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요약 내용은 그간 출제된 기출문제의 여러 지문들을 종합하여 작성한 것입니다.
시간상 교재를 읽지 못하신 분들은 최소한 이것만이라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 不備 드림- )
제1장 통일 정권의 성립
<시대개관>
15~16세기에 걸쳐서 전개된 전국 쟁란의 결과, 일본 각지에서 유력한 다이묘들이 출현하였다.
다이묘들 사이에서는 점차로 전국 통일의 기운이 조성되었다.
여러 다이묘들 중에서 특히 오다 노부나가가 먼저 두각을 나타내었다.
오다 노부나가는 1560년 스루가 지역의 강력한 다이묘였던 이마가와 요시모토를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무찌른 후에 급속하게 세력을 넓혔다.
1568년에는 드디어 교토로 진출하는데 성공하였고, 통일 사업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러나 그는 1582년에 가신의 반란으로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오다 노부나가가 사망한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즉시 군사 행동을 개시하여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후계자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그는 천황의 권위를 최대한 이용하면서 여러 다이묘들을 차례로 굴복시키고, 1590년에 드디어 전국을 통일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 여세를 몰아 조선을 침략하였으나, 결국은 실패하고 1598년에 사망하였다.
노부나가 시대와 히데요시 시대를 거치면서 병농 분리가 완결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무사는 직접생산에서 분리되어 조카마치(城下町)라는 도시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특히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검지와 가타나가리 정책을 엄격하게 실시하여 근세사회 질서의 기초를 공고히 하였다.
1.1 오다 노부나가
1.1.1 통일 기반의 확립
전국시대 후기부터 통일의 기운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전국 다이묘 중에서 선두 주자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오와리(尾張) 지역에 근거하고 있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였다.
오다 노부나가의 이름이 천하에 알려지게 된 것은 1560년 여러 유력한 다이묘들 중에서 제일 먼저 교토로 입성하고자 기세를 올리며 오와리를 공격해 온 스루가(駿河) 지방의 대 다이묘였던 이마가와 요시토(今川義元)의 대군을 『오케하자마(桶狹間)』전투에서 격파하면서부터였다.
오다 노부나가는 이마가와씨의 지배에서 해방되어 미카와(三河) 지역을 탈환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동맹을 맺어 배후의 우환을 없앤 다음, 서부 일본 지역의 공략에 전념하였다.
오다 노부나가는 1568년에 상경(上京)을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오미(近江) 지역의 전국 다이묘인 롯카쿠씨(六角氏)를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교토로 입성하였다.
1.1.2 통일전쟁
노다 노부나가는 1570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연합하여 오미 지역의 아사이씨(淺井氏)와 에치젠(越前) 지역의 아사쿠라씨(朝倉氏)를 아네가와(姉川) 전투에서 격파하였다.
또, 다음해에는 히에이잔(比叡山)의 엔랴쿠지(延曆寺)를 불태워 중세 이래의 강대한 사원 세력을 타도하였다.
1573년에는 오다 노부나가와 사이가 벌어져 대립하게 되었던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교토에서 추방하니, 형식상으로나마 명맥을 유지하던 무로마치 막부는 멸망하였다.
오다 노부나가는 1575년에는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의 아들인 다케다 가쓰요리(武田勝賴)를 미카와(三河) 지역의 『나가시노(長條)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군과 연합하여 무찔렀다.
이 전투에서 오다군은 뎃포(鐵砲)라고 하는 화승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오다 노부나가는 교통의 요지인 오미(近江) 지역에, 1576년 1월부터 거대한 『아즈치성(安土城)』을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웅장한 천수각(天守閣)을 중심으로 하는 성을 건설하고 그 곳을 통일 사업의 거점으로 삼았다.
1582년 6월 초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伸秀吉)를 격려하기 위하여 소수의 병력만을 이끌고 교토의 혼노지(本能寺)에서 숙박하던 중에 가신인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의 기습을 받고 처참하게 최후를 마쳤다.
오다 노부나가는 자신이 지배하는 지역의 경제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조카마치(城下町)에 상공업자를 불러들였다.
그리고, 라쿠이치(樂市). 라쿠자(樂座) 제도를 시행하여 상업을 촉진하고, 새로 형성된 도시를 번영하게 하려고 하였다.
훗날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조카마치를 건설하면서 이 제도를 계승하였다.
1.2 도요토미 히데요시
1.2.1 전국통일
오다 노부나가의 통일 사업을 계승한 것은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였다.
1583년에는 동료였던 시바타 가쓰이에(紫田勝家)를 오미 지역의 시스가타케(賤ケ岳)의 전투에서 물리치고 최고 실력자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 해에 이시야마 혼간지 자리에 거대한 규모의 오사카성(大板城)을 건설하고 전국 통일의 거점으로 삼았다.
1.2.2 천황과 도요토미 히데요시
1586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교토에 광대한 부지를 확보하고 웅장한 주라쿠다이(聚樂第)라는 성곽을 건설하였다.
그리고 1588년에 고요제이(後陽成) 천황을 주라쿠다이에 행재하게 하였다.
1.3 검지와 가타나가리 정책
1.3.1. 검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책 중에서 후세에 가장 많이 영향을 많이 미친 것은 검지(檢地)라고 하는 토지 조사정책과 『가타나가리(刀狩り)』라고 하는 무기 소유 금지정책이었다.
검지는 전국시대 말기부터 몇몇 다이묘들이 이미 시행하였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실시하였다.
이와 같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실시한 토지 조사 사업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관직명을 빌려서 특히 『다이코 검지(太閤檢地)』라고 하였다.
1.3.2 가타나가리
검지정책을 통하여 구체화된 병농 분리정책이 보다 명확한 형태로 시행된 것이 『가타나가리(刀狩り)』 정책이었다.
가타나가리는 농민이 도검을 비롯한 무기를 소지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가타나가리 정책의 시행에 의하여 무기는 원칙적으로 무사 신분에 의하여 독점되었다.
1.4 조선 정책
1.4.1 조선 침략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망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세계를 정복하려는 야망을 품고 오랜 시간을 두고 침략을 구상하였다.
조선을 침략하기 이미 5년 전에 명(明)과 조선은 물론 동남아시아 지역까지 침략한다는 소문이 공공연하였다.
1592년 음력 4월, 조선 침략군이 일본을 출발하였다.
그리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중국 대륙을 점령한 후, 중국을 기반으로 하여 동남아시아 지역과 인도 지역까지 지배하려는 꿈을 꾸고 있었다.
1.4.2 조선의 반격과 휴전 교섭
그러나 일본군이 평양까지 진격한 후에는 전쟁 상황이 달라졌다.
조선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였고, 조선군도 전열을 가다듬어 조직적으로 반격을 개시하였다.
1.4.3 정유재란
협정에 따라 일단 휴전이 성립되었으나, 명의 사절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에 봉한다는 칙서와 금인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전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크게 분노하여 1597년에 재차로 조선 침략을 명하였고 전쟁은 다시 시작되었다. 정유재란인 것이다.
1.5 모모야마 문화
1.5.1 건축과 미술
도요토미 정권시대를 거치면서 일본은 문화적으로도 변환기를 맞이하였다.
불교의 영향력이 감소하고 현실 생활을 긍정하는 풍조가 확산되었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문화는 다이묘들의 거성(巨城)이었다.
성은 기본적으로는 군사 시설이었으나, 다이묘의 주거를 겸한 공간으로서 권력을 가시적으로 과시한 조형물이었다.
성에는 천수각(天守閣)이 높이 솟아 있는 것이 특색이다.
아즈치성, 오사카성, 후시미성(伏見城),히메지성(姬路城) 등의 천수각이 유명하다.
건물의 내부는 호화스런 조각과 그림으로 장식되었다.
그림의 소재로는 자연 경관, 조수, 화초, 인물 등이 선택되었다.
이러한 화풍은 주로 가노파(狩野派)라고 불리는데,『가노 에이토쿠(狩野永德)』와 가노 산라쿠(狩野山樂)에 의하여 대성되었다.
1.5.2 예능
예능 방면에서도 대중화의 경향이 두드러졌다.
특히 다도(茶道)의 『센노 리큐(千利休)』는 와비차(わぴ茶)의 형식을 완성하였다.
그 밖에 꽃꽂이, 향도(香道), 바둑, 장기 등이 서민층에도 보급되었다.
일본의 대표적인 가면 음악극인 노가쿠(能樂)도 서민층에게 애호되었는데, 당시에 『이즈모노 오쿠니(出雲阿國)』가 혜성같이 나타나서 이상하고 현란한 옷차림을 하고, 노(能)와 교겐(狂言)의 전통에 입각한 『가부키오도리(歌舞伎踊り)』를 선보여 서민들의 인기를 독차지하였다.
17세기 전기의 건축과 미술을 상징하는 것은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어 조성된 『닛코(日光)의 도쇼구(東照宮)』였다.
인물 및 용어 해설
아케치 미쓰히데(明智秀光), 고요제이(後陽成) 천황, 도요토미 히데쓰구(豊臣秀次),
가노 에이토쿠(狩野永德), 센노 리큐(千利休), 후루타 오리베(吉田織部), 잇코잇키(一向一揆),
아즈치성(安土城), 라쿠이치(樂市).리쿠자(樂座) 제도, 가노파(狩野派), 와비차(わぴ茶)
제2장 에도 막부와 지배 질서의 형성
<시대개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603년에 에도(江戶)에 막부를 개설하고 쇼군(將軍)에 취임하였다.
그리고 1614년과 1615년에 걸쳐서 두 번의 전쟁을 일으켜서 도요토미씨를 멸망시켰다.
에도 막부의 기초는 제2대 쇼군인 도쿠가와 히데타다, 제3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미쓰 시대를 거치면서 확립되었다.
막부는 군사면과 경제면에서 다이묘들을 압도하였다.
막부는 다이묘뿐만이 아니라 천황이 정치 세력화하지 못하도록 조정을 감시하는 한편, 사원도 통제하여 권력에 봉사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크리스트교를 철저히 탄압하고, 일본인의 해외 왕래를 금지하였다.
외국 선박도 네델란드 선박에 한하여 나가사키(長崎)에만 출입하게 하였다.
에도 막부의 지배체제가 확립되면서 지배 신분인 무사를 정점으로 한 신분 질서도 확립되게 되었다.
다이묘의 거성이 있는 조카마치(城下町)에는 무사와 함께 조닌(町人)이라고 불리는 도시 상공인들이 거주하게 되었다.
농촌에는 하쿠쇼(百姓)라고 불리는 농민들이 거주하며 생산에 종사하였는데, 막번 권력은 농민을 엄격하게 통제하였다.
그리고 사농공상의 질서에서 벗어난 천민들이 촌락에서 동떨어진 곳에서 무리를 이루어 생활하였다.
2.1 에도 막부의 성립
2.1.1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한 후에 정권을 장악한 것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였다.
1542년 미카와의 오카자키(岡崎) 성주인 마쓰다이라 히로타다(松平廣忠)의 장남으로 출생하였으나, 가문이 융성하지 못하였다.
1560년 오케하자마 의 전투에서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오다 노부나가에게 패배하여 이마가와씨가 멸망하자, 고향인 오카자키로 돌아와 오다 노부나가의 객장(客將)이 되어 동부 일본 지역으로 세력을 넓히기 시작하였다.
오다 노부나가가 사망한 후에는 일시적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대립하기도 하였으나 곧 화해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복종하였다.
1590-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도와서 오다와라(小田原)의 호조씨(北條氏)를 멸망시킨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이즈(伊豆) 지역을 포함한 관동 지방의 지배권을 승인 받고, 거소를 에도(江戶)로 옮긴 후 약 250만 석의 다이묘가 되었다.
2.1.2 에도 막부의 개설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한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인 도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賴)가 이직 어렸기 때문에 실권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장악하게 되었다.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는 1600년 고니시 유키나가 등과 힘을 합쳐,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은혜를 입은 다이묘들을 결집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제거하려고 궐기하였다.
이리하여 이시다 미쓰나리가 지휘하는 서군과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지휘하는 동군이 미노(美濃)의 [세키가하라(關ケ原)]에서 대전하였다.
전투는 서군의 대패로 끝났다.
[세키가하라(關ケ原) 전투]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정권의 집정(執政)으로서의 지위에서 벗어나 점차로 독자적인 정권의 수립을 준비하였다.
