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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사찰 및 문화유적 답사기
글/정진옥
한의학에서 사람의 통증을 보는 패러다임의 하나로 ‘통즉불통 불통즉통’이란 개념이 있다. 통하면 아프지 않고, 통하지 않으면 아프다는 말이다. 즉 모든 통증이 일어나는 원인을, 우리 몸 속의 기혈이 원활히 순환되지 않고 어느 특정부위에 저체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다. 결국 환자의 통증을 치료한다는 것은 해당부위의 기혈순환장애를 제거하는 것이 그 요체가 되는 셈이다. 나는 이 명제가, 양단되어 서로 고립되고 교류가 정지된 우리 조국과 민족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개념이라고 이해하고 싶다. 허리가 잘린 우리의 삼천리 금수강산의 조국산하도 아프고, 두 도막으로 나뉜 우리 8천만 배달겨레도 모두가 다 아프다. 말 그대로 단장의 아픔이 바로 이것이리라.
가볼 수 없는, 가깝지만 너무나 먼 북녘산하 - 불과 70여년전만해도 조선팔도강산 어디라도 자유롭게 갈 수 있었던 하나의 조국이었는데, 인류의 문명이 급속히 발전해 ‘지구촌’이라는 표현이 걸맞은 오늘에 이르렀음에도, 오히려 북부조국의 풍정은 옛 선인들이 남긴 시가나 견문기를 통해 또는 일부 현대의 문인들의 단편적인 여행기를 통해서나, 아쉬움과 그리움을 달래야 하는 처지인 점이 마냥 가슴 아프다. 백문이불여일견일진대, 오호 통재라!
난 특별히 북한에 친척이나 친지 등의 연고는 전혀 없으나 그래도 분단된 조국의 산하와 세정이 못내 아쉬워 막연하게나마 북한에 대한 호기심을 간직해 왔었다. 하긴, 이는 우리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공통의 민족적 소회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1993년 11월에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줄곧 이곳 LA지역에서 23년째 살아오고 있는데, 언젠가 LA한인타운에 있었던 북한의 그림과 영화테잎 등을 판매하는 ‘고려여행사’라는 업소를 알게 되어 몇 번 그곳을 출입하면서, 풍경화 및 미인도 몇 점과‘꽃 파는 처녀’ ‘춘향전’등의 몇 영화 테잎을 구입하였었는데 이를 통하여 그 동안에 억눌려 있던 북부조국에 대한 호기심을 다소나마 충족시킬 수 있었다.
미국에서의 생활이 10여년을 지날 무렵에는, 아이들의 교육 등 뒷바라지가 고비를 넘기면서 심리적으로 다소간 여유가 생겼었나 보다. 2006년 5월부터 등산을 취미로 삼아 산을 다니게 되었으니 말이다. 산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자 한국의 산에도 새삼 호기심이 생겨난다. 작년에는 지리산을 찾아가서 비를 맞으며 홀로 주능선 43km를 종주하는 기회를 가졌다. 물론 북한의 산에 대한 동경의 에너지도 생겨난다. 마침 내가 몸담고 있던 재미한인산악회에서 북한의 명산을 등반한다는 계획을 추진한다고 하여 반가운 마음으로 주저 없이 참가신청을 했다. 그러나 중간에 미북관계가 경색국면에 들어가는 사정을 감안하여 계획이 취소된다. 실망감이 컸다.
얼마인가의 시간이 지난 2016년 7월경에, ‘미주현대불교’가 주관하는“제4차 미주동포 북부조국 불교사찰 및 문화유적 답사단”을 모집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화로 확인을 해보니, 북한의 명산들도 갈 것이라고 한다. 아내와 상의를 하고 나서 기꺼이 단신으로 참가신청을 하게 됐다. 참가신청의 변은 “내 조국의 강토인데 내 몸이 죽어지기전에 북녁산하의 풍정을 한번은 봐야 할게 아니겠는가!”이다.
13박 14일의 북한 방문에 이어 차제에 서울의 딸 내외도 만나보고 금년 3월에 태어난 외손자와도 첫 대면을 할 겸 남한에도 들리려는 계획을 가지다 보니 거의 3주일 정도 가게를 비워야 했는데, 마침 이 즈음에 학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잠시 쉬고 있는 아들이 있어, 이 공백은 염려치 않아도 되는 계제가 되었다. 수의사로서의 길을 가고 있는 아들이 타이어를 팔고 자동차를 수리하는 아버지 비즈니스를 잠시나마 경험해보는 것도 되려 여러 가지로 그 애에게 좋은 경험이 될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북한을 방문할 것이라는 소식을 들은 몇몇 지인은 나의 안전을 염려하는 마음에서, 돌아오지 못하면 어쩔 거냐며, 여행을 만류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라는 존재는 북한당국에서 볼 때 하등 이용가치가 있을 리 없는, 나이 많은 일개 장삼이사에 지나지 않는 존재이고, 또 내 스스로가 그들의 정당한 방문수칙 준수요구를 악의적으로 어기려는 의도가 전혀 없고 보면, 나의 신변이 북한당국으로부터 위협받게 될 소지는 아예 없을 것이라는 내 나름의 뚜렷한 확신이 있었다.
