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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15:20
목매인 것을 멀리하라.
이번 국회에서 특기할만한 것 중 하나는 개를 도살하여 먹게 되는 것을 금지하는 개 식용금지 법을 통과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도살에 관한 것을 관심있게 살펴보던 가운데 백석대학교(전, 천안대학교) 김경진 교수와 한국표준과학 연구원의 김영호 연구원의 자료를 통해 살펴보는 가운데 짐승을 도살할 때 원칙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첫째, 고통을 최대한 줄이는 것이고, 두 번째 죽음의 시간을 최대한 짧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 도살체인 짐승과 그 현장을 청결하게 유지할 것 등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금지하고 있는 것처럼 짐승을 목을 매달아 죽이는 것은 이 원칙과 상당히 멀다는 것입니다. 목을 매달기 때문에 짐승이 죽는데 걸리는 시간이 길어지게 되고, 길어진 만큼 짐승에게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을 주게 됩니다. 그리고 죽어가는 동안 느끼는 극도의 두려움과 공포, 심지어 분노까지 표출하게 되어 살 속으로 파고 들어갑니다. 그래서 그 고기를 먹게 되면 바로 그 고통, 분노, 공포까지 고스란히 먹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것을 알고 목매달아 죽인 것을 먹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것인데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과 멀어져 가다보니 자연히 우상을 섬기게 되고 자극, 극단, 잔인한 방법으로 짐승을 죽여 먹는데 까지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할 땐 하지 말라고 하는 이유가 분명이 있기 때문이며 우리 인간에게 분명히 해가 되기 때문에 금하시는 것입니다.
짐승이 목이 매달린채 죽어갈 때 느끼는 공포와 분노의 감정이 체내에 생화학적 변화를 일으켜 막대한 양의 호르몬을 분비시키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분비된 호르몬은 혈관을 타고 순식간에 몸 전체로 퍼지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유독 물질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을 매 죽인 짐승의 고기를 먹는 것은 결국 유독물질을 섭취하는 셈이고, 미국의 한 영양학회 보고서에 따르면 목을 매 죽인 고기에는 유독한 피와 노폐물이 가득 차 있으며, 이 유독물질은 사람의 세포를 교란시킬 뿐만 아니라 정신까지 흥분시키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습니다.
근동지방이란 특수한 사막 환경과 생화학 및 식품영양학 등의 미발달에 따른 당시 상황을 고려해볼 때 구약의 음식 규례 가운데 예루살렘공회에서 논의됐던 음식 규제는 시대와 과학을 뛰어넘는 성서의 초월성을 유감없이 대변해주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반면 은혜라는 명분하에 이러한 구약 적 상황을 폐지시킨 것은 우리들 편리주의에 부합은 하였지만 건강과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교훈은 상당히 훼손시키는 결과를 가져 왔습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미래를 통찰하고 무엇이 인간에게 더 중요한 지를 주고 싶으셨던 분입니다. 비록 까다롭고 내가 부담스러워도 말씀이라고 하면 순종하는 게 여러모로 나 자신에게 유익과 은혜를 가져다준다는 것을 믿으시고 순종하시면 좋겠습니다.
요즘은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데요. 과거에는 목을 매달아 죽일 때 몽둥이로 개에게 반복적으로 가학적 행위를 한 후 죽이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해부학적으로 조사해보면 림프계는 쪼그라들고 부신피질이 심각하게 부어 있게 됩니다. 부신과 관련된 교감신경의 자극을 지속적으로 받게 되면 여기서 생성되는 호르몬에 의해 위에 구멍이 뚫리거나 창자가 녹아내리게 됩니다. 이것이 ‘스트레스 호르몬’인데 바로 「코르티솔」이라고 부릅니다.
사람도 비슷하거든요. 고민과 고통을 반복적으로 겪게 되면 면역체계의 기능은 저하되고 부신은 붓게 됩니다. 그래서 암을 비롯해 각종 질병을 유발하게 되는 것이죠.
코르티솔 말고도 극한 상황에 접했을 때 분비되는 호르몬이 또 하나 있는데요. ‘분노의 호르몬’이라 불리는 「노르아드레날린」 있습니다. 보통 싸움이나 대결 등 분노가 폭발될 때 분비되는 노르아드레날린은 최강의 각성제인 도파민의 형제분자라고도 할 수 있는데요. 분노를 느낄 때 뇌 뿐 아니라, 전신의 교감신경에서 분비되는 이 신경전달물질은 모르핀이나 코카인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맹독성을 갖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말씀드리면 우리가 광야에서 불평과 원망으로 하나님께 대항했던 이스라엘 백성이 뭐에 물려 죽었는지 아시지요? 예, 뱀에 물려 죽었습니다. 바로 그 뱀의 독이 따지고 보면 노르아드레날린과 같은 종류의 성분들인 것입니다.
