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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회 창립 이전 역사
1. 씨족 창설 및 쌍성총관부 시대
(1) 시조 중서공 조지수(趙之壽)는 한양을 본관으로 하는 씨족을 창설한 바 최초의 족보 갑신단권보를 창간한 숭록대부 판의금부사 문절공 원기(元紀)는 서문에 이르기를 "조씨는 본래 한양의 명망있는 종족이다. 어느대부터 일어났는지는 상세히 알 수 없으나 8세조에 지수라는 이가 있어 총 관 휘를 낳았고...".(후략) 하여 고려 중엽에 씨족을 창설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양고지도
(2) 고려사에 시조의 독자인 2세조 휘(暉)가 1258년(고려 고종 45) 초대 쌍성총관 취임, 공이하 4대 99년간 15주를 세습통치하셨으니 사실상 왕의 지위였습니다.
3세조 양기(良琪)는 총관 휘의 독자로 아버지로부터 총관직을 세습하여 2대 쌍성총관에 취임하고 1281년(충렬왕 7) 동정군의 부원수로 일본정벌에 참전하여 그 전공으로 원세조로부터 금포와 옥대를 받았는데 금포는 오랜 세월로 삮아 없어졌으나, 옥대는 700년 동안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온전하게 대종가에 보존되어 내려와 한양조씨 보물 1호로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4세조 3대 총관 림(琳)은 부원수공의 큰아들로 일찍이 고려 조정에 벼슬하여 대호군과 검교첨의평리 용천부원군에 봉해졌고 가업을 이어 3대 총관에 취임하셨습니다.
고려는 1356년 (공민왕 5) 원이 쇠약해진 틈을 타서 원의 직할령인 쌍성총관부를 붕괴시키고 옛 영토를 수복하였습니다. 5세조 4대 총관 소생(小生)은 숙부 용성부원군 돈(暾)의 회유를 거절하고 고려의 유인우에게 항거하다 패망하여 처자 등 가솔 50여명과 함께 살해당하였으니 안타까운 일이며, 우리 한양조씨 문중은 오직 용성부원군의 후손으로만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2. 고려왕조
(1) 한양조씨 가문 고려왕조에 귀화 : 4세조 용성군 돈(暾)은 부원수공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20세가 되기전부터 충숙왕을 섬겼으며 여진족이 사는 삼살(북청), 해양(길주) 등지로 도망간 고려 관리와 백성들을 수차례 찾아와 그 공으로 감문위 낭장을 제수받았고, 이후 서경(평양)을 함락한 홍건적을 격퇴, 1등공신에 봉해졌으며 판사농시사, 공부상서, 해주목사, 예의판서, 검교밀직부사에 이르고 용성부원군에 봉해졌습니다.
(2) 고려 최고위 중추 가문으로 성장 : 4세조 천주(天柱)는 용성부원군의 동생으로 상장군에 이르렀으며 홍건적을 격퇴하다 순직하셨는데 후손은 없습니다.
5세조 인벽(仁璧)은 용성부원군의 큰아들로 약관에 아버지를 도와 쌍성수복에 공을 세우고, 김용의 반란을 토벌하여 2등 공신에 책록되고 밭 50결, 노비 5명을 하사받았습니다. 판사로 기주지방의 민란을 평정하고, 함주와 북청에 침입한 왜구를 토벌하여 봉익대부에 올랐습니다. 이후 동북면원수가 되어 신주, 옹진, 문화 등지에 침입한 왜구를 화포를 사용하여 격퇴하였으며 삼사좌사, 판의덕부사에 이르렀습니다. 처남 이성계가 조선을 창업하자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켜 강원도 양양으로 낙향, 후학을 지도하여 유림이 충현사 동명서원을 세워 모시고 조선왕조에서 좌정승 용원부원군 시호 양렬공을 하사하였습니다.