‘미주현대불교’의 발행인 김형근님이 말한 '여행객으로서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라는 데도 믿음이 갔다. 무엇보다도 우선 자동차가 적을 터이니 그만큼 차량사고가 발생할 확률이 낮아질 것이며, 폐쇄적인 통제사회라고 하니 그렇다면 이곳 미국이나 한국에 비하면 강도나 절도행위가 훨씬 적을 것이라는 점을 사량할 수 있었다. 또 막말로 하자면, 살만큼 산 나이인데, 더 이상 뭐가 걱정인가 라는 마음도 있었다. 사실 비행기를 타고 멀리 태평양을 건너 여행한다는 점에서 비행기 추락사고에 대한 한줄기 희미한 불안감이 있다면 있지만, 2주일 정도의 북한체류에 대한 두려움은 전혀 없었다. 내가 도통 뭘 모르는 동키호테인건가, 아니면 북한방문을 두려워 하는 그들이 그런건가?
북한방문여정은 일행 전원이 인천공항에 집결하여 공식일정이 시작되고, 일정이 다 끝나면 다시 인천공항까지 다 함께 돌아와서, 해단하는 형식이다. 주최자이며 인솔자인 김형근님을 포함하여 총 9명이라는 조촐한 규모의 답사단이 모집되었는데, 홍일점으로 여성도 참가했다. 참고로 제반 소요경비를 열거해 본다. 미리 주관처에 납부하는 금액이 $3,800이었는데, 북한 내에서 필요한 공식경비로 $3,420, 인천-평양간 왕복항공료로 $380이었다. 내가 스스로 해결키로 한 LA-인천간 왕복항공권은 San Francisco나 동경을 경유하는 United항공편을 $670에 구입했다. 북한 현지에서의 안내원에 대한 팁이나 시주 또는 성금 등의 사유로 대략 $500 정도가 소요된 점과 기타 개인적인 필요 또는 선물구입 등을 고려하면 이번 방문에 소요된 총 경비는 $6,000 수준이었다.
아무튼 2016년 8월26일에 인천으로 미리 입국하였고, 이태원에 있는 딸아이의 집에 들러 생후 5개월쯤이 된 외손자 ‘정’이를 안아보는 것으로 고국에서의 자유로운 일정을 시작했다.
제 1일 ( 2016-08-30, 화요일 ) - 평양 순안공항, 양각도 호텔
서울에서 4박을 하고 난, 8월30일 새벽에 강남역에 있는 공항터미널로 나간다. 김형근단장을 만나서 둘이 함께 04:40 출발 인천공항 행 리무진을 탄다. 곧이어 공항에서 방문단 일행 전원을 만나서 서로 반갑게 수인사를 나누고 다 함께 08:10 출발 북경행 비행기에 오른다.
13:05 북경발 평양 행 항공편을 기다리면서, 창 밖으로 우리를 싣고 북한으로 갈 것으로 보이는 고려항공 비행기를 바라보는 가슴 벅찬 감회라니! 아, 드디어 이순이 넘은 나이가 되어서야 북녁땅을 밟게 되는구나. 그러나 그렇더라도 이 모든 게 다 감사할 뿐이다.
드디어 기내에 들어선다. 단정하게 제복을 차려 입은 어린 스튜어디스들이 눈에 들어온다. 한글 이름표를 달고 있어 와락 친근감이 느껴지는데, 이름마저‘유찬란’ ‘전미성’등이라 우리가 서로 다르지 않은 한 핏줄 한 겨레라는 사실을 새삼스레 뭉클 실감한다.
우리는 지금 착륙을 위해 낮은 고도로 평양인근의 상공을 날고 있다. 우리 한반도의 지도 모양을 나르는 새의 날개에 대입시킨 고려항공 마크를 단 여객기가 고도를 낮춰감에 따라 평화로은 연초록 농지가 드러나고 이어서 도시의 윤곽이 차츰 피어난다. 저것이 북녁땅이고 아, 여기가 평양이구나.