이밖에 ‘공포의 호르몬’도 있습니다. 뭔가에 놀랐을 때 대량으로 분비되는 아드레날린이 그것입니다. 코르티솔, 노르아드레날린, 아드레날린 등은 마약이나 각성제와 구조나 기능면에서 비슷한 데가 많습니다. 죽음이란 극단적 상황에서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이 세 가지 신경전달 물질은 폭발적으로 분비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죽음의 시간이 긴 짐승의 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그래서 위험하다고 성경은 굳이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금하라’는 결론만 제시했을 뿐입니다.
○ “금하라,”는 말씀을 가볍게 넘기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래 이제부턴 어차피 개고기 먹기는 쉽지 않으니 안 먹으면 되지 않나?’ 하고 대충 넘어가려고 할 텐데요. 이게 하나님께서 언급해 주시고자 하는 의미는 굳이 개고기만 아니라는 것입니다.
금하고 취해서는 안 될 것이 개 말고도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보지요. 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괜찮아!’ 하고 가볍게 넘기는 분들이 있습니다. 술도 “금하라. 취하지 말라.”(엡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잠23:29 재앙이 누구에게 있느뇨 붉은 눈이라고 했고, 잠23:31 포도주는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고 말씀합니다. 어떤 분은 취하지 말라고 했기에 마시는 것은 괜찮을 것이라고 자조합니다.
성경은 인간의 욕심이 한없는 것을 아시고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먹음직, 보암직,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워 범죄 했다는 것을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여기에 걸리는 문제는 즉 우리 속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나 영적유익, 나아가 건강에 좋지 않기에, 그 필터 작용으로 양심에서부터 꺼림 직하도록 하셨습니다.
양심을 속이는 일은 싸워 이겨야 할 일이지, 타협하거나, 항변할 일이 아닌 줄 믿습니다. 고전10:29, 31~33절에서 “양심은 너희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라고 했습니다. 내 양심은 괜찮아 해서 술 마셨는데 그 것을 바라본 다른 지체가 아무도 아무렇지 않게 마시던데 해서 그 사람은 절제 없이 마시다가 타락하거나 건강에 손상이 가게 될 경우 그것을 괜찮게 보이게 한 나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 혼자서 집에서 음식삼아 마신다는 항변에는 누가 양심의 문제에 넘어갈 일은 없겠지만 그것을 남들 앞에서 했을 때 죄를 짓게 만들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문제가 됩니다. 진정으로 내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것은 남도 그렇게 판단했을 때 가능할 줄 믿습니다.
24년은 몸과 마음에서부터 정결하고 거룩하게 생활하는 목표를 세우고 나가기를 소망합니다.
거룩하면 거룩한 만큼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기뻐하십니다.
○ 구별은 구약시대부터 강조되어 온 일이거든요. 그래서 오죽하면 먹는 문제도 되새김질 하는 것, 굽이 갈라진 것 등을 추천해 주셨겠습니까?
목매달아 죽인 것을 멀리하라는 것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과 생태학적 건강을 유린하기에 먹지 말라고 했다면 반대로 이 음식은 먹으라고 한 것은 그만큼 인간에게 유익을 주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소나 양과 같이 굽이 갈라진 것과 되새김질하는 짐승을 먹도록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의 방식으로 말하면 이렇게 먹게 하는 짐승을 「코셔 동물」이라고 합니다.
소, 양, 염소 같은 동물을 코셔 동물들이라고 하는데 이 동물을 해부학적으로 살펴보면 추골동맥이 목 부위에서 경동맥과 하나로 합쳐진 채로 머리로 이어져 있습니다. 이런 동물들을 도살할 경우 경동맥만 칼로 끊으면 피가 한꺼번에 쏟아지기 때문에 짐승은 순식간에 의식을 잃게 됩니다. 그만큼 고통을 느낄 시간이 짧아진다는 것이죠. 코셔 동물에게서 이러한 특징이 발견된다는 것은 대단히 놀라운 일입니다.
