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0일 화요일 맑음
별로 맘에 들지 않는 숙소다. 여행 마지막 이지만 하루를 자도 맘에 드는 숙소에서 자기로 맘먹었다. 어제 잠시 봐둔 숙소로 옮기기로 했다. Spot H은 뜨거운 물 사정이 좋지 않고 어둡고 춥다. 좀더 시설이 좋은 파하르간지 내에 있는 HVP Hotel Palace로 숙소를 옮겼다. 배낭여행객보다는 인도인들이 주로 이용하는 중급 호텔 수준이다. 하룻밤에 400루피다. 짐을 옮겨놓고 또 짜이와 토스트로 아침 식사를 했다. 섣부른 인도 음식보다는 이 토스트가 입맛에 맞다. 이제는 인도의 분위기에 젖어들었는지 복잡함이나 혼란스러움 냄새, 질퍽대는 도로 등도 낯설어 보이지 않았다.
전철을 타고 찬디니 촉에 내려 어제 보지 못했던 붉은 성을 향해 복잡해지는 인파사이로 부지런히 걸어갔다. 이렇게 서둘러 걸어가야 할 이유가 없는데....... 붉은 성은 성벽이 붉어서 붙은 이름인가 보다. 넓은 광장에 서니 붉은 성벽이 견고하게 막아서고 있다. 서둘러 아내와 함께 입장권(250루피)을 끊었다. 사진 촬영비와 비디오 촬영비는 따로 받고 있다. 그냥 들어가 형편대로 몰래 찍기로 했다. 몰래 찍다가 걸리면 바로 경찰서 행이라고 책에 ..........
붉은 성은 무굴의 황제이자 건축광 이었던 샤자한이 1639~1648년에 걸쳐 공들여 지은 성이다. 사쟈하나바드(지금의 올드 델리)가 수도였던 시절에 왕궁으로 사용했던 건물이다. 현재 올드 델리의 많은 유물들 가운데서도대표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인도인들은 붉은 성을 랄 낄라 라고 부른다. 랄은 붉다. 낄라는 성이라는 뜻이다. 붉은 성은 설계당시부터 왕궁으로서 역할뿐만 아니라 전투 목적도 있었던 것 같다. 코끼리 기병대인 상병의 공격을 막기위한 급한 커브와 깊게 파 놓은 해자 등이 눈에 띈다. 그러나 무굴제국시절에 당당한 위용을 자랑했던 붉은 성도 1857년~59년에 발발한 세포이 항쟁으로 상당 부분 파괴되어 영국식민지 시절에 개.보수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붉은 성에서 자신의 치세를 떨치고 싶었던 샤자한 이었지만 실제로는 이곳에서 오래 머물지 못했다. 타지마할, 올드델리의 건설, 아그라성의 증축 등으로 국고를 고갈시킨 것에 불만을 품었던 그의 아들 아우랑제브가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결국 샤자한은 왕국을 잃고 아그라 성에 유폐되었다.
붉은 성의 출입문은 군인이 지키고 있다. 총을 들고 지키고 있어 약간 어색하다. 베레모를 쓰고 총구를 출입문을 향해 놓은 이유를 모르겠다. 라호르게이트는 붉은 성의 실제적인 입구다. 문의 방향이 라호르 라는 도시를 향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라호르는 현재 파키스탄에 편입된 도시로 무굴제국시절 내내 델리, 아그라와 함께 무굴 3경이라 불렀다.
라호르게이트는 초대 수상이었던 네루가 1947년 8월 15일, 인도 민족해방기념일 당시 연설을 한 뒤부터 정기적인 정치 행사장으로 애용되고 있다. 특히 인도의 공화국 창건일인 1월 26일에는 현재 권력의 상징인 라즈파트에서 구 권력의 상징인 라호르게이트까지 퍼레이드와 군대 사열식이 진행된다. 앞으로 6일 남았는데 이곳은 조용하다. 라호르게이트 앞의 넓은 공터는 평상시엔 아이들의 크리켓 경기와 서커스단의 공연무대로 쓰이고 있을 뿐 이지만 행사가 거행되는 동안에는 수십만 명의 군중이 모이는 집회장소로 이용된다. 오늘은 유난히 개들이 누워 있어 개판을 만들고 있다. 여기저기 누워있는 개들이 많다. 라호르게이트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데, 자세히 보니 가이드 북에는 글씨가 있는데 지금은 지워져 있다.
