta) 북서벽 초등과 함께 1920년대를 대표하는 등반으로 높게 평가된다.
같은 해 리스캄(Lyskamm) 북벽 초등
1926년 그로스 글로크너(Gross Glockner) 북벽 초등. 체르마트 브라이트호른(Zermatt Breithorn) 북서면 초등.
글로크너 지역의 글로커린(Glockerin) 북서벽 초등. 아이스퀘겔레(Eiskogele) 북벽 초등. 1926년은 벨첸바흐의 생애에서 가장 많은 루트를 개척한 한 해였다.
총 149개의 산을 올랐으며, 이중 19개는 초등이다.
1930년 그로스 피셔호른(Gross Fiescherhorn) 북벽 직등.
1931년 그랑 샬모즈(Grands Charmoz) 북벽 초등.
1932년 그로스호른(Grosshorn) 북벽 초등.
1933년 네스호른(Nesthorn) 북벽 초등.
1929년 낭가파르밧 원정을 추진했으나 무산되었으며, 1934년 메르클(M. Merkl)이 이끄는 제2차 낭가파르밧 원정대에 부대장으로 참가한다.
이 원정에서 몬순기 폭풍설로 인해 철수하던 중 질버 자텔(Silver Sattel) 부근에서 침낭도 없이 비박을 하고, 다음날 겨우 7캠프까지 왔으나 이틀 동안 식량과 연료 없이 버티다가 극적인 최후를 마친다.
눈보라가 계속 몰아치자 그의 동료들은 할 수 없이 그의 시신을 텐트 안에 남겨둔 채 철수했으나, 눈보라 속을 헤매다 그들도 모두 사망한다.
당시 벨첸바흐가 지나간 곳에는 ‘벨첸바흐 빙원’과 ‘벨첸바흐 꿀르와르’라는 지명을 붙여 그를 기념하고 있다.
저서로는 'Willo Welzenbach Berg-fahrten' (1935)이 있다.
◇ 보나티, 발터 |
보나티, 발터 Bonatti, Walter 1930~
1950년대를 대표하는 이탈리아 등산가. 그는 1950년대 중반 동계 북벽 등반이라는 새 장르를 개척한 주인공으로 전후 알피니즘을 주도했다. 보나티는 두 차례에 걸쳐 그랑까 생(Grand Capucion) 동벽 등반에 실패한 후, 1951년 마침내 초등정에 성공한다.
1976년 초등 25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에서 21세에 초등반한 루트를 46세에 재등하는 저력을 보여준다. 까 생 등반은 연속적인 인공등반방식(Continuous Artifactual Climbing)을 서부알프스에 최초로 적용시킨 것이었다.
1955년에는 드류(Dru)의 보나티필라(Bonatti Piller)라 부르는 남서필라(South West Pillar)를 단독으로 초등정한다.
그는 이 등반으로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용감한 시민상을 받는다. 그는 시상식장에서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고,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고 싶은 욕구 때문에 인간은 모험을 하게 된다. 불가능의 매력은 그것을 포기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극복하는데 있다”고 말했다.
보나타필라는 인공등반 A1~A2, 자유등반 V~Ⅵ의 난이도를 지닌 어려운 루트로, 그는 한 개의 볼트도 사용하지 않은 채 단독으로 등반을 성공시켜 세인들을 놀라게 했다. 6일이 소요된 이 등반에서 그는손가락에 심한 동상이 걸렸다. 이때 그는 1주일분의 식량과 장비를 자루(Duffle Bag)에 매달아 끌어올리는 방식을 사용하였다.
이 방법은 요세미티보다 10년이나 앞선 것으로 홀링색(Hauling Sack) 시스템을 최초로 개발한 것이다.
1957년 고비(T. Gobbi)와 함께 몽블랑의 에크파일러 버트레스(Eckpfeiler Buttress)를 초등한다. 이곳은 대략 700m의 가파른 암벽과 500m의 암·빙 혼합구간과 600m의 빙벽으로 이루어진 낙석이 심한 매우 위험한 루트다.
1961년 마지막 미등의 벽으로 남은 6등급의 프레네이 중앙필라를 이탈리아와 프랑스 산악인 7명이 합동으로 등반 중 폭풍설에 휩싸여 그의 파트너 오조니와 3명의 동료를 잃었다.
목숨이 위태로운 속에서도 위험을 무릅쓰고 동료를 구한 공로로 프랑스 정부는 그에게 레종 드뇌르(Legion d’nonneurr) 훈장을 수여한다.
1963년 19세에 등정한 바 있는 그랑드조라스(Grandes Jorasses) 워커 스퍼(Walker Spur)를 코시모 자펠리(C. Zapelli)와 6일 동안의 사투 끝에 동계 초등반하여 동계 등반의 이정표를 세운다. 1965년 마터호른 노드반트 직등(Matterhorn Nordwand Direct) 루트를 동계 단독 초등정한다.
이 해는 마터호른 초등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그는 알프스에서 거벽 등반뿐만 아니라 히말라야와 남미의 거벽에서도 활동했다.
1954년 이탈리아 K2원정대의 최연소 대원으로 참가하여 정상 등정 대원 콤파뇨니(A. Compagnoni)와 라체델리(R. Lacedelli)를 지원하여 초등정에 공헌한다. 그러나 초등 당시 보나티가 초등의 영예를 차지하려고 공격조와 경쟁을 벌였다는 콤파뇨니의 모함으로 괴로워하다가 법정 투쟁을 벌여 누명을 벗는다.
1958년에는 캐신(R. Cassin)이 이끄는 가셔브룸 4봉(Gasherbrum Ⅳ·7925m)원정대의 일원으로 칼로 마우리(C. Mauri)와 함께 북동릉을 경유하여 초등정에 성공하였다. 같은 해 마우리와 함께 파타고니아의 세로또레(Cerro Torre·3020m) 등정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으며, 세로모레노(Cerro Moreno·3506m)를 초등정한 후, 세로아델라(Cerro Adella) 산군의 연봉을 횡단한다.
1961년 다시 남미 페루의 안데스에 가서 네바도 니나샹카(Nevado Ninashnca·5638m), 세로파린 노르드(Cerro Parin Nord·5166m), 론도이 노르드(Rondoy Nord·5820m) 등을 초등정하였다.
이후 그는 모험 기사를 전문으로 다루는 저널리스트로 활동한다.
저서로는 'Le Mie Montague' (1962), 'On the Heights' (1964)- 'Le Mie Montague' 의 영문판, 'Berge-Meine Berge' (1964), 'The Great Days' (1974), 'The Mountain of My Life' (2001) 등이 있다.
◇ 보닝턴, 크리스 |
보닝턴, 크리스 Bonington, Christian 1934~
영국을 대표하는 뛰어난 등산가. 영국은 물론 알프스·히말라야 등반에 풍부한 경험을 지닌, 현존하는 영국 등반가 중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사람이다.
런던 출신으로 16세부터 등산을 시작했다. 1953년 매키네스(Macinnes)와 스코틀랜드에서 동계 등반활동을 했다. 영국인 최초로 드류의 보나티필라를 오르고 치마그란데를 직등했으며 안나푸르나Ⅰ봉 남벽, 에베레스트 남서벽을 등반하여 히말라야 거벽 등반의 새 시대를 연다.
그는 1956년 군에 입대했으나 원정등반에 관계하면서 이에 흥미를 느껴 제대 후 본격적인 등반을 시작한다. 1957년 드류의 보나티필라와 치마그란데(Cima Grande)를 직등한다. 아이거(Eiger) 북벽을 두 차례나 실패한 뒤 1966년에 성공한다.
그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글을 쓰고 사진촬영을 하기 시작한다. 아이거 북벽 직등에서는 데일리 텔레그래프(Daily Telegraph)지의 사진기자 겸 보도기자로 참가하여
이 등반에서 그는 존 할린과 묘한 갈등을 일으켰으며, 그의 추락을 직접 목격한다.
1960년 안나푸르나 2봉(AnnapurnaⅡ·7939m)을 초등한다.
이는 그가 해낸 첫 번째 히말라야 등반이다. 1961년에는 눕체(Nuptse·7879m)를 오른다. 1970년 안나푸르나 1봉(8091m) 남벽 등반에 대규모 원정대를 조직하여 초등정에 성공한다.
이 등반이 갖는 등산사적 의미는 히말라야에서 이룩한 최초의 거벽 등반이라는 점이다. 이때의 등정자는 돈 윌란스와 드갈 해스톤이다.
1973년 브라마(Brammah·6411m)와 1974년 창가방(Changabang·6864m)을 초등정한다.
1975년 포스트 몬순(Post Monsoon)에 에베레스트(8848m) 남서벽 원정대를 조직하여 해스턴(D. Haston), 스코트(D. Scott), 보드맨(Boardman)이 2회에 걸쳐 영국인 최초로 정상에 오르게 한다. 이들 중 버크(M. Burke)가 단독 등반을 시도하다가 행방불명이 되었다.
1977년 카라코룸의 바인타브락(Baintha Brakk·7285m) 남서봉을 초등정한 후 스코트와 하산 도중, 스코트가 추락하여 양다리 골절상을 당한다.
설상가상으로 기상마저 악화된 가운데 5일 동안 사투를 벌이면서 가까스로 하산한다.
1978년 K2(8610m) 서릉원정대를 꾸렸으나 눈사태로 대원 한 명이 사망하여 실패한다. 이외에도 중국 신강지역의 미답봉 콩구르(Kongur·7719m)를 원정하여 알파인 스타일로 초등정한다.
1982년 에베레스트 동북릉 등반을 시도하였으나 ABC캠프를 출발하여 정상 공격에 나선 피터 보드맨(Peter Boardman)과 조 태스커(Joe Tasker)가 능선상에서 행방불명된 채 이 원정은 실패한다.
1985년 그는 디즈니랜드의 부호이자 세븐 서미츠 등정자인 딕 베스(Dick Bass)와 함께 에베레스트에 오른다. 이때 그의 나이는 51세였다.
저서로는 'I Chose to Climb' (1966), 'Annapruna South Face' (1971), 'Everest Southwest Face' (1973), 'The Ultimate Challenge' (1973), 'The Next Horizon' (1973), 'Chan-gabang' (1975), 'Everest the Hard Way' (1976), 'Quest for Adrenture' (1981), 'Konguer China’s Elusive Summit' (1982), 'The Everest Year: A Climber’s Life' (1987), 'Chris Bonington, Mountaineer' (1989), 'The Climbers : A History of Mountaineering' (1992) 등이다.
◇ 보드맨, 피터 데이비드 |
보드맨, 피터 데이비드 Boardman, Peter David 1950~1982
고난도 알파인 스타일을 추구한 영국 등반가.
창가방(Changabang) 서벽(6860m)을 비롯, 알프스와 히말라야 카라코룸 등에서 수많은 고난도 벽 등반을 추구한 선구적인 산악인이다.
노팅검(Nottingham) 대학 출신으로 알프스의 라우터브룬네(Lauterbrunnen) 등을 등반하며 많은 경험을 쌓아갔으며, 1971년 드로와떼(Droites) 북동능에서 태스커(Joe Tasker)와 운명적인 만남 이후 우정을 키워가면서 브라이트호른 북벽의 제르바수티(Gervasutti) 루트를 함께 오른다.
1972년 최초의 해외원정 등반을 힌두쿠시(Hindu Kush)로 택하여 코히몬디(Kohi Mondi) 북벽을 비롯하여 5개의 새로운 루트를 개척한다.
1975년 보닝턴이 이끄는 에베레스트 남서벽 원정대에 참가하여 셰르파 퍼템바와 함께 정상에 선다.
남서벽 등반은 에베레스트 등반사에 영원히 기록될 장거로 안나푸르나 1봉 남벽에 이어 히말라야 거벽등반에 새 장을 연다.
당시 스코트와 해스톤이 첫 등정에 성공한 뒤 뒤이어 보드맨은 두 번째 등정자가 된다.
다음 해인 1976년 그의 영원한 파트너인 태스커와 함께 창가방의 서벽을 초등정한다.
당시 창가방 서벽은 세계에서 가장 어렵다는 평가를 받는 난벽 중의 하나였다.
이 등반을 주제로 쓰여진 책이
그는 1978년 보닝턴과 K2 서릉 초등을 노렸지만 눈사태로 대원 중 1명이 사망하자 등반을 끝내고 뉴기니로 가서 오세아니아 최고봉 칼스텐츠 피라미드(Carstenz Pyramid·4884m)를 오른다.
1979년 캉첸중가(Kangchenjunga·8586m) 북릉을 무산소로 등정한 후 가우리상카(Gaurisankar·7134m) 서릉도 등정한다.
1980년 K2(8611m) 재등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콩가(Kongur·7719m) 초등정을 성공시킨다.
1982년 보닝턴대의 에베레스트 원정에 참가하여 당시 미등으로 남아있던 북동릉을 산소 없이 알파인 스타일로 시도하던 중 5월 17일, 그의 영원한 친구 태스커와 함께 8220m 지점에서 실종된다.
이 사건은 영국 등산계의 크나큰 손실이었으며, 큰 충격파를 불러일으킨다.
10년 뒤인 1992년 에베레스트 정상 바로 아래서 일본대에 의해 태스커의 시신이 발견된다.
이 두 사람을 기리기 위해 1983년 <보드맨-태스커 산악문학상>(Boardman-Tasker Award)을 제정한다.
두 사람은 유명을 달리 하기 전에 피터는
그는 1966년 아이거 북벽에서 추락사한 미국 등산가 할린(J. Harlin)이 스위스의 레이진(Leysin)에 설립한 등산학교 I.
S. M(International School Mountaineering)의 교장직을 맡기도 했다.
저서로는
아일랜드의 정치가이자 변호사. 세계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알파인클럽(Alpine Club;1857년 창립)의 초대 회장(1858~1860)을 지낸 인물이다.
1827년 처음으로 알프스를 방문한 이래 매년 알프스를 찾았으며, 1863~1868년까지 알프스를 서부·중부·동부 세 지역으로 구분하여
이 책은 현재까지도 정확한 안내서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현재의 <알파인 저널·Alpine Journal>의 전신인
저서로는 'The Western Alps' (1863), 'The Central Alps' (1864), 'The Eastern Alps' (1868) 등이 있다.
볼, 존 Ball, John 1818~1889
알프스 최고봉 몽블랑의 첫 도전자. 제네바 출신의 화가이자 작가이며, 몽블랑 초등자인 파카르의 경쟁자였다.
주목할 만한 업적은 없으나 몽블랑 첫 도전자라는 데 의미를 두고 있다. 제네바의 성가대를 지휘했으며, 알프스의 아름다운 풍광을 많이 그렸다.
드 소쉬르가 몽블랑 첫 등정자에게 상금을 제안했다는 소식을 듣고 1783년 파카르(M. G. Paccard)와 함께 첫 등정을 시도했으나, 둘 사이의 심한 갈등으로 실패한다.
1786년 파카르와 발마가 몽블랑 초등정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질투심에 불타 파카르를 비방하는 글을 썼으며, 발마를 부추겨 파카르를 중상한다.
이후 몽블랑 초등에 대한 오랜 논쟁에 불씨를 지핀 장본인이다.
그는 몽블랑 첫 등정을 시도하고, 일생 동안 이 산에 오르기를 열망했지만 나이가 들고 체력도 떨어져 결국 몽블랑 정상을 밟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
불, 헤르만 Buhl, Hermann 1924~1957
오스트리아 티롤 출신의 등산가이며 8000m봉 최초의 단독 초등자이다.
산악도시인 인스브루크에서 출생하여 알프스 전지역의 난벽들을 상대로 등산 수업을 하였다.
그는 강한 의지와 혹독한 훈련을 통해 심신을 단련한 세계적인 등반가다.
그는 힘든 조건만을 골라 겨울철과 야간에 단독등반을 하면서 스스로 냉혹한 채찍질을 하였다.
1947년까지 134개에 이르는 난봉들을 골라 등반했으며, 이중 11개 봉은 초등반을 기록한다.
돌로미테 지역의 최고 난벽 피즈바틸레 북벽을 단독으로 4시간 만에 올라 세인들을 놀라게 했으며, 동부 알프스의 최대 난벽인 표고차 1800m 높이의 와츠만 동벽의 잘츠부르크 루트를 한겨울 밤 시간을 택하여 단독으로 9시간 만에 완등한다.
1953년 2월에 시도된 와츠만 동벽 등반은 낭가파르바트 원정에 앞서 자기 능력을 시험하기 위한 등반이었다.
1952년 여름, 8등을 기록한 아이거 북벽 등반은 그를 더욱 유명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당대 유럽의 쟁쟁한 클라이머인 장꾸지, 레뷔파 등과 함께 줄을 묶은 이 등반에서 그는 가장 어려운 구간을 선두에서 리딩하였다.
이때 보여준 등반 솜씨에 대해 이 벽의 초등자인 하러조차도 그를 가리켜 ‘신의 경지에 이른 달인의 솜씨였다’고 극찬하여 당시의 비평가들을 침묵시켰다.
그는 1953년 헤를리히 코퍼(K. H. Herrigkoffer)가 이끄는 독일·오스트리아 합동 낭가파르바트 원정대에 참가한다.
이 원정대는 1934년 이 산에서 희생된 메르클(W. Merkl)을 추모하기 위해 ‘메르클 추모원정대’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들은 고소 포터의 부족으로 캠프 설치에 많은 시간을 소요했기 때문에 5캠프를 설치하고 정상 공격을 시작할 때는 몬순이 불어 닥쳤다.
기상이 악화되자 대장은 정상공격을 중지하고 캠프를 철수하라고 지시했으나 다시 기상이 호전되자 불, 에르틀(H. Ertl), 프라운 베르거(W.
Fraunberger), 켐프터(O. Kempter) 등 4명은 대장의 명령에 불복한 채 정상 공격을 결정한다.
5캠프까지 이들과 함께 오른 불이 단독으로 정상 공격에 나섰다.
정상으로 향하던 중 방풍의, 피켈, 카메라만 남기고 나머지 장비는 크레바스에 넣어둔다.
그는 7820m 지점에서 흥분제 두 알을 먹고 드디어 오후 2시 독일, 오스트리아의 숙명의 산 낭가파르바트 정상에 선다.
이후 하산 과정은 너무도 유명한 한 편의 드라마였다.
두 차례의 비박을 하고 혈액순환을 돕기 위해 다량의 혈액순환 촉진제를 복용한 그는 환청과 환각상태에 시달리면서 하산길을 재촉한다.
동상에 걸린 발가락이 마비되고, 빈사의 상태로 40여 시간 동안 사투를 벌이면서 가까스로 5캠프에 도착하여 에르틀의 도움을 받는다.
죽음을 극복하고 베이스캠프로 귀환한 그에게 베풀어진 분위기는 너무나 냉랭했다.
퇴각명령을 어기고 등정한 행위가 대장측의 비위를 상하게 했기 때문이다.
대장 자신이 의사임에도 불구하고 동상에 걸린 발가락을 치료해주지도 않았다.
이후 동상 후유증으로 그는 발가락 두 개를 절단한다.
1954년 불은 <8000m의 위와 아래>라는 낭가파르바트 등정기를 출간한다.
그러나 이 등정기는 대장의 사전 동의 없이 발표되었다 하여 헤를리히 코퍼는 법원에 소송을 제기한다.
이로 인해 불은 오랫동안 심적 고통을 받는다.
원정대 출발에 앞서 대원들은 원정이 끝난 뒤 등반에 관한 글을 발표할 때는 대장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계약서에 서명했기 때문에 대장은 저작에 관한 계약 위반을 빌미로 불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1957년 불은 슈무크(M. Schmuck) 대장이 이끄는 오스트리아 브로드피크(8047m) 원정대에 참가한다.
이 원정대는 대장을 포함하여 4명의 대원으로 구성된 히말라야 등반 사상 가장 규모가 작은 소규모 원정대로 히말라야에서 알파인 스타일을 최초로 실천한 등반대였다.
이들은 산소용구와 고소 포터를 쓰지 않은 채 전 대원 모두가 6950m 높이의 고소캠프까지 직접 짐을 운반하고, 대원 모두가 등정에 성공한다.
불은 이때 그의 생애에 두 번째로 8000m봉 정상을 등정한다.
이 등반을 끝내고 딤베르거(K. Diemberger)와 초골리사(7668m) 등반을 시도하던 중 짙은 안개와 폭풍설 속에서 철수하면서 눈처마 붕괴로 추락사한다.
저서로는 '8000m Druber und Drunter' (1954), '8000m의 위와 아래' (이종호역·1976·국내발췌 번역판), '8000m의 위와 아래' (김영도 옮김·1996·국내완역판) 등이 있다.
◇ 부리 |
브라운, 조 Brown Joe 1930~
영국 맨체스터 출신의 걸출한 등산가다.
고향 친구인 윌란스(D.
Whillans)와 이상적인 등반 파트너가 되어 영국의 암벽뿐만 아니라 히말라야에서도 수많은 등반을 함께 한다.
그는 160㎝의 작은 체구였으나 의지가 강하고 담대한 사람이었다.
윌란스와 함께 더비셔(Derbyshire)와 웨일즈(Wales) 등지에서 수많은 개척 등반을 한다.
1954년 윌란스와 함께 알프스에 가서 드류 서벽을 21시간 만에 등반하고, 블레띠에르(Blatiere)에 브라운·윌란스 루트(Brown Whillans Route)를 개척한다.
1955년 에반스(C. Evans)가 이끄는 캉첸중가 원정에 참가하여 밴드(G. Band)와 함께 정상을 오른 후 1956년 카라코룸의 무스타그타워(Mustagh Tower·7273m)를 등정한다.
1962년 파미르(Pamirs)의 코뮤니즘봉(Mt. Communism·7482m)을 초등정한다.
1973년 베네수엘라(Venezuela)의 미답봉 로라이마(Roraima·2810m)를 초등했으며, 1976년 트랑고타워(Trango Tower·6288m) 원정대를 꾸려 보이센(M. Boysen)을 초등시킨다.
그는 유명한 등산장비 제작업자로 랑베리스(Llanberis)에 장비점을 열기도 한다.
1970년대 한국에 널리 보급되어 클라이머들이 애용했던 ‘조브라운 헬멧’도 그가 보급한 장비다.
