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동(仁同)-옥산(玉山)-장씨 사기(史記)
- 目次(목차) -
1. 仁同의 地名과 沿革(인동의 지명과 연혁)
2. 貫鄕 玉山(관향 옥산)
3. 仁同張氏의 始祖와 起源(인동장씨의 시조와 기원)
4. 仁同張氏의 由來(인동장씨의 유래)
5. 遺 蹟(유적)
1) 玉山祠(崇義廟)(옥산사)(숭의묘)
2) 玉溪書院(옥계서원)
3) 賢巖書院(현암서원)
4) 同洛書院(동락서원)
5) 大匡公遺墟碑(대광공유허비)
6) 忠貞公松隱先生遺墟碑(충정공송은선생유허비)
7) 竹亭張先生遺墟碑(죽정장선선생유허비)
8) 文康公旅軒先生神道碑(문강공여헌선생신도비)
9) 月浦張先生神道碑(월포장선생신도비)
10) 文穆公聽天堂先生神道碑(문목공청천당선생신도비)
11) 仁同張氏大宗家(인동장씨대종가)
12) 南山派宗家(남산파종가)
13) 眞佳派宗家(진가파종가)
14) 眞坪派宗家(진평파종가)
15) 凰顙派宗家(황상파종가)
1. 仁同(인동)의 地名(지명)과 沿革(연혁)
仁同(인동)은 우리 仁同張氏(인동장씨)의 始祖(시조)이신 大匡公대광공(諱金用)(휘금용)께서 肇基(조기)하여 卜居(복거)하신 고을邑(읍)로 千有餘年(천유여년)을 世居(세거)해온 遺緖(유서) 깊은 고장이다.
仁同(인동)은 新羅(신라)때 斯同火縣(사동화현)으로 그 후에 壽同(수동)으로 改稱(개칭)하였는데 年紀(연기)는 未詳(미상)이고 신라 제35대 景德王(경덕왕)(742~764)이 지금의 地名(지명)인 [仁同(인동)]으로 고치었다.
高麗朝(고려조)에 이르러 제8대 顯宗(현종)9년(1018)에 京山府(경산부)[지금의 星州(성주)]의 屬縣(속현)이 되었다가 高麗(고려)의 마지막 왕인 恭讓王(공양왕)2년(1390)에 京山府(경산부)에서 分離(분리)되어 처음으로 仁同監務(인동감무)監務(감무는 高麗末(고려말)에 작은 縣(현)에 둔 우두머리)를 두었다.
朝鮮朝(조선조)에 이르러 太宗(태종)13년(1413) 監務(감무)를 革罷(혁파)하고 縣監(현감)을 두었다가 宣祖(선조)37년(1604) 4월, 天生山(천생산)(해발 407m)에 城(성)을 쌓은 후 官方(관방)의 要塞(요새)로 浮刻(부각)됨에 따라 同年(동년) 7월 都元帥(도원수) 韓浚兼(한준겸)의 啓請(계청)에 依(의)하여 都護府(도호부)로 陞格(승격)된 후 助防長(조방장)을 두게 되었다.
高宗(고종)32년(1895)에 地方制度(지방제도)의 改定(개정)으로 都護府(도호부)에서 郡(군)四等級(사등급)이 되었다가 1914년 韓日合邦(한일합방)以後(이후) 3月(월) 1日(일) 仁同郡(인동군) 管轄(관할)의 9개면(個面)[邑內面(읍내면), 北面(북면), 長谷面(장곡면), 文良面(문양면), 石積面(석적면), 北三面(북삼면), 若木面(약목면), 岐山面(기산면)]이 漆谷郡(칠곡군)에 倂合(병합)되었다.
인동면(仁同面)은 朝鮮初期(조선초기)에 府內面(부내면)과 北面(북면)이었으나 朝鮮中期(조선중기)에 이르러 府內面(부내면)을 邑內面(읍내면)으로 고치고 1914년 4월 1일 邑內面(읍내면)과 北面(북면)을 倂合(병합)하여 仁同面(인동면)으로 改稱(개칭)하였다.
