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빈의 리히텐슈타인미술관. 1년에딱한번부정기적으로문을연다
‘운(運)과 애교.’
20세기 말 일본에서 공부할 때 자주 들었던 말이다. ‘성공하는 인생’의 핵심 요소라고 배웠다. 1970년대 ‘경영의 신’이라 불렸던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助)가 강조했던 말로, 신입사원 채용 당시 중요한 당락 기준 중 하나였다고 한다. 운은 행운을 의미한다. 애교라는 말은 ‘주변을 밝게 만드는 미소’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운과 애교는 ‘노력, 인내, 최선’과는 동떨어진 개념이다. 사회에서의 경쟁을 염두에 둔 세계관이 아니라 선천적, 원천적 성격이 강한 말이다. 당시에는 이해하기 힘든 ‘기묘한’ 발상이었다. 밤잠도 안 자고 노력해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성공의 출발점이라 믿었다. 운과 애교는 뭔가 공을 들여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개척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출생 전부터 유전자에 깊숙이 새겨진 운명 같은 의미로 느껴졌다.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노력과 인내와 최선’ 없이 공짜로 성공의 열매를 따먹는 식이라고나 할까?
마쓰시타의 생각을 이해하게 된 것은 40대 중반 이후다. ‘노력, 인내, 최선’도 성공의 요소지만,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상대적 개념이긴 하지만 경쟁사회에 활용될 단기간의 수단이 ‘노력, 인내, 최선’이 아닐까?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나보다 더한 노력가가 등장할 경우 아래로 떨어지게 된다. 나이가 들수록 ‘노력, 인내, 최선’에 대한 집중도도 떨어진다.
물론 그런 가치들이 불필요하다는 말이 아니다. 경쟁논리로는 풀 수 없는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가 바로 ‘운과 애교’라는 단어 속에 집약된 듯하다는 깨달음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정신의 상징적 인물로 로마사를 분석한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말했던가? “역량, 시대와 더불어 운이야말로 지도자 여부를 가늠할 최대 변수다.” 거창한 얘기로 들릴 듯하지만 ‘운과 애교’는 인간의 차원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신의 손길’을 느낄 수 있는 징표일지 모르겠다.
‘운과 애교’는 1등 논리에 벗어난, 등수에 들지 못한 수많은 패자(Loser)들을 위한 가치관일 듯하다. 경쟁에서 탈락한다 해도 ‘운과 애교’를 바탕으로 나만의 성공담으로 바꿀 수 있다. 필자의 판단이지만, 운과 애교는 평생 이어갈 ‘내면의 초석’이다. 운과 애교가 있다면, 아니 있다고 믿는다면, 자기만의 성공담을 창조해낼 수 있다. 작은 것 하나도 중시 여기면서, 행복으로 연결시킬 수 있다. 너무도 당연하지만, 성공의 목적은 행복에 있다. 이에 반해 ‘노력, 인내, 최선’은 젊을 때 잠시 통할 ‘외면의 디딤돌’에 그친다. 시험에 능한 모범생이 성공에 도달할 수는 있다. 하지만 들판에 핀 꽃 하나를 보면서도 행운이라 생각하고, 주변에 밝은 공기를 전해주는 사람이 진짜 성공한 인생, 나아가 행복한 삶이 될 수 있다.
다빈치 작품으로 추정되는 기미상. 아직 최종 검증은되지 않은 청동상이다.
