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韓中日) 삼국관계(三國關係)
14세기 들어 동아시아 한·중·일(韓中日) 3국은 안정기에 접어들어 200여 년 동안 평화스럽게 보냈으나 16세기에 들어 명(明)나라에서는 정권의 동요가 일어나며 심상찮은 기류에 휩싸이게 된다.
간도(間島)와 연해주(沿海州) / 교토(京都)의 이총(耳塚) / 대명황제 주원장 / 도쿠가와 이에야스 / 데라우치
1. 주원장(朱元璋)이 세운 명(明)나라
몽골족이 세운 원(元)나라가 중국을 지배하던 시기, 의기(義氣)가 넘치던 주원장(朱元璋)은 원(元)나라의 세력이 약화된 틈을 타서 수도를 난징(南京)으로 정하고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의 잔존(殘存)세력을 북방변경(邊境)으로 몰아낸 후 한족(漢族)의 나라를 세워 황제위(皇帝位)에 오르니 바로 명(明)나라를 세운 태조(太祖) 홍무제(洪武帝) 주원장(朱元璋)이다. 주원장(朱元璋)의 출신을 약술(略述)하면, 찢어지게 가난한 소작농(小作農)의 6남매 중 막내로 서민 출신이었다. 일찍 양친을 여의고 오갈 데가 없어 절에 들어가 탁발승(托鉢僧)으로 전전긍긍하다 더이상 견디기 어려워지자 산적인 홍건적(紅巾賊)에 들어가 스스로 산적(山賊)이 된다.
처음 산적의 소굴로 들어가 작은 무리의 소두목이 되었다가 나중 최고지도자인 총 두목이 된 후 정권경쟁에 뛰어들어 원(元)나라를 몰아내고 마침내 대명(大明)의 황제위(皇帝位)에까지 오르니(1368) 다시 한족(漢族)이 중국의 지배권을 되찾아 오는.... 신화적인 인물이다.
명(明)나라는 제3대 영락제(永樂帝) 때 수도를 베이징(北京)으로 옮기며(1412) 약 250여 년간 지속한다.
그러나 환관(宦官)들의 득세와 농민(農民)반란, 청(淸)나라의 공격 등으로 시달리게 된다.
마침내 이자성(李自成)이 난(亂)을 일으켜 제17대 황제 숭정제(崇禎帝)가 자결(自決)함으로써 명나라도 1644년에 막을 내리는 비극(悲劇)을 맞게 된다.
2. 임진왜란(壬辰倭亂)과 경술국치(庚戌國恥)
일본(日本)을 살펴보면, 16세기 후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정권을 잡은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로 이어지는데 간토(關東) 지방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연합하여 일본이 통일된다.
이후, 17세기 초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일으킨 에도막부(江戶幕府) 시대가 열리며 비로소 국가형태가 정비되고 눈부신 경제발전으로 세계에 얼굴을 드러내게 된다. 일본은 당시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 예폐(禮幣)라는 공물(貢物)을 바쳤는데 일반적으로 상국(上國)에 바치는 예물을 공물(貢物)이라고 했는데 예폐(禮幣)는 훨씬 더 공경하는 표현이다.
당시 중국의 명나라는 세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환관(宦官)들의 간계로 한국과 일본을 압박하자 국력이 나날이 신장(伸張)되던 일본은 참지 못하고 일본막부(日本幕府)의 수장(首將)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나라를 치러가는 길을 빌린다는 명목, 입대명(入大明)이라 하여 우리나라를 거쳐 가게 해 달라고 요청하자 당시 조선의 왕이었던 선조(宣祖)는 거부한다.
그러자 일본막부는 즉각 16만 명의 군대를 조직하여 우리나라를 침공하니 바로 임진왜란(壬辰倭亂)이다.
조선 14대 선조 때(1592) 발발된 임진왜란, 1597년에 또다시 쳐들어온 정유재란(丁酉再亂)까지 7년에 걸쳐 한반도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게 되는데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 대첩 등으로 왜군을 격퇴한다.