위의 仁同面(인동면)은 新羅(신라) 때부터 1914년 漆谷郡(칠곡군)에 倂合(병합)될 때까지 약 1千餘年(천여년)동안 官衙(관아)邑治(읍치)의 所在地(소재지)였고 1977년 3月(월) 1日(일) 구미(龜尾)에 編入(편입) 直前(직전)까지 63년 동안 仁同面事務所(인동면사무소)를 本面(본면)의 仁義洞(인의동)에 두었다. 仁同面(인동면)은 1977年(년) 3月(월) 2日(일) 慶尙北道(경상북도) 龜尾地域出張所(구미지역출장소)의 行政管轄(행정관할)로 되었다가 1978年(년) 2月(월) 15日(일) 龜尾市(구미시)에 編入(편입)된 후 現在(현재)에 이르고 있다.
仁同府(인동부) 및 仁洞君(인동군)에서 編刊(편간)한 邑誌(읍지) 仁同(인동)고을의 역사(歷史) 및 地理誌(지리지)에 依(의)하면 仁同(인동)은 行政的(행정적)인 고을의 이름邑名(읍명) 郡名(군명)이고 玉山(옥산)은 別號(별호)로 登載(등재)되어 있다.
仁同張氏(인동장씨)의 始祖(시조)인 大匡公(대광공)을 享祀(향사)하는 玉山祀(옥산사) 및 仁同張氏大宗家(인동장씨대종가)의 住所地(주소지)인 仁義洞(인의동)의 同名(동명)은 法的(법적)으로 在續(재속)되어 있고 行政的(행정적)으로 龜尾市(구미시) 仁同事務所(인동사무소)仁同同(인동동)은 法定洞(법정동)이 아니고 행정적(行政的)인 同名(동명)임管轄(관할)로 되어 있다.
<인동지명 연혁도표>
사동화(현) 수동(현) 인동(현)
<신라초기> ⇒ <개칭미상> ⇒ <신라경덕왕개정> ⇒
<742 ~ 764>
인동(감무) 인동(현) 인동<도호부>
<고려공양왕2년> ⇒ <조선태종13년> ⇒ <선조37년 승격> ⇒
<1390> <1413> <1614>
인동<군> 인동(면) 인동(동)
<고종32개정> ⇒ <칠곡군에 병합> ⇒ <구미시에 편입>
<1895> <1914> <1978>
2. 貫鄕(관향) 玉山(옥산)
吾張(오장)은 高麗(고려)때부터 貫鄕(관향)을 [玉山(옥산)] 또는 [인동(仁同)으로 使用(사용)하여 왔기 때문에 至今(지금)도 이에 由來(유래)되어 生時(생시)族譜(족보) 및 각종문헌(各種文獻) 등에는 [玉山(옥산)]으로 쓰고 있다.
卽(즉) 조선조(朝鮮朝)의 國朝榜目(국조방목) 司馬榜目(사마방목) 및 官衙(관아)의 文書(문서)와 戶口單子(호구단자) 등에는 모두 本貫(본관)을 인동(仁同)으로 登載(등재)되어 있고 儒林文(유림문) 簡札(간찰), 禮簡(예간) 및 文集(문집), 金石文(금석문) 各種文獻(각종문헌) 등에는 [玉山(옥산)]으로 記載(기재) 또는 刻字(각자)되어 있다. 舊譜(구보)의 玉山基址圖識(옥산기지도식)에 依(의)하면 “덕령부윤(德寧府尹)휘안세(諱安世)公(공)이 高麗(고려)가 亡(망)하자 官職(관직)에 물러나와 [玉山(옥산)]에서 餘生(여생)을 마쳤다 하였고, 또 玉山(옥산)이란 名山(명산)이 있는 까닭에 邑誌(읍지)까지 玉山(옥산)으로 別稱(별칭)하는 것이 아닌가”하였다.
玉山(옥산)은 비록 조그마한 1個(개)의 獨山(독산)이지만 우리 [인동(仁同),玉山(옥산)張氏(장씨)]의 發祥之地(발상지지)라 진실로 그 由來(유래)와 因緣(인연)이 깊은 곳이다. 玉山(옥산)은 인동관아(仁同官衙)에서 東(동)으로 一里(일리)에 所在(소재)하는데 天生山(천생산)에서 來爲(내위)하여 仁同府(인동부)에서 主山(주산)海拔(해발) 約(약) 50~60m程度(정도)으로 인동장씨(仁東張氏)의 貫鄕(관향)이다.
