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뮤얼 버틀러의 <에레혼>.
도무지 아리송한 제목의 책이다. 그저 책표지에 매달린 조지오웰의 서평, 즉 ‘기계문명을 꿰뚫어본 미래소설의 걸작’이라는 한 줄에 매료되어 책을 펼쳐들었다. 그러나 처음의 기대와는 달리 한동안 내 머릿속은 뒤죽박죽이 되는 느낌이었다.
소설은 주인공인 화자가 돈벌이를 위해 영국을 떠나 미지의 땅, 영국의 식민지 중 한 곳에 정착하게 되면서 시작된다. 그곳에서 화자는 새로 생긴 작은 목장에 견습생으로 들어왔다가 곧 정직원이 되었다. 그의 나이 스물 세 살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생활하면서 강 멀리 상류와 두 번째 산맥인 주산맥 너머를 궁금해 했고, 마침내 양털깎이 ‘초복’이라는 늙은 원주민과 탐험을 떠난다. 탐험 과정에서 ‘초복’은 달아나고 주인공 혼자 전혀 새로운 세상인 ‘에레혼’으로 들어가게 된다.
에레혼은 nowhere를 뒤집어 쓴 것으로 글자 그대로 Erewhon이다. nowhere가 어디에도 없는 곳이라는 말이니 에레혼 역시 지구상 어디에도 없는 곳이다. 토마스 모어가 <유토피아>를 그려낼 때도 그랬고, 조너선 스위프트의 <갈리버 여행기>에 등장하는 곳들 또한 다르지 않다.
이 소설은 1872년에 발표되었다. 19세기 말은 격동의 시기이다. 따라서 이 소설은 작품 전반부에서 미지의 세계 이야기를 통해 당시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습속을 통렬히 비판한다. 그리고 후반부에서는 이 소설의 백미라 할 다윈의 진화론을 기계로 확장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그래서 이 소설을 유토피아 소설과 상상여행소설의 전통적 요소를 결합한 풍자소설로 회자되기도 하고 기계 문명의 진보적 생각을 담은 미래소설로 회자되기도 한다. 그러나 19세기 영국의 습속에 대한 내 밑천이 너무도 일천한 탓에 풍자소설의 깊이를 가늠하기는 어려웠다.
오히려 내 관심을 끄는 것은 그보다는 ‘미래소설의 걸작’이라는 것이었다. 이 소설에서 인공지능과 인공생명의 도래를 예견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상의 이야기를 하다 보니 저자의 생각은 자유분방하고 거침이 없으며, 어디로 이야기가 흘러갈지 예측을 불허한다.
그것이 읽는 재미를 더하기도 하지만 자칫 이야기의 꼬리를 놓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시종 나를 불안하게 했다. 그러다보니 더러 소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헷갈리기도 한다. <유토피아>는 토마스 모어가 꿈꾸는 사회가 그려져 있다.
토마스 모어가 꿈꾼 세상을 그래서 우리를 이상향이라고 부른다. 반면에 새뮤얼 버틀러의 <에레혼>은 우리의 통념을 송두리째 뒤흔든다. 당시 영국 사회를 통렬히 비판하고 있다지만 질병은 죄악이자 비도덕으로 여기고, 횡령 따위는 범죄라는 생각조차 없는 사회를 비판으로 받아들여야할지 망설여진다.
흥미로운 것은 이 소설을 쓰게 된 계기가 다윈과의 서신 교류를 통해서였다고 한다. 버틀러가 <종의 기원>을 읽고 나름의 비판을 한 것이 둘의 대화가 어이진 계기라고 한다. 다윈의 생각을 당시 사회가 순순히 받아들이기에는 버거웠을 것이다.
당시 영국은 진화론과 기독교 신앙에 대한 독특한 시각 때문에 영국 사회는 양분되어 있었다. 그는 진화론이야말로 기독교의 인간 창조론을 대체할 수 있는 최고의 가설이라고 믿었지만, 진화를 기계론적으로 설명한 다윈의 입장에는 강한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산업화 시대를 한창 꽃피던 시절이었으므로 각종 기계 발명은 자고나면 어디선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노동자들은 기계에 의해 일자리를 잃거나 기계를 다루는 일에 매몰된다. 말하자면 노동자가 기계에 종속되는 것이다.
인간은 기계 다루는 일을 포함해서 매일 제자리이지만 기계는 하루가 다르게 더 성능이 좋은 것이 발명된다. 기계의 성능이 점점 좋아진다는 것은 진화론적 시각에도 들어맞는 듯하다. 버틀러는 그런 생각 끝에 기계가 점점 더 발전하다보면 기계도 생명력을 가지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다윈과의 대화에 올렸을 것이다. 다윈 입장에서는 한심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러니 이런 친구와 이야기를 더 지속해봐야 별로 득일 것이 없다는 판단이 섰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를 그저 무시하면 진화론에 또 다른 시비를 계속 걸어올 것도 뻔해 보이므로 그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자 글쓰기를 권했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말하자면 버틀러가 뉴질랜드에서 목축업을 하고 있었으므로 그곳의 이야기를 쓰면 어떨까 하는 것이다. 진화를 기계까지 연장해서 상상의 나래를 펴면 멋진 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사탕발림이 있었을 것이다.
