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승천 2009,5, 24.
사랑합니다. 승천하신 예수님을 영접하는 수많은 신창동 성당의 꽃들이 신자들의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오르신다. 달려 나가자! 김희중 주교님도 오시어 신창동에 오시어 첫 견진성사를 집전해주신다.”
Zenta Maurina라는 신체장애자가 있었습니다. 일생을 휠체어에 의지하면 살았습니다. 장애 때문에 신체적 고통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장애 때문에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을 받아야 했습니다. 장애 때문에 사람들은 그녀를 불친절하게 대했습니다. 그러나 신앙으로 모든 장애를 넘었습니다. 그래서 1978년, 80세의 나이로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세상의 여러 사람들이 사랑하는 여류 작가로 살았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넘어서 극복한 장애를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불행, 나의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내가 스스로 고통을 선택하면 참아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나에게 고통을 강요하면 참아내지 못 한다. 예수님이 물속에 빠지지 않게 하시리란 확신을 가진 베드로는 호수 위를 걸었다. 내가 걷는 고통의 호수도 마찬가지였다. 예수님은 내가 고통의 호수에 빠지지 않게 하시리란 확신이 있었다. 그래서 나도 고통의 호수에 빠지지 않고, 고통의 호수 위를 걸었다.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베드로가 호수 속으로 빠졌다. 나도 절대자에 대한 믿음을 잃으면 언제라도 고통의 호수에 빠진다.”
그 고통의 호수를 걷던 첸타 마우리나는 죽음을 앞두고 이렇게 확신에 찬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나의 뿌리는 하늘에 있다.”
그녀가 죽은 다음 사람들은 그녀의 삶과 그녀의 마지막 말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그녀는 세상의 공기로 숨 쉬지 않았다. 그녀는 세상의 공기와는 전혀 다른 공기로 숨 쉬며 살았다. 그녀는 이 세상에 살았지만, 영원한 세상에서 살았다. 땅위에서 사는 것 같았지만, 하늘나라에서 살았다. 이 세상의 공기를 마시는 것 같았지만, 실은 하느님의 숨길을 마셨다. 이 세상으로 살아가는 듯이 보였지만, 하늘로 살아간 사람이었다. 그녀의 뿌리는 하늘에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위를 보고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래를 보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위를 보고 사는 사람은 고통의 심연 위를 걸을 수 있지만, 아래를 보고 사는 사람은 고통의 심연 속을 허우적거릴 뿐입니다. 누구에게나 삶은 때때로 뒤죽박죽이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때에도 위를 보고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을 느낍니다. 아래를 보고 사는 사람은 지옥의 고통을 느낍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는 사람은 그 고통을 통해서 성장하고 어른이 됩니다. 그러나 지옥의 고통 속을 헤매는 사람은 좌절하고 애늙은이가 돼버립니다.” 우리는 넘어야 합니다.
나는 과연 어느 쪽을 보고 살아가는 사람일까?
성서의 기록을 보면, 제자들과 초대 교회 신자들은 하늘을 바라봅니다. 하늘로 올라가시는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천사의 깨우침을 들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생애를 뒤돌아봅니다. 예수님도 하늘을 바라보고 사셨음을 느낍니다. 하늘만 바라보고 사셨던 예수님, 이 세상에서 당신이 하셔야 했던 일을 충실하게 하셨음을 기억합니다. 십자가와 고통과 죽음을 받아들이셨음도 기억합니다. 위에 계시는 아버지 하느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셨음도 기억합니다. 그리고 예수님 속으로 들어가 예수님을 묵상합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두려움을 넘어섰습니다.
예수님은 중요한 일을 결정하거나, 결정적인 어려움에 직면하셨을 때,
늘 하늘을 바라보셨습니다.
“열 두 제자를 뽑으실 때에도 하늘을 우러러보셨고, 병자들을 치유하실 때에도 하늘을 우러러보셨고, 수난을 당하기 직전 갈바리아 산 위에서도 하늘을 우러러보셨다. 그리고 간청하셨다. 예수님은 삶의 모든 시간에 하늘을 우러러보시면서, 그 힘으로 살아가셨다.”사람이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의 힘으로 살지 않는 법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늘 이 세상을 넘기 위해서 아버지 하느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이제야 우리는 왜 예수님이 하늘에 오르셨는가? 승천하셨는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평소 당신이 우러러보시던 아버지 하느님께로 가셨습니다. 그분의 오른편에 앉으셨습니다. 당신이 세상에 사시던 동안 줄곧 우러러보셨던 분께로 옮아가셨습니다. 당신 자신의 삶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지상에서 시작하신 일, 하느님만을 우러러보시던 일이 완성 된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우러러볼 필요가 없이, 영원하신 하느님 아버지와 하나가 되셨습니다. 이 세상을 넘어서셨습니다.