玉山初月[옥산초월: 옥산의 초생달]은 仁同八景(인동팔경)의 하나로 壬辰倭亂(임진왜란) 때 名將(명장) 劉綎(유정)의 軍士(군사)가 留陣(유진)한 곳으로 有名(유명)하다.
3. 仁同張氏(인동장씨)의 始祖(시조)와 基源(기원)
仁同張氏(인동장씨)의 시조는 高麗初(고려초)에 三重大匡神號衛上將軍(삼중대광신호위상장군)의 벼슬을 역임하신 諱金用(휘금용)이다. 三重大匡(삼중대광)은 高麗(고려) 때 正一品(정일품)의 品階(품계)로 壁上三韓三重大匡(벽상삼한삼중대광)이라고도 하였으며 神號衛(신호위)는 國防(국방)을 맡은 大衛中(대위중)의 하나이고 上將軍(상장군)은 正三品(정삼품)의 武官職(무관직)으로 各軍營(각군영)의 首職(수직)이며 二軍大尉(이군대위)에 各1人(각1인)씩을 두어 衛(위)의 軍兵(군병)을 統率(통솔)하였다.
우리가 通稱(통칭), 始祖(시조)를 말할 때는 上將軍公(상장군공)이라 한다. 大匡公(대광공)께옵서 鈇鉞(부월)-武官(무관)의 높은 벼슬]의 顯職(현직)을 맡아 經邦靖社(경방정사)의 功績(공적)과 翼衛補理(익위보리)한 事蹟(사적)이 多大(다대)하였을 것이나 歲月(세월)이 이미 오래되고, 世代(세대)가 또한 멀어지므로 因(인)하여 文獻(문헌)이 逸失(일실)되어 傳(전)해 오지 않으며 譜承(보승)에 또한 漏落(누락)되어 詳細(상세)치 않아서 詳考(상고)할 수 없다.
始祖(시조)이신 大匡公(대광공)께옵서 慶尙道(경상도)땅 仁同(인동)의 玉山下(옥산하)에 肇基(조기)하신 以後(이후), 一千餘年을 내려오면서 現在(현재) 그 後孫(후손)이 38代(대)까지 世系(세계)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大匡公(대광공) 以前(이전)의 先代祖上(선대조상)은 몇 代(대)나 되는지 또는 어느 때 누구이신지 諱(휘)와 官爵(관작)이 吾門(오문)의 族譜(족보)나 文獻(문헌)에 傳(전)해오지 않으니 전혀 알 수 없고 오직 族譜上(족보상)에 記錄(기록)된 最上(최상)의 先祖(선조)이신 大匡公(대광공) 諱金用(휘금용)을 始祖로 모시고 仁同張氏(인동장씨)의 基源(기원)으로 삼고 있다.
仁同(인동)의 仁義洞(인의동)에 玉山祀(옥산사)를 建立(건립)하여 崇義廟(숭의묘)에 大匡公(대광공)의 位牌(위패)를 奉安(봉안)하여 每年(매년) 淸明日(청명일)에 享祀(향사)하고 있다.
4. 仁同張氏(인동장씨)의 유래
[仁同(인동)]이란 地名(지명)은 一千二百餘年(일천이백여년)의 오랜 歷史(역사)를 지니고 있다.
즉 新羅(신라) 景德王(경덕왕)722~765년 때 [壽同(수동)]을 仁同(인동)으로 改稱(개칭)하여 現今(현금)에 이르기까지 그 地名(지명)지금은 龜尾市(구미시)仁義洞(인의동)이 存續(존속)하고 있으니 이를 考證(고증)하고 있다.
仁同張氏(인동장씨)의 始祖(시조)인 三重大匡公(삼중대광공)諱金用(휘금용)이 高麗初(고려초), 仁同(인동)에 定着(정착)하여 이로부터 一千餘年(일천여년) 동안 내려오면서 現在(현재) 그 子孫(자손)이 三十八代(삼십팔대)까지 世系(세계)가 이어진다.