이때, 일본민족의 잔악(殘惡)함이 여실히 드러난다. 그 일례로, 내가 교토(京都)를 여행할 때 이총(耳塚:귀 무덤)을 본 적이 있는데 이 무덤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명(明)나라와 조선(朝鮮)의 적군을 죽인 후, 코(鼻)와 귀(耳)를 잘라 자신의 전과(戰果)를 증명하려고 그 귀와 코를 일본으로 가져가 교토에 무덤을 만들었다고 한다. 무덤에 묻힌 귀와 코가 12만 명....
또다시 20세기 초, 일본이 우리나라를 재침공하여 정권을 장악함으로써 36년간의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를 겪게 되는데 피눈물을 흘렸던 우리 민족의 상처는 세월이 지나도 영원히 아물지 않을 것이다.
1905년, 일본과 맺은 을사늑약(乙巳勒<條>約)으로 1910년(庚戌年), 데라우치(寺內正毅)에 의해 한일합방(韓日合邦)이 이루어져 우리나라는 완전히 일본의 속국이 되니 이것이 바로 경술국치(庚戌國恥)이다.
일제강점기에 일제의 압제(壓制)에 시달리던 우리 국민은 중국(주로 길림성-間島지방)으로, 러시아 연해주(沿海州)로 피신하여 항일운동을 벌이고 김구(金九)는 중국 상해에 설치하였던 망명정부에서 주석(主席)으로 활동한다. 그 이후, 일본은 중국은 물론, 동남아를 휩쓸고 인도를 거쳐 미국까지 넘보게 되는데 바로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이다. 세계 제패를 넘보며 미국에 선전포고도 없이 하와이(Hawaii) 진주만(眞珠灣: Pearl harbor)을 가미가제(神風) 라는 전투비행특공대를 보내 폭격을 하여 쑥대밭을 만들자 미국도 눈치만 보다가 마침내 칼을 빼들고.....
미국이 태평양전쟁에 정식 참전 선언을 하고 히로시마(廣島-1945. 8. 6.)와 나가사키(長崎-1945. 8. 9.)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려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받아내고 전쟁이 끝난다. 원폭투하로 도시 전체가 파괴되었음은 물론, 히로시마가 사망자 19만 명, 나가사키는 사망자 8만 명으로 추계된다고 하니 얼마나 참혹한 전쟁발발의 대가(代價)인가? 이로써 우리나라도 마침내 1945년에야 국권을 되찾는 해방이 된다.
3. 껄끄러운 한일(韓日)관계
우리나라 역사를 좀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14세기 들면서 고려 말, 북쪽에서는 중국의 홍건적(紅巾敵)이, 남해안 일대에서는 일본의 왜구(倭寇)들이 분란을 일으켜 고역(苦役)을 치른다. 그런데 홍건적은 고려의 장군 최영(崔瑩)과 이성계(李成桂)가 물리치고 일본의 해적들인 왜구(倭寇)는 최무선(崔茂宣)이 화포(火砲)를 만들어 해적선을 불태우고 나아가 왜구의 근거지인 쓰시마(對馬島)를 토벌하였다.
이후, 쓰시마는 한국에 조공(朝貢)을 바치고 한국인들이 건너가 살게 되면서 명실상부 한국의 소유가 되었다. 쓰시마에 가면 지금도 우리 민족의 풍습과 흔적(遺跡)들이 널려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쓰시마(對馬島)는 한국 땅이 아닌가?
그런 과거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도(獨島)의 영유권을 끊임없이 주장하는 일본을 보면 헛웃음이 나온다. 울릉도(鬱陵島)는 신라 시대 우산국(于山國)으로 불리던 소국이었는데 신라에 병합되었고, 울릉도에서 87km 떨어진,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無人島)였던 독도(獨島)는 울릉도의 부속(附屬)도서인데 일본이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일본의 주장은 무인도인 독도(일본사람들은 죽도<竹島>)에 일본 어부들이 어업기지를 구축하고 고기를 잡던 곳이라 일본 소유라고 주장한다. 일본 본토에서 보면 엄청나게 먼 곳인데....
