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즐겁고 행복한 시간들이 이어지시길 바랍니다
신.중.현.
그의 이름 앞에는 많은 수식어가 붙습니다.
록의 대부,한국록의 산 증인,한국적 록의 완성자
…
그는 원하는,갖고싶은 수식어는 무얼까요?
신중현의 노래를 알게 된건 한참 음악에 빠지던 중학교때입니다.
사이키델릭 스타일이니 음악적 미 의식을 혼합해..어쩌구하는건 잘 모릅니다.
다만 로큰롤의 리듬이지만 애잔한 듯 신나는 듯한 '신중현풍'의 노래가 좋을뿐입니다.
2006년을 살고 있는 오늘 1960년대의 감성을 말입니다.
1940년 11월 4일 서울에서 태어난 신중현은 아버지를 따라 만주벌판을 떠돌았고,
한국 전쟁 중이던 1951년 가족을 모두 잃고
친척이 운영하는 공장에서 일했다고 합니다.
힘든 공장생활에 유일한 기쁨은 기타였으며 독학으로 기타연습을 하다가
모두가 잠든 새벽에 기타 하나만 달랑 들고 도망쳤다고 합니다.
1958년 미8군 무대에 기타리스트로 데뷔하는 것으로 음악활동을 시작해
일본식 트로트 일색이던 한국에 서구 대중음악을 들여놓았고 이후 5년간
미8군의 톱스타로 큰 인기를 누렸다고 합니다.
신중현은 미8군에서 '재키'라는 애칭으로 불리워졌어요(저하고 애칭이 같습니다)^^
미8군이라하면 60년대 부터 80년대 까지 한국 대중가요의 발전을 이루어내고
역사를 바꾼 음악인들이 모두 이곳 출신들이라는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특히 세시봉이란 살롱은 조영남, 송창식, 윤형주등 인기 가수를 배출시킨곳입니다.
1963년 국내 최초의 록밴드
‘
에드포
’
를 결성하고
‘
빗속의 여인
’
이 담긴
앨범을 발표하지만 시장의 냉대를 받고 말죠.
록밴드로서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던 신중현은 1968년 자매 듀오
‘
펄시스터즈
’
의
데뷔음반을 제작하면서 프로듀서로 명성을 날리기 시작합니다.
김추자,박인수,장현 등 많은 신인들을 발굴해
스타제조기로서의 성가를 한껏 올리기도 했답니다.
소울 창법의 박인수가 부른
‘
봄비
’
와 장현의
‘
미련
’
은
저 개인적으로 아주 좋아하는 노래입니다.
일본 음악계에서
'봄비'를 높이 평가하며
신중현을 여러 가지 좋은 조건으로
유혹을 했다고 합니다.
일본의 한 음반회사에서 그를 찾아와서 헬기, 거대한 집,
거액의 돈을 주겠다는 등 원하는 모든 것을 해주겠다며 그를 유혹했고.
그들은 일본인 귀화를 조건으로 내걸었고 신중현은 그 유혹을 거절했다고 하네요.
당시 그의 음악성과 인기가 어떠했는지 실감하는 대목입니다.
그의 최대 히트곡이랄 수 있는 ‘미인’이라는 노래는
1974년
‘신중현과 엽전들’을
결성해 발표된 곡으로 밴드로서도 명성을 갖게 해줍니다
,
당시 이 노래가 얼마나 유명했던지 남녀노소 이 노래를 흥얼거리고
‘미인’을 켜지 않으면 거리가 조용할 정도였다네요
.
하지만 새로운 청년문화에 반감을 품고 있던 정부가 록과 포크음악의
대표주자들을 활동금지로 묶고 대부분의 노래들이 퇴폐적이고 불온하다는
이유로 금지했는데
,(..김추자가 노래하면서 추는 춤을 간첩에게
신호를 보내는거다 라면서 금지했다는군요) -ㅣ-::
신중현의
‘미인’외
100여곡이 금지곡으로 분류되고,
연이어 대마초 사건이 터지면서 수많은 뮤지션들이 대마초 연예인으로
낙인찍혀 구속되었다고 합니다. 대마초로 붙잡혀 가면 무조건
동료연예인을
50명씩 대야하는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 가장 혹독한 표적이 되었던 것은 바로
정부에 협조적이지 않았던 신중현 이었습니다.
신중현은 1972년 청와대로부터 대통령을 찬양하는 노래를 만들어 달라는 전화를
받았지만 정치를 모른다는 이유로 거절하기도 합니다.
대마초 파동은 그후 3년뒤의 일입니다.
암튼 그는 대마초 공급책으로 오해받아 정신병원과 감방 신세를 졌다고 합니다.
기타밖에 모르던 그에겐 아주 가혹한 시련이었을 듯 합니다.정신병원이라니요..
수감시절 신중현은 아내에게 책을 넣어달라고 해
독서에 몰두하며 마음을 다스렸다고 합니다
.
감옥을 나온 뒤에도 오랫동안 활동을 정지당했는데
그때도 책과 함께 세월을 견뎠다고 하네요
.
1979년 유신정권이 막을 내리고 연에활동 금지조치가 풀려 활동은 가능해졌지만
대마초 파동은 그에게서 부와 명성
, 인기 모두를 빼앗아 갔죠.
결국 신중현은 음악가에게 가장 소중한 악기를 하나씩 팔아가며
생활을 이어갈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80년대 대중음악은 펑키와 디스코 일색이이었고
‘마치 날개가 꺾인 새처럼 기력이 없었다’고 당시를 회고합니다.
신중현에 대한 재평가가 일기 사작한 것은
1990년대 중반부터입니다.
음악비평계가 그의 음악사적 의미를 재추적하고
,많은 후배 뮤지션들이
그의 노래들을 리메이크하기 시작했고,
또한 헌정앨범을 바치며 그의 음악 정신을 기렸습니다.
그리고 2006년 월스트리트저널은
‘한국 록의 대부’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으며
전국순회은퇴공연을 하는 한 마에스트로의 스토리를 싣습니다
.
반세기에 걸친 음악인생을 통해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거장을
놓칠수 없었던 것이겠죠
.
세월이 흘러 가요계에 불어온 해금바람에 활동을 할수 있게 되어 들고 나온곡이
'아름다운 강산'입니다.
신중현의 많은 노래들이 후배가수들에 의해 리메이크 되었죠.
이선희의 '아름다운 강산' '님은 먼곳에'
'빗 속의 여인' 등등 주옥같은 노래들입니다.
인생의 다른 시기에도 그랬던 것처럼,그는 다시 음악을 위해
컴퓨터공부를 사작하고 1994년엔 연주에 녹음,믹싱까지 혼자해 내기도
합니다.신중현은 '나는 좀처럼 뒤돌아볼 줄 모르는 천성을 갖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 모든 용기와 집념뒤에는 무엇보다 불우한 자신의 어린시절을 위로해주던
기타가 있었을 겁니다. 그가 쓴 자서전의 제목처럼 영원히 잠들것 같지않은
바로 그 기타 말이죠.
시나위의 기타리스트인 신대철을 비롯하여
세 명의 아들 모두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한국 록음악계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고 하네요.
누구나
‘
하고싶다
’ ’
갖고싶다
’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기가 원하는 일을,자기의 일부처럼
스스로를 길들여간
사람들을 보면
나는 용기와 힘을 얻을 수 있어 좋습니다
..
2008년8월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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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3.05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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