歷史的(역사적)으로 보다 많은 名賢碩學(명현석학)과 忠臣烈士(충신열사)를 輩出(배출)하여 仁同(인동)하면 으레 [張氏(장씨)]를 聯想(연상)할 만큼 隆盛(융성)을 누려온 영남의 名門(명문)이었다. 더구나 一千年(일천년)이나 仁同(인동)에 世居(세거)하는 동안 숱한 戰亂(전란)을 겪으면서 宗家(종가)와 그 [터]遺址(유지)를 保存(보존)해 온 것은 他門(타문)에서 찾아보기 드문 例(예)로 至今(지금)도 大宗孫(대종손) 碩源(석원)이 仁同(인동)의 宗家(종가)를 지키면서 奉祀(봉사)와 接賓(접빈)에 餘念(여념)이 없다.
仁同張氏(인동장씨)의 系譜(계보)는 大姓(대성)답게 複雜(복잡)하여 여러 派(파)로 갈리어진다.
卽(즉), 高麗初(고려초), 仁同(인동)에 定着(정착)한 후, 高麗中期(고려중기)부터 分家(분가)派(파)되기 시작하여 朝鮮初期(조선초기)에 이르기까지 무려, 二十個派(이십개파)가 他地(타지) 全國各地(전국각지)로 分派(분파)하여 나가고, 鄕里(향리)에 五個派(오개파)[宗派(종파)-宗統(종통), 南山(남산), 眞佳(진가), 眞坪(진평), 凰顙(황상)]가 仁同(인동)의 본바닥을 지켜 張氏(장씨)의 [모밭]을 이루었으니, 漆谷(칠곡), 善山(선산) 地方(지방)에 約二千餘戶(약이천여호)[1974년 戶口調査資料(호구조사자료)], 大邱地方(대구지방)에 數千戶(수천호), 慶尙南北道(경상남북도)에 約(약) 二萬餘戶(이만여호)[1960년 國勢資料調査全國統計(국세자료조사전국통계)] 約(약) 6萬餘戶(만여호)]가 살면서 嶺南(영남)의 大姓(대성)으로 蕃盛(번성)했다.
그 후 1985년 11월, 經濟計劃院(경제계획원)의 人口調査統計(인구조사통계)에 依(의)하면 全國張氏(전국장씨)의 家口(가구)는 192.84戶(호), 人口(인구)는 810.231名(명)으로 우리나라 274個性(개성) 중 順位(순위)가 9位(위)이며 이 중에 仁同張氏(인동장씨)가 538.803名(명)으로 전국 張氏(장씨)의 66.5%이고 全國姓氏(전국성씨)의 本貫別(본관별)[3.435개관(個貫)]로 順位(순위)가 12位(위)에 이르렀다.
特(특)히 仁同張門(인동장문)은 벼슬보다 學問(학문)의 傳統(전통)이 강한 것을 무엇보다 자랑으로 삼고 있으니 이는 예부터 文人學者(문인학자)가 많이 輩出(배출)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그 實例(실례)로 朝鮮初期(조선초기)부터 現在(현재)에 이르기까지 仁同鄕內(인동향내)의 張氏門中(장씨문중)에서 52人(인)의 文集(문집)이 이미 發行(발행)된 바 있고, 아직도 發行(발행)을 보지 못한 遺稿(유고)만도 相當數(상당수)에 達(달)하고 있다.
또한 이와 關聯(관련)하여 學問(학문)을 講學(강학)하던 書院(서원) 및 書堂(서당), 亭舍(정사), 樓亭(누정) 등이 仁同鄕內(인동향내)에 60個所(개소)나 遺存(유존)[없어진 곳이 수개소(數個所)나 됨]하고 있으니 지난날의 가세(家勢)와 그 융성(隆盛)을 말해주고 있다.