그는 등산에 관한 영화와 TV방송에 해설자로 자주 출현했으며, 영국 등산계의 우상처럼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저서로는 'The Hard Years' (1967) 등이 있다.
브와뱅, 장마르크 Boivin, Jean-Marc 1951~1991
프랑스 산악인이자 모험가이다.
브와뱅은 프랑스가 자랑하는 스키 활강 모험가이며, 빙벽 등반의 달인으로 행글라이딩 고공활강 기록을 갖고 있는 알파인 클라이머다.
그는 몽블랑 주변 4000m급 빙설암을 등반하고 스키로 신속하게 하강하는 방식의 익스트림 스키(Extreme Ski) 분야에 일대 혁신을 가져왔으며, K2와 가셔브룸 고봉, 에베레스트와 같은 8000m 고산에서 행글라이딩으로 활공하여 하산하는 등 스키와 행글라이딩을 등산에 접목시킨 독특한 스타일의 등반을 창출하였다.
1991년 베네수엘라에서 패러글라이딩 활공 사고로 사망할 때까지 숱한 모험을 감행했다.
1972년 페를랭 북벽 직등 루트와 에귀유상놈의 브라운 패티 루트, 푸(Fou) 남벽, 드류의 아메리칸 다이렉트(Americane Directe)를 올랐으며, 단독으로 몽블랑 드 타쿨(Mont Blanc du Tacul)의 알비노니 가바루 루트와 모디카누리를 동계에 오르는 능력을 보여주면서 브와뱅 돌풍을 일으킨다.
1975년 패트릭 가바루(Patrick Gabarrou)와 함께 드로와떼 북벽과 에귀유 베르트(Aiguille Verte) 북벽 직등 루트와 제루바슈티 필라(Gerva Sutti Pillar), 몽블랑 드타클(Mont Blanc du Tacul)의 슈퍼 꿀르와르(Super Couloir)를 직등으로 초등하는 두드러진 성과도 이룩한다.
1978년 그의 첫 해외원정이 된 페루로 출발하기에 앞서 그랑드조라스 슈라우드(Shroud)를 단독으로 등반하여 2시간 30분 만에 끝내고, 높은 난이도를 지닌 라가드세고뉴 꿀르와르를 단독으로 초등정한다.
같은 해 페루의 와스카랑(Huascaran·6787m) 남벽과 피스코(Pisco·5780m) 북벽, 랑 퀴타라주(Quitara Ju·6100m) 북벽을 등반하고 3곳 모두 스키로 활공하여 그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그는 1979년 베르나르 멜레(Bernard Mellet)가 이끄는 K2 원정에 참가하여 7600m 지점서 베이스캠프까지 1분에 200m씩 고도를 낮추며 13분 만에 활동하여 안착한다.
이것은 히말라야 등반 사상 최초로 이룩한 도전기록이었다.
전 세계 산악계는 이 일을 격찬하였다.
이 일로 영국 정부는 그에게 ‘국제용맹스포츠맨상’(International Award for Valourin Sports)을 수여한다.
1980년 그는 색다른 모험에 도전한다.
행글라이딩과 스키를 이용하여 단독으로 마터호른을 오르고 내려오는 연장 등반을 성공시킨다.
마터호른 북벽을 4시간 10분만에 올라 정상에서 행글라이딩으로 활공하여 하산한 후 다시 마터호른에 올라 동벽으로 스키활강하여 하산하는 연장등반 기록을 이룩한다.
익스트림 스키와 행글라이딩을 조화시켜 스피드 클라이밍이란 독특한 장르를 창출한 것이다.
1982년 파타고니아 등반에 참여했고, 그랑드조라스(2시간 30분), 마터호른(4시간 30분), 아이거 북벽(7시간 30분) 등 3대 북벽을 14시간 만에 오르는 스피드한 기록을 탄생시킨다.
뿐만 아니라 푸(Fou)의 남벽을 오르고 드류의 아메리칸 다이렉트 루트를 연결해서 블라티에르까지 단 하루만에 끝낸다.
이런 스피드한 등반은 행글라이더 덕이다.
1985년 7월, 가셔브룸2봉(8035m)을 등정한 후 행글라이딩으로 25분 만에 베이스캠프에 안착하였다.
다음 해 콜롬비아의 리타쿠바(Rita Cuba·5200m)에서 패러글라이딩 활공을 한다.
1987년 4월, 르모앙(3412m), 르드류(3754m), 아데귀유베르트(4121m), 테쿠르트, 그랑드조라스 등 5개봉을 연장하여 활강과 등반을 하루 만에 끝낸다.
1988년 프랑스 에베레스트 등정 10주년 기념원정대에 참가하여 남동릉으로 정상에 오른 뒤 세계 최고봉에서 역사상 최초로 패러글라이딩 활공을 하여 베이스캠프에 안착한다.
브와뱅의 익스트림 스키 활강 수준은 55~65°의 급경사까지도 가능하다.
그는 “히말라야 8000m 14봉을 지겹게 오르내리는 일의 반복은 흥미가 없으며, 세계 각국의 색다른 지역을 바꾸어가면서 새로운 도전과 모험을 계속 하고 싶다”고 말했다.
빈, 칼 Wien, Karl 1906~1937
독일의 등산가이자 물리학자.
1937년 비극으로 막을 내린 독일 낭가파르바트 원정대의 대장이다.
이 원정에서 대장을 포함하여 7명의 대원과 9명의 셰르파가 눈사태로 사망한다.
그는 1924년 벨첸바흐와 바우어를 만나 서부 알프스에서 많은 등반을 한다.
1925년 베터슈타인(Wetter Stein)에 3개의 새로운 루트를 개척하고, 1926년 벨첸바흐와 함께 그로스 클로크너 북벽, 아이스코겔레(Eiskogele) 북벽, 글로커린 북서벽을 초등한다.
특히 주목할 만한 등반은 1927년 몽블랑과 리스캄(Lyskamm)을 최초로 동계 종주한다.
1928년 릭머스(R.
Rickmers)의 파미르 원정에 참가했으며, 1931년 바우어(P. Bauer)가 이끄는 캉첸중가 원정에도 참가하여 7700m까지 오른다.
이 등반은 대원 1명과 셰르파의 추락으로 실패한다.
1933년 동아프리카 케냐(Mt. Kenya·5200m)와 메루(Mt. Meru)를 등반하고, 1934년 메르클(W. Merkl)이 이끄는 낭가파르바트 원정에도 참가한다.
이때의 원정은 3명의 대원과 6명의 셰르파 목숨을 앗아간 채 끝난다.
그러나 정상까지 4~5시간 거리를 남겨둔 채 등정 일보직전에 실패했으므로 그는 다음 등반을 기약한다.
1936년 시킴(Sikkim) 원정시 시니올추(Siniolchu·6890m)와 네팔 피크를 초등한다.
1937년 그는 자신을 포함한 7명의 우수한 대원으로 강력한 원정대를 조직한다.
2캠프까지는 등반이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나 눈사태로 일단 철수한 다음 6월 초에 재도전하여 5캠프를 구축한 뒤 전 대원이 휴식차 4캠프에 모였다.
비극은 이날 밤에 일어난다.
라키오트(Rakhiot Peak)의 빙벽에서 시작된 눈사태는 자고 있던 모든 대원을 묻어버리고 말았다.
발굴 작업에서 발견된 대원들은 침낭 속에서 평화스런 모습으로 잠들어 있었고, 얼어붙은 시계는 12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비극은 이 시간에 일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독일은 구조를 위해 바우어를 현지로 급파한다.
낭가파르바트는 정상을 인간에게 내어주기까지 실로 엄청난 희생을 요구하였다.
1953년 불이 이 산을 초등할 때까지 1895년 머메리의 비극을 시작으로 1934년 메르클대의 대참사와 1937년 빈대의 참사까지 셰르파를 포함하여 31명의 목숨을 앗아간 비극의 산이 되었다.
빈은 'Willo Welzenbachs Bergfarten'과 'Hartmann’s Kantschagebuch' (1931)을 편집하였다.
◇ 빠가르, 미셀 가브리엘
빠가르, 미셀 가브리엘 Paccard, Michel Gabriel1757~1827
786년 8월 8일 발마와 함께 몽블랑 초등으로 등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근대 알피니즘의 메카 프랑스 샤모니에서 공증인의 아들로 태어나 이탈리아 트리노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의사가 되었으며 치안 판사도 역임했다.
1783년 부리와 함께 몽블랑 등정을 시도하였으나 불화로 실패한 것을 비롯해 1775~1784년까지 9년 동안 모두 3차례나 몽블랑 등정을 시도하였지만 실패하였으며, 그는 이탈리아 측도 정찰하였다.
샤모니 토박이인 그는 몽블랑 등정을 열망해 온 강인한 사람으로 1786년 발마와 함께 역사적인 초등정을 이룩한다.
몽블랑 초등정 후 빠가르는 보고서를 작성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원고는 발견되지 않았다.
몽블랑 초등정의 주역이 발마라고 주장한 부리의 중상모략으로 빠가르는 많은 고통을 겪었으며, 이 사건은 등반 사상 가장 큰 논쟁의 하나가 되었다.
역사가들은 몽블랑의 주인공이던 드 소쉬르, 발마, 부리, 빠가르 네 사람 중 진정한 알피니스트란 단어를 붙일 수 있는 인물은 빠가르 한 사람이라고 평하고 있다.
관련 저서로는 T.G.브라운과 G.R.드비어가 저술한 'The First Ascent of Mont Blanc'이 있다.
셀라, 비토리오 Sella, Vittorio 1859~1943
이탈리아 알프스 산악지역인 비엘라(Biella) 출신의 등반가이자 탐험가이며 뛰어난 산악사진 작가이다.
이탈리아 알파인클럽 창설자인 퀸티노 셀라(Quintino Sella)의 조카이며, 이탈리아 사진계의 개척자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등산과 산악사진에 입문한다.
그는 1879년 비엘라 주변에 있는 산에 올라 파노라마 산악사진을 최초로 촬영했으며, 알프스 여러 지역에서 등반과 산악사진을 촬영했다.
본격적인 등반은 1882년 마터호른, 1884년 몬테로자, 1885년 리스캄(Lyskamm), 그리고 1888년 몬테로자(Monte Rosa·4634m)와 몽블랑을 동계등반했다.
1889년부터 1896년 사이에 세 차례나 코카서스를 탐험했다.
1897년 아브루찌 공(Duke of the Abrussi)과 함께 알래스카에 가서 세인트 엘리아스(St. Elias·5488m)를 초등정했고, 1899년 프레쉬 필드(W.D. Freshfield)와 함께 캉첸중가(Kangchen Junga·8586m)를 일주하였다.
1906년 아브루찌 공과 함께 아프리카 루웬조리(Ruwenzori)에도 갔다.
1909년 아브루찌 공, 데필리피(de Filippi) 등과 카라코룸을 탐험하고 히말라야에도 두 차례나 갔다.
카라코룸 탐험시 K2를 최초로 정찰하였으며, 당시의 원정기록을 정리한 데필리피의 방대한 보고서에 그가 찍은 K2 사진이 실렸다.
이로 인해 K2 모습이 최초로 세상에 공개된다.
그의 사진은 이후 K2 원정대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가 K2에서 촬영한 산악사진들은 풍부한 내용과 정보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기술적·예술적으로도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현재까지도 널리 활용되고 있다.
등반 역사가 아놀드 런(Arnold Lunn)에 의하면 당시 셀라의 사진 건판 규격은 약 30㎝×40㎝ 대형이었으며, 사진 장비 무게는 123㎏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의 생애와 사진들을 엮어 애트켄(S. Aitken)은 'Among the Alps'를, 클라크(R.W. Clack)는 'The Splenid Hills' (1948)를 출간했다.
1879년에서 1909년까지의 셀라의 작품을 모아 편집한
쉽튼, 에릭 얼 Shipton, Eric Earle 1907~1977
영국 실론 태생의 등반가이자 탐험가.
그는 대규모의 원정대보다는 소규모 원정을 선호했으며, 이로 인해 결국 역사에 길이 남을 1953년 에베레스트 초등대와 대장직을 헌트(J. Hunt)에게 양보하게 된다.
그는 문필에도 재능이 있어 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는 학창시절 윔퍼(E.Whymper)의 책을 비롯하여 많은 산악서적을 탐독하며 등산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해 노르웨이의 요튼하임(Jotunheim)에서 첫 등산을 한다.
1928년 케냐에 이주하여 커피농장을 경영하면서 미답의 넬리온(Nelion·5188m)을 등정한 후 등반기록을 출간한다.
이 기록의 발간이 계기가 되어 역시 이곳에서 농장을 경영하던 틸만(H.W. Tillman)을 만나 히말라야 등 수많은 산군에서 함께 활동한다.
1931년 스마이드(F.S.Smythe)가 이끄는 카메트(Kamet·7756m) 원정대에 참가하여 홀즈워스(R.L. Holds Worth), 레와(Lewa) 등과 함께 초등정을 한다.
이는 그 당시까지 등정된 봉우리 중에서 가장 높은 고봉 등정 기록이었다.
1933년 4차 에베레스트 원정에 참가한 그는 스마이드와 함께 6캠프까지 오르고 일기불순으로 퇴각한 후 에베레스트에 매혹되어 농장을 그만두고 히말라야 탐험에 정열을 쏟는다.
그는 난다데비(Nanda Davi) 등정을 여러 차례 시도했으나 번번이 실패했으며, 1934년 리시강가강(River Rish Ganga)을 통하여 난다베이 상투아리((Nanda Davi Sangctuary) 탐험을 계획한다.
그는 틸만과 10여 명으로 구성된 소규모 원정대를 이끌고 난다데비의 남측을 정찰하고 상투아리에서 광범위한 탐험을 하였다.
1935년 6명으로 구성된 5차 에베레스트 정찰대의 대장이 되어 유능한 등산가 틸만과 지형학자 스펜서, 전도가 촉망되는 텐징 노르게이 등을 대동하고 다아질링을 떠나 전년의 루트를 피해 처음부터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섰다.
당시 에베레스트 일대는 좋은 날씨가 계속되었으나 쉽튼은 등정에는 마음을 두지 않고 오로지 주어진 정찰 임무에만 충실하였다.
사실 그들은 빠른 속도로 전진하여 롱북빙하로부터 6일 만에 4캠프를 설치했으나 더 오르지 않고 주변만을 탐사하면서 두 달 사이에 주변 봉우리를 26개나 오르면서 시간을 소비해 막상 에베레스트 공격을 개시했을 때는 몬순과 눈사태로 후퇴한다.
초기 히말라야 연구의 권위자 디렌푸르트(G.O. Dyhrenfurth)는 그의 저서
반복되는 원정의 실패로 대중의 호응을 얻지 못해 자금조달이 어려워진 상황에서 1936년 6차 에베레스트 원정대가 조직되었다.
스마이드, 쉽튼 등 히말라야 경험이 풍부한 12명의 대원으로 구성된 이 원정대는 23명의 셰르파를 고용했다.
그러나 정상 공격을 하던 쉽튼과 스마이드는 4캠프까지 진출하였으나 일찍 닥쳐온 몬순 탓으로 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철수하고 말았다.
1937년 틸만과 함께 카라코룸의 샥스감(Shaksgam) 지역을 탐험하고, 1938년 틸만이 이끄는 7차 소규모 에베레스트 원정대에 참가하였으며, 1939년 두 번째의 카라코람 원정에도 참여하여 초고룽마(Chogolungma) 지역을 탐험한다.
1951년 에베레스트 정찰대의 대장을 맡아 처음으로 남쪽(네팔쪽) 루트의 등반 가능성을 정찰한다.
그는 웨스턴쿰(Western Cwm)을 통과하여 사우스콜(South Col) 루트의 등반가능성을 확인한다.
그는 중국 신강성의 카슈가르(Kashgar) 주재 총영사를 지내고 쿤밍(Kunming)에서도 근무하였으며, 1952년 초오유(Cho Oyu·8201m) 원정대의 대장을 맡았으나 계획의 차질로 실패하고 만다.
이어 1953년 에베레스트 원정대의 대장을 쉽튼으로 지명하였으나 그의 성격은 노련한 지도력이 요구되는 대원정에 부적합하다는 이유로 히말라야 위원회가 결국 대장을 헌트(J.H. Hunt)로 교체한다.
이 결정은 쉽튼을 추종하던 젊은 대원들을 흥분시켰으나 헌트의 탁월한 리더십이 이 문제를 잘 해결했다.
1958년 파타고니아(Patagonia) 탐험은 그의 생애에서 두 번째 탐험기의 시작이었다.
1958~1964년 사이 남파타고니아(South Patagonia) 아이스캡(Ice Cap)을 횡단하고 티에라 델 푸에고(Tierra del Puego) 탐험에 이어 북파타고니아 아이스캡도 횡단하였다.
그는 칠레의 지질관계 자문위원으로 있으면서 피노체트 정권을 옹호해 논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계속하여 남미에서 탐험과 여행을 하였다.
저서로는 'Nanda Devi' (1936) 'Blank on the Map' (1938) 'Upon That Mountain' ( 1948) 'The Mountains of Tartary' (1951) 'Mount Everest Reconnaissance Expedition' (1951) 'Man Against Everest' (1955) 'Land of Tempest' (1963) 'Mountain Conquest' (1966) 등이 있다.
슈미트, 토니 Schumid, Tony 1909~1932
독일의 등산가인 슈미트 토니(Tony)는 형인 슈미트 프란츠(Frantz)의 이름과 함께 붙어 다니며 일반적으로 ‘슈미트 형제’로 불려지고 있다.
이들 형제는 1931년 마터호른 북벽(Matterhorn North Wand)을 함께 초등했으며, 이 장거는 세계 등반사에 영원히 기록될 업적이다.
이 두 형제는 독일 뮌헨 출신으로 당시 동부알프스의 어려운 빙설암 루트에서 등반기술을 연마했으며, 마터호른 등반 때는 자전거를 이용하여 체르마트까지 장거리를 이동한 일화로 유명하다.
두 형제는 이틀 동안의 정찰을 마치고 북벽등반에 나섰다.
등반 도중 지친 나머지 그들은 회른리릉(Hornly Ridge)으로 탈출하려는 생각도 하였으나 결국 어려운 난관을 극복하고 당시 유럽 산악계의 과제였던 마터호른 북벽을 초등반한다.
그 때까지 북벽 등반의 조건은 건조하고 따뜻한 날씨가 최적의 조건이라고 생각하였으나 이 등반으로 많은 적설과 혹한의 추위가 오히려 낙석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어 북벽 등반에 최적의 조건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입증시켰다.
이들은 마터호른 북벽 등반을 끝내고 아이거 북벽과 그랑드조라스 북벽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동생 토니는 이듬해 크로스비스 바흐호른(Crosswies Bachhorn) 북서벽 등반 도중 아이스하켄이 빠져 추락사하였다.
저서로는 루돌프 페터스와 공동 집필한 'Gefahrten am Seil'이 있다.
스마이드, 프랜시스 시드니 Smythe Francis Sydney 1900~1949
영국의 등반가이자 등반저술가, 사진가로 유명하다.
그는 1933·1936·1938년 세 차례에 걸쳐 영국 에베레스트 원정대에 참가한 인물로 히말라야에 대한 풍부한 경험의 소유자다.
몽블랑 브렌바벽(Brenva Face)의 쌍띠넬 루트(Sentinelle Route)와 메이저 루트(Major Route) 등반으로 알프스 등반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1930년 디렌푸르트(G.O. Dyhrenfurth)가 이끄는 국제 캉첸중가(KangChenJunga·8586m) 원정대의 대원이었으며, 1931년에는 자신이 직접 원정대를 조직, 쉽튼과 함께 카메트(7756m)의 정상을 오른다.
이는 그 당시까지 등정된 봉우리 중에서 가장 높은 고봉 등정 기록이었다.
1933년 에베레스트 원정에서 그는 쉽튼과 함게 정상 공격을 하였으나 쉽튼이 병을 얻어 6캠프로 철수하자 그는 혼자서 8560m 지점까지 올라갔지만 아무런 지원도 없는 상태에서 너무 지쳐서 등반을 포기한다.
연이어 1936년과 1938년에 에베레스트 원정에 참가했으며, 2차대전 중에는 산악훈련 교관으로 근무하였다.
그는 1927년부터 20여 년간 등산 활동을 하면서 27권의 산악명저를 집필했으며, 훌륭한 사진도 많이 남겼다.
1949년 인도에서 원정대를 조직하던 중 병을 얻어 귀향했으나 사망하고 만다.
그의 문명(文名)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계기는 캉첸중가 등반 때 <타임>지의 특파원 자격으로 글을 써서 발표한 것이 동기가 되었다.
그의 글이 외국어로 번역되어 많은 독자들에게 읽히면서 많은 산악인들로부터 주목을 받게 된다.
그가 남긴
그는 등반수단으로서의 인공적인 용구(하켄) 사용으로 자연이 파괴되는 것을 우려하면서 사용한계 설정을 주장했다.
다음 세대를 위해서 아름다운 산을 남겨놓은 것이 이 시대 사람들이 실천해야 할 의무라고 했다.
또한 등반의 편의성을 적극적으로 배척한 인물이다.
그는 에베레스트에서 산소용구의 사용을 비판했으며, 그런 것을 이용하여 등정에 성공하기보다는 차라리 그런 용구를 사용하지 않고 실패하는 편이 더 좋다고 말했다.
등산은 모험으로 남아있어야 하므로 산소용구와 같은 인위적인 요소는 동원되지 말아야 하며, 만일 그런 것이 없이 등반이 불가능할 때는 그런 등반은 시도하지 않는 편이 좋다고 했다.
이것은 편의(Expediency)에 뿌리를 박은 보다 숭고한 철학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은 시대에 거역하는 완고한 생각이 아니라 등산은 자연을 사랑하는 일이고, 자연의 어려움 속에서 끝까지 진지하게 싸울 때에 비로소 그 가치와 의의가 있다고 보았다.
그는 과학이 제공하는 편리함을 예찬하는 것이 오늘날 등산 세계의 재난이며, 등산의 진수를 알려면 기계적인 보조기구를 줄여야 한다고 등반윤리문제를 거론했다.