인경(仁瓊)은 용성부원군의 둘째 아들인데 밀직부사와 검찬성에 이르렀으며, 인규(仁珪)는 용성부원군의 셋째 아들인데 검한성부윤을 역임하는 등 당시 우리 문중은 고려 최고위 관직에 오르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3. 조선왕조
(1) 가문의 융성 : 5세조 양렬공 인벽과 검한성공 인규, 6세조 가천재공 사(師)는 불사이군을 지켜 조선왕조에 출사하지 않은 반면, 고려말 부정부패를 쇄신하고 새왕조의 창업에 대한 사명감으로 일찍부터 이성계와 더불어 혁명의 중심세력으로 자리잡은 분들이 계셨습니다.
5세조 충정공 인옥(仁沃)은 이조판서로서 이성계의 휘하로 요동정벌에 종군시 위화도회군을 건의하고 최영 등 구세력 숙청에 가담하였으며, 척불숭유와 전제개혁에 앞장서고 정도전 등과 이성계를 추대하여 조선개국 1등공신 이조판서와 대제학 한산군에 봉해지고 시호는 충정공이시다.
6세조 온(溫)은 양렬공의 큰아들로 약관부터 외숙부 이성계를 섬겼는데 이조판서 등을 역임하였고 위화도회군에 가담하여 조선왕조 창업에 큰공을 세워 개국, 정사, 좌명공신 한천부원군에 봉해졌고 장정들을 군적에 등록시켜 군사력을 강화하여 건국기반을 공고히 하였고 시호는 양절공이시다. 연(涓)은 양렬공의 둘째아들로 정화공주 소생이며 진사시에 급제하고 상장군때 외숙부 태조 이성계를 호위하였고, 좌명공신, 한평부원군, 우의정, 시호는 양경공이시다. 뢰(賚)는 충정공의 아들로 생원시와 무과에 급제하고 상호군, 절제사, 경기감사, 지돈녕부사 등을 역임하고 시호는 절효공이시다.
(2) 도유사 문절공 원기 갑신단권보 창간 : 1524년(조선 중종 19) 양절공 고사공파 지중추부사 문절공 원기(元紀)는 우리 문중 최초의 족보 갑신단권보를 창간하였습니다. 도유사(都有司)는 족보를 편찬하는 책임자를 일컫는 말로 현재의 편찬위원장과 동일 개념이며, 사실상의 대종회장으로 보면 됩니다. 시조 조지수--2세조 총관공을 독자로 하여 편찬 배포하였는데, 9년이 경과한 후(1533년) 족보책 한권 뒷장에 최근 역사적 고증자료에 의해 영흥조씨로 판명된 소위 판도공파 몇명을 붙여 놓았는데 이를 세정공괘서라 부릅니다.
책을 편찬 배포한 후 책한권에 임의대로 몇명의 이름을 적어 붙여놓은 것을 인정해 달라는 저들의 행위는 상식이하라고 단언한다. 한양조씨대종회에서 2005년 6월 11회째 족보를 편찬 배포하였는데 몇년이 지난 후 이 족보 뒷장에 몇명의 이름을 붙여 놓고 인정해 달라는 것과 어떻게 다른지 되묻고 싶습니다.
우리 문중의 대표적 인물인 문정공 정암 광조(光祖)는 문절공의 조카입니다.
한양조씨 최초의 족보 문절공(휘 원기) 갑신단권보 영인본
(3) 도유사 문간공 경 신묘삼권보 발간 : 갑신단권보 창간후 127년후인 1651년(효종2) 양경공 병참공파 문간공 경(絅)이 신묘삼권보를 편수하였는 바 문간공과 외손 영의정 김육이 서문을 쓰고, 영해부사 빈(斌)이 발문을 썼습니다.
문간공(휘 경) 신묘삼권보 원본(2021년 7월 14일 한양조씨대종회 부회장 조병국 국립중앙도서관에 기증)
(4) 도유사 선유 병오칠권보 발간 : 신묘삼권보 편수 75년후인 1726년(영조2) 양절공 한풍군파 문장(門長) 선유(善裕)가 병오칠권보를 발간하고 발문을 썼습니다. 편수 기간이 무려 16년이나 걸려 족보 발간의 어려움을 알 수 있습니다.