그러나 현대에는 유엔(UN)과 국제사법재판소에서 국제분쟁을 판결하여 한국 땅으로 인정하였는데 일본은 아직도 교과서에 독도는 일본 땅이라 실었다고 하니...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쓰시마(對馬島)가 우리 땅이라고 맞서야 하지 않을까?
4.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
중국은 간도(間島)는 물론, 만주에 넓은 영토를 차지했던 고구려 역사를 중국의 역사에 편입시키려 열을 올리고 있는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은 도대체 그 의미가 무엇일까? 우리나라의 삼국시대에는 요동반도(遼東半島)는 물론, 산동반도(山東半島)도 우리 한민족이 차지하던 시기가 있었는데 그러면 베이징(北京)을 제외한 산동(山東)반도와 요동(遼東)반도, 만주는 우리 땅이라고 우리나라도 주장을 해야 하는가?
5. 백두산(白頭山) 정계비(定界碑)
1990년, 나는 백두산 여행을 하면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내가 알기로는 예전 백두산정계비(白頭山政界碑)에 중국과 조선의 국경선을 합의한 내용의 비석을 세웠는데 거기에 청(淸)나라의 오라총관(烏喇摠管) 목극등(穆克登) 등과 조선 관원들이 현지를 답사하고 국경선을 기록하였는데 거기에는 백두산 전체는 물론, 간도(間島) 지방까지 조선 땅이라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압록강(鴨綠江)과 토문강(土門江)이 경계라고 했는데 토문강은 만주를 흐르는 쑹화강(松花江)의 한 줄기로 그 동쪽이 간도(間島) 지방인데 중국은 토문강이 두만강이라고 우기면서 결국 간도(間島)가 중국 땅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언제인가 그 정계비(定界碑)가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는데 당시 찍은 사진이 남아있고 그 내용도 뚜렷이 확인된다.
더 기가 찰 노릇은 내가 갔을 때 백두산 정상의 천지(天池)를 향하여 중국 쪽으로 올라갔는데 백두산을 정상에서 국경선을 그어 백두산의 60%는 중국 땅, 정상의 호수인 천지(天池)도 가운데를 반을 갈라 절반은 중국, 절반이 한국이라니.... 북괴(北傀) 김일성(金日成)이 중국과 맺은 협약의 결과이겠는데 백두산정계비를 기준으로 보면 엄청나게 넓은 지역의 한국 땅이 중국 땅으로 둔갑한 결과이다.
6. 일본 기후(岐阜)의 시라가와고(白川鄕)
그렇다고 하여 일본인, 중국인들이 모두 나쁜, 야수(野獸)와 같은 종족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일본여행 중 기후(岐阜)에 있는 전통마을 구조하치만(郡上八幡)에 있는 일본 전통가옥 갓쇼우조(合掌造)를 보러 가다가 중도에 시라가와고(白川鄕)라는 간판이 보이는 찻집으로 들어갔던 적이 있었다. 백천향(白川鄕)이라니 일본 성씨(姓氏)인 시라가와(白川) 성(姓)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생각하고 40대의 주인아주머니가 우리를 접대하기에 내가 불러서 심심풀이로 몇 마디 건넸다.
서툰 일본어로, 나는 한국 사람인데 성이 바꾸(白)인데 일제강점기에 창씨개명(創氏改名)하라는 총독부(總督府)의 명령이 떨어져 우리 백씨(白氏)들은 모두 시라가와(白川)로 바꾸었다. 나는 태어나기 몇 년 전이라 해당되지 않지만, 우리 형님의 이름이 시라가와 요시노(白川吉野)였다....