16:30 순안공항에 착륙했다. 역동적인 고구려 강서고분의 백호그림을 형상화한 조형이‘Terminal 2’라는 표지가 있는 공항건물 외부에 부착되어 있다. 공항건물이나 기타 시설들은 아주 깨끗하다.‘국제항로 도착’이라는 안내표지가 붙은 공항대합실에는 우리 비행편의 승객 외에는 사람이 별로 보이지 않는 한산한 정경이다. 어딜가나 많은 사람들로 매우 붐비는 미국이나 한국과는 크게 대조적인 별개의 세상이다. Terminal 2 공항청사의 주차장은 건물형태가 아닌 단순한 아스팔트포장의 평지에 주차선을 그어놓은 수십면 정도의 규모인데, 주차되어있는 차량은 10여대에 불과할 만큼 한가한 풍경이다.
북한에 체재하는 동안 우리와 시종 동행하며 안내를 맡을 해외동포위원회 소속의 백광석님이 공항에 나와 우리를 환영한다. 50세 쯤으로 보이는 키가 크고 서글서글한 성품이 이내 드러나는 남성이다. 이미 여러차례 북한을 방문했던 김형근단장과는 구면이라며 서로 반가워 한다. 15인승쯤으로 보이는 자그마한 우리의 전용버스를 운전하게 될 이는 이철진이라는 이름의 30대 중반일 젊은이인데 자그마한 체격에 소박하면서도 야무질 것 같은 인상이다.
시가지를 달리는 차에서 보는 평양의 모습은 대체로 매우 깔끔하고 아름답다. 특히 공공건물들은 그 규모가 크고 건축미가 뛰어나다는 느낌을 받는다.‘해동식당’에 들려서 저녁을 먹는다. 건물의 외관이나 내부가 그렇게 세련된 곳은 아니다. 해외동포위원회(해동)에서 직영하는 곳이라고 한다. 젊고 상냥한 처녀들이 친절하고 정중하게 서빙을 한다. 음식이 맛있고 정갈하다. 대동강맥주라고 한글로 쓰인 상표의 4홉짜리 병맥주가 나온다. 난 술맛의 차이를 잘 모르는 편인데, 나로서는 맛이 매우 만족스럽다.
20:00경에‘양각도 국제호텔’에 도착한다. 양각도란 양의 뿔 모양의 섬이라는 의미인데, 한강의 여의도처럼, 대동강에 있는 섬이다. 여의도 보다는 다소 작아 보인다. 47층짜리 현대식 건물의 호텔이다. 우리 일행은 김형근단장과 Miller 보살은 각각 독실을 쓰고, 기타 단원은 2인1실로 방이 배정된다. 나는 뉴저지에 거주하시는 마이클류님과 함께 25층 19호실에 배정된다. 호텔의 건물외관이 아주 번듯하여 현대식 고층건물로서 별로 손색이 없는 세련된 느낌을 주는 것에 비하면, 호텔내부는 여러가지로 많이 다른 느낌이다. 그러나 이곳에 묵으면서 특별히 불편하거나 신경이 쓰이는 그런 것은 전혀 없었고 아주 편안하게 쾌적하게 잘 지냈다. 또 강원도나 함경북도를 방문하기 위해 여러 날을 비울 때에도 소지품을 호텔 방에 그냥 그대로 놓아둘 수 있어서 대단히 편리하다.
창문너머로 보이는 대동강과 평양시가지의 야경이 나름대로 아름답다. 투숙객들은 주로 중국인이나 유럽인들로 보였는데, 대체로 호텔이 그다지 붐비는 분위기는 아니라고 느껴진다. 오랫동안 막연히나마 꿈꾸어 왔던 북한에서의 첫날밤은 꿈이 아닌가 싶은 들뜬 설레임 속에 서서히 깊어가고 있다.
제 2일 ( 2016-08-31, 수요일 ) - 묘향산 (국제친선관람관, 보현사), 대동강맥주 축전
아침에 눈을 떴다. 유선생님과 함께 창문을 활짝 열어 제친다. 비가 내리고 있다. 간밤에 보았던 대동강과 평양시가의 전망을, 다소 어두웠다는 의미에서 흑백사진이었다고 한다면, 이 아침의 전망은 비에 젖어 다소 흐린듯 하지만 환한 밝음이 있기에 한폭의 해맑은 수채화로 보이는 느낌이다. 아름답다. 강폭이 막연히 연상했던 것보다는 훨씬 넓다. 한강에 버금가는 수량이 아닌가 싶다. 특히 물이 귀한 남가주의 강이나 시냇물을 늘상 보아오던 나에게는 아주 대단히 넓은, 제법 양양한 강으로 느껴진다.
호텔을 중심으로 상류측인 동쪽으로는 3개의 교량이 보이고 서쪽으로는 1개의 교량이 보인다. 강상에 떠있는 배들이 여러 척인데 형태로 보아 대개는 준설선이 아닐까 싶다. 강의 양안으로는 산뜻한 색깔의 고층건물들이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는 가운데, 양양한 물길이 유장히 흐르고 있는 이 정경이 참 아름답다.
