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경주에 가려거든 외 1편
문형렬
봄에는 경주를 가지 말라
봄날, 그대는 경주를 스쳐 가지도 말라
그래도 그대가 봄 경주에 가려거든 깊이 다짐하고, 마음속으로 무명불명無明不明 맹세하고 경주를 가라 어떤 슬픔에도 놀라지 말고 어떤 황홀함에도 흔들리지 않으리라고 그러나, 경주에 이르기 전에 남산이 보이고 목월의 생가며 동학교주 최제우의 생가 그 어디를 지나면서, 죽은 이도 살려낸다는 금척이 기다리는 비밀의 무덤을 스치면서 그대는 알 수 없는 두근거림과 가슴 밑바닥에서 차오르기 시작하는 속 울렁임의 첫 관문을 통과할 수 없으리
어쩔 수 없는 일, 하냥 그대가 봄에는 꼭 경주를 가야 한다고, 말한 바 없고 들은 바 없고, 찾을 수 없었던 약속를 지켜야 한다고 앙탈처럼 외친다면, 나는 대답을 잃어버리고 수만 리 꽃 사태로 무너지듯 확 물러서 말하리라 봄 경주에 가려거든, 눈을 감고 가라 경주에 이르러 고요히 눈을 감으라 눈을 감고 경주에 다가서고 눈을 감고 경주를 헤매며 눈을 감고 경주를 지나가라 눈을 꼭 감고, 수직으로 베인 가슴을 두 손으로 덮고, 입술을 앙다물고
어찌 눈을 감고 경주를 볼 수 있겠느냐고, 실눈이라도 뜨고 가야 하지 않겠느냐고 그대는 타협해 오리라, 난들 어찌 눈을 감고 경주의 수많은 부처님과 화려한 무덤과 시간의 갑옷을 입고 달려오는 말발굽을 똑바로 만날 수 있으랴 나는……, 아무 것도 약속할 수 없으리, 실눈을 뜨고서라도 봄날 그대가 경주에 가려 한다면, 아스라하게 실눈에 맺히는 희고 붉은 앙금과 그 앙금에 서리는 환상과 터져 오르는 상처들을 내내 다스릴 수 없어 그대는 스스로 눈이 멀어버리리라 경주로 가는 길도 되돌아서 오는 길도 오래 찾지 못하리라
그대가 눈을 뜨고 경주를 찾아가면 전쟁에 나가는 청년을 동시에 사랑한 자매가 못에 몸을 던지고 보라색 등꽃으로 거듭 세상에 나와, 눈뜬 그대를 오라고 오라고만 손짓하리니, 스산한 향기로움에 그대는 몸을 벗고 그만 물속으로 걸어 들게 되리니, 함께 가라앉았다가 등꽃으로 필 뿐 이미, 애욕이 다져진 그대 눈동자는 보라색 겹꽃잎 아래 또 매달릴 뿐이니 그대, 경주에 가려가든 제발 눈을 감고 가라 누가 눈이 멀어버리고 싶으랴
정말 눈을 뜨고 그대, 경주에 간다면 경주에 이르기 전에 내가 먼저 그대의 눈을 멀게 하리라 잠시라도, 눈을 뜨면 포석정에는 언제나 비운의 왕이 술잔을 기울이고, 저 세월의 창날이 왕의 가슴을 눈부시게 찌르는 모습을 그대는 보고 말리라 그제서야, 눈을 감은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이미 밝은 날은 붉게 사라지고, 외마디 소리치는 왕은 스스로 가슴을 먼저 베어 끄떡없이 서 있으니 그대, 다시는 그대 본디 모습으로 돌아올 수 없으리, 가슴에 맺혔다가 시냇물로 흘러내리는 연분홍 넋을 고즈넉이 바라보며 마상의 잔을 높이 들어 근심을 휘날리는 저 왕이 누구인지 마주하면 그대는 한 번 더 눈이 멀어버리리라 그대는, 찬란하고 드높았으므로 탄식으로 얼룩졌던, 진정 외면했던 이생의 또 다른 그대 얼굴을 마주하리니 언제나, 봄날은 천년의 말을 달리고, 뒹구는 가슴으로 마냥 달려와 박히는 얼룩얼룩한 꽃잎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대 그림자는 사직을 끌어안듯 날마다 가슴 깊이 선혈을 흘리니, 어찌 눈을 뜨고 그 얼굴을 마주 볼 수 있으랴 그대, 봄 경주에 가려거든 눈을 결코 뜨지 말라 내가 그대의 눈을 먼저 멀게 하기 전에 봄 경주, 지극한 아름다움 앞에서 눈을 감으라