라호르게이트를 들어서면서 처음 만난 곳이 차라 촉이다. 여러 가지 골동품과 기념품을 파는 상가다 붉은 성이 지어지던 당시에는 성내의 거주민을 위한 보석 등 고급제품을 팔았던 곳이란다. 요즈음으로 말하면 최고급 쇼핑몰인 셈이다. 현재는 관광객을 상대로 준 보석류의 공예품이나 세공품이 많다. 별로 관심을 끄는 것이 없다. 우리들 눈에는 화장실 표시만 눈에 들어와 잠시 해결하는 여유를 갖게 되었다. 그늘이라 시원하다.
그 다음 찾아 간 곳이 나우밧 카나 이다. 칫타 촉의 끝자락에 있는 2층 건물이다. 황제나 왕자들이 지나갈 때 음악을 연주하던 장소였단다. 현재는 전쟁박물관으로 세포이 항쟁 당시 황폐해진 붉은 성의 내부 사진도 있고 조형물도 전시되어 있다.
계속 걸어가니 디와니암 이 나온다. 초록색 잘 가꾸어진 잔디밭이 양 옆에 있어 더욱 멋져 보이는 거물이다. 왕의 공식 접견장이란다. 참고로 인도의 모든 성에는 디와니암을 하나씩 두고있다. 왕이 머무는 동안 공식 접견장으로 사용한다. 무굴제국 당시에는 루비와 사파이어 등의 보석으로 한껏 치장을 했던 곳 이지만 현재의 모습에는 화려했던 자취를 찾을 수 없다. 가장 큰 원인은 세포이 항쟁으로 철저하게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1903년 영국인 쿠르존 경에 의해 복구 작업이 이루어졌지만 이후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더욱 황폐해지고 말았다. 들개들의 놀이터로 까지 전락했던 디와니암이지만 최근들어 정부차원의 관리가 이루어지고 있어 겨우 위엄을 유지하게 되었다.
걸어서 1분정도 갔을까? 디와니카스가 눈에 들어온다. 페르시아의 한 시인이 ‘ 지상에 낙원이 있다면 바로 이곳’이란 시구를 지어 바쳤던 거물이다. 건설 당시 온 벽을 보석으로 치장했지만 도굴꾼과 여행자들의 약탈로 현재는 마치 눈 빠진 인형같이 초라한 모습만 남아있다. 그러나 외형은 품위 있어 보인다. 붉은 성에서 디와니카스가 유명해진 이유는 건물 안에 있던 옥좌, 일명 공작좌 때문이다. 샤자한에 의해 만들어진 공작좌는 인류가 만든 어떤 옥좌와도 비교가 안될 만큼 화려한 것이었다고 전해진다. 우선 단상에 까지 이르는 계단을 은으로 만들었고 의자의 다리는 황금으로, 등받이는 다이아몬드와 루비 등으로 꾸며 눈이 부실 만큼 아름다웠다고 한다. 참고로 공작좌라는 이름은 의자의 등받이가 마치 공작 깃털처럼 만들어진데서 비롯된 것이다.
아쉽게도 현재는 공작좌가 사라지고 없어 그 모습을 볼 수 없다. 공작좌의 최종 소유자였던 쿠르드족이 등받이의 보석이 탐이나 의자를 분해해 버렸기 때문이다. 현재 이란의 테헤란 박물관에 모조품이 소장되어 있단다. 화려한 공작좌에 얼마 앉아 보지도 못하고 왕좌를 넘겨준 샤자한의 원한이 서려있어서인지, 공작좌의 주인이 된 사람들은 이후 권력을 잃거나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고 한다. 먼저 아버지를 아그라 성에 유폐시켰던 아우랑제부는 옥좌에 앉았지만 반란에 시달리다가 죽었고 무굴제국의 수명도 끝이 났다. 이후 이란의 샤 skepfm가 1739년에 인도를 침략해서 공작좌를 탈취해 갔지만 그해 벌어진 쿠르드족과의 전투에서 패해 1년도 소유하지 못하고 빼앗긴다.
