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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8 편
아담 시절 이후의 보라 인종
(The Violet Race After the Days of Adam)
. 네바돈의 한 천사장
. 1934년
78:0.1 둘째 에덴은 거의 3만 년 동안 문명의 요람이었다. 이곳 메소포타미아에서 아담 종족들은 그들의 자손을 땅 끝까지 보내며 버텼고, 후일에는 놋과 산긱 부족들과 합쳐져 안드 종족으로 알려졌다. 이 지역에서 역사적인 시대의 삶을 시작했고, 또한 유란시아에서 문화적 진보를 아주 엄청나게 가속한 남녀들이 다른 곳으로 퍼져 나갔다.
이 논문은 기원전 약 35,000년에 아담의 실패 직후부터 시작하여 기원전 약 15,000년경의 놋 후예들과 산긱 부족들과의 혼합을 거쳐, 안드 민족이 형성되기까지 그리고 B.C. 약 2,000년경에 보라 종족이 메소포타미아의 고향으로부터 마지막으로 사라질 때까지의 그 행성 역사를 묘사하고 있다.
1. 종족과 문화의 분산 (Racial and Cultural Distribution)
78:1.1 아담이 도착했을 때 종족들의 지성과 도덕은 낮은 수준에 있었어도, 신체의 진화는 칼리가스티아의 반란으로 생긴 긴급 사태에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고 진행되었다. 아담이 이 사업의 불완전한 실패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종족들의 생물학적 지위에 기여한 것은 유란시아 사람들을 엄청나게 증진시켰다.
또한 아담과 이브는 인류의 사회적, 도덕적, 그리고 지적 진보의 가치 있는 것에 많은 기여를 했다; 그들 자손의 존재로 유란시아의 문명은 엄청나게 빠르게 발전했다. 그러나 35,000년 전에, 세계 전체에 문화가 거의 없었다. 문명의 어떤 중심들이 여기저기 존재했지만, 유란시아의 대부분은 문화가 없는 야만 속에 빠져 있었다. 종족과 문화의 분산은 다음과 같다:
1. 보라 인종―아담 자손들과 아담손 자손들. 아담 문화권의 주요한 중심은 둘째 동산에 있었고, 여기는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의 삼각 지역에 놓여 있었다. 이 지역은 정말로 서양과 인도 문명의 요람이었다. 보라 인종의 2차 중심, 곧 북쪽 중심은 아담손 사람들의 본부였고, 이것은 코펫 산맥 가까이 카스피 바다의 남쪽 해안의 동쪽에 놓여 있었다. 이 두 중심으로부터 문화와 생명질이 주변 지역들로 퍼져 나갔고, 이것은 오래지 않아 모든 종족에게 즉각적으로 활기를 띠게 하였다.
2. 수메르 이전 사람들과 놋의 기타 자손들. 메소포타미아에는 또한 강들의 입구 가까이에, 달라마시아 시절의 고대 문화 잔재들이 남아 있었다. 수천 년이 지나면서, 이 무리는 북쪽에 있는 아담 종족과 속속들이 섞였지만, 그들은 놋 종족의 전통을 결코 완전히 잃어버리지 않았다. 동부 지중해 연안 지역에 정착한 다양한 기타 놋 종족 집단은 대체로 나중에 확장하는 보라 인종에 의해 흡수되었다.
3. 안돈 사람들은 아담손 본부의 북쪽과 동쪽에 어지간히 대표적인 대여섯 개의 촌락들을 갖고 있었다. 그들도 또한 투르키스탄에 두루 흩어졌고, 한편 그들의 고립된 집단들이 유라시아에 두루, 특히 산악 지역에서 명맥을 이어 나갔다. 이 원주민들은 아이스랜드와 그린랜드와 함께, 유라시아 대륙의 북쪽 땅을 아직도 지키고 있었지만, 유럽의 평야에서 청인들에 의해, 그리고 더 멀리 아시아의 강 유역에서는 확장하는 황인종에 의해 쫓겨난 지 오래되었다.
4. 홍인은 두 아메리카를 장악했고, 아담이 오기 5만 년쯤 앞서 아시아에서 밀려났다.
5. 황인종. 중국 종족들은 동부 아시아를 단단히 장악하고 있었다. 그들의 가장 진보된 촌락들은 현대 중국의 북서쪽에, 티벳과 인접한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6. 청인종. 청인들은 유럽 전역에 걸쳐 흩어졌으나, 그들 문화의 상급 중심들은 지중해 분지에, 당시에 기름졌던 유역과 북서 유럽에 자리잡았다. 네안데르탈인을 흡수한 것은 청인의 문화를 크게 더디게 만들었지만, 그밖에 청인은 유라시아의 모든 진화 민족 가운데에서 가장 적극적이고, 모험심 있고 탐험을 좋아했다.
