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인 송정봉 위에 걸렸던 복숭아 같은 해가 산을 넘어가고 날이 어둑어둑해지는데도 벌들은 분주합니다. 어디에 가서 무얼 물어 오는지 연신 날아오고 날아갑니다. 벌들은 내 방문 앞 추녀 밑에 집을 짓습니다. 처음 주먹만 하게 시작할 때는 그런가 보다 했는데 점점 커져 축구공만 하더니 지금은 수박 통 정도로 커졌습니다.
벌들은 능숙한 솜씨로 작은 아이스크림 꼭지 같기도 하고 우렁이 껍질 같기도 한 꼭 그만한 크기의 흰색 돌기를 수십 수백 개 겹쳐 집을 만듭니다. 돌기 사이에 드나드는 구멍이 있는데 그 구멍 주위에 수십 마리 벌들이 모여 일을 합니다. 벌집 안쪽에는 알을 낳고 애벌레를 돌보거나 키우는 벌들이 있을 테고,
기능이 다른 수없이 많은 방들도 만들어져 있을 겁니다.
그런가 하면 주위를 돌며 순찰하는 벌들도 있습니다. 그 벌들은 낯선 사람의 이상한 행동을 발견하면
죽음을 무릅쓰고 공격합니다. 벌집이 점점 커지는 걸 지켜보던 주위 사람들이 커지기 전에 없애 버리라고 합니다. 낫질을 하다가 벌에 쏘여 정신이 혼미해지며 죽을 고비를 넘긴 이도 있고, 평상에 앉아 고기를 구워 먹다가 벌에 쏘여 혼난 이도 있습니다. 아니 어떤 이는 벌집을 좀 더 크게 두었다가 따서 팔면 수십만 원은 받는다고 귀띔해 주기도 합니다.
나도 걱정이 안 되는 건 아닙니다. 산중에서 벌에 쏘였다가 큰 낭패를 당할 수도 있다는 걸 모르는게 아닙니다. 그러나 벌들도 노동을 하고 짝짓지를 하고 새끼를 키우며 제게 주어진 업을 살다가 갑니다.
여럿이 모여 서로 역할을 나누고 힘을 모아 집을 짓고 사회활동을 하며 주어진 목숨의 크기만큼 무슨 일인가를 하며 삽니다.
그걸 한순간에 날려 버리는 일이야말로 폭력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가 공격하지 않으면 먼저 사람을 해치려 드는 짐승이나 곤충은 없으리라는 게 내 순진한 생각입니다. 나를 공격해서 무얼 얻어 갈 게 있어야 공격할 게 아닙니까. 내 육신은 벌이 필요로 하는 달콤한 것도 신선한 것도 기운찬 것도 별로 가지고 있지 못한데 벌이 나를 공격해서 무얼 얻어가겠습니까. 본래 나보다 먼저 이 산속에 살던 것들이니 저들도 여기 살 권리가 있지 않나 생각하며 벌집을 올려다봅니다.
- 도 종환의 산방일기 -
(강헌 선집 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