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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다음)
내가 만화라는 장르를 처음 접한때는 국민학교 2학년때다.
학교앞에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형이 소년한국일보를 아침마다 팔고 있었고, 그당시 십환(1원)을 주고 신문을 샀는데 내용이 무척 재미있어서 그 후에는 집에서 정기 구독을 하였다.
신문 앞면에는 코주부 김용환의 세계일주라는 만화가 5cut 정도로 매일 나왔고(지금으로 하면 이원복 교수의 먼나라 이웃나라 같은 내용이었다),우리가 모르던 외국의 문물을 많이 소개했으며, 그후 수호지(그린 사람은 생각이 안나는데 임충,무송,조개,노지심,송강 등 양산박 108人이 등장하였다.),길창덕의 꺼벙이등이 연재되었다.
뒷면에는 미국 만화가의 헨리라는 대머리 소년의 만화가 4cut로 매일 소개되었는데 문화의 차이로 왜 웃어야되는지 몰랐고,이해가 안되는것도 있었다.(그후 한국일보에 블론디나 리더스다이제스트 유머판에서도 같은 어려움을 겪었다.)
뒷면 위에는 40~50 cut의 만화가 연재되었는데 흑두건(작가 박XX),아이반호우(흑기사),투명인간,톰아저씨의 오두막집(엉클톰스캐빈),허클베리핀의 모험,이중인간(지킬박사와 하이드씨),몬테크리스토백작(암굴왕),신데렐라,소공녀,소공자,등을 만화로 읽었는데 그림을 그린사람은 후에 유명 만화가가 된 만화작가들이 학생때 아르바이트로 그린거라 하였다.
코주부 만화 밑에는 12회 동문인 최영의 아버지인 작가 최요안의 연재소설도 가끔 소개되곤 하였다.
그러나 사실 이런 명작만화 보다도 만화가게에 있는 만화가 훨씬 재밌었는데 국민학교3학년때 처음으로 이모네 집에 가서 만화를 보았는데 제목은 사라센의 밀사였고 지금 생각하니 80년대에 KBS에서 미니시리즈로 했던 애련의 밀사(줄베르느 원작)와 비슷한 내용이었다. 그 후 고학년으로 올라가서 산호원작의 라이파이(32권,윤박사,메리앙,녹의여왕,라이파이 등 등장하고 대표적인 공상 과학 만화였다.),박기당의 서유기(손오공),김경언의 의사까불이, 로보트 삐빠, 이종진의 철인28호,임창의 땡이 시리즈 등이 나왔고,추동성(고우영의 고등학교때 가명.본명응로 할 수 없었다함.)의 짱구박사, 신동우,신동원의 진진돌이, 남대문 꼬마(내가 대학교때 학장님이 신동훈교수였는데 이분이 강의할때 그림을 잘 그렸는데 알고보니 이분들과 형제지간이었다.)김종래의 엄마찾아 삼만리,향원의 투견만화,기타 손우성,박기정,박부성등의 많은 작품들이 나왔다.
전쟁이 끝난지 얼마안되고 가난에 굶주렸고, 변변한 오락도 없었던 그 때 만화는 우리들의 가장 큰 오락거리였으며, 공부방이었다. 만화에서 우리는 과학을 배우고(의사까불이,삐빠)과학적인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도 하고(라이파이,철인28호) 고전을 배우고(서유기,수호지등) 외국문학 번안작품을 접하기도 하였다.(김종래의 엄마찾아 삼만리)
우리 보문동에는 여러군데 만화가게가 있었는데 학교문을 나서자마자 우측(창신동쪽)에 있었고, 탑골승방과 최영집 사이에 있었고, 작은절 뒤쪽에도 잠깐 있다가 없어졌다. 동산 및 안세의원쪽에도 있었으며, 고목나무 쪽에도 있었다.