저서로는 'Climbs and Ski Runs' (1929) 'The KangChenJunga Adventure' (1934) 'Spirit of the Hills' (1935) 'Camp Six' (1937> 'The Valley Flowers'(1938)
'Camera in the Hills'(1939), 'Edward Whymper' (1940) 'The Adventure of a Mountaineer' (1940) 'My Alpine Album' (1940), 'Mountain Vision' (1941) 'Mountains in Color' (1951), 국내 역서 <산의 영혼>(안정효 옮김·수문출판사) <산의 환상>(안정효 옮김·수문출판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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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코트, 더글라스케이스 |
스코트, 더글라스 케이스 Scott, Douglas Keith 1941~
스코트는 본명보다는 흔히 더그 스코트(Doug Scott)로 더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영국 노팅엄(Nottingham) 출신의 뛰어난 거벽 등반가이다.
그는 인공등반에 의한 빅월 클라이밍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영국에 도입하여 직접 보급하면서 그 방면의 대표적인 인물로 인정받고 있다.
그는 초등반보다는 오르는 행위의 순수성을 주장하고 등정지상주의를 멀리 했기 때문에 높이 평가받고 있다.
그는 알프스·히말라야·요세미테·노르웨이 등 세계 각지의 거벽에서 등반활동을 하였다.
1972년 힌두쿠시(Hindukush)의 코-이-반다카(Koh-i-bandaka·1658m) 남벽을 초등했고, 같은 해 봄 가을 시즌에 두 번의 에베레스트를 원정했고, 1974년 창가방(Changabang· 6864m)을 등정했다.
1975년 보닝턴의 에베레스트 남서벽 원정대에 참가하여 영국인 최초로 두갈 해스톤(Dougal Haston)과 함께 정상에 오른다.
1976년 해스톤과 함께 매킨리(Mt. Mckinley·6191m) 남벽 직등 루트를 6일 반 만에 등정하고 웨스트 버트레스(West Buttress)로 하산하던 중 지쳐있는 다른 팀의 등반자를 구조하기도 한다.
1977년 보닝턴 등 6명으로 구성된 바인타브락(Baintha Brakk·7285m) 원정에 참가하여 보닝턴과 등정을 끝내고 하산하던 중 양 다리 골절상을 입는다.
폭풍설이 몰아치는 가운데 6일 동안 버티면서 빙하를 무릎으로 기어 내려와 가까스로 생환한다.
이런 극적인 하산으로 그는 인간승리라는 칭송을 들어야 마땅함에도 세평은 그를 지탄했으며, 언론의 희생물이 된다.
영국의 한 스포츠 단체가 그에게 용맹스포츠상을 수상하기로 결정했으나 그는 등반이란 개인적인 즐거움이나 성취감을 위한 것이지 영예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수상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이 상에는 상금이 지급된다는 사실을 알고 에베레스트재단(Mt. Everest Foundation)에 상금을 기부하기 위해 수상을 수락하였으나 상금이 지급되지 않는다고 하자 다시 수상을 거부하여 구설수에 오른다.
이 스포츠 단체의 담당자들은 그가 개인적인 이익만을 추구한다고 생각하였으나 곧 그의 진의가 밝혀져 세인의 칭송을 받는다.
1981년 메스너와 함께 참랑(Chamlang·7317m) 중앙봉을 4일 만에 등정한다.
이는 마칼루(Makalu·8463m) 등반을 위한 시험등반이었으나 이 등반을 마친 뒤 이 팀은 해산한다.
1982년 그를 포함한 3명의 원정대는 시샤팡마(Shisha Pangma·8046m) 미답의 남벽 초등에 성공한다.
슬링스비, 윌리엄 세실 Slingsby, William Cecil 1849~1929
영국 요크셔 출생의 등반가이자 탐험가로 직물제조업자이다.
그는 당시 등반을 스포츠로 생각한 사람 중의 하나로 등반대중화에 많은 공헌을 했다.
영국인들이 당시 알프스로 몰려갈 때 그는 미답지인 노르웨이의 많은 산을 개척하는데 정열을 쏟았다.
1872년 최초로 노르웨이를 방문한 이래 80년의 생애 가운데 15차례에 걸쳐 노르웨이 산을 등반하는데 진력하여 ‘노르웨이 등반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다.
1876년 요덴하임(Jotenheim)의 스카가스톨스틴드(Skaggastolstind·2405m) 등반시 노르웨이 안내인들이 등반을 거부하였으나 단독으로 등반하여 초등정에 성공한다.
1878년부터 알프스에서 등반활동을 하여 1879년 바이스미스(Weissmies)와 마터호른을 등반하였다.
1892~93년 당대를 풍미하던 머메리(A. F. Mummery), 콜리(J. N. Collie) 등과 함께 당 뒤 르깽(Dent du Requin)을 가이드 없이 초등정하였으며, 에기유 뒤 쁠랑(Aig du Plan)에 도전하였으나 실패했다.
이 두 등반에서 그의 빙벽등반기술이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또한 그는 영국의 스카펠(Scafell) 지역의 암벽 개척에도 많은 공헌을 했다.
이후 그는 머메리와 낭가파르바트에 동행하고, 1913년까지 왕성한 등반활동을 했으며, 초기 영국 암벽등반 개척자 중의 한 사람으로 알파인클럽 회장을 역임했다.
영국의 유명 산악인인 윈스롭 영(G. W. Young)이 그의 사위이기도 하다.
저서로는 'Norway : The Northern Playground' (1904)가 있다.
시잔첸 史占春 1928~
중국을 대표하는 등산가로 중국등산협회 부주석을 역임하였다.
1955년경부터 등산활동을 시작하여 1956년 7월 중국·소련 합동대의 부대장으로 무즈타그아타(Muztag Ata·7546m) 초등정에 성공하였다.
당시 이 등반대는 31명 전원이 정상 등정에 성공했다.
1957년 6월 미야콩가(Minya Konka·7556m) 등반대장으로 참가하여 서릉으로 등정하여 제 2등을 기록한다.
1959년 7월 무즈타그 등반대에 참가하였으며, 1960년 5월 초모룽마(Chomo Lungma·8850m) 등반대장으로 북동릉 8695m까지 올랐으며, 1961년 6월 파미르 최고봉 콩거(Koungur·7719m) 여자등반대에 참가하여 등반활동을 지원하였다.
그후 문화대혁명시 하방(下放)되었으나 1975년 5월 초모룽마 등반대장으로 복귀하여 북동릉으로 등정에 성공하였다.
1980년대 중국 지역 등반 개방에 많은 노력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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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브루치 공 Duke of Abruzzi |
아브루치 공 Duke of Abruzzi 1873~1933
이탈리아의 등반가이자 탐험가. 이탈리아를 통일하여 근대 국가를 세운 엠마누엘 2세(Emmanuel Ⅱ)의 손자로 본명은 루이지 아마데오 쥬세페(Luigi Amadeo Giuseppe)이다.
그가 조직한 원정대는 그의 신분에 알맞게 대규모로 잘 조직되었으며, 사진작가인 셀라(V. Sella)가 항상 동행하여 많은 기록사진을 남겼다.
셀라는 말년까지 아브루치 공과 깊은 우정을 나누며 유일한 탐험동료가 된다.
1897년 낭가파르바트(Nanga Parbat·8125m) 원정을 계획하였으나 인도에 전염병이 발생하여 행선지를 알래스카로 변경하여 세인트 엘리아스(St. Elias·5489m)를 초등정하였다.
1899년 북극점에 도달하려는 시도를 하여 당시로서는 가장 극점에 가까운 북위 86° 31’까지 이르렀으나 3명의 대원이 실종되었으며 아브루치 자신도 동상으로 손가락 2개를 잃었다.
이 탐험은 북극 탐험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채 실패로 끝났다.
당시 이 탐험대는 극지법(Poral System)을 최초로 채용하여 전진을 하였다.
그는 1906년 아프리카 자이레의 루엔조리(Ruwenzori·4829m)봉 등반을 시도한다.
적도의 열기와 살인적인 폭풍우, 맹수들의 위협을 뚫고 이들은 루엔조리 지역의 4500m 이상인 14개 봉을 모두 초등정한 후 이 지역의 지도를 작성한다.
1909년 카라코룸의 K2에 도전하였으나 실패한다.
12명의 대원과 260명의 포터, 5톤 분량의 식량과 장비를 가지고 발토로 빙하 베이스캠프에 도착한다.
이들은 폭설과 추위를 극복하고 정상을 향한 루트 개척에 힘썼으나 남동릉 6700m 지점까지 도달하고 철수한다.
이때 개척한 루트가 ‘아브루치릉’으로 지금은 K2 등반의 가장 일반적인 루트가 되었고, 이 때 셀라가 찍은 K2의 모습이 이 산을 세상에 알리는 최초의 계기가 되었다.
이로부터 45년이 지난 1954년 이때의 원정에서 얻은 자료를 바탕으로 데지오(A.Desio)가 이끄는 원정대가 K2 정상에 이탈리아 국기를 꽂았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아브루치 공은 연합국 함대사령관으로 맹활약을 하고, 뛰어난 전술과 전략으로 명성을 얻는다.
아브루치 공의 원정대는 초골리사(Chogolisa)에서도 등반을 하였으며, 그는 어려서부터 서부알프스의 암벽들을 섭렵하던 중 1894년 체르마트에서 우연히 앨버트 머메리를 만나 1879년에 머메리가 초등한 마터호른 츠무트릉(Zmutt Ridge)을 함께 재등한다.
그는 머메리가 자신을 왕족이 아니라 동료 클라이머로 인정해 주는데 항상 존경했고 우정을 지속했다.
그가 낭가파르바트 등반을 계획한 것은 낭가파르바트에서 사망한 머메리를 추모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몽블랑 산군의 루이지 아마데오봉(Pic Luigi Amadeo·4469m)은 그의 원명을 따서 명명한 것이다.
그는 1919년부터 1933년 사망할 때까지 이탈리아와 아프리카를 오가며 에리트리아 식민지에서 농촌공동체 설립을 위해 일하며 강연과 연구 등 왕성한 활동을 하던 중 전립선암으로 사망한다.
관련 저서로는 미렐라 텐데리니·마이클 샌드릭 공저의 'The Duke of the Abruzzi' ( 1997)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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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데레크, 멜히오르 Anderegg, Melchior |
안데레크, 멜히오르 Anderegg, Melchior 1828~1914
스위스의 일류급 가이드로 마이링겐(Meiringen) 부근에서 출생했다.
그는 알머(C. Almer)와 함께 당대를 대표할 만한 훌륭한 알프스 가이드였다.
원래의 직업은 목각조각가였으나 영국 산악회 창설의 주역인 힌치클리프(T.W.Hinchcliff)에 의해 발탁되었다.
그는 1862년 몬테디스그라치아(Monte Disgrazia)와 당데랑(Dent d’ Herens)을 초등정하고, 1859년에 몽블랑의 보스릉(Bosses Ridge)을, 1865년에 브렌바벽(Brenva Face)을 초등반하였다.
여성 최초로 마터호른을 등반한 루시 워커(Lucy Walker)와는 20여 년간의 등반으로 우정을 나누었다.
그는 성실하고 정의감이 투철한 인물로 산행에서도 무모한 모험은 절대로 감행하지 않았다.
그의 둘째 아들 역시 훌륭한 가이드가 되었다.
알랭, 피에르 Allain, Pierre 1904~?
프랑스의 등산가이며 훌륭한 알프스 가이드로, 장비제작자이다.
그는 주로 퐁떼느블로(Fontainebleau)에서 암벽등반을 했다.
1933년 푸(Fou) 남서릉, 1935년 드류(Dru) 북벽, 당 뒤 께망(Dent du Caiman) 동벽, 1936년 당 뒤 크로꼬딜((Dent du Crocodile) 동릉의 개척등반을 하였으며, 당대의 일류 클라이머인 테레이(L. Terray), 라슈날(L. Lachenal), 레뷔파(G. Rebuffat) 등과 등반활동을 하였다.
이후 장비제작에 열중하여 1939년 처음으로 알루미늄 합금Aluminium Alloy) 카라비너를 제작하여 1947년부터 상업화하여 판매하기 시작하였다.
뿐만 아니라 외피가 캔버스 천으로 되고, 접착력이 뛰어난 부드러운 고무창을 댄 현재와 같은 모양의 플랫솔(Flat Sole) 암벽화가 알랭에 의해 최초로 개발되었다.
이 암벽화는 그의 이름 머리글자를 따서 피에이슈즈(P. A. Shoes)라 불렸으며, 이 암벽화는 암벽등반계에 일대 혁신을 일으켜 세계적으로 널리 보급되었다.
1950년 드 세고뉴(H. de Segogne)는 그를 그릅 드 오뜨 몽따뉴(Groupe du Haunt Montagne) 회장으로 추천했으나, 그는 이를 거절하였다.
그는 1963년 파리를 떠나 그레노블(Grenoble) 근처의 위리아쥐(Uriage)로 옮겨가 카라비너와 하강기 외에도 여러 가지 장비를 제작하여 판매하고 있다.
저서로는 'Alpinisme et Competition' (1949), 'L’ Art d’ Alpinisme' (1956)이 있다.
알머, 크리스찬 Almer, Christian 1826~1898
그린데발트 출신의 알프스 일류 가이드. 안데레크와 비교되는 일급 안내인으로 원래는 목동이었다.
그는 1854년 윌스(A.Wills)의 베터호른(Wetterhorn·3701m) 초등정에 참가하여 윌스의 쇠기둥을 정상에 꼽았다.
이때의 등정은 알프스 등반 사상 등산의 황금기를 여는 첫 쾌거였으며, 근대 등반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등반이었다.
1857년 아이거(Eiger·3970m)와 묀히(Monch·4099m)를 초등정하였으며, 1864~65년 윔퍼(E.Whymper)와 함께 많은 등반을 하였으나 마터호른의 초등정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1868~84년까지 쿨리지(W.A.B Coolidge)와 등반을 하였으며, 1884년 융프라우(Jungfrau) 동계 등반 중에 동상으로 발가락을 절단한 뒤 등반을 하지 않다가 1890년부터 다시 등반을 시작하였다.
그의 아들 5명이 모두 안내인이 되어 아버지의 뒤를 이었다.
그는 성품이 진실되고 순진하였으며, 항상 신중하게 등반을 하였다.
특히 베터호른을 좋아하여 1896년 금혼식 기념으로 부인과 함께 이 산을 등반하였다.
언솔드, 윌리엄 Unsoeld, William F 1927~1978
미국의 등산가로 위싱턴대학에서 비교종교학을 강의한 철학교수다.
12세 때부터 등산을 시작하여 티톤(Tetons)과 캐스케이드(Cascade) 등지에서 등산 수업을 한 다음 히말라야에 진출하였다.
1949년 가르왈(Garhwal)의 닐칸타(Nilkanta·6596m)를, 1954년 마칼루(Makalu·8463m) 등정을 시도하였으며, 1960년 마셔브룸(Masherbrum·7821m)을 초등정하였다.
1962~67년에는 평화봉사단의 부단장으로 네팔에서 거주하였다.
1963년 다이렌퍼스(N. Dhyrenfurth)가 이끄는 에베레스트 원정대에 참가하여 혼바인(T.F. Hornbein)과 함께 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정상에 올랐다.
이때 그는 서릉팀(혼바인과 언솔드)으로 등정해 남동릉으로 하산하는 루트를 택했으며, 비숍과 저스타드는 남동릉팀으로 두 팀이 정상에서 랑데부하였다.
이는 에베레스트 원정 사상 유례가 없는 최초의 횡단등반이었다.
당시 이들은 정상에서 합류한 후 8500m 지점에서 비박을 하였다.
이때 언솔드는 동상으로 9개의 발가락을 절단했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히말라야 등반에 온 정열을 쏟았다.
그는 난다데비(Nanda Devi·7816m)에 매혹되어 자기 딸의 이름도 난다데비로 지어준다.
그의 딸 난다데비는 아버지가 이끄는 1976년 난다데비 합동등반대에 참가하였으며, 정상 바로 아래 북릉상에서 조난사한다.
이후 그는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을 인솔하고 레이니어(Rainier·4392m)를 등반하였으나 하산 도중 눈사태로 사망한다.
에글러, 알버트 Eggler, Albert 1913~?
스위스 베른(Bern) 출신의 등산가로 베르너 오버란트(Berner Oberland)를 중심으로 등반활동을 하였으며, 바이스호른(Weiss Horn), 그랑샤르모즈(Grand Charmoz) 등을 오르기도 하였다.
1956년 로체(Lhotse·8511m) 초등정과 에베레스트 제2등을 목표로 한 11명의 대원으로 구성된 스위스 원정대의 대장을 맡는다.
이 원정대는 빙벽에서 비박용 얼음구멍과 비박 사이트를 만들기 위해 화약을 준비하였으나, 위험한 빙탑을 제거하는데 이 화약을 사용하였다.
로체 등반 중 6캠프를 설치하였으나 기상이 악화되어 등반을 일시 중지하다가 재도전하여 라이스(E. Reiss)와 루흐징거(F. Luchsinger)가 산소를 사용해 초등정에 성공한다.
이 원정대는 로체를 등정한 뒤 2차례에 걸쳐 에베레스트에도 올랐다.
이 원정에서 5일 간격으로 두 개의 8000m봉 등정이라는 성과를 이룩한다.
이 원정대의 성공은 에글러 대장의 리더십과 조직력이 유감없이 발휘되었기 때문에 얻어진 성과였다.
저서로는 'Gipfel ober den Wolken' (1956)이 있다.
에르조그, 모리스 Herzog, Maurice 1919~
인류 역사상 최초로 8000m 봉을 오른 프랑스 등산가. 리옹(Lyon) 출신의 엔지니어로 몽블랑 산군에서 수많은 등반활동을 하였다.
1950년 안나푸르나 1봉(Annapru naⅠ·8091m) 초등정으로 유명하며, 프랑스 등반가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사람 중의 하나이다.
1950년 프랑스산악회와 프랑스 히말라야위원회는 히말라야 진출을 계획하고, 금단의 나라 네팔이 등반대에게 문호를 개방하자 프랑스원정대가 처음으로 입국하였다.
그들은 당시 아무런 자료조차 없이 ‘지도의 공백지대’나 다름 없는 다울라기리(Dhaulagir·8167m)와 안나푸르나 두 산의 지형을 정찰하고 접근로를 탐색하는데 20여 일을 소모했다.
등반대장은 에르조그, 대원들은 당시 프랑스를 대표하는 1급 가이드들로 구성했다.
그들은 두 산을 정찰한 후 안나푸르나를 오르기로 결정했다.
6월 3일 에르조그와 라쉬날(L. Lachenal)은 5캠프를 출발, 정상으로 향했다.
두 사람은 흥분제인 맥시톤(Maxiton)을 복용했으며, 오후 2시 정상을 밟았다.
하산 도중 약기운으로 흥분상태에 빠져있던 에르조그는 무의식적으로 장갑을 벗다가 이를 잃어버린 채 행동한다.
예비용 장갑이 있었으나 전혀 기억하지 못한 채 구조될 때까지 광적인 상태에서 맨손으로 버티다 동상에 걸렸다.
그러다 결국 5캠프에서 그들을 기다리던 레뷔파(G. Rebuffat)와 테레이(L. Terray)에 의해 구조되었다.
그 이후의 하산 과정은 한 편의 장대한 서사시였다.
도중에 크레바스에서 비박을 하고 동상 때문에 셰르파에게 업혀 내려왔다.
원정대의 의사인 우도(J. Oudot)는 부족한 의료기구로 썩어가는 그들의 손가락과 발가락을 절단하며 의사로서의 책임을 다했다.
안나푸르나 초등정이 오늘날까지 높게 평가되는 이유는, 인류 최초의 8000m 봉 정복이라는 점과 사전 정찰 없이 단 한 번의 시도로 불가능을 가능케 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전후에 개발된 최신 소재의 장비를 총동원했다.
사상 최초로 나일론섬유와 두랄루민 등 경량의 장비를 사용하여 통상 1개월 이상 소요되는 8000m 거봉을 단 18일 만에 거뜬하게 등정하여 ‘나일론 등반대’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이 산의 초등정은 히말라야 거봉 초등정의 황금시대를 열게 한 기폭제가 되었으며, 20세기에 실현된 가장 위대한 모험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 등정으로 에르조그는 네팔 정부가 수여하는 구르카훈장을 받았으며, 네팔 국왕으로부터 ‘용자(勇者)’라는 칭호를 받는다.
이후 그는 자신의 기록과 이삭(M. Ichac), 라쉬날 등의 개인 일기를 종합하여 병상에서 구술한 ‘Annapurna Premier 8000’을 1952년에 출간한다.
- 우리 모두가 빈손으로 찾아간 안나푸르나는 우리가 평생 간직하고 살아갈 보배인 것이다.
인생에는 또 다른 안나푸르나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 라고 저자가 남긴 에필로그는 오늘날 여러 사람에게 회자되고 있는 글이다.
이 책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읽힌 책 중의 하나로 반 세기가 지난 지금 40여 개 국어로 번역되어 약 1100만권이 판매되는 기록을 남겼다.
이 책은 프랑스인 기질답게 화려한 문체로 쓰여진 것이 특징이다.
그 후 그는 프랑스국립등산학교(Ecole Nationale d’ Alpinisme) 교장, 샤모니시장, 체육상,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Annapurna Premier 8000' (1952), 'Regards Vers 1’n Annapurna'가 있으며, 번역서로는 <성봉 안나푸르나 初登>(모리스 에르조그 저·김경호 역·성문각·1973), <최초의 8000미터 안나푸르나>(모리스 에르조그 저·최은숙 역·수문출판사·1997) 등이 있다.
에반스, 로버트 찰스 경(1918~) Evans, Sir Robert Charles
영국 옥스퍼드 출신의 외과의사이자 등산가다.
1967~1970년 알파인클럽 회장을 역임했다.
영국과 알프스에서 활동하며, 1950년 틸만(H.W.Tilman)과 안나푸르나 산군을 탐험하고 1952년 쉽튼(E.E.Shipton)이 이끄는 초오유(Cho Oyu·8201m) 원정대에 참가하였다.
이 원정대는 1953년으로 예정된 에베레스트 원정에 필요한 대원 훈련과 장비 시험을 계획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그는 1953년 에베레스트 원정대의 일원으로 참가하여 버딜런(T.O.Bourdillon)과 함께 1차 공격조가 되어 남봉(8754m)을 오를 때 버딜런이 개량한 산소용구를 사용했다.