(5) 도유사 증이조참판공 수관 무오이십권보 발간 : 병오7권보 편수 72년 후인 1798년(정조 23) 문간공 증손 수관(守寬)이 무오이십권보를 발간하고 발문을 썼습니다.
(6) 정묘위조보 예조정단문으로 폐보 처리 : 무오이십권보 편수 9년 후인 1807년(순조7) 무오이십권보를 발간한 증이참공 수관의 아들 훤이 부친의 뜻과는 다르게 영흥조씨인 소위 판도공파의 자금 수천을 사용하여(註. 부경공 정윤의 갑자보 서문에서 인용함) 판도공파를 합보한 위조보를 발간하였다. 종통을 변조시키고 문란케 한 바 우리 문중 각파, 각 지방 종인들이 총 궐기하고 통덕랑 임중씨외 178명이 연명으로 예조에 정단을 올려 폐보처리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정묘위조보 사건입니다.
(7) 도유사 강화유수공 형복 기유이십권보 발간 : 정묘위조보 42년후인 1849년(헌종15) 양절공 14대손 강화유수공 형복(亨復)이 20권의 족보를 발간하고 서문을 썼으며, 문간공 6대손 석인과 문정공 11대손 참봉 성교는 발문을 썼습니다.
(8)도유사 호조참판공 제화 갑신이십이권보 발간 : 기유이십권보 편수 35년후인 1884년(고종 21) 문간공 8대손 제화(濟華)는 22권의 족보를 발간하고 서문을 썼습니다.
(9)시조 중서공 단소 준공(함남 영흥) : 시조 중서공 조지수의 묘는 함남 영흥에 모셨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실전하였습니다. 후손 양경공파 진사 준식 등이 1901년(고종 광무) 단을 쌓고 비를 세워 향사를 받들게 하였습니다.
*대종회 창립
1.태동기
(1) 양절공 고사공파 공조판서공 종필(鐘弼)은 1908년(고종 융희 2) 역사적인 한양조씨대종회를 창립하고 초대 대종약장에 취임하였습니다.
(번역)
대종회 창립총회 융희 2년 6월(1908년)
은나라에서는 벼슬아치들이 수레를 탔고 주나라에서는 면류관을 썼느데 이는 하(夏), 은(殷), 주(周) 삼대(三代)의 예법(禮)의 변천을 보여준다. 여름에는 갈포(葛布)로 만든 옷을 입고 겨울에는 가죽 옷을 입었으며 사철 기후의 변화를 따르는 것이 법도였다. 그래서 성인(聖人)들은 자기의 처지가 바뀌면 모두 그렇게 하였으며 현자(賢者)들은 시세(時勢)를 좇아 자신을 인도하였다.
도리어 구습(舊習)에 교착하여 개혁하지 못하고 옛날의 법도에 젖어 전철을 바꾸지 못한다면,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쓴 무사에게 탕(湯) 임금의 악곡(樂曲)을 연주 하는 것과 같고, 맨발로 걸어다니는 사람들에게 유생(儒生)을 파는 것과 같음에 비견될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무식한 사람들에게서 욕먹게 될 것이니 도리어 식자우환이 될 것이다.
오늘 날의 한민족(韓民族)을 비교하면서 보건데 지구상 강대국들과 과연 같은가? 두개골이 둥그럽고 발 꿈치가 네모난 것만 본다면 우리도 사람이고 저들 또한 사람이다. 그러나 문물과 자녀를 비교해 보면 저들 사람들이나 국가는 분명히 우리를 업신여길 것이다.