1603년에는 쇼군에 취임하여 에도에 막부를 열었다.
이후 260여년간 도쿠가와씨가 일본을 통치하였는데, 이 시대를 에도 시대라고 한다.
2.1.3 도요토미씨의 멸망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쇼군의 지위를 2년 만에 아들인 도쿠가와 히데타다(德川秀忠)에게 물려주었다.
그리하여 쇼군의 지위는 도쿠가와씨가 세습하는 것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선언하였다.
그러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항상 오사카성에 있는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불안하였다.
그리하여 억지로 트집을 잡아서 호코지 종명(鐘銘) 사건을 일으켜 도요토미 히데요리 공격의 실마리를 만들었고, 1614년 10월 오사카성을 공격하였다.
12월에 일단 강화를 맺고 일단 물러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다음 해인 1615년 4월에 다시 오사카로 쳐들어가 오사카성을 함락하고,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자결하게 하였다.
2.2 에도 막부의 제도
2.2.1 쇼군의 권력
에도 막부의 제도는 제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와 제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시대에 거의 정비되었다.
대외적으로는 쇄국체제(鎖國體制)가 강화되었다.
이렇게 하여 성립한 지배체제를 막번체제(幕藩體制)라고 한다.
도쿠가와 쇼군은 일본열도의 지배자라고 하는 성격과 함께 비교될 수 없는 군사력과 경제력을 보유한 최대의 다이묘라는 성격도 갖고 있었다.
경제면에서는 덴료(天領)라고 하는 쇼군의 직할령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쇼군은 에도. 교토. 오사카. 나가사키 등의 주요 도시와 사도(佐渡). 이즈(伊豆). 다지마(但馬). 이와미(石見) 등의 금. 은 광산을 직할지로 하고 있었고, 무역의 이익을 독점하고 상인으로부터 각종 상납금을 징수하였다.
무엇보다도 화폐의 주조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군사력의 중핵은 지키산(直參)이라고 일컬어지는 쇼군에 직속된 가신이었다.
그 중에서 오메미에(御目見) 이상 즉 쇼군을 직접 알현할 수 있는 자를 하타모토(旗本)라 하고, 그렇지 못한 자를 고케닌(御家人)이라고 하였다.
2.2.2 막부의 행정 조직
막부의 조직도 제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 시대에 이르러 정비가 완료되었다.
1635년에는 쇼군을 정점으로, [로주(老中)]와 와카도시요리(若年奇), [오메쓰케(大目付)], [메쓰케(目付)], 3부교(三奉行)라고 하는 직제가 정비되었다.
감찰기관으로서는 다이묘의 동태를 감시하는 오메쓰케가 있었고, 하타모토와 고케닌을 감독하는 메쓰케가 있었다.
2.2.3 다이묘의 통제
쇼군에게 복속한 1만 석 이상의 영지를 가진 영주를 일괄하여 다이묘라고 하였다.
다이묘는 쇼군과의 친소 관계, 지교다카(知行高), 관위, 막부 내에서의 직위 등을 근거로 하여 그 서열이 정해졌다.
특히 쇼군과의 친소 관계의 관점에서 볼 때, [신판(親藩), 후다이(譜代), 도자마(外樣)]로 구분되었다.
도요토미씨가 멸망한 1615년에 막부는 다이묘의 거성을 한 곳으로 제한하는 명령을 내렸다. 같은 해 7월에 [무가제법도(武家諸法度)] 13조를 정하여 다이묘가 지켜야 할 사항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무가제법도는 정치도덕상의 훈계, 치안 유지의 규정, 의례상의 규정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무가제법도는 제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 시대인 1635년에 19조로 늘려서 정비하였다.
이 때, [참근교대(參勤交代) 제도]의 내용이 첨가되었다.
참근교대 제도란 다이묘가 격년 교대로 가신들을 거느리고 영지를 떠나 에도로 와서 쇼군의 지휘하에 편입하는 제도를 말한다.
2.2.4 조정과 사원의 통제
에도 시대에는 조정과 사원. 신사도 막부의 통제하에 놓여 있었다. 쇼군은 제도적으로 조정의 관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조정에 대하여 표면적으로는 공순하였으나 실제적으로는 천황이 정치권력화하는 것을 철저하게 감시하였다.
1615년에는 조정과 귀족을 대상으로 하는 법령인 [금중병공가제법도(禁中竝公家諸法度)] 17조를 제정하여 천황과 귀족의 일상생활까지 상세하게 규제하였다.
2.2.5 대외 관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는 다르게 평화적인 대외 관계를 유지하는 방침을 정하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609년에 네델란드에, 그리고 1613년에 영국에 무역을 허가하였고, 이 두 나라는 히라도(平戶)에 상관(商館)을 두었다.
막부는 해외로 진출하는 상인에게는 그 도착지를 명기한 주인장(朱印狀)이라는 공문서를 수여하여, 상선들이 해적선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였다.
이 배를 주인선(朱印船)이라고 하였다.
막부는 조선과 국교를 회복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새로이 쇼군이 취임할 때마다 조선에서 통신사가 파견되었다.
2.2.6 쇄국
1612년에 막부의 직할령에 크리스트교 금지령이 내려졌다.
다이묘들은 표면에 예수의 초상이나 마리아의 초상을 새긴 동판을 준비해 놓고 사람들을 한 사람씩 불러서 그 동판을 밟게 하는 방법으로 크리스천을 색출하였다.
이것을 [후미에(踏繪)]라고 하였다.
막부의 쇄국정책은 더욱 강화되었다.
일본인이 해외로 도항하는 것을 점차로 제한하다가,1635년에는 완전히 금지하였다.
해외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귀국도 전면적으로 금지되었다.
1639년에는 포르투갈 선박의 내항을 금지하였다.
포르투갈이 추방됨으로써 네델란드가 일본 무역을 독점하게 되었다.
1641년에는 히라도에 있던 네델란드의 상관을 [나가사키의 데지마(出島)]로 옮겼다.
2.3. 신분 질서
2.3.1 사농공상
무사는(武士)는 사민(四民)의 최상위에 있으면서 갖가지 특권을 누렸다.
무사는 두 개의 도검을 패용할 수 있는 [대도(帶刀)의 특권]과 성을 사용할 수 있는 [묘지(苗字)의 특권]이 부여되어 있었다.
그리고 농민이나 상공인이 무사에게 무례를 범했을 경우에 무사는 무례를 범한 자를 즉석에서 살해하여도 증거가 확실한 한 그 죄를 묻지 않는 [기리스테고멘(切捨御免)]의 특권도 있었다.
농민 중에는 경작지와 주택을 소유한 혼뱌쿠쇼(本百姓)와 타인의 경작지를 소작하는 미즈노미뱌쿠쇼(水呑み百姓), 혼뱌쿠쇼에 예속되어 있는 나고(名子). 히칸(被官) 등의 계층이 있었다.
조닌 사회에도 신분 서열이 있었다.
사농공상의 밑에는 [에타(濊多). 히닌(非人)]이라고 하는 천민이 있었다.
에타는 주로 피혁 제품을 생산하는 사람들이었고, 히닌은 주로 시체를 처리하거나 걸식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일반 만가와 동떨어진 장소에 거주하였는데, 그 지역을 일반적으로 부락(部落)이라고 하였다.
2.3.2. 농촌과 하쿠쇼
일본 근세의 무라(村)는 대개 50호에서 100호 정도의 규모였다.
촌민은 고닌구미(五人組)라는 조직에 편성되었다.
영주 권력은 연공이 체납된다든지 범죄자가 발생하였을 경우에는 고닌구미에게 연대 책임을 지웠다.
연공의 납부 방법으로는 매년 수확량을 점검하여 세액을 가감하는 검견법(檢見法)과 일정액을 수취하는 정면법(定免法)이 있었다.
에도 시대 중기에는 [오공오민제(五公五民制)] 즉 원칙적으로 영주와 농민이 생산량을 각각 2분의 1씩 배분하였다.
2.3.3 도시와 조닌
농촌이 막번 권력에 의하여 엄격하게 통제되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도시에서는 상공인의 활발한 활동이 전개되었고, 도시는 많은 사람이 옮겨와 거주하면서 점차로 발전하였다.
특히 3도(三都)라고 일컬어지는 [에도. 교토. 오사카]는 눈부시게 발전하였다.
인물 및 용어 해설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도쿠가와 히데타다(德川秀忠),
도쿠가와 이에미쓰(德川家光), 다카야마 우콘(高山右近),
호코지(方廣寺) 종명(鐘銘) 사건,
데라우케(寺請) 제도, 게이안오후레가키(慶安御觸書),
묘가킨(冥加金), 미야자(宮座).
제3장 산업경제의 발달과 도시의 번영
<시대개관>
17세기 전기의 일본 사회는 인공적으로 도시가 건설되었던 시기이기도 하였다.
쇼군의 조카마치(城下町)인 에도가 건설되었고, 전국적으로 다이묘의 조카마치가 건설되었다.
대규모 토목공사도 동시에 시행되었다.
17세기에 들어오면서 특히 대규모 개간 사업이 전개되었다.
경작지가 늘어나고 농업기술이 발달하면서 생산량이 괄목하게 증가하였다.
각지에서 여러 산업이 발달하였다.
다이묘가 연공으로 수취한 미곡은 에도나 오사카로 운반되어 소비되었다.
도시가 발달하면서 거대한 소비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자연히 다이묘의 거성을 중심으로 형성된 조카마치와 중앙 도시인 에도나 오사카를 연결하는 상품 유통망이 전국적으로 발달하게 되었다.
상업의 발달은 화폐 수요의 증가를 초래하였다.
그런데 동부 일본은 금본위제를 채택하고 있었고, 서부 일본은 은본위제를 채택하고 있었기 때문에, 환전 업무를 담당하는 은행이 일찍부터 발달하였다.
17세기 후기에는 교통망이 정비되면서 상업이 더욱 발달하였으며, 상인은 경제적인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3.1 농업의 발달
봉건사회의 경제적 기초가 되는 농업은 에도 시대에 이르러 크게 발전하였다.
막번 권력은 개척 사업을 장려하여, 각지에서 관개 시설을 정비하고 새로운 경작지를 개간하였다.
농업 기술도 발달하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농업 용수를 확보하기 위하여 각지에 저수지를 만들었다.
논에다 물을 대는 양수기로 용골차가 있었으나, 이 시대에는 그것보다 간단한 후미구루마(踏車)가 점차로 보급되었다.
비료는 종래와 같이 나무나 풀을 태워서 그 재를 이용하거나 인분을 여전히 이용하면서도, 17세기 말기부터는 깻묵. 생선찌꺼기 등을 다량으로 사용하였다.
소나 말에 이용하는 쟁기와 논이나 밭을 파 일구는 빗추구와(備中楸)라고 하는 쇠스랑이 사용되었다. 센바코키(千齒扱き)라고 하는 홀태도 발명되어, 탈곡하는 데 걸리는 시간과 정력이 절약되었다.
3.2 산업의 발달
농업의 발달에 발맞추어 여러 산업도 발달하였다.
당시까지 어업은 주로 인근 연안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나, 17세기 이후에는 멀리 홋카이도까지 출어하는 경우도 있었다.
광업은 전국시대 이래 채굴법과 제련법이 진보되었는데, 에도 시대 초기에는 금. 은 채굴이 특히 성행하였다.
사도(佐渡)의금광, 이쿠노(生野). 오모리(大森)의 은산, 아시오(足尾). 벳시(別子)의 동산(銅山), 이즈모(出雲)의 사철 등의 광산이 발달하였다.
17세기를 통하여 수공업이 특히 발달하였다.
처음에는 주로 농업과 연계된 농춘 가내공업이 상업과 도시의 발달과 함께 점차로 도시 수공업자의 생산이 증가하였다.
3.3 도시의 발전
17세기에는 조카마치(城下町)가 특히 발달하였고, 3도(三都)라고 일컬어지는 에도. 오사카. 교토가 번영하였다.
에도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입성하였을 때만 하여도 시골에 불과하였으나, 에도 막부가 성립된 이후에는 무가 사회에 물자를 공급하기 위하여 상공업자들이 몰려들면서 인구가 급증하여 18세기 초에는 인구가 100만 명에 달하였다.
오사카는 전국적인 상품 유통의 중심지였다.
다이묘들은 오사카에 거대한 창고를 세우고 연공으로 거두어들인 미곡이나 상품을 그 곳에 보관하였다.