끝으로 仁同張氏(인동장씨) 문중(門中)에 관(關)하여 부기(附記)하면 日本人學者(일본인학자) 江守五夫(강수오부)와 僑胞學者(교포학자) 崔龍基(최용기)[明治大學校敎授(명치대학교교수)]박사가 仁同(인동)에 長期間(장기간) 滯留(체류)하면서 韓日學者(한일학자) 共同(공동)으로 [仁同張氏家系(인동장씨가계)]를 연구한 [韓國兩班同族制의 硏究(한국양반동족제의 연구)]라는 冊子(책자)가 일본의 도요다 財團(재단) 後援(후원)으로 1982년 8월 [第一書房(제일서방)]에서 發行(발행)한 바 있음.
5. 遺蹟(유적)
1) 玉山祀(옥산사)-崇義廟(숭의묘)
所在地(소재지): 龜尾市(구미시) 仁義洞(인의동) 596
仁同張氏(인동장씨)의 始祖(시조)이신 高麗三重大匡神號衛上將軍(고려삼중대광신호위상장군) 諱金用(휘금용)의 位牌(위패)를 [숭의묘]에 保管(보관)하고 每年(매년) 淸明日(청명일)에 享祀(향사)하고 있다.
境內(경내)에는 廟宇(묘우)(3間(간)), 出入門(출입문: 3間(간)), 講堂(강당: 12間(간)으로 ㄷ字形(자형)), 正門(정문)(5間(간)), 유허비(유허비) 등이 있고 廟宇(묘우)에는 숭의묘(숭의묘), 講堂(강당)에는 玉山祀(옥산사) 扁額(편액)이 揭板(게판)되어 있다.
2) 옥계서원(玉溪書院)
所在地(소재지): 龜尾市(구미시) 仁義洞(인의동) 575
麗末忠臣(여말충신)인 忠貞公(충정공)(諱安世(휘안세))을 主享(주향)으로 한 후 後孫(후손) 8인을 從享(종향)하여 오랫동안 享祀(향사)하여 오다가 高宗(고종)8년 朝令(조령)에 依(의)하여 講堂(강당)은 毁撤(훼철)되고 강당과 三門(삼문)은 撤去(철거)되지 않아 建物(건물)이 現存(현존)하고 있다. 그 후 훼철된 지 23년 만인 고종30년(1893)에 이르러 다시 廟宇(묘우)의 遺址(유지)에 神堂(신당)(碑)를 세우고 忠貞公(충정공) 한 분을 獨享(독향)으로 하여 每年(매년) 重九(중구)에 享祀(향사)하여오다가 玉溪書院(옥계서원)이 陞號(승호)된 후 每年(매년) 穀雨日(곡우일)이 享祀定日(향사정일)이다.
이 祠堂(사당)은 朝鮮(조선) 英祖(영조)50년(1774)에 創建(창건)하여 純祖(순조)19년(1819)에 重修(중수)한 후 1984년에 이르러 大宗會(대종회)에서 廟宇重建(묘우중건) 및 講堂重刱(강당중창)을 決議(결의)하여 3年餘(년여)에 걸친 後孫(후손)의 精誠(정성)어린 獻誠金(헌성금)으로 1986년 10월 工事(공사)에 着手(착수)하여 1987년 3월말에 竣工(준공)을 보게 되었다.
工事槪要(공사개요)는 高宗(고종)8년에 毁撤(훼철)된 廟宇(묘우)를 重建(중건)하고 講堂(강당)(5間(간)) 및 門樓(문루)(3間(간))을 重刱(중창)하고 東西齋(동서재)(各(각)3間(간))을 新建(신건)하고 碑閣(비각)을 改建(개건)하고 垣墻(원장)을 모두 花岡石(화강석)으로 改築(개축)한 후 境內(경내)를 새롭게 淨化(정화)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90년 儒林(유림) 公議(공의)에 의하여 書院(서원)으로 승호(陞號)되었다.
