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환의 생애
유치환은 1908년 경남 통영의 태평동에서 한의였던 유준수의 8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난다. 장남은 극작가인 유치진이다. 그의 부친은 본래 거제군에서 살았으나 결혼한 뒤에 처가가 있던 통영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그는 외가에서 태어나 11세 때까지 서당을 다니며 한문을 배웠다. 어린 시절 그는 말이 별로 없는 소년이었다. 학교 종이 울리더라도 뛰어가는 법이 없이 조용히 걸어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실로 들어갔다. 그가 통영보통학교 4학년을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요야마 중학교에 입학한 것은 1922년이다. 그의 형 유치진은 3학년에 재학중이었다. 그의 내성적 성격은 중학 시절에 더욱 심화되었다. 일본인 친구들을 사귀는 대신에 그는 혼자 책을 읽고 무언가를 쓰는 일에 열중했다. 그러던 중 이듬해 관동대지진을 맞이했고, 그 때 그는 일본인들에 의해 아무 죄도 없는 한국인들이 무참하게 학살되는 것을 목격했다. 그 후 그는 주일학교에서 만난 소녀에게 매일같이 편지를 보낸다. 그 소녀는 나중에 그의 아내가 된 권재순이다. 도요야마 중학 4학년 때 부친의 사업이 기울자 그는 귀국하여 동래고보 5학년에 편입한다. 그는 1928년 연희전문을 중퇴하고 진명 유치원의 보모로 있던 권재순과 결혼한다. 그 당시에는 드문 신식 결혼식이었다. 이 결혼식 때 신랑신부 앞에 꽃바구니를 들고 서 있던 어린아이 중의 하나가 훗날 시인이 된 김춘수이다. 권재순과 결혼한 후 그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아나키스트들의 작품을 보고 이듬해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런 후 그는 일본의 아나키스트들과 정지용의 시에 깊은 영향을 받으며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다. 청마는 1931년 24세 때「문예월간」2호에 「정적」이라는 시를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데뷔하게 된다. 이 때 청마는 비슷한 또래의 통영 문학청년들과 어울려 다니며 술을 마시곤 했다. 그의 장래를 불안하게 생각하던 아내는 시아버지와 청마를 설득하여 거처를 평양으로 옮긴다. 청마는 평양에서 사진관을 경영했으나 여의치 않자 이내 걷어치우고 시를 짓는 데에만 전념한다. 그의 아내는 청마에게 평양의 신학교 진학을 권유했으나 그는 자신과는 맞지 않는다고 거절한다. 다시 거처를 부산으로 옮긴 것은 1934년이고, 부산화신연쇄점에 근무한다. 30세 되던 해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통영 협성상업학교 교사가 되는 것을 계기로 이후 교육계에 종사하게 된다. 문예동인지 생리(生理) (창간 1937. 7. 1.)를 주간하기도 했던 해였다. 그러나 그 다음해 여자 문제가 얽힌 데다가 통영경찰서에 근무하던 남 순사란 사람으로부터 그가 일제의 예비 검속 대상자에 포함되어 있음을 귀띔 받고 가족들을 거느리고 인생을 다시 한 번 재건해 보려는 의도로 만주로 떠나게 된다. 만주의 연수현에 형 유치진의 농장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그 곳에서 일을 한다. 광복 직전인 45년 6월에 귀국하여 광복을 맞이하였고 통영여자중학교 교사(1945. 10. ∼ 1948)가 된 그는 11월에 윤이상, 김춘수 등과 같이 통영문화협회를 조직하고 그 회장이 되어 문화유치원(그의 부인이 경영)을 포함하는 4동의 적산을 인수하고 '연극 부락' 중심의 예술 활동을 벌인다. 39세 때는 제 1회 시인상을 받았으며 41세 때인 1948년엔 청년문학가 협회 회장직을 맡아 반공 민족 문학의 선두에 서기도 했다. 50년 북한 남침으로 부산으로 피난한 그는, 그 곳에서 문총 구국대 조직에 참여한 후 3사단과 함께 종군하여 원산, 함흥 등지로 병사들과 함께 전쟁의 아픔을 겪었다. 이 경험으로 잘 알려진 시 '보병과 더불어'(50), '돌아오지 않는 비행기'(50. 4.) 등이 쓰여졌다. 48년에 교직을 그만두었으나 54년에 거창 안의중학교 교장(54∼55)이 되었다. 그 후 그는 경주고(55∼61), 경주여중(61∼62), 대구여고(62∼64) 등 사학의 교장으로 있다가 경남 문교 사회국장이던 오복근의 주선으로 경남여고(64) 교장으로 옮겼다. 청마가 세상을 뜬 것은 1967년 2월 13일이었다. 그날은 고교 후기 입시날이었다. 부산남여상 교장으로 있던 청마는 학교일을 마치고 예총 일로 몇몇 문인을 만났고, 그들과 어울려 몇 군데 술집을 들렸다. 그런 후 그들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가던 청마는 좌천동 앞길에서 한 시내버스에 치였고 부산대학 부속병원으로 옮기는 도중 절명했다.