이 일본 아줌마는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얼굴이 빨개지더니 나에게 열 번도 넘게 고개를 구부려 인사를 하면서 어쩔 줄을 모르는 표정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일본은 여행하는 내내 가는 곳마다 친절하고, 예의 바른 사람들이 많았다. 일본인들의 성향을 읽어보면 완전히 극과 극이라는 느낌이 짙은데 일본 지식인들중에 역사를 바로 읽고 일본의 잘못을 인정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완전히 말도 안 되는 주장을 늘어놓는 인간들도 부지기수이다.
우리나라의 상황과 우리 한국인(조선인)들의 인간성으로 말하면....
끝없이 서로 물고 늘어지고 모함하던 사색당파(四色黨派) 싸움, 이순신 장군을 모함하여 사지로 내몰아 죽을 고비를 간신히 넘기는 등, 우리 한민족이라고 특별히 나을 것도 없는 모양새이다.
그러나 목숨을 내걸고 투쟁에 앞장서던 항일투사(抗日鬪士)들을 비롯하여 정의를 위하여서는 참지 못하는 열사들도 많았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나라의 정치판을 보노라면 완전히 ○판.... 언급을 회피하기로 한다.
인류문화(人類文化)의 아이러니(Irony)
인류의 역사를 더듬어 보면 상당히 이해하기 어려운 점들이 제법 많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영국은 신사(紳士)의 나라이다.’, ‘독일인은 정직(正直)한 국민성을 가지고 있다.’, ‘이탈리아와 스페인은 가톨릭 국가로 신앙의 나라이다.’ 등으로 불리는 것 같다. 과연 사실일까?
나는 그 나라들을 두루 여행하며 많은 것을 보고 느꼈는데 과연 그러하다는 인상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여러 가지 이치에 맞지 않는, 아이러니(Irony)가 읽혀진다.
쿠스코 삭사이후아망 유적 / 오양따이땀보 요새 / 마추픽추 / 잉카길(Inca Trail)
1. 스페인(Spain)과 포르투갈(Portugal)
나는 스페인 전역을 3주간 배낭여행 하면서 골고루 둘러보았는데 가톨릭 신자인 나에게는 가는 곳마다 성지(聖地)나 다름없어서 여행 내내 벅차오르는 기쁨과 감동으로 가슴이 울렁거렸다.
산티아고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 성당, 마드리드(Madrid) 대성당, 바르셀로나(Barcelona)의 성가족(Sagrada Familia)성당, 몬세라트(Montserrat) 수도원의 검은 성모자상(聖母子像)....
중세(中世), 항해(航海) 대국으로 영국과 어깨를 견주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중남미로 눈길을 돌린다.
16세기 초(1519), 스페인의 정복자(征服者) 코르테스(Cortes)와 피사로(Pizarro)는 숱한 만행을 저지르지만 그중 하나를 약술하면, 멕시코는 국토면적도 넓고 다양한 부족들이 살았는데 당시 아스텍(Aztec) 제국의 수도(首都)였던 테노치티틀란(Tenochititlan-현재 멕시코시티)을 코르테스가 점령한다. 아스텍인들은 흰 피부에 처음 보는 말을 타고 온 스페인 정복자들을 열렬히 환영했다고 한다. 테노치티틀란은 당시 둘레 10km의 호수 가운데 인공섬을 만들고 건설한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요새도시(要塞首都)였다는데 성문을 활짝 열고 쌍수로 환영하여 맞아들였다고 한다..