3일 후 힐러리(E.Hillary)와 텐징 노르가이(Tenzing Norgay)가 역사적인 초등정을 이룩한다.
1955년 세계 3위의 고봉인 캉첸중가(Kangchen Junga·8586m) 원정대의 대장을 맡아 밴드(G.Band)와 브라운(J.Brown)의 초등정을 성공시킨다.
초등 당시 두 사람은 정상 몇 발자국을 남겨놓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것은 현지 원주민들과 신성한 정상을 밟지 않기로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다음날 두 번째의 공격조 하디(Hardi)와 스트리더(Streather)가 정상 등정에 성공한다.
그동안 난공불락으로 여겨져 왔던 캉첸중가 원정의 성공은 에반스의 탁월한 지휘력과 대원들 간의 확고한 팀워크가 이루어낸 결과였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고 있는 에반스매듭(Evans Knot)은 그가 개발한 매듭이다.
저서로는 'Eye on Everest' (1955), 'Kangchen Junga-The Untrodden Peak' (1956), 'On Climbing' (1956) 등이 있다.
에켄슈타인, 오스카 요한니스 루드빅(1859~1921) Ecken Stein, Oscar Johannes Ludwig
런던 태생의 화학을 전공한 철도기사이자 등산가로 독일계 부친과 영국인 모친 사이에서 태어난 독일계 영국인이다.
역사 속에서 그의 이름을 기억하게 하는 유명한 일은 그가 현대적인 아이젠(Eisen) 발전의 기초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그는 오늘날 아이젠의 원형이 된 일명 ‘에켄슈타인 10발 아이젠’을 1908년에 최초로 고안하여 새로운 빙벽등반 기술과 함께 보급, 현대적 형태로 발전할 수 있도록 계기를 마련했다.
그가 고안한 ‘10발 아이젠’은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장비였다.
이 용구의 출현으로 등산은 한층 눈부시게 발전하였고, 눈과 얼음에 대한 등반개념이 완전히 바뀌었다.
그동안 미등의 벽으로 남겨져 있던 눈·얼음이 덮인 북벽의 루트들이 차례로 등정되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신형 아이젠을 개발한 에켄슈타인조차 처음에는 아이젠 사용을 경멸했으나 1886년 호베르크호른(Hohberghorn·4219m)의 빙벽등반을 하던 중 피켈을 이용한 발판깎기 기술인 스텝커팅(Step Cutting)에 지쳐 등반을 포기하게 되면서 비로소 아이젠의 효용가치를 깨닫게 된다.
이후 그는 아이젠 무용론이 그동안 자신의 무지와 편견이었음을 깨닫게 되어 서둘러 역사적인 물건이 된 ‘10발짜리 에켄슈타인 아이젠’을 고안하게 된다.
당시 아이젠이 발명된 영국에서는 이 용구의 사용을 기피했다.
보수적인 영국인들은 아이젠과 같은 인공적인 용구를 써서 정상에 오르는 일은 스포츠 정신에 위배되며, 이런 이기(利器)를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등산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사용을 기피했다.
오늘날 보편화된 이 용구도 한때는 이단시되었다는 점은 흥미로운 일이다.
그는 아이젠 발명뿐만 아니라, 길이가 짧은 피켈과 아이젠 사용 기술을 함께 조화시킨 ‘에켄슈타인 아이젠기술’도 창안하여 보급했다.
오늘날 프렌치 테크닉(French Technique)이라 부르는 평발딛기 기술인 플랫푸팅(Flat Footing)도 그가 개발했다.
일부 사람들은 불어로 ‘삐에다쁠라(Pieda Plat)’라고 하는 이 기술을 정통 프랑스식 기술로 오인하고 있으나 이 기술의 창안자는 영국의 에켄슈타인이며, 이후 프랑스 산악인들이 더욱 정교하고 우아한 형태로 완성시켰다.
‘10발 아이젠’의 출현은 종래의 쇠징 박힌 등산화를 퇴출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비브람(Vibram) 고무창을 출현시키는 기회를 제공했다.
그는 1892년 콘웨이(M.Conway)가 이끄는 카라코룸 원정대의 부대장으로 참가하였으나 대장과의 불화로 원정을 포기한다.
1902년 자신이 직접 K2 원정대를 최초로 꾸려 온갖 어려움 속에서 북동릉 루트를 따라 6821m 지점까지 진출했다.
그는 등반이론에 정통한 산악인으로 암벽등반에 체계적인 이론을 도입하고, 아이젠뿐 아니라 여러 가지 등반장비를 과학적으로 연구하여 실용화하는데 전력했다.
그는 빙벽등반에 적합한 짧은 피켈도 고안했으며 안정성이 높은 여러 가지 매듭도 연구했다.
그는 1차 세계대전 전에 있었던 여러 등산가 중 가장 과학적인 등산가로 평가되고 있다.
영국 클라이머스클럽(Climbers Club) 창설회원의 한 사람으로 알파인클럽에는 평생 동안 가입하지 않았다.
영, 지오프리 윈스롭(1876~1958) Young, Geoffrey Winthrop
영국 명문가 출신 교육자이자 시인이며 등산가. 1941~1944년까지 알파인클럽 회장을 역임했으며, 알프스에서 화려한 초등 기록을 남긴 20세기 초의 등산가다.
‘노르웨이 등반의 아버지’로 불리는 슬링스비(W.C.Slingsby)의 딸 엘리노어(Eleanor)와 결혼했다.
부친을 따라 유년시절부터 웨일스 지방에서 등반을 하였으나 삼촌이 등반사고로 사망하자 그의 집안에서 등산은 금기사항이 되었다.
20세 때 처음 알프스에 진출하여 가이드 크누벨(J.Knubel)과 명 파트너를 이루면서 여러 산들을 섭렵했다.
1898년 그랑꼬르니에(Grand Cornier)를 단독 등반하고, 1905년 바이스호른(Weisshorn) 남동벽에 신루트를 개척했다.
1906년 태슈호른(Taschhorn) 남서벽과 브라이트호른(Breithorn)의 영그라트(Young Grat) 돔(Dom) 남서벽을 등반했다.
1907년 치날로트호른(Zinalrothorn) 동벽과 바이스호른(Weisshorn)의 영그라트(Young Grat)를 등반했다.
1909년에는 말로리(Mallory) 등과 함께 네스트호른(Nesthorn) 북동릉을 초등반했다.
1911년 그레퐁(Grepon), 메르드글라스페이스(Mer de Glace Face)를 직등하고, 그랑드조라스(Grandes Jorasses) 동릉과 서릉을 등반했다.
이밖에도 태슈호른의 남면, 꼴드그랑조라스(Coldes Grandes Jorasses) 서릉, 그쉬팔텐호른의 레드티스(Red Teeth) 등 주목할 만한 등반을 했다.
그는 1차 대전에 참전하여 야전병원에 근무하던 중 왼쪽 다리를 잃었으나 등반에 대한 의욕을 꺾지 않은 채 스프링을 장착하여 길이를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고 충격을 흡수할 수 있는 특수 제작된 의족을 차고 등반을 하면서 강한 의지로 장애를 극복했다.
그는 의족을 차고 마터호른(Matterhorn)을 비롯한 여러 첨봉들을 올랐다.
마터호른 등반시 그는 외다리로 9시간 30분에 등반을 끝냈다.
그가 의족을 차고 등반한 것은 1927년이 처음이고, 1935년 치날로트호른(Zinalrothorn) 등반을 마지막으로 등반생애에 종지부를 찍었다.
당시 그의 나이 59세였다.
그는 알파인클럽 회장뿐만 아니라 1944년에는 영국등산협회를 창설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등반 이외에도 여러 권의 격조 높은 저술을 남겼다.
그의 저서 'Mountain Craft' (1920)는 오랫동안 등산의 지침서가 되어왔으며, 이밖에도 'On High Hill' (1927), 의족을 차고 마터호른을 비롯하여 여러 봉을 오른 등반기록인 'Mountains with a Difference' (1951) 등의 저서를 남겼다.
영허즈번드, 프랜시스 에드워드(1863~1942) Younghusband, Francis Edward
영국의 군인이자 탐험가다.
인도(현 파키스탄)의 뮤레(Muree)에서 육군 소장 존영허즈번드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영국 왕실 소속 기병대에 배속되어 1890년부터 인도 정치국으로 옮겨 캐시미르, 중앙아시아 각 지방의 주재관을 역임했다.
1886~1887년 만주를 출발, 서양인 최초로 백두산(2744m)을 등반했고, 북경~고비(Gobi)사막을 횡단하여 중앙아시아를 넘어 인도에 이르는 대장정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이 탐험여행은 당시 미지의 영역이었던 카라코룸 북쪽 무즈타그파스(Mustagh Pass)를 넘어 발토로 빙하(Baltoro Glacier)를 탐험했고, K2 북면을 가까이서 조망한 최초의 서양인이 되었다.
1889년 두 번째 탐험을 감행, 아그힐파스(Aghill Pass), 샥스감 강(Shaksgam River), 가셔브룸, 우독 빙하(Urdok Glaciers) 등을 발견하면서 파미르(Pamirs) 지역 깊숙이 들어가 3년에 걸쳐 탐사활동을 하였으며, 민타카 고개(Mintaka Pass·4712m)를 넘어 길기트로 귀환했다.
이후에도 파미르를 일주하는 탐험을 감행하였으며, 인도 북서변경의 정무관이 되어 1903년 티베트 영토에 군대를 진주시켜 영국 외교사에 이름을 남겼다.
그는 영국 에베레스트 원정을 추진시킨 장본인으로 영국왕립지리학협회 회장을 역임하는 한편, 에베레스트위원회를 발족시켜 그 위원장을 겸하였다.
이 위원회는 후일에 히말라야 위원회로 개칭된다.
그의 백부와 형도 중앙아시아, 인도 북서변방 및 아프가니스탄을 탐험한 선구자였다.
그의 중앙아시아 지역 탐사활동은 20세기 초 대영제국의 식민지 영토 확장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첩보적 성격을 가진 탐색이었다는 비판도 일고 있다.
저서로는 'The Heart of a Continent' (1896), 'Kashmir' (1909), 'Wonders of the Himalaya' (1924), 'The Epic of Mount Everest' (1926), 'Peking to Lhasa-the Narrative of Journeys in the Chinese Empire' (1926), 'Everest the Challenge' (1936)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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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에무라 나오미 |
우에무라 나오미(1941~1984) 植村直己
일본 메이지(明治)대학을 졸업한 일본을 대표하는 등산가이자 탐험가다.
알프스와 히말라야에서 활동했으며, 세계 최초로 5대륙 최고봉을 등정했다.
1968년 남미 아마존의 원류로부터 하구까지 6000㎞를 뗏목으로 주파했으며, 1970년 일본인 최초로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랐다.
그는 1974~1975년까지 1년 동안 그린란드 최북단에서 극지생활을 한 후 1978년 개썰매를 이용하여 북극권 1만2천㎞를 세계 최초로 단독 종단하여 북극점 최초의 단독 도달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그는 그때의 공으로 1979년 3월 영국에서 수여하는 세계에서 가장 용감한 사람에게 주는 스포츠 용맹상을 수상한다.
1984년 2월 북미의 매킨리 단독 등정에 성공하였으나 하산 도중 실종되었다.
저서로는 <북극권 22000km> <북극점 그린란드 단독행> 등이 있으며, 국내 역서로는 <내 청춘 산에 걸고>(곽귀훈·김성진 공역·1979) <돌아오지 않는 봄>(허창성 역·1986) <안나여 저게 코츠뷰의 불빛이다>(곽귀훈 역·1978) 등이 있다.
워커, 호레이스(1838~1908) Walker, Horace
영국 빅토리아 시대를 대표하는 여성등반가로 마터호른을 여성 최초로 오른 루시워커(Lucy Walker)의 동생이다.
그는 16세 때 벨랑(Velan) 초등반을 시작으로 67세 때 뽈뤼(Pollux) 등반까지 수많은 초등반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는다.
1864년 바르데에끄랭(Barre de Ecrin) 초등정, 1865년 피츠 로제그(Piz Roseg) 초등정과 몽블랑의 브렌바벽(Brenva Face) 초등반을 하였다.
1868년 그랑드조라스(Grandes Jorasses) 뽀앙뜨워커(Point Walker) 초등반은 특히 유명하다.
이는 1930년대 등반가들에게도 과제가 된 곳이기도 하다.
1874년 코카서스(Caucasus)의 엘브루즈(Elbruz)와 이미 등정된 봉들에 수많은 새 루트를 개척했다.
뿐만 아니라 도피네 알프스(Dauphine Alps)와 티롤(Tyrol), 돌로미테(Dolomites) 등 알프스의 전 지역을 섭렵했다.
그는 동계 등반과 가이드리스 등반(Guideless Climbing)을 강조하면서 몽블랑과 피츠베르니나(Piz Bernina) 등지에서 그의 이상을 실현했다.
1890년부터 1892년까지 알파인클럽 회장을 역임했으며,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웨스턴, 월터(1861~1940) Weston, Walter
일본알프스와 일본산악회를 거론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일본 등산의 아버지’로 불리는 영국의 성공회 목사다.
그는 유럽알프스에서 등산을 시작하여 브라이트호른(Breithorn), 마터호른 등을 올랐으며, 최초로 아이거요흐(Eiger-Joch)를 가이드리스로 횡단했다.
1888년부터 1차대전 전까지 일본에서 성공회 목사로 일했다.
일본에 거주하면서 ‘일본알프스’라는 산명을 만들어 세계에 널리 알렸으며, 일본의 등산운동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1905년 일본산악회 창설을 유도하고 그 기초를 다졌다.
그는 지도자적 소양을 갖춘 인물로 아이거 미텔레기릉을 초등하여 일본 산악계에 자극을 준 마끼유꼬도 웨스턴의 권유로 스위스에 가서 등반활동을 한다.
저서로는 'Mountaineering and Exploration in the Japanese Alps' (1896), 'The Playground of the Far East' (1918) 등이 있다.
휘테커(1929`~) Whittaker, Jame W.
미국인 최초로 에베레스트 정상을 밟은 인물이다.
미국 오리곤(Oregon)주 출신의 안내인이며 대학에서 생물학을 전공하였고, 스키 인스트럭터다.
그는 1963년 다이렌퍼스(Dyhren-furth)가 이끄는 미국 에베레스트 원정대에 참가하여 셰르파 나왕곰부(Nawang Gombu)와 함께 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남동릉을 거쳐 정상에 섰다.
뒤이어 언솔드(W.Unsoeld)와 혼바인(T.Hornbein)도 서릉을 거쳐 2차 공격에 성공하였다.
오늘날 서릉의 ‘혼바인 꿀르와르’는 당시 혼바인 대원의 이름에서 만들어졌다.
그는 매킨리(Mckinley·6191m) 원정에도 참가했다.
현재 그는 시애틀(Seattle)에서 알.이.아이(R.E.I) 장비점을 경영하고 있다.
이 장비점은 로스앤젤레스, 버클리 등에도 분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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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쉬테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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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드워드 윔퍼의 판화 ‘체르마트의 클럽룸’. 이 작품에는 당대를 풍미하던 유명한 등산가 18명이 등장한다. |
윌스, 알프레드 경 Wills, Sir Alfred 1828~1912
알프스 개척기에 활동한 영국의 등반가이자 고등법원 판사. 베터호른(Wetter Horn·3701m)을 등정하여 알프스 황금시대를 개막시켰으며, 알파인클럽 회원으로 1864~1865년까지 회장을 지냈다.
그의 집안은 영국 유수의 등반가문으로 유명한 등반가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1924년 에베레스트 원정대 대장인 노턴(E.F.Norton)은 그의 손자다.
비록 초등정이 아닌 네번째 등정이기는 하나 1854년 그의 베터호른 등정은 근대적인 등반의 시작이라 평가되고 있으며, 이 때의 등정 기록을 담은
영국 사람들은 베터호른의 등정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등정일인 9월 17일을 ‘근대등산 창립의 날’로 정하여 기념하고 있다.
윌스는 19세기 중엽에 일어난 빙하 논쟁에도 참여하여 포브스(J.D.Forbes)의 견해를 지지하였다.
윌스의 베터호른 등정 때 근대 피켈의 원조격인 용구가 최초로 등장하여 등반에 사용되었다는 점은 등산용구 발달사에서 특기할 만한 가치가 있다.
당시 윌스가 고용한 베르너 오버란트의 한 가이드가 도끼(Axe)와 지팡이(Stick)의 기능을 결합시켜 만든 수제품 아이스 액스(Ice Axe)를 들고 온 것이 현대 피켈의 효시가 된다.
이들은 이 기발한 발명품을 활용하여 빙하의 발판을 깎고, 커니스를 절단하고, 크레바스를 탐색하는 등 효과적으로 사용했다.
이 기발한 용구에 대해 윌스는 그가 펴낸 <알프스 방랑기>에서도 언급하고 있다.
‘이 피켈의 길이는 4피트(약 1.2m)에 강철제 파이크(Pike·긴 자루창)로 얼음을 깎기 좋도록 날카로운 날을 세웠으며, 자루와 평행이 되도록 수직을 이루고 있어 마치 큰 도끼 모양을 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윌스는 알프스 계곡에 이글스네스트(The Eagles Nest)라는 산장을 지어 안내인 발마(A.Balmat·몽블랑 초등자인 자크 발마의 손자)에게 관리를 맡기고 여생을 이곳에서 보냈으며, 폐인이 된 발마를 죽을 때까지 보살펴 주었다.
저서로는 'Wandering Among the High Alps' (1856), 'The Eagle’s Nest' (1860) 등이 있다.
윔퍼, 에드워드 Whymper, Edward 1840~1911
영국의 등반가로 1865년 알프스 4000m급의 마지막 보루였던 마터호른을 5년 동안 도전한 끝에 초등정을 이룩한 일로 유명하다.
이 등반으로 베터호른에서 시작된 11년간의 황금시대는 종말을 고하고 등산의 은시대(Silver Age)가 개막된다.
윔퍼는 원래 목판 조각공으로 1860년 판화 그리는 일을 부탁받고 알프스에 갔다가 산의 매력에 이끌린다.
그는 등반의 기초를 닦지는 않았으나 몽뺄부(Mont Pelvoux), 바르데 제끄랭(Barre des Ecuins)의 뽀엥뜨 윔퍼(Pte Whymper). 에귀유 베르뜨(Aig Verte) 등을 등반했다.
그는 바이스호른(Weisshorn), 마터호른과 같은 미답봉의 등정을 꿈꾸었으나 틴달(J.Tyndall)이 바이스호른을 초등정하자 마터호른 등정에 전념하였다.
그는 마터호른의 회른리릉, 쯔무트릉, 이탈리아릉 중의 하나를 시도하기 위해 브레일(Breuil)에 가서 까렐(J.A.Carrel)을 만났다.
그는 까렐의 인간적인 면모에 매혹되었으나 그가 이탈리아인으로 구성된 마터호른 등반대를 조직하자 분노와 배신감을 느낀 채 체르마트로 돌아와 회른리릉으로 등정하기 위한 대규모 등반대를 조직한다.
이 등반대의 대원은 프랜시스 더글러스(Francis Douglas), 찰스 허드슨(Charles Hudson), 더글러스 해도우(Douglas Hadow)였으며, 안내인으로는 미셀 끄로(Michel Croz), 피터 타우그발더(Peter Taugwalder) 부자였다.
그들은 7월 14일 오후 2시경 아무런 사고 없이 정상에 도착하였다.
이때 윔퍼는 이탈리아릉으로 올라오고 있는 까렐 일행을 보고 그들의 주의를 끌기 위해 돌을 던지기도 했다.
윔퍼의 마터호른 등정은 그가 알프스를 알게 된 이후 5년 동안 8번에 걸쳐 끈질긴 도전 끝에 얻어낸 결과로 알프스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엄청난 업적이었다.
윔퍼는 정상에 서서 “세계는 나의 발아래에 있다”라고 기쁨의 함성을 보냈으니, 이 등정은 황금시대의 최후를 장식하는 한 편의 드라마였다.
이로써 마터호른이 오를 수 없는 산이라는 신화는 사라졌다.
그는 이탈리아대 까렐과의 싸움에서 승리했지만, 오랫동안 기다렸던 승리 뒤에는 엄청난 비극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산 도중 해도우가 미끄러지면서 끄로, 더글러스, 허드슨을 끌어당기자 로프가 절단되면서 네 사람은 1200m 아래의 마터호른 빙하로 추락사했다.
알프스 등반 사상 가장 충격적인 조난 사고를 일으킨 것이다.
윔퍼와 타우그발더 부자만이 살아남아 체르마트로 돌아왔다.
이 사고는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고, 사고가 일어난 상황 자체가 독특했기 때문에 세간에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당시 사람들은 인명사고를 내는 등산에 대하여 비난의 소리가 높았으며 등산금지 여론까지 일어났으나 등산의 열기는 한층 고조되면서 ‘은의 시대’라는 새로운 등반기를 연다.
이 사건으로 윔퍼는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무죄판결을 받는다.
윔퍼의 등정 이틀 뒤인 7월 16일에는 장 안뚜안느 까렐(Jean Autoine Carrel)이 이탈리아 등반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릉을 통해 2등을 기록, 초등정의 영예를 놓친다.
이후 윔퍼는 알프스에서 눈을 돌려 탐험에 관심을 기울여 1867년과 1872년에 두 차례에 걸쳐 그린란드를 탐험한다.
난센의 그린란드 횡단이 1888년이었음을 볼 때 윔퍼의 생각이 한 발 앞섰음을 엿볼 수 있다.
그 뒤 윔퍼는 까렐과 함께 남미 에콰도르 안데스산군의 침보라조(Chimborazo·6310m)를 비롯하여 6개의 초등반을 기록한다.
이 등반에서 그가 펴낸 보고서를 높이 평가한 영국지리학회가 그에게 금메달을 수여한다.
그는 안데스뿐만 아니라 캐나디언 로키(Canadian Rockies)도 탐험한다.
그는 틴달의
이 판화에는 당대를 풍미하던 유명한 등산가 18명이 등장한다.
윔퍼는 엄격하고 냉정하여 접근하기 어려운 인물로 여자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 죽기 5년 전인 67세에 비로소 결혼하였으나 그의 가정생활은 행복하지 못했다.
그는 런던에서 태어나 1911년 샤모니에서 급사하여 몽블랑이 바라다 보이는 샤모니 계곡에 묻혔다.