오사카는 18세기 초에 인구 35만 명이 넘는 전국 시장의 중심이었다.
교토에서는 전통 산업이 발달하였다.
교토의 인구는 17세기 말에 이미 40만 명에 달하였다.
오사카를 중심으로 하는 3도가 전국적 영주 경제의 중심지라면, 지역경제의 중심지는 조카마치였다.
3.4 상업의 융성
상업은 주로 도시에서 발달하였고, 특히 다이묘의 거성을 중심으로 형성된 조카마치가 영주경제의 중심지로서 번영하였다.
다이묘가 연공으로 수취한 미곡을 구라마이(藏米)라고 하였는데, 이 구라마이와 특산물은 주로 에도와 오사카로 운반되었다.
구라마이를 비롯한 각 지역의 산물은 각 다이묘가 설치한 구라야시키(藏屋數)라고 하는 거대한 창고에 보관하였다가 적당한 때에 출시하였다.
상업이 발달하면서 도매상과 소매상이 나뉘어졌다.
도매상 중에는 나카마라고 하는 조합을 결성하는 자들이 나타났다.
18세기가 되면서 막부는 조합을 공인하고 그 대가로 상업세를 납부하도록 하였다.
이것을 가부나카마(株仲間)라고 하는데, 오사카의 24구미(組) 돈야(問屋), 에도의 10구미 돈야가 유명하였다.
3.5 호상의 출현
17세기 말이 되면서 상업과 금융업이 발달하면서 많은 신흥 상인들이 출현하였다.
이 시기에 출현한 대표적인 신흥 상인 가문으로는 『미쓰이(三井). 고노이케(鴻池). 스미토모(住友)』 등을 들 수 있다.
그 중에서도 미쓰이는 지금까지 일본을 대표하는 재벌로 건재하다.
미쓰이가(三井家)는 17세기 후기에 가문의 시조인 미쓰이 다카토시(三井高利)가 에도에 에치고야(越後屋)라는 포목상을 내면서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는 당시 일본에서는 가히 혁신적이었다고 할 만한 박리다매 상법과 정찰제를 도입하여 서민들로부터 인기를 얻었고, 상업은 날로 번창하였다.
3.6 화폐와 금융
상업의 발달은 화폐 수요의 증가를 초래하였다.
이러한 수요에 발맞추어 막부는 화폐 제도를 정비하고 화폐의 주조권을 독점하였다.
화폐는 간조부교(勘定奉行)의 통제하에, 금화는 오반자(大判座)와 킨자(金座), 은화는 긴자(銀座), 동전은 데쓰좌(鐵座)에서 주조하였다.
에도 시대 중기 이후에는 화폐 발행권이 없는 번(藩)에서 번내에서만 통용되는 한사쓰(藩札)라고 하는 지폐를 발행하기도 하였다.
도시에서는 화폐의 환전과 칭량을 직업으로 하는 상인이 출현하였다.
이들을 료가에쇼(兩替商)라고 하였다.
3.7 교통의 발달
도시와 상업이 발달하면서 에도를 중심으로 하는 교통망과 통신망이 정비되었다.
교통. 통신망의 정비는 막부가 전국을 통치하기 위해서도 불가결한 것이었다.
막부의 공문서를 신속하게 전달하기 위해서 히캬쿠(飛脚)는 발이 빠른 인부를 항상 대기시켰다.
막부와 번(藩)은 치안 유지를 목적으로 교통의 요지에 세키쇼(關所)나 반쇼(番所)를 설치하여 통행인을 검색하였다.
17세기 중기 이후에는 가와무라 즈이켄(河村瑞軒)에 의하여 무쓰(陸奧)와 에도를 연결하는 동회항로, 데와(出羽)와 오사카를 연결하는 서회항로가 개통되었다.
<시대개관>
17세기 후기는 무단정치에서 문치정치로 크게 전환한 시기였다.
에도 시대 초기에 막부는 군사력을 배경으로 다이묘들을 강력하게 감시하고 통제하는 기조를 유지하였는데, 이 시기는 사건이 많이 발생하여 사회가 극도로 혼란한 시기이기도 하였다.
위기를 감지한 막부는 군사력을 배경으로 하여 다스리는 정치에서 제도에 의하여 다스리는 정치로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문치주의는 도쿠가와 쓰나요시가 제5대 쇼군에 취임하면서 본격적으로 실시되었다.
유학이 장려되고, 제도와 의례가 정비되었다.
또한 관료 조직을 정비하고, 조닌의 사치 풍조를 억제하였다.
그리고, 경제 규모가 커지면서 현실적인 경제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도쿠가와 쓰나요시의 독재정치에는 실정도 있었다.
특히 1687년에 발령된 쇼루이아와레미령(生類憐み令)은 상식을 벗어난 정치라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웠다.
도쿠가와 쓰나요시 치세인 1702년에 일어난 아코(赤穗)의 복수 사건도 중대한 실정의 하나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도쿠가와 쓰나요시가 무가사회의 관행을 경시한 결과 초래된 사건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18세기 초기에 정권을 담당한 인물은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였는데, 이 시기에 문치정치는 제도적으로 정비되었다.
아라이 하쿠세키는 제도와 의례를 정비하여 막부의 권위를 높이는 데 주력하였다.
이 시기의 정치를 특히 쇼토쿠(正德)의 정치라고 하였다.
4.1 막정의 전환
17세기 중기에서 18세기 전기에 이르는 시기는 막부의 정치가 질적으로 크게 전환된 시기였다.
에도 막부 초기에는 막부에 대하여 저항감을 가진 다이묘를 강력하게 탄압하는 무단정치를 시행하였다.
그 때문에 영지가 몰수된 다이묘가 많았으며, 그 다이묘에 속하였던 무사는 순식간에 실업자로 전락하였다.
이러한 무사를 로닌(牢人)이라고 하였는데, 로닌의 발생은 사회 불안의 요인이 되었다.
1651년 제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가 사망하고, 나이 어린 도쿠가와 이에쓰나(德川家綱)가 쇼군직을 승계한 직후에, 유이 쇼세쓰(由比正雪)의 난이 발생하였다.
병학자(兵學者)로 에도에서 군사학을 가르치고 있었던 유이 쇼세쓰는 막부의 정치에 불만을 품은 로닌들을 결집시켜, 에도. 오사카. 슴푸(駿府) 등에서 일시에 봉기하여 막부를 전복하려고 하였다.
1650년대의 사회는 특히 불안하였다.
사건도 많이 발생하였다.
간토 지방에서는 무리를 지어 도적질을 하는 무리들이 횡행하였고, 에도에서는 가부키모노(歌舞伎者)라고 하여, 이상한 옷차림으로 상식을 벗어난 도검을 차고 막부의 도덕체계를 무시하는 무리들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막부는 이들을 일제히 체포하면서 에도의 분위기는 뒤숭숭하였다.
이러한 사태에 직면한 막부는 이제까지의 무단정치에서 문치정치로 정책의 전환을 꾀하여 심각한 위기를 벗어나려고 하였다.
4.2 도쿠가와 쓰나요시의 정치
4.2.1 신상필벌주의
1680년 제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나가 사망하고, 다테바야시(館林) 영주였던 도쿠가와 쓰나요시(德川綱吉)가 제5대 쇼군에 취임하였다.
그의 정치는 쇼군의 정치를 강화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무가사회의 무사안일주의와 부패를 척결하기 위하여 신상필벌주의를 견지하였다.
조닌의 사치 풍조에 대하여도 일벌 백계로 다스렸다.
4.2.2 경제정책
도쿠가와 쓰나요시 시대는 특히 농업 생산력이 발전하여 농민 생활도 안정되었다.
농촌에서도 상품경제가 진전되어 상품 작물이 재배되었다.
도시에는 그들과 거래를 하는 신흥 상인이 대두하였다.
막부는 연공 이외의 재정 수입 통로를 확보하였다.
양조업자를 비롯한 상인으로부터 헌납금을 징수하고, 조선 인삼의 전매 제도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수 차례에 걸쳐서 화폐를 개주하였다.
4.2.3 유학의 장려
문치주의는 도쿠가와 쓰나요시 쇼군 시대에 이르러 강력하게 추진되었다.
도쿠가와 쓰나요시는 유학을 좋아하였을 뿐만 아니라 유학의 장려에도 힘을 쏟았다.
1690년에는 유시마(湯島)에 성당을 세우고 하야시 라잔(林羅山)의 후손인 하야시 호코(林鳳岡)를 다이가쿠노카미(大學頭)에 임명하여 공자를 제사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유학자인 기노시타 준안(木下順庵)을 등용하였다.
유학 이외에도 여러 학문에 대한 관심을 가졌고, 각종 의례도 정비하였다.
4.2.4 도쿠가와 쓰나요시의 실정
도쿠가와 쓰나요시는 관료를 임명할 때, 문벌을 중시하는 폐단을 타파하고 인재를 발탁하여 측근을 구성하였다.
이들 측근들을 소바요닌(側用人)이라고 하였는데, 그들은 당연히 도쿠가와 쓰나요시의 뜻을 받드는 데 힘썼으므로 쇼군의 독재를 강화하게 되었다.
도쿠가와 쓰나요시는 추상같은 태도로 정치에 임하였기 때문에 쇼군이 상식에 벗어난 정치를 하여도 아무도 직언을 하지 못하였다.
1687년에 공포한 『쇼루이아와레미령(生類憐み令)』은 상식을 벗어난 정치의 대표적인 것이었다.
쇼루이아와레미령은 모든 생물 특히 개를 죽여서는 안 된다는 법령, 다시 말하자면 살생금지령이었다.
이 법령은 도쿠가와 쓰나요시의 편협된 자의성이 빚어낸 일종의 학정이었다.
도쿠가와 쓰나요시는 문치정치를 정착시키고 막부의 권위를 확립하는 데에는 성공하였으나, 대사원을 건립하고 제도와 의례를 정비하는 데 지출을 많이 하였기 때문에, 막부의 재정은 이 시대에 거의 고갈되었다.
1702년에는 아코(赤穗)의 무사가 집단으로 주군인 아사노 나가노리(淺野長 )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군사 행동을 한 사건이 일어났다.
쇼군에 의하여 처단이 내려진 주군의 복수를 감행함으로써, 쇼군의 결정이 부당하였음을 우회적으로 주장하였던 것이다.
4.3 쇼토쿠의 정치
1709년 도쿠가와 쓰나요시가 사망한 후에, 제6대 쇼군에 취임한 도쿠가와 이에노부(德川家宣)는소바요닌에 마나베 아키후사(間部詮房)를 임명하고,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를 발탁하여 등용하였다.
아라이 하쿠세키는 이후, 제6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노부와 제7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구(德川家繼) 대에 걸쳐서 실권을 장악하였다.
아라이 하쿠세키는 로닌(牢人)의 아들로 가정이 빈한하였으나, 어려운 생활 환경 속에서도 학문에 열심이었다.
아라이 하쿠세키의 정치는 주로 도쿠가와 쓰나요시 시대의 정책을 폐지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는 먼저 쇼루이아와레미령을 폐지하였다.
그리고, 1714년에는 화폐의 재개주를 시행하여 금의 함유율을 높였다.
또한, 아라이 하쿠세키는 해외 무역을 통하여 일본의 금은이 해외로 유출되는 것을 매우 걱정하여, 1715년에는 법령을 내려서 해외 무역을 통제하였다.
유학자로서의 아라이 하쿠세키의 진면목은 제도와 의례를 정비하면서 유감 없이 발휘되었다.
1711년에는 조선통신사의 대우와 예의 절차를 대폭 간소화하고, 그 때까지 '다이쿤(大軍)'이라고 칭하여 왔던 쇼군의 호칭을 '니혼코쿠오(日本國王)'라고 개칭하여 쇼군이야말로 일본을 대표하는 권력자라는 것을 명확히 하였다.
인물 및 용어 해설
도쿠가와 이에쓰나(德川家綱), 도쿠가와 쓰나요시(德川綱吉),
하야시 라잔(林羅山),하야시 호코(林鳳岡),
기노시타 준안(木下順庵), 도쿠가와 이에노부(德川家宣),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 유이 쇼세쓰(由比正雪)의 난,
메이레키의 대화재(明歷の大火),
소바요닌(側用人), 쇼루이아와레미령(生類憐み令)
제5장 겐로쿠 시대의 사회와 문화
<시대개관>
17세기 후반의 사회는 상품경제가 발달하고, 도시가 번영하였으며, 조닌이 경제적 실력을 자랑하던 시대였다.