구내식당에서 조반을 먹는다. 유럽인과 중국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띈다. 식당은 밝고 깨끗하고 온기가 있어 좋다. 부페식으로 차려진 음식은 종류도 많고 맛도 좋다. 음식이 차려진 뒷벽에 크고 화사한 꽃그림이 걸려있다.‘김정일화’로 불리는 꽃이다. 장미와 국화의 두 모습을 닮아 보이는 빨갛고 풍성한 꽃인데, 아마도 품종교배를 통해 새로운 종류의 화초를 만들었나 보다.
묘향산 보현사 13층 석탑과 대웅전
비가 내리는 가운데 우리를 태운 차는 묘향산을 향하여 출발한다.‘해동’측의 인사 2명이 동승한다. 관광용 도로라는 평양-향산 고속도로에는 통행하는 차량이 많지 않고 한가한 정경이다. 요즈음에 내린 비 때문인지 도로에 패인 부분이 많아, 버스 뒷자리에 앉은 리차드전님은 가끔씩 비명을 지르곤 하는데, 그래도 즐거우신지 시종 명랑모드이다. 아마도 우리들 모두의 마음이 소풍길에 나선 어린시절로 되돌아간 그런 느낌이리라.
우리 방문단원들의 면면을 짚어본다. 김형근단장의 나이가 60 전후이고, 내가 64세로 단원으로서는 가장 나이가 적은 편이다. Miller보살님은 나보다 한살 위이고, 리차드전님이 60대 후반, 마이클류 김조명 윤흥로님들이 70대 초반, 임원기 김수곤님이 80대 초반인데, 거의 모든 분들이 이미 직업에서 은퇴를 하셨거나, 은퇴를 목전에 두고계신 분들이다. 이 가운데 의사가 세분이나 계셔서 혹시 있을지 모르는 의료상의 응급상황이 생기더라도 크게 도움이 될거라는 위안이 되는데, 특히 김단장께서 반갑고 든든한 마음일 것이다.
자세한 지리를 알 수는 없으나 평양에서 북쪽으로 대략 120km를 달려서 묘향산에 도착한다. 간간이 비가 내리는 날씨이고 도로상태도 거칠어 거의 2시간이 걸린다. 먼저 도착한 곳은 묘향산에 위치한 국제친선관람관이다. 주차장에는 대형 관광버스들이 많이 서있는데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다. 우리를 맞아주는 이는 위아래 모두 청녹색의 박지로 지은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성이다. 50세 전후의 나이로 짐작되는 안내원겸 해설강사이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우산을 펼쳐들고, 묘향산의 산줄기들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곳의 한 광장을 걸어간다. 조경이 잘 되어 있어 정제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거대한 성처럼 지어진 한옥양식의 건물이 나타난다. 김정일지도자가 세계각국의 인사들로부터 받은 선물이 전시되어있는 곳이다. 10만점이라고 했는지 아닌지, 아무튼 수많은 수증품들이, 거대한 전시관 내부의 미로처럼 많은 전시실에 잘 전시되어 있다. 모든 물품에는 각기 자세한 설명문이 있다.
전시실을 옮겨 다니는 도중에, 다른 안내원의 인솔아래 단체로 관람을 하고 있는 다른 그룹의 사람들을 몇번인가 교차한다. 관람관 내부는 사진촬영금지구역이다.
관람을 마치고 나서 2층에 해당되는 높이의 전망대로 안내된다. 산 속에 있는 정자같은 구조인데 규모가 아주 넓다. 편히 앉아서 앞에 펼쳐지는 묘향산의 봉우리들을 관람토록 푹신한 안락의자가 스무개쯤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역시 청록색 한복을 입은 여러 여성 해설강사들이 다른 관람객들에게 옆에서 뭔가를 설명해주고 있다. 김일성주석도 이 자리에 앉아 묘향산 풍경을 구경했었단다. 우리 해설강사분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는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봉우리들에 운무가 너울처럼 걸려있어 제대로 된 전망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오히려 신비로운 분위기를 보게되는 셈이라고 자위한다. 김일성주석이 받은 선물을 전시하는 관람관이 따로 있다고 하는데, 우리는 이를 생략하고, 다시 차를 타고 묘향산의 불교사찰 보현사로 이동한다.