그런데 코르테스는 당시 왕이었던 몬테수마 2세를 잡아 가두자 깜짝 놀란 아스텍인들이 제발 놓아달라고 빌자 왕이 갇혀있는 방에 금을 가득 채우면 살려주겠다고 한다. 아스텍 사람들은 집에 있던 모든 금붙이를 가지고 와 왕이 갇혀있는 방에 가득 채우는데.... 코르테스는 복수가 두려워 약속을 어기고 왕을 죽여 버린다. 그뿐만 아니라 남미의 잉카(Inca)제국, 유카탄반도의 마야(Maya)제국 등도 모두 무너지는데 스페인 속죄의 의미인가 가는 곳마다 화려한 성당(聖堂)이 세워져 있다. 페루(Peru)를 여행하면서 보면 정복자이자 약탈자였던 스페인 피사로(Pizarro)의 흔적이 곳곳에 있는데 피사로의 무자비한 학살에 대항하여 전투를 벌이지만 계속 패배하자 잉카(Inca)의 왕은 쫓기면서 요새를 세우지만 끝내 대적(對敵) 할 수 없어 달아나 종적을 감춘다. 최후의 보루로 알려진 빌까밤바(Vilcabamba)는 수수께끼 속으로 사라져 지금도 찾지 못하고 있다. 빌까밤바에는 잉카의 왕이 가지고 도망간, 엄청나게 많은 황금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지금도 전 세계 수많은 탐험가, 탐욕가들이 찾기에 혈안이 되지만 영원히 찾아내지 못한다. 잉카(Inca) 제국의 수도였던 쿠스코(Cuzco)에서 신성계곡(神聖溪谷)으로 불리는 삐삭(Pisac)은 가는 곳마다 지금도 수많은 요새(要塞) 유적이 있고 이곳에서 멀지 않는 우루밤바(Urubamba) 강가의 고대도시 오얀따이땀보(Ollantaytambo)에도 요새가, 그리고 숨겨진 공중도시 마추픽추(MachuPicchu)도 온전히 유적이 남아 있다. 이곳 봉우리에서 보면 끝없이 이어지는 아슬아슬한 계곡 절벽의 잉카길(Inca Trail)도 곳곳에 보이는데 저 길은 잉카 군인들이 왕을 모시고 도망갔던 길로 알려져 있다.
2. 영국 동인도(東印度) 회사
영국을 예로 보면, 1600년대 ‘동인도(東印度)’라는 회사를 설립하여 아시아권과 무역을 활성화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인도에 첫발을 내디디는데 영국뿐만 아니라 네덜란드, 프랑스 등 유럽의 몇몇 나라들도 앞다투어 인도(印度:India)에 발을 들여놓는다. 18세기 초, 영국은 제1차 산업혁명(産業革命)으로 경제적인 부를 쌓게 되자 1757년에 인도에 눈독을 들이고 첫 영·인(英·印) 전쟁이라 할 수 있는 ‘플라시 전투(Battle of Plassey)’를 기점으로 인도를 정복해 나갔고 프랑스도 함께 앞다투어 인도의 영토를 차지하기 시작한다. 그러다 1876년에 이르러 가장 세력이 우세했던 영국은 인도 주변의 여러 나라들을 묶어 인도제국(印度帝國)이라는 명칭을 붙이고 최고 통치자인 황제 자리를 영국 빅토리아(Victoria) 여왕이 겸임했으니 명실공히 인도의 대부분 소국들은 영국의 속국(屬國)이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3. 중·영(中英) 아편전쟁(阿片戰爭)
1947년에야 인도는 영국의 통치에서 벗어났으니 인도는 거의 300여 여년이나 영국지배하에 있었던 셈인데 가장 야비하다고 느껴지는 것은 영국이 중국(中國)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하는데 그 방법이 인도에서 아편(阿片)을 생산하고 중국에 밀수(密輸)하여 엄청난 부(富)를 쌓았음은 물론, 중국을 마약(痲藥) 중독자 천국으로 만든 일이다. 결국, 중국 청(淸)나라와 전쟁이 벌어지는데 바로 ‘아편전쟁(阿片戰爭-일명 英·中 전쟁, 1839~1842)’이 그것으로 아쉽게도 중국이 패배하여 불평등 조약인 난징(南京)조약을 맺게 되고 홍콩(香港)을 영국에 넘겨주게 된다. 대영제국의 전성기에 전 세계 영국령(식민지)이던 곳이 70여 곳에 이르렀는데 세계 2차대전 후 54개국이 독립하지만 영국령이 14곳이나 남아있다고 한다. 과연 영국은 신사(紳士)의 나라라고 할 수 있는가? 한 달 동안 인도를 여행하면서 보았더니 영국 이외에도 곳곳에 네덜란드, 프랑스 등 유럽의 나라들이 차지하여 통치하였던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있었다.