그러나, 번영의 이면에는 갖가지 사회. 경제적 모순이 심화되고 있었다.
이러한 특색을 지닌 시대를 겐로쿠 시대라 하고, 이 시대의 문화를 겐로쿠 문화라고 한다.
17세기를 통하여 상품경제가 발달하면서 도시의 물가는 급등하였다.
일상 생활을 소비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던 무사들은 상대적으로 빈곤하게 되었다.
그러나 경제적인 실권을 장악하게 된 조닌들은 경제력을 배경으로 하여 밝고 활기에 찬 문화를 창조하였다.
이 시대에 유학이 일본 사회에 뿌리를 내렸다.
봉건 교학의 지위를 확립했던 것은 유학 중에서도 주자학이었다.
양명학은 크게 발달하지 못하였지만, 주자학에 고학이 발달하였다.
이 시대에는 실증적인 학문이 발달하였다.
역사학과 국문학 분야에서도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특히 국문학 분야에서 <<만요슈(萬葉集)>>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었는데, 이는 국학의 출발점이 되었다.
겐로쿠 문화의 담당자는 교토와 오사카의 조닌들이었다.
소설과 연극 그리고 미술이 발달하였다.
문예 분야에서는 훗날까지 일본인들의 사랑을 받았던 작가들이 출현하였다.
그리고 서민들이 가장 애호하는 풍속화인 우키요에(浮世繪)가 발달하였다.
5.1 겐로쿠의 사회
5.1.1 평화 시대의 무사
겐로쿠(元祿) 시대에는 무사(武士)의 생활도 크게 변화하였다.
평화 시대가 계속되면서 본래 전투원이었던 무사가 그 직분인 전투의 기회를 오랫동안 잃게 되었다.
상품경제가 발전하고 물가가 상승하면서 무사는 점점 궁핍하여졌다.
무사는 지배 계급이었으며 신분적으로도 조닌의. 상위에 위치하였으나, 경제적으로는 조닌이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시간이 지날수록 무사를 정점으로 하는 신분제가 동요되었고, 그럴수록 막번 권력은 사농공상의 신분 질서를 강조하였다.
5.1.2 사치금령의 시대
일반적으로 겐로쿠 시대는 풍속이 사치스러웠다고 일컬어지는데, 그것은 서민들도 자유롭게 사치할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겐로쿠 시대에는 일상 생활 전반에 걸쳐서 풍속 규제가 강화되었는데, 특히 조닌에 대한 사치가 엄격하게 금지되었으며 이에 따르지 않는 자는 처벌되었다.
그 중에서도 제5대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 정권 초기에 시행한 에도의 호상 이시카와 로쿠베에(石川六兵衛)의 재산 몰수와, 정권 말기에 실시한 일본 제일의 호상 요도야 다쓰고로(淀屋辰五郞)의 재산 몰수였다.
5.1.3 서민 생활의 향상
겐로쿠 시대의 문화는 현실주의적 경향을 띄었으며, 학문에는 합리주의 정신이 뚜렷하였다.
미술이나 예능의 세계에서는 현실적이면서도 사치스러운 표현이 기조를 이루었다.
문화의 담당자는 교토와 오사카의 조닌이었다.
이 시대에는 특히 조닌의 생활이 향상되었다.
무엇보다도 조닌의 복장이 화려해졌다.
의복의 재료가 고급화되었고, 형태나 장식품도 세련되고 다양해졌다.
또한 미곡의 생산량이 증가하고 야채가 다양하게 생산되었다.
1일 2식의 식생활이 1일 3식으로 일반화된 것도 17세기 후기였다.
또 다양한 과자류가 상품화되어 판매되었다.
주거 생활에도 변화가 있었다.
다타미(たたみ[疊])가 보급된 것이다.
5.2 사상과 학문의 발달
5.2.1 유학의 발달
(1)주자학
막부가 학문을 장려하면서 유학(儒學)이 발달하였다.
유학 중에서도 주자학(朱子學)이 발달하였다.
주자학은 특히 군신. 부자의 명분을 중시하는 학문으로, 봉건 지배에 적합하였기 때문에 막번 권력의 보호를 받으면서 발전하여 여러 학파를 형성하였다.
하야시 라잔(林羅山)의 자손은 대대로 막부에 봉공하면서 주자학의 전통을 유지하였다.
주자학의 일파로 미나미무라 바이켄(南村梅軒)이 도사(土佐) 지방에서 뿌리를 내린 남학(南學)이 있는데, 이 계통에서 야마자키 안사이(山崎闇齊)가 출현하였다.
그는 일종의 신비주의에 빠져서 주자학의 사상을 기본으로 하는 신도설인 스이카신도(垂加神道)를 제창하기에 이르렀다.
그 밖에 후쿠오카(福岡)의 가이바라 에키켄(貝原益軒)과 같이 어느 학파에도 속하지 않은 주자학자도 있었다.
그의 직업은 의사였으나 교육. 경제. 역사 분야에 걸쳐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특히 <<가쿠도쿤(學道訓)>>. <<와조쿠도지쿤(和俗童子訓)>> 등을 저술하여 서민 교육에 진력하였다.
(2) 양명학
나카에 도주(中江藤樹)와 그의 제자인 구마자와 반잔(熊澤蕃山)은 양명학파(陽明學派)를 이루었다.
나카에 도주는 처음에는 주자학을 배웠으나 이윽고 양명학에 심취되었고, 그의 제자인 반잔은 오카야마번(岡山藩)의 정치를 담당하면서 양명학의 도덕설을 현실 정치에 적용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러나, 양명학은 현실 사회를 비판하고 그 모순점을 개혁하려고 하는 혁신 사상을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에 막부는 이 학파를 경계하였다.
구마자와 반잔도 그의 저서인 <<다이가쿠와쿠몬(大成或問)>>에서 막부의 정치를 비판하였다고 하여 탄압을 받았다.
(3) 고학
이 시대에 커다란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은, 주자학이나 양명학의 해석을 비판하고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서 유학의 진리를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고학파(古學派)였다.
고학은 현실과 역사를 파악하고 인간성을 존중한다는 특징을 갖고 있었다.
대표적인 학자로는 야마가 소코(山鹿素行), 이토 진사이(伊藤仁齊), 오규 소라이( ) 등을 들 수 있다.
야마가 소코는<<세이쿄요로쿠(聖敎要錄)>>를 비롯한 여러 저술을 통하여 주자학을 비판하였다.
이토 진사이는 교토에서 고기도(古義堂)라는 사숙을 열고 후학들을 지도하였는데, 그는 신사상(神思想)이나 노장 사상이 융합되어 있는 주자학은 진실한 성인의 학문이 아니라고 하여, 공맹 사상을 직접 연구하였다.
그의 노력은 <<론고코기(論語古義)>>, <<고모코기(孔孟古義)>> 등의 저서에 결집되어 있다.
에도의 오규 소라이는 오경을 중시하였는데, 고문헌의 실증적 연구를 통하여 경서의 참 뜻을 이해하려고 하였다.
그는 예악과 제도를 정비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주장하였고, <<세이단(政談)>>을 저술하여 합리적인 정치개혁안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5.2.2 학문의 발달
(1) 실증적인 학문의 발달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시대 정신을 반영하듯이, 이 시대에는 본초학. 농학. 의학. 수학. 천문학 등 실증적인 학문이 발달하였다.
가이바라 에키켄의 <<야마토혼조(大和本草)>>, 이노 자쿠스이(稻生若水)의 <<쇼부쓰루이산(庶物類산)>> 등은 본초학의 집대성이었다.
미야자키 아스사다(宮崎安貞)의 <<노교젠쇼(農業全書)>>는 각종 작물의 재배법을 상세하게 소개하였다.
의학 분야에서는 기존의 의학의 처방술을 부정하고 임상 실험에 근거한 의학의 정립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수학 분야에서는 계산과 측량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던 전통적인 수학이 드디어 고등수학의 영역으로 발전하였다.
야스이 산테스(安井算哲)는 천문학을 연구하였다.
(2) 역사학과 국문학의 발달
역사학과 국문학 분야에서도 성과를 거두었다.
대표적인 역사서로는<<혼초쓰간(本朝通鑑)>>이 있는데, 이것은 하야시 라잔이 편찬한 <<혼초헨넨로쿠(本朝編年錄)>>를 하야시 라잔의 아들인 하야시 가호(林 峰)가 완성한 것이다.
<<혼초쓰간>>은 일본의 건국에서부터 17세기 초까지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술한 것으로, 도쿠가와 막부 성립의 정당성을 증명하려는 의도에서 편찬되었다.
미토번(水戶藩)에서는 1657년에서부터 <<다이니혼시(大日本史)>>가 편찬되기 시작하였다. <<다이니혼시>>는 편찬하기 시작한 지 250년만인 1906년에 완성을 보게 되는데, 유교적인 명분론의 관점에서 광범위한 사료 수집과 엄밀한 사료 분석을 토대로 하여 쓰여졌다.
그밖에 야마가 소코(山鹿素行)는 고문서를 인용하여 <<부케지키(武家事紀)>>를 편찬하였고, 아라이 하쿠세키는 <<도쿠시요론(讀史余論)>>과 <<고시쓰(古事通)>>를 저술하여 무가정권의 발전을 단계적으로 고찰하였다.
5.3. 문예와 미술
5.3.1 문예
(1) 하이카이
겐로쿠 문화를 상징하는 것은 조닌 문예였다.
조닌 문예는 교토. 오사카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그 중의 하나가 하이카이(俳諧)였다. 그것은 귀족적 취향의 와카(和歌)나 렌가(連歌)와는 다르게, 현실적이며 해학적인 서민의 시가로서 발생하였다.
하이카이는 에도 초기에는 형식주의에 치우쳐 있었으나, 17세기 중기에 오사카에서 니시야마 소인(西山宗因)이 출현하여 자유 분방하면서도 혁신적인 담림파(談林派)를 일으켰다.
니시야마 소인의 문하에서 『마쓰오 바쇼(松尾芭蕉)』가 출현하여 심오하고 한적함을 본지로 하는 하이카이를 확립하였다.
이것을 바쇼 하이카이라고 하는데, 제자와 함께 각 지방을 여행하면서 남긴 <<오쿠노 호소미치(奧の細道)>>라는 기행문이 유명하다.
(2) 소설
조닌 생활을 실감나게 표현한 것은 소설이었다.
에도 초기의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가나조시(假名草子)는 교훈적인 내용으로 서민의 인기를 끌지 못하였으나, 『이하라 사이카쿠(井原西鶴)』가 출현하여 조닌의 희로애락을 실감나게 표현함으로써 대중적인 인기를 끌면서 근세 소설의 기초가 확립되었다.
오사카의 조닌이었던 이하라 사이카쿠는 인간의 물욕과 애욕 본능을 솔직하게 그려냈는데,
그 내용은 대체적으로 호색물, 조닌을 대상으로 한 것, 무가의 생활을 대상으로 한 것들이었다.
이하라 사이카쿠의 대표작으로는 일생동안 여색을 탐닉한 한 남자의 일대기를 그린 <<고쇼쿠이치다이오토코(好色一代男)>>, 즉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랑을 이루는 여인들을 묘사한 <<고쇼쿠고닌온나(好色五人女)>>와 같은 호색물과, 단기간 내에 막대한 부를 축적한 동 세대 조닌의 성공담과 금전을 둘러싼 인간 관계를 묘사한 <<니혼에이타이구라(日本永代藏)>>, <<세켄무네산요(世間胸算用)>> 등이 있다.
(3) 연극
마쓰오 바쇼, 이하라 사이카쿠와 함께 『지카마쓰 몬자에몬(近松門左衛門)』이 이 시대에 출현하였다.
그는 연극의 각본과 함께 가부키(歌舞伎)의 각본도 썼다.
그는 <<소네자키신주(曾根崎心中)>>와 같이 실제로 발생했던 사건과 역사적인 사건을 소재로 하였다.
가부키는 배우가 행동을 과장되게 하여 감정을 상징직으로 표현하는 것을 특색으로 하였다.
남자 역할로 유명한 배우로는 에도의 이치가와 단주로(市川團十郞), 교토의 사카타 도주로(板田藤十郞)가 있었다.