제일 규모가 큰 것은 동부시장 근처 영화당이었다.(참고로 고사지서 근처에는 풍미당이라는 빵집이 있었고, 시장안에는 보문당이라는 도매상 문방구 점도 있었다.90년대 TV에서 우연히 풍미당집 주인이 과거 얘기하는것을 들었고, 그 딸도 동신12라고 한다.)
여기는 5원을 내면 하루종일 만화를 볼 수 있었으며, 만화표를 15장 모으면 흑백TV 시청권을 주었는데 그 당시 유행하던 프로레슬링을 볼 수 있었으며, 역도산, 김일, 장영철,천규덕등의 박치기와 두발당수가 우리에게는 큰 구경거리였다.
그리고 전투,타잔,도망자나 존웨인 주연의 서부영화도 많이 볼 수 있었다. 만화가게에는 최근만화는 고무줄에 끼워전시하였고,오래된 만화는 책꽃이에 권 순서대로 끼어 놓았고, 보는데 가격차이가 있었던것 같다.옆에는 군고구마를 팔기도 하였고, 삼각형 모양의 비닐에 담긴 불량주스도 있었으며, 떡볶이나 오뎅을 팔기도 하였고, 나중에는 (중학교때) 라면땅도 갔다놓았다.
만화를 좋아했던 나는 국민학교때 거의 만화가게에서 살았으며, 중학교 입시전날도 저녁 늦게까지 만화를 보다가 만화가게로 찾아온 아버지에게 끌려간 기억을 갖고 있다. 그 후 중학교때에는 돈암동.혜화동,삼선동 근처에서 만화를 보다가 그후 소설에 재미를 붙여, 만화를 끊게 되었는데 대학교때 일간스포츠에 연재된 고우영의 금병매,열국지,초한지,등을 보고 다시 만화를 접하게 되었다.그 후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이나 박수동, 강철수의 만화도 읽었으나 이미 내 마음속에 순수함이 사라지도 세속적이 욕심이 많이 생겨저인지 어렸을때처럼 감동을 주지는 못하였다.그 후 가끔 금호갤러리 전시회나 인사동 등에서 옛만화의 단행본 등을 구경하곤 하였으나 단편적인 것이였고, 1990년대 중반 부천 복사꽃 마을에서 대대적인 만화축제가 있었는데 가보니 옛날 만화가게의 모습을 그래도 재연해놓고 어디서 구했는지 옛날 만화를 많이 전시해놓고 볼 수 있게 하였다.
오래간만에 김경언, 임창,박기당,등의 만화를 읽을 수 있었는데 그 당시 국민학교 다니던 아들 둘을 데리고 갔는데 30년의 차이가 났지만 아주 만화가 재미있다고 하였다. 만화를 읽던중 SBS PD가 와서 인터뷰를 요청하였다. 나와 같이 동행했던 소아과 후배, 그리고 어렸을때 만화를 보기위해서 일주일에 1번 읍내에 나갔다던 촌 출신 어른 3명이 PD의 질문을 받았는데 만화가 내 인생에서 많은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고, 어른이 된 지금도 그정도의 감명을 주는 것은 없었다고 대답했고, 혹시 폭력적인 영향을 받지 않았냐고 질문을 했는데 그 당시 만화는 박정희 대통령시대에 이미 자율심의를 하여 출간이 되었기 때문에 큰 폭력적이 만화가 있었던거 같지는 않다.
세월이 흘러 다른 오락이 많이 발달하였고, 70년대 불렀던 포크송 처럼 주류사회에서는 잊혀져가고 있지만 전후의 경제적으로 어렵고,문화적으로 낙후되고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속에서 살고 있었을때 우리의 감성의 고향시키고 희망의 메시지를 던져준 큰 역할을 했기에 그 당시 어려운 여건에서 만화를 그렸던 화백들에게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그들중에는 세월을 잘 만났으면 대화가로 화단에 족적을 남길 수 있는 분들도 있었건만 못내 안타깝다.)
p.s
다음은 학교앞 이발사 아저씨 이야기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