아침에 평양에서 준비하여 가져온 도시락을 먹기위해 우리는 잠시 향산호텔에 내린다. 호텔의 건물양식이 삼각형으로 아주 독특하고 멋있는데, 내부 또한 화려한 편이면서 밝고 정갈하다. 서구식 제복을 입은 젊은 여성종업원들이 있고 한복을 차려입은 여성종업원들도 있다. 2층의 어느 고급스럽게 꾸며진 Banquet Room에서 평양에서 가져온 도시락을, 종업원들의 친절한 안내와 부가적인 서비스를 받으며, 점심으로 먹는다. 투숙객이 아니면서도 다른 곳에서 가져온 음식을 먹는데 고급호텔의 Banquet Room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은, 아마도 북한처럼 대부분의 시설을 국가가 소유 관리하는 곳이 아니고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겠다.
묘향산 보현사 경내에 들어선다. 고려시대인 1042년에 창건된 절이라는데, 우선 해탈문을 지나 천왕문에 들어서니 좌우에 4대 천왕상이 나를 굽어 보신다. 남한의 일반적인 절에서 보던 천왕문과 별로 다르지 않아 무서운 형용이지만 그래도 다소 친근감이 일어난다. 좀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천왕들의 복장과 그 채색무늬가 더욱 밝고 화려하고 정교하다는 점이다.
이어서 4각9층탑이 서있고, 그 뒤의 만세루를 지나니, 정교한 양식의 8각13층탑이 있다. 대웅전은 그 다음이다. 30년간 이 절을 지켜왔다는 주지스님이 우리를 맞아 주신다. 노스님다운 간결한 체형과 맑은 용모를 지니셨다. 범상치 않은 청아한 품격의 향기가 풍겨난다. 무진한 불도의 정진에 따른 내공의 Aura인지, ‘신묘한 향내가 풍겨나는 산’에 반생을 머무심으로 어느새 온 몸과 마음에 깊이 스며든 그 묘향인지 알 수 없다. 어쩌면 ‘양쪽 모두’가 정답일 것이다. 주지스님의 독경하에 부처님전에 예를 올린다. 조그마한 등불 하나를 불전 보시함에 넣는다.
비를 듬뿍 맞으며 사찰경내의 화단에 가지런히 피어있는 빨간 맨드라미가 내 어릴적 고향집의 상념을 불러일으킨다. 또 다른 화단에는 온통 새빨간 사르비아꽃이 더욱 무더기로 피어나 있다. 웬지 사찰에 대한 낯설음과 거리감이 덜어지고 친근감이 솟아난다.
보현사 경내의 동쪽편으로는 서산대사를 기리는 건물들이 있다. 충의문 영산전 수충사들을 둘러본다. 어쩌면 북한에서는 외세의 위협에 대한 대비라는 면에서, 불법 본연의 의의랄 수 있을 견성이나 중생제도 등의 측면에 앞서 특히 호국불교에 더욱 많은 의의를 두고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범종각이 있다. 금강산 유점사에 있던 범종인데 6.25전쟁때 사찰 전체가 소실 파괴되어 이 종만 남아있기로 이곳으로 옮겨와 국보로 보관하고 있다는데, 1469년에 2만2천근의 구리와 주석을 재료로 조성하였다고 한다. 우리 일행에게는 타종이 허락된다고 하여 둘러가며 한번씩 종을 친다. 나도 우리민족의 평화통일과 이 우주만유의 안녕을 발원하며 종을 울린다.
마지막은 기념품점이다. 여러 여성판매원들이 이 지역특산의 열매나 약재, 또는 기념품들을 팔고있다. 시골에서 태어났지만 아직 다래를 먹어본 일이 없다. 다래와 찔강이라는 이곳에서 따냈을 열매 한봉지를 사서 맛을 본다. 묘향의 맛으로 기억해야겠다. 그림을 파는 코너에서 자수그림이 있기에 옛날의 시집 장가가는 아스라한 추억속의 정경을 담은 풍속화 하나를 고른다. 인민예술가 김정섭님의 유작으로 2개월에 걸쳐 손으로 한땀 한땀 수를 놓은 매우 귀중한 작품이라고 한다. 값으로 $200를 치른다.
평양으로 돌아와서 저녁식사까지 시간이 남아 대동강변에서 열리고 있다는 맥주축전에 가보기로 한다. 바로 강변인데, ‘평양대동강맥주축전’이라는 찬란한 조명장치가 더해진 환한 현수막이 걸려있다. 비가 내리고 있어 20여명은 되어보이는 젊은 여인들이 우의를 입고 손님들에게 서빙을 하고 있다. 군데 군데 차일을 쳐서 비를 피하고 있는데, 우중이라서인지 손님들이 많지 않아 한산하다.
강변에 쳐 놓은 차일 속에 자리를 잡고 앉을 수도 있고, 강상에 떠있는 유람선에 올라서 흥취를 즐길 수도 있다. 우리는 강변에 쳐진 ‘차일’아닌 ‘차우’에 자리를 잡고 앉아 맥주 한잔씩을 시킨다. ‘평양대동강맥주축전’이라는 말에는 대동강에서 열리는 축전이라는 의미와 ‘대동강맥주’라는 상표의 술을 즐기는 축전이라는 두가지 뜻이 담겨진 것으로 이해해 보는데, 사실은 후자가 더욱 합당한 이해일 것이다.
