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송설당
1855년 8월29일 김천에서 출생.
1931년 3월21일자 동아일보는 최송설당에 대하여 ‘침묵의 김천을 활기의 김천으로, 초야의
김천을 이상의 김천으로 만들었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근대 민족지도자들이 설립한 하교에는 도산 안창호의 ‘대성학교’, 이승훈의 ‘오산학교’, 민영환의 ‘흥화학교’, 엄주익의 ‘양정학교’, 아젠팰러의 ‘배재학당’, 이용익의 ‘보성학교’, 민영휘의 ‘휘문학교’, 김성수의 ‘중앙학교’ 정도이다.
이들 학교의 면면을 보면 기독교에 기반을 둔 학교이거나 설립자들이 모두 남자로서 친지들의 도움을 받아 학교를 설립했으나 자신의 전 재산을 학교설립에 받친 사람은 없다. 송설당은 자신의 전 재산을 바쳐 순수한 민족자본으로 학교를 설립한 것이 여느 사립고보와 다른 점이다.
송설당의 본관은 화순이고 조상은 평안도 정주에서 문무 혁혁한 사대부의 집안으로 가계를 이어 왔다. 당시 증조부의 외가가 ‘홍경래의 난’에 가담하였다고 하여 증조부는 억울하게 옥사하였고, 조부는 전라도 고부로 귀양을 갔다. 아버지 창환공이 김천으로 이주한 이후 1855년 8월 29일 최송설당은 김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선비의 집안에서 태어났으므로 김천 교동에서 훈장으로 간신히 생계를 이어 갔다.
당시 최대의 문장가였던 김윤식은 송설당의 재능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진실로 문필에 종사하는 사람이 있어 일생 동안 부지런히 형설의 어려움을 무릅쓰고 공부를 하였더라도 그가 지은 글을 보면 매미 울음과 벌레 소리와 같아서 한 번 읊어 보기에도 부족하며, 그리하여 글다운 글은 얼마 되지 않는다. 부인(송설당)은 일찍이 오랜 동안의 힘든 공부와 특별한 노력이 없으면서도 학식이 넓고 넉넉하며 음률이 절조에 맞으니 어찌 천재가 아니겠는가?
송설당의 면모는 조선시대 여성을 대표 할 수 있는 문학가이며 조선조 말기 가사문학을 보존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송설당은 지극한 불심과 자선사업가로서 삶을 보여 주었다. 1930년 11월 14일 조선일보 사설은 당시 여성계의 대표적인 사화사업가로 ‘평양의 백선행과 김천의 최송설당’을 주제로 다루었다. 송설당은 자선사업을 많이 하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독실한 불교신자로서 전국 30여개 사찰에 시주 및 불사에 적극 참여했다. 지금도 도선사, 청암사, 도성암, 금강산 유점사 등에는 당시의 시주에 대해 고마움을 표시하는 대형 각석이 남아 있다. 1910년에는 흉년이 들자 김천 교동의 주민을 구휼하기 위해 벼 50석을 희사하여 소작인으로부터 자모(慈母)로 추앙을 받았다.
송설당의 삶에 있어 인생의 전환점은 40세에 혼자 몸으로 상경하는 데에서 시작된다. 지극한 불심의 영향으로 엄순헌황구비(嚴純獻皇貴妃)를 알게 되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1897년 엄순현황귀비가 영친왕을 출산하게 되자 영친왕 이은(李垠)의 보모로 입궁하게 된다. 영친왕이 1907년 일제의 강요에 의해 일본으로 출국하게 될 때까지 10년 동안 궁중생활을 하였다. 궁중생활 기간 중 고종으로부터 선친들을 몰적(沒籍)에서 복권 받게 되며, 엄순헌황귀비의 총애를 받아 엄청난 재력가로 발돋움할 수 있는 종자돈이 마련되었다고 보여진다.
거부의 반열에 오르기까지 여사의 삶은 근검절약 자체였다. 송설당은 하인이 닭 잡고 닭발을 버렸다고 호통을 하고, 쌀 한 톨 구정물에 흘렸다고 야단치면서, 물건을 사면 포장지 한 장, 노끈 한 오라기 버리지 않고, 자신의 식단은 검소하게 평생을 살았다.
궁중에 있을 때 엄순헌황귀비가 ‘진명여고’와 ‘숙명여고’를 세우는 과정을 보아 왔던 자신의 인생관, 그리고 민족지도자 만해 한용운 선생이 학교설립을 적극 추천함에 따라 학교설립을 하기로 결심하였다.
1931년 1월 송설당은 전 재산 32만원을 출연하여 김천고보(지금의 김천고등학교) 설립허가를 받아냈다. 1930년 송설당이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김천으로 내려 왔을 때는 김천역 앞에는 화환과 취주악대를 앞세운 환영인파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1935년 전국에서 1천 명이 성금을 보내와 송설당의 동상제막식을 하는데 전국의 민족지도자들 대부분이 참석하였다. 일본 경찰의 삼엄한 감시 앞에 여운형 선생은 ‘경성을 떠나 남으로 내려오는 동안 적막한 지방상태가 저 광활한 사막을 밟는듯한 심정이었다. 그러나 김천에 들어와서 우리의 생명 탑이라 할만한 김천고등보통학교가 뚜렷이 서 있음을 발견함에 오아시스를 만남과 같다’고 했다. 즉 민족의 등불을 밝혀주고 독립을 찾을 수 있는 길이 교육에 있음을 극찬하였다.
1939년 6월 16일 송설당은 자신이 만년을 보내던 송설학원 뒤편의 정검제에서 84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민족사학 김천고보를 세운 송설당은 죽음을 앞두고, 민족 독립과 평화를 위한 자신의 의지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永爲私學 涵養民族精神
一人定邦國 一人鎭東洋
克尊此道 勿負吾志
길이 사립학교를 육성하여 민족정신을 함양하라.
잘 교육받은 한 사람이 나라를 바로잡고
잘 교육받은 학생 한 사람이 동양을 편안하게 할 수 있다.
마땅히 이 길을 지키되, 내 뜻을 저버리지 말라.)
본래 김천이란 지역은 조선시대에 있어 사대부나 학자를 배출한 곳이라고 할 수 도 없다.
그러다가 1905년 경부선 철도가 부설되면서 교통의 요지로 떠 오른 곳인데 3.1 운동 과정에서도 민족적인 역량을 발휘하는 데에는 미흡하였다. 송설당의 사학정신에 의해 설립 된 김천고보는 김천지역과 경북 서북부의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 그 실증적인 사례가 1932년 김천고보 38명의 합격자 명단을 보면 김천, 영동, 상주, 안동, 대구, 영천, 예천, 성주, 달성, 문경, 선산, 정평, 밀양, 고령으로 나타나고 있다. 김천고보는 80년의 역사 속에서 3만 여명의 인재를 배출했고 지금도 송설당의 건학이념을 전통으로 이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