반면 말, 돼지와 같이 코셔가 아닌 동물들은 추골동맥과 경동맥이 별도로 머리 속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도살할 때 짐승의 고통이 가중됩니다. 바로 여기에 먹어서는 안 될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한 백성들인 유대인들의 식량이 될 동물 그리고 오늘 날 신실한 크리스천들에게 먹게 끔 할 이러한 짐승은 도살 과정에서 겪게 될 극심한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려는 하나님의 따뜻한 배려였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절반만 코셔인 동물은 성경에 기록된 이 4종류의 동물을 빼고는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이 구절에 의구심을 품은 한 동물학자가 실제로 전 세계 모든 동물들을 대상으로 직접 확인 작업을 진행해 봤다고 합니다. 그 결과 정말 딱 4종류의 짐승 외에는 한 가지 코셔 조건만 만족하는 동물은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 동물학자는 어떻게 성경이 정확히 4종류 동물만을 지적해 절반만 코셔인 것을 알아서 기록으로 남겼을까! 의아하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그렇다면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된 것'이란 말을 단지 구별되게 살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이것만 먹어 하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원어엔 「마퍼레세 파러사 버쇼사앗 쉐사아 퍼라소트」라고 기록했습니다.
인상적인 것은, 앞부분의 두 구절('굽이 갈라져'라는 부분-마퍼레세 파러사)과 마지막 구절('쪽발'-퍼라소트)이란 부분이 모두 「파라스」라는 어근에서 왔습니다.
「파라스」라는 말은 “빵 같은 것을 자르다.” to break one's bread to any one라는 식으로 종종 사용합니다. 또 “나눠서 분배하다.”는 뜻으로 쓰입니다. 사58:7절에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란 말씀이 있는데 “나주어 주며”가 「파라스」입니다. 즉 share(함께 공유하다) 혹은 offer(제공하다)라는 의미가 강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들을 참고한다면 '굽이 갈라졌다'는 것을 단지 “구별되게 살아라.”는 “구별주의 삶만을 강조하지는 않는다.” 라는 정도의 눈치는 채실 것입니다. 그보다 훨씬 더 크고 원대한 다른 뜻이 분명히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죠.
“구별되게 살아야 되지만 동시에 “나누어 주고” “함께 공유하는 삶을 살라는 뜻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빵을 떼어서 나눠 먹잖아요? 그것처럼 고기도 떼어서 나눠 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하게 위해서 굽이 갈라진 짐승을 데려다가 시청각적으로 교훈하신 것입니다.
○ 이어서 되새김질하는 짐승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되새김 질 하는 소의 경우 하루에 2만5천 번에서 3만 번을 되새김질 한다고 합니다. 밤에 주로 하고 하루에 6~9시간 정도를 13~20회 정도 나누어서 합니다. 그런데요. 신기한 것은 되새김 질 할 때 이상한 소리나 상황이 발생하면 멈추고, 안심이 될 때 다시 되새김질 한다고 합니다. 한우의 특징이란 논문에 보면 되새김 행동은 초지의 상태를 파악하기 위한 수단으로 한다고 보고되고 있습니다.
즉 음식을 조용히 음미하며 씹는 것은 주변을 탐색하고 자신의 안전을 확보하는 기기 막힌 과정입니다. 나아가 한 번에 대충 소화시키고 마는 것이 아니라 몇 번이고 나눠서 되새김질하고 또 합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만드시고 유전자를 그 속에 집어 넣으셨어요. 덩치만 커서 잡아먹기 좋은 살진 짐승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말씀을 오랫동안 묵상하게 하고 많이 해야 할까요? 그러는 가운데 주변 돌아가는 것을 영적으로 분간하고 살피라는 뜻도 되고, 밤에 되새김 질 하는 것처럼 우리가 가장 타락하기 좋고 유혹받기 좋은 시간에 오히려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 가까이 하라는 뜻이 있는 줄 믿습니다.
그리고도 또 쾌락과 세상에 너무 많은 유혹을 자주 받으니 자주 종종 말씀을 되새기고, 묵상하라. 좀 더 자주 기도하라. 이 기가 막힌 뜻을 외면하면 안 되는 거 아닐까요?
그리고 풀만 먹으면 어떻게 사냐? 할 수 있는데요.
물론 고기 예찬 가들의 이야기입니다만 그런데 실제로 소는 풀만 먹고도 저렇게 어마어마한 짐승으로 컸잖아요?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은 풀만 갖고도 얼마든지 커다란 짐승을 만들 수 있다는 교훈 아닙니까? 그러므로 정말 하나님 뜻 가운데 살면 별 볼일 없는 것 갖고도 얼마든지 능력을 주시고 권세를 부어 주실 줄 믿습니다.
이와 같이 볼 때 먹는 문제가 단지, 먹는 문제로 끝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이러한 짐승을 먹게 하고 혹은 먹지 못하게 함으로서 우리에게 주시는 유익과 은혜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에 먼저 초점을 맞추고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셔서
땅에서도 안전하고 유익한 삶을 사시고, 죽어서도 “내 뜻대로 살다 왔구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칭찬받고 상급 받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같이 합니다. 구별되게 살자. 나누면서 살자. 내게 능력주시는 하나님의 권세를 믿고 살자.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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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멘
주옥같은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