그의 묘비에는 저술가·탐험가·등산가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의 생애는 바로 알프스 황금기와 더불어 시작하여 근대 등산의 기초가 굳어질 때 끝났다.
그의 역저 <알프스 등반기>는 마터호른에 오른 지 6년이 지난 1871년에 출간되었다.
등산사 연구가 아놀드 런(Arnold Lunn)이 “이 책은 사람이 산에 오르는 한 계속하여 읽힐 책”이라고 격찬을 보낸 것처럼 일세기가 지난 지금에도 여러 나라의 언어로 번역되어 세계적인 산악문학의 고전으로 널리 읽히고 있다.
저서로는 'Scrambles Amongst the Alps in Years 1860~1869' (1871), 'Travels Amongst the Great Andes of Equador' (1892) 등이 있으며, 국내 역서로는 <알프스 등반기>(김영도 김창원 공역·1988·평화출판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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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르바수티, 주스토 |
제르바수티, 주스토 Gervasutti, Giusto 1909~1946
이탈리아 프리올레 출신의 뛰어난 등반가. 트리노 대학에서 법률과 정치학을 전공했으며, 알프스 북벽 등반기로 상징되는 1930~1940년대에 서부알프스에서 5, 6급의 멋진 등반을 하였다.
1934년 샤보드(R.Chabod)와 함께 그랑드조라스(Grandes Jorasses) 끄로 스퍼(Cro Spur)에 도전하였으나 악천후로 후퇴하였다.
이들은 이를 두고두고 후회하였다.
같은 해 타쿨(Tacul) 동벽을 등반하고 1935년 6월 그랑드조라스를 다시 찾은 그는 그랑드조라스 북벽 제2등을 기록한다.
초등의 기회는 놓쳤지만 초등팀보다 6시간이나 짧은 시간에 오른 그에게 유럽 등산계는 찬사를 보냈다.
1936년 에일프로와드 서봉(Ailefroide West·3949m), 1938년 에귀유 블랑쉬드 쀼뜨리(Aig Blanche de Peutrey)의 구글리에르미나봉(Pt. Gugliermina) 남벽, 1940년 프레니(Freny)의 라이트 핸드 필라(Right Hand Pillar) 초등반 등은 특기할 만한 등반이었다.
같은 해 그는 그랑드조라스 동벽의 이롱델리지(Hirondelle Ridge)를 초등정한다.
제르바수티는 매우 현대적인 사고방식을 지닌 인물로 머메리를 존경했다.
그의 저서 <알프스에서 코카서스로>를 열심히 탐독했고, 머메리의 몬테시에라 초등반 루트를 따라 오르며 자신의 첫 선등을 장식한다.
그는 프랑스의 등반가 루시앙 드뷔(Lucian Devies)와 파트너십을 이루며 우정을 나누었다.
그와 함께 1100m가 넘는 거벽 오랑(Olan·3564m) 북벽을 우박과 안개, 벼락이 치는 가운데 올라 초등정에 성공한다.
그는 후일 자서전에서 당시의 등반 상황에 대해 “정상으로 오르는 등반은 죽음과의 사투였고, 등정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생존을 위해 올랐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제르바수티는 이탈리아 산악회로부터 프랑스와 정치적 대립 문제를 이유로 루시앙 드뷔와 단절할 것을 종용받았으나 그는 “자신이 즐기기 위해 등반을 하는 것이지 국가의 위신을 걸고 등반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면서 등반에 대한 파트너십은 국경을 초월하는 것이라고 의사를 표명했다.
그는 등반뿐만 아니라 인간미와 원숙한 인격의 소유자로 평가되고 있다.
그의 로프 파트너였던 루시앙 드뷔는 “비록 언어와 조국이 다를지라도 서로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가까운 친구로 그와 함께 로프를 묶고 등반할 수 있기를 항상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알프스의 난이도 높은 거벽뿐만 아니라 첫 해외 원정으로 남미 안데스에 원정하여 세로리토리오(Cerro Littorio·5395m)와 무명봉인 마르모레호(Marmolijo·6100m) 건너편의 중앙릉도 초등정한다.
그는 1946년, 지금은 제르바수티 필라라 불리는 몽블랑 뒤 타쿨(Mont Blanc du Tacul) 중앙릉 등반 중 기상악화로 하강하다가 로프 두 가닥을 모아 쥐지 않고 한 가닥만 잡는 로프 조작의 실수로 추락사하였다.
저서로는 'Scalate Nelle Alpi' (1947)가 있다.
주르브리겐, 마티아스 Zurbriggen, Mattias 1856~1917
이탈리아 출신의 스위스 안내인. 남미 안데스의 최고봉 아콩카구아(Aconcagua·6959m) 남벽을 단독 초등반하였다.
그는 1881년부터 본격적인 가이드가 되었으며, 몬테로자(Monte Rosa·4634m)를 즐겨 올랐다.
1890년 이후 카라코람을 중심으로 한 히말라야와 뉴질랜드, 알프스, 안데스 등 알프스 이외의 지역에서 활발하게 등산 활동을 하였다.
1892년 콘웨이(M.Conway)가 이끄는 영국원정대에 참가하여 카라코룸의 파이오니어 피크(Pioneer Peak·6970m)의 서남릉을 초등정하였다.
1895년 뉴질랜드의 마운틴쿡(Mt. Cook ·3764m) 북동릉을 피츠제랄드(E.A.Fitzerald)와 함께 초등정하였다.
그는 1897년 피츠제랄드가 이끄는 대규모 안데스 원정대에 참가하여 피츠제랄드와 함께 아콩카구아 정상을 공격하던 중 정상 500m 아래에서 피츠제랄드가 고산병으로 등반을 포기하고 내려갔으나 주르브리겐 만이 단독으로 등반을 강행하여 남봉(6928m)을 초등정하였다.
저서로는 'From the Alps to Andes' (1899)가 있다.
지그몬디, 에밀 Zsigmondy, Emile 1861~1885
오스트리아의 등반가이자 외과의사. 그의 형 오토 에밀(Otto Emile)과 함께 알프스 등반 사상 황금시대를 이룬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힌다.
이들 형제는 가이드리스 등반(Guideless Climbing)과 단독등반을 과감하게 실천하여 당시 주변에서 많은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이 실천한 등반방식은 단지 한 시대를 앞서간 것으로 1920~30년대에 활약한 벨첸바흐(W.Welzenbach) 등으로 대표되는 뮌헨파에 의해 절정에 이르게 되었으며, 근대 등반의 개념을 정립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지그몬디는 도피네 알프스(Dauphine Alps)의 라메이쥬(La Mei Je·3987m) 남벽 횡단 중에 추락사하였다.
질러탈 알프스(Zillertal Alps)에 있는 지그몬디 슈비체(Zsigmondy Spitze)는 그들 형제를 기념하기 위해 명명된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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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나드, 이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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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5년 치마오베스트 북벽 초등 당시 모습. 왼쪽에서 세 번째가 캐신. |
캐신, 리카르도 Cassin, Riccardo 1909~
제2차 세계대전 전 유럽 전역의 알피니즘을 주도해 온 전전과 전후 세대를 연결한 이탈리아 등산계의 대부다.
그는 알프스 등반사에서 1930년대를 대표하는 금세기 최고의 알피니스트로 평가받고 있다.
북부 이탈리아 사볼가뇨에서 태어나 레코(Lecco)에 살면서 그리그나(Grigna)의 석회암장에서 1926년부터 등반을 시작하면서 경력을 쌓아나갔다.
그는 ‘이탈리아 신등반그룹(New Italy Climbing Group)’을 결성하고 이를 주도하면서 서부알프스와 돌로미테 등지에서 6급의 암벽등반 시대를 열어나갔다.
1934년 당대의 명 클라이머인 에밀리오 코미치(E.Comici)와 첫 만남을 가진 후 친밀한 관계를 맺어오면서 이때부터 본격적인 등반을 시작하였다.
1935년 그의 생애 최고 업적 중의 하나인 치마오베스트(Cima Ovest) 북벽을 초등하였다.
당시 그는 낙뢰와 섬광이 번쩍이는 폭풍 속에서 오버행으로 이루어진 500여m의 수직벽을 이틀 동안 비박을 하면서 과감한 등반을 감행한다.
그는 이 등반을 성공시킨 후 이탈리아의 영광이 될 만한 커다란 업적을 이룩했다는 자부심으로 감격했다.
당시 유럽 산악계의 분위기는 독일·이탈리아·오스트리아·프랑스 등의 클라이머들이 자기 조국의 영예를 걸고 경쟁적으로 미등의 벽에 초등의 흔적을 남기던, 알피니즘에도 국가간의 내셔널리즘이 강하게 작용하던 시대였다.
올림픽에 출전한 운동선수가 조국의 영예를 표방하고 그라운드에서 열띤 경쟁을 벌이면서 뛰었듯이 유럽 산악인들도 자국의 우월성을 앞세우면서 초등 경쟁을 벌였다.
1937년 피츠바딜레(Piz Badile) 북동벽 초등 당시에도 정상 부근의 폭풍설 속에 갇혀 2명의 대원이 탈진하여 사망한다.
1938년 그는 에스포지토(L.Esposito), 티죠니(Tizzoni)와 함께 단 한 번의 시도로 전 유럽의 관심사였던 그랑드조라스(Grandes Jorasses)의 워커릉(Walker Spur)을 초등반하여 유럽 산악계를 침묵시켰다.
워커스퍼 초등으로 이탈리아는 일거에 산악 강국으로 부상한다.
이 기습적인 쾌거로 이 벽의 등반을 노리던 수많은 등반가들을 실망시켰다.
캐신 일행이 이룩한 이 등반의 성공은 독일 게르만 민족의 아이거 북벽 승리에 대한 무언의 시위이기도 했으며, 알프스 3대 북벽 중 유일하게 남아있던 마지막 과제를 해결한 것이기도 하다.
캐신은 이때의 심경을 “같은 산악인으로서 아이거 북벽 초등 소식을 듣고 기뻐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한편 우리 기대가 무참히 무너졌다는 사실에 몹시 실망했다.
그래서 몇 번 정도 듣기만 했던 그랑드조라스를 선택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국가 의식이 강하게 작용한 단순한 동기에서 출발한 그랑드조라스 등반의 성공은 지금까지도 세기적인 대등반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전 전유럽의 알피니즘을 주도해 온 캐신의 천재성은 루트에 대한 정확한 판독에 있다.
세기적인 대등반으로 평가받는 워커스퍼 초등이 이를 입증한 결과다.
그는 자연스러운 선을 따르면서 직등을 추구하였다.
워커스퍼 등정 후 그는 “알피니즘의 본류는 빙설암의 어려운 조건을 추구하고 이를 극복하는데 있다”고 말했다.
등산에 입문하기 전 캐신의 취미는 권투였으나 등반 세계에 입문하고 나서부터 광적인 클라이머로 변신한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는 레코에서 전기공장의 감독으로 일하였으나 전쟁 중에는 레지스탕스 요원이 되어 독일 항전에 참여하기도 했다.
1946년 이탈리아산악회 레코 지부장을 역임하면서 후진 지도와 산장 복원 사업에 주력했다.
회장직을 사임한 1947년부터 하켄, 카라비너, 해머 등 금속제 장비제작에 힘을 기울였다.
1970년대 그가 직접 제작한 ‘캐신’이란 상품명의 암벽장비가 우리나라에서도 널리 사용되었다.
‘대장장이 캐신’이라는 애칭도 그가 금속장비 제작을 했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
1953년 이탈리아 정부 지원의 K2 원정대 아르디토 데지오(Ardito Desio) 대장과 K2를 정찰했으나 대장과의 견해 차이로 불화가 생긴 가운데 스키 사고로 발목부상을 입어 1954년 본대(K2 초등대)에 합류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겼다.
1958년 가셔브룸4봉(GasherbrumⅣ·7925m) 원정대장으로 참가, 초등정을 이룩하였다.
1961년 52세의 나이로 북미 최고봉 매킨리(Mckinley·6191m)에 원정, 사우스 버트레스 루트를 초등정했다.
이 루트는 초등자 캐신을 기리기 위해 ‘캐신리지’로 명명했다.
이 초등을 축하하기 위해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과 그론치 이탈리아 대통령이 축전을 보내 그의 공적을 크게 치하했다.
1969년에는 페루 중부의 안데스 히리상카(Jirishanca·6126m) 서벽을 초등하였다.
1974년 히말라야 3대 미해결 과제로 남아있던 등반 고도 3500m 이르는 난공불락의 로체(Lhotse·8516m) 남벽에 대장으로 원정하였으나 베이스캠프까지 덮쳐오는 눈사태와 한 달 동안 매일 몰아치는 강풍의 횡포 앞에 결국 후퇴하고 만다.
그의 등산 인생에서 가장 괴로운 최초의 패배를 이때 처음 맛본다.
당시 대원으로 참가했던 메스너는 대장이 처음 당하는 패배감을 백전노장답게 잘 참아냈다고 당시 상황을 증언했다.
로체 남벽에서 돌아와 기자회견장에 들어선 캐신은 “아마 20년 후 누군가 이 벽을 오를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현재로서는 불가능하다.
20년 후에 오른다 해도 행운이 따르지 않으면 도저히 불가능할 것이다”고 말했다.
캐신의 예언이 있고 난 후 15년 만인 1990년에 ‘서기 2000년의 벽’은 토모 체슨(Tomo Cezen)에 의해 단독 등정된다.
그는 로체 남벽에서 후퇴했으나 그의 알피니즘은 끝나지 않는다.
1987년 78세의 나이로 피츠바딜레를 10시간에 재등하여 백전노장의 저력을 과시, 주변을 놀라게 했다.
그는 등반을 끝낸 뒤 “등반을 즐기면 50, 60, 80세까지도 등반이 가능하다”고 말하면서 아직도 자신이 건재함을 입증했다.
그는 산을 찾는 후배 산악인들에게 “보다 높은 차원의 알피니즘을 위해서는 환경 자체를 극복할 수 있는 저력을 반드시 키워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저서로는 'Lhotse 75' (1977), 'Fifty Years of Alpinism' (1981·영문판), 'Cing Uant Anni di Alpinismo' (1977) 등이 있다.
카스파레크, 프리츠 Kasparek, Fritz 1910~1954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등반가 중의 한 사람. 그는 1938년 7월 헤크마이어(A.Heckmair), 베르크(L.Vorg), 하러(H.Harrer) 등과 함께 전 유럽의 관심이 집중되었던 난공불락의 아이거 북벽을 초등하여 세계 산악계에 이름을 떨친다.
그는 아이거 북벽을 초등함으로써 알프스 최고 난이도의 과제를 해결함과 동시에 알프스 철시대의 정점을 장식하는 위업을 이룩한다.
그는 카이저(Kaiser) 연봉과 돌로미테(Dolomites) 등지에서 6급의 등반을 하였다.
1938년 찐네(Zinne) 북벽을 동계 초등반했으며, 아이거북벽 등반에서는 탁월한 등반 기량을 구사하며 정상에 섰다.
1954년 안데스의 살칸타이(Salcantay·6081m) 북동릉 등반 중에 눈처마의 붕괴로 추락사하였다.
저서 'Vom Peilstein zur Eiger Nordwand' (1951)는 산악인들의 진한 우정을 담아냈으며, 하러의 <하얀 거미·Die Weisse Spinne>와 함께 전세계 산악인들에게 널리 애독된 책이다.
코미치, 에밀리오 Comici, Emilio 1901~1940
이탈리아 트리에스테(Trieste) 출신의 등반가로 인공등반을 창안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이탈리아의 ‘국민적 클라이머’로 추앙받고 있다.
돌로미테에서 등반활동을 하면서 200여 개의 루트를 개척해 6급 등반 시대의 막을 여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그는 39년이라는 짧은 생애 동안 돌로미테에서 600여 개의 루트를 등반했으며, 이중 200개가 초등 루트였다.
특히 1933년 치마그란데(Cima Grande) 북벽 초등반은 알프스 북벽 등반의 전환점이 되었다.
그는 단독등반에도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디레티시마(Direttisima)를 주창하였다.
“정상에서 물방울을 떨어뜨려 그 흐르는 자국을 따라 직선으로 루트를 개척해야 한다”고 말하였으며, 가능하면 어려운 루트로 정상에 오르는 것이 가장 품위 있는 등반이라고 했다.
코미치의 이러한 견해는 오늘날 볼트의 사용으로 그 가능성이 커졌으나 그가 볼트의 사용까지 생각했었는지는 의문이다.
그가 생존했을 당시에는 아직 볼트가 개발되지 않고 있었다.
후일 그의 견해를 잘못 이해한 많은 등반가들이 세계 도처의 거벽에서 볼트를 과용하면서 직등 루트를 뚫는 우를 범하였다.
그의 충격적인 첫 번째 초등반은 1929년 이틀에 걸쳐 오른 소렐라 디 메초(Sorella di Mezzo) 북서벽 등반이다.
이 등반은 이탈리아 최초의 6급 등반으로 기록된다.
카라비너, 하켄, 줄사다리를 사용한 수준 높은 인공등반기술을 현대적 관점으로 풀이한 첫 등반이었다.
1931년 치베타(Civeta) 북서벽의 코미치 베네디티(Comici Benediti) 루트를 초등하였으며, 1933년 수직 암벽과 오버행이 550m나 이어져 있는 치마그란데(Cima Grande) 디라바레도(di Ravaredo) 북벽 코미치 디마이(Comici Demai) 루트와 치마피콜라 디라바레도(Cimapicola di Ravaredo) 북벽을 차례로 초등반하였다.
그는 후일에 치마그란데 재등을 할 때 자신의 초등 기록을 깨고 3시간 30분 만에 단독등반으로 정상에 오르기도 하였다.
그는 기도 레이(Guido Rey)의 아크로바티크 클라이밍(Acrobatic Climbing)의 맥이 흐르는 돌로미테의 분위기를 발판으로 하여 6급 클라이밍 세계로 도약하면서 현대 인공등반기술의 표준 스타일을 완성하는데 공헌하였다.
그는 오토 헤르조그(Otto Herzog), 한스 듈퍼(Hans Dulfer) 등 독일과 오스트리아 클라이머들이 주도해 온 뮌헨파 전통을 전수받은 등반가였다.
그는 소년시절부터 여러 분야의 스포츠에 열중한 만능스포츠맨으로 거의 완벽에 가까울 정도의 신체조건을 구비한 클라이머였다.
딱 벌어진 넓은 어깨, 가는 허리, 긴 팔 등은 클라이머로서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등산세계에 입문하기 전에는 동굴탐험에 심취하기도 했다.
그는 이탈리아 최초의 클라이밍 스쿨을 개설하여 운영했으며, 그가 학교에서 가르친 과목은 인공등반기술이었다.
그가 등반교육에서 강조한 부분은 인공보조물(피톤)을 가능하면 한 피치당 1개 정도만 사용하는 피톤의 제한적 사용법이었다.
그는 수많은 루트를 등반하였으나 피톤을 가장 적게 사용하려고 노력했다.
코미치가 발전시킨 인공등반기술은 알프스 전역의 수직벽과 오버행에서 위력을 발휘했으며, 줄사다리 3개를 이용해 루프(Roof)를 돌파하는 핵심기술도 그가 창안한 것이다.
그는 등반교육 중 여자교육생과 암각에 슬링을 걸고 내려오다 슬링이 끊어지면서 50m 추락하여 사망하였다.
저서 'Alpinismo Eroico'는 사후에 발간된 유고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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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콘웨이, 윌리엄 마틴 |
커닝햄, 존 Cunningham, John 1927~1980
영국의 전후 세대를 주도한 스코틀랜드의 등반가다.
원래 그는 뛰어난 레슬링 선수였으며 발레를 배우기도 했는데, 발레는 몸의 유연성을 중시하는 암벽등반에서 많은 도움이 되었다.
1980년 홀리헤드(Holyhead) 근처의 해벽에서 추락하는 소녀를 구하려다 사망하였다.
1953년 그는 하미스 매킨즈(Hamish Macinnes)와 함께 2명의 단촐한 에베레스트 원정대를 조직했으나 자금조달에 실패하여 원정을 포기한다.
1958년 디스테길사르(Disteghil Sar·7885m), 1959년 아마다블람(Ama Dablam·6856m) 원정에 참가하는 등 히말라야뿐만 아니라 뉴질랜드에서도 활동하였으며, 남극을 세 차례나 방문하였다.
등반사적 측면에서 볼 때 그는 빙벽등반기술 보급에 커다란 공헌을 한 인물이다.
1960년대 수준 높은 빙벽등반을 하는 사람이 많지 않던 시기에 그는 스코틀랜드 빙벽등반의 전설적인 존재였던 지미 마셜(Jimmy Marshall)의 자리를 추월하였다.
드갈 해스톤(Dougal Haston)과 같은 우수한 알피니스트들이 마셜 밑에서 배출된 사람이다.
그는 이제까지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프런트 포인팅의 한계를 70도 경사까지 끌어올렸다.
1970년 커닝햄은 케언곰(Cairngorms)에 있는 헬스럼(Hell’s Lum)의 수직빙벽을 올랐다.
이 빙벽은 길이가 짧아도 수직벽이었다.
이 등반은 스텝 커팅을 하지 않고 오른 스코틀랜드 최초의 수직 빙벽등반이었다.
그는 전 세계의 빙벽등반 기술에서 스코틀랜드 상황에 알맞은 기술을 택하여 수정을 하고 독자적인 기술을 개발하는데 놀라울 정도의 융통성을 보였다.
그는 스코틀랜드 동계등반에 가장 큰 공헌을 한 클라이머였다.
그는 70도 이상의 빙벽에서 아이스 스크류(Ice Screw)를 사용하지 않고 각진 아이스 대거(Ice Dagger)와 크램폰의 프런트 포인팅 기법을 사용하여 수직빙벽을 올랐다.
또한 각이 심하게 진 아이스 액스(Ice Axe)와 데드맨(Dead Man) 사용의 일반화에도 많은 기여를 하였다.
저서로는 'Guide to Winter Climbs : Cairngorms and Creag Mcaghaidh' (1973)가 있다.
콘웨이, 윌리엄 마틴 Conway, William Martin 1856~1937
영국의 등반가이자 탐험가로, 빅토리아 시대의 미술평론가이자 작가이기도 하다.