재미있게도 공작좌의 모조품에 앉기만 해도 저주가 계속된다는 얘기다. 이후 등장한 카자르 왕조는 공작좌의 모조품을 만들었다. 1941년 이란의 마지막 국왕이었던 팔레비가 여기 앉았다가 결국 호메이니의 이슬람 혁명으로 인해 자국에서 추방되어 객사했다. 어쨌든 의자 하나 탐낸 결과 치고는 너무 가혹한 대가를 치른 것이 아닌지........
옆에는 왕족들의 목욕탕으로 사용한 함만 이 있다. 장미 잎을 띄워 놓았던 장미탕, 뜨거운 물이 계속 흘러내렸다는 열탕, 그리고 오늘날의 사우나인 증기탕으로 이루어져있다. 함만 내부에는 타지마할의 장식에 사용되었던 피에투라 두라 기법으로 꾸며있어 건축적인 가치도 높은 편이다. 문이 굳게 닫혀있어 뒤로돌아 창문으로 들여다보니 모두 메말라있어 황량하다.
옆에 있는 사원 모띠 마스지드 로 갔다. 독실한 이슬람교인 이었던 아우랑제부가 1659년에 자신의 개인 기도실로 사용하기위해 만든 대리석 사원이다. 아버지 샤자한이 사치한데 반해 아우랑제부는 검소함으로 대변되는 인물이다. 그의 성품을 반영하듯 모띠 마스지드는 아우랑제부가 붉은 성에서 유일하게 세운 건물이다. 옆에 커다란 나무들과 어울리는 예쁜 사원이다. 아버지를 유폐시킨 아우랑제부는 이곳에서 무슨 기도를 드렸을까?
다시 오른쪽으로 가서 카스마할 을 둘러본다. 카스마할 은 황제의 개인 처소로 사용된 곳이다. 생각보다 검소하고 간단한 편인데, 기도실과 침실, 응접실로 내부가 나뉘어져 있다. 그 옆에는 왕비의 침실인 랑마할 이다. 황제의 거처보다 크고 화려한 편이다. 그 옆에 있는 뭄타즈마할 은 샤자한의 부인 이름을 본 땄다고 하는데 지금은 민속 고고학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눈에 띄는 것은 별로 없다.
붉은 성 중앙에는 의자들이 줄지어 놓여있는데, 매일 밤 펼쳐지는 조명 쇼를 관람하는 곳이란다. 낮에는 그늘이 없어 너무 뜨겁다. 그래도 이곳에 앉으니, 밤의 빛과 소리의 향연은 체험할 수 없지만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 흰색의 거물들이 시원하게 보여 좋다. 의자 뒤로 펼쳐진 공간에는 붉은 색으로 꾸며진 작은 건물들과 사각의 물 저장고 등이 바삭 마른 채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대충 구경을 하고 나오려하니 무척 뜨겁다. 높은 붉은 성 벽이 답답함이 느껴진다.
다시 라호르 게이트 로 나와서 광장에 선다. 붉은 성을 다시 보니 인도국기가 펄럭이고 성벽위에 솟아있는 대칭의 성탑이 멋져 보인다. 3단의 성벽에 만들어진 망대가 튼튼해 보인다. 그 다음 목적지인 라즈가트를 향해 걸었다. 대로변에는 걷는 사람이 별로 없다. 햇볕은 뜨겁고, 차량은 매연을 뿜어대고 바람이 없다. 도로변의 가로수들도 지쳐보인다.