우리도 이 세상에서 하느님만을 우러러보고 산다면, 언젠가 하느님 안에 계시는 예수님 안에서, 우리도 하느님 아버지와 하나가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만을 우러러보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하느님께 나아갈 수도 없고, 하느님을 영원히 뵙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만을 우러러보고 살아간 사람들은 죽음이 찾아와도 슬퍼하지도 괴로워하지도 아쉬워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보았습니다. “하나씩 둘씩 모이기 시작한 신창동의 교우들과 예비자들이 이룩한 신앙의 신비를! 위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메아리쳤기 때문에 이룩한 일들입니다. 우리는 성령께 마음을 열고 하느님의 약속을 따랐을 뿐입니다.” 우리에 앞서 히브리서의 저자도 외친 적이 있습니다.
“우리 믿음의 근원이며 완성이신 예수님만을 바라봅시다.”(히브12,2)
신창동의 작은 무리들이 모든 장애를 넘을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의 선택과 사랑을 믿으면서 성령께 마음을 열었기 때문입니다. 성당 정원의 꽃들이 그 증인입니다.
미 프로 골프에서 대한민국을 빛내고 있는 전남 완도의 사나이, 최 경주가 우승한 원동력은 무엇입니까? 신발에 달린 태극마크였습니다. 태극 마크를 바라보는 최 경주의 마음속에는 ‘나는 대한민국의 대표’란 사명감이 불타올랐습니다. 온갖 수모나 고통이나 좌절이나 가난이 짓눌려 올 때에도, 태극마크를 바라보면 새로운 힘, 대한의 건아란 자의식이 솟아올랐습니다.
그래서 최 경주는 동양인이라고 하는 미국 사람들의 편견을 넘었습니다.
에페소서(1, 21)는 예수 승천의 두 번째 의미를 제시합니다.
“권세와 세력과 능력과 주권의 여러 천신들을 지배하게 하시고 또 현세와 내세의 모든 권력자들 위에 올려놓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늘 하느님 아버지만을 우러러보고 사셨기 때문에, 하느님 아버지는 예수님을 죽음에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 불러올리시고, 아버지 하느님의 우편에 앉게 하셨다. 모든 것을 다스리고 지배할 권한을 주셨다.”는 뜻입니다. 우리도 하느님만을 분명하게 우러러보면 볼수록 세상만물을 대할 때 자신감이 넘친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 시선을 떼지 않는 사람은 자신이 당하는 고통을 다스릴 수 있다. 자신에게 닥쳐오는 온갖 어려움도 다스릴 수 있다. 세상의 재화나 권력의 단맛에 넘어가지 않고 다스리는 지배자가 될 수 있다. 이웃에게 참된 봉사를 할 수 있다. 원수를 사랑할 수 있다. 하느님을 우러러보지 못할 때 세상과 이웃의 도전에 불안해하며, 세상과 이웃의 지배를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넘기를 두려워할 때 바로 넘어가게 하시는 분이시며, 두려움이나 선입감을 넘어선 사람들에게 당신 오른 편에 앉는 특권을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의 의미를 정리해봅시다.
하느님 아버지만을 바라보고 사시던 예수님은 고통뿐만 아니라 죽음까지도 쳐부수고 하느님 아버지께로 넘어가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 아버지만을 바라보고 사는 일이 바로 신앙인의 삶입니다. 시편저자도 외칩니다.
“하느님께 청하는 단 하나의 소원은, 하느님의 성전에 머무는 것뿐입니다.
아침마다 성전에서 눈을 뜨고 하느님을 뵙는 것이 나의 낙입니다.”(시27,4)
교회는 교황님의 새로운 도전 명령에 귀를 기울일 때입니다.
“인터넷은 복음 선포의 새로운 장이다.
오순절에 성령의 강림으로 언어의 장벽을 넘은 초대교회 신자들처럼, 오늘은 사는 신자들도 같은 성령의 도움으로, 인터넷의 장벽을 넘어야 한다. 인터넷도 다른 커뮤니케이션 매체들과 마찬가지로 단순한 도구에 불과하다. 목적이 아니다. 수단이다. 인터넷의 장단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적절하게 사용하면, 인터넷은 복음화를 위한 훌륭한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그러나 인터넷의 약점은 무한한 정보를 홍수처럼 제공한다. 그리고 그 정보들은 곧 사라져버린다. 인터넷은 광범한 지식을 제공하지만 가치를 가르치지는 못한다. 인터넷을 알았으면, 과감하게 그 문턱을 넘어라.”
교황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새로운 문턱을 용감하게 넘어라.”(6항)
광주대교구장이신 최대주교님도 2002년에 사목지침으로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새로운 복음화를 위하여 지금의 하던 일들을 넘어라.”
신창동 성당에서 새롭게 시작한 창조의 힘도 위를 바라보고 넘는 것이었습니다. “넘어라. 과거 다른 본당에서 하던 일을 고집하지 마라. 여기는 新天地다.”
다른 말로하면 변화입니다. 새로운 變化(변화)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변화하도록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서 나도 변해야 하고, 너도 변해야 하고, 모두가 변해야 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 하나가 되는 신비에 우리가 다다를 때까지 변해야합니다.
우리 모두 교황님의 말씀을 외치며, 이 세상을 넘어서 하느님 나라에 이를 때까지
외치며 변화되면 좋겠습니다.
새로운 문턱을 넘어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