버틀러는 부친이 목사였다. 그러므로 그는 아들도 목사가 되기를 바랐다. 버틀러는 이를 뿌리치고 나오기는 했지만 가풍이라는 것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뼛속까지 기독교 신앙으로 가득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버틀러에게 진화론은 온전히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법하다. 따라서 그는 진화론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기계 사이의 다윈>이라는 에세이를 3편이나 발표했다고 한다. 그것을 손질하여 이 소설 속에 담아놓았다. 말하자면 이 역시 다윈에 대한 풍자이거나 비틀기로 읽힌다.
말하자면 진화가 왜 하필 동식물에게서만 일어날까 진화를 변화로 읽는다면 무엇인들 변화하지 않을까. 다윈의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동식물뿐만 아니라 기계 역시 진화를 거듭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상상의 나래는 인공지능이며 인공생명의 도래까지 연장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버틀러는 자기가 진화론을 기계에 까지 확장했다고 자부심을 가지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실제로 소설에서는 <기계의 책>이라는 장에서 이 문제를 상당히 길게 설명하고 있다.
“인간은 나이가 들면서 점점 복합해져서 시력 기계를 갖고 있거나 인공치아와 인공모발까지 생길지 모른다”고 주장한다. 그의 상상력은 어떤 근거를 가진 것이 아니라 진화라는 다윈의 관점에서 그를 조롱하듯 던진 말일 것이나 재미있게도 세상은 그의 조롱처럼 변화해왔다.
그런가 하면 “인간이 풍요로움의 절정에 다가갈수록 더욱 정교하게 구성되며, 백만장자만이 인류가 합체할 수 있는 사지를 완벽하게 구비할 수 있다”고 말한다.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에서 언급한 사이보그가 바로 그런 사례가 아니겠는가.
그뿐만이 아니라 “‘인간은 바퀴와 말 두 필과 마부까지 딸린 커다란 상자도 구비하게 될 것”이라는 주장도 그것이 바로 자동차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더구나 기계의식이란 결국 오늘날 인공지능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한편, “강력한 조직체인 거물급 은행가와 상인들은 방방곡곡에 있는 자신과 동일한 부류의 인간들에게 단 1초 만에 의견을 전할 수 있다”는 언급도 흥미롭다. 오늘날, 전화, 인터넷은 이미 이를 충실히 구현하고 있지 않은가.
버틀러의 미래 사회와 인공지능에 관한 이야기가 기계의 진화를 통한 나름의 추론이기는 하지만 어떻든 요즈음 그의 상상이 우리의 일상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가 탁월한 예지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그보다는 속된 말로 그저 하나 얻어걸린 것이다. 예언자로 곧잘 회자되는 에라스무스의 예언도 내 생각에는 후세 사람들이 이리저리 꿰맞추다보니 뭔가 비슷한 것이 보였을 뿐이다. 그 역시 그저 하나 얻어걸린 것이라고 생각한다.
소설 속 인공지능은 기계가 진화한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기계는 진보하는 것이다. 유기화합물처럼 자연발생적으로 진화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기계가 진화할 수 있다는 허황된 생각을 펼친 이 소설은 그런 점에서 SF소설에 가깝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어떻든 버틀러의 입담은 실로 대단하다. 왜 다윈이 그에게 글쓰기를 권했는지 알 것도 같다. 그의 허황된 이야기는 소설에 적합하다는 판단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다른 한편으로 버틀러가 나이 겨우 23살에 다윈의 <종의 기원>을 읽었다는 사실이 더 놀랍다.
그는 그저 <종의 기원>의 행간을 따라간 것이 아니라 진화론은 유기체뿐만 아니라 기계에까지 확장해 생각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진화과정은 더디지만 기계의 진화과정은 매우 짧다는 것이 그를 불안하게 한다.
그런 발전 속도로 보면 언젠가는 기계가 인간을 점령하는 시대가 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빠져들었다. 결국 언젠가는 기계도 의식을 가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고 그렇다면 그 자체의 의식으로 기계를 더욱 발전시켜 갈 수 있다는 생각은 순진함을 넘어서 매우 진지해 보인다.
소설은 주인공이 에레혼에서 열기구를 이용해 탈출하고 마치내 영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영국에 돌아온 그는 그후 에레혼에서 겪은 일을 책으로 펴내고 마침내 투자자를 모아 에레혼으로 다시 가려는 계획을 세우는 것으로 끝난다.
소설은 인간의 무한한 상상력이 도대체 어디까지 뻗어갈지 궁금하게 한다. 그런 상상력이 미래의 어느 지점과 맞닿을 때 우리는 전율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버틀러의 <에레혼>은 미래에 대한 하나의 담론으로도 읽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