7. 드라비다 이전의 인도. 인도에서 있었던 인종들 간의 복잡한 혼합 (지구상의 모든 종족들을 포함하였는데, 특히 녹인종, 주황색 인종, 흑인종)은 바깥에 놓인 지역들보다 조금 높은 문화를 유지했다.
8. 사하라 문명. 남인종의 우수한 요소들을 지닌 사람들은, 지금의 거대한 사하라 사막 지역에서 가장 진보된 촌락들을 가지고 있었다. 이 남색 집단, 곧 흑인 집단은 사라진 주황 인종과 녹인종의 혈통을 가장 많이 지녔다.
9. 지중해 분지. 인도 바깥에서 가장 많이 섞인 종족은 지금 지중해 분지가 있는 자리를 차지했다. 여기 북쪽에서 온 청인과 남쪽에서 온 사하라 사람들이 동쪽에서 온 놋 종족과 아담 종족들을 만나고, 함께 섞였다.
78:1.12 이것이 보라 인종이 크게 비로소 팽창하기 전, 약 25,000년 전 세상의 그림이었다. 미래 문명의 희망은 메소포타미아의 강들 사이에 위치한 둘째 동산에 놓여 있었다. 여기 남서 아시아에, 큰 문명의 잠재성, 곧 달라마시아 시절과 에덴의 시대로부터 건져 낸 아이디어와 이상을 세계에 퍼뜨릴 가능성이 존재하였다.
아담과 이브는, 제한되기는 했어도 유력한 후손을 남겼고, 유란시아에서 하늘의 관찰자들은 실수한 물질 아들과 딸의 이 후손들이 어떻게 행동할지 초초하게 기다렸다.
2. 둘째 동산에 있던 아담 사람들 (The Adamites in the Second Garden)
78:2.1 몇천 년 동안 아담의 아들들은 메소포타미아의 강을 따라서 경작하였고, 남쪽에서 관개하고 치수하는 문제를 풀고, 북쪽에서는 방어를 완벽하게 만들며, 첫 에덴에서 누렸던 영화로운 전통을 간직하려고 애썼다.
둘째 동산을 지휘하는 데서 나타난 영웅심은 유란시아 역사에서 놀랍고 영감을 주는 서사 중 하나이다. 이 눈부신 사람들은 아담 사명의 목적을 결코 완전히 잊지 않았고, 따라서 둘러싼 열등한 부족들의 영향을 용감하게 물리치면서, 한편 땅에 있는 종족들에게 밀사로서 자신들의 가장 좋은 아들과 딸들을 기꺼이 보냈다. 때때로 이러한 확장이 고향의 문화에 손상을 입혔지만, 언제나 이 우수한 민족들은 스스로를 재건할 수 있었다.
아담 사람의 문명, 사회, 문화적 지위는 유란시아의 진화 민족들의 일반 수준을 훨씬 뛰어 넘었다. 반과 아마돈, 그리고 아담손 사람들의 오래된 정착지 중에서만 어느정도 비교 가능한 문명이 있었다. 그러나 둘째 에덴의 문명은 진화되어온 문명이 아니라 인위적인 구조였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진화 수준에 이를 때까지 퇴보할 운명에 처해있었다.
아담은 지적, 영적인 위대한 문화를 뒤에 남겼지만 그 문화는 기계문명 면에서는 진보되지 않았는데, 이는 모든 문명이 발명의 열매를 보장하려면, 쓸 수 있는 자연 자원, 타고난 재능, 충분한 여가에 제한을 받기 때문이다. 보라 인종의 문명은 아담의 존재와 첫째 에덴의 전통에 달려 있었다. 아담이 죽은 뒤에, 그리고 지나가는 수천 년을 거쳐서 이 전통이 흐릿해짐에 따라서, 아담 사람들의 문화 수준은 둘러싼 민족들의 상태, 그리고 보라 인종의 자연스럽게 진화하는 문화적 능력과 서로 균형되는 상태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저하되었다.
그러나 아담 종족은 B.C 19,000년에 450만에 이르는 진정한 민족이었고, 이미 주변 사람들에게 수백만 명의 자손을 쏟아부었다.
3. 아담 사람의 초기 팽창 (Early Expansions of the Adamites)
78:3.1 보라 인종은 수천 년 동안 에덴의 평화로운 전통을 간직하였는데, 이것이 그들이 영토를 정복하는 데 오래 지체한 것을 설명한다. 인구의 압력에 고통을 받을 때, 영토를 더 확보하려고 전쟁을 일으키는 대신에, 그들은 잉여 거주자들을 다른 종족들에게 선생으로 보냈다. 옛 시대에 있었던 이 이민의 문화적 효과는 오래 가지 않았지만, 아담 사람인 선생과 무역가와 탐험가들을 흡수한 것은 둘러싼 민족들에게 생물학적으로 생기를 불어넣었다.