해동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한다. 역시 잘 차려진 음식이다. 식사가 거의 끝날 즈음에 식사 시중을 들던 한복을 곱게 입은 아가씨들 5명이 마이크를 잡고 율동을 곁들인 노래를 한다. ‘반갑습니다’라는 노래를 시작으로 우리가 알만한 노래들도 섞여있다. 우리가 식사를 하는 방에는 가무를 할 수 있는 장비가 아예 붙박이로 설치되어 있다. 한 아가씨는 익숙하게 여러개의 드럼과 심벌즈(Cymbals)를 신명나게 두드리며 흥을 돋군다. 다들 많은 훈련을 하였는지 아주 능숙한 솜씨들이다.
중국의 옛 기록에 ‘동이’를 언급함에 ‘가무를 즐긴다’라는 구절이 있다는데, 그 풍속이 이어져 내려오기 때문인지, 이곳 북한에서는 식사와 더불어 음주가무를 즐기는 일이 상례가 아닌가 싶다.
호텔로 돌아온 뒤에 시간도 여유가 있고, 또 일행들이 호텔지하 구내에 있는 안마실을 찾는 분위기라서‘사돈이 장에 가니 나도 가는’ 모양새로, 또 북한에서의 경험삼아, 안마를 받아본다. 한 여성이 한 시간을 열심히 해주는데, 안마를 받아본 일이 별로 없어 솜씨의 우월성 여부를 판단키는 어려우나 정성을 다하는 자세는 느껴진다. 이 여성에겐 이 1시간이 무척 힘들고 길었을 것이니 고맙고 미안하다. 요금은 $45이다. $15를 얹혀 준다.
아침에 호텔을 나갈 때 세탁물 몇 가지를 세탁물봉지에 넣어두었는데, 말끔히 세탁되어져 546원이라는 요금명세표와 함께 책상위에 가지런히 개어 놓여져 있다. $1를 100원으로 환산하니, $5.46인 셈이다. 호텔 체크아웃을 할때 프런트에서 일괄 계산한단다. 누군지 모르지만 우리 북쪽 동포여성의 손이 갔을 것을 생각하니 고마운 느낌이 각별하다. 마음이 훈훈해진다.
제3일 ( 2016-09-01, 목요일 ) - 만경대, 만수대 창작사, 평양지하철, 룡악산(법운암)
새벽에 일어나서 우리일행 몇과 해동측 1인이 함께 양각도국제호텔 주위의 대동강변을 산책한다. 휘휘 늘어진 가지의 수양버드나무가 유난히 많이 눈에 띈다. 평양을 부르는 또 다른 말로 ‘유경’이라는 호칭이 있는데, 옛부터 버드나무가 많기에 불려진 이름이란다. 그래서 ‘유경호텔’이라는 말이 지어졌나 보다.
강물이 대체로 맑은 편이나, 그렇다고 아주 깨끗한 것은 아니다. 4~5인의 남자 주민들이 강변에서 낚시를 하고 있는데, 김단장은 그들에게 다가가서 조황을 살핀다.
호텔에서 조식을 마친 후 김일성주석의 생가인 만경대고향집을 방문한다. 평양의 지리를 알지 못하니, 어디쯤인지 잘 알 수는 없지만, 만경대라는 누각에서는 강물이 바로 아래로 보이니, 아마도 평양시내의 대동강변 어디쯤이라고 여겨진다.
역시 한복을 입은 중년여성이 우리를 맞아 안내와 해설을 담당한다. 김일성주석이 태어나고 어린시절을 보낸 곳이라는데 아름답고 정결하게 조성되어 있다. 4대조께서 이 지역 지주의 산지기를 하여 대대로 생계를 이어왔던 집이라는데, 방이 2개로 기억되는 자그마한 안채와 바로 그 앞에 작은 헛간이 하나, 또 한켠으로 2평이 안될만큼 조그만 움막이 전부인데, 집터 전체가 50~60평이 될것 같은 아담한 생가였다.
안채에는 가족사진들과 투박하고 작은 앉은뱅이 서안과 옛 책을 꽂아둔 작고 거친 나비장이 있다. 부엌에는 시렁이 있고 밥상과 그릇들이 얹혀져 있다. 헛간에는 농기구들과 베틀이 하나 놓여있다. 모두 짚으로 지붕을 이었는데, 지붕 위로 호박넝쿨들이 뻗어 올라가 있어 옛 시골마을의 우리집을 보는듯 하다. 작지만 정결하게 개축 관리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과장이 없는 조촐한 느낌이다. 이 고향집 부근에 기념품 판매점이 있다. 꿩털로 만들었다는 부채를 하나 산다. 신기하리만큼 정교하다. 누나에게 선물할 요량이다. $7이다.