먼저 샨티바나에 도착했다. ‘평화의 숲’이라는 뜻을 지닌 추모공원이다. 인도의 초대 수상인 자와할랄 네루와 그의 딸이자 인도의 수상을 역임했던 인디라 간디, 그리고 그녀의 두 아들인 산자이 간디, 라지브 간디가 화장된 곳이다.
라즈가트에 도착하니 유명한 곳 치고는 사람이 별로 없다. 입장료는 없으나 신발 맡기는 곳에서는 약간의 돈을 받는다. 아내가 그늘에 쉬고 싶다 해서 아내에게 신발을 맡기고 들어갔다. 물이 계속 흐르도록 만들어져 있고 정원도 잘 가꾸어져 있다. 잔디밭도 넓게 조성되어 있다. 라즈가트는 마하트마 간디를 화장한 곳이다. 현재는 추모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간디에 대한 애정을 반영하듯 연 1000만 명이 방문한다고 한다. 뛰어난 조경과 평온함을 만끽하려는 일반 관광객도 많다고 했는데, 오늘은 별로 사람이 없다. 간디가 화장된 자리에 마련된 흑색 대리석위에는 노란색 꽃들로 장식된 5개의 원모양이 만들어져 있다. 그리고 대리석에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인 ‘헤이람(라마 신이여.........)이라는 글씨가 세겨져 있다. 뜨거운 대낮에 조용함을 깨는 북소리가 들린다. 한 스님이 서양 중 2명을 데리고 줄세워 걸어가며 북을 친다. 요란하게 걸어가는데 코믹하다. 청바지 차림에 머리깍은 서양중은 장난치듯 따라 간다. 앉아서 구경하니 재미있다.
잠시 쉰 다음에 가까이에 있는 간디 기념박물관에 갔다. 건물은 낡아 보인다. 정원에는 소금불매운동을 할 때 모습을 동상으로 만들어 놓았는데, 힘이 느껴진다. 입장료는 없다. 재수 없는 오토릭샤 운전사를 또 만났다. 그 남자의 느끼한 웃음이 우리도 어이없다는 한숨을 짓게 한다. 간디 박물관 입구 벽에는 Truth is god 이라고 써 있다. 인도의 국부인 마하트마 간디를 기념하기위하여 만든 박물관은 오래된 느낌을 준다. 인도 독립 운동사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간디에 대한 자료를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전시장에는 간디의 어린 시절 부터 사망 시 까지 의 사진, 언론 기사, 생활용품, 간디와 함께 인도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인사들에 대한 자료 등이 있다. 간디의 명성에 비하면 전시물이나 전시장의 규모가 부실한 편이다. 간디에 대한 예절이 아닌 것 같다. 백도픈 우리에게는 작은 박물관이 더 좋은 것 같다.
대충 구경을 한 것 같다. 한국 여행자가 소개해 준, 추천 해 준 악세르담을 가기로 했다. 책에는 없는 명소다. 최근에 만들어진 힌두사원이다. 빠하르간지에서 오토릭샤로 80루피, 또는 지하철 블루 라인 Indraprastha 역에서 내려 오토릭샤를 타라고 알려주었다. 일단 오토릭샤를 타고 가기로 했다. 야무나 강변에 있는 악사르담은 규모도 엄청 크지만 입장하는데도 까다롭다. 비디오는 물론 카메라 핸드폰도 갖고 들어가지 못한다. 모두 짐을 맡기고 맨 몸으로 들어가야 한다. 들어가려면 규정에 따라야지....... 엄청난 인파가 줄을 서고 규정대로 들어간다. 까다로운 검색대를 지나 들어가니 자유롭다. 엄청 넓다. 스와미나ㅣ라얀 종파들이 건축한 악사르담은 2005년 11월 6일에 개장했는데, 7000여명의 장인과 3000여명의 자원봉사자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 건물은 요기지 마하라지의 미래상으로 1968년 이후 계획되었다. 당시 정신적 지도자였던 그는 야무나 강변에 거대한 사원을 세울 것을 소망하고, 시도했으나 진척이 더디어 완공되지 못했다. 그리고 1971년 세상을 떠났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종파들인 이들은 이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다. 급기야 1982년 그의 제자 쁘라묵 스와미 마하라지가 스승의 꿈을 이루기 위한 노력을 계속했다. 계획에 대한 신청서가 델리 개발국에 전해졌고 18년 후인 2000년 4월에 우따르뿌라데쉬 정부가 37000평의 토지를 제공했다. 토지를 제공받자 계획을 성공적으로 이루기 위한 뿌자 의식을 거행했다. 공사는 2000년 11월 8일에 시작하여 5년여 공사기간을 거쳐 만들어졌다.