어떤 아담 자손들은 일찍부터 서쪽으로 나일강 유역으로 여행했다; 일부는 동쪽 아시아로 파고들어 갔으나, 이들은 소수에 불과하였다. 후일에 있었던 대규모의 이동은 광범위하게 북쪽으로, 그리고 거기서부터 다시 서쪽으로 향했다. 그 대규모 이동은 주로 점차적으로 이루어졌지만, 끊임없이 북쪽을 향한 진격이었고, 반이 넘는 무리가 북쪽으로, 다음에는 서쪽으로 카스피 바다의 주위를 돌아서 유럽으로 들어갔다.
약 2만 5천 년 전에 아담 사람들 가운데 더욱 순수한 요인들을 가진 자들의 다수는 북쪽 길을 한창 향했다. 북쪽으로 침투함에 따라서 그들은 아담의 모습이 더욱 줄어들었고, 이것은 투르키스탄을 차지했을 때가 되어, 다른 민족들, 특히 놋 사람들과 속속들이 뒤섞이기까지 계속되었다. 순수 핏줄을 가진 보라 인종은 거의 아무도 유럽이나 아시아로 깊이 파고들지 못했다.
B.C. 약 30,000년부터 10,000년까지, 새로운 세대를 여는 종족 혼합이 서남아시아 전역에 걸쳐서 일어나고 있었다. 투르키스탄의 고지에서 거주하던 자들은 씩씩하고 활력 있는 민족이었다. 인도의 북서쪽에는 반 시절의 문화가 많이 지속하였다. 이 촌락들에서 더 북쪽으로는 초기 안돈 자손의 최고 문화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다. 그리고 문화와 특성을 가진 우수한 이 두 종족은 북쪽으로 움직이는 아담 사람들에게 흡수되었다. 이 혼합은 많은 새 아이디어를 채택하도록 이끌었고, 문명의 진보를 수월하게 하고, 예술과 과학과 사회 문화의 모든 국면을 크게 앞서게 하였다.
B.C. 약 15,000년에, 아담 사람의 초기 이동이 끝나면서 이 세상의 어느 곳보다도 더 많은 아담 후손들이 유럽과 아시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으며, 심지어는 메소포타미아보다도 더 많았다. 유럽의 청인종들은 아담의 후손들에 의해 크게 혼합되었다. 놋 종족, 안돈 종족, 홍인 및 황인 산긱 종족이 섞인 아담 사람들의 저장고라 할 수 있는 큰 무리들이 이제 러시아와 투르키스탄이라고 부르는 땅의 남쪽 지대를 두루 차지했다. 유럽의 남부와 지중해의 가장자리는 아담의 핏줄이 아주 조금 섞인, 안돈 및 산긱족들―주황인, 녹색인, 남색인―이 차지하였다. 소아시아와 중부 및 동부 유럽의 땅은 대체로 안돈 종족인 부족들이 지키고 있었다.
78:3.6 섞인 유색 인종은 이 무렵에 메소포타미아로부터 도래한 자들로 말미암아 크게 강화된 어떤 혼혈의 유색 인종은, 이집트에서 세력을 키웠으며.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서 사라지고 있는 문화를 이어받을 준비를 갖추었다. 흑인 민족들은 아프리카에서 더 남쪽으로 움직이고 있었고, 홍인종처럼 거의 고립되었다.
사하라 문명은 가뭄에, 지중해 분지의 문명은 홍수에 시달렸다. 아직까지도 청인종은 진보된 문화를 개발하지 못했다. 안돈 종족은 아직도 북극과 중앙아시아 지역에 흩어졌다. 녹인종과 오렌지 인종은 그 자체로서 멸절되었다. 남인종은 아프리카에서 남쪽으로 움직이고 있었고, 느리기는 하지만 오래 끌면서 종족의 질이 낮아지기 시작했다.
인도에 있는 민족들은 진보되지 않는 문명 속에서 정체해 있었다; 황인종은 중앙아시아에서 자기가 차지한 것을 공고히 만들고 있었다. 갈색인종은 근처의 태평양 섬들에서 아직 문명을 시작하지 않았다.
이 종족의 분산은, 광범위한 기후변화들과 결합하여, 유란시아 문명의 안드 시대를 개시하는 세계무대를 준비하였다. 이 초기의 이동은 B.C. 25,000년에서 15,000년까지, 1만 년의 기간에 걸쳐 이루어졌다. 후일의 이동, 곧 안드 사람들의 이동은 B.C. 15,000년부터 6000년까지 연장되었다.
아담 사람들의 이 초기 물결이 유라시아를 지나가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 그들의 문화는 대체로 이동하면서 사라졌다. 오로지 후일의 안드 사람들이 메소포타미아로부터 아무리 먼 거리에서도 에덴의 문화를 간직할 만큼 충분히 빨리 움직였다.