그는 프랭크 스마이드(F.Smythe)와 같은 스타일의 등반방식을 취했으며, 머메리(A.F.Mummery)를 무척 존경했다.
윔퍼(E.Whymper)의 안데스 원정대를 모방하여 1892년 카라코룸(Karakorum) 지역에 대한 원정대를 조직하여 스리나갈(Srinagar)로부터 길기트(Gilgit)에 들어가 히스파(Hispar), 발토로(Baltoro) 빙하지역을 답사하고 지도를 제작했으며, 파이오니어 피크(Pioneer Peak·6790m)를 추르브리겐(M.Zurbriggen)과 함께 등반하여 5970m까지 도달한다.
그는 카라코룸 일대에 있는 2개의 거봉에 브로드 피크(Broad Peak·8047m)와 히든 피크(Hidden Peak·8068m)라는 산명을 붙인다.
브로드 피크는 알프스의 브라이트 호른(Breit Horn)과 비슷해서 영어와 같은 뜻인 ‘폭이 넓은 봉(Broad Peak)’이란 이름을 붙인 것이며, 히든 피크는 가셔브룸 산군의 여러 고봉에 가려져 발토로 빙하 깊숙이 거슬러 올라가야 볼 수 있기 때문에 ‘숨어있는 봉우리(Hidden Peak)’로 이름을 붙인 것이다.
1898년 남미의 일리마니(Illimani·6462m)를 초등정하고 아콩카구아(Aconcagua·6962m)를 등반하였으며, 1901년 자신이 처음으로 올랐던 브라이트 호른 등반을 마지막으로 등반활동을 끝낸다.
그는 1881년 뻬닌알프스(Pennine Alps) 지역의 등반안내서인
저서로는 'Climbing and Exploration in the Karakorum Himalaya' (1894), 'The Alps from End to' (1912), 'Mountains Memories' (1920), 'The Alps' (1904), 'The Bolivian Andes' (1901) 등이 있다.
콜리, 존 노먼 Collie, John Norman 1859~1942
영국의 등반가로 초기 히말라야 개척에 영향을 주었다.
그는 알프스에서도 많은 활동을 하였다.
1893년 머메리와 함께 당디르깽(Dent du Reguin)과 에기디블랑(Aig du Plan) 남서벽을 초등반하였다.
1895년 6월 머메리, 해스팅스(G.Hastings) 등과 함께 최초로 낭가파르바트(Nangga Parbat·8125m) 원정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이 원정은 머메리와 그를 수행한 2명의 구르카(Gurkha)인의 행방불명으로 비극으로 끝났다.
콜리와 해스팅스는 10월까지 남아 머메리를 수색하였으나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이 사건은 1902년 콜리가 발표한 등정기에 친구를 설산에 묻고 돌아오는 허전한 마음을 애절한 문장으로 남겼다.
그는 1897년 캐나디언로키(Canadian Rockes)를 영국인으로서 최초로 답사한 이래 다섯 차례나 이 지역을 방문했다.
그는 유니버시티 칼리지(University College)의 유기화학 교수로 네온가스(Neon Gas)를 발견하고 X선의 응용실험을 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Climbing on the Himalaya and Other Mountain Range' (1907)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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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쿠쿠츠카, 예지 |
쿠쿠츠카, 예지 Kukuczka, Jerzy 1948~1989
폴란드 태생의 세계적인 등반가로 1979년부터 1989년 로체 남벽에서 사망할 때까지 10년 동안 8000m 고봉 17개를 완등한 20세기가 낳은 철인이다.
그와 14개 거봉 완등 레이스를 벌였던 메스너와 달리 낙후하고 폐쇄된 동구권에서 등산을 시작한 그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히말라야 거봉들을 전혀 새로운 스타일로 등반해낸 점은 세계 등반사에 길이 남을 업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1979년 그가 히말라야 무대에 혜성처럼 나타나서 1989년 로체 남벽에서 로프가 끊어져 사망할 때까지 10년 동안에 오른 8000m 고봉 편력은 매우 다채롭다.
그가 노말 루트로 오른 산은 오직 로체뿐이었고 에베레스트, 가셔브룸1봉과 2봉, 브로드피크, 낭가파르바트, K2, 마나슬루, 시샤팡마는 모두 새로운 루트를 개척했으며, 마칼루는 단독 등정했다.
특히 다울라기리, 초오유, 캉첸중가, 안나푸르나는 동계 등정을 이룩했다.
이 중 초오유와 캉첸중가는 동계 초등정이었으며, 어렵기로 정평이 나 있는 안나푸르나 남벽은 새로운 루트를 뚫고 정상에 올라 8000m 거봉 등정사에 새로운 족적을 남긴다.
1981년 베리에이션 루트를 열고 서북릉을 통해 단독으로 등정한 마칼루 등정은 등정 증거가 없어 의혹이 제기되었으나 다음 해인 1982년 한국대의 허영호가 정상에서 쿠쿠츠카가 정상 등정 증거물로 놓고 온 무당벌레 마스코트를 발견함으로써 그의 등정 의혹에 종지부를 찍는다.
쿠쿠츠카의 히말라야 중요 등반 연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79년 로체(8511m) 서북면 무산소 등정, 1980년 에베레스트(8850m) 남벽에 신루트 개척, 1981년 마칼루(8463m) 서북릉에 베리에이션 루트를 열고 단독 등정, 1982년 브로드피크(8047m) 등정, 1984년 북봉과 중앙봉을 연결하는 신루트로 등정하여 이 산을 두 번 등정하게 된다.
1983년 가셔브룸2봉(8035m) 동서릉과 가셔브룸1봉(8068m) 서남벽에 신루트를 개척하여 등정, 1985년 다울라기리(8167m) 동북릉 동계 초등정, 같은 해 초오유(8201m) 동남벽에 신루트를 개척하여 동계 초등을 이룩한다.
1985년 낭가파르바트(8125m) 동남벽에 신루트를 개척하여 등정한 후 1986년에는 캉첸중가(8586m) 서남벽 동계 초등을 성공시킨다.
1986년 K2(8611m) 남벽과 마나슬루(8161m) 동북벽에 신루트를 개척하여 등정, 1987년 안나푸르나(8091m) 북벽 동계 초등과 시샤팡마(8046m) 서릉에 신루트를 개척하여 등정하였다.
그의 경쟁자였던 메스너가 8000m급 14봉을 완등한 지 불과 4주 뒤 쿠쿠츠카가 시샤팡마를 마지막으로 14봉 등정을 끝내고 돌아왔을 때 메스너는 ‘당신은 제2인자가 아니다.
당신은 참으로 위대하다’라는 내용의 축하 전문을 보냈다.
저서로는 'Im Vierzehnten Himmel-Wettlauf im Himalaya' (1990)가 있으며, 국내 역서 <14번째 하늘에서>(김영도 옮김·1993)는 그가 남긴 오직 하나의 기록이다.
이 책 내용 중에는 1983년 한국 안나푸르나 원정대의 동계 초등 의혹에 대한 그의 견해를 언급하고 있어 흥미롭다.
쿨리지, 윌리엄 Coolidge, William Augustus Brevoort 1850~1921
영국의 등산가. 알프스 등반사에 정통한 저명한 역사가다.
뉴욕에서 출생한 쿨리지는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했다.
병약했던 그는 이모의 보살핌 속에서 성장했다.
그의 이모 브레보오트(Brevoort)는 산악인으로 그녀가 사망할 때까지 쿨리지와 함께 등반하면서 그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1870년 라 메이쥬(La Meije) 중앙봉, 1876년 피츠 바딜레(Piz Badile)를 초등했으며, 1874년에는 베터호른(Wetterhorn), 융프라우(Jungfrau), 1879년 슈레크호른(Schreckhorn)을 동계 초등했다.
1865~1898년 동안 한 계절도 빠지지 않고 알프스를 등반하여 이 지역에 대한 풍부한 경험과 지식을 쌓았으며, 수많은 등반을 하였다.
그는 암벽등반보다는 빙벽등반을 선호했으며, 알프스 등반 사상 황금기가 끝난 후에야 암벽등반을 시작하였다.
그는 1882년 이후 알프스연구와 산악 도서관 건립에 생애를 바쳤다.
1897년에는 재직하고 있던 옥스퍼드를 떠나 그린델발트로 이주하였다.
그는 알프스를 서부, 중앙부, 동부로 구분하고 이를 다시 세분하였다.
이 분류법이 지금도 일반적으로 쓰이고 있다.
그가 최초로 펴낸 실험적 소책자인
그의 저서는 등반가들에게 많은 정보를 제공해주는 중요한 자료로 높게 평가되고 있다.
그는 완고하고 논쟁적이어서 많은 등반가들과 대립했다.
30세 이후에는 성직에 종사하였으나 그린델발트로 옮긴 후 그린델발트의 현인(Sage of Grindelwald)으로 불리면서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저서로는 'Swiss Travel and Swiss Guide Books' (1889), 'Josias Simler et Les Origins de I Alpinisme Jusqu en 1600' (1904), 'The Alpine Nature and History' (1908), 'Alpine Studies' (1912) 등이 있다.
클린치, 니콜라스 Clinch, Nicolas 1930~
미국인 최초로 8000m봉 초등 기록을 이룩한 장본인이다.
일리노이주 에반스톤 출신인 그는 뉴멕시코 군사 전문학교와 스탠퍼드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변호사이자 등반가이다.
그는 20세부터 등반을 시작하여 경험을 쌓아갔으며, 그를 유명하게 한 것은 1958년 히든피크(가셔브룸1봉·8068m) 초등대를 지휘하여 셰닝(schoening)과 카우프만(Kauffman)을 정상에 올려 세계 최강국 미국의 체면을 세우게 한 점이다.
미국은 그동안 8000m 고봉 중에서 K2를 세 차례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하여 세계 열강들의 8000m 고봉 초등 경쟁 대열에서 뒤쳐져 있어 강대국의 체면이 평가 절하되고 있었다.
그래서 미국은 처음부터 이 산의 초등정을 이룩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1955년 남미 페루 서부의 푸카지르카(Pukajirka·6039m) 2·3봉을 초등, 1960년 마셔브룸1봉(Masherbrum·7821m)을 등정하고, 1966년 남극대륙의 빈슨매시프(Vinson Massif ·5140m)원정대를 지휘하여 셰닝과 에반스의 초등정을 성공시킨다.
이후 그는 미국산악회장을 역임한다.
저서로는 히든피크 초등 기록인 [A walk in the Sky](1982)가 있다.
태스커, 조셉 토머스 Tasker, Joseph Thomas 1948~1982
영국의 유명한 등반가로 1982년 5월 피터 보드맨과 함께 에베레스트 동북 능선상에서 행방불명되었다.
그의 이름은 흔히 조 태스커로 불리기도 한다.
그는 헐(Hull) 출신으로 어소대학(Ushaw College)에 진학하여 그 근처의 채석장과 호수지방(Lake District)에서 등반을 시작하였다.
또한 맨체스터대학에서는 사회학을 전공하였다.
1972~1974년 알프스의 3대 북벽과 아이거 북벽을 동계 등반했다.
1975년 두나기리(Dunagiri·7066m) 남릉을 알파인 스타일로 시도하여 6일치의 식량으로 10일을 버티는 대 서사시를 연출한다.
1976년 창가방(Changabang·6864m)을 초등정하고, 1979년 캉첸중가(Kangchenjunga·8586m) 북릉을 최초로 무산소 등정한다.
1980~1981년 에베레스트 서릉 원정에 참가하고, 1981년 보닝턴(Bonington), 보드맨과 함께 콩구르(Kongur·7719m)를 초등정했다.
그는 1982년 보닝턴이 지휘하는 에베레스트 원정대에 참가한다.
이 원정대는 에베레스트에서 최초로 알파인 스타일에 의한 베리에이션 루트 개척을 목표로 산소와 포터의 사용을 배제한 채 도전했다.
공격조에 선발된 태스커와 보드맨은 최상의 조건하에서 ABC를 출발했다.
8200m 지점까지 올라가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보닝턴의 망원경에 관찰되었으나 곧 날이 어두워지고 두 사람의 모습은 사라졌다.
그것이 두 사람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아마도 두 사람은 그 지점에서 정상까지 얼음으로 연결된 사면에서 미끄러져 동벽의 캉슝빙하(Kangsung Glacier)로 추락한 것으로 추측했다.
이들의 실종은 영국 산악계의 커다란 손실이었다.
당시 원정대는 이들의 기적적인 생환을 기대하면서 10일 이상을 기다렸으나 그들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다.
8200m 이상의 고소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생존해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철수했다.
태스커와 보드맨은 원정을 떠나기 전 공항에서 가진 기자 회견에서 “선배들의 피와 땀이 얼룩진 티베트 측면은 매력적이며, 어떤 곤란이 있어도 정상에 오르겠다”고 말했으나 그들의 꿈은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다.
그들의 최후는 1924년 에베레스트 북릉에서 사라진 말로리와 어빈의 조난을 떠올리게 한다.
그들도 추락했을 것이라는 추측만 있을 뿐 그 외는 모두가 미스터리에 싸인 채 망각되었으나 말로리는 실종된 지 75년이 지난 1999년에 8250m 지점서 시체로 발견되었으며, 태스커는 실종 10년 후인 1992년 정상 바로 아래서 일본원정대에 의해 시신이 발견된다.
저서로는 에베레스트 서릉 원정기인 'The Cruel Way' (1981)와 'Savage Arena' (1982)가 있다.
'Savage Arena' 는 그의 마지막 원정이 된 1982년 에베레스트 원정을 떠나기 바로 전날 저녁에 출판사에 전해진 원고이다.
국내 역서로는 <세비지 아레나>(허긍열 번역·1996)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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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레이, 리오넬 |
테레이, 리오넬 Terray, Lionel 1921~1965
프랑스 등산가. 알프스 가이드 출신으로 루이 라슈날(L.Lachenal)과 팀을 이루어 1945년부터 1950년대에 걸쳐 서부 알프스의 거벽과 침봉을 섭렵한 프랑스를 대표하는 명가이드다.
1946년 그랑드조라스 북벽 워커 측릉의 제4등과 1947년 아이거 북벽 제2등을 기록했으며, 1950년 안나푸르나 원정대(초등대)에도 참가하였다.
1951년 12월 말 피츠로이(Fitzroy·3440m)로 원정을 떠난다.
기도 마뇨느(G,Magnone), 뽀엥스노(J.Poincenot)와 함께 떠난 이 원정에서 뽀엥스노는 급류에 휩쓸려 사망한다.
본격적인 등반은 1952년 1월부터 시작, 100여 개의 피톤과 120m의 고정 로프를 설치하면서 악천후를 뚫고 정상에 오른다.
1956년 그가 한 등반전문지에 기고한 피츠로이 등반기를 보면 “등반을 해보았으나 파타고니아에서의 등반은 나의 체력과 윤리관의 극한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기술적인 면에서는 알프스 화강암 등반보다 약간 떨어진다”고 말했다.
1955년 장꾸지와 마칼루(8463m)를 초등정한다.
1954년 초모렌쪼(Chmolonzo·7790m)와 마칼루2봉(7640m) 초등정, 1962년 자누(Jannu·7710m)와 닐기리 북봉(Nilgiri North·7061m)을 초등정한다.
1964년 헌팅턴(Mt. Huntington·3730m) 원정대의 대장으로 북동릉을 초등반한다.
그는 프랑스 베르꼬르(Vercors) 산군의 암벽을 오르다 안개 속에서 추락하여 사망한다.
테레이는 2차 대전 후 가스통 레뷔파, 루이 라슈날과 함께 프랑스 3대 등반가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아르망 샤를레 이후 전통적인 가이드로서 고전과 현대를 잇는 가교역할을 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저서로는 'Les Conquerants del Inutile; 무상의 정복자' (1961)가 있다.
텐징 노르게이 Tenzing Norgay 1914~1986
네팔 국경 타메이라 불리는 작은 셰르파 마을에서 출생했다.
1953년 힐러리와 함께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 정상을 최초로 밟은 인물이다.
1953년 5월 29일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맹렬한 바람에 깃발이 흩날리는 피켈을 높이 쳐들고 있는 이 유명한 텐징의 사진은 불가능에 대한 인간 승리의 기록이기도 하다.
그동안 인류는 32년에 걸쳐 끈질기게 도전해왔던 이 산의 상징적인 정상을 현실적인 정상으로 실현시킨 순간이기도 하다.
그는 1939년 티리치 미르(Tirich Mir·7619m) 등반에 참가하고, 1951년 프랑스대의 난다데비 동봉(Nanda Devi·7434m) 등반에 참가하여 등정에 성공하였으나 대원인 뒤뿔라(Duplat)와 비느가 사망한다.
1946년 이래 여섯 차례나 에베레스트 원정에 참가했으며, 1953년 영국의 10차 에베레스트 원정대의 사다(Sirda)로 힐러리와 함께 개방식 산소 호흡기를 사용하여 초등정에 성공하였다.
그와 함께 정상에 오른 힐라리는 “그의 힘, 완벽한 등반기술, 능동적인 태도에 감탄하였다”고 말하면서 “나는 자신을 한번도 영웅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텐징은 예외였다.
그는 진정한 영웅이었다.
그는 미천하게 출발하여 세상의 정상에 올랐다”고 그를 격찬하였다.
에베레스트 등정 후 등반활동과는 인연을 끓고 다아질링에서 등산학교 강사로 후진을 지도하면서 인도 등산계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다.
한때 이 인류사적인 에베레스트 초등정을 놓고 호사가들은 두 사람 중 누가 먼저 정상을 등정했는가에 대해 관심을 모아왔다.
이 점에 대해 힐러리는 어느 언론 매체와 가진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누가 먼저 정상에 올랐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어려운 문제를 함께 해결해냈을 뿐이다.
다만 남봉(8749m)에서 정상까지는 내가 리드했다.
” 텐징이 정상을 눈앞에 두고도 혼자 오르지 않고 뒤에 처진 힐러리를 30분이나 기다린 일은 매우 감동적이다.
힐러리는 정상에 올라 텐징의 사진만 찍고 자기는 사진찍기를 거절했다.
그가 천한 신분의 동반자를 진정한 영웅으로 여긴 때문이다.
저서로는 얼만(J.Ullman)의 도움으로 발간한 자서전 'Man Of Everest' (1955)와 'After Everest' (1982), 'Tenzing Norgay-Hero Of Everest: Ed Douglas' (2003)가 있다.
국내 역서로는 <텐징 노르가이>(강대은 번역)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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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슨, 토모 |
체슨, 토모 Cesen, Tomo 1959~
슬로베니아 크란지에서 출생하였으며, 본명은 토미슬라브 체슨(Tomislab Cesen)이다.
그는 5.13급의 온사이트 능력을 갖춘 고산자유등반가이다.
그는 히말라야 자누(Jannu·7710m) 북벽에서 5.10급의 단독 자유등반을 성공시켰고, 히말라야 마지막 과제로 불려오던 로체 남벽을 단독 초등정하여 세계 산악계를 놀라게 하였다.
이 두 등반은 등반 역사상 고산등반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였다.
1980년대에 그가 세계 등반계에 미친 영향은 파울 프레우스, 벨첸 바하, 발터 보나티, 라인홀드 메스너 등과 같이 등반 분야의 선구자들이 각각 그 시대에 미쳤던 영향들과 비교해 볼 때 조금도 손색이 없는 성과로 평가되고 있다.
16세 때부터 등반을 시작한 그는 1979년 안데스의 알파마요(Alpamayo·5947m) 남벽의 신 루트를 초등하였으며, 1980년 드류의 보나티 필라, 몽블랑 뒤 타귈의 가바로우 꿀르와르 등 알프스의 여러 고전 루트를 섭렵하였다.
1983년 파미르의 코뮤니즘 북벽을 등반하였고 1985년 얄룽캉 북벽을 초등반하였다.
얄룽캉 등반에서는 4일 동안 굶은 상태에서 물도 마시지 못한 채 하산 중에 비박을 하면서 동상 하나 걸리지 않은 상태로 베이스캠프로 무사히 돌아왔다.
얄룽캉에서의 비박과 고통은 후일 훌륭한 등반가가 되기 위한 값진 경험이 되었다.
1989년 말모라다 남벽의 모던 타임(5.11a)과 가바로우 롱 루트(5.11d)를 동계 단독등반하면서 자누 북벽 등반을 준비하였다.
1989년 4월 자누 북벽으로 향한 그는 화강암 슬랩 위에 얇게 얼어붙은 2~3cm 두께의 베르글라 지대 구간과 2800m 거벽에서 5.10급의 크럭스와 A2급 구간을 여러 차례 오르면서 23시간 동안 계속하여 등반을 한 후 정상에 오른다.
이 등반은 그동안 히말라야에서 행해진 그 어떤 등반보다 가장 어려운 단독등반이었다.
7000m급 고소에서 80~90도 경사의 벽을 플라스틱 이중화를 신고 장갑을 낀 채로 5.10급의 난이도를 돌파한다는 것은 악몽과 같은 일이다.
5.10급의 등반이 7000m 고소 환경에서 행해질 때는 5.13급 정도로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난이도 높은 자누 북벽의 단독등반은 히말라야 등반에 분명 새 바람을 일으킬 만한 대사건이었다.
이제 클라이머들은 8000m 고산에서도 난이도 높은 기술적인 루트를 열어야 하는 시대가 왔음을 그는 보여 주었다.
체슨은 모든 등반가들이 꿈꾸어 오던 길을 열었다.
이제 고산에서도 5.13급 온사이트 능력을 갖추고 테크니컬한 등반을 해야 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1990년 4월, 그는 로체 남벽에 도전하였다.
이 벽은 1973년부터 17년 동안 여러 나라 원정대에 의해 13차례나 줄기차게 도전을 받았으나 역부족이었다.
1975년 봄에는 리카르도 카신이 지휘하는 이탈리아 원정대도 두 번의 눈사태를 맞고 무릎을 꿇었다.
이 벽에서 패장이 되어 돌아온 카신은 “아마 20년 후에나 누군가가 이 벽을 오를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그것도 행운이 따르지 않으면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일찍이 메스너도 ‘서기 2000년의 벽’이라 불렀을 만큼 세계의 유명 등반가들을 완강히 물리쳐 왔던 로체 남벽이 단독으로 도전한 체슨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그는 히말라야 최후 과제 중의 하나를 2박 3일 만에 해결했다.