그대 천우신조로, 알 수 없는 공덕으로 눈이 멀지 않았다 해도 감포 앞바다, 대종천, 감은사 앞 수로로 이어지는 물길을 달리는 어리고 푸른 용들을 만나면, 그대는 그만 이 속진의 허물을 벗고 함께 배를 해딱이며 어린 용들을 따라 동쪽 바다 물거품으로 떠나버려도 나는 모르겠네, 처용은 그대를 위해 날마다 춤을 추고 그대는 물거품이 되어서도 사랑하는 이가 정조를 잃었다고 슬퍼할라
눈을 감고서라도 그대 봄 경주에 가려거든 곧은길로 뻗어서 경주로 가지 말라 경주로 가는 길은 수없이 많으나 너무 많은 길을 돌아서 가야 하리, 경주로 갈 수 있는 길을 그대가 다 안다 해도 수많은 길을 돌아 돌아서 경주로 가야 하는지 나는 이르고 싶으니, 누가 헤매고 싶으랴 그대는 알아야 하리 이미, 곧바로 허둥거리는 발로 경주로 이르는 길을 접어들기도 전에, 누군가의 오랜 기다림이 지층에 쌓이고 쌓여서 붉은 찬탄과 흰 공덕으로 메아리 져 휘몰아치는 앞길에 그대는 두 발이 빠져버리고 말리라 북쪽으로, 서쪽으로 기울어져 그림자마저 불타는 황룡사 9층 목탑처럼 빠져들 테니, 찾을 수 없는 전생처럼 경주에 이르는 길을 하나하나 살피며, 돌고 돌아서 이르러야 하는 까닭은 그대, 급한 성질 때문에 단숨에 경주에 이른다면 그곳은 경주가 아니었을라 크게 저어하기 때문이니……
경주와 경주 사이 그곳은 가장 가까운 별과 별의 사이보다 더 먼 수억 광년이니 곧은길로 경주에 가서 천년의 장수들이 달려와 그대 가슴에 비수를 꼽아도 끄덕없다 한들, 빛과 바람 사이에서 꽃 사태에 온전히 정신을 바치는 대제국 신라를 어찌 만날 수 있으랴 에밀레의 드높은 외침을 어찌 들을 수 있으랴 천개 손과 천개 눈 어느 하나도 그대를 찾아오지 않는다면, 날마다 춤을 추는 처용마저 만날 수 없으리 경주로 바로 가는 그 어느 길을 돌아서 가야 하는지 나는 알 수 없으나, 경주에 이르는 길이 얼마나 깊고 멀고 조심스러운지 나는 또한 알 수 없으나, 동곡을 지나 산내를 거쳐 단석산 오르는 갈래갈래 산길처럼 그 모든 길을 고개 숙여 물 흐르듯 굽이쳐 갈 수 있다면 천년은 가볍다고 그대는 말하리
오오, 그대의 천년은 가볍고 우스운 일, 그리하여 그대 눈을 감고 경주에 가려거든 그러나 곧바로 가라 곧바로 가는 길이 가장 멀고 천년보다 더 긴 날이 걸릴지 모르니, 봄 경주에 가서도 절대 눈을 뜨지 말라, 그대 꼭 감은 눈 속에서 찾을 수 없었던 대신라 열아홉 왕릉도 둥글게 모습을 드러내리니, 속옷 같은 슬픔도 올올이 나누어지고 속절없이 깊어 경주 곳곳이 우물처럼 아득한 봄날, 그대 봄 경주에 가려거든 눈 감고 곧바로 가라 이생에 가혹한 운명으로 전생에 내생에 파탄 난 사랑을 완성하려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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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어이 봄 경주에 가려거든