잠시 걸어서 만경대라는 누각에 오른다. 아름다운 소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공원같은 정경이다. 바로 아래 편으로는 강물이 흐른다. 바로 옆에는 간단한 매점이 있다. 대략 1시간 가까이 고향집을 둘러보는 동안에 세 그룹에 20명 내외의 주민 및 학생들을 지나친다.
다시 차를 타고 20분이 채 안되어 도착한 곳은 만수대 창작사이다. 큰 광장에 있는 건물인데, 건물밖 한편에 김일성 김정일 부자가 각기 말에 올라타고 있는 역동적인 이미지의 황금빛 동상이 세워져 있다. 여러가지 화풍의 그림들을 전시하여 팔고 있다. 썩 내 마음에 드는 것을 만나지 못하여 그냥 구경만 한다. 우리 일행 몇몇분은 나름대로 마음에 드는 그림을 고르신다.
‘해동’산하의 시설이라는‘모란봉 면회자숙소’라는 간판이 걸린 곳의 식당에서 냉면으로 점심을 먹었다. 평소에 냉면을 아예 안 먹는 편이지만, 까다롭게 굴기도 안됐고 호기심도 있어, 내키지 않았지만 한그릇을 쉽지않게나마 비운다. 맛은 잘 모른다.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나오는데 30~40인의 남녀노소의 사람들이 화목한 분위기에서 풍성한 음식상을 앞에 놓고 담소를 나누는 정경이 있었다. 어느 분이 팔순을 맞았기에 그 가족잔치 모임이라는 설명을 듣는다. 그러고 보니 벽면에 ‘경축’이라는 큰 글씨가 부착되어 있다. 이 잔치주인공의 장수와 갸륵한 이 가족분들의 행복을 비는 정겨운 마음이 우러난다.
이 건물 앞 길건너에 빙수라는 간판이 걸린 미니판매대가 있고 그 앞에 너댓명의 주민들이 야외 탁자에 둘러앉아 무엇인가를 구입하며 휴식을 취하는 모습이다. 지나가는 2인의 여성들의 체형이나 옷차림이 꽤 멋있다.
다시 차를 타고 20분 가까이 간다. 지하철을 탑승하는 순서이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지하철역 입구에서 차를 내린다. 부흥역이다. 행인들이 많다. 대학생인듯한 젊은이들이 줄지어가듯 몰려서 지나간다. 초등학생일 어린 두 소녀도 큰 책가방을 메고 뭔가를 열심히 얘기하며 지나가는데 아주 귀엽게 생겼다. 모두가 다 나름대로 통일된 교복을 입었다.
지하로 계단을 내려가니 경찰관같은 제복에 안내원이라는 완장을 찬 여성이 개찰구를 지키고 있다. 한 떼의 수많은 사람들이 더 아래쪽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온다. 아마 이 지하철역에서 막 내린 승객들이겠다. 우리는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를 탄다. 일직선으로 곧장 내려가는데 그 깊이가 경이롭게 길다.
전동열차가 들어와 있는데 역 구내의 플래트폼 길이가 3칸짜리 전동차의 길이와 일치한다. 역 구내가 고전적인 양식으로 아름답다. 화려한 샹들리에(Chandelier)가 줄지어 있고 조명도 밝다. 천정을 받치고 있는 기둥들이 마치 어느 카톨릭성당의 기둥인양 꽤 웅장하고 아름답다. 대형벽화들도 눈을 끈다. 일터로 출근하는 인민들의 밝은 모습을 그린듯 하다. 밝고 화려한 꽃그림들도 있다.
우리는 부흥역에서 열차를 타고 바로 다음 역인 영광역에서 내린다. 열차노선도를 보니, 노선은 2개이고 총 16개의 역명이 표기되어 있는데, 역 이름들이 예컨대, 봉화 승리 통일 개선 전우 광복 건국 전승 등으로 다분히 전투적인 에너지를 담고있다. 북한이 당면 감당하고 있는 외세에 대한 긴장감 위기감의 발로가 아닌가 이해해 본다. 지하철을 견학하는데 약 30분이 걸린다.