아! 단기 4000년, 신성스러운 나라, 조선 500년, 삼천리 강토를 도덕으로 교화하였건만 2000만 인구가 마침내 노예의 이름을 뒤집어 쓸 지경에 이르렀구나! 아이들 교육 수준을 비교하여 6대주(六大洲)를 돌아 보건데 우리나라와 같이 빈약한 나라가 하나도 없는 까닭은 무엇 때문인가? 그 본말을 따져보면, 그 책임을 담당할 부형들이 교육의 방침을 세워 자제들의 방향 상실을 서둘러 선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눈물이 앞을 가리고 마치 간과 폐가 모두 슬픔에 잠기는 것 같다. 또한 돌아가신 선조와 부형들의 하늘에 계신 영혼이 양양하게 혹은 오르고 혹은 대지에 내려와 남 몰래 틀림없이 이를 보고 느낄 것을 생각하면서 슬퍼 탄식하노라.
"옛날의 문명은 이미 오늘과 다르고 오늘날 우리의 문명은 저들만 못하여, 허약한 자손들이 경쟁과 선택의 틈바구니에서 고향을 떠나 떠돌고 있는데 누가 그들을 가르치고 육성하여 다 같이 태평한 세대의 행복을 누리게 할 것인가!"
오늘 날, 우리(여기 모인 사람들)는 선조의 자손으로 경향 각지에 흩어져 사는 자들로서 머리가 하얗게 셌으나 진정으로 집안의 다듬이질 소리, 어린 아이 우는 소리, 젊은 이의 글 읽는 소리에 의지(기대)한다.
다른 가문의 문하생을 힐책하는 데에도 그 것이 불가피한 경우 옷깃을 여미고 조심하고 경계해야 할진데 하물며 우리 한양 조씨가 고려조(高麗朝)로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뛰어난 재상과 어진 신하, 선현후학(先賢後學)이 줄을 이었으면서도 이렇게 어려운 시기를 만났음에랴! 무릇 우리 자손들이 정신을 수습하여 문명의 발전을 위해 힘써 도모하지 않는다면 이는 국민의 책무를 잃는 일이며 선조의 업적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연구 검토하여 옛날의 방법을 고치고 새로운 학문을 이용하는 방향을 충분히 의논하여, 우선 교육의 채찍을 잡고 유지할 방책을 논하여야 할진데 어찌 이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에 통고하노니 종중의 모든 이들은 왼쪽에 쓴 정한 날짜에 모두 참석하여 방안을 연구 검토해 주시면 천만 다행이겠다.
(2) 한양조씨가( 漢陽趙氏世家) 발간
조선 고종 융희 2년(1908년) 사헌부 감찰 종호께서 간행하였는데 천 지 인 3권으로 시조 중서공 부터 대대 선조들의 비문 사료 등을 정리하여 배포하였다.
한양조씨세가(천,지,인) 3권,비문,사료 |
(3) 신유조보 법원에 폐보처분 승소 판결 : 갑신22권보 편수 37년 후인 1921년(일제시대) 문간공 8대손 형식(衡植)과 문정공 12대손 종서(鐘緖)는 역대 선조와 도유사들의 족보편수 지침을 망각하고 영흥조씨인 소위 판도공의 자금으로 판도공파를 족보 원보에 등재하는 위조보를 발간하였다. 이에 우리 문중의 각 파와 각 지방 대표는 궐기하여 법원에 발행금지 소송을 제기, 승소하였다. 양절공 장자 첨지공파를 사칭하는 철원조씨인 소위 논걸공파에서는 1921년 종통탈취를 위한 소송을 제기하였으나, 승산 없음을 자인하고 소를 자진 취하하였습니다.
2. 성장 발전기
(1)한양조씨대종회 제2대 도유사 가선대부 시종원부경공 정윤
(가) 갑자팔권보 발간 : 신유위조보 사건 3년후인 1924년 양절공 참판공파 가선대부 시종원부경공 정윤(鼎允)이 정통보를 발간코자 총관공 묘소에 1,000여명이 모여 대회를 열고 새로 발간하는 정통족보는 옛 범례를 확실히 따르겠다고 총관공께 고하고 발간하였는 바 신유위조보에 돈을 낸 종인들의 부담을 고려하여 부경공이 비용을 단독 부담하고 서문을 썼습니다.