불운의 도시 빈의 반전
필자에게 오스트리아 빈은 불운(不運)의 도시로 남아있다. 불행은 아니지만, 들를 때마다 운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20여년 전부터 4번이나 방문했지만, 올 때마다 방점을 둔 명소로부터 배척당했다. 리히텐슈타인미술관이 특히 그랬다. 흥미롭게도 인구 4만명에 불과한 유럽의 초(超)미니국가 리히텐슈타인의 최고 미술관이 오스트리아 빈 한복판에 있다. 리히텐슈타인 수도 바두츠(Vaduz)에도 국립미술관을 비롯한 수많은 미술관들이 들어서 있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알려진 리히텐슈타인미술관이라고 하면, 빈 소재 전시관부터 떠올리게 된다. 스위스와 오스트리아 사이 산속에 갇힌 바두츠보다, 합스부르크 대제국의 영광이 드리워진 빈이 리히텐슈타인 예술의 총사령부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리히텐슈타인은 합스부르크 체제하의 작은 봉건 영토로 취급돼왔다. 리히텐슈타인 왕가는 합스부르크 대제국의 신하와 같은 존재였다. 따라서 리히텐슈타인 왕실 가족들도 빈에 거주했다. 생활 기반이 바두츠로 완전히 옮겨간 것은 20세기 들어서부터다. 외딴 바두츠 미술관보다, 빈 한복판 리히텐슈타인미술관이 더 유명하고 고평가될 수밖에 없다.
리히텐슈타인미술관은 1년에 딱 한 번 부정기적으로 문을 연다. 개장 기간은 길 때는 한 달, 짧을 경우에는 1주일에 그치는 해도 있다. ‘빈=불운의 도시’의 근거지만, 항상 미술관이 닫혀 있던 때에만 들렀다. 잔뜩 준비를 하고 히말라야 등정에 나섰지만, 입산금지라는 푯말을 접하는 식의 상황이다. 올해는 아예 작정을 하고 일찍부터 미술관 개장 시기에 맞춰 빈으로 향했다. 3월 1일부터 한 달간 미술관 개장이 예정돼 있는 걸 알았다. 유럽 열차의 특징이지만, 일찍 구입할 경우 최고 80% 정도 저렴하다. 9시간 걸리는 베네치아발 빈행 열차 2등석을 32유로에 미리 끊어뒀다. 국경을 넘어가는 열차는 알프스의 스키를 즐기는 승객만 이용할 뿐, 거의 텅 빈 상태에서 달렸다. 도착 다음날 바로 리히텐슈타인미술관으로 향했다.
1년에 딱 한 번 문을 여는 미술관
필자가 리히텐슈타인미술관에 대해 처음 안 것은 20세기 말이다. 미국 의회 공영방송 C-SPAN의 특집 다큐멘터리로, 워싱턴 국립미술관이 소장한 다빈치 명화 ‘지네브라 드 벤치(Ginevra de Benci)’가 주인공이다. 유럽 밖에 있는 유일한 다빈치 유화로, 워싱턴은 물론 미국 미술관의 간판 작품에 해당한다. 다큐멘터리의 핵심은 다빈치 그림 확보와 관련한 CIA와 FBI의 비밀작전에 관한 내용이다. 1960년대 냉전 당시의 국가 프로젝트로, 수년간 대륙을 오가며 이뤄진 세기의 명화 반입작전이었다고 한다. 그림 가격으로 450만달러의 현금을 지급한 뒤 전투기 호송하에 특수 비행기로 수송했다고 한다. 도착 직후 당시 대통령 린든 존슨에게 직접 보고했다는 얘기도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
리히텐슈타인미술관 1층을 장식하고 있는 로마 황제 10여명의 청동 두상.
다빈치 작품을 미국에 판 이유
다큐멘터리에서 필자가 가장 많이 들은 단어는 ‘리히텐슈타인’이란 고유명사다. 수백 년간 다빈치 명화를 보관했던 곳이 빈 리히텐슈타인미술관인 것은 물론, 그림을 미국에 판 주체도 리히텐슈타인 왕가였다. 다빈치 그림이 워싱턴에 도착한 것은 1967년이었다. 당시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142달러였다. 약 3만1000명의 1년간 총소득을 전부 합친 엄청난 금액이 다빈치 명화의 가격이었다.