4. 안드 종족 (The Andites)
78:4.1 안드 종족들은 순수한 핏줄의 보라 인종과 놋 사람 및 진화 민족들이 1차적으로 섞인 것이다. 무릇 안드 종족은 현대 민족들보다 아담의 피를 훨씬 높은 비율로 가졌다고 생각해야 한다. 주로, 안드 종족이라는 용어는 종족의 유산이 8분의 1에서 6분의 1까지 보라 종족들을 부르는 데 쓰인다. 현대의 유란시아 사람들은, 북쪽의 백인조차 이 비율보다 훨씬 적게 아담의 피를 지닌다.
가장 초기의 안드 종족들은 25,000년도 더 이전에 메소포타미아에 인접한 지역에서 시작되었고, 아담 종족과 놋 종족의 혼합으로 이루어졌다. 둘째 동산은 계속 줄어들고 있는 보라색 혈통의 동심원에 둘러싸였고, 안드 종족이 태어났던 곳은 이렇게 종족들이 합쳐져서 섞이는 용광로의 가장자리에서였다. 나중에, 이동하는 아담 종족들과 놋 종족들이 당시에 기름진 투르키스탄 지역으로 들어갔을 때, 그들은 곧 우수한 거주자들과 섞였고, 이렇게 생긴 종족의 혼합은 안드 종류를 북쪽으로 뻗게 하였다.
안드 종족들은 순수 핏줄의 보라 인종이 살던 시절 이후로 유란시아에서 나타난 혈통들 중에서 가장 다재다능한 인간 혈통이었다. 그들은 아담 종족과 놋 종족의 살아남은 잔재에서 가장 높은 종류의 대부분, 나중에는 황인, 청인, 녹인 가운데서 가장 좋은 핏줄을 얼마큼 포함했다.
이 초기 안드 종족들은 아리아인이 아니었고, 아리아인 이전의 사람들이었다. 백인이 아니었다; 백인이 되기 이전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서양 민족도 동양 민족도 아니었다. 그러나 여러 나라 말이 섞인, 이른바 백인종들의 혼혈에게 코카서스 인종이라 부르는 일반화된 동질성을 주는 것은 안드 종족의 유산이다.
보라 인종의 좀 더 순수한 핏줄은 평화를 추구하는 아담의 전통을 간직하였는데, 그것은 초기의 인종 이동이 어떻게 하여 평화로운 이주의 환경 속에서 이루어졌는지를 설명해 준다. 그러나 아담 자손들이 그 당시에 가장 호전적인 놋 후예 혈통들과 결합하게 되자, 그 안드 후손들은, 그 시절과 시대에 유란시아에서 있었던 가장 솜씨 있고 능숙한 군인들이었다. 그때부터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의 움직임은 갈수록 더 군사적 특징을 띠었고, 실제의 정복과 더 비슷해졌다.
78:4.6 이 안드 종족들은 모험을 좋아했고 돌아다니는 성향을 가졌다. 산긱이나 안돈 사람의 혈통을 더하면 그들은 안정되려는 경향을 보였다. 그렇다 해도 후일에 그 자손들은 지구를 배로 한 바퀴 돌아서 멀리 있는 마지막 대륙을 발견할 때까지, 결코 멈추지 않았다.
5. 안드 종족의 이동 (The Andite Migrations)
78:5.1 2만 년 동안 둘째 동산의 문화는 지속되었으나 B.C. 약 15,000년까지 꾸준한 쇠퇴를 겪었고, 이때 셋 사람의 사제직의 부활과 아모삿의 지도력이 밝은 시대를 열었다. 나중에 유라시아로 번진 문명화의 엄청난 물결은 에덴동산의 큰 문예 부흥을 즉시 뒤따랐는데, 이 문명의 부흥은 아담 종족들이 자기들을 둘러싼 주변의 혼합된 놋 종족들과 광범위하게 연합하여 안드 종족들을 형성한 결과로서 생긴 것이다.
이 안드 종족들은 유라시아와 북아프리카 전역에 새로운 발전을 불러일으켰다. 메소포타미아로부터 신장을 통해서 안드 종족의 문화가 지배했고, 유럽을 향한 끊임없는 이동은 메소포타미아로부터 새로 이주하는 사람들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혼합된 아담의 후예들이 최종적으로 이주하기 시작할 무렵까지는, 안드 종족을 메소포타미아 본토에 있는 종족이라고 말하는 것은 도저히 거의 타당하지 않다. 이때가 되어서는 둘째 동산에 있는 종족들조차 아주 많이 섞여서 그들은 이제 더이상 아담 종족으로 간주될 수 없었다.