살인마 히틀러 / 일본의 진주만 기습 / 아우슈비츠(유대인 400만 명 독가스) / 불타는 우크라이나
4. 독일 살인마(殺人魔) 히틀러(Hitler)와 일제(日帝)의 만행(蠻行)
세계 2차 대전의 비극은 전쟁터에서 희생된 사람들도 불쌍하지만, 유대인(猶太人)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감금하고 400여만 명을 독가스로 살해한 히틀러(Hitler)는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살인마(殺人魔)??
일본 또한 2차대전 때 우리나라와 중국 및 동남아를 차지하고 선전포고도 없이 미국 진주만(珍珠灣:Pearl Habour)을 기습하여 엄청난 사상자를 발생시켰고 결국 미국의 반격으로 무너지지만 일본인들의 잔인성 또한 상상을 초월한다.
이들에 결코 뒤지지않는 인물이 현 러시아 대통령인 푸틴(Putin)이다.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병원이고, 백화점이며 민간인 시설까지 미사일을 쏘아대어 수많은 사망자가 속출하다니... 불쌍한 우크라이나...
그렇다면 현재 우리나라가 경제대국의 반열(班列)은 물론, 선진국 대열에 끼게 되었다고들 하는데 사실인가? 전직 대통령은 모조리 감옥 생활을 하게하고, 잘한 일들보다 잘못한 일들만 파내어 감옥행....
조선시대에도 사색당파(四色黨派)라 하여 노론(老論), 소론(少論), 남인(南人), 북인(北人)으로 정파(政派)가 갈리어 끊임없는 당파싸움으로 나라가 혼란에 빠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귀양가고....
5. 조선(朝鮮)의 의적(義賊) 임꺽정(林巨正)
의협심에 불타오른 강원도 철원의 임꺽정이 ‘이 천하에 몹쓸 쓰레기 같은 놈들 모조리 잡아, 목을 쳐서 들고 임금님 앞에 나가 엎드려 용서를 빌고야 말겠다.’고 분연히 일어난 것이 ‘임꺽정(林巨正)의 난’이다.
임꺽정은 관헌이 잡으러 오자 한탄강 바위 밑에 꺽지라는 물고기가 되어 숨어버려서 찾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임꺽정이라 하는데 꺽지고기라는 의미이다.
조선의 3대 의적(義賊) 임꺽정(林巨正), 홍길동(洪吉童), 장길산(張吉山)은 누구나 아는 호걸들이었다.
현재 우리나라 관광명소로 알려진 철원 한탄강(漢灘江) 계곡에는 고석정(孤石亭) 정자각이 있다.
우리나라도 국민성이 우수하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결코 정직하다거나 인간적이지만은 않은 것 같다.
의적(義賊) 임꺽정 / 한탄강 고석정(철원) / 러쉬모어(미국) / 인디언 추장 성난 말 조각(작업 중)
미국 러시모어(Rushmore)산에 있는 미국 역대 대통령 중 위대한 인물로 꼽히는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시어도어 루스벨트, 아브라함 링컨은 과연 잘못이라고는 전연 없는 성인(聖人)들이었을까?
미국 원주민인 인디언(Native American)들은 여기에 반발하여 미국에 거주하였던 200여 원주민(Native American-Indian)들의 추장 중에서 최고의 추장이라 일컬어지는 성난 말(Crazy Horse) 두상(頭狀)을 사우스다코타(South Dakota)주 블랙힐스(Black Hills)에 건립 중인데 미국 대통령 조각상 거의 2배 크기로 세계 최대의 석상(石象)이라고 한다. 인간의 심성(心性)이라고 하는 것은 ‘나만 잘난 것’이 아니라 두루 주변을 살피며 겸손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참된 도리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