수억 광년처럼 아주 먼 봄날, 나는 그대에게 경주에 가려거든 눈을 감고 가라고 했다 그대가 실눈이라도 뜨고 간다면, 그 눈동자에 맺히는 희고 붉은 앙금 속으로 회오리 지는 환영이 그대의 눈을 멀어버리게 하리라고, 그대가 눈을 뜨고 경주를 간다면 그대는 드높은 아름다움에 미쳐버려서 넋이 빠져서, 오래 수습하지 못하리니 꽃잎마다, 천년을 쏟아내는 저 찬란한 비애의 창날들이 그대의 두 눈을 다시는 회복할 수 없도록 찌르기 전에 내가 먼저 그대 눈을 멀게 하리라고
그러나 그대 기어이 눈 감고 봄 경주에 가려거든 오오, 천년은 봄 경주에 흩날리는 꽃잎보다 거듭 가볍고 우스운 일, 천년보다 더 긴 날이 그대 눈썹에 걸려 있으니 소매 끝을 스치던 사람의 속살 같은 왕벚꽃잎 사이로 후두둑 부귀영화가 떨어지고, 하늘 높이 솟은 황룡사 9층 목탑 층층마다 대신라 제국에 조공을 바치는 중앙아시아와 북만주와 이름마저 사라진 부족국가의 깃발이 펄럭이며 그대 눈 속마저 가리리니 기어이 그대, 눈 감고 곧바로 경주로 가려거든 돌무덤에 녹슨 칼을 꽂고, 전나무를 높이 세우고 천마가 솟구쳐 공중에 난 길을 땅에 새기며 가라
에밀레의 맑은 외침과 기울어가는 사직에 생애를 맡기는 푸른 왕의 가슴에 쉬지 않고 세월의 장수들이 말 달려 비수를 꽂는 그 화엄장을 그대가 감당하려 한다면, 원효가 춤을 추는 저잣거리를 헤매며 위없고 아래 없는 평등한 발걸음으로, 경주에 이르는 헤아릴 수 없는 길을 곧은 길 속에서 한없이 헤매어 가라, 처용이 춤을 추는 그 길을 따라······, 속 울렁임을 바람에 떠나는 벚꽃 향기로 토해내며 발걸음마다, 솟구치는 그리움이 시냇물을 따라 바다로 흘러가는 그 길마다 그대는 한낮에도 별을 품어내는 첨성대로 우뚝 서 있을 테니
마침내 그대는 화살처럼 되물으리, 당신은 눈을 감고 경주에 갔는가, 먼먼 길을 돌아, 그리하여 곧바로 무너지듯 경주에 이르렀는가, 경주와 경주 사이 수억 광년 지나서 오늘도 내일도 애절하게 찾아오는 저 억겁의 평등하고 평정하고 평화로운 얼굴을 당신은 알고 있었는가 라고 고백하노니, 나는 경주에 갈 수 없다 경주를 지날 수도 없다 오직, 경주에 눈감고 곧바로 가는 길에 뼈에 시리도록 사무치는 발걸음을 잡아채는 내 마음을 그대는 모른다고 변명할 수밖에 없으리, 천 년 전의 함성들과 앞가슴을 치는 꽃잎마다 이어진 인연들이 나의 두 눈과 살갗, 뼈 하나하나마다 아롱져 불도장이 찍히는데 나는 그곳을 찾아갈 수 없으리, 하염없는 기상과 애틋한 사랑과 초원을 달려온 황금 장식과 휘몰아치는 천마가 공중의 꽃잎으로 떠다니는 저 봄날의 경주를 나는 어찌 만날 수 있으랴
천마는 언제나 그대 눈앞에서 빛으로 바람으로 천년을 달리고 세찬 숨소리와 말발굽 소리는 거리마다 울리는데, 아직도 자작나무 말안장에 앉아 기다리고 있는 저 청운의 사랑들이 기다렸다는 듯 푸른 꿈을 그대에게 쏘아대고 있는데, 쏟아지는 꽃잎마다 일어서는 말발굽 소리는 찰나의 창을 들고 맹목적으로 내달리는 삼생의 그대 얼굴을 떠오르게 하노니, 나는 가슴이 울렁거려 간에서 창자에서 뒤집어지는 얼굴을 온 말발굽으로 짓밟고 달려도 안개비, 몽롱한 구름꽃 한 줄기마저 잡을 수 없으니