그는 주로 밤에 등반하고, 눈사태와 낙석이 쏟아지는 낮에는 휴식을 취했다.
이런 방법으로 바위와 얼음, 눈이 혼합된 믹스 지대를 속공으로 오르면서 32시간 만에 정상에 오른다.
히말라야의 마지막 위대한 과제를 단독으로 해결한 것이다.
그의 로체 남벽 등반은 미래의 고소 등반에 대한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였다.
그는 최근 신문에 등산 칼럼을 기고하고, TV 프로그램에서 등산에 관한 해설을 맡고 있으면서 “고소등반의 미래는 필수적인 장비 외에는 소지하지 않고서 소수의 인원으로 산소 없이 알파인 스타일로 행해지는 등반이 주류를 이룰 것”이라고 말했다.
틴달, 존 Tyndall, John 1826~1893
아일랜드 출신으로 빅토리아 시대의 과학자이자 등산가이다.
그는 등반활동에서 윔퍼와 경쟁 관계였으며, 미답봉으로 남아있던 바이스호른(Weiss Horn·4506m)을 1861년에 초등정하여 윔퍼로 하여금 마터호른으로 관심을 돌리게 하였다.
그는 또 마터호른에도 관심을 가져 이탈리아릉의 피크틴달(Pic Tyndall)까지 올랐다.
그는 빙하의 구조에 관심을 갖고 1856년 알프스를 방문한 이래 알프스에 매혹되어 베르너 오버랜드 등지에서 등반활동을 하며 알프스의 황금기를 장식하였다.
그가 연구한 빙하에 관한 논문은 빙하학자 포브스(Forbes)와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이후 그는 왕립학회 회원이 되었고, 영국 산악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Glaciers of the Alps' (1860), 'Hours of Ex in The Alps' (1871)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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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릭 쉽튼과 함께한 틸만(오른쪽). |
틸만, 헤럴드 윌리언 Tilman, Harold Willian 1898~1978
영국의 등산가이자 탐험가로 에릭 쉽튼(Eric Sipton)의 친구이자 등산 파트너다.
그들은 아프리카 케냐에서 커피 농장을 경영할 때 처음 만났다.
두 사람 모두 대규모 원정보다는 소규모 원정을 선호하였다.
그들은 마운틴 케냐(Mt. Kenya)의 넬리온 바티안(Nelion Batian)을 첫 횡단등반하였으며, 1934년 소규모 원정대를 꾸려 난다데비(Nanda Devi·7816m)를 정찰하였다.
그들은 리시강가(Rishi Ganga) 강을 통하여 난다데비 상투아리(Sangtuary)까지 들어가 난다데비 남측을 정찰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1936년 오델(N.E. Odell)과 함께 난다데비를 초등정하였다.
당시 영국에서는 이들의 소규모 원정을 비난했지만 그들은 굴하지 않고 그들의 소신대로 실천하였다.
1935년 쉽튼이 이끄는 5차 에베레스트 정찰대에 참가하였으며, 1938년 영국의 제7차 에베레스트 원정대의 대장으로 대원들을 지휘하여 노스콜(North Col)까지 도달하였다.
이 원정대는 북방의 티베트 측에서 마지막 원정을 한 팀이다.
그는 기동력이 있고 검소한 소규모 원정대를 이상적으로 생각한 사람이다.
틸만은 문명의 이기를 경시하는 순수한 등반가였기 때문에 산소 사용을 극도로 반대하였으며, 종전의 원정대에 비해 장비와 경비를 5분의 1로 줄였고, 필수적인 장비 이외는 모두를 줄였다.
이들은 기상이 악화하는 가운데 전 대원이 노스콜에 올라 5캠프를 세우고 전진하여 8290m까지 진출하였다.
1950년에는 에베레스트의 네팔 측을 정찰, 쿰부(Khumbu) 계곡을 탐사하고, 아이스폴 기슭까지 올랐으며 웨스턴 쿰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세락지대를 발견하였다.
2차대전 중에는 발칸 반도에서 빨치산을 도와 싸웠으며, 전후 히말라야 황금기로부터 남미의 파타고니아와 극지방으로 눈을 돌려 1955~56년 파타고니아 아이스캡(Patagonia Icecap)을 최초로 횡단하였다.
그는 보트를 이용한 극지탐험에도 몰두하여 포스터 산(Mt, Foster)을 목표로 하여 1977년 리오데자네이로를 출발하였다.
탐험대는 25세의 리처드슨(Richardson)을 대장으로 7명의 대원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포클랜드 군도로 향하는 도중 보트가 침몰하여 대원 중 2명은 구출되었으나 틸만을 포함한 5명은 남대서양에 수몰되고 말았다.
저서로는 'Snow on The Eguador' (1937), 'Ascent of Nanda Devi' (1937), 'Mount Everest' (1938,1948), 'Two Mountains and a River' (1949>, 'China to Chitral' (1951), 'Nepal Himalaya' (1952)가 있고, 그의 자전적 유고집으로 앤더슨(Anderson)이 저술한 'High Mountains and Cold Seas' (1980)가 있다.
푸르첼러, 루드빅 Purtscheller, Ludwig 1849~1900
오스트리아 등반가. 그는 고학으로 체육교사 자격증을 얻어 잘츠부르크에서 교사 생활을 하며 본격적인 등반 활동을 했다.
지그몬디 형제(Zsigmondy Brothers)의 동료이며, 이들과 함께 가이드레스(Guideless) 클라이밍을 하였다.
클라이네찐네(Kleine Zinne)와 치베타(Civeta)를 초등정하고, 바츠만(Watzman) 동벽도 초등반했다.
그는 다른 독일·오스트리아 클라이머들과 마찬가지로 안내인 없는 등반을 하고, 티롤 지방에서는 단독등반도 하여 무모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1889년에는 메이어(Meyer)와 킬리만자로(5895m)를 초등정하고 1891년에는 코카서스(Caucasus)에 가기도 하였다.
그는 알프스 등반 사상 1880~1890년대를 장식하는 대표적인 산악인의 한 사람으로 드류(Dru)에서의 추락사고 후 6개월 만에 허약한 상태에서 감기로 사망하였다.
저서로는 'Der Hochtourist der Ostalpen' (1894)가 있고 유고집 'Uber Fels und Firn' (1909)이 있다.
파울, 프레우스 Paul, Preuss 1886~1913
오스트리아의 뛰어난 등반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활약한 당대를 대표할 만한 등반가이다.
음악 교수인 헝가리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2년 뮌헨 대학에서 식물생리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지적인 등반가다.
1911년부터 동부 알프스를 중심으로 300여 회의 단독등반을 하였다.
이중 150개는 초등반이었다.
그는 동부 알프스뿐만 아니라 돌로미테, 서부 알프스의 몽블랑 산군에까지 족적을 남기며, 생전에 1200여 개의 봉우리를 등반할 정도로 왕성한 활동을 전개했다.
당시 북부 알프스에서는 피톤이 처음 사용되기 시작하여 종전에는 불가능하게 여겨졌던 벽들이 인공등반에 의해 쉽게 길을 열었으나 그는 피톤 사용을 거부하고 피톤리스(Pitonless)등반을 몸소 실천하며 피톤 사용을 반박하였다.
그의 주요 등반경력을 살펴보면, 몬테로자(Monte Rosa·4634m)를 동계에 초등정하고, 그랑파라디소(Gran Paradiso·4061m)를 스키로 초등정했다.
프레우스의 등반관과 평소의 신념이 잘 표현된 등반은 1911년 7월 돌로미테의 캄파닐레 바소 동벽(Campanile Basso east Face) 등반에서 잘 나타난다.
그는 기둥을 박아 세운 듯한 이 암탑을 피톤, 카라비너, 자일 등 일체의 인공적인 용구를 사용하지 않고 2시간에 단독으로 초등정하여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이 유명한 등반은 이후 26년 동안 아무에게도 재등을 허락하지 않은 채 남아있어 난도 높은 등반으로 평가되었다.
이 암탑은 1937년에 이르러서 인공등반의 창시자인 에밀리오 코미치(E. Comici)가 프레우스와 같은 방법으로 올라 그의 진가를 한층 더 높여주었다.
이외에도 크로쫀 디 브렌타(Crozzon di Brenta) 북동벽, 치마 피콜라(Cima Picola) 북동벽, 에귀유 블랑쉬 뒤 쁘뜨리(Aig. Blanche de Peuterey) 남동릉을 초등반하였다.
정열과 지성, 자기소신에 투철했던 자유등반의 기수 프레우스는 1913년 동부 알프스의 만들코겔(Manndlkogel) 북벽의 오버행에서 단독등반 중에 추락하여 27세의 젊은 나이로 삶을 마감한다.
10여 일이 지난 후 구조대는 100m 아래의 신설 속에서 그의 시체를 발견하였다.
서로가 상반된 주장을 펴왔던 한스 듈퍼는 그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어린 아이처럼 통곡을 하였다 한다.
후일 프레우스의 죽음을 놓고 리카르도 카신(R. Cassin)은 “그의 자유 등반에 대한 열망은 존경하나 등반 중에 죽었기 때문에 자유등반 일변도는 현실성이 없다.
나는 목숨을 잃기보다는 피톤 하나를 더 사용하겠다”라고 말했다.
결국 프레우스는 그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피톤 사용을 거부하고 자유등반을 실천해 왔으나 피톤을 사용했더라면 좀더 오래도록 등산을 했을 것이다.
프랑코, 장 Franco, Jean 1914~1973
프랑스의 등산가로 1955년 프랑스 마칼루(Makalu·8463m) 초등 원정대의 대장을 역임했다.
그의 부인도 등산가로, 이들 부부는 1944년 바르 데 에끄랭(Barre des Ecrins) 남릉을 초등반했다.
1954년 프랑스는 마칼루 원정을 계획하고 프랑코를 대장으로 하여 정찰대를 파견하고, 다음 해인 1955년 역시 그를 대장으로 프랑스의 우수한 등반가들로 구성된 강력한 원정대를 조직하였다.
이 원정대는 대원 7명, 지질학자 2명, 의사 1명으로 조직되었다.
원정대는 고소순응을 위해 3주를 소비하였으나 등반은 예정대로 진행되어 꾸지(Couzy)와 테레이(Terray)가 1차 등정에 성공한 후 이어서 프랑코, 마뇨느(Magnone), 갈첸, 노르부(셰르파)가 정상에 섰으며 나머지 대원들도 2개 조로 나누어 전원 등정이라는 히말라야 등반 사상 전례가 없는 화려한 기록을 남겼다.
이 원정대의 완벽한 등정은 훌륭한 장비와 우수한 대원 그리고 1950년에 있었던 안나푸르나 등반의 불행을 교훈 삼아 6000m 높이의 산을 오르내리면서 고소적응 훈련을 한 것이 전 대원에게 행운을 안겨 주었다.
프랑코는 1959년 자누(Jannu·7710m)원정대 대장으로 다시 히말라야에 갔으며 이 때에는 테레이와 마뇨느가 정상에 섰다.
그는 국립스키등산학교 교장을 역임하였으며, 프랑스 등산계에 큰 공헌을 하였다.
저서로는 'Makalu' (1955), 'Bataille pour le Jannu' (1966)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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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스트, 톰 |
프레쉬필드, 윌리엄 더글러스 Freshfield William Douglas 1845~1934
영국의 등산가이자 탐험가로 알프스에서 히말라야까지 대부분의 지역을 등반하고 탐험하였다.
1893~1895년까지 알파인클럽 회장을 역임하기도 한 그는 영국 서섹스 출신으로 이튼스쿨과 옥스퍼드를 졸업하였다. 변호사 자격증을 갖고 있었으나 평생 동안 개업을 하지 않았으며, 등산과 탐험에 전념할 수 있을 정도로 재력이 풍부했다. 열렬한 산악 여행가인 어머니의 영향을 받았으며, 60여 년간의 등반활동을 통하여 등반의 발달에도 크게 공헌했다.
3차례에 걸친 코카서스 탐험에서 카즈벡(Kasbeck)과 엘부르즈 동봉(Erbruz East·5592m) 을 등반하였다. 1899년 비토리아 셀라와 캉첸중가(8586m) 주변을 탐험하고 이 지역에 대한 지도를 제작하여 20세기의 히말라야 등반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그 외에도 루엔조리, 캐나디안 로키와 시베리아를 거쳐 일본 알프스에도 갔다. 그도 쿨리지처럼 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그가 펴낸 책들은 대중적인 인기를 얻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근대 등반의 효시가 된 1786년 몽블랑 초등자 파까르(Paccard)의 초등정 의혹에 대해 그 진상을 규명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미등정 의혹에 휩싸여 150년 동안이나 논쟁을 일으켜 오던 파까르의 초등정에 대한 증거를 찾아내어 이를 규명한다. 그는 샤모니 광장에 서있는 소쉬르와 발마의 기념동상 옆에, 오랫동안 등정 의혹으로 멸시받아온 또 한사람의 초등자인 파까르를 기념하는 또 하나의 동상을 세울 것을 주장하였다.
저서로는 'The Exploration of the Caucasus' (1896), 'Round Kangchenjunga' (1903), 'The Italian Alps' (1875), 'Travels in the central Caucasus' (1869), 'Below the Snow line' (1923), 'Horace Benedict de Saussure' (1924)가 있다.
프로스트, 톰 Frost, Tom 1942~
아메리칸 알파인클럽 부회장을 역임한 스탠포드 대학 출신의 등산가다.
그는 1960년 로열 로빈스 등과 시지 택틱스(Siege Tactics) 방법에 의하지 않고 엘캐피탄(El capitan)의 노즈(Nose)를 7일 만에 재등하였다.
이들은 아직 주마가 실용화되지 않던 때여서 장비와 식량을 직접 손으로 끌어 올리고 후등자는 프루지크 매듭을 이용해서 올랐다.
1961년에는 로빈스와 엘캐피탄의 살라테월(Salathe Wall)을 개척했다.
그들은 전 루트의 40% 이상을 자유등반 하였으며, 그들이 이 루트에 설치한 볼트는 13개에 불과했다.
1963년 그는 알프스에 가서 푸(Fou) 남벽과 프레니(Freney) 벽을 오른 후, 1968년 로터스 플라워 타워(Lotus Flower Tower) 동벽을 올랐다. 1970년 히말라야 벽 등반의 문을 연 보닝턴이 이끄는 안나푸르나 1봉(8091m) 남벽 원정대에 참가하여 윌란스와 해스턴의 1차 공격 성공에 뒤이어 2차 공격에 참가하였다.
그는 무산소로 1500m의 난이도 높은 수직 벽을 단 하루 만에 오르는 등 놀라운 업적을 이루었으나, 기상의 악화로 정상 등정에 실패한다.
1979년 아마다블람(Amadablam·6856m) 남릉을 등반하였다. 그는 취나드와 합작으로 장비 회사를 운영하였으나 독립하여 장비 제조업에 종사하고 있다. 1966년에 최초로 개발된 피크가 굽은 피켈은 그가 취나드와 합작으로 개발한 제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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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거 북벽을 등정하고 내려와 기념 촬영한 오스트리아등반대 |
플라시두스 아 스페샤 Placidus a Specha 1752~1833
드 소쉬르와 함께 근대 등반의 선구자로 불리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스위스 디젠티스(Disentis)의 베네딕트파 수도사다. 3500m급 봉들이 있는 퇴디(Todi) 산군, 라인발트호른(Reinwaldhorn) 산군을 중심으로 등반활동을 하였다.
시대를 앞서가는 등반가로 드 소쉬르의 책을 읽고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의 열정적인 등반활동 때문에 프랑스의 첩자로 오해받거나 미쳤다고 생각하는 동료 수도사들로부터 심한 방해를 받았으며, 그가 수집한 많은 자료들은 프랑스의 침략으로 모두 불타버렸다.
그는 라인발트호른(Reinwald horn·3400m), 오버랄프스톡(Oberalp Stock·3326m)을 비롯하여 여러 개의 봉우리들을 초등정하였다.
그가 근대 등반의 선구자라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으며, 등반역사가 쿨리지는 그와 드 소쉬르로부터 근대 알피니즘이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하딩, 워렌 Harding, Warren 1924~2002
미국의 암벽등반을 주도했던 뛰어난 거벽등반가다.
캘리포니아 오클랜드 태생으로 건설기사이자 극작가이며, 강인한 체력의 소유자로 철인으로 불렸으나 볼트 남용 때문에 무법자라는 명성을 얻기도 했다. 그는 1958년 릭 칼더우드, 웨인 메리, 조지 위트 모어 등과 엘캐피탄의 노즈(The Nose)를 초등반한다. 이 등반에 소요된 기간은 18개월이며, 실제 등반에 소요된 날짜는 47일이다.
그는 이 루트를 오를 때 65개의 피톤과 125개의 볼트를 사용하였다. 엄청난 양의 볼트 사용으로 인해 암벽을 손상했다고 비난을 받기도 하고 당시 그가 채택한 시지 클라이밍(Siege Climbing) 전술은 비윤리적이라는 비난을 듣기는 했어도 거벽 등반의 막을 여는 기폭제가 되었다. 그의 등반스타일은 당시 인공등반 대신 자유등반을 강조한 로얄 로빈스와 같은 등반가들과의 사이에 불화가 조성되었다.
그러나 당시 다른 등반가들은 그러한 대담하고 야심적인 루트를 등반할 정도로 용감하지 못했다.
그는 1964년 척 프래트(Chuck Pratt), 이본 취나드(Yvon Chouinard) 등과 마운트 워트킨스(Mt. Watkins)의 600m가 넘는 남벽을 등반하고 1970년 갈렌 로웰과 하프돔 남벽을 오른다. 같은 해 엘캐피탄의 다운월(Dawn Wall)을 개척등반하기도 한 그는 이때 300여 개의 볼트를 박아 물의를 일으킨다.
얼마 후 로빈스가 이 루트에 올라 하딩이 설치한 볼트를 제거했다. 이 일 때문에 둘 사이에 심한 논쟁이 일기도 했다.
저서로는 'Downward Bound' (1975)가 있다.
하러, 하인리히 Harrer, Heinrich 1912~
오스트리아 태생의 등반가. 아이거 북벽을 초등반한 등산계의 전설적인 인물이다.
1938년 그라츠대학 재학 중 카스파레크(F.Kasparke), 헤크마이어(A.Heckmair), 베르크(L.vorg) 등과 마의 북벽으로 이름난 아이거북벽(Eiger Nordwand)을 초등반하여 유명해졌다. 아이거가 초등되기까지 그 영광의 배후에는 무려 10여 명의 산악인들이 희생되었다. 하나의 벽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예는 알프스 등반사에서 그리 흔치 않은 일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사람들은 이 벽을 아이거 모르드 반트(Eiger Mord Wand), 즉 ‘아이거 살인벽’으로 ‘Nord(북)’를 ‘Mord(살인)’로 고쳐서 부르기까지 하였다.
1939년 아우프슈나이터(P. Aufschneiter)가 이끄는 독일 낭가파르바트(8126m) 정찰대에 참가하였다. 이 정찰등반 중 2차세계대전의 발발로 영국군의 포로가 되어 인도 수용소에 억류되었다가 1944년 티베트로 탈출하여 라사에서 달라이라마의 교사가 되어 친분을 맺는다.
1951년 중국군의 티베트 침략으로 인도를 거쳐 고국으로 귀환하는데, 이때 남겨진 기록이
그는 아이거 북벽 등정 후 나치정권에서 수여하는 ‘산악 운동의 영웅’ 칭호를 받는 등 나치정권의 정치적 선전도구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그는 알래스카 루웬조리(Luenzori)에서도 등반을 하였으며, 1962년에 뉴기니아 원정등반 중 추락하여 부상을 입고 행방불명되었다가 귀국하였다. 1965년에는 인도·네팔 등 오지의 민속습관을 연구하면서 히말라야 주변을 답파 하는 등 노 등산가의 건재함을 보여주었다.
저서로는 'Seven Years in Tibet' (1953), 'Die Weisse Spinne' (1958), 'The White Spider', [I Come from the Stone Age](1964) 가 있고 국내번역서로는 '하얀 거미' ·(이 종호 번역, 공동문화사 1971), '티베트에서의 7년'·(함영탁 번역, 수문출판사 1989), '티베트에서의 7년'·(박계수 번역, 황금가지 1997) 가 있다.
하벨러, 페터 Habeler, Peter 1942~
오스트리아 마이어호펜에서 출생. 20세에 1급 가이드 자격증을 따내고 오스트리아 가이드협회 회장도 역임했다.
그는 메스너와 단짝을 이루며 70년대 후반 히말라야 등반 스타일에 커다란 변화를 주도하면서, 시대를 앞서가는 기록적인 등반을 하였다. 그는 8000m급에서 최초로 알파인 스타일을 실현했으며, 의학계에서 불가능하다고 단정지었던 에베레스트 무산소 초등정을 쟁취했다. 그는 소년 시절부터 고향인 질러탈 알프스에서 등반활동을 시작했으며, 티롤 출신 등반가인 제프 마이에를(S. Mayerl)의 영향을 받았다. 1964년 몽블랑 프레니필라를 올라 2등을 기록한다.
그는 1969년 남미의 에르파하(Yerupaja·6121m)를 등반하고, 이로 인해 두 사람의 우정은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그는 한 달 동안 미국에 머물면서 요세미테 엘캐피탄의 살라테월(Salathe Wall)의 등반을 비롯해 수많은 등반을 하였다. 1974년 메스너와 함께 마터호른(4478m) 북벽을 8시간 만에, 아이거북벽(3970m)을 10시간 만에 해치움으로써 매스컴의 각광을 받기 시작한다.
1975년 메스너와 하벨러는 가셔브룸1봉(8068m)을 5일 만에 무산소 알파인스타일로 등정한다. 많은 인원이 모여 캠프를 전진시키는 극지법이 히말라야에서는 최상의 방법으로 여기던 당시에 단 두 사람이 해낸 이 등정 소식은 세계 산악계에 충격을 주었다. 이것은 하벨러에게는 최초의 고산경험이었다.