투르키스탄의 문명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온 새 사람들, 특히 나중에 온 말을 탄 안드 종족들에 의해 끊임없이 부활되고 새로워졌다. 이른바 아리안족의 모국어는 투르키스탄의 고지에서 형성되는 과정에 있었다. 그것은 그 지역의 안돈 사람 방언이 아담손 사람과 후기 안드 사람들의 언어와 섞인 것이다. 많은 현대 언어가 이 중앙아시아 부족들의 초기 언어로부터 생겨났는데, 이들은 유럽과 인도, 그리고 메소포타미아 평야의 위쪽 지대를 정복한 부족들이다. 이 고대 언어는 소위 아리안 언어와 유사한 언어들을 서양에 주었다.
B.C. 12,000년이 되어서, 세상에서 안드 혈통의 4분의 3은 유럽 북부와 동부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메소포타미아로부터 나중에 마지막 대이동이 일어났을 때, 이 마지막 이주 물결의 65%는 유럽으로 들어갔다.
안드 종족들은 유럽뿐 아니라, 중국의 북부와 인도까지 이주했고, 한편 많은 무리가 선교사, 선생, 상인으로서 땅끝까지 파고들었다. 그들은 사하라의 산긱 종족들의 북쪽 집단들에게 상당히 기여하였다. 그러나 오직 몇몇 선생과 상인들이 아프리카에서 나일강 상류보다 더 남쪽으로 파고들었다. 나중에, 혼합된 안드 종족과 이집트인들이 적도 훨씬 밑으로 아프리카의 동부와 서부 해안 밑으로 따라갔지만, 마다가스카르에 이르지는 않았다.
78:5.6 이 안드 사람들은 인도에서 이른바 드라비다인, 후일에는 아리아인 정복자였다; 그리고 중앙아시아에서 그들의 존재는 투란 족의 조상을 크게 개선하였다. 이 종족에서 많은 사람이 신장과 티벳을 경유해서 중국으로 여행했고, 후일의 중국인 핏줄에 바람직한 특성들을 보탰다. 때때로 작은 무리들이 일본, 타이완, 동인도 제도, 중국 남부로 들어갔다. 하지만 거의 아무도 해안선의 길로 중국 남부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이 종족 132명은 일본으로부터 작은 배들의 떼를 지어 출발하여, 결국에는 남아메리카에 다다랐고, 안데스의 토착민들과 서로 결혼하여 후대에 잉카 제국을 통치했던 자들의 조상이 되었다. 그들은 쉬운 단계를 거쳐 태평양을 건넜고, 가는 길에 발견한 많은 섬에서 머물렀다. 폴리네시아 집단의 섬들은 지금보다 더 많고 컸는데, 이 안드 종족의 뱃사람들은 그들을 따라간 어느 정도의 사람들과 함께, 이동 중에 토착 집단들을 생물학적으로 변화시켰다. 안드 사람이 침투한 결과로서 지금은 물 밑에 가라앉은 이 여러 지방에서, 번성하는 문명의 중심이 많이 생겨났다. 이스터 섬은 오랫동안 이 사라진 집단 중 하나의 종교 및 행정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오래 전에 태평양을 항해한 안드 종족들 가운데 132명을 빼고, 아무도 결코 두 아메리카의 본토에 이르지 못했다.
안드 종족들이 이동하면서 행한 정복은 그들이 마지막으로 분산될 때까지, B.C. 8000년에서 6000년까지 이어졌다. 메소포타미아로부터 쏟아져 나옴에 따라서 그들은 고향의 생물학적 저장을 계속 써 버렸고, 한편 둘러싼 민족들을 두드러지게 강화하였다. 그들이 여행했던 모든 나라에서, 그들은 유머, 예술, 모험, 음악, 제조업에 기여했다. 그들은 동물을 능숙하게 길들이는 가축 사육자이자 전문적인 농부였다. 얼마 동안, 적어도 그들의 존재는 보통, 더 오래된 종족들의 종교 관념과 도덕적 풍습을 개량하였다. 그래서 메소포타미아의 문화는 조용히 유럽, 인도, 중국, 북아프리카, 태평양 군도(群島)에 퍼졌다.
6. 안드 종족의 마지막 분산 (The Last Andite Dispersions)
78:6.1 메소포타미아로부터 퍼져 나가는 마지막 세 번의 물결들이 B.C. 8,000년부터 6,000년 사이에 있었다. 세 차례의 이 문화 대이동 물결은, 동쪽으로는 고지대 부족들의 압력에 의해서 그리고 서쪽으로는 평야지대 주민들의 공격에 의해서 메소포타미아로부터 밖으로 밀려났다. 유프라테스강 골짜기와 인접한 영토의 거주자들은 마지막 탈출할 때 여러 방향으로 흩어졌다:
65%는 카스피해의 항로를 따라서 유럽으로 들어가서 새롭게 등장하는 백인종들을 (청인들과 초기 안드 사람들의 혼혈족들) 정복하고 그들과 섞였다.