리히텐슈타인 왕가는 왜 다빈치 그림을 팔았을까? 더 많은 돈을 준다는 곳도 있었지만, 왜 미국 정부에 지네브라를 넘겼을까? 당장 당시 왕가의 결혼식을 앞두고 엄청난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란 분석이 나오지만, 정치적 배경하의 해석도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리히텐슈타인 왕가와 독일 나치와의 협력관계가 배경에 있다. 어두운 역사를 비밀로 하고 무마하는 조건으로 다빈치 그림이 ‘미국 정부’에 전해졌다는 식의 얘기다. 사실 리히텐슈타인 왕가의 전쟁 중 흑역사는 이후 체코, 폴란드를 통해 간헐적으로 흘러나온다. 2005년에는 나치 강제수용소 유대인 일부가 리히텐슈타인 왕가의 강제노역에 동원됐다는 뉴스도 전해졌다. 그러나 정작 미국에서는 왕가에 대한 비난도 없고, 흑역사 관련 뉴스도 전무하다.
빈 특유의 구식 노면열차를 타고 미술관으로 향했다. 일명 리히텐슈타인 가든팰리스(Garden Palace)라 불리는 곳으로, 문자 그대로 시민용 공원을 낀 왕가의 건물이다. 현재 빈에는 가든팰리스를 비롯해 리히텐슈타인 왕가 소유 건물이 3군데에 이른다. 미술관은 바로크 스타일 3층 건물 내에 들어서 있다. 뒤쪽의 정원과 더불어 정문 앞쪽 마당을 동시에 갖춘, 넓은 터의 공간이다. 붉은색과 푸른색으로 양분된 리히텐슈타인 국기가 눈에 들어온다. 국기 왼쪽에는 십자가 문양의 면류관이 새겨져 있다. 리히텐슈타인은 왕정 체제하의 민주주의 국가다.
미술관 안으로 들어서자, 직원들이 무려 3명이나 달려왔다. 친절한 안내와 함께 영어판 안내서도 제공했다. 무료인 1층 미술관과 함께, 2층의 왕가 전용 건물 유료 투어도 따로 있다고 한다. 당장 16유로를 내고 유료 투어도 신청했다. 불운은 잊고 행운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느낌이다. 2층 전시관은 평소에는 폐쇄된 공간이다. 1층 미술관 개장에 맞춰 잠시 문을 열었을 뿐이다.
워낙 넓은 공간이라 그런지 무료인데도 관람객 수가 그렇게 많지 않다. 1층 안으로 들어가자 로마 황제 10여명의 청동 두상이 길게 드리워져 있다. 로마를 대표하는 철학가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청동상은 아예 따로 전시돼 있다. 전부 17세기 오스트리아에서 제작된 것으로, 사실적 묘사가 대단하다. 미술관 전체가 그리스, 로마 관련 전시물로 채워진 느낌이다. 리히텐슈타인 왕가가 추종하고 흠모하는 문화와 롤모델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전시물들이다. 건물 안에는 리히텐슈타인 왕가 전용도서관도 있다. 수백 년 전 출간된 책들이 천장까지 빼곡히 들어서 있다. 성경만 모아놓은 서재가 따로 있는지 물어봤다. 직원이 대답하기 직전, 바로 옆에 있던 60대 오스트리아 신사가 웃으면서 ‘농담 반 진담 반’ 얘기를 들려줬다. “왕 스스로 신이라 여기는데 바이블이 왜 필요한가? 의례용으로 교회에 가지만, 중세 유럽의 군주 대부분은 신앙심과 무관한 ‘욕(欲)의 화신’에 불과했다. 바이블 자체에 무관심하다.”
로마 5현제 중 한 명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리히텐슈타인 왕가 권위 창출을 위한 최고의 모델이다. 왼쪽 포스터 사진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이고 오른쪽 포스터 인물이 리히텐슈타인 왕자다.