(나) 병인일통세보 발간 : 갑자 8권보 편수 2년 후인 1926년 보책의 숫자가 많아 이를 간수하는데 어려움이 있어 보관과 휴대하기가 수월하도록 방주를 제거하고 오직 계대만을 적어 발간한 족보로서 양절공 참판공파 부경공 정윤이 발간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을 단독 부담하고 서문을 썼습니다.
(다) 쌍성각 창건 및 쌍성각유적비 건립 : 2세조 총관공의 유적을 길이 보존코자 썽성총관부가 있던 함남 영흥에 2대 도유사 양절공 참판공파 부경공 정윤이 종인들과 협의하여 단독 부담으로 쌍성각을 창건하고 유적비를 세웠는데 함남 유림대표 성균관 박사 윤병현이 유적비문과 현판문을 짓고, 규장각 부제학 정만조와 홍문관 교리 곽찬은 기(記)를 지었으며, 후손 진사 일원은 서(序)를 짓고 쌍성각 창건설은 시종원부경 정윤이 썼습니다(화보 참조)
(2) 한양조씨대종회 제3대 도유사 진사공 일원 갑술대보(총20권) 발간
일통세보 편수후 8년만인 1934년 참판공 16대손 진사 일원(一元)이 23세 대종손 주사 필원(弼元)을 위시하여 양절공파 춘교, 양경공 종손 국형과 포천 훈식, 용인 종훈, 가천재공파 용인 중원, 절효공파인 청주 형원 등 각 파와 홍성, 전주, 강릉, 보령, 대전, 함평, 문천, 무안, 김제, 장성, 광주, 단양, 진위, 정산, 덕산, 결성, 서울, 예천, 양양, 영천, 철산, 당진, 포천, 북청, 영양, 연백, 영흥, 창원, 해주, 충주, 부안 등 각 지방을 대표하는 어른들 60여명이 참여하여 정통대보를 발간하였는데 서문은 진사 일원, 발문은 대종손 필원과 양경공파 직원(直員) 훈식이 썼습니다. 진사공은 당대의 대문장가로 국가의 큰 동량이 될 수 있었으나 시운이 불운하여 나라를 일본에 빼앗겨 출사하지 않았고, 선대의 비문을 많이 지었고 문집이 전합니다.
1933년 1월 갑술대보발행을 위한 정기총회 통고문
(3) 한양조씨대종회 제4대 도유사 유석 병옥 박사 기해대보(단권) 발간
갑술이십권보 편수후 25년후인 1959년 기해년 족보를 발간하였는데 통칭 기해대보라 일컫습니다. 일반적으로 대종회장이 족보편찬의 도유사(현재 편찬위원장)를 겸하는 것이 보통이나 기해대보의 경우 족보 편찬업무와 일상업무의 책임을 나누었으니, 즉 충정공파 독립운동가 내무부장관 민주당 대통령후보 유석 병옥(炳玉)박사를 이 족보 발간의 도유사로, 대종회장 양경공파 영원(永元)은 대종회 운영을 각각 맡아 종사를 수행하였습니다. 서문은 유석 병옥박사, 발문은 양경공파 영원과 근영, 양절공파 병열과 성원, 가천재공파 병철이 썼습니다.