큰 무리의 셋 사제들을 포함하여, 10%는 동쪽으로, 엘람의 고지를 거쳐서 이란의 고원과 투르키스탄으로 옮겨 갔다. 그들의 후손 가운데 다수는 나중에, 북쪽 지역으로부터 온 아리아인 형제들과 함께 인도로 몰려갔다.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의 10%는 북쪽으로 여행하여 동쪽으로 돌아서 신장에 들어갔고, 거기서 그들은 안드-황인 거주자들과 함께 섞였다. 이 종족 연합에서 나온 유능한 자손의 대다수는 황인종의 북쪽 가지를 즉시 개선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메소포타미아를 떠난 이 안드 종족의 10%는 아라비아를 가로질러 가서, 이집트로 들어갔다.
78:6.6 열등한 이웃 부족 사람들과 서로 결혼하지 않고 자신들을 지키며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강 입구 근처, 물가 지역에서 아주 우수한 문화를 가졌던 안드 종족의 5%는 집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이 집단은 많은 우수한 놋과 아담 종족의 핏줄이 살아남은 것이다.
비록 주변의 산긱 종족들, 그리고 소아시아의 안돈 자손들과 널리 섞인 그들의 후손들이, 훨씬 후일에 북쪽과 동쪽을 침공한 자들과 그곳에서 대항하여 전투를 벌이기는 하였지만, 안드 사람들은 B.C. 6000년이 되어 이 지역을 거의 완전히 비웠다.
두 번째 동산의 문화 시대는, 주변에 있는 열등한 혈통의 사람들이 점점 더 침투해 들어옴으로써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다. 문명은 서쪽으로 나일강 지역과 지중해의 섬들로 옮겨 갔으며,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원천이 퇴락된 후에도 오랫동안, 서쪽의 지역에서 계속하여 번성하고 발전하였다. 그리고 열등한 민족들이 억제되지 않고 유입된 현실은, 나머지 유능한 혈통들마저 몰아냈었던 북쪽의 그 야만인들에게 후일 메소포타미아 전체를 정복하게 하는 길을 열어주었다. 문화를 가진 잔존세력은 무식하면서도 거칠고 천한 이런 침입자들의 존재에 대해 후일에도 여전히 분개했었다.
7. 메소포타미아에서 터진 홍수 (The Floods in Mesopotamia)
78:7.1 강가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특정한 계절에 그 둑들을 넘쳐흐르는 강에 익숙해 있었다. 이러한 주기적 홍수들은 그들이 사는 지역에서 연중행사로 일어나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북쪽에서 지질학상의 점진적인 변화의 결과로서 새로운 위험이 메소포타미아 유역을 위협했다.
첫 번째 에덴동산이 바닷물 속으로 가라앉은 후에, 수천 년 동안 지중해의 동부 해안가 근처에 있는 산들과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북서쪽과 북동쪽의 산들은 계속해서 솟아올랐다. 고원지대의 이러한 상승 현상은 B.C. 약 5000년경에 크게 가속화되었고, 이것은 북쪽에 있는 산들 위에 점점 더 엄청나게 쌓이는 눈과 함께 전체 유프라테스강 주변 계곡에 매해 봄마다 전례가 없었던 홍수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봄에 생기는 이 홍수는 더욱 악화되어서, 결국 강 지역에 거주하던 자들은 동쪽의 고지대로 밀려났다. 거의 1000년 동안 수십개의 도시들이 이런 광범위한 강물의 범람 사태 때문에 실질적으로 사람들이 떠나버렸다.
거의 5000년이 지난 후에, 바빌로니아에서 포로 생활을 하던 히브리인 사제들이 유대 민족을 아담까지 거슬러 추적하려고 애쓸 때, 그 이야기를 꿰어맞추는 일에서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들 중의 하나가 그러한 수고를 포기하면서, 노아의 홍수 때에 그 사악함으로 말미암아 온 세계가 홍수로 잠긴 것으로 만들 생각이 떠올랐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의 조상을 살아남은 노아의 세 아들들 중의 하나로 연결시키는 보다 확실한 입장을 취하게 되었던 것이다.
물이 지구의 표면 전체를 덮은 때에 관한 전설은 거의 보편적이다. 많은 종족이 지난 시대 어느 때인가 세계적인 홍수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지니고 있다. 성경에 있는 노아, 방주, 홍수에 관한 이야기는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있던 동안에 히브리인 사제들이 창안한 것이다. 유란시아에 생명이 정착한 뒤로 세계적인 홍수가 한 번도 없었다. 지구의 표면이 완전히 물로 덮었던 유일한 시기는, 육지가 나타나기 전인 시생대 동안이었다.