1977년 그들은 다울라기리(8167m) 남벽 등반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한다. 1978년 두 사람은 상식을 초월한 등반을 한다. 메스너와 하벨러는 세계최고봉 에베레스트(8848m)를 무산소로 등정하여 또 한번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그러나 이 등반이후 둘 사이의 우정에 금이 간다. 이 등반이 끝나고 하벨러는 ‘고독한 승리(Der einsame Sieg)’ 라는 등반기를 펴낸다. 그들이 헤어진 원인은 이 등반기에 기록된 메스너에 관한 이야기가 자존심을 상하게 한 것이 원인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1984년 K2로 원정을 떠났으나, 등반 도중 부상을 입고 실패한다.
1985년에는 낭가파르바트를 원정하여 디아미르루트를 통해 정상등정에 성공한다. 1986년 고줌바캉 동릉에 도전하였으나 실패한 후, 초오유를 3일 만에 등정한다.
1988년 캉첸중가 북릉에 도전하여 정상등정에 성공한다. 그는 독일 뮌헨에서 발간하는 월간 등산전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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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세가와 쓰네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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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6년 독·미 합동대의 아이거북벽 등반기록의 국내 역서 <아이거> 표지. |
할린, 존 Harlin, John 1934~1966
미국의 등반가로 1966년 아이거 북벽에서 디렛티시마 클라이밍(Direttissima Climbing·직등주의)을 시도하던 중 고정 로프의 절단으로 추락사 하였다. 그는 요세미티의 등반 기술을 유럽 암장에서 유감없이 발휘 하였으며, 스위스의 레이진(Leysin)에 국제 등산학교를 설립하고 많은 등반을 하였다.
1963년 헤밍(G. Hemming), 프로스트(T. Frost)등과 에귀유 뒤 푸(Aig du Fou) 남벽의 어려운 인공등반 루트를 개척하고 프로스트와 프레니(Freney) 봉의 레프트 핸드 히든 필라(Left Hand Hidden Pillar)를 개척하였다. 1965년 로빈스(R. Robbins)와 함께 드류 서벽과 남서 필라 사이에 할린·로빈스 루트를 개척하였다. 이 등반은 스카이 훅(Sky Hook), 러프(Rurp), 봉(Bong) 등을 사용하는 고도의 기술을 요구하는 등반이었다.
1966년 그는 아이거 북벽의 직등을 계획하고 헬리콥터를 이용하여 북벽의 직등 루트를 구간별로 촬영하였다.
그를 대장으로 듀갈 해스턴 (D. Haston), 레이튼 코어 (Layton Kor), 크리스 보닝턴(C. Bonington)등 영국과 미국의 막강한 클라이머들로 구성된 등반대가 조직 되었다. 이들은 미리 고정 로프를 설치하고 단 한번의 공격 시도로 정상까지 등반하기로 했다.
마침 때를 같이해 직등을 계획한 독일대는 시지 클라이밍(극지법)을 택하였다. 이후 영·미팀도 독일 팀과 같은 방법을 취하게 되었으며 할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하얀 거미 아래 부분부터는 영·미팀과 독일팀이 함께 행동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등반 중 그가 주마를 사용하여 하얀 거미 아래 부분까지 오르던 중 로프가 절단 되여 추락사 한다.
할린 사망 후 그를 기념하기 위하여 동료들은 이 루트 이름을 ‘존 할린 직등 루트(John Harlin Direttissima)’라고 이름 붙였다.
존 할린의 장례식이 거행되던 시간에 그의 동료들은 정상 등정에 성공하였으며, 등반대로부터 장례식에 보내진 화한에는 ‘굿 바이 존(Good-bye John)’이라는 고별사가 써있었다.
존 할린의 아이거 북벽 등반 관련 저서로는
허드슨,찰스 Hudson, Charles 1828~1865
19세기 영국의 등산가로 직업은 목사다. 초기 알프스 등반의 위대한 개척자이며, 알프스 등반사에서 황금기를 장식했던 등반가 중 한 사람이다. 강인한 체력의 소유자로 1853년 에귀유 뒤 구떼(Aig Du Gouter)의 동계 단독 등반, 1855년 몬테로자(Monte Rosa·4634m) 초등정, 알프스 최고봉 몽블랑(4810m)에서 최초로 가이드레스(Guide Less) 등반을 하였다.
그는 1865년 에드워드 윔퍼의 마터호른 초등정에도 참가 하였다. 7명으로 구성된 등반대는 쩨르마트를 출발하여 회른리 능선으로 올라 등정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하산 도중 경험이 부족한 해도우가 미끄러지면서 허드슨, 더글러스, 끄로 등이 함께 추락하자 로프가 하중을 견디지 못하고 끊어져 모두가 추락사 하였다.
저서로는 케네디와 함께 쓴 'Where There’s a Will Way' (1856)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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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거 북벽 직등을 마치고 등반대와 함께 기념 촬영한 듀갈 헤스턴(오른쪽 두 번째). |
해스턴, 듀갈 Haston, Dougal 1940~1977
영국의 등산가로 스코틀랜드에서 제과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에딘버러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으나 중퇴한 그는 10대부터 등반을 시작하여 1959년 돌로미테 지역의 암벽과 스코틀랜드 암장에서 몇 차례의 초등반을 이룩한다. 1966년 야망에 가득 찬 미국 등반가 존 할린에 의해 조직된 아이거 북벽 직등등반대에 참가하여 할린의 추락사에도 불구하고 독일 등반대와 함께 초등반에 성공한다. 그는 할린이 사망한 후 스위스 레이진에 설립한 국제 등산학교의 책임자로 일했다.
이외에도 제르바수티 꿀르와르, 마터호른 북벽, 치마 오베스트 북벽, 동계 마터호른 북벽, 세로또레 등을 등반하였다. 1970년 보닝턴이 이끄는 안나푸르나(8091m) 남벽 원정대에 참가한 그는 윌런스와 함께 정상에 오른다. 이 등반은 히말라야 벽 등반의 문을 연 첫 번째의 쾌거였다. 이어 1971년 에베레스트 국제등반대에 참가하여 윌런스와 함께 남서벽에 도전하여 8382m 까지 오르지만 기상조건의 악화와 국적이 서로 다른 대원들의 불화로 인해 실패한다.
하지만 1975년 보닝턴이 이끄는 에베레스트 남서벽 원정대에 참가하여 더그 스코트와 함께 정상에 오르고 1976년에는 그와 함께 매킨리 남벽에 새로운 루트를 개척하기도 했다.
그는 등산학교의 성공적인 운영과 책 발간에서 얻어진 인세수입 등으로 경제적인 여유를 갖고 안정된 생활을 영위 하지만, 스위스에서 스키 활강 중 눈사태로 사망한다. 듀갈 헤스턴은 성품이 차가운 사람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의 오랜 파트너였던 스코트는 그가 섬세하고 인간미 넘치는 인물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저서로는 'In high Places' (1972), 'The Eiger' (1974), 'Calculated Risk'가 있다.
헌트, 헨리 세실 존 Hunt, Henry Cecil John 1910~1998
영국의 군인이자 등산가로 1953년 인류사적인 업적이라 할 수 있는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 초등정을 지휘했다.
1923년부터 등반 활동을 시작한 그는 1953년 카라코룸의 살토로 캉그리(Saltoro Kangri·7742m) 원정대에 참가하였으며, 콜라호이(Kolahoi·5452m)를 초등정 하였고, 포스트 몬순에 캉첸중가 지역을 탐사하기도 하였다. 1937년 시킴의 제무빙하(Zemu Glacier)에서부터 캉첸중가까지 탐사하고 네팔 피크(Nepal Peak·7163m) 남서봉을 등정하였다. 1936년 에베레스트 원정대의 대원 선발시 심장박동이상이라는 의학심사위원회의 판정으로 원정대에서 탈락되었으나, 1953년 원정대에서는 쉽튼을 대신해서 그를 대장으로 임명하였다.
이 원정에서 힐러리(E. Hillary)와 셰르파 텐징 노르게이(Tenzing Norgay)가 정상을 밟았으며, 이 소식은 엘리자베스2세의 대관식 전야에 전해져 영국전체가 축제의 분위기로 들끓었다. 대장 헌트와 등정자인 힐러리는 이 공로로 경(Sir)의 칭호를 받았다.
젊었을 때 그는 부친을 따라 군인이 되었으며, 부하들에게 혹독한 산악훈련을 시켰는데 이는 2차 세계대전 중 상그로(Sangro) 전선에서 큰 도움이 되었다.
그는 1956년 육군에서 제대한 후 사회봉사 활동을 시작하여 봉사단체(Duke of Edinburgh‘s Award)의 책임자로 10년 동안 일했으며, 나이지리아 내란 때는 수상의 자문역을 맡기도 하였다.
1960년대에는 소련, 동유럽 등과 등산에 관계된 일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지만 1998년 11월 14일 향년 88세로 영국의 헨리 온 테임스의 자택에서 사망했다.
저서로는 'The Ascent of Everest' (1953), 'My Favorite Mountaineering Stories' (1978), 'Life is Meeting' (1978)이 있다.
헤를리히코퍼, 칼 마리아 Herrligkoffer, Karl Maria 1917~
독일의 등산가이자 의사로 1953년 독일의 낭가파르바트 원정대를 지휘하여 헤르만 불로 하여금 초 등정을 성공시킨 인물이다. 그는 낭가파르바트에 총 8번의 원정을 시도하여 1953년, 1962년, 1970년 3차례나 성공을 거두었다.
첫 번째 성공은 1300m의 고도차를 극복하고 헤르만 불이 단독 초등정을 이룩했고, 두 번째는 디아미르 측면으로 킨스호퍼, 만하르트 뢰브가 2등을 기록했으며, 세 번째는 메스너 형제와 쿠엔 숄츠가 루팔벽으로 정상에 올랐다.
당시 메스너는 정상에서 북서쪽으로 종주했다. 헤를리히코퍼는 1934년 낭가파르바트에서 죽은 메르클(W.Merkl)의 이복동생으로 그는 이복형의 한이 서린 낭가파르바트를 오르기 위해 1953년 ‘메르클 추모 원정대’라는 이름의 원정대를 조직하기도 했다.
하지만 등반 경험이 미숙하여 실질적인 등반활동은 아센브레너(P.Aschenbrenner)가 맡고 그는 원정대의 조직을 구성, 추진하였다. 당시 그는 기상악화로 정상공격 대원들에게 하산할 것을 지시 했으나, 헤르만 불은 이를 어기고 단독으로 정상을 등정하였다.
이 일로 두 사람 사이의 불화는 오랫동안 지속 되었으며 불이 낭가파르바트 등반기인 <8000m의 위와 아래>를 발간하자 대장과 사전협의 없이 책을 발간한 것은 계약 위반이라는 이유를 들어 법정소송까지 하기도 했다. 이후 1954년 브로드 피크(Broad Peak·8047m) 등반을 시도 하였으나 시일이 지체되고 기상도 악화 되어 철수한다. 1961년에는 낭가파르바트의 디아미르 벽(Diamir Face)을 정찰하고 이듬해 이 벽을 직등하였다.
그는 이후에도 계속해서 낭가파르바트를 등반했는데 1963년에 루팔 벽(Rupal Face)을 정찰하고 이듬해 등반을 시도하였으나 악천후로 철수하고 1968년 ‘킨스호퍼(T.Kinshofer) 추모 원정대’라는 이름으로 재도전 하였으나 대원들 사이의 불화로 실패하였다. 1970년 세 번째로 루팔 벽 등반대를 조직했다.
이 때 메스너 형제가 참가하여 루팔 벽 초등에 성공하고 북서쪽으로 하산하였으나 동생인 귄터 메스너는 지친 상태에서 눈사태에 쓸려 사망했으며 메스너도 구사일생으로 귀환하였으나 동상으로 발가락을 절단한다.
1972년에는 에베레스트 남서벽 원정대를 조직하였으나 등정에 실패하고 1975년 쿠엔(F.Kuen)을 추모하는 낭가파르바트 원정대를 조직하여 4캠프까지 진출하였으나 등정에 실패했다. 저서로는 'Nanga Parbat' (1953·1954), 'In the Spell of Nanga Parbat' (1953), 'Deutsche Am Broad Peak 8047m' (1955), 'Mount Everest 1972' (1973~1974)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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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3년 영국 에베레스트 등반대. 왼쪽부터 존 헌트, 힐러리, 텐징 |
헤밍, 게리 Hemming, Garry ?~1969
미국의 암벽등반가. 50년대 초 타퀴츠(Tahquitz)에서 등반 활동을 시작하여 요세미티를 비롯한 미국의 암장과 알프스를 두루 섭렵하였다. 1962년 켄달(Kendall)과 그랑드조라스의 워커 스퍼(Walker Spur)를 등반하고 로얄 로빈스와 4일에 걸쳐 드류 서벽을 직등 하였다.
1963년 존 할린 등과 푸(Fou) 남벽을 등반하였다.
헤밍이 등반한 이 루트들은 극도로 어려운 자유등반과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인공등반 루트로 이 등반을 계기로 요세미티의 등반방식과 장비가 알프스에 소개 되는 계기가 되였다.
1966년 에귀유 베르뜨(Aig Verte)의 꾸뛰리에(Couturier) 꿀르와르와 트리올레(Triolet) 북벽을 단독등반 하였다. 그는 드류 서벽에서 추락한 조난자들을 위해 적극적인 구조 활동을 하기도 했지만 침울한 성격의 소유자로 1969년 결국 자살하였다.
◇ 1921년 영국 에베레스트원정대와 함께한 하워드버리(뒷줄 왼쪽 두 번째).
하워드 버리, 찰스 케네스(Howard-Bury, Charles Kenneth) 1883~1963
인도에서 근무한 영국 육군 대령으로 32년에 걸친 험난했던 영국 에베레스트 원정사의 첫 거보를 딛는 1921년 제1차 원정대의 대장을 역임한 인물이다. 그는 등반가로서 탁월한 기량을 지닌 인물은 아니었으나, 변방근무를 통하여 히말라야에 대한 풍부한 경험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1905년에 인도에 갔으며 1913년 티엔산(Tienshan 天山)산맥을 답사하였다. 이외에도 군인으로 근무하면서 카시미르 가르왈 등을 탐험했다. 그는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히말라야에서의 풍부한 경험 때문에 1921년 영국 제1차 에베레스트 원정대장에 발탁된다. 이 원정대는 에베레스트 아래의 대빙하를 발견하고 롱북(Rongbuk) 빙하라 명명한다. 이 후 하워드 버리는 제1차 세계대전 중에 독일군의 포로가 되기도 했지만 두 차례에 걸쳐 영국 하원의원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Mount Everest: The Reconnance(1921.22)가 있다.
하슬러, 구스타브 아돌프 (Hasler, Gustav Adolf) 1877~1952
중부 알프스 베르너 오버란트(Berner Oberland)에서 활동한 스위스의 부유한 실업가이자 등반가다.
1897년 동계등반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무렵부터 본격적인 등반 활동을 시작한 그는 1902년에 아이거, 융프라우, 묀히를 등반했다. 1903년에는 피츠 베르니나, 에귀유 베르뜨 등을 동계에 등반하고 알레치호른(Aletschhorn)의 하슬러 립(Hasler Rib)을 초등반했다. 1904년에는 아마터(F.Amatter)와 함께 핀슈터아르호른(Finsterarhorn) 북동릉을 초등반했는데, 이 등반은 아직도 T.D.Sup(Tres Diffcile Superior·극히 어려움)급 등반으로 여겨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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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스, 캄머란더 |
한스, 캄머란더 (Hans, Kammer Lander) 1956~
이태리 남 티롤 아호르나흐(Ahornach)에서 태어난 등반가로 등산 가이드 겸 스키 강사다.
그는 유년기부터 돌로미테 지역의 산들과 친숙해져 50여개의 루트 초등과 60여개의 단독 초등을 이룩했다. 세로토레와 돌로미테 그리고 알프스 전역의 험봉들을 대부분 올랐으며, 히말라야 8000m급 거봉 13개 봉을 올랐다. 이중 7개 봉은 그의 등반 스승이기도한 전설적인 등반가 라인홀트 메스너와 파트너가 되어 함께 올랐다.
그는 메스너가 세운 남티롤등산학교(Alpin Schule Sud Tirol)를 수료했다. 메스너와는 사제지간으로 그의 명성에 가려지기도 했지만 기대 이상의 파트너십을 발휘한 유일한 동료이기도 했다.
그는 등산학교 수료 후 유럽 알프스 순례등반에 나서 난이도 6~8급 루트에서 알파인 속도등반 경험을 쌓고 이를 고산 등반에 적용했다. 1983년에 메스너와 함께 초오유(8201m) 남서벽을 초등했으며, 1984년에도 메스너와 함께 가셔브룸1봉(8068m)과 가셔브룸2봉(8035m)을 등정하여 최초로 8000m급 2개봉 무산소 연속등정의 기록을 세운다. 이후에도 메스너와 함께 등반을 계속한 그는 1985년 다울라기리(8167m)를 등정하고 같은 해에 안나푸르나(8091m) 북서벽에 신루트를 개척하여 초등정한다. 1986년에는 마칼루(8463m)와 로체(8511m)를 등정하고 1988년에는 남미 파타고니아의 세로토레(3128m)를 그때까지의 가장 빠른 속도인 17시간 만에 등반 및 하강을 완료한다.
1990년 낭가파르바트(8125m) 등정 후 최초로 디아미르 사면을 스키 활강으로 하산한 그는 1991년에 6주 동안 1200㎞를 이동하면서 10만m 이상을 등반하며 300개가 넘는 정상을 오르내리는 남 티롤 일주 등반을 한다.
1992년에는 24시간 내에 회른리릉, 푸르겐릉, 리옹릉 ,츠무트릉 등 4개 능선으로 마터호른(4477m)을 4번 등정한다.
1993년에 가르왈 히말라야의 쉬블링(6543m) 북봉을 초등하고 1994년에는 브로드피크(8047m) 등정 후 7000m지점부터 스키로 활강하여 하산한다.
1996년에 시샤팡마(8046m) 등정 후 정상에서부터 스키로 하산하고 같은 해에 무산소 단독으로 고소캠프를 설치하지 않고 에베레스트(8850m) 정상에 오른 후, 세계 최초로 스키 활강을 하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운다. 1998년 캉첸중가(8586m) 등정 후 부분적으로 스키활강을 하고 1999년 K2(8611m) 등정을 시도 했으나 눈사태의 위험으로 포기했다. 그는 현재 남티롤등산학교 교장으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해스팅스, 지오프리 (Hastings, Geoffrey) 1860~1941
영국 요크셔 출신의 등산가로 당대를 풍미하던 머메리와 슬링스비(W.C. Slingsby)의 등반 파트너였다. 1855년부터 슬링스비와 등반을 시작한 그는 머메리와 함께 에기유 드 그레뽕(Aig. de Grepon)을 초등반하고, 머메리·슬링스비·콜리(J.N.Collie)와 당 뒤 르깽(Dent du Requin)과 에기유 뒤 쁠랑(Aig. du Plan) 서벽을 초등반했다.
드류와 몽블랑의 브렌바 벽(Brenva Face)에서 처음으로 가이드레스 등반을 하기도 한 그는 1895년 머메리, 콜리 등과 최초로 8000m급의 거봉인 낭가파르바트(8125m) 등반을 시도했지만 이 등반은 머메리와 그를 수행한 2명의 구르카인이 희생되는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 후 슬링스비와 5차례에 걸쳐 노르웨이에 가서 여러 차례의 초등정과 탐험을 했다.
헤르조그, 오토 (Helsog, Otto) 1889~1964
카라비너(Karabiner)를 최초로 고안하여 실용화한 독일의 등산가다.
1910년 독일 뮌헨의 소방수들이 화재 진압에 사용하던 서양배 모양의 클립(Pear Shaped)을 헤르조그가 새로운 모양으로 고안하여 실용화 한 것이 지금과 같은 카라비너의 효시다. 그는 화재진압 훈련을 하는 소방대원들이 허리벨트에 차고 있던 서양배 모양의 쇠고리를 보고 이것을 암벽등반에 응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안한 후 연구를 거듭한 끝에 실용화하는데 성공했다.
같은 시기인 1910년 한스 피히틀(Hans Fiechtl)에 의해 하켄(Haken)의 기본형이 개발되고, 그의 등반 파트너인 헤르조그가 카라비너를 고안하여 암벽등반에 이용하게 되자 등반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그는 1921년에 하버(G. Harber)와 드라이찐켄슈비체(Dreizinkenspitze) 북벽을 초등반하기도 했는데 이는 알프스 등반사에서 최초의 6급 플러스(Ⅵ+)등반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 시기는 헤르조그의 카라비너, 피히틀의 하켄, 한스 듈퍼의 듈퍼지츠(Dulfersitz) 등 세 가지 등반기술적 요소가 삼위일체를 이루며 인공등반기술이 확산되었다.
암벽등반은 6급 등반의 시대가 열리는 새로운 국면으로 돌입했다.
헤크마이어, 안데를 (Hechmair, Anderl) 1905~2005
1930년대에 활약했던 독일의 산악가이드로 뮌헨파(Munich School)의 일원이다.
그는 한 시대를 대표할만한 선구적인 등반가들 중 한사람으로, 일정한 직업이 없어 많은 시간을 등반에 바칠 수 있었다. 1930년에 돌로미테의 자스 마오르(Saas Maor) 동벽을 등반하고 1932년에 그랑샤르모즈(Grand Charmoz) 북벽 직등 루트를 등반했으나 그를 가장 유명하게 한 것은 1938년 아이거 북벽 초등반이다.
그는 루드빅 페르크(Ludwig Vorg)와 함께 북벽 등정을 시도하던 중 오스트리아의 등반가인 하러(H. Harrer)와 카스파레크(F. Kasparek)도 등정을 원한다는 것을 알고 이들과 합동으로 아이거 북벽 초등정에 성공했다. 2차세계대전 후에도 세계 여러 곳에서 등반 활동을 했으며 독일의 유스호스텔 사업에도 관여했다. 2005년 2월 1일 그는 독일 바이에른주 자택에서 향년 98세로 생을 마감했다.
저서로는 'Hein Laben ais Bergsteiger' (1972)가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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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정아씨!! 우리 이거 요약해서 A4 용지 2장으로 맞추기로 했는데...
이 내용이 다 필요한것이 아니고, 이름과 년도 대표적 등반으로 해서 역사 연표를 만들어야 해요...
네~~연표만들어 올릴게요~ㅋㅋ
ㅎㅎ 오데서 많이 보던 포스팅이야..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