조직
한양조씨대보소 임원
도유사 병옥 서울
부유사 근영 "
" 병렬 충남 홍성
" 철행 충남 대덕
한양조씨대종회 임원
고문 대종손 국형
" 검한성공 종손 병룡
(4) 한양조씨대종회 제5대 대종회장에 독립지사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양경공파 영원(永元) 취임
영원 대종회장은 병참공후손으로 1892년 5월 11일생이며, 자는 명천(命天)이며 호는 각산(覺山),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한국독립당 대표최고위원을 역임하였고,1960년 대종회장의 중책을 맡아 유석 병옥박사와 더불어 1959년 족보 기해대보를 편찬하고 종사를 빛내었다. 1974년 4월 1일 졸하였습니다. 1983년 8월 독립유공공적비를 포천 창수초등학교 교정에 세웠으며, 1990년 12월 26일 대통령 건국훈장 수여(2390호), 1973년 6월 1일 대통령 국가유공자증 수여(11-292호), 묘소는 포천군 창수면 추동리에 모셨습니다.
독립지사 각산 영원 선생 공적비(포천시 창수초등학교)
(5) 한양조씨대종회 제6대 대종회장에 한학자 월봉공 진규 취임 : 월봉공(月峰公) 진규(鎭奎)는 양경공 병참공파 일봉공 석회(錫晦)의 5대손으로 부친은 장원(章遠), 생부 정원(正遠)이며, 호는 월봉(月峰)이다. 임인 5월 22일 생으로 1964년 한양조씨대종회 제6대 대종회장 역임하였고 忌는 1월 25일이며, 묘는 경기도 용인공원묘지 간좌입니다.
(6) 한양조씨대종회 제7대 대종회장에 국립중앙도서관장 근영 취임 : 26세 양경공파 병참공 후손으로 자는 무중(茂重), 호는 정파(靜波)이며 1896.9.6 생으로 초대 국립중앙도서관장을 역임하였으며 1966년 한양조씨대종회 제 6대 대종회장을 역임하였다. 1982.1.18 졸하였고, 묘는 경북 봉화군 재산남면 곤좌이다. 동생 헌영은 2대 국회의원, 군영은 경북도지사, 조카 동탁은 호가 지훈으로 청록파시인입니다.
(7) 한양조씨대종회 제8대 대종회장에 서울대교수 이사관 병욱(炳旭) 취임 : 양절공 한풍군파, 조부는 의관 덕원(德元), 부친은 무과급제로 사복정에 이르른 종대(鍾大)이며, 충남 예산 덕산 시묘동에서 1906년 1월 9일 출생, 일본 광도고등사범학교 졸업하고 서울대 교수, 문교부 이사관, 고등교육국장 등 여러 국장 역임하고 1968년 한양조씨 대종회 제8대 회장에 올랐습니다.
(8) 한양조씨대종회 제9대 대종회장 유송(維松) 성원(性元)취임 : 양절공 한풍군파 후손으로 1912년 1월 23일출생, 가산공파종회장과 양절공파종회장, 1972년 한양조씨대종회 제9대 대종회장에 취임하였습니다. 1986년 9월 5일 한양조씨 가산공파계보약사(漢陽趙氏 嘉山公派系譜略史)를 편찬하고, 1988년 8월 10일 한양조씨 모촌공파보(漢陽趙氏 慕村公派譜)를 발간하였습니다.
(가) 한양조씨대종회 회보 창간호 발간 : 1972년 10월 30일. 발행인은 대종회장 성원, 편집위원장은 법무부장관을 역임한 병일이며 비매품으로 대종회장과 편집위원장을 비롯한 임원들의 성금으로 발간하였습니다. 표지는 붓글씨로 會報라 표제를 달았고 우리 문중의 가보인 옥대 사진을 삽입하였으며 내용은 8세분파도와 항렬도, 대종회장의 창간사, 편집위원장의 서(序), 한양조씨의 내력, 가보 옥대기사, 이조 관직 기타 해설, 총회 소식과 대종회 임원 명단, 이사회 명단, 모임 안내, 경조사, 시제 안내, 편집후기 등 16페이지에 걸쳐 다양한 내용으로 편집하였습니다.
(나) 회보 제2호 발간(73년 4월 25일) : 대종회 강령(선조 숭봉, 종족 돈목, 후진 교양)을 넣었고 춘형 부회장의 서문과 사계화 해설, 정암선생 실기, 종중 재산소유권 등기에 관한 고찰, 묘지법 중 개정 법률, 파종회 지방 종회 소식, 인물 소개(문학 예술 부문), 통지사항, 소식, 편집후기 등 20페이지입니다.