여자 역할로 유명한 배우로는 요시자와 아야메(芳澤あやめ)가 있었다.
5.3.2 미술
이 시대의 풍조는 현재의 생활을 즐기는 데 만족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특기할 만한 문화재는 거의 남겨지지 않았다는 아쉬움이 있다.
건축 분야에서는 다이묘들이 호화로운 저택을 건축하였으나 현재에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회화 분야에서는 가노파(狩野派)가 여전히 막부의 보호를 받으며 대를 이어 작품 활동을 하면서 현실에 안주하였다.
이에 비하여 야마토에는 크게 발전하였다.
서민이 가장 애호하였던 것은 풍속화였다.
이 시대의 풍속화는 미인, 인기 있는 가부키 배우, 유명한 스모 선수를 그 대상으로 하였기 때문에 서민의 인기를 독차지하였다.
이러한 풍속화를 『우키요에(浮世繪)』라고 하였다.
대표적인 작가로는 히시카와 모로노부(菱川師宣)를 들 수 있는데, 그가 주로 세상의 풍속을 소재로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우키요에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이러한 시대에 막번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실추된 막부의 권위를 세우고 지배 계급인 무사의 경제적 우위를 확보하는 한편, 농촌경제를 안정시키는 일이 무엇보다도 시급한 과제였다.
도쿠가와 요시무네(德川吉宗)가 제8대 쇼군에 취임하면서 개혁을 단행하였는데 이 개혁을 교호(享保) 개혁이라고 한다.
교호개혁은 농촌의 부흥과 막부 재정의 재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뒤를 이은 제9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시게(德川家重)는 1760년에 은퇴하고, 도쿠가와 이에하루(德川家治)가 제10대 쇼군에 취임하였다.
이 시대에 실제 정치는 권신인 다누마 오키쓰구(田沼意次)가 행하였다.
다누마가 정치를 담당하였던 시대를 다누마 시대라고 한다.
다누마 오키쓰구는 원대한 이상은 없었지만 매우 현실적인 정치가였다.
그는 막부의 재정을 충실히 하기 위한 방법을 상품경제의 유통 과정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다누마 시대에는 공공연하게 뇌물이 오고 가는 등 정치가 문란하였다.
그리고 천재지변이 많이 발생하였다.
그러자 전국 각지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났으며, 도시에서는 폭동이 일어났다.
반란과 폭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다누마 시대는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
6.1 막번체제의 동요
6.1.1 무사의 궁핍
18세기에 들어서면서 막번체제는 벌써 붕괴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 현상 중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무사 계급이 경제적으로 궁핍하여지면서 지배자로서의 자각마저도 상실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막부도 이미 겐로쿠 시대부터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연공의 수취도 벌써 한계에 달해 있었기 때문에, 도시 상공인으로부터 금전을 징수하기도 하고, 화폐를 개주하여 늘어난 양을 막부의 수입으로 하기도 하였다.
여러 번의 경우도 재정난에 봉착하여 있었다.
일반 무사의 궁핍은 더욱 심각하였다.
상급 무사의 경우에도 금융업자로부터 자금을 융통하여 겨우 생활을 꾸려 나가는 경우가 보통이었다.
하급 무사의 빈궁한 모양은 극에 달하였다.
18세기 중기에는 선조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무구를 매매하거나 저당잡히고 자금을 융통하는 사례가 빈번하였다.
호구지책으로 금붕어와 새를 기르고, 꽃과 나무를 재배하고 바둑. 장기. 꽃꽂이를 지도하는 경우도 있었다.
지배 계급인 무사가 경제적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은 곧 막번체제가 동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6.1.2 농촌 사회의 동요
무사의 궁핍 이상으로 막번체제의 동요 가능성을 보여 주는 것은 농촌의 분해 현상이었다.
원래 농촌은 자급 자족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화폐경제가 농춘에 침투하면서 농촌의 구조가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농민 생활을 더욱 어렵게 한 것은 과중한 연공의 수취였다.
일본 근세시대에는 특히 천재지변의 영향으로 만성적인 기근과 흉작이 계속되었다.
부유한 농민의 경우, 토지를 사들여 소작을 주고 스스로는 직접 경작하지 않고 생활하는 기생 지주가 되는 자도 출현하였다.
특히 대규모로 경작지가 개발되는 지방에서는 개발을 청부맡은 상인들이 부재 지주가 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농민의 계층 분해는 급속하게 진행되었다.
6.2 교호개혁
6.2.1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개혁 정치
1716년 제 7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구(德川家繼)가 어린 나이로 사망하자, 기슈번(紀州藩)의 번주인 도쿠가와 요시무네(德川吉宗)가 33세의 나이에 막부의 기대를 모으며 제8대 쇼군에 취임하였다.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는 에도 막부를 개설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정치를 이상으로 하여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던 것이다.
이 개혁을 교호(享保) 개혁이라고 한다.
그는 소바요닌(側用人) 제도를 폐지하고 쇼군 독재 정치를 시행하였다.
도쿠가와 묘시무네는 먼저 겐로쿠 문화의 영향으로 무사와 도시 상공인의 생활이 사치스러워졌다고 판단하여 그들을 대상으로 엄격한 검약령을 내렸다.
그리고 재정의 지출을 억제하였다.
동시에 대규모 행사나 건축을 억제하였다.
그래도 막부의 재정은 여전히 빈약하여 막부에 직속한 무사들에게 급여도 제때에 지급하기 어려운 실정이었기 때문에 다이묘들에게 미곡을 상납하도록 하였다.
이것은 여러 다이묘로부터 1만 석에 대하여 100석씩의 미곡을 상납하게 하는 것이었는데, 그 대신에 다이묘가 에도에 참근하는 기간을 절반으로 줄이도록 하였다. 이 제도는 10여년간 지속되었다.
6.2.2. 재정 개혁
막번 체제는 농업 생산량의 수취를 기반으로 하였기 때문에, 막부의 재정을 근본적으로 재건하기 위해서는 농업 생산량을 증가시키고, 농민으로부터 가능한 한 많은 연공을 수취하는 방법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막부는 연공 증진책의 일환으로 수확량에 관계없이 일정한 양의 연공을 수취하는 정면법(定免法)을 시행하였다.
그 이전까지는 매년 수확량을 표본 조사하여 그 해의 연공액을 확정하는 검견법(檢見法)을 시행하였는데, 이 제도는 관리들의 부정이 개입될 소지가 있고, 수확량이 감소되면 징수액도 감소하는 문제점이 있었다.
18세기 초기까지 무사가 관직에 취임하면 그에 상응하는 봉록을 인상하고 그것을 상속하도록 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그러나, 도쿠가와 요시무네는 무사가 관직에 재직하는 기간에 한하여 직책에 해당하는 봉록과 그 무사가 원래 지급받았던 고쿠다카(石高)와의 차액만을 지급하는 제도를 시행하였다.
이것을 다시카가(足高) 제도라고 하였다.
막부는 수입의 증가를 꾀하기 위하여 경작지 개발과 상품 작물을 장려하었다.
막부는 1722년에는 에도의 번화가에 방을 붙여서 대상인들이 대규모 경작지 개발에 자본을 투자하도록 유도하였고, 막부도 직접 자본을 투자하였다.
또 산업 개발에 도움이 되는 실학을 장려하기 위햐어, 한문으로 번역된 서양 서적의 수입을 허용하였다.
이 때, 크리스트교와 관계없는 기술 서적을 중심으로 하는 서양의 서적이 일본으로 수입되었다.
그리고, 서양의 학문인 난학(蘭學)을 배우게 하였다.
6.2.3 법제의 정비
법제의 정비도 교호 개혁의 커다란 특징이었다.
가혹하기 그지없었던 형벌이 상당히 완화되었으나, 상하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에 대해서는 여전히 엄벌에 처하고, 10냥 이상을 훔친 자는 사형에 처하는 등 형벌은 매우 엄격하게 집행되었다.
또 산적한 소송 사무를 신속하게 처리하기 위하여, 급증하는 금전 대차에 관한 소송을 접수하지 않고 당사자들이 타협하여 해결하도록 하였다.
도쿠가와 요시무네는 민중의 소리를 직접 청취하기 위하여, 시중에 메야스바코(目安箱)라고 하는 투서함을 설치하고 누구라도 자유롭게 투서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관리들을 긴장하게 하는 한편, 민중의 애로 사항이나 건의 사항을 파악하여 정책에 반영하였다.
6.2.4 미곡가 정책
교호 개혁은 성과를 올렸고 막부의 권위도 회복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미곡 수취량의 증가라는 측면에서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고 하여야 할 것이다.
도쿠가와 요시무네는 '고메쇼군(米將軍)'이라고 일컬어질 정도호 막부의 미곡가 정책에 부심하였으나, 결국 미곡가 정책은 실패하였고, 연공액의 증가로 농민은 농민대로 불만이 많았다.
농민경제가 압박되면서 농민 반란이 증가하게 되었다.
교호 연간에 농민 반란이 177건이나 발생하였다.
6.3 다누마 시대의 정치와 사회
6.3.1 현실적인 정치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뒤를 이은 제9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시게(德川家重)는 본래 병약한 사람이었다.
그는 1760년에 은퇴하고 도쿠가와 이에하루(德川家治)가 제10대 쇼군에 취임하였다.
도쿠가와 이에하루도 무기력한 쇼군이어서 실제 정치는 권신인 다누마 오키쓰구(田沼意次)가 행하였다.
다누마 오키쓰구는 원래 미천한 무사였으나 쇼군의 측근이 되면서, 나아가 행정 수반인 로주(老中)에 취임하여 20여년간 막정을 전횡하였기 때문에, 그가 정치를 담당하였던 시대를 다누마 시대라고 한다.
다누마 오키쓰구는 매우 현실적인 정치가였기 때문에, 연공 징수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막부의 재정을 재건하기 위해서는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상업 자본 이용 정책을 적그적으로 추진하려고 하였다.
그는 또한 대상인의 경제력을 최대한으로 이용하려고 하였다.
일반 상공업자의 동업 조합을 적극적으로 공인하여 각종 명목으로 헌납금을 징수하였다.
그리고 해산 자원을 개발하여 중국으로 수출하였다.
6.3.2 다누마 오키쓰구와 홋카이도
다누마 시대에 러시아 선박이 홋카이도 근해에 자주 출몰하게 되자, 센다이번(仙臺藩)의 의사였던 구도 헤이스케(工藤平助)는 <<아카에조후세쓰코(赤가夷風說考)>>라는 책을 저술하여 다누마 오키쓰구에게 헌상하였다.
실리적인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던 다누마는 모가미 도쿠나이(最上德內)를 위시한 조사단을 홋카이도에 파견하여 실태를 조사하기도 하였다.
6.3.3 정책의 실패
그러나 다누마 오키쓰구가 상인 자본을 끌어들여 여러 곳에서 추진한 대규모 간척 사업은 실패하였다.
다누마 오키쓰구가 새로운 계획을 수립하면 그 권리를 얻으려고 하는 상공업자들이 암약하여 공공연하게 뇌물이 거래되었다.
게다가 다누마 오키쓰구 자신이 공공연히 뇌물을 받았기 때문에 도덕은 타락하여 세상은 극도로 혼란스러워졌다.
당연히 막부의 통제력도 약화되었다.
6.3.4 천재지변과 민중 봉기
18세기는 천재지변이 빈번하게 발생한 시대였다. 특히 흉작과 기근의 피해가 극심하였다.
재해로 인하여 농촌이 피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영주는 무거운 연공을 농민에게 부담시켰기 때문에 농민 생활은 파탄되었다.
그러자 전국 각지에서 햐쿠쇼잇키(百姓一계)라고 하는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도시에서도 하층민이 중심이 되어 폭동이 일어났고, 전국의 주요 도시로 확산되었다.
6.3.5 다누마 오키쓰구의 실각
다누마 시대에는 1760년대 이래 흉작이 이어지는 불운이 계속되었다.
1783년에는 아사마야마(淺間山)가 대폭발을 일으켜 주변 지역에 커다란 피해를 안겨 주었다.
분출된 화산재는 오랜 세월 동안 성층권에 머물면서 햇빛을 차단하였기 때문에 농작물에 냉해 피해를 주었다.
그 결과 수년에 걸쳐서 흉작이 계속되었다. 도호쿠 지방에서는 수십만 명이 굶어 죽었다.
이것을 '덴메이(天明)의 대기근'이라고 한다.