청마 유치환은 사진관 경영, 화신 연쇄점 사원 경력을 빼고는 거의 대부분 교직에 있었다. 통영 협성상고와 통영여중에서 4년쯤 교단에 섰고, 경주고 교장이 되기 전 한 학기쯤 경북대에서 강의를 맡은 경력을 빼고는 거의 대부분의 교직 경력은 교장이었다. 통영 문화협회에서 인수한 적산을 사유화하여 그의 아내가 경영하게 만든 사건이나 여러 차례 불륜의 여성 관계를 빚는 등 인간적인 약점이 없지는 않았으나 그는 존경받는 교육자였고, 지사적인 시인이었다.
2. 유치환의 삶과 문학
청마(靑馬)와 이상(李箱)은 여러모로 대조되는 시인이다. 청마는 건강한 몸을 지녀서 고래 술을 평생 마시고도 끄떡없었는데 이상(李箱)은 20대 중반에 얻은 폐결핵을 극복하지 못하고 28세로 요절했다.
이상(李箱)이 생(生)의 의미를 찾지 못해 절망하고 자기 모멸에 빠져 몸부림치고 있을 때 청마는 [생명의 서(書)] 같은 시집을 내놓으며 삶의 정열에 들끓었다. 이상(李箱)이 인간의 삶 자체를 거부하고 저항하면서 의식적으로 '애욕의 진흙탕'에 뛰어든 반면 청마는 [깃발], [바위] 등을 발표하면서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理念)의 푯대를 바라보며 일생을 살았다.
이렇게 다르면서도 둘은 친하게 지냈다. 이상(李箱)은 신상에 이상이나 변화가 있을 때는 꼭 청마에게 엽서를 띄워 알려주곤 했다. 이상(李箱)이 절망을 극복해 보려고 일본으로 건너갈 때 마지막으로 찾은 사람이 청마였다. 청마는 그러므로 국내에서 이상을 마지막으로 본 사람이다.
이상(李箱)은 어느 날 일본으로 간다면서 느닷없이 청마를 찾아왔다. 둘은 항구의 싸구려 술집에서 엉망진창이 되도록 마셨다. 생명력이 충천한 시인 청마와 생명력을 찾아 얻어 보려는 이상(李箱)이 만난 술자리이니 그 순간만은 의기투합 '비슷한 모습'을 보였을 것이다. 그날밤, 지금은 불타고 없는 부산 우체국 건너편에 있는 조선 여관이란 삼류 여인숙에서 지내고 이튿날 저녁 둘은 관부연락선 부두에서 영원한 작별의 손을 마주 흔들었다. '이상(李箱)은 까마귀 같은 퀭한 눈에 커다랗게 입을 벌려 흥소했다.' 이것이 청마가 기록한 이상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청마는 친계(親系)로부터는 강직한 성품을 이어받고 모계(母系)로부터는 후덕한 덕성을 물려받았다. 그래서 청마의 성격 규정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와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로 대표되는 양면성에서 찾아져 왔고, '의지와 사랑의 시인'이라는 평가를 받아 왔다.
청마는 타고난 저항 정신을 피 속에 용해시켜 놓고 있었다. 그는 우선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동래고보 학적부를 보면 조선어, 영어, 한문은 늘 갑(甲;9점)인데 국어(일본어), 화학 등은 병(丙;4점)을 면치 못했다. 또 그는 결석을 잘 했다. 병이 났다고 결석계를 내고 학교엘 잘 빠졌는데 학적부에 기록된 '체격란'에는 항상 '갑(甲)'으로 되어 있다. 가기 싫은 학교를 꾀병 내고 안 갔음이 분명한데 그러고도 석차는 27명중 7등이었다.