악사르담은 석재를 사용하여 정교하게 만든 중앙의 커다란 신전, 전시관, IMAX 영화관, 음악분수, 그리고 잘 가꾸어진 커다란 정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앙 신전까지 가는데도 한참 걷는다. 규모가 대단하다. 신전의 크기는 높이 43m, 폭 96m, 길이 110m 이고 붉은 사암과 하얀 대리석으로 건축되었다. 식물군, 동물군, 무용수들, 음악가들, 그리고 여러 신들이 정교한 조각으로 기초에서 지붕까지 외벽을 장식하고 있다. 모두가 돌이고 철재나 콘크리트는 사용하지 않았다.
신전은 화려하게 조각된 234개의 기둥과 9개의 돔, 그리고 20,000여개의 신상들, 고행자들, 신도들, 스승들이 만들어져 있다. 기초에는 코끼리들이 조각되어 있는데, 실물 크기의 코끼리가 148마리란다. 내부 중앙에는 3.4m의 신상(바그만 스와미나라얀)이 세워져 있고 주변에는 스승들이 만들어져있다. 힌두교의 다른 신들도 만들어 놓았다. 모두 비슷한데 이름이 기록되어 있어 구분이 된다. 시타, 라마, 크리슈나, 시바, 파르바티 등이다. 힌두교에서 시바와 브라만이 최고 신 인 줄 알았는데, 여기에 오니 변두리에 있다.
전시관에는 바그만 스와미나라얀의 생애를 전시해 놓았다. 어린시절의 모습이 세계에서 가장 작은 로봇으로 제작되어 있다. 영화관은 델리에서 최초이며 유일한 대형 스크린이 성치되어있다. 바그만 스와미나라얀이 10대에 인도 전역을 여행하는 모습을 특별 제작하여 보여주고 있다. 스크린의 크기는 26m x 20m이다. 극장 밖에는 8.2m의 닐깐트 바르니 동상이 서 있다. 바그만 스와미나라얀은 스와미나라얀 교라는 힌두교의 현대형태에서 중심적인 인물이고 신의 마지막 현시로 바그만 스와미나라얀을 믿고있다. 닐깐트 바르니는 여행할 때 사용하던 바그만 스와미나라얀의 어린시절 이름이란다.
배 타는 곳도 있다. 공작 모양의 배를 타고 인공 수로를 통과하며 세계 최초의 대학, 화학 실습실, 고대 병원, 그리고 시장 등을 지나 인도의 미래에 대한 메시지가 있는 곳에서 끝난다. 음악분수는 인도 최대의 계단식 우물이다. 연꽃 모양의 계단들이 특이하다. 여행자들의 휴식장소로 이용된다. 정원은 정돈된 잔디, 고급스러운 수목과 관목이 있다. 인도의 어린이, 여성, 영웅들을 포함한 인도 문화 공헌자들의 청동상이 곳곳에 세워져 있다. 연꽃 모양의 움푹 꺼진 정원은 세익스피어, 마틴루터 킹 등 세계의 유명인들의 말이 기록된 돌이 있다. 본 건물 주변의 연못에는 바그만 스와미나라얀에 의해 정화되었다는 151개의 강과 호수들의 물이 담겨있다.