(다) 회보 제3호 발간(74년 3월) : 권두시에 청록파 시인 양경공파 지훈 동탁의 산중문답을 싣었고 예절속의 인생, 자화자찬의 변, 정암 탄생 491주년 기념강연회 박종홍 서울대 대학원장의 참된 실생활의 몸가짐을 강조 등 3편의 논문, 가정의례준칙 시행에 즈음하여, 안동 정전문중 민속경연대회 수상소식, 양절공파종회 소개, 종친 소개(법조계), 대종회 동정, 경조사, 병참공파종회 사무실 이전, 편집후기 등 28페이지에 달합니다.
(9) 한양조씨대종회 제10대 대종회장 서기관공 영환(榮渙)취임 : 양경공 병참공파, 초명 영규, 자 우삼, 호 석암(昔庵), 1909년 기유 8월 11일생, 서기관, 1976년 제10대 한양조씨대종회장, 1990년 경오 9월 9일 졸하였고, 묘소는 고양시 벽제산 해좌이며 자 병호는 의학박사, 2자 병우는 은탑산업훈장 수훈, 3자 병철, 4자 병태, 5자 병하입니다.
(가) 회보 제4호 발간(74년 11월) : 옥대사진이 있던 표지를 생략하고 신문형태의 편집과 종인들의 광고를 싣었으며 10대 대종회장 영환의 취임사, 종친학생들께, 사계화 고(考), 제례절차 상식, 시향일에 관하여, 해외생활 수상, 대종회 동정, 종친 소식(오련, 아시안 게임에서 수영 3관왕), 경조사, 임원 명단(고문, 이사 및 감사, 자문위원), 대전지방 종친회 소개, 편집후기 등 8면이다.
(나) 회보 제5호 발간(75년 12월 30일) : 4호에서 실험적으로 보여줬던 신문형태의 회보를 책자형태로 원상회복시켰으며, 대종회장의 권두사 '종인의 의합이 국민의 단합이다', 동명서원복구추진위원장 유도회장 이동균의 '동명서원 복구사업 추진 현황 보고', 특집기사 유석 병옥박사를 추모하며, 유석 병옥박사 신도비문, 종친소개(독립투사 조태헌), 대종회 동정(족보 서문 번역 등), 주요행사 및 경조사, 각파종회, 지방종회 소식(양절공파종회, 병참공파종회<장학금 지급>, 대구지방 종친회, 공주군 종친회, 광주지방 종친회 등 24페이지이다.
(11) 한양조씨대종회 유명무실
오랜기간 동안 사농공상으로 유교적 사고와 질서를 유지하고 있던 사회가 일제시대와 6.25동란을 겪으면서 민심이 혼탁해지고 신분제도가 급격하게 무너지게 되었고, 60년대와 70년대를 거치면서 산업화의 물결이 농촌에도 불어닥쳐 오랜 기간 동안 살던 곳을 떠나 도시로의 이주가 이루어지면서 집성촌 마져도 흔들리게 되었고, 우리 한양조씨대종회도 더 이상 모임이 이루어 지지 않고 전통의 맥이라 할 수 있는 한양조씨종보 마져도 이어지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각 파종회별로 종회 모임이 발생하고 있는 점은 다행이라 아니할 수 없다.
(가) 국역 정암선생문집 기존의 정암집이 순 한문으로만 되어 있어서 한글세대들에게는 접근할 수 없는 점을 감안하여 1978년 8월 1일 정암선생기념사업회에서 간행한 책자이다
(나) 1982년 조광조 선생 생탄 5백주년 기념하여 국제할술대회를 개최하고 거기서 나온 논문을 12월 31일 책으로 엮어 배포하었다
(다) 심곡서원지 발간 2002년 11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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