청마는 학교하고는 연분이 적었던 모양으로 연희 전문 문과에 입학했으나 마음에 안 들어서 1학년도 다 못 채우고 걷어치웠다. 그러고는 다시는 학교 근처에는 얼씬거리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일본에 건너가서 사진 학원에 들어가 사진 기술을 배운다. 사진관을 열어서 먹고 살 요량으로 한 것인데 사실상 그는 평양에서 그후 사진관을 차렸다. 그러나 그것도 서너 달만에 다 털어먹고 부산에 내려와 백화점 점원 노릇을 했다. 이것이 청마의 20대 모습이다.
30대 시절 청마는 만주 등지로 방황하게 되는데 거기서 그는 외아들 '일향(日向)'을 잃게 된다.
얼어붙은 땅에 외아들의 시신을 파묻고 마음이 여린 청마는 종래 그 충격을 극복하지 못한다.
사람도 나도 접어주지 않으려는 이 自虐의 길에
내 열번 敗亡의 人生을 버려도 좋으련만
아아 이 悔悟의 앓음을 어디에 號泣할 곳 없어.
[황야에 와서]라는 시의 한 구절이다.
만주 연수현에서 농장 관리인 노릇을 6년간 하다가 청마는 해방을 맞아 40대의 나이로 귀국하게 되고 그때부터 문화 활동과 교육자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청마의 저항성이 가장 돋보일 때가 자유당 말기 정치적 부정 부패가 극에 달했을 때였다. 타고난 반골(反骨) 기질이 3.15 부정선거를 도저히 묵과하지 못한다.
그 환도를 찾아 갈라
비수를 찾아 갈라
식칼마저 모조리 시퍼렇게 내다 갈라
그리하여 너희들 마침내 이같이
기갈들려 미치게 한 者를 찾아
손에 손에 그 시퍼런 날들을 들고 게사니같이 덤벼
남 나의 어느 모가지든 닥치는대로 컥컥 찔러….
청마가 얼마나 통분 격분했으면 이런 살기 등등한 詩를 썼을까. 그는 그때 여기저기 신문 잡지에 정치 부패를 저주, 성토하는 시를 발표했다. 그 시절이 바로 청마의 경주(慶州) 시절이다.
55년부터 59년까지 그는 경주중고등학교 교장으로 있었고 그 기간동안 그는 '나는 시인이 아니다'면서 자유당 정치와 그 불의를 단죄하는 투사의 칼날을 휘둘렀다. 59년 9월 10일 그는 강요에 의해서 교장직을 물러나게 되고 그후 2년간 심한 신경통을 앓으며 낭인 생활을 하게 된다. 그 기간동안 그는 대구매일신문과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에 정치권을 질타하는 시를 계속 발표했다. 그 시들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이다.
진실로 참되고 옳음이
죽어지고 숨어야 하는 이 계절엔
나의 뜨거운 노래는
여기 먼 땅에 깊이 묻으리
아아 나의 이름은 나의 노래
목숨보다 귀하고 높은 것
마침내 비굴한 목숨은
눈을 에이고 땅바닥 옥에
무쇠연자를 돌릴지라도
나의 노래는 비도(非道)를 치레하기에 앗기지는 않으리
들어보라
저 거짓의 거리에서 물결쳐 오는
뭇 구호와 빈 찬양의 헛된 울림을
모두가 영혼을 팔아 예복을 입고
소리 맞춰 목청 뽑을지라도
여기 진실은 고독히
뜨거운 노래를 땅에 묻는다. ― 1960년 3월 13일 '동아일보'
이 시가 나온지 1개월 6일만에 4.19가 일어났고 그가 그 동안 발표한 시편들을 묶은 시집들이 다투어 나왔다. 61년 5월 청마는 마침내 경주여자중고등학교 교장이 되어서 그리워하던 경주 땅으로 돌아오게 된다.
학생들을 선동한다는 '죄목'으로 직장에서 쫓겨난 청마는 바로 그 '덕목'으로 높은 추앙을 받게 되고 그후 문단에서나 교육계에서 크게 기림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투사'의 일을 떠나 곧 '詩人'의 자리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