3) 현암서원(賢巖書院)
所在地(소재지): 구미시(龜尾市) 황상동(黃桑洞) 416
이 書院(서원)은 朝鮮(조선) 중종조(中宗朝) 儒學者(유학자)인 竹亭(죽정)(諱潛)선생의 봉향지소(奉享之所)이다. 肅宗(숙종)18년(1692) 賢巖祠宇(현암사우)를 創建(창건)한 후 英祖(영조)37년(1761) 3월에 이르러, 當時(당시) 士林(사림)의 公儀(공의)에 依(의)하여 [賢巖書院(현암서원)]으로 陞號(승호)되어 享祀(향사)를 奉行(봉행)하여 왔으나, 高宗(고종)8년(1871) 書院撤廢令(서원철폐령)에 의하여 建物(건물)이 모두 毁撤(훼철)되었다가 1993년 5월 復元(복원)한 후 現在(현재)에 이르고 있다.
서원 아래에는 先生(선생)의 講學之所(강학지소)인 竹林精舍(죽림정사)가 있다. <또한 書院(서원) 入口(입구)에는 李晦齋(이회재) 선생과 강론하던 [二賢巖(이현암)]이 있다.>
4) 東洛書院(동락서원)
所在地(소재지): 龜尾市(구미시) 臨洙洞(임수동) 373
이 書院(서원)은 朝鮮(조선) 仁祖(인조) 때 右參贊(우참찬)을 歷任(역임)한 旅軒先生(여헌선생)(諱顯光(휘현광))을 享祀(향사)하기 위해 建立(건립)하였다.
境內(경내)에는 景德廟(경덕묘), 中正堂(중정당), 允懷齋(윤회재), 謹執齋(근집재), 神道碑(신도비)와 出入門(출입문)인 尊道門(존도문)이 있으며 門人(문인) 晩悔堂公(만회당공)(諱慶遇(휘경우))이 配享(배향)되어 있다.
朝鮮(조선) 孝宗(효종)6년(1655) 이 書院(서원)을 建立(건립)한 후 肅宗(숙종)2년(1676)에 東洛書院(동락서원)으로 賜額(사액)을 받았으나 高宗(고종)8년(1971) 朝令(조령)에 依(의)하여 毁撤(훼철)된 후 다시 重建(중건)하였다.
東洛書院(동락서원)의 全面(전면)에 所在(소재)한 은행나무는 樹齡(수령)이 約(약)380餘年(여년)으로 여헌선생(여헌선생)의 手植(수식)이다. 또한 이 書院(서원)의 東便(동편)에는 旅軒先生(여헌선생)이 講學(강학)하던 不知岩情舍(부지암장사)(5間(간))가 있다.
5)高麗三重大匡神號衛上將軍玉山張公遺墟碑(고려삼중대광신호위상장군옥산장공유허비)
所在地(소재지): 龜尾市(구미시) 仁義洞(인의동) 596(玉山祀(옥산사) 境內(경내))
仁同張氏(인동장씨) 始祖(시조)(諱金用(휘금용))의 遺墟碑(유허비)이다. 大匡공(대광공)은 高麗(고려) 初(초)에 三重大匡神號衛上將軍(삼중대광신호위상장군)을 歷任(역임)하였다.
碑文(비문)은 後孫(후손) 承熙(승희)가 撰(찬)하고 後孫(후손) 會植(회식)이 書(서)하다.
6) 忠貞公(충정공) 松隱先生(송은선생) 遺墟碑(유허비)
所在地(소재지): 龜尾市(구미시) 仁義洞(인의동) 575
이 碑(비)는 高麗後期(고려후기)에 德寧府尹(덕령부윤)을 歷任(역임)하신 松隱先生(송은선생)(諱安世(휘안세))의 遺墟碑(유허비)이다.
先生(선생)은 高麗(고려)가 亡(망)하자 “忠臣(충신)은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하여 杜門洞(두문동)으로 들어가신 72賢(현)의 한 분이다. 號(호)는 松隱(송은)이고 諡號(시호)는 忠貞(충정)이다.
碑文(비문)은 韓山人(한산인) 大山(대산) 李象靖(이상정)이 撰(찬)하고 글씨는 全州人(전주인) 兵曹佐郞(병조좌랑)(뒤에 兵曹參判(병조참판) 역임 崔光壁(최광벽)이 書(서)하다.