북한의 지하철역
이제 평양의 금강산이라는 룡악산을 향한다. 용악산이라는 한글현판이 걸린 일주문 성격의 관문에 다다른다. 이 문을 들어가기 바로 전에 화장실이 있어 차를 세운다. 길 옆에 자매간이라는 두 여인이 노변에서 파라솔 아래로 좌판을 차려놓고 몇가지 음료와 과자류를 팔고있다. 가로 70cm, 세로 35cm쯤의 아주 작은 좌판에 약 20여 종류의 군입정거리를 펼쳐 놓았다. 북한주민들의 군음식류에 호기심이 생기고 또 북녁 여인들과 얘기도 나누고 싶어 진열품목들을 살펴본다. 음료로는 ‘파이내플단물, 대성산샘물, 딸기요구르트, 복숭아향탄산단물, 지당산소주, 대동강맥주’ 등이고 기타 군것질감으로는 ‘사탕을 입힌 맛있는 효모빵- 빵알’, 도넛, 꽈배기, 마른오징어, 마른명태 등을 볼 수 있다.
꽈배기를 몇 봉지 집었다. 돈을 내는데 우리를 안내하는 ‘해동’측 사람이 나서서 이를 받는다. 이들의 개인적인 장사가 아니고 공적인 영업이란다. 그들을 대신하여 해동요원이 돈을 받는 것은 아마도 외국인들에 대한 가격과 내국인들에 대한 가격을 서로 다르게 운용하는 사정도 있겠거니 싶다. 어쨌거나 우리는 어린 시절로 돌아간듯 소박하게 고소한 그 맛을 즐긴다.
해발고도 271m라는 용악산을 찾아왔지만 실제로는 국보 제13호인 법운암이라는 사찰을 답사하려는 방문이다. 이름이 ‘암’이지만 그래도 본전 외에도 독성각 산신각 칠성각 등의 작은 건물들이 뒷편에 자리하고 있다. 경내가 넓지는 않으나 웬만큼 짜임새가 있고 주변이 아주 정갈하다. 4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젊은 스님이 맞아 주신다.
고구려시대인 서기 392년에 창건된 고찰로, 평양시민들이 많이 찾으며, 김일성주석은 그의 어린시절부터의 전 생애를 통하여 200회 이상을 찾아온 것으로 알려져 있단다. 역사공부를 하다가 스님이 되었다는 분께 신도수가 얼마나 되는가를 묻는다. 500인 내외로 그리 많지 않다는 답이다. 주지스님의 인도로 간단한 예불을 마치고 시주함에 작은 정성을 담는다.
경사진 비탈에 터를 잡은 까닭에 좁고 길쭉한 모양새의 사찰의 경내 한켠에는 소풍을 나온 것으로 보이는 10여인의 주민들이 나무그늘 아래에 자리를 잡고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다. 이곳에 있는 참중나무와 느티나무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사찰건물의 일부와 5층석탑이 창건당시의 것이란다. 본당건물은 조선조 초기에 중건한 것인데 기둥의 일부는 원래의 목재가 남아있다며 여러가지 건축양식면에서의 부가적인 설명을 하신다.
본전 앞마당에 있는 5층 석탑은 그 높이가 2m 남짓인데 그 형태가 지극히 단순 소박하다. 세월의 풍상에 마모된 것인지 원래의 조성이 그러했던 것인지, 간단한 대석위에 상륜부없이 탑신만 있는데, 5개의 지붕돌이나 몸돌의 생김 생김이 두루뭉실하다. 뉴욕에서 오신 임박사님이 특히 이 탑에 매료되셨는지 여러 차례 찬탄을 금치 못하신다. 내 어두운 안목으로는 그저 아무런 기교없이 대충 깎아세운 단순한 돌들의 집합체가 아닌가 싶은데, 보시는 눈이 다르시다.
그러고 보니, 만약 이 탑을 여인에 비유한다면 세련된 도시숙녀이기 보다는 순박한 산골처녀라 하겠다. 그림이라면 정교한 사실화 아닌 담백투박한 민화이겠고, 건축물이라면 열두대문 고대광실이 아닌 두메산골 초가삼간이 맞을 듯하다. 서예에 비유하면 40대 젊은 필가의 용약비상하는 획필이 아닌 구순에 이른 노서가의 유순유치한 필체일 것이다. 노자의 ‘대교약졸’의 경지가 이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임박사님의 안목과 연륜에 경의를 느낀다.
이 탑에 대한 주지스님의 부연이다. 김일성주석이 북한의 통치자가 된 후에 언젠가 이곳을 찾는다. 석탑이 어디로 갔느냐고 묻는다. 수행한 사람들이 무슨 탑이냐며 고개를 갸우뚱한다. 탑이 분명히 이곳에 있었다며 찾도록 지시한다. 묻히고 흩어진 부분들을 주변에서 어렵게 찾아낸 것이란다. 그렇게 보니 맨 밑의 몸돌 하나는 새로 깎은 돌임이 완연하다. 1600여년의 광음을 지내온‘대교약졸’일 탑전에서 팔팔한 젊은 스님을 모시고 각자 기념사진을 찍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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