전국 각지에서는 농민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다누마 오키쓰구는 1786년에 실정의 책임을 지고 로주에서 물러났으며, 영지도 몰수되었다.
<인물 및 용어 해설>
오오카 다다스케(大岡忠相), 다누마 오키쓰구(田沼意次), 구도 헤이쓰케(工藤平助),
마쓰다이라 사다노부(松平定信), 다시다카(足高) 제도, 난학(蘭學),
메야스바코(目安箱), 햐쿠쇼잇키(百姓一계), 덴메이(天明)의 대기근.
제7장 간세이.덴포 개혁과 막정의 쇠퇴
<시대 개관>
간세이 개혁을 추진한 마쓰다이라 사다노부의 이상은 교호(亨保) 개혁이었다.
그는 다누마가 시작한 정책의 대부분을 폐지하고, 농촌 부흥을 목표로 개혁을 착수하였다.
마쓰다이라 사다노부는 재앙이 닥쳤을 때를 대비하여 구휼 대책을 수립하고, 실업자 대책을 강화하였다.
엄격한 검약령을 실시하면서 퇴폐적인 풍속을 단속하고 언론을 통제하였다.
그러나 간세이 개혁은 엄격하게 시행되었기 때문에 심한 저항에 부딪혔다. 그 결과 1793년 마쓰다이라 사다노부는 실각하였고, 개혁은 중단되었다.
간세이 개혁이 미완의 개혁으로 끝났다고는 하여도, 개혁의 필요성은 누구나가 공감하는 것이었다.
개혁은 막부뿐만이 아니라 각 번(藩)의 과제이기도 하였다.
마쓰다이라 사다노부가 로주직(老中職)에서 물러난 후,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나리가 19세기 초의 정치를 직접 관장하였다.
그러나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 통치 시대는 다누마 시대와 같이 혼란스러워졌다.
각지에서 민중 폭동이 일어났다.
사회가 극도로 혼란스러워지자 다시 개혁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덴포(天保) 개혁이 시행되었으나 급진적인 개혁을 지향하였기 때문에 중도에서 좌절하고 말았다.
7.1 간세이 개혁
7.1.1 마쓰다이라 사다노부의 개혁
1787년 6월, 에도와 오사카에서 덴메이노 우치코와시(天明 打 )라고 하는 대규모 폭동이 일어난 직후에, 다누마 오키쓰구(田沼意次)와 대조적인 성격을 지닌 마쓰다이라 사다노부(松平定信)가 난국 수습의 임무를 띠고 로주(老中)에 취임하였다.
마쓰다이라 사다노부는 다음 해인 1788년에는 제11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나리(德川家齊)의 보좌역이 되어 비장한 결의로 막정 개혁에 착수하였다. 이 개혁을 간세이(寬政) 개혁이라고 한다.
마쓰다이라 사다노부의 이상은 교호(亨保) 개혁을 모범으로 하여 막정을 재건하는 것이었다.
다누마가 시작한 영리 사업의 대부분을 폐지함과 동시에, 상업 자본과 결탁하였던 이제까지의 정책을 청산하였다
7.1.2 교호 개혁을 모범으로 한 개혁
그러나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개혁은 농촌 부흥이었다.
마쓰다이라 사다노부는 농민의 부담을 줄이고, 식목과 개간을 장려하였다.
농촌을 떠나 도시로 진출하여 임금 노동자로 생활하고 있었던 농민들을 고향으로 되돌려 보내어 농업 인구를 확보하려고 하였다.
귀농하는 자에게는 여비와 농기구 그리고 식량을 지급하여 자립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농민의 부담을 줄이기 위하여 특히 막부 직할령의 연공미를 운송하면서 막대한 이익을 챙기고 있었던 오사메야도(納 宿)라는 상인 조직을 해체하기도 하였다.
1789년에는 빈궁한 하타모토.고케닌의 생활난을 구제하기 위하여 기엔레이(棄捐令)를 내렸다.
그리고 덴메이(天明)의 대기근과 같은 재앙이 닥쳤을 때를 대비하여 사창(社倉)이나 의창(義倉)을 각지에 설립하고 미곡을 비축하도록 하였다.
7.1.3 일상 생활과 사사의 통제
교호 개혁 때와 마찬가지로 엄격한 검약령을 실시하였다.
동시에 퇴폐적인 풍속을 강력하게 단속하였다.
사창가가 단속되었으며, 남녀 혼욕의 풍속도 풍기가 문란하다는 이유로 금지하도록 하였다.
호색적인 출판물도 단속되어, 샤레본(酒落本)의 작가로 유명하였던 산토 교덴(山東京傳)이 형벌에 처해졌다.
마쓰다이라 사다노부는 서민들이 막부의 정치에 관하여 비판을 가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언론을 통제하였다.
1792년 하야시 시헤이(林子平)가 <<산고쿠쓰란세쓰(三國通覽圖說)>>에 이어 <<가이코쿠헤이단(海國兵談)>>을 출판하여 해안 방위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그러자 마쓰다이라 사다노부는 근거없는 설을 유포하여 민심을 동요시켰다고 하여 그를 처벌하였다.
문학 작품 속에서도 정치를 비판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유학 중에서도 주자학만을 정학으로 삼아 장려하고, 다른 학파의 학문은 이학(理學)으로 규정하였다.
간세이 개혁은 엄격하게 시행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정책이 시행될 때마다 심한 저항에 부딪혔다.
1793년 마쓰다이라 사다노부는 돌연히 실각하였고, 개혁은 중단되었다.
7.2 각 번의 개혁
간세이 개혁이 미완의 개혁으로 끝났다고는 하여도, 개혁의 필요성은 누구나가 공감하는 것이었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 막번체제는 동요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때 각 번도 막부와 마찬가지로 재정의 궁핍과 농민 봉기에 시달리고 있었다.
18세기 중기에 구마모토(熊本) 번주인 호소카와 시게카타(細川重賢)는 기존의 관행에 구애되지 않고 유능한 관료를 발탁하여 실로 광범위한 개혁을 단행하였다.
18세기 후기에는 특히 도호쿠 다이묘들이 의욕적으로 개혁을 추진하였다.
7.3 서양 열강의 일본 접근
일본이 쇄국을 고집하고 있는 동안에, 세계 정세는 크게 변화하고 있었다.
16세기 말에는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해외에 식민지를 건설하였는데, 17세기에는 네덜란드가 참가하였고, 곧 이어 영국과 프랑스가 해외에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러시아는 동쪽으로 진출하여, 18세기 초에는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태평양에 도달하였고, 드디어 일본 근해까지 진출하여 어업 활동을 시작하였다.
러시아선이 일본에 접근하면서 일본 국내에서는 소위 가이보론(海防論)이 활발하게 제기되었다.
센다이번(仙臺藩)의 의사였던 구도 헤이스케(工藤平助)는 <<아카에조후세쓰코(赤 夷風說考)>>라는 책을 저술하여 당시의 실권자였던 다누마 오키쓰구에게 헌상하였다.
다누마 오키쓰구는 모가미 도쿠나이(最上德內)를 위시한 조사단을 파견하여 홋카이도 북방을 탐사하게 하였다.
18세기 말에는 하야시 시헤이(林子平)가 해안 방위의 필요성을 적극 주장하였다. 당시의 실력자였던 마쓰다이라 사다노부는 그를 처벌하였지만,
북방 경비 강화의 필요성을 통감하고 곤도 주조(近藤重藏), 모가미 도쿠나이 등을 파견하여 홋카이도 인근을 탐험하도록 하였다.
19세기 초에는 마미야 린조(間宮林藏) 일행이 파견되어 가라후토(樺太)와 연해주를 탐험하였다.
7.4 오고쇼 시대와 오시오의 난
7.4.1 정국의 혼란
마쓰다이라 사다노부가 6년여 만에 로주직(老中職)에서 물러난 후,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나리(德川家齊)가 19세기 초의 정치를 직접 관장하였다.
도쿠가와 이에나리는 1837년에 쇼군직을 아들인 도쿠가와 이에요시(德川家慶)에게 물려주고 오고쇼(大御所)로서 정권을 장악하였기 때문에,50여년간에 걸친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처세를 오고쇼 시대라고 한다.
도쿠가와 이에나리는 호화로운 생활에 안주하여 정치를 돌보지 않았다.
정치는 부패하고 치안도 문란해졌다.
사회는 다시 다누마 시대와 같이 혼란스러워져, 각지에서 민중 폭동이 일어났다.
19세기 중반에 들어서면서 세상의 분위기는 더욱 험악해졌다.
7.4.2 오시오의 난
흉작이 계속되면서, 경제 선진 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 기나이(畿內)조차도 미곡 부족 현상이 심각하여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837년에는 막부의 전직 관리였던 오시오 헤이하치로(大鹽平八郞)가 난을 일으켰다.
유명한 양명학자이기도 하였던 그는 덴포의 대기근으로 고통을 받는 오사카 근교의 민중들의 처지를 가슴 아파하여, 마치부교(町奉行)에게 빈민 구제를 청원하였으나 거절당했다.
마치부교는 빈민의 처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특권 상인이 미곡을 매점 매석하는 것을 방관하는 자세를 취하였다.
이에 격분한 오시오는 민중을 동원하여 호상을 습격하고 미곡을 탈취하여 빈민에게 나누어 줄 계획이었다.
7.5 덴포 개혁
막부의 관리였던 자가 공공연하게 오사카라는 대도시에서 중화기까지 동원하여 봉기한 오시오의 난은 막부에 커다란 충격을 안겨 주었다.
도쿠가와 이에나리가 사망한 후, 제12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요시의 신임을 얻은 미즈노 다다쿠니(水野忠邦)가 로주(老中)에 취임하여 다시 개혁 정치를 단행하였다.
상업 자본의 억제와 자연경제에의 복귀를 목표로 하여 미즈노 다다쿠니가 추진한 개혁을 덴포(天保) 개혁이라고 한다.
7.5.1 일상 생활과 풍속의 통제
문란해진 사회 풍조를 쇄신하기 위하여 엄격한 검약령을 내렸다.
에도 시중에 있는 극장을 변두리 지역으로 옮기게 하고, 출판에도 통제를 가하여 소위 음란물이라고 판단되는 작품을 쓴 작가들을 처벌하였다.
값비싼 과자. 요리. 의복 등을 금하고, 기타 제철보다 일찍 출하하여 비싸게 팔리는 과일이나 식품의 통제도 강화하였다.
7.5.2 개혁의 좌절
물가가 비싼 것은 상공업자들이 동업 조합을 결성하여 가격을 통제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1841년에는 동업 조합을 해산하여 자유 경쟁을 유도하였지만 물가는 처음에 생각했던 것만큼 내려가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불필요한 혼란만 야기하였고, 상품 유통은 오히려 약화되었다.
미즈노 다다쿠니는 아게치레이(上知令)를 내려서 에도와 오사카 주변의 다이묘령과 하타모토령의 토지를 막부의 직할령으로 편입시켜 막부의 권력을 강화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 정책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영주들 뿐만 아니라, 막부 내부에서조차 반대하는 의견이 많았기 때문에, 미즈노 다다쿠니는 이 사건으로 인하여 실각하였고, 그가 추진하던 개혁은 2년여 만에 중단되고 말았다.
7.6 웅번의 형성과 정치 사상의 발달
7.6.1 웅번의 형성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일본은 내우.외환에 직면해 있었다.
막부는 위기를 타개하기 위하여 강도 높은 개혁을 추진했지만,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중도에서 좌절하면서 지도력을 상실하고 있었다.
위기감을 느낀 것은 막부뿐만이 아니었다.
각 번(藩)도 정치.경제적인 난제를 해결하지 많으면 번정(藩政)을 꾸려나가기도 어려울 정도로 위기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난관을 헤쳐 나가려고 하였다.
여러 번 중에서도 특히 서부의 사쓰마번( 摩藩)과 조슈번(장주번)의 다이묘들이 해외 사정에 익숙하였기 때문에 적극적인 정책을 추진하여 양 번의 번정개혁은 성공을 거두었다.
7.6.2 정치 사상의 발달
막번체제의 동요와 더불어 쇄국정책의 비판뿐만이 아니라,사회 제도의 비판과 모순의 타개를 위한 의견이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 사이에서 논의되었다.