7) 竹亭(죽정) 張先生(장선생) 遺墟碑(유허비)
所在地(소재지): 龜尾市(구미시) 黃桑洞(황상동) 416
이 碑(비)는 朝鮮(조선) 中宗朝(중종조)인 儒學者(유학자) 竹亭先生(죽정선생)(諱潛(휘잠))의 遺墟碑(유허비)이다.
先生(선생)은 靜庵(정암) 趙光祖(조광조)의 門人(문인)으로 當代(당대)의 巨儒(거유)인 晦齋(회재) 및 退溪(퇴계)와 交流(교류)한 선비로 道德(도덕)과 世人(세인)의 追尊(추존)을 받았다.
碑文(비문)은 眞城人(진성인) 李家源(이가원)이 撰(찬)하고 月城人(월성인) 崔秉瓚(최병찬)이 書(서)하다.
8) 文康公(문강공) 旅軒선생(여헌선생) 神道碑(신도비)
所在地(소재지): 龜尾市(구미시) 臨洙洞(임수동) 373
이 碑(비)는 仁祖(인조) 때 右參贊(우참찬)을 歷任(역임)한 후 領議政(영의정)으로 追贈(추증)된 旅軒先生(여헌선생)(諱顯光(휘현광))의 神道碑(신도비)이다.
先生(선생)은 仁祖(인조) 때 巨儒(거유)로 號(호)는 旅軒(여헌)이다. 여러 벼슬을 거쳐 兵曹參判(병조참판), 右參贊(우참찬) 등을 歷任(역임)한 후 領議政(영의정)에 贈職(증직)되고 諡號(시호)는 文康(문강)이다. 重要(중요)한 著書(저서)로 宇宙要括帖(우주요괄첩), 性理說(성리설), 易學圖說(역학도설), 龍蛇日記(용사일기) 등이 있고 在世時(재세시)에 350餘人(여인)의 門人(문인)이 輩出(배출)되었으며 星州(성주)의 川谷書院(천곡서원), 善山(선산)의 金烏書院(금오서원), 靑松(청송)의 松鶴書院(송학서원), 永川(영천)의 臨皐書院(임고서원), 仁同(인동)의 東洛書院(동락서원), 善山影堂(선산영당) 등에 祭享(제향)하다.
碑文(비문)은 右議政(우의정) 許穆(허목)이 撰(찬)하고 右副承旨(우부승지) 趙德隣(조덕린)이 書(서)하다. 篆書(전서)(전자글씨)는 玄孫(현손) 동식(東軾)의 글씨다
9) 月浦(월포) 張先生(장선생) 神道碑(신도비)
所在地(소재지): 龜尾시(구미시) 新洞(신동)
이 碑(비)는 朝鮮祖(조선조)에 嘉善大夫(가선대부) 吏曹參判(이조참판)에 贈職(증직)된 月浦先生(월포선생)(諱顯道(휘현도))의 神道碑(신도비)이다.
先生(선생)은 聽天堂(청천당)의 生父(생부)로 號(호)는 月浦(월포)이다. 寒岡(한강)의 門人(문인)으로 當代(당대)에 著名(저명)한 儒學者(유학자)이다. 碑文(비문)은 眞城人(진성인) 李國源(이국원)이 撰(찬)하고 後孫(후손) 炳壎(병훈)이 書(서)하다. 神道碑(신도비)의 後面(후면)에는 先生(선생)의 追慕之所(주모지소)인 [洋洋齋(양양재)]가 所在(소재)하고 있는 바 [洋洋齋(양양재)]의 懸板(현판)글씨는 大院君(대원군)의 親筆(친필)로 알려져 있다.
10) 文穆公(문목공) 聽天堂先生(청천당선생) 神道碑(신도비)
所在地(소재지): 龜尾市(구미시) 仁義洞(인의동) 535
이 碑(비)는 朝鮮(조선) 顯宗(현종) 때 副提學(부제학)을 歷任(역임)한 후 吏曹判書(이조판서)에 追贈(추증)된 聽天堂先生(청천당선생)(諱應一(휘응일)의 神道碑(신도비)다.