그러나 노아는 실제로 살았던 사람이다; 그는 에렉 가까이 강가의 촌락 아람에서 포도주 제조자였다. 그는 해마다 강물이 불어나던 날들을 기록했다. 그는 강 유역을 오르내리면서, 모든 집을 나무로, 배 모양으로 지으라고, 홍수 철이 다가올 때 밤마다 가족의 동물을 갑판에 올려놓으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많은 비웃음을 샀다. 그는 매년 이웃 강 정착촌에 가서 호우가 날 것이라고 경고하곤 했다. 마침내 연중행사로 발생되는 홍수 철이 시작되었고, 유별나게 심한 비가 폭포수같이 쏟아져 강물이 크게 불어 남으로써 모든 마을 전체가 물에 잠기게 되었다; 오직 노아와 그의 직계 가족만이 집으로 쓰는 배에서 목숨을 건졌다.
78:7.6 이런 홍수들로 인하여 안드 종족의 문명이 완벽하게 붕괴되었다. 이 대홍수 기간이 끝나면서, 둘째 동산은 사라져 버렸다. 오직 남쪽 지역에서, 그리고 수메르인들 사이에서, 옛 영광의 어떤 자취라도 남아 있을 뿐이었다.
가장 오래된 문명들 중 하나인 이 두 번째 동산의 잔재들은 메소포타미아의 이 지역에서, 그리고 북동쪽과 북서쪽에서 발견될 것이다. 그러나 달라마시아 시절의 더욱 오래된 흔적은 페르시아만의 바다 밑에 존재하고, 첫 에덴은 지중해의 동쪽 끝, 물 밑에 잠겨 있다.
8. 수메르인―마지막 안드 종족 (The Sumerians―Last of the Andites)
78:8.1 안드 종족들의 마지막 분산이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생물학적 중심 세력이 사라지게 되었을 때. 우수한 이 인종 중에서 하나의 작은 소수 집단이 두 강 입구 가까이 있던 그들의 고향에 남아 있었다. 이들은 수메르인이었고, B.C. 6000년이 되자 그들의 줄기는 대체로 안드 종족이 되었다. 하지만 그 문화의 성격은 좀 더 놋 종족에 가까웠으며, 그들은 달라마시아의 고대 전통에 집착하였다. 그런데도 해안 지역의 이 수메르인은 메소포타미아에서 마지막 안드 종족들이었다. 그러나 메소포타미아의 종족들은, 이 시대의 무덤에서 발견되는 두개골 종류에서 증명되는 바와 같이, 이미 이 늦은 시점에 속속들이 섞였다.
수사가 아주 크게 번성한 것은 이 홍수 시대였다. 처음에 낮은 도시가 물에 잠기면서 높은 도시가 그 아래 도시를 대신하여 그 시대의 특이한 예술 공예품의 본거지가 되었다. 이후 홍수가 점차적으로 줄어들면서 우르는 도자기 산업의 중심이 되었다. 약 7000년 전에 우르는 페르시아만에 있었고, 그 뒤로 강의 퇴적물은 땅을 현재의 한계까지 쌓아 올렸다. 이 촌락들은 치수 작업이 개선되고 강들의 입구가 넓어졌기 때문에, 홍수로부터 피해를 덜 보았다.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강 유역에서 곡식을 심던 평화로운 사람들은 투르키스탄과 이란 고원에 있던 미개인들의 침공으로 시달린 지 오래되었다. 그러나 고지의 목초지에서 가뭄이 늘어났기 때문에, 이제 공동으로 유프라테스강 유역 침공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 침공은 더군다나 심각했는데, 이는 둘러싸고 있는 이들 목동들과 사냥꾼들이 많은 숫자의 길들여진 말들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말들의 소유는 남쪽에 있는 부유한 이웃에 대하여 그들에게 엄청난 군사적 이점을 주었다. 짧은 기간에 그들은 온 메소포타미아를 휩쓸었고, 유럽, 서아시아, 북아프리카 모두에 퍼진, 마지막 문화의 물결을 내몰았다.
메소포타미아를 정복한 이 사람들은 그들의 계층 안에, 아담손 핏줄의 어느 정도를 포함하여 투르키스탄의 혼합된 북부 종족 중 더 나은 안드 종족의 혈통들을 많이 지니고 있었다. 덜 진보 되었지만 더 활력 있는, 북에서 온 이 부족들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잔재를 재빨리, 기꺼이 흡수하였으며, 마침내는 역사 연대기의 처음 시점에 유프라테스강 유역에서 발견되는 그 혼합된 민족들로 곧 발전되었다. 그들은 강 유역에 살던 부족들의 예술과 수메르인들의 문화 가운데 많은 것을 받아들이면서, 사라지고 있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많은 국면을 재빨리 되살렸다. 그들은 세 번째 바벨 탑을 세우려고 하기까지 애썼고, 나중에 그 용어(바빌로니아)를 그들 국가의 이름으로 채택하였다.