19세기 초에 가이호 세이료(海保靑陵)는 상거래를 멸시하는 무사의 편견을 비판하여 영주의 재정은 마땅히 상공업에 의하여 재건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상거래는 자연스러운 도리이며, 심지어는 군신 관계조차도 엄밀한 의미에서 상거래라고 주장하였다.
봉건제를 부정하지 않았다는 측면에서는 존왕론(尊王論)도 예외는 아니었다.
적극적인 존왕론자로 유명한 다케우치 시키부(竹內式部)와 야마가타 다이니(山縣大貳)도 황실을 높이 받들 것을 주장하였을 뿐이지, 막부를 무시하고 봉건제를 부정했던 것은 아니었다.
외세의 일본 접근에 대하여 민감하게 반응한 지식인들도 있었다.
혼다 도시아키(本多利明)는 여러 권의 서양 관련 저서를 출간하여 서양 여러 나라의 정세를 설명함과 동시에, 오히려 서양 세계와 적극적으로 무역할 필요성이 있음을 역설하였다.
사토 노부히로(佐藤信淵)도 산업의 국영화와 무역의 진흥을 주장하면서, 막부의 쇄국정책을 비판하였다.
의사인 안도 쇼에키(安藤昌益)는 이미 18세기 전반에 <<시젠신에이도(自然眞營道)>>를 저술하여 만인이 평등하게 경작하는 자연 세계를 이상으로 하여 신분 제도를 부정하였다.
그리고, 오사카의 가이토쿠도(懷德堂) 출신인 도미나가 나카모토(富永仲基)와 야마가타 반토(山片蟠桃)는 합리주의의 입장에서 기성의 종교나 학문의 권위에 의문을 갖고 있었다.
여러 가지 한계 속에서도 합리적인 사고가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에도 시대 후기에 이르면 문화의 중심이 교토.오사카에서 에도로 옮겨졌다.
에도 시대 후기의 문화는 19세기 초인 분카(文化).분세이(文政) 연간에 최성기를 맞이하였기 때문에 이 시대의 연호를 따서 가세이(化政) 문화라고 한다.
이 시대는 이미 실태적으로 상당히 이완된 질서를 막부가 법의 정당성만을 내세워 강제적으로 유지하려고 하였던 시대였다.
그렇기 때문에 가세이 문화는 막부의 엄격한 통제 속에서 활기를 상실하고, 퇴폐적이고 무기력한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
가세이 문화는, 건전하고 활기에 넘쳤던 겐로쿠(元祿) 문화와 비교해 보면, 애욕과 웃음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타락하였다.
서민들은 억압된 본능을 풍자와 해학으로 발산시켰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서민 문화의 수준이 향상되었다.
전국적으로 학교가 세워져서 서민의 자제도 실용적인 교육을 받을 기회가 늘어나게 되었다.
국학과 양학이 이 시대에 이르러서 발달하였다.
문학은, 소설은 물론 하이카이(俳諧)나 와카(和歌) 분야에서도 통속적인 경향이 명확하게 나타나 있었으나 많은 독자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미술 분야에서는 판화가 발달하였다.
판화는 점차로 기법이 개발되면서 여러 가지 색깔을 사용한 니시키에(錦繪)가 제작되었다.
8.1 학문의 발달
8.1.1 교육의 보급
18세기 말에 이르러 서민 문화의 수준이 향상되었다.
유학이 발달하면서 여러 지역에서 공.사립 교육 기관이 설치되었고, 이것은 문화 보급의 커다란 요인이 되었다.
각 영주는 번교(藩校)를 세워 주로 무사의 자제들을 입학하게 하여 인재를 양성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관학에 대하여 사학 기관인 사숙(私塾)이 있었다.
대표적인 사숙으로는 오사카의 조닌이 출자하여 경영한 가이토쿠도(懷德堂)가 있었는데, 이 곳에서 합리적이고 실증적인 정신을 연마한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었다.
또, 주로 서민의 자제들을 위한 기초 교육 시설인 데라코야(寺子屋)가 자연 발생적으로 전국 각지에 세워졌다.
교육 내용은, 주선 시대의 서당과 같이 한문을 가르친 것이 아니고, 실제 생활에 필요한 글을 읽고 쓸 정도의 실용 위주의 교육을 실시하였다.
8.1.2 국학의 발달
막번체제가 동요하는 가운데 국학(國學)이라는 새로운 학문이 뿌리를 내렸다.
이미 겐로쿠 시대에 일본 고전이 연구되기 시작하였는데, 이러한 고전 연구는 18세기 초에 교토에서 가다노 아즈마마로(荷田春滿)가 출현하면서, 점차로 단지 문학 연구에서 탈피하여 복고주의 사상으로 체계화되기에 이르렀다.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가모노 마부치(賀茂眞淵)는 <<고지키(古事記)>>와 <<만요슈(万葉集)>>를 연구하며 외래 사상의 영향을 받기 이전의 고대인의 사상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였다.
그의 가르침을 받은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는 고대의 신화는 고대로 돌아가서 그 당시의 분위기 속에서 연구하여 고대 일본인의 심정을 올바르게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모토오리 노리나가 이후, 국학은 순수 학문 연구의 방향과 운동.사상적 방향으로 갈리게 되는데, 후자의 방향에서 히라타 아쓰타네(平田篤 )가 출현하여 유교와 불교를 배척하는 한편, 국학에서 문학적 요소를 배제하고 스승인 모토오리 노리나가가 씨를 뿌린 복고적인 신도(神道)를 대성하였다.
다시 말하면, 국학은 히라타 아쓰타네에 이르러서 편협한 국수주의적 경향을 띠게 되었는데, 신관.승려.지방 호족들 중에는 그의 사상에 공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중에는 해외에서 전래된 것은 모두 좋지 않다고 하면서 편협적인 일본 중심 사상을 내세우는 사람도 있었다.
이러한 사상은 확산되어 서양의 여러 나라가 일본의 개국을 요구하자 그것을 모두 배격하려고 하는 양이(攘夷) 사상으로 발전하였다.
8.1.3 양학의 발달
양학의 연구는 일찍이 겐로쿠 시대에 니시카와 조켄(西川如見)이 <<가이쓰쇼코(華夷通商考)>>를 저술하여 세계의 지리와 풍속을 소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본격적인 양학 연구는 제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 시대에 한문으로된 서양 서적의 수입이 허용되면서 시작되었다.
양학은 주로 나가사키의 네덜란드 상관을 창구로 하여 연구되었기 때문에 난학(蘭學)이라고 한다.
난학의 발전에 획기적인 의미를 갖는 것은 1774년 <<가이타이신쇼(解體新書)>>의 번역이었다.
<<가이타이신쇼>>는 스기다 겐파쿠( 田玄白), 마에노 료타쿠(前野良澤) 등이 네덜란드어로 쓰여진 것을 직접 번역한 것이다.
일본인이 한문으로 번역되지 않은 서양 서적을 최초로 번역하였다는 점이 주목된다.
<<가이타이신쇼>>의 번역을 출발점으로 하여, 양학은 의학.본초학.천문학.지리학 분야에서 급속하게 발전하였다.
난학이 발달하면서 수입된 서양 물품을 귀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일본인은 수입 물품에 대한 관심과 함께 서양의 학문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이 늘어났다.
특히 난학자들 사이에서는 합리적인 정신이 발달하였고, 그 중에서는 해외 지식의 자유로운 수입을 통제하는 쇄국체제에 대한 비판적인 사고도 형성하게 되었다.
당연히 막부는 이러한 분위기를 경계하기 위하여 난학을 통제하기 시작하였다.
1828년에는 시볼트 사건이 발생하였다.
나가사키 상관의 독일인 의사였던 시볼트(P. Franz von Siebold)는 진료소를 설치하여 일본인을 치료하는 한편, 다카노 조에이(高野長英)를 비롯한 많은 제자에게 서양의 학문을 전수한 사람이었다.
시볼트가 귀국할 때, 천문학자이며 막부의 관리였던 다카하시 가게야스(高橋景保)가 시볼트에게 일본 지도를 건네주었는데, 이것이 발각되어 시볼트는 추방되고, 다카하시 가게야스를 비롯한 다수의 일본인이 처벌되었다.
이와 같이 난학은 실용주의 학문으로 막부의 보호를 받으면서도, 사상적으로는 막부와 팽팽한 긴장 관계를 유지하면서 발전하였다.
8.2 문학과 미술의 발달
8.2.1 소설
소설가들은 다양한 민중 생활의 모습을 재미 위주로 표현하였다.
18세기 후기에는 에도의 유흥가를 무대로 하여 주로 해학적이면서도 기발한 대화를 중심으로 하는 샤레본((酒落本)과, 풍자와 해학을 소재로 한 기뵤시(黃表紙)가 유행하였다.
샤레본의 대표적인 작가로는 산토 교덴(山東京傳)이 있었는데, 그는 유흥가 남녀의 인간상을 날카로운 필치로 묘사하여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간세이 개혁에 의하여 성풍속에 관한 출판이 전면적으로 통제되면서 기뵤시는 절판되었고, 작가들은 작품 활동이 금지되었다.
이 때 산토 교덴도 처벌되었다.
기뵤시에 대신하여 성행하였던 것이 곳케이본(滑 本)과 요미혼(讀本)이었다.
곳케이본은 주로 도시 하층민의 생활상을 기술한 단편적인 이야기인데, 짓펜샤잇쿠(十返舍一九)가 <<도카이도추히자쿠리게(東海道中 栗毛)>>를 비롯하여 에도 토박이의 해학에 넘치는 여행기를 썼다.
덴포기(天保期)에는 연애를 주제로 하여 남녀의 애욕을 전라하게 묘사한 닌조본(人情本)이 유행하였으나 덴포 개혁으로 금지되었고, 인기 작가였던 다메나가 슌스이(爲永春水)는 처벌되었다.
한편, 이 시대에는 권선 징악의 사상을 주입한 장편 소설인 요미혼이 널리 읽혀졌다.
하이카이(俳諧)나 와카(和歌) 분야에서도 통속화의 경향이 뚜렷하였다.
연극 분야에서는 18세기 중기 이후, 닌교조루리(人形靜瑠璃)의 인기가 하락하고, 가부키가 민중의 사랑을 독차지하였다.
8.2.2 미술
회화 중에서 서민이 가장 애호한 것은 풍속화인 우키요에(浮世繪)였다.
우키요에는 회화(繪畵)보다는 판화(版畵)에서 독자적인 세계를 펼쳤다.
초기의 판화는 흑백으로만 표현되었는데, 점차로 기법이 개발되어 1765년에는 스즈키 하루노부(鈴木春信)에 의하여 여러 가지 색깔을 사용한 니시키에(錦繪)가 제작되었다.
우키요에 판화는 미인을 대상으로 하여 제작되기 시작하였으나, 점차로 배우와 풍경도 그 대상이 되었다.
18세기 말에는 연극 배우나 일본 씨름(스모) 선수를 대상으로 하는 도슈사이 샤라쿠(東洲齊寫樂), 미인을 대상으로 하는 기타가와 우타마로(喜多川歌磨)가 인기를 모았다.
덴포기에는 주로 풍경화를 대상으로 한 가쓰시카 호쿠사이(葛飾北齊)와 우타가와 히로시게(歌川廣重)가 활약하였다.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후가쿠산주롯케이(富嶽三十六景)>와 우타가와 히로시게의<도카이도고주산쓰기(東海道五十三次)>가 특히 유명하다.
우키요에와는 품격이 다른 그림인 남화(南畵)가 있었다.
남화는 문인 취향의 그림이었기 때문에 문인화라고도 하였다.
문인화와는 다른 계통의 그림으로 객관적인 사실을 그대로 묘사하는 사생화가 있었다.
8.2.3 생활과 신앙
이 시대의 도시 생활은 신분 계층에 따라 큰 차이가 있었다.
중.하급 무사의 생활은 여전히 곤궁하였다. 특히 하급 무사는 부업으로 겨우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
조닌도 상층 조닌은 비단옷을 입고, 고급 생활 용품을 소지하고, 유흥가를 출입하며 거금을 소비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대부분의 조닌은 생활이 넉넉하지 못하였으며 검소한 생활을 하였다.
도시에는 많은 수의 도시 하층민이 형성되어 있었다.
도시에는 서민층을 대상으로 민중들이 오락을 즐길 수 있는 시설이 많았다.
가부키 극장을 비롯하여, 역사 이야기나 인물 이야기를 주로 하는 고단(講談)과 만담의 일종인 고단(落語) 등을 관람할 수 있는 시설이 19세기 초에는 100여 개소가 있었다.