先生(선생)은 旅軒先生(여헌선생)의 子(자)로 號(호)는 聽天堂(청천당)이다. 大司成(대사성), 承旨(승지), 大司諫(대사간), 副提學(부제학) 등을 歷任(역임)한 후 吏曹判書(이조판서)에 贈職(증직)되고 諡號(시호)는 文穆(문목)이다.
碑文(비문)은 驪州人(여주인) 星湖(성호) 李瀷(이익)이 撰(찬)하고 眞城人(진성인) 克庵(극암) 李基允(이기윤)이 書(서)하다.
11) 仁同張氏(인동장씨) 大宗家(대종가)
所在地(소재지): 龜尾市(구미시) 仁義洞(인의동) 386-2
이 宗家(종가)는 仁同張氏(인동장씨)의 始祖(시조)이신 大匡公(대광공)의 遺墟址(유허지)로 高麗(고려) 때 創建(창건)하여 壬亂(임란) 때 兵火(병화)로 燒失(소실)된 것을 다시 重建(중건)하고 高宗(고종)7년에 重修(중수)한 후 1983년에 다시 重刱(중창)하였다.
正寢(정침)은 ㄱ字形(자형)으로 六間(육간), 사랑채는 六間建物(육간건물)로 旅軒(여헌)이 지은 중창문(重刱文)과 吏曹參判(이조참판) 張仁遠(장인원)이 지은 宗廳重修記(종청중수기)가 있다.
1999년 3월 옛 建物(건물)은 撤去(철거)하고 그 遺址(유지)에 ㅁ자형(建坪(건평) 110평(坪))으로 重建(중건)하였으며 廟宇(묘우)를 復元(복원)하여 儒林(유림)의 公議(공의)로 忠貞公(충정공) 松隱先祖(송은선조)를 不遷位(불천위)로 奉安(봉안)하였다.
12) 南山派(남산파) 宗家(종가)
所在地(소재지): 龜尾市(구미시) 仁義洞(인의동) 642-2
分派祖(분파조)인 泗川縣監(사천현감) 張俁(장우)가 朝鮮(조선) 初期(초기)에 分家(분가)하여 創建(창건), 旅軒(여헌)이 이 宗家(종가)의 建物(건물)에서 出生(출생)하였으며 壬亂(임란) 때 燒失(소실)된 것을 重建(중건)한 후 純祖(순조) 24년에 다시 重建(중건)하였다.
當初(당초)에 ㅁ字形(자형)의 20間(간) 建物(건물)이었으나 1983년 ㅁ字形(자형)의 20間(간)으로 다시 重刱(중창)하였다.
13) 眞佳派(진가파) 宗家(종가)
遺址(유지): 龜尾市(구미시) 居依洞(거의동)(眞佳村(진가촌))
分派祖(분파조)인 禮賓寺參奉(예빈사참봉) 張孟昌(장맹창)이 朝鮮(조선) 初期(초기)에 仁同府(인동부)의 북쪽인 眞佳洞(진가동)에 分家(분가)하여 建立(건립)하였으나 지금은 建物(건물)이 없어지고 그 遺址(유지)만이 남아 있다.
14) 眞坪派(진평파) 종가
遺址(유지): 龜尾市(구미시) 眞坪洞(진평동) 297
分派祖(분파조)인 竹窓(죽창) 張信孫(장신손)이 朝鮮(조선) 初期(초기)에 仁同府(인동부)의 眞坪洞(진평동)에 分家(분가)하여 建立(건립)하였으나 6.25動亂(동란) 때 燒失(소실)되고 지금은 그 遺址(유지)만이 남아 있다.
15) 凰顙派(황상파) 종가
所在地(소재지): 龜尾市(구미시) 黃桑洞(황상동) 416
分派祖(분파조)인 竹亭(죽정) 張潛(장잠)이 中宗期(중종기)에 仁同府(인동부)의 凰顙洞(황상동)으로 分家(분가)하여 建立(건립)하였다.
正寢(정침)은 4間(간), 사랑채 4間(간)의 建物(건물)로 여러 번 重修(중수)하였다. 2000년에 三間(삼간) 겹집으로 重建(중건)하여 現在(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이 종가의 右便(우편)에는 竹林精舍(죽림정사)가 所在(소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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