말을 탄 이 야만인들이 북동쪽으로부터 침입하여 유프라테스강 계곡 전체를 차지하였을 때, 그들은 페르시아 만에서 강 입구 근처에 거주하던 나머지 안드 종족은 정복하지 않았다. 이 수메르인들은 우수한 지능, 더 나은 무기, 그리고 그들이 지은 광범위한 군사적 운하(運河) 체계 때문에 자신들을 방어할 수 있었다. 이 운하는 물웅덩이들을 서로 연결하는 방식을 사용함으로써 부수적으로 관개 시설로도 사용되었다. 그들은 동일한 집단 종교를 가졌기 때문에 하나로 뭉쳐진 민족이었다. 그리하여 북서쪽에 있는 이웃들이 고립된 도시 국가들로 나뉘어 고립된 시기 이후에도 오랫동안 이렇게 그들은 종족과 국가의 통일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 도시 집단 중에서 어느 것도 뭉쳐진 수메르인들을 정복할 수 없었다.
78:8.6 그리고 북쪽에서 온 침략자들은 평화를 사랑하는 이 수메르인들을 선생으로 그리고 행정가로 신뢰하고 존중하였다. 그들은 북쪽에 있는 모든 종족들과 서쪽으로는 이집트로부터 동쪽으로는 인도에 이르는 모든 종족들에 의해서 매우 존경을 받았으며 예술과 산업의 선생으로, 상업에 대한 지도자로, 그리고 시민 정부의 통치자로 추대되었다.
초기의 수메르인 연방 체제가 무너진 후에, 후대의 도시-국가들은 셋 자손 사제들의 후예들 중에서 그들의 종교적 믿음으로부터 이탈한 자들에 의해서 지배되었다. 이 사제들이 이웃 도시들을 정복하였을 때에는 스스로를 왕이라 칭하였다. 신들에 대한 경쟁심으로 인해, 후일 도시의 왕들은, 사르곤 시절 이전에까지, 강력한 연방을 형성하지 못했다. 각 도시는 그 도시의 신이 모든 다른 신들 보다 우수하다고 믿었고, 따라서 그들은 공통된 지도자에게 복종하려 하지 않았다.
도시 성직자들에 의해 미약하게나마 통치되던 이 긴 기간은 키시의 사제였던 사르곤에 의해서 막을 내리게 되었는데, 그는 스스로를 왕이라고 선포하였으며, 메소포타미아 지역 전체와 그에 인접한 땅들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 시절의 도시 국가들, 곧 각 도시가 자기만의 신과 자기만의 의식 관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성직자가 다스리고 성직자에게 짓눌렸던 도시-국가들이 종말을 맞이했다.
이 키시 연방이 깨어진 이후에, 이 강 유역의 도시들 사이에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끊임없는 전쟁의 세월이 오랫동안 뒤를 이었다. 그리고 통치권은 수메르, 아카드, 키시, 에렉, 우르, 수사 사이에서 여러 번 바뀌었다.
78:8.11 B.C. 2500년 무렵에 수메르인들은 북쪽에 있는 수트족(Suites)과 구트족(Guites)들의 손에 큰 패배를 겪었다. 홍수로 생긴 언덕 위에 세운, 수메르의 수도 라가시가 함락되었다. 에렉은 아카드가 무너진 뒤에, 30년 동안 버티었다. 함무라비의 통치가 확립될 때가 되어 수메르인들은 북쪽의 셈 사람들의 계층에 흡수되었고, 메소포타미아의 안드 종족들은 역사의 페이지에서 사라졌다.
B.C. 2500년에서 2000년까지, 대서양에서 태평양에 이르기까지 유목민들이 어지럽게 날뛰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낳은 안돈 족과 안드 종족의 후손들 중에 혼합 부족들인 네르 족들은 카스피 지역 집단의 최종적인 이주를 형성하였다. 미개인들이 메소포타미아에 종지부를 찍으려고 해내지 못한 것을 나중에 기후의 변화가 이룩하였다.
이것이 아담 시절 이후의 보라 인종, 그리고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강 사이에 있던 그들의 고향 운명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들의 고대 문명은, 우수한 민족들이 이주해 나간 것과 열등한 이웃들이 이주해 들어온 것 때문에 마침내 침몰되고 말았다. 그러나 미개한 기병들이 그 유역을 정복하기 오래전에, 동산 문화의 상당 부분이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으로 퍼졌고, 거기서 유란시아의 20세기 문명을 일으킨 효소를 생산하였다.
[네바돈의 한 천사장이 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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