스모도 인기를 끌었다.
나나쿠사(七草), 히나마쓰리(雛祭), 단고(端午), 다나바타(七夕), 조요(重陽) 등의 연중 행사가 하나의 관례로 정착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현세 이익을 추구했던 민중은 전국적으로 영험이 있다고 알려진 사원과 신사에 참배하며 여행하였다.
현세 구복을 추구하는 일본인의 요구에 부응하여, 막말에는 특정한 신이나 교주를 섬기는 신흥 종교가 일어났다.
구로즈미 무네타다(黑住宗忠)가 창시한 구로즈미교(黑住敎), 여성 교주인 나카야마 미키(中山 )가 창설한 덴리교(天理敎), 가와테 분지로(川手文治郞)가 창설한 곤코교(金光敎) 등은 대표적인 신흥 종교이다.
이러한 종교들은 모두 사회가 극도로 혼란했던 막말에 성립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막부는 무력에 굴복하여 개항하였다.
그러나 개항은 여론의 지지를 얻지 못하였다. 당시에 천황을 비롯한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개항에 저항감을 갖고 있었다.
막부의 권위는 실추되었고, 정국은 혼란스러웠다.
개항 이후 계속되는 경제적 혼란은 양이론을 부채질하였다.
각지에서 지사들이 출현하였고, 그들은 번(藩)의 통제를 벗어나서 혹은 고향에서 도망나와 존왕양이 운동에 참여하였다.
각 번의 존왕양이파는 노골적으로 막부의 정책을 비판하였다.
이러한 와중에 존왕양이 운동의 본거지였던 조슈번은 이윽고 서양과 충돌하는 사태로 발전하면서 막부와 조슈번은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조슈번의 존왕양이파가 특히 막부에 적대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급박한 상황 속에서 1866년 1월, 조슈번과 사쓰마번은 비밀리에 동맹을 맺고, 막부를 타도하는 운동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사정을 알지 못하는 막부는 동년 6월에 제2차 조슈 정벌을 감행하였으나, 사쓰마를 비롯한 많은 번이 출병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막부군의 사기는 저하되었다.
이에 대하여 조슈번은 농민과 조닌도 포함하여 편성된 기헤이타이(奇兵隊)를 앞세워 각지에서 막부군을 격파하였다.
무위를 상징하던 막부가 무력 앞에 굴복하는 상황을 맞이하였다.
9.1 개국
9.1.1 페리 내항
18세기 말 이래, 서양의 선박이 자주 일본 근해에 나타났으나 막부는 쇄국 정책을 고수하고 있었다.
열강의 개국 요구가 계속되어도 막부는 불가하다는 입장을 반복하여 표명하였다.
1853년 6월, 미국의 동인도 함대 사령관 페리가 이끄는 4척의 군함이 에도만 입구의 우라가(浦賀)에 내항하였다.
일본인들은 이 증기선을 흑선(黑船)이라고 불렀다.
페리는 필모어(M. C. Fillmore) 미국 대통령의 국서를 제시하고 개국을 요구하였다.
페리의 기세에 눌린 막부는 로주(老中)인 아베마사히로(阿部正弘)를 중심으로 회의를 거듭한 끝에, 전례를 깨고 미국의 국서를 수리하고 다음 해에 회답할 것을 약속하였다.
페리는 일단 물러갔다.
막부는 또한 전례를 깨고 미국의 개국 요구에 관한 사항을 조정에 보고하였다.
한편, 동년 7월에는 러시아 사절인 푸티아틴(Putyatin)이 나가사키에 내항하여 개국을 요구하였다.막부는 답변을 연기하였다.
페리는 1854년 1월에 다시 군함 7척을 이끌고 내항하여 강력하게 개국을 요구하였다.
다이묘와 무사의 대부분은 개국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나, 막부는 페리의 무력에 굴복하여 동년 3월에 미국과 화친 조약을 체결하였다.
9.1.2 조약 체결
이 조약은 일본이 미국선에 대하여 식품.연로.식수 등을 공급하고 시모다(下田)와 하코다테(箱館)를 개항하고, 미국 영사가 일본에 주재하며, 미국에 일방적으로 최혜국 대우를 하는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것이었다.
막부는 영국.러시아.네덜란드 등과도 화친조약을 체결하였다.
1856년, 화친 조약의 규정에 따라서 총영사 해리스(T. Harris)가 시모다에 도착하여, 일본측에 통상 조약의 체결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 국내에서는 양이(攘夷)의 기운이 강하였다.
1858년 다이로(大老)에 취임한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는 동년 6월 해리스의 강압적인 요구에 굴복하여 칙허를 얻지 못한 채 독단으로 통상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조약은 일본이 가나가와(神奈川).나가사키(長崎).니가타(新潟).효고(兵庫)를 개항하고, 상업 활동을 위하여 외국인이 에도와 오사카에 체재할 수 있도록 개방하며, 개항장에서 미국인의 거주와 치외 법권을 인정하고, 영사 재판권과 협정 관세를 인정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특히 협정 관세 규정은 자주권을 부정하는 불평등 조항이었다.
막부는 연이어서 네덜란드.러시아.영국.프랑스 등과도 같은 내용의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것을 안세이(安政)의 5개국 조약이라고 한다.
9.2 정국의 전환
서양 열강과의 교섭 과정을 통하여 국력의 차이를 절감한 막부는, 해외 사정을 조사하고 양학을 연구하는 한편, 서양의 항해술도 도입하였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대외 위기 의식이 깊어지고, 더 이상 막부에 기대할 수 없다는 분위기가 확산되었다.
그 무렵, 제1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德川家定)는 병약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조속히 후계자를 결정하지 많으면 안 되었다.
사쓰마 번주 시마쓰 나리아키라와 후쿠이(福井) 번주 마쓰다이라 요시나가 등은 쇼군의 후사에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내세워 막부의 개혁을 주도하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다이로인 이이 나오스케는후다이 다이묘들의 지지를 배경으로 하여, 도쿠가와 요시토미를 후계자로 정하고 독재를 계속하였기 때문에, 조정과 반대파 다이묘 그리고 지사(志士)들이 저항하였다.
이에 대하여 이이 나오스케는 반대파를 강력하게 처벌하여 이에 맞섰다.
이 때 급진적인 존왕양이론(尊王攘夷論)을 주장하여 젊은 지사들의 인망을 모으고 있었던 조슈번(長州藩)의 요시다 쇼인(吉田松陰)과 후쿠이번(福井藩)의 하시모토 사나이(橋本左內)가 사형에 처해졌다.
이 사건을 안세이노 다이고쿠(安政の大獄)라고 한다.
9.3 개항의 경제적 영향
무역은 1859년 6월부터 요코하마(橫濱)와 나가사키. 하코다테에서 영국을 주요 상대국으로 하여 개시되었다.
생사. 차 등이 수출되었고, 면포. 모직물. 무기. 선박 등이 수입되었다.
특히 생사의 대량 수출에 의하여 일본의 양잠업과 제사업이 호황을 누렸다.
한편, 요코하마에서는 지방 상인들이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에도의 도매상을 통하지 않고 직거래를 하였기 때문에 동업 조합을 중심으로 하는 유통 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외국과의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일본의 금이 유출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금과 은의 교환 비율이 국제 시장에서는 1:15였으나 일본 내에서는 1:5였기 때문에 해외에서 은이 수입되고 금이 유출되었던 것이다.
한편, 수출이 증가하면서 일본 내에서는 물자가 결핍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 결과 오사카와 에도 등의 대도시의 물가가 폭등하였으며, 양이 사상은 더욱 서민층의 지지를 얻게 되었다.
9.4 공무 합체 운동
1860년 3월, 다이로인 이이 나오스케는 에도성으로 출근하는 도중에 사쿠라다몬( 田門) 부근에서 미토번(水戶藩)의 무사들에게 살해되었다.
이 사건은 막부의 정치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막부는 로주인 안도 노부마사(安藤信正)를 중심으로 실추된 막부의 권위를 회복하려고 의도하였다.
막부는 반대파를 탄압하지 않고 조정과 막부의 화합을 꾀하려고 하여, 소위 공무 합체 운동(公武合體運動)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1862년 고메이(孝明) 천황의 여동생인 가즈노미야(和宮)를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모치(德川家茂)의 부인으로 맞아들이는 데 성공하였다.
이와 같은 공무 합체 운동의 진행과 때를 같이하여, 하급 무사층을 중심으로 한 급진직인 존왕양이(尊王攘夷) 운동도 전개되었다.
안도 노부마사의 피습 이래, 막부의 실력자들은 언제 습격당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개항 이래 일본에 거주하기 시작한 외국인 습격 사건도 계속되었다.
1860년에서 1862년 사이에 네덜란드인 통역사가 암살되었고, 영국 공사관이 습격당하였으며, 요코하마 부근의 나마무기(生麥)에서는 사쓰마 무사가 영국인을 살상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개항 이후 계속되는 경제적 혼란은 양이론을 부채질하였다.
이윽고 조슈와 그 밖의 존왕양이파 지사가 천황과 조정의 귀족들을 움직여서 막부에게 양이의 실행을 요구하는 단계로 발전하였다.
존왕양이 운동이 한창인 1863년 봄에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교토로 행차하였다.
그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5월 10일을 기한으로 하여 양이를 결행하겠다고 하였다.
약속한 기일이 되자 조슈번의 시모노세키(下關) 해협을 통과하는 외국선에 포격을 가하였다.
그러나 양이에는 찬성하나 막부를 타도하는 것에는 반대하는 보수파 귀족들이 아이즈번(會津藩)과 연합하여 1863년 8월에 산조 사네토미(三條實美)를 비롯한 급진파 귀족과 조슈번의 세력을 조정에서 완전히 추방하였다.
이 사건을 8월 18일 정변이라고 한다.
조슈번은 다음 해인 7월에 세력을 만회하기 위하여 군사를 이끌고 교토로 처들어 왔으나 사쓰마. 아이즈 양 번이 협력하여 이를 패퇴시켰다.
이 사건은 긴몬(禁門)의 변(變)이라고 한다.
9.5 토막 운동의 전개
영국. 프랑스. 미국. 네덜란드의 4개국 함대는 조슈번에 대한 보복으로 시모노세키를 공격하였다.
궁지에 몰린 조슈번은 무력에 굴복하여 강화를 맺었다.
이 영향으로 조슈번의 존왕양이파는 일시적으로 잠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1863년 7월, 영국의 동양 함대가 사쓰마번의 가고시마(鹿兒島)를 포격하였다.
전년도 8월, 가나가와(神奈川) 부근의 나마무기에서 발생한 영국인 살상 사건에 대한 보복이었다.
결국 사쓰마번은 영국의 무력에 굴복하여 동년 11월 강화를 맺었다.
그 과정에서 막부와 이해 관계가 대립하게 되었다.
이후, 사쓰마번은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등 하급 무사가 번정의 실권을 장악하게 되면서 점차로 반막부의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한편, 조슈에서는 1865년 다카스기 신사쿠(高 晉作)를 비롯한 하급 무사가 중심이 되어 시모노세키에서 거병하여 번정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주도권을 잡은 양이파는 막부의 재차 정벌에 대비하여 서양식 군제 개혁에 착수하였다.
이런 와중에 프랑스는 막부에게 조슈 정벌을 권유하면서 군사 원조를 약속하였다.
1865년 4월, 조슈번의 주도권이 다시 토막파(討幕派)에 의하여 장악되는 것을 지켜 본 막부는 조슈 정벌령을 내렸다.
이런 급박한 상황 속에서 조슈번과 사쓰마번이 제휴한 것을 모르는 막부는 동년 6월에 제2차 조슈 정벌을 감행하였으나, 사쓰마를 비롯한 많은 번이 출병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막부군의 사기는 저하되었다.
이에 대하여 신무기로 무장한 조슈번의 군대는, 농민과 조닌도 포함하여 편성된 기헤이타이(奇兵隊)를 앞세워 각지에서 막부군을 격파하였다.
설상가상으로 각지에서 폭동이 일어났기 때문에 무위를 상징하던 막부가 무력 앞에 굴복하는 상황을 맞이하였다.
첫댓글 구교과서 정리본이지만 손색이없는 자료여서 올렸습니다, 좋은 자료가 되어 좋은 결과 얻길 바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