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봉재의 외삼문인 숭조문ⓒ시민기자 이화준
포천에서 의정부 방향으로 축석고개 삼거리 전에 가구 판매점들 사이로 큰 사당이 하나 보인다.
아니, 이런 곳에 사당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조금은 생경한 장소이다.
사당의 위치는 경기도 포천시 소흘읍 호국로 35-14에 자리하고 있다.
이 사당은 백사 이항복의 가르침을 받은 기봉(麒峰) 이시성(李時省)을 기리는 곳이다.
사당의 외삼문인 숭조문(崇祖門)은 조상을 숭배하고 가문의 번영을 위한 자손들의 의지가 느껴진다.
기봉(麒峰) 이시성(李時省)(1598년-선조 31년~1668년-현종 9년)
1598년(선조31) 포천군 가산면 마산리(말뫼)에서 출생하였다.
자는 자삼(子三), 호는 기봉(騏峯), 본관은 경주이다.
할아버지는 이광복(李光福)이며, 작은 할아버지는 백사 이항복(李恒福)이다.
아버지는 인제 현감을 지낸 이태남(李泰男)이고,
어머니는 찰방 원영세의 딸인 원주 원씨이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밝고 마음이 활발하였으며, 글 읽기를 즐겼다.
12세때 작은 할아버지인 백사 이항복에게 학문을 배웠다.
재주가 뛰어나 사략(史略)을 배우고, 모든 글을 폭넓고 두루 섭렵하였으며,
글을 지으매 웅장하고 월등하였다.
▲이시성 묘ⓒ시민기자 이화준
진사가 되고 음보로 참봉이 되었으나, 술 마시고 시를 짓는 것을 좋아하여 틈나는 대로
벗들과 어울려 전국 명승지를 찾아 시를 짓고 노래하며 보냈다.
늦은 나이인 53세인 1650년(효종 1)에 증광 문과 병과 18위로 급제하여
공조(工曹), 예조(禮曺) 정랑을 거쳐 회양부사(淮陽府使)를 역임하였고,
70세인 1667년(현종 8) 통정대부에 승진하여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使)에 이르렀다.
학식이 높은 풍류시인으로서 명문(名文), 명귀(名句), 명시(名詩)가 담긴 기봉집(騏峯集)을 남겼다.
71세인 1668년 세상을 떠나 소흘읍 이동교리 기봉재 뒷산에 묘소가 자리한다.
기봉재의 협문을 나와 바로 보이는 묘가 이 시성의 아버지 이태남의 묘이다.
묘비에는 “통훈대부 행 인제 현감 경주 이공 태남 지묘,
숙인 원주원씨 쌍봉”이라 새겨 있다.
이시성 선생의 묘는 기봉재를 뒤편 산으로 조금 더 올라야 보인다.
▲이시성 묘비ⓒ시민기자 이화준
묘비는 “통정대부 행 검지중추부사 진양도호부사 경주이공 휘 시성 지 비,
배 숙부인 안산 김씨 쌍봉”이라 새겨 있다.
이시성의 유시(遺詩)로 금강산에 양사언(楊士彦)이 암각한 봉래풍악
원화동천(蓬萊楓岳 元化洞天)을 보고 지은 아래 시와
蓬萊昔日宰淮陽(봉래석일재회양) 봉래선생이 옛날 회양부사가 되었을 때
自?平生筆力强(자이평생필력강) 평생의 필력을 자랑했네
鳳?鸞騰書八字(봉저란등서팔자) 난봉이 나는 듯한 여덟 글자는
龍?虎躍閱千霜(용번호약열천상) 용호가 서진 듯 천년을 경과했네
天荒地老風雲起(천황지로풍운기) 유구한 천지에 풍운이 일고
鬼護神?劒戟張(귀호신간검극장) 귀신이 보호한 듯 검극강이 날카로 우네
令人目擊駭心?(영인목격해심상)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놀랍게 하고 싶네
무등산에 오른 뒤 환벽당에 들러 세월의 덧없음을 노래한 시 한 수가 전해진다.
春和踏靑節(춘화답청절) 봄 날씨 온화한 삼월삼짇날
獨遊環壁堂(독유환벽당) 나 홀로 환벽당에서 노니네
水流人亦去(수류인역거) 물 흐르고 사람도 떠나가니
松竹老蒼蒼(송죽노창창) 세월 가도 송죽만 푸르구나
▲이시성 선생 상ⓒ시민기자 이화준
1981년 이재천 포천 군수와 후손들이 가산면사무소 입구 오른쪽에 ‘기봉 이 선생 상’을 건립하였으며,
2008년 후손들이 축석령 아래 선생을 추모하기 위한 재실인 기봉재(騏峯齋)를 건립하였다.
*참고
포천문화원
디지털포천문화대전
시민기자 이화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