악세르담은 2007년 12월 7일, 기네스 북에 올랐다. 인증서에는 ‘세계 최대의 종합적인 힌두사원으로 길이 110m, 폭 96m, 높이 43m 이고 면적은 25500평이다. 거대한 고대양식의 화려한 석재사원은 철골구조를 사용하지 않고 11000명의 장인과 후원자들의 노력으로 5년 동안 건축했다. 존경하는 정신적 지도자 성스러운 쁘라목 스와미 마하라자는 2005년 11월 6일 사원을 봉헌했다. 악세르담은 근본적으로 인도의 영원한 예술, 국경을 초월한 문화, 그리고 무한한 가치를 보여준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너무 넓어 구경하기도 힘들다. 배가 고프다. 식당이 보인다. 아젠타와 엘로라 석굴과 아유르 베다의 시장을 모델로 한 채식식당이라는데, 우리가 보기에는 그냥 큰 식당이다. 그림을 보고 음식을 정해서 표를 사서 음식을 주문한다. 나는 제일 비싼 탈리를, 아내는 샌드위치를 주문하여 허기진 배를 채운다. 짐은 입구에 맡겨도 돈을 들고 오길 잘했다. 먹고 나니 여유가 생긴다. 뜨거운 날에 종일 땡볕아래를 돌아다녔더니 피곤하다. 해도 지치는지 긴 그림자를 만들면서 서쪽으로 쓰러져 간다. 오토릭샤를 잡는데 가격흥정이 쉽지 않다. 몇 개의 릭샤를 보내고 40루피에 뉴델리 역으로 왔다.
아내와 함께 빠하르간지 골목으로 들어서다가 왼편에 있는 이발소가 눈에 띄었다. 인도 사람들은 유난히 머리 손질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까칠해진 머리를 손질하려고 가격을 물어보니 40루피 우리나라 돈으로 1200원이다. As you like! 당신 맘대로 깎으라고 하니 신나게 머리를 깎는다. 아내를 보더니 머리가 길다고 카트를 해준단다. 머리를 깎더니 뭐라고 하면서 얼굴에 팩을 하고 기계로 맛사지도 해준다. 가격이 약간 걱정되었지만........ 이발사 둘이서 맛사지도 하고, 면도도하고, 얼굴 팩과 짜이 한 잔까지 최대한 서비스를 받고 가게를 나오려고 가방을 매고 가격을 물어보니 가격표를 보여주며 950루피에 2명이니 60,000만원이란다. 오직 카트만하기로 했다며 항의하며 주머니를 뒤져보니 300루피가 있어 이것만 주고 나왔다. 300루피(9000원)를 준 것도 화가 났다. 골목을 걸어오며 아내와 맘껏 웃었다. 인도에서 깎았다고 말 하지 않기로 약속하고 또 웃었다.
숙소에 들어와 샤워를 했다. 사설이 깨끗하고 뜨거운 물이 나와 좋았다. 저녁식사를 하러 다시 나왔다. 거리에서 파는 머머(만두)를 사서 먹었다. 야채만두와 빠니르 만두를 먹었다. 빠니르는 인도의 치즈로 두부처럼 생겼다. 두부와 치즈의 중간 정도의 맛인데, 먹을 만 했다. 감자튀김도 사서 먹었다. 찍구라는 과일도 샀다. 모양과 색깔은 감자 같은데, 맛이 단감 맛이고 씨가 있다. 포도도 사고 바나나도 샀다. 유진이와 상희에게 줄 선물을 사러 인도냄새 물씬 풍기는 상점을 둘러보았다. 목걸이 2개를 샀다. 숙소로 돌아와 찍구와 포도, 바나나를 실컷 먹었다. 인도에서 마지막 밤이다. 내일 계획을 세워 놓고 잠자리에 들었다.
1/20 경비
전철비 12루피 토스트 50루피 점심 140루피 오토릭샤 115루피 입장료 500루피 주차비 10루피 선물 50루피 만두, 튀김 35루피 과일 70루피 숙박비 400루피 화장실 1루피 이발소 300루피
계 1673피(50,190원) 누계881,97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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