‘다빈치 청동 기마상’의 진위
미술관 안으로 들어가자 작은 기마상 하나가 눈에 띈다. 유난히 사람들이 많이 몰린 곳으로 70대 할머니가 열변을 토하며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사람들이 빠져나간 뒤 기마상을 살펴봤다. 놀랍게도 ‘다빈치가 만든 청동 기마상’일지도 모른다는 부제가 달린 작품이다. 아직 논란 중이지만, 청동 기마상 모양이 다빈치가 남긴 그림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진위 여부가 논의 중이라고 한다. 다빈치가 유화가 아닌 청동상을 만들었다는 점이 이상하게 들렸다. 그러나 르네상스 당시 예술가 대부분이 ‘알티자노(Artizano)’, 즉 예술 전반에 능한 장인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청동상 제작도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다빈치는 자신에 대한 소개를 ‘전쟁무기 개발과 건축에 능한 예술가’로 표현했다. 얼굴 초상화 제작도 수많은 특기 중 하나라는 식으로 소개하며, 그림에 대한 능력은 소개서 제일 마지막에 표기했다. 16세기 당시 무기나 건축 나아가 청동상 장인이 그림보다 더 많은 돈을 벌었기 때문이다. 기마상을 자세히 관찰한 결과, 다빈치의 흔적이 표류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1505년, 다빈치가 피렌체 체제 중 제작에 나서려다 중단했던 ‘앙기아리전투(The Battle of Anghiari)’ 속 기마상 모습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원래 벽화로 만들 계획이었지만, 다빈치가 구상한 데생만 남아 있는 전설의 작품이 ‘앙기리아전투’다. 다빈치 관련 소식은 인류가 영원히 즐길 고품격 소프트 뉴스의 대표주자다. 언젠가 해외토픽을 통해 ‘다빈치 청동 기마상 발견’이란 리히텐슈타인미술관발 뉴스가 흘러나올지 모르겠다.
1층 무료 미술관에 이어 2층 유료 전시관 투어에 들어갔다. 독일어로 설명을 하기에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유럽에서 보기 어려운 명화와 가구, 시계가 2층 건물 전체를 채우고 있었다. 필자가 보기에는 이탈리아 화가 카라바조 작품으로 판단될 초대형 유화도 걸려 있었다. 사진촬영 금지로 인해 아쉬웠지만, 라파엘로, 티치아노, 루벤스가 그린 기억에 남을 명화가 즐비했다. 높은 수준의 수집품도 인상 깊지만, 1·2층 외부 전시용 예술작품의 경우 뮤지엄 전체 소장물의 1%도 안 된다는 점이 한층 더 놀라웠다. 엄청난 양의 초고가 예술 작품들이 리히텐슈타인 가든팰리스 지하와 3층 건물에 쌓여 있다고 한다.
지구 최고 부자 나라가 사는 법
리히텐슈타인은 지구 최고의 고소득 국가로 분류된다. 1인당 명목 국민소득이 무려 16만달러에 달한다. 보통 영세중립국이란 이미지도 갖고 있지만, 주변 국가로부터 100%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 점에서 국제법상 보장은 없다. 그러나 리히텐슈타인이 누리는 평화와 번영은 전 세계 모두가 이상적으로 받아들이는 인류의 모델임에 틀림없다. 필자 판단이지만, 리히텐슈타인은 ‘운과 애교’의 절정에 선 나라로 느껴진다. 역사를 보면 절묘하게 살아남아 평화와 번영을 동시에 이룩한 땅이기 때문이다.
리히텐슈타인의 정식 국가명은 ‘리히텐슈타인 공국(Principality of Liechtenstein)’이다. 황제나 왕이 아니라, 왕자(Prince) 수준의 군주가 통치하는 국가라는 의미다. 원래 합스부르크 대제국의 정치고문으로 활약한 명재상 리히텐슈타인이 건국의 아버지다. 21세기, 합스부르크 왕가는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마리아 테레지아 황후의 부하였던 리히텐슈타인 재상의 땅은 세계 최고 부자에다 평화의 나라로 남아 있다. 오스트리아, 프랑스, 독일, 스위스 나아가 미국을 넘나드는 절묘한 외교·정치·경제 대응책을 통해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행운의 땅이 바로 리히텐슈타인이다. 예술을 통해 주변과 멀리 워싱턴까지 밝은 미소를 수출한 땅이란 점에서 애교를 겸비한 나라라 평가할 수도 있다.
남의 나라 오스트리아 빈 한복판에 들어선 리히텐슈타인 뮤지엄은, 4만 인구 나라가 걸어온 ‘운과 애교’의 증거이자 상징으로 느껴진다. 예술품 하나하나에 새겨진 초미니 국가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이 리히텐슈타인미술관 곳곳에 새겨져 있다.