나는 억겁의 봄 경주에 이를 수 없으리, 두 눈에 흘러넘치는 얼굴들, 경주 푸른 하늘에 소리쳐 그대 이름을 부르는 메아리를 나는 견딜 수 없어 꽃잎에 덴 내 얼굴은 오래 전에 귀면이 되어 아예 숨겨져 있으니 기어이 그대, 눈감고 곧바로 봄 경주에 가려 한다면, 나는 삼생을 걸고 말할 수 있으리 차라리 쏟아질 것 같은 두 눈을 아예 뽑아버리고, 목 매어달듯 어리석고 미련한 기다림에 불붙여 아쉬운 마음마저 흩날려버리고 바람과 먼지에 내맡긴 서툴고 텅 빈 몸만을 가지고 가라
그대는 외마디 길게 소리 지르고 말리라 이미, 경주로 떠나가 버린 그대의 봄날이 속 속마다 헤매며 외치고 말리라 봄 경주는 어디에 있는가, 아무리 찾아도 봄 경주가 보이지 않는다고 오오, 그대가 봄 경주를 찾을 수 없다면 누가 그 어디에서 봄 경주를 찾는단 말인가, 그대를 떠나버린 눈 속에서 그대가 재로 쌓인 마음속에서 봄 경주를 찾지 말라 봄 경주 보이지 않는 날들을 아무리 찾아 헤맨들, 아무리 눈을 감은들 무슨 속절이 있으랴
경주로 이르는 그 수많은 길을 돌아 돌아서, 그리하여 곧바로 봄 경주에 이른들, 그곳에서 아무도 그대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면, 그곳에서 아무도 만날 수 없다면 아뿔싸, 바람과 먼지와 한갓 광명의 그대 몸속에서 봄 경주는 더 이상 그대를 기다리지 않을라 두려워하노니, 어느 광명을 잃어버린 아기를 위해 천수천안 관세음께 천개의 눈 가운데 단 하나만이라도 달라는 어미의 간절한 외침을 천년의 귀를 열고 들을 수 없다면, 석굴암 부처님의 이마 한가운데 박혀있던, 그대 꽉 쥔 주먹보다 더 큰 금강석 속으로 대왕암 앞바다가 올라서고, 감은사 수로 사이에서 어린 용들이 동해의 깊은 숨결을 그대에게 선사하지 않는다면, 경주의 모든 봄꽃들이 일시에 휘날리며 대자대비大慈大悲!, 외오치는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면, 사랑을 잃은 전생의 그대 얼굴을 다시 만날 수 없다면
그러나 이미 눈먼 그대, 기어이 봄 경주에 가려거든 그곳에 이르기까지 천년보다 더 걸리는 긴 날들을 그대가 비어서 가득찬 몸으로 바로 찾아 나서면, 잃어버린 사랑은 천년이 지나가도 그대를 기다리고 있으니 그대 그림자마저 보물로 일어서리니 계절이 무슨 상관이 있으랴 나는 비로소 말할 수 있으리, 분황芬皇의 푸른 연꽃들이 손가락마다 흐르는 너무 찬란하고 너무 화려한 그대가 바로 경주라고, 봄 경주라고
문형렬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소설 당선, 198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꿈에 보는 폭설』, 『해가 지면 울고 싶다』. 장편 소설로 『바다로 가는 자전거 연적 굿바이 아마레』, 『어느 이등병의 편지』 외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